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선의에 가득찬 말과 점잖은 매너가 지루하고 못 견딜 일이었지만 나는 잘 참아낼 수 있었다. 저들의 외로움과 불안을 조금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양지를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인생에서 모처럼 이루기 시작한 이 작고 위태로운 성공들을 더욱 탄탄히 만들고 좀더 키워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온 길이나 최승권의 길이 별로 다르지 않다고도 생각했다. 다만 내가 세상에 대하여 좀더 냉소적이었을 뿐이다. - 91, 92쪽
모든 것은 꿈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욕망의 꿈이 이어지다가 현실적인 것처럼 실체가 나타나고 그것마저 꿈이 되어 흘러가버린다. 저 벌판에 띄엄띄엄 서 있던 시멘트와 철골로 이루어진 건물들은 예전과 달리 게임기 속의 가상세계 같다. - 95, 96쪽
흔히들 첫사랑은 만나고 나면 후회한다는데 피차에 늙고 볼품없어져 만난다 해도 내가 한 짓을 생각하면 상대방에게 실망할 처지가 아니다. 우리가 살았던 달골이 지상에서 이미 사라진 기억 속의 박제에 지나지 않듯이, 한번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 102 쪽
젊었을 때에는 그렇게 냉소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진 않았다. 잘못된 것에 저항하는 이들을 이해하면서도 참아야 한다고 다짐하던 자제력을 통하여 나는 자신을 용서할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은 일종의 습관적인 체념이 되었고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차갑게 자신과 주위를 바라보는 습성이 생겨났다. 그것을 성숙한 태도라고 여겼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숨가쁜 가난에서 한숨 돌리게 되었던 때인 팔십년대를 거치면서 이 좌절과 체념은 일상이 되었고, 작은 상처에는 굳은살이 박여버렸다. 발가락의 티눈이 걔속 불편하다면 어떻게든 뽑아내야 했는데. 이제는 몸의 일부분이 되어버렸다. 어쩌다가 약간의 이질감이 양말 속에서 간신히 자각될 뿐. - 112쪽
개인의 회한과 사회의 회한은 함께 흔적을 남기지만, 겪을 때에는 그것이 원래 한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지난 세대의 과거는 업보가 되어 젊은 세대의 현재를 이루었다. 어려운 시절이 오면서 우리는 짅작부터 되돌아보아야 했었다. - 1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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