아비 그리울 때 보라 - 책을 부르는 책 책과 책임 1
김탁환 지음 / 난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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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찾는 이유는 제각각이다. 다른 사람들은 무슨 책을 보나 하는 단순한 호기심에서부터 책 소개를 통하여 독서의 길안내를 받고 싶다는 바람, 그리고 이 사람처럼 나도 서평을 써보고 싶다는 욕심까지. 때문에 서평이 주는 느낌도 다르기 마련이다. 책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목적에 충실한 글이 있는가 하면, 책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저자의 느낌만을 열거해 놓은 글, 책 너머의 깊이 있는 배경이나 지식까지 연결해주는 글, 책의 내용과 현실의 문제점을 기막히게 엮어 현실을 반추하게 하는 글까지.


그러나 이렇게 서평을 찾는 다양한 이유와 서평의 느낌에도 불구하고 서평이라면 모름지기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이 있으니, 나는 그것을 '소개하는 책을 독자가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정적으로 말하면, 서평의 근본적 목적은 그것이 다른 글의 평가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서평을 통하여 본래의 책(원본)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서평은 나를 그 너머로 이끌기에 충분하다.


인쇄술이 발전하기 이전에 이야기는 대개는 구전(口傳)되었으며, 글을 전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원본을 필사(筆寫)하는 것뿐이었다. "아비 그리울 때 보라"며 멀리 시집간 딸에게 소설을 필사하여 선물로 주는 아버지처럼 저자는 우리에게 (필사는 아니지만) 생각의 전달이라는 방식으로 원본의 감동을 전달하려는 것 같다. 기교가 아닌 진심을 강조하는 저자의 서평을 덮으며, 이제 나는 그와의 공감을 넓히기 위해서, 또한 우리가 서로 공명할 수 있도록 여기에서 소개한 책들을 펼쳐보려 한다.

눈물은 눈에 있는가 아니면 마음에 있는가. 조선 후기 문장가 심노숭(1762-1837)이 아내를 잃고 지은 <누원(淚原)>의 첫머리에 던진 질문이다. 눈에 있다면 물이 웅덩이에 고인 듯 모인 것인지, 마음에 있다면 피가 맥을 타고 돌듯 하는 것인지 고쳐 따졌다. - 33쪽
심노숭은 눈물이 마음에서도 나오고 눈에서도 나온다고 했다. 구름을 눈, 땅을 마음에 비유한다면 눈물은 비와 같다는 것이다. 비는 구름과 땅을 통하는 기(氣)의 감응에 의해 내리되, 구름에도 속하지 않고 땅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심노숭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눈물을 흘리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어떤 느꺼움이다. 상(喪)을 당해 참담한 지금 이 순간은 물론이고 여러 해를 지나 흥겨운 악기들이 들어찬 자리에 머물 때, 업무를 보느라 서류가 책상에 가득할 때, 술에 취해 비틀거릴 때, 잡기를 여유롭게 즐길 때, 그러니까 눈물과 전혀 무관한 그때에도 마음이 갑자기 북받친다는 것이다. 그 느꺼움의 순간, 심노숭은 죽은 아내가 곁에 왔음을 느낀다고 적었다. - 34쪽

밥벌이와 상식이란 이름으로 당연하게 여긴 변화들을 어린 왕자는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묻고 되돌린다. 나이를 먹는다고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낙오될까 두려워 제 발밑만 살피고 고개 들어 뭇별들을 보지 못할 때 두려움이 아름다움을 누르고, 어린 왕자가 곁에 머물렀다는 사실마저도 잊힐 때 어른이 되는 것이다. 아직, 지금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 40쪽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물음은 두 가지 다른 빛깔을 띤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저따위 짓을 하느냐는 분노의 표출이 첫번째다. 가해자들이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국가를 위해 회사를 위해 혹은 사사로운 개인의 욕심을 채우려고 피해자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내몰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분노는 폭발한다. 또다른 빛깔은 날카롭고 뜨겁진 않으나 더 오래 사라지지 않는다. 질문을 던진 이에게 끈질기게 되돌아온다. 당장 내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핑계로 이 썩어빠진 세상을 외면하진 않았던가. 끔찍한 불행이 남의 일이 아닌 내 일일 수도 있었음을 실감하였으니, 나는 이제부터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떤 인간이 되어야만 할까. - 43쪽

역사 속 인물에 관한 소설을 쓰려고 할 때 처음 떠오르는 단어는 틈이다. 가령 고려 말 승려 신돈에 관한 소설을 짓는다면 공화국의 국민인 나와 왕조의 백성인 그, 21세기의 나와 14세기의 그, 서울에 사는 나와 개성에 사는 그의 틈은 깊이도 넓이도 제각각이다. 시간(時間), 공간(空間), 인간(人間)이란 단어에 모두 `사이 간(間)`이 들어가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틈은 어쩌면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내내 겪게 되는 모든 문제의 근원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 틈을 최대한 메우기 위해 읽고 걷고 따져 듣는다. 그러나 결코 나는 신돈이 아니며 신돈 또한 내가 될 수 없다.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 틈 앞에서 스스로 묻곤 한다. 이와 같은 시도는 부질없는 글 장난이 아닐까. - 46쪽

움직임은 그 상황을 경험한 이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추락은 불안이요 공포다. 떨어질 것을 알기에 선뜻 두 발을 지상에서 떠지 못한다. 그렇지만 또한 비상은 파괴요 설렘이다. 일상에 갇히지 않고, 단 한 번 짧은 순간만이라도 저 야구공처럼 저 날치처럼 중력을 거스르고 싶은 뜨거운 갈망이다. - 59쪽

삐딱함을 아낀다. 상식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의외로 공이 많이 든다. 인생을 왜 그리 어렵게 사느냐고, 세상을 너무 어둡게만 보지 말라는 충고도 뒤따른다. 그러나 단언컨대, 삐딱함이 없이는 작가도 없다. - 61쪽

나는 줄곧 글을 쓰는 테크닉보다 태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해왔다. 독자들로부터 `태도`가 대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그때마다 나는 수많은 풍경 중에서 자신만의 풍경을 발견하고자 노력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자신만의 문장으로 옮기고자 분투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물론 양귀자 선생님께 배운 것이다. - 67, 68쪽

인간은 별을 우러르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족속이다. 별을 가슴에 품고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땅을 열망하며 두 발을 떼는 무모한 짐승이란 뜻이다. 바람이 분다. 날아야겠다. - 100쪽

나 역시 등단 직후엔 그랬다. 내가 쓰는 장편 소설의 성패에 예민했으며, 결과가 나온 후엔 그다음 장편소설로 곧장 달려가서 또 어떤 승부를 보려 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기획하고 만드는 일에 몰두할 때, 어느 영화인으로부터 짧은 충고를 들었다. "소비되지 마시길!" - 102쪽

소설 <야간비행>(소담출판사, 2000)에서 항공우편국 책임자 리비에르는 강조했다. "법칙을 이끌어내는 건 경험입니다. 법칙을 아는 것이 결코 경험을 능가할 수 없지요." - 111쪽

인생이란 내면의 소리를 만드는 나날이 아닐까. 세상의 소리는 많지만 내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소리는 지극히 적다. 어떤 소리는 매일 찾아와도 스치듯 사라지고 어떤 소리는 일생에 단 한 번 닿더라도 심신을 온통 울려댄 후 내 안에 머무른다. 그렇게 바뀐 내면의 소리는 또 언젠가 바깥으로 흘러나가 타인의 영혼을 울리고 그 내면에 둥지를 튼다. 누구에게나 가능한, 이 신비로운 안과 밖의 공명(空鳴)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 115쪽

세상의 모든 여행기는 <열하일기>(돌베개, 2009)와 <왕오천축국전> 사이에 놓인다. 순간순간 닥쳐오는 새로움들을 다채로운 형식과 문체로 오롯이 담아낸 것이 <열하일기>라면, 그 모든 다양함에서 핵심만 뽑아내어 간명한 단 하나의 형식과 문체로 정리한 것이 <왕오천축국전>이다. 또한 혜초는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과 여행중에 전해 들은 정보들을 엄격하게 분리하여 적었다. 체험과 견문이 뒤섞여 실제 여정을 파악하기 힘든 몇몇 여행가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정직함이다. - 122쪽

같은 병을 앓고 싶다는 말보다 더 가슴 절절한 말이 있을까. 같이 `죽는` 일은 극히 짧은 `순간`이지만 같이 `앓는` 일은 서로를 품고 이해하는 제법 긴 `동안`이다. 그의 병까지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세상에 감내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으리. 흔히 사랑 이야기에 질병이 동반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병이 결핵이든 암이든, 사랑 이야기에는 궁극적으로 함께 아파하고픈 갈망과 더이상 함께 아파하지 못하는 절망이 교차한다. 마음과 마음을 잇기 위해 몸과 몸을 같은 상태로 만드는 식이다. - 177쪽

블랑쇼에 따르면 작가에게 이로운 상황이란 영원히 찾아들지 않는다. 자신의 모든 시간을 전부 바친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자기의 시간을 글쓰는 것으로 보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더이상 작업도 존재하지 않는 또다른 시간 속으로 이동하는 것, 시간이 상실되는 지점, 매혹과 시간의 부재가 주는 고독 속에 돌입하는 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 문제다." - 186쪽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는 것은 참으로 옳다. 때로는 스스로 용기를 내어 낯선 곳으로 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마지못해 수동적으로 이끌리기도 한다. 계기가 무엇이든, 길 위에 올라선 다음에는 과정 자체를 즐기며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공자님도 길 위에서 배우고 길 위에서 가르치며 길 위에서 자고 먹고 마시며 길 위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지 않았던가. 삶의 이치를 `길 도(道)`로 압축하여 표현해온 것이 예사롭지 않다. -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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