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 향수 냄새가 바람에 실려 포자처럼 사방으로 퍼졌다. 쉴새없이 빠르게 속닥거리며 움직이는 입술들.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그 아이들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비밀스러운 동굴의 입구처럼 입안의 검은 암흑이 보이다 사라지다 한다. 내가 공유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날숨에 실려 공기 중으로 사라진다.  - P42

우유 냄새와 아이의 땀 냄새, 축축하고 더운 습기 같은 것들로 가득 차 있는 어둡고 폐쇄적인 구석진 방들. 가보기 전엔 절대 알 수 없는, 세상의 눈에 띄지 않는 모퉁이 같은 장소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아이와 단둘이 그리로 몸을 완전히 구겨 넣는 일 같은 거였다. 그 안에서 엄마들은 아무도 모르게 늙어 가고 아이들은 자란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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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삶을 견디는 나름의 방식이 있기 마련이었다. 뒷자리 여자는 안 돼.‘라는 말을 연발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유형이었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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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는 모임을 떠난 사람들이 불행하기를 내심 바라는지도 모른다. 자기는 어떻게든 버티며 남아 있는데 떠난 사람들이 행복하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떠난 사람들은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애써 불행을 연기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떠나는 사람들의 행복과 행운을 빌어주는 영화 장면이 늘 감동적인 것은 그게 쉽지 않아서일 것이다. - P120

1학년 때의 그 친구 말이 떠올랐다. 떠난 사람은 루저가 아니라 그냥 떠난 사람일 뿐이다. 남아 있는 사람도 위너가 아니라 그냥 남아 있는 사람일 뿐이다.  - P122

대체로 젊을 때는 확실한 게 거의 없어서 힘들고, 늙어서는 확실한 것밖에 없어서 괴롭다. 확실한 게 거의 없는데도 젊은이는 제한된 선택지 안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잘 모르는 채로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을 내려야만 한다.
무한대에 가까운 가능성이 오히려 판단을 어렵게 하는데,
이렇게 내려진 결정들이 모여 확실성만 남아 있는, 더는 아무것도 바꿀 게 없는 미래가 된다. 청춘의 불안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 P137

"제가 작가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럴 때면 나는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물었다. 작가가 되고 싶으면 계속 쓰면 되고, 되고 싶지 않으면 안 쓰면 되지 않나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 가능성이 있다고 하시면 한번 열심히 해보려고요."
그 학생들은 ‘하고 싶음‘이 아니라 ‘할 수 있음‘에 더 관심이 많았다. ‘하면 된다‘가 아니라 ‘되면 한다‘의 마음. 나는 누구에게도 답을 주지 않았다. 답을 몰랐고, 알아도 줄 수 없었다. - P141

사공 없는 나룻배가 기슭에 닿듯 살다보면 도달하게 되는 어딘가. 그게 미래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온다. 먼 미래에 도달하면 모두가 하는 일이 있다.
결말에 맞춰 과거의 서사를 다시 쓰는 것이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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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아내가 엄마의 말에 매번 다시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은 그 ‘앎‘의 정확성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부모에게 부여한 앎의 권력(자식의 ‘명목상의‘
저자라는 권위)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엄마는 자식을 정말로 잘 알았던 것이 아니라 ‘자식을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권력‘, 즉 다른 사람이 귀를 기울이게 만들 힘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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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언젠가는 누군가를 실망시킨다는 것은 마치 우주의 모든 물체가 중력에 이끌리는 것만큼이나 자명하며, 그걸 받아들인다고 세상이 끝나지도 않는다.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은 (부모를
포함해 그 누구라도) 그 사람이 나에게 해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리해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기대와 실망이 뱅글뱅글 돌며 함께 추는 왈츠와 닮았다. 기대가 한 발 앞으로 나오면 실망이 한 발 뒤로 물러나고 실망이 오른쪽으로 돌면 기대도 함께 돈다. 기대의 동작이 크면 실망의 동작도 커지고 기대의 스텝이 작으면 실망의 스텝도 작다. 큰 실망을 피하기 위해 조금만 기대하는 것이 안전하겠지만 과연 그 춤이 보기에도 좋을까?  - P61

인간은 보통 한 해에 할 수 있는 일은 과대평가하고, 십 년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과소평가한다는 말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새해에 세운 그 거창한 계획들을 완수하기에 열두 달은 너무 짧다. 그러나 십 년은 무엇이든 일단 시작해서 띄엄띄엄 해나가면 어느 정도는 그럭저럭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십 년이 여럿 쌓였다. 할 줄 아는 것만 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도 변했다. - P77

몸속에 분노도 많았다. 말과 몸으로 여기저기서 싸웠다.
지금은 조용히 물러설 때가 많다. 좋게 말하면 성숙했고,
삐딱하게 보자면 노회하고 비겁해졌다. 벌이지 않았어도 될 부끄러운 싸움들을 지금도 가끔 떠올린다. 다 웃어넘겼어도 될 일인데 그때의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 모든 싸움은 얄팍한 정의감이 부추겼다. - P73

인간은 평생에 걸쳐 테세우스의 배보다도 더 큰 변화를 겪는다. 이십대의 나는 길에서 마주쳐도 지금의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나 역시 십대의 나를 그냥 지나칠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 사람이 과거의 그 사람과 같은 존재라고 애써 믿으며 살아간다. 변하지 않은 어떤 것들을 애써 찾아내, 사람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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