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도 생명권, 자유권, 문화와 정치에 관여할 권리를 지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려는 싸움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이 싸움은 가끔은 퍽 암울하다. 내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쓰면서 스스로도 놀란 점은, 처음에는 재미난 일화로 시작한 글이 결국에는 강간과 살인을 이야기하면서 끝났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여성이 사회에서 겪는 사소한 괴로움, 폭력으로 강요된 침묵, 그리고 폭력에 의한 죽음이 모두 하나로 이어진 연속선상의 현상들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깨달았다(그리고 우리가 여성 혐오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더 잘 이해하려면 힘의 오용을 총체적으로 바라보아야만 한다. 가정폭력을 강간, 살인, 성희롱, 협박과 별개의 문제로 취급하지 말아야 하고, 온라인과 가정과 직장과 거리를 전부 아울러야 한다. 그렇게 전체를 보아야만 패턴이 뚜렷해진다). - 31, 32쪽
그 남자는 자신이 고른 피해자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자유도 없지만 자신에게는 그녀를 통제하고 처벌할 권리가 있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폭력은 무엇보다도 일단 권위주의적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폭력은 내게 상대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살인은 그런 권위주의의 극단적 형태다. 살인자는 당신이 죽을지 살지 결정할 권리는 자신에게 있다고 살인을 통해서 단언하는 셈이다. 이것은 타인을 통제하는 궁극의 수단이다. 설령 당신이 고분고분하게 굴더라도 아무 소용없을지 모르는데, 통제의 욕망은 순종으로는 좀처럼 달래기 힘든 격렬한 분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행위의 이면에 모종의 두려움과 취약함이 깔려 있을지라도, 아무튼 그런 행위는 타인에게 괴로움을, 더 나아가 죽음을 부여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 의식이 범인도 피해자도 비참하게 만든다. - 45, 46쪽
우리가 이미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를, 내가 어떻게 들려줘야 좋을까? 그녀의 이름은 아프리카였다. 그의 이름은 프랑스였다. 그는 그녀를 식민지로 삼았고, 착취했고, 입을 막았으며, 그런 일을 그만두기로 한 때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뒤에도, 가령 코트디부아르 같은 곳에서 그녀의 사정을 결정하는 일에 위세를 부렸다. 여담이지만, 그가 그녀에게 그런 이름을 준 것은 그녀에게서 나오는 수출품 때문이지 그녀의 정체성 때문은 아니었다(코트디부아르 Cote d`Ivoire는 프랑스어로 `상아 해변`을 뜻한다. - 67쪽
그녀의 이름은 아시아였다. 그의 이름은 유럽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침묵이었다. 그의 이름은 권력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가난이었다. 그의 이름은 풍요였다. 그녀의 이름은 그녀의 것이었지만, 그녀가 과연 무엇을 소유했던가? 그의 이름은 그의 것이었고, 그는 그녀까지 포함해 모든 것을 그의 소유로 여겼다. 그리고 그녀의 의향을 묻거나 뒷일을 염려하지 않고도 그녀를 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67, 68쪽
진화생물학자들이 자주 말하는 공리가 있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 한 생물체의 배아가 발달하는 과정은 그 종이 진화해온 과정을 반복한다는 뜻이다. 총재의 성폭행 혐의라는 개체발생은 IMF의 계통발생을 반영한 것일까? 아닌 게 아니라, 그 조직은 미국의 경제적 비전을 나머지 세계에 부과하려 한 악명 높은 브레텐우즈 회의 결과 중 하나로서 제2차 세계대전 말에 만들어지지 않았던가. IMF는 원래 각국의 개발을 돕기 위해서 돈을 빌려주는 기관으로 설립되었지만, 1980년대에는 이미 자유무역주의와 자유시장주의 이데올로기를 추종하는 조직이 되고 말았다. IMF는 대출금을 볼모로 삼아서 온 남반구 국가들의 경제와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 71쪽
그녀의 이름은 아프리카였다. 그의 이름은 IMF였다. 그는 그녀에게 올가미를 걸어 약탈당하게 했고, 보건 써비스를 폐지하게 했고, 굶주리게 했다. 자신의 친구들을 배불리기 위해서 그녀에게 쓰레기를 투척했다. 그녀의 이름은 남반구였다. 그의 이름은 워싱턴 컨센서스(1990년대 미국이 중남미 국가들에게 제시한 자유무역주의에 기반한 경제정책의 통칭)였다. 그러나 그의 연승은 끝나가고 있었고, 그녀의 운은 상승하고 있었다. - 72쪽
IMF는 포식세력이었다. 개발도상국가들의 문호를 열어젖혀 부유한 북반구와 강력한 초국적기업들의 경제공세를 겪게끔 만들었다. IMF는 포주였다. 어쩌면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1999년 씨애틀의 반기업 시위를 계기로 세계적 운동이 점화된 이래 IMF에 저항하는 대중봉기가 일어났고(1999년 씨애틀에서 열릴 예정이던 세계무역기구 각료회의의 저지를 목표로 5만명의 시위대가 벌인 반세계화 시위, 이른바 ‘씨애틀 전투’를 가리킨다), 그런 세력이 라틴아메리카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 덕분에 앞으로 벌어질 모든 경제논쟁의 틀이 바뀌고 있으며, 경제와 전망에 관한 우리의 상상이 더 풍요로워지고 있다. - 73쪽
최근에 많은 미국인들은 ‘동성결혼’(same-sex marriage)이란 어색한 용어를 ‘평등결혼’(marriage equality)으로 바꾸었다. 원래 이 용어는 동성 커플도 이성 커플이 누리는 권리를 전부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렇지만 이 용어는 결혼이란 평등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라는 뜻도 될 수 있다. 전통적 결혼은 그렇지 않았다. 서구 역사에서 대부분의 기간에, 법은 결혼을 통해서 남편이 사실상 아내의 소유자가 되고 아내는 사실상 남편의 소유물이 된다고 규정했다. 혹은 남자가 주인이 되고 여자는 하인이나 노예가 된다고 규정했다. - 92쪽
그물을 짜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 세상을 창조하는 것,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것, 자신의 운명을 다스리는 것, 아버지들만이 아니라 할머니들을 호명하는 것, 직선만이 아니라 그물을 그리는 것, 청소부만이 아니라 제작자가 되는 것, 침묵당하지 않고 노래하는 것, 베일을 걷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내가 빨랫줄에 너는 현수막들이다. - 118쪽
미래는 어둡고, 나는 그것이 미래로서는 최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이 선언은 예사롭지 않다. 이 선언은 우리가 거짓된 점괘를 믿거나 울적한 정치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내러티브를 미래로 투사함으로써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바꿀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 선언은 어둠을 칭송하며 - ‘나는 ... 생각한다’ 부분이 암시하듯이 - 스스로의 선언에 대해서조차 기꺼이 불확실함을 인정한다. - 122쪽
사람들은 대부분 어둠을 두려워한다. 아이들의 경우에는 말 그대로 캄캄한 것을 두려워하고, 어른들의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모르는 것, 못 보는 것, 모호한 것이라는 어둠을 겁낸다. 그러나 무언가를 구별하고 규정하기 힘든 밤이란 한편으로는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다. 사물들이 합쳐지고, 변화하고, 매료되고, 흥분하고, 충만해지고, 사로잡히고, 풀려나고, 재생되는 시간이다. - 123쪽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무렵, 나는 아생에서의 생존법을 가르쳐주는 로런스 곤잘러스(Laurence Gonzales)의 책을 접었다가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문장을 발견했다. "계획은, 즉 미래의 기억은 현실이 자신에게 맞는지 시험 삼아 걸쳐본다." 무슨 뜻인가 하면, 그 두가지가 합치하지 않는 듯할 때 사람들은 현실이 주는 경고를 무시한 채 계획에 매달림으로써 위험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르는 것의 어둠, 희미하게만 보이는 공간을 겁낸 나머지 종종 감은 눈의 어둠, 자각하지 못함의 어둠을 선택한다. - 123쪽
손택 또한 우리에게 어둠을, 미지를, 불가지(不可知)를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이미지에 현혹되어 다 이해한다고 믿어버리거나 스스로가 고통에 무감각해지도록 내버려두지 말라고 말한다. 그녀는 앎이 감정을 일깨우기도 하지만 마비시키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가 그 모순을 해소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우리에게 계속 사진을 봐도 좋다고 허락하고, 사진 속 피사체들에게는 그들이 겪는 경험의 불가지성을 타인들로부터 인정받을 권리를 허락한다. 그리고 스스로도 인정한다. 우리가 비록 완전히 헤아리진 못해도 여전히 마음을 쓸 수 있다는 것을. - 129쪽
‘해석에 반대한다’(Against Interpretation)라는 제목의 글로 공적인 경력을 시작한 손택은 불확정성을 찬양하는 사제였다. 손택은 그 글의 첫머리에서 "예술에 대한 최조의 경험은 틀림없이 주술적이고 마술적이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뒤에서는 "오늘날 해석은 대체로 반동적이고 억압적인 작업이 되었다. 해석은 지성이 세상에 가하는 복수다. 해석하는 것은 빈약하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물론 그녀는 이후 해석하는 삶을 살았으며, 최고의 순간에는 무조건적인 분류와 지나친 단순화와 손쉬운 결론에 저항하는 데 있어서 울프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 130쪽
내게 희망의 근거는 단순하다. 우리는 다음에 벌어질 일을 모른다는 것, 세상에는 있을 법하지 않은 일과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꽤 자주 벌어진다는 것. 비공식적인 세계사가 이미 보여주었듯이, 헌신하는 개인들과 대중운동들이 역사를 만들 수 있으며 만들고 있다는 것. 우리가 언제 어떻게 이길지, 얼마나 걸릴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말이다. 절망은 확실성의 한 형태다. 미래가 현재와 거의 같거나 현재보다 쇠락하리라고 믿는 확실성이다. 곤잘러스의 공감되는 표현을 빌려서 말하자면, 절망은 미래에 대한 확실한 기억이다. 마찬가지로 낙관도 앞으로 벌어질 일을 확신한다. 절망과 낙관은 둘 다 행동하지 않을 근거로 작용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그런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 현실이 반드시 우리 계획과 일치하진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야말로 희망일 수가 있다. 창조력과 마찬가지로, 희망은 낭만파 시인 존 키츠(John Keats)가 말한 이른바 소극적 능력(negative capability)에서 생겨날 수 있다. - 134쪽
언젠가 하와이의 어느 식물학자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새로운 종을 찾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는데, 그가 밝힌 요령은 밀림에서 길을 잃는 것, 자신이 아는 지식과 방법을 넘어서는 것, 경험이 지식을 압도하도록 허락하는 것, 계획이 아니라 현실을 택하는 것이라고 했다. - 136쪽
조사에 따르면, 많은 경우 강간의 동기는 남자가 여자의 욕망과는 무관하게 자신이 그녀와 섹스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마음이었다. 한마디로 남자의 권리가 여자의 권리에 앞선다는 생각, 혹은 여자에게는 권리가 없다는 생각이다. 이렇듯 여자가 남자에게 섹스를 빚지고 있다는 생각은 어디에나 퍼져 있다. 내가 어렸을 때처럼 요즘도 여자들은 우리의 어떤 행동이, 어떤 말이, 옷차림이, 우리의 모습 자체가, 우리가 여성이라는 사실 자체가 남자에게 욕망을 불러 일으켰으므로 응당 그 욕구를 만족시켜주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우리가 그들에게 빚을 졌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우리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 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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