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읽을 것인가 - '모든 읽기'에 최고의 지침서
고영성 지음 / 스마트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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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적어도 책을 읽을 수 있는 육체적 정신적 상태가 유지될 때까지는 독서법에 대한 고민은 끊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책을 읽긴 읽는데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지금 내 방식이 적절한가, 이것 말고 다른 방식이 있다면 어떠한 것이 있는가. 확연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쩌면 책을 선택하고, 읽고, 책장을 덮는 내내 이런 생각들은 내 머릿속에 머물러 있을지 모른다.


처음엔 책만 많이 읽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리지 않고 이 책 저 책을 사고, 읽고, 모았다. 그러다가 내가 제대로 읽지도 않고 방치해놓은 책들이 책장에 꽂혀 있는 것을 보고서는 이내 방식을 바꾸었다. 책을 선별해서 사는 것이었다. 철학, 미술, 생태와 환경 중심의 책들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뭔가 부족했다. 책을 읽기는 읽는데, 나중에 돌아보면 책의 제목과 저자는 기억이 나는데, 내가 그 책을 통해 얻은 것이 무엇인지를 되새기기 힘들었다. 그래서 책에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적어도 한 권 당 한 문장은 남기자는 마음으로. 그러다가 어느덧 욕심이 생겨 바로 그 순간 공감했던 문장, 읽을 수록 멋진 문장, 새로운 깨달음을 준 문장, 언젠가 써먹을 것 같은 문장 등에 밑줄을 긋다보니 이 또한 길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밑줄 그은 문장이 많을 수록 그 책의 내용을 떠올릴 수 있는 여지도 많아져 기억에는 도움이 되었으나, 제대로 요약하거나 정리한 것도 아니고 내 생각을 남기지 않는 것에도 뭔가 부족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독서법에 대한 방법들을 뇌과학, 인지심리학, 행동경제학 등의 이론을 통하여 잘 정리해놓은 책이다. 내가 앞서 고민했거나 시행했던 독서법들이 거의 다 담겨 있다. 그리고 앞으로 내 독서법을 어떻게 개선해야 할 지에 방향도 제시해준다.

'독아(獨我)'에서는 뇌의 가소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 성장형 사고방식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것이 독서임을 주장한다. '다독(多讀)'에서는 독서라는 어려운 행동이 뇌에 적합하지 않은 힘든 일이어서 독서에 실패하는 일이 많다는 점과 초보자는 우선 많은 책들을 읽을 수 있는 환경에 자신을 묶어 놓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한다. 또한 다독을 위해서는 특정 분야의 책들을 묶어 읽는 계독(系讀)을 제안한다. '남독(濫讀)'에서는 경계를 넘나드는 독서를 통하여 낯선 생각을 접하고 이를 기존의 생각과 연결하여 생각의 외연을 확장할 것을 권한다. 제노비스 사건을 통하여 하나의 사건에 대한 전문가들의 해석이 낯선 시각에 의하여 어떻게 수정되고 재정리 되는지를 보여준다. '만독(慢讀)'에서는 아이들의 독서는 많은 양을 다그치는 것보다 느리게 시작하여 자세히 읽고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알려주며, '관독(觀讀)'에서는 관점을 취하는 독서를 제시한다. 이를테면 책을 읽고 서평을 쓰려면 책의 내용도 정리되지 않고 글도 잘 안써지는데, 서평을 쓰기 위해 책을 읽으면 각 챕터와 내용에 집중하게 되고 자신의 관점을 지키며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재독(再讀)'을 통한 기억의 환원, '필독(筆讀)'을 통한 글쓰기의 준비, '낭독(朗讀)'을 통한 퇴고, '난독(難讀)'의 극복 및 '엄독(奄讀)'을 통한 읽는 행위의 초월과 독서의 자기화를 설명한다.

독서법으로 무슨 책 한권이 나올까라는 생각에 읽을 때는 쉬웠지만, 열거해보니 이 정도로 다양한 독서방법과 단계가 있다는 점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독서법을 제시하는 다른 책들에 비하여 '나는 이렇게 읽었다'라는 류의 자랑이나 '이렇게 읽어라' 따위의 강권이 없어서 (물론 최상의 경지로 '엄독'을 염두하고 있지만) 이 책을 읽는 독자 자신의 상황에 맞는 독서법을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우리의 뇌는 가소성이 있다. 무언가를 열심히 하면, 뇌가 그 방향대로 해부학적으로 변한다. 뇌의 가소성은 우리 모두 자신을 성장형 자아로 인식할 수 있는 생물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정체성은 바닥에 검게 굳어 딱 달라붙은 껌딱지 같은 것이 아니다. 조지 버나드 쇼가 "삶은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을 창조하는 과정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정체성이라는 불변하는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인식하고 있는 정체성이 바로 본질이다. 인식이 변하면 본질도 바뀐다. - 44쪽

독서라는 과정은 또한 단순히 문자를 시각적으로 읽는 것만이 아니다. 독서는 인간의 정신활동 중에서 가장 복잡다단한 활동 중 하나이다(E. B. 휴이). 1980년대에 멀린 위트록 박사는 독서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하나의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 단어의 사전적 의미로 읽는데만 그치지 않고, 그 텍스트를 위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낸다. 텍스트를 읽으면서 자신의 지식, 경험에 얽힌 기억, 글로 씌어진 문장, 절과 단락 사이의 관계를 구축해 나감으로써 의미를 만들어 낸다."
이처럼 독서는 뇌의 다양한 정보원, 특히 시각과 청각, 언어와 개념 영역을 기억과 감정의 부분들과 연결하고 통합하는 매우 복잡한 과정이다. 그런데 이런 통합을 위해서는 뇌의 각 영역들이 최소한의 성숙도를 확보해야 한다. - 52쪽

남독은 우리에게 세 가지 변화를 준다. 남독을 하게 되면 당신은 까칠해지고(비판적 사고), 엉뚱해지며(창의적 인간), 겸손해질(세계의 확장) 것이다. - 94쪽

"오늘 예전에 읽었던 책을 들추어 보게 되는 것은 그것들이 사라져 버린 날에 대해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기록이기 때문이며,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거처와 연못의 그림자가 그 책장 위에 비치는 것이 보고 싶기 때문이다."
프루스트의 <독서에 관하여>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는 우리가 예전에 들추어 보았던 책을 다시 일게 되는 이유는 지나간 내 과거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 176쪽

낭독은 글을 제대로 검열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다. 눈으로 읽었을 때 보이지 않았던 결점들이 소리를 내어 읽었을 때 여지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휘는 적절한지, 문맥은 매끄러운지, 논리는 잘 맞는지, 낭독을 통해 제대로 확인할 수 있다. 유시민 또한 비슷한 말을 했다.
"어떻게 하면 잘못 쓴 글을 알아볼 수 있을까? 쉽고 간단한 방법이 있다. 텍스트를 소리 내어 읽어보는 것이다. 만약 입으로 소리 내어 읽기 어렵다면, 귀로 듣기에 좋지 않다면, 뜻을 파악하기 어렵다면 잘못 쓴 글이고 못나고 흉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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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복종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지음, 심영길 외 옮김 / 생각정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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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모두가 더 이상 노예가 되길 거부하는 순간, 이 굴욕적인 세상은 사라진다. 스스로 복종한 자, 그들은 독재자와 공범이다. 아무도 복종하지 않는다면, 독재자는 결코 그 어떤 권력도 발휘할 수 없다. 그가 지닌 모든 권력은 바로 자발적 복종을 바친 자들이 건네준 것이기 때문이다. 복종을 멈춰라. 그 순간 당신은 자유인이다. - 30쪽. 역자서문

독재자의 권력이란 그 권력에 종속된 다른 모든 이들이 그에게 건네준 힘일 뿐이다. 다른 모든 이들이 독재자를 참고 견디는 한, 그의 권력이 부리는 횡포는 계속될 것이다. 사람들이 독재자에게 저항하지 않더라도, 단지 견뎌내기를 멈추기만 해도, 독재자는 더 이상 그들에게 어떤 해악도 끼칠 수 없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대단한 힘을 가진 척하는 한 인간의 명성에 홀리거나 마법에 사로잡힌 듯 목이 눌린 채 비천하게 복종한다는 사실. 이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 분명하나 흔히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더 마음 아프고 놀라울 뿐이다. 독재자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는 혼자이고, 사랑받을 만한 어떤 장점도 지니지 않았다. 그는 민중들에게 비인간적이고 잔혹할 뿐이다. - 36, 37쪽

다시 독재자에게로 말머리를 돌려보자. 그와 싸울 필요는 없다. 그를 패배시킬 필요도 없다. 독재자는 스스로 굴복한다. 민중이 독재자에 대한 굴종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독재자는 스스로 무너진다. 그에게서 무엇을 빼앗을 필요도 없다. 단지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 된다. 나라가 그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 단지 자신의 이해에 반하는 짓만 안 하면 된다.
우리는 민중 스스로가 자신을 방치하고 비탄의 수렁에 빠지도록 놔두는 것을 종종 본다. 굴종을 멈추면 그것으로 일단락된다. 민중은 흔히 자발적으로 굴종을 택하고 스스로 자신의 목을 자른다. 노예가 될지 자유인이 될지를 선택하는 것은 민중 자신이다. 자유를 버리고 멍에를 짊어지며 잘 정비된 법률하에 권력의 보호 아래로 기어 들어가는 것은 동시에 근심과 압제, 불의 그리고 오직 독재자 한 사람만의 기쁨을 위해 살기를 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46, 47쪽

천부(天賦)의 권한인 자유를 되찾는 것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그것은 짐승에서 다시 인간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잇겠다. 만일 누군가가 자유를 되찾기 위해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나는 그에게 서두르지 말라고 할 것이다.
사실 나는 누군가가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큰 용맹심을 발휘할 것조차도 바라지 않는다. 그가 들어온 `자유로운 삶`이라는 의심스러운 희망을 실현하는 것보다 차라리 미천한 현재의 삶을 안전하게 누리면서 사는 편을 선호한다면, 나는 이 또한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를 얻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그것을 간절히 원하기만 하면 된다. 단지 그것을 원한다는 의지만이 필요하다는데, 이 단순한 희망만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자유인데, 그것을 너무 비싼 대가라고 부를 사람이 있을까? - 47, 48쪽

그대들 자신이 그대들 위에서 군림할 특권을 그에게 인정하지 않았다면, 그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그 많은 눈을 그는 어디서 구할 수 있었겠는가. 그대들 자신이 바로 그의 눈 역할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면 그대들을 가격하는 그 많은 팔을 그는 어디서 얻었겠는가. 그대들 자신이 그의 팔이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면 그대들의 마을을 짓밟는 발을 그는 어디서 구했겠는가. 그대들 자신이 그의 발이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면, 그대들 스스로가 그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는 무슨 힘으로 그대들을 지배할 수 있었겠는가?
그대들이 그를 용인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가 감히 그대들에게 달려들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겠는가. - 52, 53쪽

나는 그대들이 독재자를 밀어내고 흔들어버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를 더 이상 지지하지 않기를 원할 뿐이다. 그때 그대들은 디딤돌을 뽑아낸 거대한 동상처럼 자신의 무게로 무너져 내려 산산조각 나는 독재자의 꼴을 보게 될 것이다. - 54쪽

우리는 여기서 자발적 복종의 일차적 근거가 습관이란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마치 말이 길드는 과정과 같다. 말에 재갈을 채우면 처음에는 재갈을 물어뜯다가 나중에는 익숙해져 재갈을 갖고 장난질한다. 말에 안장을 얹으면 처음에는 격렬하게 반항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신을 짓누르는 무거운 장비와 장신구를 뽐낸다. - 81쪽

반듯한 오성과 맑은 정신을 지닌 이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발치 앞만을 바라보는 데 만족하지 않고, 이들은 사안의 전후를 살피는 데 주의를 기울이며, 현재를 판단하고 미래를 통찰하기 위해 과거를 떠올린다. 정돈된 두뇌의 소유자는 탐구와 지식으로 사고의 힘을 더욱 연마한다. 자유가 완전히 사라져 세상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을 때조차 이들은 자유를 상상하고 정신 속에서 자유를 느끼며 자유의 맛을 음미할 수 있어 아무리 잘 포장해서 들이대도 굴종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 83쪽

프랑스의 질서가 두려움 때문에 신중하고, 재산 모으기에만 정신이 팔려 타인에 대해 무심한 사람들의 질서라면, 그것은 최악의 무질서다. 무관심은 모든 불의를 허락하기 때문이다. 균형과 화합, 즉 평등과 우애가 없는 질서는 질서가 아니다.
사회적 질서란 통치 세력과 피통치 세력(시민) 사이에 균형관계가 성립되어야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한 균형관계의 성립은 보다 고차원의 원칙이 있어야만 이루어진다. 이 원칙이 바로 정의다. 정의 없는 질서는 질서가 아니다. 민중의 이상적 질서는 정부와 시민 사이에 갈등이 없는 사회에서 사는 것이다. 그것이 행복한 사회다.
질서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현실의 권력층은 항상 그들 세력의 욕구를 강요하고 만족시키기 위해 질서를 주장한다. 문제의 앞뒤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통치하기 위해 질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의미 있는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통치력을 동원해야 한다. 질서가 정의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질서에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1944년 10월 12일 자 논설 - 148, 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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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 내 삶의 주인이 되는 문화심리학
김정운 글.그림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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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전 교수, 곧 '화백'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의 책은 거의 다 사서 읽는 편이다. 


우선 그의 글은 읽기 쉽고 편하다. 그렇다고 해서 글의 수준이 낮은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편하게 계단 하나를 올라선 느낌이다. (읽기 쉽게 쓴 글은 수준이 낮을 것이라는 편견은 하루 빨리 사라져야 한다.) 그가 가끔 글에서 괄호까지 쳐가며 깨알 같은 자랑을 하듯, 어려운 심리학적 개념을 그처럼 쉽게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은 또 없을지 모른다. 

게다가 그의 글은 재미있다. 한번도 만나본 적은 없지만, 그의 글에는 어쩌면 평소에 그대로 말할 것만 같은 어투가 녹아 있는 것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마치 말을 하듯 써내려간 그의 글은 그가 할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든다.


더욱이 그의 글은 솔직하다. 내 주변의 50대들 중에서 자신을 '아저씨'로 인정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억지스럽게 자신을 보다 젊은 범주로 꾸역꾸역 밀어 넣거나 (정말 꼰대는) 자기를 저너머 60대쯤으로 동일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김정운은 자신이 대한민국 50대의 소심하고 성질머리 더러운 아저씨임을 인정하며 글을 쓴다. 때문에 그의 글에는 무수한 공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며 그를 좋아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생각한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정년이 보장된 대학교수직을 연금 수령을 위한 재직기간 전에 때려쳤다는 멋(?) 때문이 아니다. 갑작스럽게 일본으로 건너가 그림을 배우고는 성인만화를 그리고 싶다던 괴짜 같은 면목때문이 아니다. 누구보다 자신을 알고, 내면의 구체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저자들은 독자보다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며 이야기를 하면서도 한번도 독자의 자리에 서질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의 언어는 무상하고 비현실적이다. 몸으로 겪어내지 않은 언어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정운은 다르다. 그는 이미 경험한 것들을 말하고 쓴다. 그래서인지 그가 말하는 구체성을 기반으로 하는 '행복론'에는 절로 공감이 간다.


외로움은 그저 견디는 겁니다. 외로워야 성찰이 가능합니다. 고독에 익숙해져야 타인과의 진정한 상호작용이 가능합니다. `나 자신과의 대화인 성찰`과 `타인과의 상호작용`이 가지는 심리학적 구조가 같기 때문입니다. 외로움에 익숙해야 외롭지 않게 되는 겁니다. 외로움의 역설입니다. - 8쪽

서구의 근대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까지 나누면 세상의 모든 구성 원리가 설명될 것이라는 환상에서 출발한다. 자연과학에서는 모든 물질의 가장 최소 단위인 `원자(atom)`를 생각해낸다. `atom`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다`는 뜻의 그리스어 `atomus`에서 나온 단어다. 자연과학적 세계관에 따라 인간 사회도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피부를 통해 바깥세상과 구별되는 마지막 단위인 개인을 만들어낸다.
심리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부분의 합은 전체가 아니다. 각 단위들이 전체의 한 부분이 될 때는 최소 단위의 성질로는 더 이상 설명되지 않는다. 자연과학도 마찬가지다. 가장 작은 부분이라고 여겨졌던 원자의 세계도 양자역학이 시작되면서 `환상`이었음이 밝혀진다.
심리학도 마찬가지다. 개인을 단위로 인간의 심리는 설명되지 않는다. 근대심리학의 원자주의는 막힌 길이다. 각 개인들이 만나는 `상호성`이 사회와 문화, 그리고 인간 심리를 분석하는 기본 단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문화심리학의 출발점이다. - 28, 29쪽

여자는 남자를 위해 화장하지 않는다. 여자에게 화장은 연기자의 분장과 마찬가지다. 주어진 사회적 맥락에 맞춰 화장의 톤을 결정하고, 입을 옷에 따라 색조를 결정한다. 남자는 그 맥락에 포함되는 작은 요소 하나에 불과하다. - 36쪽

수용소나 정신병원의 삶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무대 뒤, 즉 배후 공간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도대체 숨을 공간이 없다. - 37쪽

시간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달력을 만들었다. 하루를 24시간으로 쪼개고, 일주일을 7일로 나누고, 한 달은 4주로 분리하고, 일 년은 열두달로 분해했다. 그렇게 시간을 각 단위로 나누면 하루, 일주일, 한 달, 한 해는 매번 반복된다. 반복되는 것은 하나도 안 무섭다. 그래서 한 해가 시작될 때마다 우리는 담배도 끊고, 살도 빼기로 결심하는 거다. 지난해를 아무리 망쳤다고 해도 새로 시작할 수 있어 즐겁다. - 45쪽

고령화 사회의 근본 문제는 `연금`이 아니다. 은퇴한 이들의 `아이덴티티(identity)`다.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확인할 방법을 상실한 이들에게 남겨진 30여 년의 시간은 불안 그 자체다. 불안은 원래 미래가 불확실한 젊은이들의 정서다. 경험과 경륜의 노인들이 불안해하는 젊은이들을 위로할 때 한 사회는 균형을 잡으며 건강하게 버틸 수 있는 거다. 그러나 오늘날 아무런 대책 없이 수십 년을 견뎌야 하는 `젊은 노인들`이 갈수록 늘어난다.

문제는, 불안하면 세상을 자꾸 좁혀서 본다는 사실이다. - 65쪽

세상일에는 접근동기로 접근해야 하는 일과 회피동기로 접근해야 하는 일이 따로 있다. 일의 결과가 바로 나타나는 일은 회피동기(`그렇게 하면 손해를 본다`)로 설명해야 유리하고, 결과가 나중에 나오는 것일수록 접근동기(`그렇게 해야 성공한다`)로 설명해야 유리하다고 히긴스는 주장한다. - 69쪽

접근동기는 상상력을 자극하고, 회피동기는 일을 치밀하게 한다. 창조적 능력이 발휘되려면 긍정적 정서를 동반하는 접근동기를 자극해야 한다. 놀듯이 일해야 창의성이 발휘된다는 이야기다. 반대로 치밀함과 정확성을 요구하는 일은 회피동기를 자극해야 한다.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큰 사고가 터진다`와 같이 위협을 주는 방식이다. 한국에서는 왜 애플 같은 회사가 나오지 않는가를 접근동기-회피동기로 설명하면 아주 잘 이해된다. - 70쪽

김수영의 시가 가진 저항과 진보의 신념이 옳다고 박인환을 현실을 외면한 철없는 서구 추종자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 박인환의 시가 아름답다고 김수영의 시가 가진 경직성을 비난해서도 안 된다. 김수여의 시만 읽어야 한다는 주장은 바인환의 시만이 진짜라고 하는 주장만큼이나 황당하다. 문학과 예술은 산만하고 다양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다. 아무튼 한 가지만 옳다는 확신에 찬 이들이 제일 무서운 거다. - 82쪽

삶도 마찬가지다. 내가 원하는 것이 구체적이지 않으면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돈은 아주 막연한거다. 그 돈으로 뭘하고 싶은지 분명하지 않으면 돈은 재앙이다. 사회적 지위도 마찬가지다. 그 지위를 가지고 내가 뭘 하고 싶은 것인지 분명치 않으니 다른 사람들 굴복시키는 헛된 권력만 탐하게 된다. - 112쪽

행복하려면 하루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에서 구체적으로 기분이 좋아야 한다. - 114쪽

난무하는 자기계발서의 추상적 언어로 아무리 자기최면을 걸어도, 자신의 구체적 생활 언어로 번역할 수 없다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행복뿐만이 아니다. 삶을 지탱하는 모든 가치와 이념이 그렇다. 추상적 언어가 현실에서 제대로 기능하려면 구체적 어휘로 번역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되었다 할지라도, 내 삶에서 구체화될 수 없다면 그건 순 가짜다. 거짓말이라는 이야기다. - 114쪽

숟가락을 잡으면 뜨게 되고, 포크를 잡으면 찌르게 된다. 도구가 행위를 규정한다는 말이다. 도구는 의식을 규정하기도 한다. 아주 편하고 기분 좋게 앉을 수 있는, 뒤로 자빠지는 의자로 규정되는 의식이란 바로 `소통과 관용`이다. - 123쪽

논리적 설득보다는 공감을 이끌어내는 정서적 설득이 훨씬 더 잘 작동하는 이유도 바로 이 감정이입 능력 때문이다. 논리는 인지적 과정이다. 설득의 대상과 주체가 분명하게 나뉜다. 웬만큼 강력한 권위와 논리가 아니라면 상대방을 `굴복`시킬 수 없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타인을 설득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논리적으로 굴복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옳은 이야기라도 논리적 굴복을 요구하면 상대방은 반드시 저항하게 되어 있다. `그래, 당신 말 다 맞아. 그래서?`하는 것이다. 논리는 이해했지만 절대 승복할 마음이 없다. 그러나 감정이입에 기초한 정서적 설득은 강력하다. 상대방의 정서적 반응을 이끌어내기만 하면 언제든 성공할 수 있다. 감정이입이란 `함께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함께` 느낀 것이기에 논리적 설명은 오히려 구차한 것이 된다. - 158쪽

금지는 사람을 좌절케 한다. 모든 종류의 금지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주체로서의 삶은 바로 끝난다. - 165쪽

시기심은 열등한 사람만의 감정이 아니다. 열등한 사람과 간격이 좁혀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우월한 사라의 시기심이 더 무섭다. `있는 사람이 더 한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감정을 독일의 `시기심 전문가(?)` 롤프 하우블(Rolf Haubl, 1951~)은 `간격시기심(Abstandneid)`이라고 정의한다. 한참 `아랫것`이 어느새 부쩍 자라 자기 자리를 치고 올라오는 것에 대한 윗사람의 불안이 적개심으로 변하는 것은 한순간이다. 프로이트가 수제자인 융의 급성장을 견디지 못해 자기 학파에서 쫓아내고, 평생 증오했던 경우가 바로 그렇다. - 174쪽

`내 편 - 네 편`의 이분법은 존재가 불안한 이들의 특징이다. 자신의 위치를 정하고 반대편에 적을 만들어야 자신의 존재가 확인되는 까닭이다. - 184쪽

`두려움`은 일본의 집단심리학적 특징이다. 일본인이 친절한 이유도 두렵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해진 룰 안에서만 친절하기 때문이다. 그 틀을 벗어나면 태도가 돌변한다. 일본에서는 친절도 상호작용의 규칙 같은 거다. 규칙을 어겼을 때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친절하다는 듯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친절과는 그 본질이 다르다. - 207쪽

발달심리학자 피아제는 우리의 지식은 인지구조에 기초해서 생성된다고 주장했다. 인지구조를 구성하는 쉐마는 외부 환경과의 상호작용에서 끊임없이 재구조화된다.
이 재구조화의 과정을 피아제는 조절(assimilation)과 동화(accommodation)라는 생물학적 개념을 빌려 설명한다. 조절은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쉐마에 맞춰 새로운 경험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동화는 새로운 경험이 자신의 쉐마로 설명되지 않을 때, 기존의 쉐마를 수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조절과 동화를 통해 인간의 인지구조는 균형 상태(equilibrium)를 이루게 된다.
아무리 새로운 자극이 있어도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인지구조를 전혀 바꾸지 않는 경우를 편견이라고 한다. `조절`만 일어나고 `동화`는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경우다. 이분법적 사고도 전형적인 편견의 한 유형이다. 나이가 들면서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같은 인지구조의 불균형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에 노출되어야 하는 거다. - 213쪽

월급쟁이 생활을 때려치우기만 하면 바로 내 삶의 주인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큰 착각이다. 평생 추구해야 할 공부의 목표가 없음을 돈의 문제로 환원시키며 자신의 쫓기는 삶을 정당화하는 것 또한 참으로 비겁하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지 않을 관심의 대상과 목표가 있어야 주체적 삶이다. 우리가 젊어서 했던 `남의 돈 따먹기 위한 공부`는 진짜 공부가 아니다. - 318쪽

지라르 이론의 핵심은 `욕망의 모방`이다. 우리가 그렇게 집요하게 추구하고 원하는 것이 실제로는 남들의 욕망을 흉내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은 영원히 충족될 수 없다. 흉내 내야 하는 타인의 욕망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메커니즘은 사회적 갈등을 끝없이 야기한다. 이 갈등은 희생양을 찾아 집단 폭력을 가하는 방식으로 해소된다. 문명의 기원은 바로 이 같은 `희생양 제의`라는 것이다.
나와 다른 것들에 대한 두려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생기는 질투로 인해 눈을 부릅뜨고 적을 찾아내는 한국 사회다. 그렇게 `발명된 적`에 집단 린치를 가하며, 자신은 지극히 정의롭고 선한 존재로 합리화한다. - 321쪽

바로 그거였다. 지난 몇 년간 내 삶이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던 것은 너무 빨랐기 때문이었다.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내 삶의 속도가 나를 슬프고 우울하게 했다는 이야기다. 난 언제나 빨리 말해야 했고, 남이 천천히 생각하거나 느리게 말하면 짜증 내며 중간에 말을 끊었다. 조교나 학생들의 느린 일 처리에는 불같이 화를 냈다. 수업이나 각종 모임, 약속 시간에는 수시로 지각했으며, 바쁘다며 항상 먼저 나왔다. 그러나 아무도 날 찾지 않는 교토의 한 귀퉁이에서 내 삶은 비로소 정상 속도를 되찾은 것이다. - 3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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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대인의 빅픽처 - 저성장 시대의 생존 경제학
선대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제목에서 처럼 책의 내용에서도 저자는 경제의 '큰 그림'을 보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실제로 큰 그림을 통한 투자의 흐름과 기회를 타진할 수 있는 몇가지 사례도 제시하고 있다. 분명 도움이 되는 설명이기는 하나, 너무 일반적인 내용이 다수를 이루어서 투자에 대한 공부를 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거시적인 것을 강조하다보면 미시적인 것을 어느 정도 놓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대인의 이름만 보고 구체적인 투자 전략을 얻고자 이 책을 들었다면 바로 후회하게 될 것이다. 투자의 기초를 위한 책이다.


중의적인 의미로의 빅 픽처는 Bio-Health Care, Interest Rate, Green, Petroleum, India, China, Tech Companies, USA, Risk, Exchange Rate을 의미한다고도 한다. 10개의 요소 중 Bio-Health Care, Green, Tech Companies는 성장 가능한 산업분야를, India, China, USA는 성장 기대 국가를, Petroleum, Interest Rate, Risk, Exchange Rate은 투자시 고려해야할 거시적 지표를 가리키는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저자는 이 '퍼즐 조각'들이 미래의 핵심적인 기회라고 말한다. 그러나 10가지나 되는 요소들을 제시하다보니 그 내용 또한 상식적인 수준에 그치거나 비일관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경우가 있다. 한국의 제약업계의 기술경쟁력은 떨어지지만 최근 기술특례 등으로 상장하는 기업들의 추이는 주목해야 한다던가, 인도 기업들에 대한 직접투자는 말리고 싶다고 하면서도 인도를 계속 주목해볼 만 하다고 서술하는 것, 또는 중국은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여전히 기회가 있는 숨어 있는(중국이 숨어 있나?) 광맥이라는 등의 내용이다. 어찌 보면 뻔한 얘기일 수도 있고, 초보자가 읽으면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오히려 더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와 관련해 짐 로저스는 이렇게 말했다.
"정보를 빨리 입수하더라도 정확한 활용 방법을 알아야만 돈을 벌 수 있다. 지금은 모든 정보를 순식간에 입수하는 시대다. 모두가 거의 같은 시점에 똑같은 정보를 입수한다. 차이는 판단력에서 나온다." - 32쪽

국제 금 가격의 상승과 하락은 사실 기축통화인 달러의 흐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림1-4>를 보면, 2008년 이후 국제 금 가격과 달러의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인덱스가 대체로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기축통화인 달러의 가치가 떨어지면 대안으로 금 가격이 상승세를 보이고, 달러의 가치가 오르면 금 가격은 반대로 약세를 보인다. - 41, 42쪽

그렇다면 유가가 달러 가치와 연동해 움직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원유는 기본적으로 달러로 거래된다. 시중에 돈이 많이 풀리면 물가가 올라가는 것처럼, 달러가 많이 풀리면 달러로 거래되는 유가 역시 올라가게 된다. 반대로 달러가 강세면 달러로 표시되는 유가는 떨어진다. 같은 현상을 원유 공급자인 중동 산유국 입장에서 설명해볼 수도 있다. 중동 산유국 입장에서는 달러 가치가 올라가면 달러로 거래되는 유가를 조금 낮춰도 이익이 난다. 반면 달러 가치가 내려가면 유가를 올려야 이익을 맞출 수 있다. 이런 점 때문에 달러인덱스와 유가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고도 볼 수 있다. - 46, 47쪽

대한항공의 영업이익은 유가가 하락하며 바로 상승세를 탔고 주가도 올라갔다. 이 시기 이외에도 대한항공 주가는 대체로 국제 유가가 떨어지면 오르고 국제 유가가 올라가면 떨어지는 흐름을 보였는데, 경제의 큰 그림을 볼 수 있다면 이런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 50쪽

국내 부동산 경기가 조금 좋아진 것처럼 보이는 지금, 이때다 싶은 국내 건설업체들은 사상 최대의 엄청난 분양 물량을 쏟아내고 있다. 이렇게라도 분양해서 국내 주택 소비자들에게 바가지를 씌우지 않으면 무리한 해외 건설 수주로 인한 자금난을 해결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사상 최대의 분양 물량을 쏟아내며 겉으로는 엄청난 호황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 건설업체들의 실적과 주가가 그다지 상승하지 않는 배경이기도 하다. - 52쪽

중국의 경기침체는 한국 경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당장 한국의 수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 해당 기업들의 실적이 악화되고 주가가 떨어진다. 잘 알려져 있듯 중국은 한국의 최대 수출국이며, 중국 수출이 전체 수출 중 약 4분의 1이나 차지한다. 이는 두번째로 비중이 큰 미국의 두 배를 넘는 수준이다.
게다가 과거에는 중국의 수출 추이와 한국의 대중(中) 수출 추이가 직접 연동되어 있었다. 즉 중국의 대외 수출이 늘어나면 한국의 대중 수출도 늘어났다. 한국에서 생산한 중간재가 중국으로 수출되고, 중국이 그 중간재로 완성품을 만들어 다시 미국이나 EU 등에서 수출했던 것이다. 한국의 대중 수출은 `중국을 향한 수출`이라기보다는 `중국을 통한 우회 수출`에 가까웠다.
그런데 2014년부터는 중국의 수출이 늘어도 한국의 대중 수출은 오히려 줄어드는 등 과거와 같은 상관성이 사라지고 있다. 이는 중국 내 수입대체산업이 빠르게 성장해 한국 중간재에 의존하는 비중이 급속히 줄었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은 한국의 일방적인 수출 대상국에서 벗어나 이제 해외에서 한국의 수출 경쟁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 57, 58쪽

양적완화가 무엇인가. 쉽게 말하면 돈의 발행량을 크게 늘려 마구 푸는 것이다. FRB는 돈의 힘이라는 거대한 쿠션으로 절벽에서 수직낙하하는 미국 경기를 떠받쳤다. 이렇게 양적완화를 통해 미국과 전 세계에 뿌려진 된이 실로 어마어마하다. 이 돈은 어디로 어떻게 흘러들어갔을까? 우선 FRB는 이 돈으로 미국 국채와 주택저당증권을 사서 미국의 장기 시장금리를 떨어뜨림으로써 경기회복을 도왔다. 또한 이 돈은 주식시장과 주택시장에 흘러들어 주가를 띄우고 집값을 다시 일정 수준까지 회복시켰다. 제로금리 상태인 미국을 벗어나 밖으로 나간 돈은 신흥국가들에 주로 흘러 들어가 해당 국가들의 자산 가격을 밀어 올리고, 달러로 거래되는 각종 원자재 가격도 끌어올렸다. 이 과정에서 한국에도 2008년 경제위기 이후에만 약 400조 원 가까운 증권투자자금이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에 흘러들어왔다. - 69, 70쪽

만약 미국이 금리를 올리고 다른 나라도 금리를 따라 올리는데 한국 금리만 요지부동이라면, 심할 경우 외환위기가 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이 향후 어느 시점에 기준금리를 2.0%까지 올렸다고 하자. 2015년 9월 현재 한국의 기준금리는 1.5%다. 그러면 미국 금리가 더 높은데, 한국에 들어와 있는 돈들이 그대로 머물러 있겠는가? 상당량의 자금들은 빠져나갈 가능성이 굉장히 크다. 미국 경기가 더 탄탄하게 회복되어 투자 기회도 많은데 돈의 값인 금리까지 더 높다고 생각해보라. 어느 시장에 투자를 늘리겠는가? - 75쪽

"위험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데서 온다." 워런 버핏의 말이다. 자기가 어떤 상태에서 무엇을 투자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위기가 찾아온다는 뜻이다. - 1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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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목소리 - 미래의 연대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은혜 옮김 / 새잎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체르노빌 사고에 대한 증언이라는 자체만으로 이 책의 가치는 어느 정도 인정된다. 더구나 "나는 과거에 대한 책을 썼지만, 그것은 미래를 닮았다"는 저자의 말은 강한 경고처럼 우리의 머릿속을 파고 든다. 


그러나 책의 구성과 편집의 문제는 이러한 가치를 상당부분 떨어뜨리고 있다.


이 책은 망자의 땅(I), 조물주(II), 슬픔의 탄식(III)이라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각 장의 제목과 그 세부 내용과의 명확한 연계를 찾기가 어렵다. "사람은 악을 통해서만 완벽해지며 솔직한 사랑의 말에 마음을 열 만큼 단순하다"라는 소제목이 망자의 땅이라는 장과 어떤 의미가 있는지. "오래 전에 숨어버렸지만 다시 나갈 방법도 만들지 않았다"는 표현은 조물주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또한 글의 구성도 매우 혼란스럽다. 첫 에피소드인 '사람의 외로운 목소리, 하나'는 그나마 읽을만 하다. 이후의 글들은 정말 두서 없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이다. '같이 울고 밥 먹자고 영혼이 하늘에서 부른다'편은 이렇게 시작한다. "손님이 오셨네! 좋은 분들이 오셨어! 점을 쳤을 때는 아무런 징조가 없었는데. (...)" 이후에는 맥락없는 대화의 연속이다. "다 살아서 넘기고, 견뎌냈지", "에그, 생각하기도 싫어. 무서워. 우린 쫓겨났어, 군인들이 쫓아냈어.", "비행기, 헬리콥터가 무더기로 있었어.", "영감이 농장모임에서 돌아와서 말했어" (...) 도대체 등장인물이 몇 명이며 누구인지, 이게 인터뷰인지 회상인지 전혀 모르고 읽어나가다가 글이 끝나면 '안나 파블로프나 아르튜센코, 에바 아다모브나 아르튜센토.... 고멜 주 나로블랸스키 지역 벨리 베레크 마을 주민'이라고 표시하고 마는 식이다. 


마지막으로 편집의 오류와 오타도 거슬린다.

이 책은 각 소제목의 글이 끝나면 해당 증언자의 이름을 기록하는 형식인데, 하나의 글이 끝나고 다음 글이 시작된 중간에 증언자의 이름이 들어가는 편집의 오류가 있다.

예를 들면 65쪽에서는

'증언하고 싶다. 10년 전 일이지만 지금도 매일 일어나고 있다. 이제 영원히 - 지나이다 예도키모브나 코발렌카 주민'

이라고 써 있어. 이제 영원히? 뭘 어쩌자는 거지? 이게 끝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 장을 보니,

문에 기록된 삶이라는 제목의 장은 첫 문장이 '나와 함께 할 것이다.'로 시작한다. 이 무슨...

연결해보면 '산 사람과도 죽은 사람과도 대화할 수 있다'라는 글은 '증언하고 싶다' 앞에서 이미 끝을 맺은 것이다. '내 슬픔이 어떤지 알겠어? 사람들한테 알려줄 때쯤이면 나는 죽고 없을 수도 있어. 땅속에 있겠지. 뿌리 아래...'에서. 그리고 '증언하고 싶다'는 새로운 에피소드의 시작으로 했어야 했다. '증언하고 싶다. 10년 전 일이지만 지금도 매일 일어나고 있다. 이제 영원히 나와 함께 할 것이다.'로.

"나한테 도움이 되고 설명르 해준 책은 한 군도 없'엇'어요."와 같은 단순한 오타도 있다. - 159쪽


결론은 그 취지에 비해 내용과 구성면에서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요소가 너무 많고, 따라서 체르노빌에 대한 공감을 느끼기에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두려움만이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
첫 번째 핵 수업은 체르노빌이었다. 체르노빌에 대한 경고는 성경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체르노빌을 전체주의로 해석했다. 소련의 핵 원자로가 불완전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기술적으로 낙후했기 때문이라고, 러시아인의 안일함과 도둑질을 예로 들어가며 설명했다. 핵의 신화 자체는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다. 충격은 빨리 사라졌다. 방사선은 바로 죽이지 않는다. 5년이 지난 후에는 암에 걸려도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러시아 환경단체가 수집한 통계에 따르면 체르노빌 사건 후 150만 명이 사망했다. 이에 대해서는 모두 침묵한다. - 5쪽

그리고 지금, 우리는 두 번째 핵 수업을 받고 있다.
하나도 아닌 11기의 원자력 발전소에 사고가 났다. 체르노빌처럼 후쿠시마에도 전 세계의 이목이 쏠려 있다. 후쿠시마는 히로시마, 나가사키와 같은 대열에 서게 되었다. 군사적 핵과 평화적 핵은 똑같이 사람을 죽이는 공범이 되어버렸다. 세계 3대 경제대국이 `평화적 핵` 앞에 무력해졌다. 재난의 반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몇 시간, 아니 몇 분 만에 쓰나미가 도시 전체를 태평양으로 휩쓸고 갔다. 우리가 진보라고 불렀던 곳에는 겨우 잔해만 남았다. 진보라는 신기루의 무덤만... 세계 최고라고 불리는 일본의 원전 보호 체계도 규모 9.0의 강진 앞에서는 아기 옷에 불과했다. 배냇저고리처럼 약했다. - 5쪽

나는 과거에 대한 책을 썼지만, 그것은 미래를 닮았다. - 8쪽

나는 체르노빌의 증인이다. 무서운 전쟁과 혁명이 20세기를 대표한다고 하지만 체르노빌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사고가 발생한 지 벌써 20년이나 흘렀지만, 내가 증언하는 것이 과거인지, 또는 미래인지, 나는 아직도 나 자신에게 묻고 있다. 그 사건은 너무나도 쉽게 진부한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시사한 공포물이 되어버렸다. 하지마 나는 체르노빌을 새로운 역사의 시작으로 본다. 체르노빌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선(先)지식이다. 왜냐하면 체르노빌로 인해 사람이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던 방식과 갈등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시간에 대한 주관을 이야기 속에 담는다. 그런데 체르노빌은 그 자체가 시간의 재앙이었다. 우리 땅에 흩어진 방사성 핵종은 5만, 10만, 20만 년, 아니 그보다도 더 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인생의 관점으로 볼 때, 영원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이해할 수 있는가? 아직은 낯설기만 한 그 악몽의 의미를 이해하고 연구할 능력이 되는가? -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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