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풀니스 - 우리가 세상을 오해하는 10가지 이유와 세상이 생각보다 괜찮은 이유
한스 로슬링.올라 로슬링.안나 로슬링 뢴룬드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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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소문이 자자한 책이어서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자는 통계라는 도끼로 독자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편견을 여지 없이 깨버린다. 이런 저자의 노력은 주로 서양인들의 사고에 박혀 있는 서양과 비서양(아시아, 아프리카)의 이분적 구조의 문제를 지적하고 그 간격 차이에 무수히 많은 중간층을 직시하도록 하는데 할애되었지만, 아시아에 사는 나도 서양인들과 유사한 관점의 편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저자가 서두에 제시한 13가지 문제들을 풀다보면, 우리 스스로도 얼마나 많은 편견과 편향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편견을 일종의 '본능'으로 치부하고, 간극 본능, 부정 본능, 직선 본능, 공포 본능, 크기 본능, 일반화 본능, 운명 본능, 단일 관점 본능, 비난 본능, 다급한 본능의 10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논리학에 포함되어 있는 오류의 유형을 현실적으로 변환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이분법적 사고의 틀인 간극 본능 외에도, 숫자와 통계를 보고도 믿으려 하지 않은 부정 본능, 이대로 가면 다 망한다라며 겁을 주는 공포 본능, 그 나라는 어차피 안돼라고 인식하는 운명 본능, 사고의 원인을 찾기보다는 비난할 대상을 찾는 비난 본능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해악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세계는 끊임없이 진보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발전할 것이라는 장미빛 환상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다. 오히려 너무 부정적인 편향성을 없애고 미래에 대한 정확한 대비를 하기 위해서라도 항상 현상 이면의 것을 보도록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자원의 배분, 정책의 수립, 역량의 집중을 한층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핵심적 내용은 갈등, 반목, 대립으로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에도 던지는 시사점이 있다. 현상의 이면을 추적하지 않고 현상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이들,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이 전부인 줄 알고 이를 전분야에 적용하는 이들, 뉴스와 기사를 읽는 그대로 지식으로 저장하는 많은 이들이 비판적인 사고를 통해 그 지식을 재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름들은 세상에 대해 생각하고, 추측하고, 학습할 때 끊임없이 그리고 직관적으로 자신의 세계관을 참고한다. 그래서 세계관이 잘못되면 체계적으로 잘못된 추측을 내놓는다. 한때 나는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이 낡은 지식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최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사람조차 세계를 오해하는 걸 보면 그 때문만은 아니다. 그리고 악마 같은 언론이나 선전 선동, 가짜 뉴스, 엉터리 사실 탓도 아니라고 확신한다.
수십 년의 강연과 테스트 경험 그리고 사람들이 사실을 눈앞에 두고도 그걸 잘못 해석하는 방식을 관찰한 경험을 토대로, 나는 마침내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은 우리 뇌의 작동 방식에서 나오는 탓에 바꾸기가 너무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다. - 27, 28

우리에겐 모든 것을 서로 다른 두 집단, 나아가 상충하는 두 집단으로 나누고 둘 사이에 거대한 불평등의 틈을 상상하는 거부하기 힘든 본능이 있다. - 38

한마디로, 세상은 더 이상 예전처럼 둘로 나뉘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다수가 중간에 속한다. 서양과 그 외,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부자와 빈자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간극을 암시하는 이쪽 또는 저쪽이라는 단순한 분류는 쓰지 않는 게 옳다. - 46

사람들은 세계가 점점 나빠진다고 말하면서 실제로 무슨 생각을 할까? 내가 보기에는 생각을 아예 ‘안 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생각이 아닌 느낌을 말할 뿐이다. - 99

언론과 활동가들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려고 극적 상황에 의존한다는 점을 기억하라. 부정적 이야기는 중립적이거나 긍정적인 이야기보다 더 극적이다. 장기적으로는 개선되고 있지만, 그중 일시적으로 후퇴하는 상황을 골라 위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게 얼마나 쉬운가. 우리는 서로 연결된 투명한 세계에 살고 있으며, 그런 세계에서는 고통을 보도하기가 그 어느 때보다 쉽다. - 104

공포는 유용할 수 있다. 단, 실제로 위험한 것에 공포를 느낄 때라야 그렇다. 공포 본능은 세계를 이해하는 형편없는 지침이다. 공포는 우리가 가장 무서워하지만 위험하지는 않은 것에 주목하게 하고, 실제로 매우 위험한 것은 외면하도록 한다. - 172, 173

수치보다 눈에 보이는 피해자 개개인에게 지나치게 주목하면 우리 자원을 문제의 일부에만 모두 쏟아부을 수 있고, 따라서 훨씬 적은 목숨을 구할 뿐이다. 이런 원칙은 부족한 자원을 어디에 쓸지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는 경우에 모두 해당한다. 목숨을 구하는 문제나 삶을 연장 또는 개선하는 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자원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면 매정한 사람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자원이 무한하지 않은 한(자원은 절대 무한하지 않다) 머리를 써서 지금 있는 것으로 가장 좋은 일을 하는 게 오히려 가장 인간적이다. - 181, 182

율을 왜곡하기는 매우 쉽지만, 다행히 그것을 막을 쉬운 해결책이 있다. 나는 많은 수를 비교해야 할 때, 그리고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을 골라야 할 때 가장 쉬운 생각 도구를 이용한다. 가장 큰 수를 찾는 방법이다.
이것이 ‘80/20 법칙’의 전부다. 우리는 나열된 모든 문제를 똑같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그중 더 중요한 문제가 몇 개 있다. 사망 원인에 관한 문제든, 예산에 관한 문제든 나는 전체의 80%를 차지하는 문제에 먼저 주목한다. 더 작은 문제에 시간을 쓸 때는 먼저 이렇게 자문한다. 80%는 어디에 있지? 왜 이 문제가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할까? 그것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 191

나는 국가별 ‘총’배출량을 기초로 중국과 인도를 기후변화의 주범이라고 조직적으로 비난할 때면 더러 오싹하다. 그것은 중국 전체 인구의 몸무게 합이 미국보다 크다고 해서 미국보다 중국에서 비만이 더 심각하다고 주장하는 꼴이다. 국가별 총배출량을 문제 삼는 주장은 나라마다 인구가 크게 다르다는 점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된다. 이 논리대로라면 전체 인구가 500만 명인 노르웨이는 1인당 이산화탄소를 아무리 많이 배출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경우는 국가별 총배출량이라는 큰 수치를 해당 국가의 인구로 나눠야 의미가 있고, 비교 가능한 수치가 된다. - 199

우리는 비교 불가능한 여러 집단을 일반화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하며, 우리 논리에 숨은 광범위한 일반화를 찾아내려고 또 노력해야 한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새로운 증거가 나오면 언제든지 예전의 단정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재평가해 우리가 틀렸다는 사실을 기꺼이 시인해야 한다. - 231

"아이한테 망치를 주면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는 말이 있다.
가치 있는 전문성을 지닌 사람은 그 전문성을 활용할 곳을 찾고 싶어 한다. 그래서 전문가는 더러 어렵게 얻은 지식과 기술을 본래의 활용 영역을 넘어선 곳에도 적용할 방법을 고민한다. 수학을 잘하는 사람은 수에 집착하고, 기후 활동가는 틈만 나면 태양에너지를 강조한다. 의사는 예방이 더 나을 법한 경우에도 치료를 장려한다.
훌륭한 지식을 해결책은 찾는 전문가의 능력을 방해할 수 있다. 여러 해법이 모두 그 나름대로 특정 문제를 훌륭히 해결할 수 있겠지만,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해법은 없다. 따라서 세계를 다양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 273

비난 본능은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중요성을 과장한다. 잘못한 쪽을 찾아내려는 이 본능은 진실을 찾아내는 능력, 사실에 근거해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을 방해한다. 비난 대상에 집착하느라 정말 주목해야 할 곳에 주목하지 못한다. 또 면상을 갈겨주겠다고 한번 마음먹으면 다른 해명을 찾으려 하지 않는 탓에 배울 것을 배우지 못한다. 그러다 보면 문제를 해결하거나 재발을 방지하는 능력도 줄어든다. 누군가를 손가락질하는 지극히 단순한 해법에 갇히면 좀 더 복잡한 진실을 보려 하지 않고, 우리 힘을 적절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295

우리 언론은 자유롭고 전문적이며 진실을 추구하겠지만, 언론의 독립성과 그들이 보도하는 사건의 대표성은 다르다. 모든 보도가 그 자체로는 전적으로 진실이라도 기자가 세상에 알리기로 선택한 진실 이야기를 여럿 모으면 오해할 만한 그림이 나올 수 있다. 언론은 중립적이지도 않고, 중립적일 수도 없으며, 그걸 기대해서도 안 된다. - 301

데이터는 진실을 말하는 데 사용해야지,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행동을 촉구하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된다. - 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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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5-21 1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가 생각하는 진리는 언젠가 틀릴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면 불필요한 논쟁을 줄일 수 있거든요. 나와 다른 주장에 맞서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a먼저 내 주장이 진실에 근접한지 검토하는 데 집중해야겠습니다.

붉은눈 2019-05-27 19:36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보려는 부분만 부각해서 보고, 미리 결론을 내고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거나, 상대방의 합리성을 속으로는 감지하였으면서도, 제 마음속으로 철벽을 쳐놓은 채 절대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온갖 이유를 대며 논쟁했던 적이 꽤 많이 있었네요. 말씀처럼 내가 확고하게 믿고 있던 진리조차도 틀릴 수가 있다는 유연성이 필요한데 말이죠.
 
퍼스트 러브
시마모토 리오 지음, 김난주 옮김 / 해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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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아버지를 죽였다. 작가는 살인사건의 결과를 먼저 공개한다. 결과를 먼저 공개하고 그 결과 속에 숨어 있는 이유를 살펴 나가는 소설이다. 스릴러나 추리극에 많이 나오는 기법으로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으니, 그 인과를 한 꺼풀씩 벗겨내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피의자(칸나)의 상태를 보여주고 다시 독자들에게 되묻는다. 이래도 이 사람을 비난할 것인지.


기막힌 서스펜스나 반전이 있지는 않다. 딸(여성)이 아버지(남성)를 죽였다는 것에서 막연한 성적(性的) 연유를 추정해봄직 한데, 작가는 일종의 성적 트라우마로 인한 살인이라는 범죄의 연유를 차근차근히 밝히면서 피의자와 관련된 사람들(변호사, 임상 심리사, 그의 남편) 사이에 얽혀 있는 관계도 조명한다. 살인사건을 변호하기 위해, 그녀와 상담을 하면서 책을 쓰기 위해 엮인 이들의 과거를 드러내면서, (1) 숨겨진 살인사건의 실마리를 풀고 (2) 사건의 의문점을 해소함에 따라 주변인들의 얽힌 관계도 풀어가는 방식이다.


그런데 제목이 왜 '첫 사랑'일까. 그건 아이였던 칸나가 친모에게 느꼈어야 할 사랑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이 사건의 원인으로 본 것은 아니었을까.

스튜디오로 이어지는 길은 길고 지나치게 하얗다.

"있죠, 나나미 씨, 전에 본 영화에 이런 대사가 있었어요. ‘빼앗긴 것을 되찾으려다, 더 많은 것을 잃는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 18

고독과 성욕과 사랑을 구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젊으면 더욱 그렇다. 다만 나나미가 또 큰 상처를 입기 전에, 스스로 그 상황을 인식할 수 있기를 바랐다. - 19, 20

불현 듯, 엉엉 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처럼 울어서 마음속에 고인 감정을 털어 내고 싶었다.
그러나 감정은 거기까지 치닫지 않은 채 잠과 피곤함에 떠밀려 깊숙이 가라앉고 만다. 우는 데도 젊음과 체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 67

거슬러 올라가 원인을 찾아내는 것은 책임 전가도 아니거니와 도피도 아니다. 지금을 바꾸려면 단계와 정리가 필요하다. 보이지 않는 것에 뚜껑을 덮은 채 앞으로 나아가는 척 처신해봐야, 등에 들러붙은 것의 지배가 계속될 뿐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지금 속은 물론이고, 과거 안에도 있기 때문이다. - 258,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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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다식한 경제학자의 프랑스 탐방기 - 아들이 묻고 경제학자 아빠가 답하는 아주 특별한 수업
홍춘욱 지음 / 에이지21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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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저자가 썼던 경제서적과는 다른 종류의 책이라서 어떤 내용일지 궁금했다. '여행기'가 아닌 '탐방기'로 제목을 단 것으로 보아, 목적이 여행 자체보다는 무엇을 알아내기 위한 방문으로 읽혔는데, 그것은 아들과 함께한 여행이었으나 아들의 물음에 답을 했던 주제로 추후 다시 글을 썼기 때문이었다. 아빠가 중2 아들과 여행을 했다는 것도 놀라운데, 아들이 호기심과 궁금증이 이리 많다니, 그리고 아빠가 그걸 답해주기 위해 노력한 결과를 이렇게 책으로 엮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많은 질문들 중에 일부를 선정하고 그것을 써나갈 내용에 맞게 재편한 것일테지만, 프랑스의 도시 형성, 파리의 높은 지가, 베르사유궁전의 화려함, 도시마다 위치한 상징적인 성당, 그림, 프로방스 지방 도시의 위치, 파리의 맛집, 유색인종(외국인)의 노동 분야 등 흥미로운 주제로 엮여 있고, 이러한 주제에 대해 역사적 배경과 비교를 통하여 쉽게 설명해준다. 읽다보면 설명이 무척 매끄러워 당연하게 느껴지는 대목들이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깊이의 낮음을 비판할 정도는 아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목차에 역거된 11가지 질문 중 즉시 대답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있었는지, 저자처럼 설명을 할 수 있을지를 자문해보면 그런 비판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2015년 말 예전 직장을 그만두고 큰아들 채훈이와 프랑스 여행을 계획하면서 많은 역사책을 읽었습니다.

파리의 주택난과 비싼 주거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규모의 신도시 건설을 주장하는 쪽도 있지만, <르몽드>지 칼럼니스트는 정반대의 입장입니다. ‘파리는 누구도 손댈 수 없는 박물관입니다’라는 말 속에 숨어 있는 파리 시민의 자긍심을 감안하면 대대적인 주택 건설은 힘들어 보입니다. - 45

유럽은 알프스 산맥과 피레네 산맥 등 아주 큰 산맥이 각 지역을 갈라놓는데다 다뉴브 강, 라인 강, 엘베 강처럼 거대한 강이 여럿 존재하며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이런 지리적 특성상 여러 개의 중심권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와 같은 다(多) 중심성이야말로 중국 문명과 달리 유럽이 여러 개의 나라로 분열된 원인이라고 봐야 합니다. - 71

중국이 아주 적은 생산량 증가를 위해 많은 노동력을 투입하는 동안 영국에서는 전혀 다른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원래 인구가 적고 1인당 소득도 높으니 저축 수준도 높습니다. 이처럼 높은 소득수준은 ‘기계’ 투자의 저항감을 낮춥니다. 왜냐하면 사람 몸값이 비싸니까 대신 기계를 써서 고용을 절약하는 게 남는 장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옥스퍼드 대학교 로버트 앨런 교수는 왜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는가를 설명하려면, 영국의 발명가들이 많은 시간과 돈을 필요로 하는 기계를 만드는 데 몰두했는지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증기기관을 비롯한 값비싼 기계는 노동을 절약할 수 있었죠. 워낙 영국의 인건비가 비쌌기에 기계는 충분히 값을 했습니다. 반면 베이징에서는 이익이 나지 않습니다. - 97

중국은 인건비가 싸고 사람도 넘치니까 웬만한 일은 그냥 사람을 쓰는 방향으로 갑니다. 반대로 영국은 사람도 적고 인건비도 비싼 편이니 인건비를 절약하는 종류의 기계를 사용하는 데 거침이 없고. 특히 영국은 발명 특허권이 잘 발달되어 있어 발명가가 큰돈을 벌 수 있었다는 것도 한몫했습니다. - 97, 98

중국산 도자기 못지않게 자신의 ‘감식안’을 드러내는 방법은 미식이었습니다. 지금 마시는 와인이 어디에서 생산된 것인지, 요리가 어떤 면에서 독창적인지 파악하는 것은 상류 계급 사교의 핵심 요인으로 부각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관심은 미쉐린 가이드 덕분에 더욱 확대되고 재생산되었습니다. -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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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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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에게는 미안한 말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의 에세이를 더 좋아한다. 소설보다는 그의 경험과 그로 말미암은 생각이 내게는 더 많은 공감을 주기 때문이다. 비자를 받지 못해 추방당하는 첫 장면에서 시작해 그는 인생과 여행의 닮은 점, 특히 예상하지 못한 사건과 그로 인해 기대하지 못한 결과를 얻게 되는 과정에서의 기쁨과 깨달음에 대해 역설한다. '추방'으로부터 시작한 그의 에세이는 낯선 곳에서 받는 '환대'의 편안함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런 환대는 얼마 가지 못한다. 여행이란 결국 일상의 삶으로 돌아올 것을 예정하고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작가가 여행에 대해 표현한 조목조목이 다 마음에 든다. 아울러 그동안 포기를 반복했던 오딧세우스를 다시 한번 도전해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2005년 12월의 어느 날, 나는 상하이 푸등공항 티켓 카운터에서 서울로 가는 편도 항공권을 사고 있었다.

추구의 플롯의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의 결말이다. 주인공은 원래 찾으려던 것과 전혀 다른 것, 훨씬 중요한 어떤 것을 얻는다는 것이다. 대체로 그것은 깨달음이다. 길가메시는 ‘불사의 비법’ 대신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통찰에 이른다.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귀환한다는 애초의 목적은 달성했지만 그 긴 여정을 통해 그가 진짜로 얻게 된 것은 신으로 표상되는 시계는 인간의 안위 따위에는 무심하다는 것, 제아무리 영웅이라 하더라도 한낱 인간에 불과하며, 인간의 삶은 매우 연약한 기반 위에 위태롭게 존재한다는 것, 환각과 미망으로 얻은 쾌락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는 것 등을 깨닫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오디세우스는 처음 길을 떠날 때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고향인 이타케에 도착한다. - 19, 20

인생과 여행은 그래서 신비롭다. 설령 우리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실패와 시련, 좌절을 겪는다 해도, 우리가 그 안에서 얼마든지 기쁨을 찾아내고 행복을 누리며 깊은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다. - 24

오래 내면화된 것들이라 하지 않고 살고 있으면 때로 못 견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이런저런 합리화를 해가며 결국은 그것을 하고야 만다. - 55

모든 인간은 다 다르며,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조금씩은 다 이상하다. 작가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 ‘다름’과 ‘이상함’을 끝까지 추적해 생생한 캐릭터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스프레드시트로 표를 하나 만들어 소설을 쓸 때마다 사용한다. 비중이 있는 인물이면 그의 외모부터 습관, 취향까지 다양한 항목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해본다. 마치 앙케이트 조사와 비슷하다. 역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인물의 내면이다. 윤리적 태도, 성(性)에 대한 관념, 정치적 성향 등, 십여 개의 항목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변하다보면 인물에 대해 좀더 또렷한 윤곽이 그려진다. 그런데 인물의 내면 부분에서 내가 제일 고민하게 되는 항목은 ‘프로그램’이다. 노아 루크먼은 ‘가지고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인물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일종의 신념’으로 프로그램을 설명한다. - 57, 58

어떤 인간은 스스로에게 고통을 부과한 뒤, 그 고통이 자신을 파괴하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때 경험하는 안도감이 너무나도 달콤하기 때문인데, 그 달콤함을 얻으려면 고통의 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 61

잠깐 머무는 호텔에서 우리는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잘 정리되어 있으며, 설령 어질러진다 해도 떠나면 그만이다. 호텔 청소의 기본 원칙은 이미 다녀간 투숙객의 흔적을 완벽히 제거하는 것이다. 그들의 냄새까지 지워야 하니까 호텔에선 가정집보다 훨씬 독한 세제와 방향제를 쓴다. 호텔에 들어설 때마다 맡게 되는 그 냄새, 분명 처음에는 자연의 어떤 향을 흉내냈겠지만, 어느 순간 그 근원을 몰각한 듯한, 아니 아예 신경쓰지 않겠다는 듯한, 이제는 그저 세제와 방향제 냄새로만 지각되는 그 익숙한 향의 습격을 받는다. - 65

일상사가 번다하고 골치 아플수록 여행지의 호텔은 더 큰 만족을 준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 문제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고 나에게 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할 것만 같다. 삶이 부과하는 문제가 까다로울수록 나는 여행을 더 갈망했다. 그것은 리셋에 대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 66

작가는 모국어에 묶인다.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가 ‘나의 조국은 모국어’라고 말한 것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망명이나 피난 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마이너 언어권에 속한 작가는 모국어가 양수처럼 편안히 감싸주는 곳에 있으려 한다. - 78

영감을 얻기 위해서 혹은 글을 쓰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지는 않는다. 여행은 오히려 그것들과 멀어지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격렬한 운동으로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을 때 마침내 정신에 편안함이 찾아오듯이, 잡념이 사라지는 곳, 모국어가 들리지 않는 땅에서 때로 평화를 느낀다. 모국어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지만, 이제 그 언어의 사소한 뉘앙스와 기색, 기미와 정취, 발화자의 숨은 의도를 너무 잘 감지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 진정한 고요와 안식을 누리기 어려워졌다. 모국어가 때로 나를 할퀴고, 상처내고, 고문하기도 한다. 모국어를 다루는 것이 나의 일이지만, 그렇다고 늘 편안하다는 뜻은 아니다. - 80

생각과 경험의 관계는 산책을 하는 개와 주인의 관계와 비슷하다. 생각을 따라 경험하기도 하고, 경험이 생각을 끌어내기도 한다. 현재의 경험이 미래의 생각으로 정리되고, 그 생각의 결과로 다시 움직이게 된다. 무슨 이유에서든지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은 현재 안에 머물게 된다. 보통의 인간들 역시 현재를 살아가지만 머릿속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후회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지난밤에 하지 말았어야 할 말부터 떠오르고, 밤이 되면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뒤척이게 된다. 후회할 일은 만들지를 말아야 하고, 불안한 미래는 피하는 게 상책이니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미적거리게 된다. 여행은 그런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러다놓는다. - 81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그 경험들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생각으로 바꿔 저장한다. 영감을 좇아 여행을 떠난 것은 없지만,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는 또다시 어딘가로 떠나라고, 다시 현재를, 오직 현재를 살아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다. - 81, 82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일종의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낯선 곳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먹을 것과 잘 곳을 확보하고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 거듭하여 말한 것처럼 미래에 대한 근심과 과거에 대한 후회를 줄이고 현재에 집중할 때, 인간은 흔들림 없는 평온의 상태에 접근한다.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하고, 일상의 근심과 후회, 미련으로부터 해방시킨다. - 109, 110

자기가 누구인지를 자기만 아는 상태가 지속되면 키클롭스의 섬으로 쳐들어가는 오디세우스와 비슷한 심리 상태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정체성은 스스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타인의 인정을 통해 비로소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 165

실뱅 테송의 말처럼 여행이 약탈이라면 여행은 일상에서 결핍된 어떤 것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늘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하러 그 먼길을 떠나겠는가.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이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 179, 180

언제든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는 것은 그 어디에 있더라도 내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 196

이주자는 일상을 살아가는 반면 여행자는 정제된 환상을 경험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 199

이주와 여행의 관계는 마치 현실과 소설의 관계와 같다. 현실은 어지럽고 복잡하고 무질서하다. 자잘한 일들이 끝없이 일어나고, 그중 어떤 것은 우리 삶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잇다. 하지만 개개의 사건들에 일일이 주의를 기울일 수는 없다. 현실은 줄거리가 없다. 어떤 일들이 불쑥불쑥 일어난다. 때로 우리의 통제력을 벗어난다. 아름다운 별똥별이라고 생각하고 쳐다보던 무언가가 거대한 운석으로 우리 머리 위로 떨어질 수도 있다. 대단한 일처럼 생각하고 긴장했지만 별일 아닌 것으로 판명되기도 한다. 우주는 우리의 운명에 무심하며 우리는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 199

이야기는 다르다. 현실과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만 질서가 잇다. 제한된 인물들, 특히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듯, 작가들은 현실에서 어지러운 잡음을 제거한 뒤 이를 이야기로 재구성한다. 작가는 이야기를 적절히 통제하여 독자들이 이를 경험할 수 있도록 제공한다. 소설이나 영화에서도 별똥별은 운석이 되어 지붕 위로 떨어질 수 있지만, 현실과 달리 이런 사건들은 주인공의 삶과 인생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현실에서 무질서하게 일어나는 여러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배운다. 죽음과 재난, 사랑과 배신 같은 일들이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닥쳐올 때,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지켜내야 하고 그럴 때 이야기가 우리에게 심리적 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 199, 200

어느새 뉴욕에서의 생활도 말 그대로 생활이 되어가고 있었다. 일상은 파도처럼 밀려온다. 해야 할 일들, 그러나 미뤄두었던 일들이 쌓여간다. 언젠가는 반드시 처리해야 할 일들이다. 일상에서 우리는,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통제력을 조금씩 잃어가는 느낌에 시달리곤 한다. 조금씩 어떤 일들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생긴다. 욕실에 물이 샌다거나, 보일러가 낡아서 교체해야 한다거나, 옆집이 인테리어 공사에 들어가 너무 시끄러워진다거나 하는 일들. 우리는 뭔가를 허거나, 괴로운 일을 묵묵히 견뎌야 한다. 여행자는 그렇지 않다. 떠나면 그만이다. 잠깐 괴로울 뿐,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다. 그렇다.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 - 203

소설에서는 그냥 일어나는 사건이 거의 없다. 나중에 일어날 일들과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 소설은 재미있는 일들을 집어넣는 게 아니라 무의미한 사건들을 배제하면서 쓰인다. 독자들은 일종의 실험실적 환경에서 인물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그것을 인물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것이 인물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지켜볼 수 있다. 인간과 세계가 좀더 높은 해상도로 다가온다. -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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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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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서점을 방문했다가 가벼운 마음으로 펼쳐본 대목이 마음에 들어 골랐다.


"나는 사람이 그다지 강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사람은 여러 가지 요인들로 불안정해지기 쉬운 동물이다마치 날씨처럼 매일 다른 사건이 눈앞에 펼쳐지는데우리의 몸과 마음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기란 쉽지 않다변화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작은 물결에 배가 휩쓸려가서는 안 되므로 닻을 단단히 내려둘 필요가 있다."


저자가 전혀 의도하지도 않았을 텐데도 현재의 내 상황에 맞춘듯 깊이 꽂히는 경우가 있다. 이 말이 그랬다.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내 허세에 지나지 않았고, 직장 동료들이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일에 대하여 나 혼자 온몸으로 충격을 받아내고 시름시름 앓고 있던 요즘이다. 굳건하게 나를 받치고 있다고 여겼던 일에 대한 신념은 너무나도 쉽고 허무하게 무너져내렸고, 내가 받은 내상을 어떻게 치유해야 할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을 정도로 나는 내 속에 가득한 화를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한 배우(이자 화가이자 감독이라는 걸 알았다)가 너무나도 우연히 내게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걷는다는 것은 생각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어쩔 수 없는 고민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느니 몸으로 걷는 것을 택한 것이지만, '걷기'가 포함된 그의 철학은 나 또한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을 정도로 단순하고, 바르고, 꾸준하다.


그는 말한다.

"한 발만 떼면 걸어진다"고.

그리고 지금 내 머릿속에 꽉 들어찬 채 나를 괴롭히고 있는, 나도 어쩔 수 없는 고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걸어가야 할 것이라고.


책을 사서 단숨에 읽었다. 수십 군데 밑줄을 쳤다. 공감하고 싶은 생각들이 많았다. 

그의 생각의 근간이 되는 '루틴'에 나도 동참하고 싶어 바로 휴대폰 만보기를 설정했다. 10000만 보는 안 되었지만, 8000보 가까이 걸었다. 앉아서 고민만 하느니 걸으며 잠시 그 고민과 멀어지고, 걷기를 끝낸 후 다시 새로운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볼 기회를 만들게 되면 좋겠다. 곧 핏빗을 구매할 지도 모르겠다.  

서울에서 해남까지 장장 577킬로미터를 걷게 된 것은 그놈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인생살이에서 어떤 기대와 꿈을 품고 살아간다. 나중에는 형편이 나아지겠지, 세월이 지나면 다 괜찮아지겠지, 지금 이 순간을 견디면 지금보다 나은 존재가 되어 있겠지…… 어릴 때는 이런 희망과 꿈이 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높지만, 나이들수록 그 폭은 조금씩 줄어든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고 뉘우치며 포기하는 단계까지 간다. - 25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길 끝에서 느낀 거대한 허무가 아니라 길 위의 나를 곱씹어보게 되었다. 그때 내가 왜 하루하루 더 즐겁게 걷지 못했을까. 다시 오지 않을 그 소중한 시간에 나는 왜 사람들과 더 웃고 떠들고 농담하며 신나게 즐기지 못했을까. 어차피 끝에 가서는 결국 아무것도 없을 텐데.
내 삶도 국토대장정처럼 길 끝에는 결국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인생의 끝이 ‘죽음’이라 이름 붙여진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무(無)’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루하루 좋은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즐겁게 보내려고 노력하는 것뿐일 테다. - 26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 아까 무슨 고민을 했었는지 떠올려보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물론 고민의 주제는 선명한데, 낮에 느꼈던 것만큼 중대하고 어려운 상황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분명히 심각했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렇게까지 엄청난 위기 같지는 않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나는 금방 곯아떨어진다. 단순하게도 인간은 몸을 움직이는 만큼 수면의 질이 높아지는 것 같다. - 32

기분에 짓눌려서 문제를 키우고 고민을 부풀린 것은 결국 나 자신이었음을 깨닫는다. - 32

내 갈 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걷는 것, 내 보폭을 알고 무리하지 않는 것, 내 숨으로 걷는 것, 걷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묘하게도 인생과 이토록 닮았다. - 41

정작 일은 너무나 열심히 하는데 휴식 시간에는 아무런 계획도 노력도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그대로 던져두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치고 피로한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곧 휴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기’는 결과적으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누적된 피로를 잠시 방에 풀어두었다가 그대로 짊어지고 나가는 꼴이 되는 경우가 많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휴식을 취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휴식을 취하는 데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적어도 일할 때처럼 공들여서, 내 몸과 마음을 돌봐야 하지 않을까? - 58

고통보다 사람을 더 쉽게 무너뜨리는 건, 어쩌면 귀찮다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고통은 다 견뎌내면 의미가 있으리라는 한주의 기대가 있지만, 귀찮다는 건 내가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이 하찮게 느껴진다는 거니까. 이 모든 게 헛짓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차오른다는 거니까. - 78

어쩌면 고통의 한복판에 서 있던 그때, 우리가 어렴풋하게 찾아헤맨 건 ‘이 길의 의미’가 아니라 그냥 ‘포기해도 되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애초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었다고, 이 길은 본래 내 것이 아니었다고, 그렇게 스스로 세운 목표를 부정하며 ‘포기할 만하니까 포기하는 것’이라고 합리화하고 싶었던 거다. - 79

장거리를 걸을 때는 지치기 쉽다. 판단력도 흐려진다. 그러므로 걷는 시간보다 더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때가 있다. 바로 ‘쉬는 시간’이다. - 79

"좋은 작품은 예술가가 안정적이고 반듯한 길에서 벗어나서 일탈하거나 방황할 때 나오지 않나요?"
사람들이 던지는 이런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좋은 예술과 안정적인 삶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잇따. 내가 아는 한 좋은 작품은 좋은 삶에서 나온다. - 118

요리가 좋은 건 이번 한끼를 애매하게 실패했다 해도, 반드시 만회할 다음 끼니가 돌아온다는 거니까. - 145

한 발만 떼면 걸어진다.
그러니 도무지 꼼짝도 하고 싶지 않은 날 아침엔 일단 일어나 한 발, 딱 한 발만 떼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 한 걸음이 가장 무겁고 어렵게 느껴지겠지만, 이내 깨닫게 될 것이다. 머릿속에 굴러다니는 온갖 고민과 핑계가 나를 주저앉히는 힘보다 내 몸이 앞으로 가고자 하는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 160

나는 사람이 그다지 강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여러 가지 요인들로 불안정해지기 쉬운 동물이다. 마치 날씨처럼 매일 다른 사건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우리의 몸과 마음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기란 쉽지 않다. 변화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작은 물결에 배가 휩쓸려가서는 안 되므로 닻을 단단히 내려둘 필요가 있다. - 164

나에겐 일상의 루틴이 닻의 기능을 한다. 위기상황에서도 매일 꾸준히 지켜온 루틴을 반복하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희미하게나마 보인다. - 165

루틴의 힘은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잠식하거나 의지력이 약해질 때, 우선 행동하게 하는 데 있다. 내 삶에 결정적인 문제가 닥친 때일수록 생각의 덩치를 키우지 말고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살다보면 그냥 놔둬야 풀리는 문제들이 있다. 어쩌면 인생에는 내가 굳이 휘젓지 말고 가만 두고 봐야 할 문제가 80퍼센트 이상인지도 모른다. 조바심이 나더라도 참아야 한다. - 166

나는 별 뜻 없이 한 말도, 일단 입 밖으로 흘러나오면 별 뜻이 생긴다고 믿는 편이다.
말에는 힘이 있다. 이는 혼잣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결국 내 귀로 다시 들어온다. 세상에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은 없다. 말로 내뱉어져 공중에 퍼지는 순간 그 말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 186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하면서 자신이 믿고 기댈 수 있는 시간을 쌓아가는 거뿐이다. 나는 내가 지나온 여정과 시간에 자신감을 가지고 일을 해나가지만, 결코 나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않는다. 어쩌면 확신은 나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오만과 교만의 다른 말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226

삶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없다면 언제든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 274

보통 ‘노력’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가능한 한 많은 시간과 자원을 들여서 그 안에서 최선의 결과를 뽑아내는 모습이 상상된다. 하지만 노력은 그 방향과 방법을 정확히 아는 것으로부터 다른 차원으로 확장될 수 있다. - 282, 283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위기와 절망 속에 있을 때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나는 때로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노력이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한다. 어쩌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도 모른 채 힘든 시간을 그저 견디고만 있는 것을 노력이라 착각하진 않는지 가늠해본다. - 285

지금 고통받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곧 노력하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혹시 내가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오지 않을 버스를 기다리는 건 아닌지 수시로 주변을 돌아봐야 한다. - 286

비단 신을 믿지는 않더라도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우연이나 예상치 못한 변수 등 외부에서 오는 절대적인 힘을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내 마음을 다 이해할 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나에게 남은 것은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일과 기도뿐이라는 사실을. - 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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