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지널스 - 어떻게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이는가
애덤 그랜트 지음, 홍지수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애덤 그랜트라는 사람을 전혀 알지는 못했지만, 와튼스쿨 최연소 종신교수, 아마존 베스트셀러, 말콤 글래드웰이 좋아하는 사상가라는 광고 문구를 보고 이 두꺼운 책을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부제가 '어떻게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이는가'이다. 나는 수잔 케인의 <콰이어트>나 이 책과 같이 사회적인 모범생이 아닌 이들의 성공담을 좋아한다. 획일적이고 계량화된 조직 시스템에서 나름의 돌출된 행동을 하거나 남들이 하는 그대로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 혹은 사회에 다소 부적응적인 사람들의 성공담은 나 같은 이가 이 숨막히는 사회를 살아가는 데 그나마 한줄기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 제목인 <오리지널(original)>이 가리키듯 참신한 독창성이나 창의력을 지녀 다른 사람과 차별되는 사람, 즉 단순히 사회적 비순응자들에 대한 일화를 모아 놓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독창성을 발휘하여 성공한 이들에게 숨어 있는 비순응성의 면모를 파헤친 책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워낙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어서 읽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표현이 어렵거나 전문적이지는 않아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재미있는 점은 이 책은 '성공'에 관한 기존의 통념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오히려 그 반대의 생각과 행동을 권하고 있다. 이를 테면, 와비파거(Warby Parker)라는 온라인 안경 사업의 예를 통하여 '배수의 진'과 같이 하고자 하는 일에 올인(all-in) 하는 것이 성공의 요소가 아니며, 실패를 대비하면서 리스크(책에는 '위험'이라고 표현하였지만)를 적절히 회피하는 것이 성공을 위한 요소라는 것을 말하는가 하면, 독창적인 생각은 집중된 소수의 작업이 아니라 다량의 작업 속에서 탄생한다는 것, 전략적으로 일의 완성시기를 지연시키는 것이 선발주자의 불리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전략이라는 것, 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을 포섭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에 대해 다양한 사례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실제 사례가 제시되기 때문에 기존의 통념을 비틀어버린 저자의 주장에 한번 더 공감이 간다.


총 8개의 장에 해당하는 이 책은 구성 자체가 구분되어 있지는 않지만, 읽다보면 제1장에서 제4장(창조적 파괴, 눈먼 열정에서 벗어나기, 위험을 무릅쓰다, 서두르면 바보)으로 이어지면서 개인의 독창성을 위한 방법들에 대해 설명하고, 이후 제5장부터는 (최적의 균형점과 트로이 목마, 이유 있는 반항, 집단 사고를 재고하라, 평지풍파 일으키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조직의 변화와 발전을 위한 방안에 대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모색한다. 물론 글의 흐름이 개인에서 집단으로의 확대라는 틀에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 장에서는 '효과적인 행동 지침'이라고 해서 친절하게도 지금까지의 논의를 몇 가지 행동 방식으로 정리하는데, 개인과 지도자, 부모와 교사를 위한 제안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해라"라는 식으로 정리하고 보니, 기존의 뻔한 원칙들을 열거해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독서할 때 강렬히 느꼈던 공감이 이 부분을 읽으며 다소 떨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 부분은 사족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개인을 위한 행동 제안은 책 전반부의 내용들을 정리해서 요약한 것이어서 앞서 제시했던 설명들을 되새김하며 곱씹어 보아도 좋을 것 같다.


1. 기존의 체제에 의문을 던져라.

2. 자신이 창출하는 아이디어의 수를 세 배로 늘려라.

3. 새로운 영역에 몰입하라. 

4. 할 일을 전략적으로 미루라.

5. 동료들로부터 더 많은 피드백을 구하라.

6. 위험 포트폴리오의 균형을 유지하라.

7. 당신의 아이디어를 지지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에 집중하게 하라.

8. 아이디어에 대한 친숙함을 높여라. 

9. 당신의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집단에게 평가를 받으라.

10. 과격한 성향을 숨겨라.

11. 결심했을 때와 마음이 흔들릴 때 서로 다른 방법으로 동기부여 하라.

12.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하지 말라.

13. 가해자가 아니라 희생자에게 집중하라. 

14. 혼자가 아님을 기억하라.

15. 당신이 나서지 않으면 현재 상태가 지속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파이어폭스나 크롬을 사용하려면 사람들은 수완을 좀 부려서 다른 브라우저를 다운로드해야 한다. 내장된 기능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주도력을 조금 발휘해서 더 나은 선택지를 찾는 것이다. 바로 그 주도력, 아무리 미미하다고 해도 그 주도력이 작업 수행 능력을 예측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인터넷 익스플로러나 사파리처럼 내장된 브라우저를 그냥 사용한 고객 상담 직원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도 같은 접근 방식을 적용했다. 그들은 회사에서 준 각본대로 판매했고, 고객 불만을 접수할 때도 회사에서 마련한 표준 절차를 따랐다. 그들은 자신의 직무를 회사가 정한 대로 고정불변의 것으로 여겼고, 따라서 자기 일에 불만이 생기면 결근을 하기 시작하다가 결국 사직했다.
파이어폭스나 크롬을 사용하려면 사람들은 수완을 좀 부려서 다른 브라우저를 다운로드해야 한다. 내장된 기능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주도력을 조금 발휘해서 더 나은 선택지를 찾는 것이다. 바로 그 주도력, 아무리 미미하다고 해도 그 주도력이 작업 수행 능력을 예측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 26쪽

인터넷 익스플로러나 사파리처럼 내장된 브라우저를 그냥 사용한 고객 상담 직원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도 같은 접근 방식을 적용했다. 그들은 회사에서 준 각본대로 판매했고, 고객 불만을 접수할 때도 회사에서 마련한 표준 절차를 따랐다. 그들은 자신의 직무를 회사가 정한 대로 고정불변의 것으로 여겼고, 따라서 자기 일에 불만이 생기면 결근을 하기 시작하다가 결국 사직했다.
주도적으로 브라우저를 파이어폭스나 크롬으로 바꾼 직원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에 달리 접근했다. 그들은 고객들에게 상품을 팔고, 고객들의 불만을 해소할 새로운 방법들을 모색했다. 그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상황을 바로잡았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주도적으로 개선했으므로 그들은 이직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재창조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일반적이지 않고, 예외적인 존재였다. - 26쪽

사회적 취약 계층이 경제적으로 우월한 계층보다 현상 유지를 더 지지한다는 결과를 얻은 조스트와 그의 연구팀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주어진 여건에서 가장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그 여건에 의문을 제기하고 도전장을 내밀고 바꾸려고 할 가능성이 가장 낮다는 모순된 결과를 얻었다."
이런 독특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조스트와 그의 연구팀은 체제 정당화 이론(theory of system justification)을 수립했다. 이 이론의 핵심 개념은 사람들은 현상 유지를 합법적이라고 합리화하도록 동기부여된다는 주장이다. 설사 그렇게 합리화하는 것이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이나 자신이 속한 특정 집단의 이익에 반한다고 해도 말이다. - 27쪽

출발점은 호기심이다. 호기심은 왜 애초에 현재 상태가 존재하게 되었는지 의문을 품는 행위이다. 우리는 ‘기시감(旣視感, deja vu)’의 정반대 현상이 ‘未視感(미시감, vuja de)’을 경험할 때 현재 상태에 의문을 품게 된다. 기시감은 우리가 새로운 것을 접했을 때 전에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현상을 말한다. 미시감은 그 반대다. 늘 봐온 익숙한 것이지만, 그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기존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해결함을 뜻한다. - 28, 29쪽

신동들은 재능이나 야망은 충분히 지녔지만 독창성을 발휘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을 바꾸는 데 기여하지 못하고 만다. (...) 교사의 총애를 받을 확률이 가장 적은 아이들이 가장 창의성 있는 아이들이라는 연구 결과는 위 설명을 뒷받침해준다. 한 연구에서 초등학교 교사들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학생들과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학생들의 목록을 만들게 하고, 두 집단의 학생들을 여러 가지 특성에 따라 점수를 매기도록 했다. 조사 결과 교사들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학생들은 자기 스스로 규정을 만드는 이른바 비순응자(non-conformist)들이었다. 교사들은 아주 창의적인 학생들을 차별하고 그들을 말썽꾸러기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아이들은 대부분 체제에 순응하는 법을 터득하고 독창적인 생각을 속으로만 간직하게 된다. - 32, 33쪽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가 남긴 명언처럼, 독창성이란 창조적인 파괴 행위이다. 새로운 체제를 주장하려면 기존 방식을 해체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긁어 부스럼을 만들까 봐 두려워 주저한다. - 38쪽

나는 와비파커 창립자들의 선택지와 내가 생각하는 성공적인 기업가들이 선택한 길을 비교해보았지만 일치하지 않았다. 닐과 그의 친구들은 믿음을 실행하기 위해 저돌적으로 밀어붙이겠다는 베짱이 없었다. 따라서 나는 그들이 자신들의 구상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고 전력을 다할 의지가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들은 기업가로 성공하겠다는 마음이 절실하지 않았다. 그들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의지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모두 걸기는커녕 실패할 경우의 대안을 마련하면서 위험을 회피했기 때문에 실패할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그 점 덕분에 그들은 성공했다. - 43, 44쪽

당신이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생각한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창업에 전념한 사람들이 분명히 유리한 점이 있다고 예측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연구 결과는 정반대였다. 직장을 계속 다닌 창업가들이 실패할 확률은 직장을 그만둔 창업가들이 실패할 확률보다 33퍼센트 낮았다.
당신이 위험을 회피하는 성향이고 당신의 사업 구상에 대해 의구심이 든다면, 당신이 추진하는 사업은 끝까지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다. 당신이 앞뒤 가리지 않고 무모하게 덤비는 도박꾼 기질이라면, 당신의 창업은 사상누각(沙上樓閣)일 가능성이 높다. - 45쪽

위험 포트폴리오를 안정적으로 관리한다는 것은, 적당한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어정쩡하게 양다리를 걸친 채 계속 활동한다는 뜻이 아니다. 성공한 창시자들은 한 분야에서는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는 대신에, 다른 분야에서는 극도로 신중을 기함으로써 위험을 상쇄한다는 뜻이다. - 49쪽

독창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면, "작업량을 늘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 말이다"라고, 라디오 프로그램 <디스 아메리칸 라이프(This American Life)>와 팟캐스트 <시리얼(Serial)>의 프로듀서인 아이라 글래스(Ira Glass)는 말한다.
분야를 막론하고 최고의 독창성을 보여준 사람들은 아이디어를 가장 많이 창출해낸 사람들이고, 그들은 가장 많은 양의 아이디어를 낸 기간에 가장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냈다. - 77쪽

양과 질은 서로 상충 관계(tradeoff)라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다. 어떤 일을 더 잘하기를 원한다면, 즉 결과물의 질을 높이려면, 다른 일은 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아이디어 창출에서는 양이 질을 예측하는 가장 정확한 지표이다. "독창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변형되거나, 더 이상 발전할 여지가 없거나, 완전히 실패작인 아이디어를 많이 생각해낸다. 하지만 이는 결코 헛수고가 아니다. 그만큼 재료로 삼을 아이디어, 특히 참신한 아이디어를 많이 생각해내게 된다"라고 로버트 서튼(Robert Sutton)스탠퍼드대학교 교수는 지적한다. - 78쪽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지닌 사람이 그 아이디어를 실행하는 데 성공할지 여부를 예측하려면, 아이디어를 낸 당사자가 자신의 아이디어에 대해 얼마나 열정이 있는지보다는 그들의 행동을 통해 얼마나 실행 의지가 강한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 107쪽

전설적인 영화 제작자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가 지적한 바와 같이, "권한은 단순히 기존 체제에 도전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일단 기존 체제 내에서 지위를 확보한 후에, 기존 체제에 도전하고 뒤엎어야 얻어진다." - 124쪽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부정적인 관계는 청산하고, 애증의 관계는 복구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로 해야 한다는 증거가 있다. 즉 친적과는 인연을 끊고, 적을 내편으로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
현상에 반기를 들 때 독창적인 사람들은 반대자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처음부터 변화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그럴 시간에 이미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강화하자는 논리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동맹은 지속적으로 우리를 지지해온 사람들이 아니다. 처음에는 우리의 주장에 반대했지만, 마음을 바꿔 우리 편을 들게 된 사람들이다. - 227쪽

반세기 전, 저명한 심리학자 엘리엇 애런슨(Elliot Aronson)은 일련의 실험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어느 정도 존중을 받는지 그 수준 자체보다는 이미 받고 있는 존중을 얼마나 더 잃고 얻었는지에 훨씬 더 민감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누군가가 우리를 늘 지지해주면 우리는 이를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평가절하한다. 그러나 처음에 경쟁자로 시작된 관계지만 점점 열렬한 지지자가 된 사람의 경우 진정으로 자신을 지지해준다고 여긴다. - 227쪽

윌러드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온건한 과격파이다. "뭐든지 윌러드가 하면 과격해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보다 진보적인 주장으로 옮겨갈 때조차도 말이다"라고 진 베이커는 말한다.
윌러드의 사례는 잠재적인 협력자에게 힘을 모으자고 설득할 때 염두에 둬야 할 두 가지 교훈을 제시해준다. 첫째, 가치에 대해 달리 생각해야 한다. 상대방도 우리와 가치관이 같다고 여기거나, 우리의 가치를 채택하라고 상대방을 설득하지 말고, 우리의 가치를 상대방이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해줄 수단으로 제시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가치관을 바꾸기는 어렵다. 우리의 목표를 상대방이 이미 지니고 있는 익숙한 가치와 연결시키는 방법이 훨씬 쉽다. - 240쪽

둘째, 무선 충전 기술을 개발한다는 본래 목적을 숨긴 메러디스 페리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투명성이 반드시 최선의 방책은 아니다. 잠재적인 협력자에게 최대한 솔직해야 하지만,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실현하려면 때로는 자신의 아이디어가 듣는 사람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도록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윌러드는 알코올 남용이라는 트로이 목마에 여성 참정권을 몰래 숨겨 들여왔다. - 241쪽

사람들은 결과의 논리를 바탕으로 결정을 내릴 경우, 위험을 무릅쓰지 않을 구실을 늘 찾게 된다. 한편 적절성의 논리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든다. 어떤 행동을 해야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지는 덜 생각하게 되고,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면적인 느낌을 바탕으로 행동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경향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은 출생 서열이다. - 262쪽

수년 동안 전문가들은 맏이의 장점을 강조해왔다. 집안의 맏이는 자신을 애지중지하는 부모의 관심과 시간과 에너지를 한 몸에 받고 자라기 때문에 성공할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 그러나 초기에는 맏이들이 유리하지만, 30세가 되면 이런 장점의 효과가 사라진다. 출생 서열이 낮은 사람들이 연봉 증가율이 더 높은데, 그 이유는 그들이 연봉이 더 나은 직업으로 바꾸려는 의향이 더 강하고 더 자주 일자리를 옮기기 때문이다. 베르토니와 브루넬로는 "맏이들은 출생 서열이 낮은 사람들보다 위험 회피 성향이 더 강하다"라고 말한다. - 262, 263쪽

집단 의사결정에 관한 세계적인 전문가이자 버클리대학교의 심리학자 찰런 네메스(Charlan Nemeth)는 "소수의 의견이 중요하다. 그들의 의견이 결국 옳다고 판명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양한 측면에 관심을 갖게 하고, 사고를 촉진시키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 결과 소수 의견이 틀리다고 해도, 의견이 다른 소수는 기발한 해결 방법을 찾아내고 질적으로 더 나은 결정을 내리는 데 기여하게 된다."
소수 의견은 심지어 그 의견이 ‘틀릴 때조차’ 쓸모가 있다는 말이다. - 312쪽

직원들의 공동의 가치와 규범에 매우 헌신적인 경우, 그 조직에는 강력한 문화가 존재하지만 가치와 규범이 어떤 것인지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강력한 문화를 조성하려면 다양성(diversity)을 핵심 가치에 포함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이 점이 브리지워터의 강력한 문화와 컬트의 차이점이다. 다른 의견을 권장해야 헌신적인 문화를 조성할 수 있다. 브리지워터는 직원을 채용할 때 유사성을 기준으로 조직문화에 적합한지 판단하지 않고 조직문화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지를 평가한다.
달리오는 직원들이 독자적으로 생각할 능력을 바탕으로 조직문화를 풍성하게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달리오는 직원들에게 다른 의견을 낼 책임을 부여함으로써 사람들이 결정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 320, 321쪽

컬트에서 핵심적인 가치는 독단성이다. 브리지워터에서는 직원들이 원칙을 비판하도록 되어 있다. 신입 사원 연수에서 직원들은 회사가 표방하는 원칙들을 배우면서 끊임없이 질문을 받는다. "그 원칙에 동의하는가?"라고 말이다. "우리는 오랜 세월에 걸쳐 증명되어온 기준들이 있다. 그 기준들을 따르든지, 이의를 제기하든지, 더 나은 기준을 위해 싸우든지 선택해야 한다"라고 달리오와 함께 회사의 원칙들을 설정한 잭 위더(Zack Wieder)는 말한다. - 320, 321쪽

성공의 비결은 진정성이다. 진정성을 가장할 수 있으면 다 된 셈이다. 그러나 실제로 진정성을 가장하기란 쉽지 않다. 악마의 변호인이 최대한 효과를 거두려면, 악마의 변호인 자신이 자기가 내세우는 주장을 진심으로 확신해야 한다. 그리고 집단도 그가 정말로 확신을 갖고 주장한다고 믿어야 한다. 네메스의 한 실험에서, 진정성 있는 반론자가 포함된 집단은 집단 내에서 지목한 악마의 변호인이 포함된 집단보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48퍼센트 더 많이 내놓았고 해결책도 질적으로도 훨씬 우수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악마의 변호인이 다수 의견에 공감한다는 사실을 그 집단이 알고 있었는지, 또는 그 사람의 실제 생각이 무엇인지 확실히 몰랐는지에 상관없이 이런 결과가 나왔다. 게다가 악마의 변호인이 진정으로 소수의 시각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가 지정된 악마의 변호인이라고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알리기만 해도 변호인의 설득력이 충분히 약화되었다. 지정된 반론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의구심을 품게 만들지만, 진정성 있는 반론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견해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 325, 326쪽

미래학자 폴 사포(Paul Saffo)의 말을 빌리자면, "분명한 견해를 지니되, 자신의 주장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겸허함"이 필요하다. - 328쪽

레이 달리오는 직원들이 자신에게 해결책을 들고 오기를 바라지 않는다. 문제를 제기하기를 바란다. 그가 가장 처음 고안해낸 방식은 이슈 로그(issue log)라는 개방형 데이터베이스인데, 직원이라면 누구든지 자기가 발견한 문제점과 그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기록하는 체계이다. 문제를 인식하게 만들면 집단 사고와의 전투에서 절반은 이긴 셈이 된다. 나머지 절반은 문제를 해결할 방법에 대해 올바른 의견을 귀담아 듣는 데 있다. 브리지워터가 해결 방법을 모색하는 절차는 신임이 높은 직원들로 집단을 구성해 문제점을 진단하고 의견을 교환하고 원인을 규명하고 가능한 해결책을 강구하는 방법이다.
누구든지 의견을 낼 수는 있지만, 모든 의견이 똑같은 가치를 지니지는 않는다. 브리지워터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투표로 결정하게 되면 소수의 의견이 더 낫다고 해도 다수가 원하는 대로 결정된다. "민주적인 의사결정(즉 1인 1표)은 어리석은 방법이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정도로 신뢰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달리오는 설명한다. - 334쪽

사람들은 대부분 방어적 비관주의자보다 전략적 낙관주의자가 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노럼(Julie Norem)은 분석적, 언어적, 창의적인 작업에서 방어적 비관주의자는 전략적 낙관주의자보다 훨씬 불안해하고 자신감도 덜 하지만, 성과는 전략적 낙관주의자 못지않게 달성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방어적 비관론자들에게 비관주의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렇게 성과를 올리는지 물어보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나는 그들이 바로 그 비관주의 덕분에 성과를 올린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라고 노럼은 말한다. - 357쪽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게 만들고 싶다면, 그들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어야 한다. 바로 이 점이 오트포르 혁명을 비롯해 수많은 혁명들이 성공한 첫 번째 비결이다. - 376쪽

사람들이 새로운 행동을 안전하다고 인식하는 경우에는 행동을 바꿀 경우에 일어날 온갖 좋은 일들을 강조하는 것이 좋다. 사람들을 행동 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을 누리기 위해 당장 행동을 개시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새로운 행동을 위험하다고 믿으면 그 접근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미 현재 상태에 만족하기 때문에 변화로써 얻는 이득에 솔깃해하지 않고 멈춤 장치가 작동한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변하지 않으면 어떤 나쁜 일들이 일어날지 강조함으로써 현재 상태를 불안정하게 만들어야 한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경우 기정사실화될 손실에 직면하게 되면 위험을 무릅쓰는 일에 좀 더 솔깃해진다. 바꾸지 않으면 분명히 손실을 겪는다고 생각하면 동력 장치가 작동하게 된다. - 387, 38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사조영웅전 1권 사조영웅전 1
김용 지음, 김용소설번역연구회 옮김, 이지청 그림 / 김영사 / 2020년 2월
평점 :
판매중지


중학교 때 매주 목요일마다 집 앞의 아파트 단지에 오던 1톤 탑차에서 300원을 내고 소설책을 빌려보던 일이 독서라는 것을 취미이자 습관으로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때는 무슨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 지 몰라 당시 TV 드라마로 방영되었던 소설 <겨울 나그네>나 <제5열> 같은 원작을 읽어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곧 홍콩영화와 무협지의 붐에 빠져들었는데 책을 한번 펴면 손에서 떼지 못한다는 `수불석권`의 증상이 시작되었다. 학교 수업시간에도 교과서 안에 책을 숨겨 읽고,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도, 새로운 책을 빌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도 나만의 `형설지공`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렇게 읽고 나서 다음 날이면 내 옆이나 앞자리에 앉은 친구들에게 소설 내용을 신나게 떠들어 대며 이야기 했던 기억이 난다.
화창한 봄날의 기운도 왠지 모르게 들떠 있는 내 기분도 괜스레 책 읽기를 방해하고 있던 요즘, 예전에 e북 세트 할인가로 구매했던 김용의 영웅문 3부작을 발견했다. 그리고 바로 책을 다운 받아 읽기 시작했다. 예상과는 달리 내가 기억하고 있는 부분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다시 한번 빠져들기 좋은 기회였다. 지칠 때 입맛을 돋우는 봄나물의 느낌처럼 매번 집중하며 책읽기가 힘들 때 이렇게 재미로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나저나 이 나이에 다시 무협지를 펴다니...

- 테무친 휘하에 들어갔던 곽정이 드디어 강남칠괴를 만나 사제의 연을 맺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를 잊은 그대에게 -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
정재찬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친구의 소개로 책을 샀다. 표지에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라는 부제를 보고 슬며시 웃음이 났다. 아마도 교양강좌였나 본데, 굳이 공대생이라는 대상을 넣은 것과 '가슴'을 울렸다는 표현이 그러했다. 교양강좌에 그 정도의 열렬한 공감이 있었다는 말인가? 저자가 재직하는 한양대가 공대로 유명하다는 것 때문에 공대생을 대표로 넣었을까, 아니면 공대생은 시 같은 것은 잘 읽지도 않으며 더군다나 시를 통하여 웬만해서는 공감하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을 표현한 것일까. 공대생은 아니었지만 내 가슴도 멀쩡할 수 있는지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1장 '가난한 갈대의 사랑노래'를 읽어 보고는 책을 덮었다. 신경림의 <갈대>와 <가난한 사랑노래>를 설명하는 것이 었는데, 여기저기에서 너무나도 많이 써먹은 영화 <봄날은 간다>의 '어떻게 사랑히 변하니?' 같은 내용을 해설로 넣어두었다는 것이 너무 평범하다못해 지겨웠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한동안 이 책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방정리(= 책정리)를 하다가 옆으로 켜켜히 쌓아 놓은 책 더미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그리고 계속 읽어볼 것인지 그만 둘 것인지를 고민했다.


결론적으로는 계속 읽어보길 잘했다는 생각이다. 복효근의 <목련 후기>를 설명한 3장의 '떠나가는 것에 대하여'부터는 거의 눈을 떼지 못하고 읽어 내려갔다. 이 책의 도움으로 이어지는 함민복, 정호승, 박노해, 황동규, 박목월, 황지우 시인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예전에 대충 읽어내려갔던 것과는 전혀 다른 감상을 할 수 있었다. 뻔하고 식상하다고 앞서 불평했던 영화나 다른 시, 소설, 음악, 그림 등을 소재로 설명하려 한 것이 오히려 다양한 관점의 이해를 돕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작가들의 배경이나 개인사에 대한 설명을 곁들인 덕에 각 작품들이 품고 있는 시구에 대해서도 천천히 곱씹어 볼 수 있었는데, 신경림이 <갈대>로 등단한 이후 10년을 절필했다는 것이나, 별을 노래했던 가수 윤형주가 별을 노래했던 시인 윤동주와 육촌지간이라는 점, 황순원의 아들인 황동규가 작곡가를 꿈꾸다가 문학으로 전환했는데 그의 대표작 <즐거운 편지>가 고3 시절 짝사랑하던 연상의 여대생에게 바친 시라는 것, 박목월이 그를 흠모하던 여대생의 구애로 제주도에 몇 달을 도피했었고 그의 시 <배경>은 그 사연을 알아야 제대로 읽을 수 있다는 것, 일본인 목두꾼들에게 몰매를 맞고 정신이 이상해진 아버지를 둔 김소월의 강박적일 정도의 정상적인 삶 그러나 끝내 자살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아픔 등이 그러하다.


이 책의 백미는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언제 들어도 신선하고 놀라운 유치환과 이영도의 사랑에 관한 것이었다. "세상을 뜰 때까지 청마(유치환)는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20년 동안 정운(이영도)에게 편지를 보냈다. 보낸 이만 정성이었을까. 받은 이 정운도 정성이었다. 그녀는 그 많은 편지를 꼬박꼬박 보관해 두었다. 정운도 청마에게 얼마나 편지를 보냈는지 그건 알 길이 없지만 정운이 알뜰히 모아 놓은 청마의 편지는 전란 때 불타버린 예전 것을 제하고도 무려 5,000여통! 그의 사후, 당시의 주간지에 이들의 러브스토리가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이 계기가 되어 청마의 편지 중 200통을 추려 같은 제목의 단행본이 출간된다. 그런데 이 러브레터가 책으로 나오자마자 엄청난 주문이 몰려들면서 일약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만약 이 책을 끝까지 읽지 않았다면, 하나의 시를 이해하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작품과 매체, 그리고 시인에 대한 배경을 동원하여 시를 온전히 이해하고 감상하여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지나칠 뻔 했다. 다양한 해석 방법을 즐기는 재미도 있지만, 시를 읽는 다는 것이 단순히 그 시의 글자와 은유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이 책을 통해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이었다.

생각해 보라. 별과 내가 서로 마주본다는 것, 이것은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우리 은하계에는 천억 개의 별이, 그리고 우주에는 그런 은하가 또 천억 개 정도 있단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수십억 인구 가운데 하나인 나와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억겁의 시간 가운데 지금 이 순간, 어쩌면 이미 오래전 티끌로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를 그 별과 지금 이 순간 내가 만나고 있는 것이다. 허나 그렇게 소중한 만남과 관계건만 그 또한 시간의 힘을 이길 수는 없는 법. 저녁별은 밤이 되면 사라지고 나 또한 그럴 운명이다. - 45쪽

만일 오랜 병상의 세월을 보내는 노인이 있다면 존중하라. 그 모습을 결코 추하다 하지 마라.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힘겹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사랑과 결별을 준비하는 시간을 주기 위해 힘겹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헤어짐은 헤어짐다워야 한다. 오랜 사랑의 무게는 시간의 절약을 미덕으로 삼지 않는다. 안녕이라는 인사는 기능적이지만, 인사에 인사를 거듭하고 나서도, 적어도 동네 어구까지 나가서 떠나는 이의 꼭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 흔드느 ㄴ것이야 말로 인간에 대한 참된 예의다. 그것이 작별이다. - 67쪽

통증을 모르면 우리는 죽는다. 심지어 죽는 줄도 모르고 죽을 것이다. 그러니 슬픔을 아는 자는 정녕 복이 있도다. 슬픔은 슬픔을 고칠 줄 알게 해 주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공감의 능력이 사라진 사회는 죽은지도 모르고 있는 이미 죽은 사회다. 그래서 신은, 그리고 시인은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이에게 슬픔을 선물로 주고자 하는 것이다. 고통을 모르는 이에게 고통을 느끼게 해 주고, 슬픔을 모르는 이에게 슬픔을 느끼게 해 주는 일은, 그러므로 저주가 아니라 사랑이다. - 92쪽

내 사랑은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하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위대한 선언인가. 매일같이 변함없이 일어나서 사소해 보일 뿐,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굉장한 일이 또 있을까? 오늘 해가 지지 않으면, 오늘 바람이 불지 않으면, 그거야말로 큰일 아닌가? 그 엄청난 일이, 그것도 매일같이 벌어진다는 것은 실로 경이(驚異)라고 해야 옳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화자는 지금 고백하고 있는 게다. 등 뒤에 서서 얼굴 한번 제대로 비치지 못한 처지지만 그대에게 은근히, 그러나 당당히,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게다. 내 사소한 사랑이야말로 위대하지 않은가? 다만 늘 그대 뒤에 있기에,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하게, 늘 그대 앉은 배경에 있기에 그대가 몰라줄 뿐. - 111쪽

당신을 구원하는 것은 극점에 빛나는 오로라도, 대양을 뒤집는 태풍도 아니다. 당신이 온전히 빛나도록 배경이 되어 주는 해 질 녘 노을, 당신의 땀을 닦아 주는 바람일 게다. 당신이 괴로움 속을 헤맬 때 그때 가서야 비로소 나는 그대의 등 뒤에서 벗어나 그대 앞에 서리라. 그리고 그대를 불러 보리라. 나는 그럴 자격이 있다.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을 지켜 온 자이니 말이다. 그대여, 그때 가거들랑 나를 인정하고 내게 의지하라. 나처럼 당신을 오랫동안 조용히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기다린 자가 있던가. 지금 사소해 보이는 내 존재가 과연 그때도 사소할 것이냐. 나는 해지고 바람이 부는 그런 사람, 당신을 지키는 그대 등 뒤의 사람인 것이다. - 112쪽

모든 기다림은 결국 시간과 변화의 문제다. <어린완자> 여우의 말이 기억나는가? 기다림이란 오늘 하루를 다른 날과 다르게 만드는 일이다. 그러니 어제와 늘 같이 오늘을 살면서 내일이 변화되길 기다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이미 지나간 버스를 기다리는 것일 테다. 안타까워도 그것이 진실인데, 무서운 것은 과연 그 버스가 지나갔는지 여부를 알 길이 없다는 데 있다. 기다림에 녹이 슨 채, 그러다 우리는 죽을 테고, 그런 생각을 할 때면 가끔 인생은 두렵다. - 153쪽

특히 <산유화>의 `저만치`라는 시어처럼 김소월의 마음을 잘 표현한 시어도 드물다. 그는 늘 자신이 추구하고 욕망하는 대상으로부터 `저만치` 떨어져 있다. 그것이 바로 여기, 내 눈앞에 피어 있으면, 똑 따면 그만이다. 그것이 바로 저기, 도저히 손이 가닿을 곳 없는 곳에 있으면 쳐다보지 않고 포기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꽃은 꼭 `저만치` 피어 있는 게다. 그냥 가자니 손을 조금만 더 뻗으면 딸 수 있을 것 같고, 따려고 하자니 건너편 절벽에 홀로 피어 있는 꽃이라 위험해 뵈기도 하고. 아마 또 그렇게 주춤거리고 머뭇거리다가 결국 시간만 흐르고 그는 돌아서야 했을 것이다. 그의 운명처럼. 그래서 늘 그의 시를 읽으면 읽는 우리가 답답해지고 한이 맺히는 듯하다. - 20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빠가 돌아왔다 - 2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의문을 품는다. 저 별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내가 태어나기도 전, 아니 내 할머니와 그 할머니의 할머니가 태어나기도 전에 생겨난 것일 텐데, 그렇다면 저 별은 도대체 지구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는 것일까. 소년의 궁금증엔 해답이 없다. 그는 들고 있던 플래시의 불을 밝혀 별을 겨눈다. 이 빛도 언젠가 저 별에 가 닿겠지. 내가 죽고 내 손자가 죽고 그 손자의 손자가 죽으면... 물론 이런 가정은 터무니 없는 것이다. 그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빛도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게 우주다. - 127쪽

어리석은 의문은 또 있다. 창공의 새에게도 그림자가 있을까? 저렇게 작고 가벼운 것에게 어찌 그림자처럼 거추장스런 것이 달려 있으랴 싶은 것이다. 그러나 새에게도 분명 그림자가 있다. 날아가는 새떼를 보고 있노라면 가끔, 아주 가끔, 뭔가 검고 어두운 것이 휙 지나간다. 너무 찰나여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 않으면 잘 모르기 십상이다. 달이 해를 가리는 걸 일식이라 하는데 그렇다면 새가 해를 가리는 이런 현상은 무어라 할까. 물론 나는 모른다. 그렇지만 가끔 새 그림자가 해를 가리는 일도 있다는 걸 말해두고 싶은 것이다. - 127, 128쪽

그림자는 광원과 자신 사이를 가로막은 물체를 결코 놓치지 않는다. 빛을 가로막으면 그 뒤엔 그림자가 생긴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엔 언제나 내가 있다. - 128쪽

"남자들이 왜 기를 쓰고 성공하려고 하는지 알아?"
"몰라요."
"거절당하지 않기 위해서야." - 177, 178쪽

오랜만에 도서관에 가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뇌 속에 숨어 있던 작은 성기가 힘차게 발기하는 느낌을. 저 지중해 어딘가에 있다는 누드비치에 처음 당도한 관광객처럼 독자들은 도서관에 들어서자마자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책은 밝게 웃으며 어서 오라고 우리를 향해 손짓한다. 요염한 그 책들은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암시를 풍기면서 손만 대면 가랑이를 벌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르가슴이 멀지 않았다. 바야흐로 우리의 뇌는 팽창하여 부풀어오르는 중이다. 우리는 허겁지겁 아무 책이나 뽑아 펼쳐댄다. 외설스런 장면이다. 그러나 이 누드비치의 풍경이 눈에 익으면 어느새 정신의 성기는 늘어지고 광대무변해 보였던 가능성의 세계는 일 제곱미터 면적의 책상으로 한정된다. 졸음이 쏟아지거나 식욕이 생긴다. 햇빛을 오래 보지 못한 사람들의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퀴퀴한 냄새도 비로소 코를 간지럽힌다. 그때쯤 되면 사람들은 잡지 서가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한다. 아직 낡지 않은 것들이 주는 달콤함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 201, 202쪽

약간의 불편만 감수하면 더는 피곤한 게 없는 삶. 그런 사람에게 인생이란, 다소 예외가 있기는 해도, 경부고속도로와 같은 것이다. 규정속도를 지키면서 꾸준히 가기만 하면 목적지에 대다르는 것이다. - 20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2
정유정 지음 / 비룡소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에는 그냥 훑어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을 아직 다 읽지 않았으므로 또 다른 책을 벌여놓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한 장, 두 장 넘기면서 빨려들어간 이야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정신 없이 진행되는 사건과 이것을 재치 있게 풀어나가는 작가의 입담. 결국 다른 책들을 제쳐두고 이 책을 다 읽고 말았다.


정유정의 소설은 네 권째 읽는다. 처음으로 읽은 것이 <7년의 밤>, 그 다음에는 <28>, <내 심장을 쏴라>, 그리고 이 책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를 읽었으니, (비록 <7년의 밤>보다 <28>이 뒤에 출간되었지만) 그의 책을 거의 출간 역순으로 읽은 셈이 된다. 다 읽고 보니, 등대마을과 화양시라는 곳에서 각각 진행되는 <7년의 밤>과 <28>의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 그리고 Y읍을 벗어나 임자로도 길을 떠나고, 정신병원에서의 탈출을 시도하는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와 <내 심장을 쏴라>의 똘끼 있으면서도 좌충우돌 유쾌한 분위기가 서로 닮아 있다. 그의 소설을 초기와 중기로 나눈다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분위기가 <7년의 밤> 부터는 다소 음울하게 변한 것 같다. (소설의 배경을 놓고 본다면 화양시의 시위장면과 5.18의 광주가, 등대마을의 댐과 정신병원이 각각 겹쳐 보이기 때문에 <28>과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가, <7년의 밤>과 <내 심장을 쏴라>가 닮아 있는가? 암튼...) 여행이나 탈출을 소재로 한 영화를 '로드무비'라고 부르는데, 이 소설은 '로드노블'이라고 불러야 하나(물론 이런 용어는 생소하다). 심사평을 보니 '모험소설'이라고 표현을 한 것이 있던데 '모험'으로 뒤덮기엔 너무 큰 것도 같고.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린 성장소설이기도 하고.


한 소년이 등장한다. 친한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하여 길을 떠나는데, 예기치 못한 사건과 불청객들이 끼어들게 된다. 본의 아니게 한 명의 노인과 두 명의 소년, 한 명의 소녀와 한 마리의 개가 동행하게 되면서 일은 꼬여가고 많은 고비를 넘으며 목적지로 향하게 된다. 주인공 '준호'는 아빠의 실종과 뒤이은 엄마의 재혼으로 심적 갈등을 겪게 된다. 그리 친근감이 느껴지지 않는 엄마와 아빠의 부재, 그리고 아빠에 대한 연민이라는 설정은 <7년의 밤>의 '서원'과 닮아 있다. 방황할 수밖에 없는 시기에는 방황에 대한 너무나 많은 원인과 이유가 존재한다. 그런데 그 빈공간을 채워주는 것은 보다 온전한 인격을 갖춘 누군가가 아니라, 여행길을 동행하게 된 생경한 사람들이었다. 처음에 그들 사이에 놓여있던 낯설고 의뭉스러운 관계들이 점차 이해와 믿음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그런 불완전한 존재들끼리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작가는 이 소설을 시작하면서 "만약, 우리 인생에도 스프링캠프가 있다면?"이라는 질문을 들여다 봤다고 했다. 사라진 '무엇'이 거기 있으리라 생각했다고 한다. 스프링캠프, '정규 리그가 시작되기 전인 이른 봄, 날씨가 따뜻한 지역에 머물면서 집중적으로 가지는 합숙 훈련'. 인생에서 이런 시기가 과연 있기는 했을까? 그리고 나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치른 스프링캠프 덕분에 그나마 지금의 정규 리그를 그럭저럭 버텨내고 있는 것일까? 그러면 내 스프링캠프에서 같이 합숙했던 사람들은? 그들은 나와 다른 리그에서 경기를 잘 치르고 있을까? 우리는 삶이라는 시즌이 끝나기 전에 다른 리그에서 또 한번 만나게 될까? 나는 거기서 잃어버린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 세상에는 자기가 그 입장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진실이 있는 법이거든.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게 혜택 받은 자의 예의야. 알아들어, 김준호?" - 119, 120쪽

"돌아갈 수 없을 땐 돌아보지 마. 그게 미친 짓을 완수하는 미친 자의 자세야. 오케이?" - 323쪽

"하느님은 참 괴상한 방식으로 공평해. 사랑이 있는 쪽에선 사람을 빼앗고 사람이 있는 쪽에서는 사랑을 빼앗아 가고." - 358쪽

푸름 마을을 지나오며 안개섬의 새벽을 생각했어. 우리가 봤던 낯선 것들, 아름다운 것들, 빛나는 것들. 아니 어떤 말도 그들을 칭하는 데 적당하지 않을 거야. 세상 깊숙한 곳에 숨어 있다가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았던 그들을, 나는 그냥 `비밀`이라 부르기로 했어. 내 인생의 첫 비밀. 어쩌면 우리가 함께한 며칠은 우리 인생의 비밀을 찾아가는 법을 가르친 신의 특별한 수업이었는지도 몰라.
세상에는 신이 내 몫으로 정해 놓은 `비밀`이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지? 그렇다고 동의해 줘.
참혹한 대가를 치렀지만 난 자유를 얻었어. 비밀을 찾아가는 법도 배웠어. 그러니 이젠 나를 믿을 테야. 우리들 여행의 끝에 무엇이 있었는지 잊지 않을 거야. 나를 무릎 꿇리려 드는 게 있다면 큼직한 감자를 먹여 주겠어. 이래봬도 내가 깡이 좀 되잖아. - 381, 38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