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는 가끔 엄마가 어떻게 그렇게 자기 꿈과 깨끗이 작별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엄마는 ‘그저 다음 단계로 간 것뿐‘이라며, ‘작별한 건 맞지만 깨끗이 헤어진건 아니‘라고 했다. ‘대부분의 어른이 그렇게 사는데 그건 꼭 나쁜 일도 좋은 일도 아니‘라면서. 그땐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요즘에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자신에게 재능은 있되 그게 압도적인 재능은 아님을 깨달아서였다. - P129
‘이야기가 가장 무서워질 때는 언제인가?‘소리가 슬픈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이야기가 끝나지 않을 때‘ - P134
채운은 자신이 이렇게 늙고 무력한 남자를 오랫동안 무서워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동시에 아버지가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쏘아볼 것 같아 두려웠다. 아버지가 남들 다 보는 데서 자신에게 실컷 욕을 퍼부은 뒤 "아, 미안. 내가 거짓말을 잘 못해서"라고 으스댈 것 같았다. 아버지는 자신이 빈말 못하고 솔직하다는 사실을 늘 자랑스러워했다. 실은 그게 어떤 무능을 뜻하는지 잘 알지 못하면서. - P75
- 가난이란......지우는 문득 교실 안이 조용해지는 걸 느꼈다.- 가난이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작은 눈송이 하나에도 머리통이 깨지는 것.지우는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지만 조금 의연해진 투로 다음 문장을 읽어나갔다.- 작은 사건이 큰 재난이 되는 것. 복구가 잘 안 되는 것......
밀란 쿤데라는 불멸을 꿈꾸는 것이 예술의 숙명이라고 했지만 내 아버지에게는 소멸을 담담하게 긍정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었고, 개인의 불멸이 아닌 역사의 진보가 소멸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무기였다. - P44
고통이든 슬픔이든 분노든 잘 참는 사람은 싸우지 않고 그저 견딘다.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 들고일어나 누군가는 쌈꾼이 되고 누군가는 혁명가가 된다. - P68
"또 올라네.‘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번만 와도 되는데, 한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마음이겠지.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 - P197
쉰 넘어서야 깨닫고 있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행복도 아름다움도 거기 있지 않다는 것을 성장하고자 하는 욕망이 오히려 성장을 막았다는 것을. - P267
당신의 정치적 종교적 사상적 관습적 올바름이 곧 당신의 윤리적 올바름의 증거는 아니다. 통념과 상식은 진실과는 무관하다. 유익함은 도덕과 구분되어야 하며,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대의는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 P121
사는 동안 우리가 겪는 많은 힘듦이 타인에게서 오고,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많은 힘들도 타인에게서 온다. 인간은 무리 생활을 하는 동물이고, 무리를 잃은 표류자는 깜박이며 꺼져 가는 약한 등불이다. 사랑을 연습하지 않는 사람은 그 희미한 빛조차 내지 못하고 누군가의 작은 반짝임을 알아보지도 못한다. - P106
생의 모든 순간이 죽음과 달라붙어 있음을 알게 된다면 누구라도 눈앞의 죽음, 한때의 기억에 붙들리지 않을 수 있다고. 용기를 내라고. 그렇게 가는 거라고. 모든 걸 보고 듣고 겪은 이 정겨운 비관주의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 P95
그러나 제아무리 무자비한 야생에도 탄식을 자아내는 아름다움은 있다. 암흑의 지구 위로 쏟아지는 유성우처럼 황홀한 문장들을 소설 속에서 만날 때, 생각하게 된다. 용기란 이런 것이 아닌가 하고. 따뜻한 피가 흐르는 말들을 예뻐하는 마음. 언젠가는 식어질 것을 알면서도 그 온기를 지켜 주려고 애쓰는 마음. - P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