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의 이런 일들이 세월호 문제를 넘어서지 못한 업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세월호는 한국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냈다. 국가의 무능과 자본의 탐욕을 자각하고, 반성하고, 개혁해야 할 시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계기를 날려버렸다. 바닷속 객실에 갇혔던 아이들을 `사고 희생자`의 틀에 또 한 번 가뒀고, 세월호를 사회 갈등의 먹잇감으로 던졌다. 2015년의 사건들은 세월호와 인과(因果)의 끈으로 묶여 있진 않더라도 최소한 겹쳐져 있다. 부끄러움의 자정(自淨) 능력을 상실한 사회에서 항용 나타나는 현상이요, 징후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자기기만의 시스템을 더 높이 쌓아올리는 것인지 모른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를 쓸 수 있느냐"는 철학자의 물음은 세월호 이후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살아남은 자들은 하루하루 비관론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세월호를 다시 대면하고 극복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 언저리를 맴돌 뿐이라고, 나는 믿는다. - 24, 25면
시스템은 중요하다. 다만 시스템이 우릴 구조해줄 것이라 믿는 건 오산이다. 착각이다. 우리를, 우리 아이들을 위기에서 구해줄 수 있는 건 선장, 해경, 장관, 총리, 대통령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몸과 마음을 바쳐 움직여줘야 생명을 건질 수 있다. 스펙이 화려하고, 신망이 높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진정성과 용기, 열정과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 28쪽
그해 6월 우린 서둘러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자기 자리로의 복귀를 조금 미루고 한국 사회, 한국 정치의 미래를 놓고 토론을 벌였어야 했다. 민주주의를 어떻게 발전시킬지 묻고 답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상식과 일상을 만들어가야 했다. 권력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것을, 어떤 이유로도 국가기관이 시민들의 여론에 검은 손을 뻗으려 해선 안 된다는 것을 서로의 가슴에 새겨 넣어야 했다. 입으론 노동자 농민을 말하면서도 다들 자기 앞의 생(生)에 초조해했다. 구호 소리만 높았을 뿐 생각을 나누지 않았다. 어쩌면 그저하지 못함에 보복당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 52쪽
공권력이란 무엇일까. 법률용어사전을 찾아봤다. `국가나 공공단체가 국민에 대하여 우월한 주체로서 명령하거나 강제하는 권력.` 국가기관을 위에, 국민을 아래에 두는 개념이다. 옛날 기사들을 검색해보면 공권력이 부쩍 많이 쓰인 때는 80년대였다. - 73, 74쪽
공권력이란 말은 착시 현상을 일으킨다. 법 원칙과 혼용되면서 어떤 방식이든 문제가 없는 듯한 착각에 빠뜨린다. 그 결과 강경 대응으로 치닫기 일쑤다. - 74쪽
나는 공권력이라는 말이 되도록 쓰이지 않았으면 한다. 국민이 정부에 위임한 건 권력이 아니다. 권한이다. 권한(權限)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공(公)이란 수식어도 부적절하다. 공이 무조건 사(私) 위에 있다는 발상은 권위주의 체제에서나 가능하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건 이른바 공권력이 과거만큼 `유능`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요즘 판사 검사 경찰은 87년 민주화의 세례를 받은 세대들이다. 그들의 손발은 영화 <변호인>의 시대처럼 착착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진짜 공권력이란 것이 있다면, 아니 있어야 한다면 다른 노력을 다한 다음에, 신중하게 등장하길 바란다. 먼저 투입돼야 할 것은 소통의 정신이다. 정부의 소통은 듣고 또 듣는 것이다. 작고 잊혀진 이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 존재를 증명해주는 것이다. - 75, 76쪽
대권은 과연 용어만의 문제일까. 정치권과 언론계, 나아가 우리 사회의 의식 수준을 반영하는 건 아닐까. 대통령이 되면 법의 울타리를 넘어 어마어마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고들 여긴다. 수퍼울트라 갑(甲)의 이미지다. 그 뒤를 검찰 권력, 국세청 권력, 공정위 권력이 따른다. 신문사 방송사도 언론 권력으로 행사해왔던 게 사실이다. 권력(權力)이란 말이 온당한지부터 보자. 권력은 개인이나 집단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이다. 이 단어는 헌법 1조에 단 한 번 등장한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반면에 권리가 미치는 범위 내지 한계를 뜻하는 권한(權限)은 헌법에 열한 번 되풀이된다. 권한 행사, 대통령 권한 대행, 정부의 권한, 행정 각부 간의 권한... 총구에선 권력이 나오지만 투표함에선 권한이 나올 뿐이다. 민주공화국이라면 대통령이라도 공식적으론 권한이라고 해야 맞다. 그럼에도 우리는 권력을 인격화하고 우상으로 받들며 그 앞에 대(大)라는 수식어까지 붙여주고 있다. - 177, 178쪽
대권의 마력(魔力)에 중독된 한국의 대통령들은 권좌에 안자 자기 뜻대로 세상을 바꾸려다 실패를 반복했다. `실세` 완장을 찬 측근들만 단물을 빨았다. 미국 대통령을 보라. 의회에서 법안 한 건을 통과시키기 위해, 의원들의 협력을 끌어내기 위해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그 옆을 지키는 건 측근이 아니라 참모다. 그래서 권력엔 부패가 따르지만 권한엔 책임이 따른다. 이것이 권력과 권한의 차이다. - 178, 179쪽
야당 의원으로 사는 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여당 의원을 하면 청와대나 정부를 비판하기 어렵다. 속 시원하게 말 한마디 하기도 쉽지 않다. 검찰 수사가 들어오면 꼼짝없이 조사를 받아야 한다. 그러느니 차라리 야당 의원을 하면 자유롭게 발언도 할 수 있ㄷ고, 비판도 할 수 있다. 검찰 수사에 대해선 `정치 탄압`이라고 반발하면 된다. 어젠다(Agenda)설정도 힘들지 않다. 새로운 정책을 내놓기보다 정부여당 정책을 비판하고, 실책을 물고 늘어지는 게 얼마나 편한가. 이런 상황에서 총선에서 이겨 과반을 확보하든가 대선에서 승리해 집권을 하게 된다면 부담감만 커지는 느낌이겠지. 그들 스스로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 187, 188쪽
사실 비주류 의식은 나쁜 게 아니다. 소외받는 약자,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대신 외치는 것이다. 아랫목에 안주하는 주류와 달리 찬바람 부는 광야에서 변혁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주류 의식이 매너리즘에 빠지면 책임지지 않는 습관이 생기고, 하나의 목적을 위해 뭉치기보다 작은 차이를 이유로 나뉘고, 전략을 놓고 싸우기보다 전술을 두고 다투게 된다. - 188쪽
간통죄 위헌이 진정 역사적 사건이라면 시대를 꿰뚫는 재판관들의 고민과 통찰력을 보여줘야 했다. 그것이 우리의 법치주의를 풍요롭게 하고 성숙시키는 길 아닐까. 철학이 빠진 결정문은 간통죄 위헌에 콘돔 제조사 주가가 급등했다는 소식만큼이나 씁쓸할 뿐이다. - 252쪽
진실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한 사회가 진실을 끝까지 가리지 않고 `편한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정의에 반한다. 판사는 여론에 휘둘려서도, 재판 원칙 뒤에 숨어서도 안 된다. 끊임없이 불편해야 하고, 그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그것이 헌법이 판사의 신분을 보장해주는 이유다. - 257쪽
원세훈 판결만이 아니다. 쌍용차 정리해고, 전교조 법외노조, 과거사 국가배상... 사회적 이슈가 됐던 주요 사건 결론이 대법원에서 뒤집히고 있다. 20년차 이상인 고등법원 부장판사들 판단이 틀렸다는 얘기인데, 그러면 어떤 부분들이 문제인지 명쾌하게 지적하고 설득하려는 자세를 보이는 게 하급심에 대한 예의다. 최고법원의 존재감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런 줄 알고 따르라"며 `판사동일체`를 요구하는 식이어선 곤란하다. "우리가 정의를 실현하는 것만큼이나 사회구성원들이 정의가 실현되고 있다고 믿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23일(2015년 7월) `성공보수 무효` 판결문에 대법관들이 덧붙인 말이다. 대법원에 묻는다. 정녕 `정의가 실현되고 있다고 믿을 수 있게` 재판을 하고 있는가. 보이는 것은 보이는 대로 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 268, 269쪽
제가 생각하는 민주적 기본질서의 또 다른 이름은 `설득`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상대편을 설득하려는 노력입니다. 앞으로 여러분의 결정문에 담길 말들이 국민들을 설득하고 정당이 왜 존재하는지 일깨워주는 민주주의의 시금석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 277쪽
강력범죄만큼은 보수 진보의 진영 논리와 분리해야 한다. 권위주의 시대 인권 탄압에 대한 반작용으로 범죄자 인권이 과잉 보호돼온 게 사실이다. 이젠 피해자 인권과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등교하던 여자아이가 시신으로 돌아오고, 주부가 집 안에서 무참하게 살해되는 상황을 계속 방치할 수 없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들 한다. 어디까지나 죄는 죄로 미워해야 한다. 그러려면 소외된 이들을 뒷받침하는 노력 못지않게 범죄에 대한 엄정한 법 집행이 병행돼야 한다. 이 사회의 악인들에게 죗값은 반드시 치르게 하겠다는 신호를 보낼 때다. 사형수가 자전 소설을 출간하겠다고 하는 나라는 정상이 아니다. 누가 그런 나라에 살고 싶겠는가. - 310쪽
정의와 취향은 반대쪽에 있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 정의로운 사회는 다른 이의 취향을 철저히 존중해주는 곳일 것이다. `감자의 친구들은 연애를 하지`처럼 자신의 취향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공간과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같은 도발적인 책이 많이 나올 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를 수 있다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청교도적인 사회처럼 위험한 사회는 없다. - 345쪽
새로운 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자신을 오롯이 그 앞에 세우고, 원점에서부터 고민을 다시 시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제의 나, 어제의 우리를 버릴 수 있다는 결기로 당면 과제를 직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인의 배신은 배신 그 자체를 문제 삼을 게 아니라 무엇을 위한 배신인지, 무엇을 향한 배신인지를 따져야 한다.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야 한다"고 말하자 여당 원내대표가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두 살마이 전화기로 주고받아야 할 말을 왜 TV 카메라 앞에서 마이크 잡고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아직도 대통령의 감정(배신감), 원내대표의 감정(미안함)이 국정의 최대 이슈가 되는 시대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 370, 371쪽
만델라와 ANC가 승리했던 원인은 `원칙이 우릴 삼킬지라도 그 원칙을 지킨다`는 정신의 힘에 있었던 것 아닐까요. 삭스는 재판관 취임 후 과거 폭탄 테러에 연루됐던 퇴역 군인에게 악수를 청합니다. 그가 진상 규명에 협조했기 때문입니다. 민주화와 정의를 향한 여정은 오른팔을 없앤 자에게 왼손을 내미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오직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 382, 383쪽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다. 이기는 게 정의다.` 이 지랄 같은 상식을 깨는 건 슈퍼 히어로 한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한 걸음씩 나아가면서 같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어깨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우린 결국 서로에게 정의를 부탁해야 하는 존재다. - 4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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