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잊은 그대에게 -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
정재찬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친구의 소개로 책을 샀다. 표지에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라는 부제를 보고 슬며시 웃음이 났다. 아마도 교양강좌였나 본데, 굳이 공대생이라는 대상을 넣은 것과 '가슴'을 울렸다는 표현이 그러했다. 교양강좌에 그 정도의 열렬한 공감이 있었다는 말인가? 저자가 재직하는 한양대가 공대로 유명하다는 것 때문에 공대생을 대표로 넣었을까, 아니면 공대생은 시 같은 것은 잘 읽지도 않으며 더군다나 시를 통하여 웬만해서는 공감하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을 표현한 것일까. 공대생은 아니었지만 내 가슴도 멀쩡할 수 있는지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1장 '가난한 갈대의 사랑노래'를 읽어 보고는 책을 덮었다. 신경림의 <갈대>와 <가난한 사랑노래>를 설명하는 것이 었는데, 여기저기에서 너무나도 많이 써먹은 영화 <봄날은 간다>의 '어떻게 사랑히 변하니?' 같은 내용을 해설로 넣어두었다는 것이 너무 평범하다못해 지겨웠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한동안 이 책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방정리(= 책정리)를 하다가 옆으로 켜켜히 쌓아 놓은 책 더미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그리고 계속 읽어볼 것인지 그만 둘 것인지를 고민했다.


결론적으로는 계속 읽어보길 잘했다는 생각이다. 복효근의 <목련 후기>를 설명한 3장의 '떠나가는 것에 대하여'부터는 거의 눈을 떼지 못하고 읽어 내려갔다. 이 책의 도움으로 이어지는 함민복, 정호승, 박노해, 황동규, 박목월, 황지우 시인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예전에 대충 읽어내려갔던 것과는 전혀 다른 감상을 할 수 있었다. 뻔하고 식상하다고 앞서 불평했던 영화나 다른 시, 소설, 음악, 그림 등을 소재로 설명하려 한 것이 오히려 다양한 관점의 이해를 돕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작가들의 배경이나 개인사에 대한 설명을 곁들인 덕에 각 작품들이 품고 있는 시구에 대해서도 천천히 곱씹어 볼 수 있었는데, 신경림이 <갈대>로 등단한 이후 10년을 절필했다는 것이나, 별을 노래했던 가수 윤형주가 별을 노래했던 시인 윤동주와 육촌지간이라는 점, 황순원의 아들인 황동규가 작곡가를 꿈꾸다가 문학으로 전환했는데 그의 대표작 <즐거운 편지>가 고3 시절 짝사랑하던 연상의 여대생에게 바친 시라는 것, 박목월이 그를 흠모하던 여대생의 구애로 제주도에 몇 달을 도피했었고 그의 시 <배경>은 그 사연을 알아야 제대로 읽을 수 있다는 것, 일본인 목두꾼들에게 몰매를 맞고 정신이 이상해진 아버지를 둔 김소월의 강박적일 정도의 정상적인 삶 그러나 끝내 자살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아픔 등이 그러하다.


이 책의 백미는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언제 들어도 신선하고 놀라운 유치환과 이영도의 사랑에 관한 것이었다. "세상을 뜰 때까지 청마(유치환)는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20년 동안 정운(이영도)에게 편지를 보냈다. 보낸 이만 정성이었을까. 받은 이 정운도 정성이었다. 그녀는 그 많은 편지를 꼬박꼬박 보관해 두었다. 정운도 청마에게 얼마나 편지를 보냈는지 그건 알 길이 없지만 정운이 알뜰히 모아 놓은 청마의 편지는 전란 때 불타버린 예전 것을 제하고도 무려 5,000여통! 그의 사후, 당시의 주간지에 이들의 러브스토리가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이 계기가 되어 청마의 편지 중 200통을 추려 같은 제목의 단행본이 출간된다. 그런데 이 러브레터가 책으로 나오자마자 엄청난 주문이 몰려들면서 일약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만약 이 책을 끝까지 읽지 않았다면, 하나의 시를 이해하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작품과 매체, 그리고 시인에 대한 배경을 동원하여 시를 온전히 이해하고 감상하여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지나칠 뻔 했다. 다양한 해석 방법을 즐기는 재미도 있지만, 시를 읽는 다는 것이 단순히 그 시의 글자와 은유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이 책을 통해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이었다.

생각해 보라. 별과 내가 서로 마주본다는 것, 이것은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우리 은하계에는 천억 개의 별이, 그리고 우주에는 그런 은하가 또 천억 개 정도 있단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수십억 인구 가운데 하나인 나와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억겁의 시간 가운데 지금 이 순간, 어쩌면 이미 오래전 티끌로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를 그 별과 지금 이 순간 내가 만나고 있는 것이다. 허나 그렇게 소중한 만남과 관계건만 그 또한 시간의 힘을 이길 수는 없는 법. 저녁별은 밤이 되면 사라지고 나 또한 그럴 운명이다. - 45쪽

만일 오랜 병상의 세월을 보내는 노인이 있다면 존중하라. 그 모습을 결코 추하다 하지 마라.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힘겹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사랑과 결별을 준비하는 시간을 주기 위해 힘겹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헤어짐은 헤어짐다워야 한다. 오랜 사랑의 무게는 시간의 절약을 미덕으로 삼지 않는다. 안녕이라는 인사는 기능적이지만, 인사에 인사를 거듭하고 나서도, 적어도 동네 어구까지 나가서 떠나는 이의 꼭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 흔드느 ㄴ것이야 말로 인간에 대한 참된 예의다. 그것이 작별이다. - 67쪽

통증을 모르면 우리는 죽는다. 심지어 죽는 줄도 모르고 죽을 것이다. 그러니 슬픔을 아는 자는 정녕 복이 있도다. 슬픔은 슬픔을 고칠 줄 알게 해 주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공감의 능력이 사라진 사회는 죽은지도 모르고 있는 이미 죽은 사회다. 그래서 신은, 그리고 시인은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이에게 슬픔을 선물로 주고자 하는 것이다. 고통을 모르는 이에게 고통을 느끼게 해 주고, 슬픔을 모르는 이에게 슬픔을 느끼게 해 주는 일은, 그러므로 저주가 아니라 사랑이다. - 92쪽

내 사랑은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하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위대한 선언인가. 매일같이 변함없이 일어나서 사소해 보일 뿐,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굉장한 일이 또 있을까? 오늘 해가 지지 않으면, 오늘 바람이 불지 않으면, 그거야말로 큰일 아닌가? 그 엄청난 일이, 그것도 매일같이 벌어진다는 것은 실로 경이(驚異)라고 해야 옳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화자는 지금 고백하고 있는 게다. 등 뒤에 서서 얼굴 한번 제대로 비치지 못한 처지지만 그대에게 은근히, 그러나 당당히,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게다. 내 사소한 사랑이야말로 위대하지 않은가? 다만 늘 그대 뒤에 있기에,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하게, 늘 그대 앉은 배경에 있기에 그대가 몰라줄 뿐. - 111쪽

당신을 구원하는 것은 극점에 빛나는 오로라도, 대양을 뒤집는 태풍도 아니다. 당신이 온전히 빛나도록 배경이 되어 주는 해 질 녘 노을, 당신의 땀을 닦아 주는 바람일 게다. 당신이 괴로움 속을 헤맬 때 그때 가서야 비로소 나는 그대의 등 뒤에서 벗어나 그대 앞에 서리라. 그리고 그대를 불러 보리라. 나는 그럴 자격이 있다.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을 지켜 온 자이니 말이다. 그대여, 그때 가거들랑 나를 인정하고 내게 의지하라. 나처럼 당신을 오랫동안 조용히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기다린 자가 있던가. 지금 사소해 보이는 내 존재가 과연 그때도 사소할 것이냐. 나는 해지고 바람이 부는 그런 사람, 당신을 지키는 그대 등 뒤의 사람인 것이다. - 112쪽

모든 기다림은 결국 시간과 변화의 문제다. <어린완자> 여우의 말이 기억나는가? 기다림이란 오늘 하루를 다른 날과 다르게 만드는 일이다. 그러니 어제와 늘 같이 오늘을 살면서 내일이 변화되길 기다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이미 지나간 버스를 기다리는 것일 테다. 안타까워도 그것이 진실인데, 무서운 것은 과연 그 버스가 지나갔는지 여부를 알 길이 없다는 데 있다. 기다림에 녹이 슨 채, 그러다 우리는 죽을 테고, 그런 생각을 할 때면 가끔 인생은 두렵다. - 153쪽

특히 <산유화>의 `저만치`라는 시어처럼 김소월의 마음을 잘 표현한 시어도 드물다. 그는 늘 자신이 추구하고 욕망하는 대상으로부터 `저만치` 떨어져 있다. 그것이 바로 여기, 내 눈앞에 피어 있으면, 똑 따면 그만이다. 그것이 바로 저기, 도저히 손이 가닿을 곳 없는 곳에 있으면 쳐다보지 않고 포기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꽃은 꼭 `저만치` 피어 있는 게다. 그냥 가자니 손을 조금만 더 뻗으면 딸 수 있을 것 같고, 따려고 하자니 건너편 절벽에 홀로 피어 있는 꽃이라 위험해 뵈기도 하고. 아마 또 그렇게 주춤거리고 머뭇거리다가 결국 시간만 흐르고 그는 돌아서야 했을 것이다. 그의 운명처럼. 그래서 늘 그의 시를 읽으면 읽는 우리가 답답해지고 한이 맺히는 듯하다. - 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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