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돌아왔다 - 2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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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의문을 품는다. 저 별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내가 태어나기도 전, 아니 내 할머니와 그 할머니의 할머니가 태어나기도 전에 생겨난 것일 텐데, 그렇다면 저 별은 도대체 지구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는 것일까. 소년의 궁금증엔 해답이 없다. 그는 들고 있던 플래시의 불을 밝혀 별을 겨눈다. 이 빛도 언젠가 저 별에 가 닿겠지. 내가 죽고 내 손자가 죽고 그 손자의 손자가 죽으면... 물론 이런 가정은 터무니 없는 것이다. 그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빛도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게 우주다. - 127쪽

어리석은 의문은 또 있다. 창공의 새에게도 그림자가 있을까? 저렇게 작고 가벼운 것에게 어찌 그림자처럼 거추장스런 것이 달려 있으랴 싶은 것이다. 그러나 새에게도 분명 그림자가 있다. 날아가는 새떼를 보고 있노라면 가끔, 아주 가끔, 뭔가 검고 어두운 것이 휙 지나간다. 너무 찰나여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 않으면 잘 모르기 십상이다. 달이 해를 가리는 걸 일식이라 하는데 그렇다면 새가 해를 가리는 이런 현상은 무어라 할까. 물론 나는 모른다. 그렇지만 가끔 새 그림자가 해를 가리는 일도 있다는 걸 말해두고 싶은 것이다. - 127, 128쪽

그림자는 광원과 자신 사이를 가로막은 물체를 결코 놓치지 않는다. 빛을 가로막으면 그 뒤엔 그림자가 생긴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엔 언제나 내가 있다. - 128쪽

"남자들이 왜 기를 쓰고 성공하려고 하는지 알아?"
"몰라요."
"거절당하지 않기 위해서야." - 177, 178쪽

오랜만에 도서관에 가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뇌 속에 숨어 있던 작은 성기가 힘차게 발기하는 느낌을. 저 지중해 어딘가에 있다는 누드비치에 처음 당도한 관광객처럼 독자들은 도서관에 들어서자마자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책은 밝게 웃으며 어서 오라고 우리를 향해 손짓한다. 요염한 그 책들은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암시를 풍기면서 손만 대면 가랑이를 벌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르가슴이 멀지 않았다. 바야흐로 우리의 뇌는 팽창하여 부풀어오르는 중이다. 우리는 허겁지겁 아무 책이나 뽑아 펼쳐댄다. 외설스런 장면이다. 그러나 이 누드비치의 풍경이 눈에 익으면 어느새 정신의 성기는 늘어지고 광대무변해 보였던 가능성의 세계는 일 제곱미터 면적의 책상으로 한정된다. 졸음이 쏟아지거나 식욕이 생긴다. 햇빛을 오래 보지 못한 사람들의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퀴퀴한 냄새도 비로소 코를 간지럽힌다. 그때쯤 되면 사람들은 잡지 서가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한다. 아직 낡지 않은 것들이 주는 달콤함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 201, 202쪽

약간의 불편만 감수하면 더는 피곤한 게 없는 삶. 그런 사람에게 인생이란, 다소 예외가 있기는 해도, 경부고속도로와 같은 것이다. 규정속도를 지키면서 꾸준히 가기만 하면 목적지에 대다르는 것이다. - 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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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2
정유정 지음 / 비룡소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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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그냥 훑어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을 아직 다 읽지 않았으므로 또 다른 책을 벌여놓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한 장, 두 장 넘기면서 빨려들어간 이야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정신 없이 진행되는 사건과 이것을 재치 있게 풀어나가는 작가의 입담. 결국 다른 책들을 제쳐두고 이 책을 다 읽고 말았다.


정유정의 소설은 네 권째 읽는다. 처음으로 읽은 것이 <7년의 밤>, 그 다음에는 <28>, <내 심장을 쏴라>, 그리고 이 책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를 읽었으니, (비록 <7년의 밤>보다 <28>이 뒤에 출간되었지만) 그의 책을 거의 출간 역순으로 읽은 셈이 된다. 다 읽고 보니, 등대마을과 화양시라는 곳에서 각각 진행되는 <7년의 밤>과 <28>의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 그리고 Y읍을 벗어나 임자로도 길을 떠나고, 정신병원에서의 탈출을 시도하는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와 <내 심장을 쏴라>의 똘끼 있으면서도 좌충우돌 유쾌한 분위기가 서로 닮아 있다. 그의 소설을 초기와 중기로 나눈다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분위기가 <7년의 밤> 부터는 다소 음울하게 변한 것 같다. (소설의 배경을 놓고 본다면 화양시의 시위장면과 5.18의 광주가, 등대마을의 댐과 정신병원이 각각 겹쳐 보이기 때문에 <28>과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가, <7년의 밤>과 <내 심장을 쏴라>가 닮아 있는가? 암튼...) 여행이나 탈출을 소재로 한 영화를 '로드무비'라고 부르는데, 이 소설은 '로드노블'이라고 불러야 하나(물론 이런 용어는 생소하다). 심사평을 보니 '모험소설'이라고 표현을 한 것이 있던데 '모험'으로 뒤덮기엔 너무 큰 것도 같고.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린 성장소설이기도 하고.


한 소년이 등장한다. 친한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하여 길을 떠나는데, 예기치 못한 사건과 불청객들이 끼어들게 된다. 본의 아니게 한 명의 노인과 두 명의 소년, 한 명의 소녀와 한 마리의 개가 동행하게 되면서 일은 꼬여가고 많은 고비를 넘으며 목적지로 향하게 된다. 주인공 '준호'는 아빠의 실종과 뒤이은 엄마의 재혼으로 심적 갈등을 겪게 된다. 그리 친근감이 느껴지지 않는 엄마와 아빠의 부재, 그리고 아빠에 대한 연민이라는 설정은 <7년의 밤>의 '서원'과 닮아 있다. 방황할 수밖에 없는 시기에는 방황에 대한 너무나 많은 원인과 이유가 존재한다. 그런데 그 빈공간을 채워주는 것은 보다 온전한 인격을 갖춘 누군가가 아니라, 여행길을 동행하게 된 생경한 사람들이었다. 처음에 그들 사이에 놓여있던 낯설고 의뭉스러운 관계들이 점차 이해와 믿음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그런 불완전한 존재들끼리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작가는 이 소설을 시작하면서 "만약, 우리 인생에도 스프링캠프가 있다면?"이라는 질문을 들여다 봤다고 했다. 사라진 '무엇'이 거기 있으리라 생각했다고 한다. 스프링캠프, '정규 리그가 시작되기 전인 이른 봄, 날씨가 따뜻한 지역에 머물면서 집중적으로 가지는 합숙 훈련'. 인생에서 이런 시기가 과연 있기는 했을까? 그리고 나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치른 스프링캠프 덕분에 그나마 지금의 정규 리그를 그럭저럭 버텨내고 있는 것일까? 그러면 내 스프링캠프에서 같이 합숙했던 사람들은? 그들은 나와 다른 리그에서 경기를 잘 치르고 있을까? 우리는 삶이라는 시즌이 끝나기 전에 다른 리그에서 또 한번 만나게 될까? 나는 거기서 잃어버린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 세상에는 자기가 그 입장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진실이 있는 법이거든.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게 혜택 받은 자의 예의야. 알아들어, 김준호?" - 119, 120쪽

"돌아갈 수 없을 땐 돌아보지 마. 그게 미친 짓을 완수하는 미친 자의 자세야. 오케이?" - 323쪽

"하느님은 참 괴상한 방식으로 공평해. 사랑이 있는 쪽에선 사람을 빼앗고 사람이 있는 쪽에서는 사랑을 빼앗아 가고." - 358쪽

푸름 마을을 지나오며 안개섬의 새벽을 생각했어. 우리가 봤던 낯선 것들, 아름다운 것들, 빛나는 것들. 아니 어떤 말도 그들을 칭하는 데 적당하지 않을 거야. 세상 깊숙한 곳에 숨어 있다가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았던 그들을, 나는 그냥 `비밀`이라 부르기로 했어. 내 인생의 첫 비밀. 어쩌면 우리가 함께한 며칠은 우리 인생의 비밀을 찾아가는 법을 가르친 신의 특별한 수업이었는지도 몰라.
세상에는 신이 내 몫으로 정해 놓은 `비밀`이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지? 그렇다고 동의해 줘.
참혹한 대가를 치렀지만 난 자유를 얻었어. 비밀을 찾아가는 법도 배웠어. 그러니 이젠 나를 믿을 테야. 우리들 여행의 끝에 무엇이 있었는지 잊지 않을 거야. 나를 무릎 꿇리려 드는 게 있다면 큼직한 감자를 먹여 주겠어. 이래봬도 내가 깡이 좀 되잖아. - 381, 3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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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페미니스트 - 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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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에 이어 올해 '페미니즘'에 관하여 읽은 세번째 책이다. 최근에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와 저변을 넓이기 위한 노력들이 TED는 물론이고 서적을 통해서도 활발하게 진행되는 것 같다. 그래서 왠만하면 페미니즘 관련 신간들은 챙겨보려는 욕심이 있다. 이런 책들을 읽을 수록 완전히는 아니라도 '평등'이라는 개념에 조금은 다가서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정희진은 이 책의 추천사에서 제목에 포함되어 있는 '나쁜(bad)'의 뜻을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라 '부족한', '못 미치는', '완벽하게 훌륭하지 못한'이라는 뜻으로 읽힌다고 했다. 즉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말의 뜻은 (남자들에게) 나쁘거나 독한 페미니스트라는 뜻이 아니라, '부족한 페미니스트'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저자인 록산 게이도 책에서 '소문자의 페미니즘(feminism)'과 대문자로 시작하는 '페미니즘(Feminism)' 혹은 '근본주의 페미니즘'을 구분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 말은 올바른 단 하나의 페미니즘의 관념에 사로잡혀 심지어 여성들 조차도 페미니스트이기를 거부하는 태도를 취하곤 하는데, 실상 페미니즘은 어떤 대단한 사상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의 성 평등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매우 이상적인 페미니즘 외에도 각자에 맞는(소문자 형태의) 다양한 페미니즘이 존재하며, 평등을 추구하는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왠지 사상이 자유로울 것 같고, 개인주의적인 상식과 태도가 수용되어 있는 미국은 다를 것 같았는데, 그곳에서도 역시 페미니즘에 대한 굳은 편견과 오해는 만연하였다. 이러한 편견들은 여성에 대한 혐오를 확대하는 한편 차별을 너무나도 쉽게 정당화 한다. 사회에 만연해 있는 여성 신체에 대한 성적인 희롱, 여성의 신체에 대한 자유를 구속하는 성추행이나 성폭행, 자기 신체에 대한 결정권을 빼앗는 생식의 자유(reproductive freedom) 제한의 예가 책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9페이지 분량의 서문만 읽어보더라도 페미니즘에 대한 편안한 이해가 가능할 정도로 글이 쉽고 간결하다. 기본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서문만 읽는 것으로도 충분할 정도이다. 본문에서는 미국 대중사회에 나타난 여성차별의 문제점들, 이를테면 성폭행, 낙태 제한, 공중파에서의 성희롱을 다루기도 하지만, <헝거게임>,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나를 찾아줘>와 같이 국내에 번역된 소설들을 저자의 소문자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내용도 있다. 젠더를 중심으로 서술된 1부와 2부에 이어 제3부에서는 영화 <헬프>, <장고>, <노예 12년>을 관람평을 통하여 페미니즘을 미국 사회 내에서의 유색 인종 차별이라는 영역으로 확대하고 있어서, 소설이나 영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자기의 생각과 저자의 것을 비교하며 재미 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저자는 이러한 자신의 견해들이 불완전한 것이며, 자신도 수시로 흔들리는 모순덩어리의 인간임을 상기시킨다. 처음에는 저자 역시 페미니스트라는 꼬리표가 부담스러웠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스트임을 주장하는 것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연한 차별(본문에서는 "개똥 같은 취급"이라 했다)을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한대로 페미니스트가 아닌 것보다는 차라리 나쁜 페미니스트로 남는 것이 훨씬 낫다.

나를 따라다닐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꼬리표를 환영한다. 왜냐하면 나는 인간이니까. 그래서 엉망진창이니까. 누군가의 본보기가 되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는다. 완벽하려 하지 않는다. 내가 모든 해답을 갖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전부 옳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내가 믿고 있는 것을 지지하고, 이 세상에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내 글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면서도 온전히 나 자신으로 남고 싶을 뿐이다. 핑크색을 사랑하고 섹스를 좋아하고 가끔은 여성을 끔찍하게 표현한 노래에 엉덩이를 흔들기도 하고 때로는 정비공이나 수리 기사에게 마초 대점을 해주면 내게 이익이라는 것을 알기에 일부러 더 멍청한 척을 하는 이런 여자로 남고 싶을 뿐이다. - 14쪽

지금보다 어렸을 때는 페미니즘을 부인하곤 했다. 나는 왜 여성들이 아직까지도 페미니즘을 부인하고 페미니즘과 거리를 두려다 자기 발에 자기가 걸려 넘어지는지 이해한다. 내가 가끔 손사래를 치며 나는 절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한 이유는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것이 마치 인신공격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현실에서 이 단어가 그런 의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 시절 누가 날 페미니스트라고 불렀을 때 최초로 떠오른 문장은 이것이었다. 왜 그러지? 나 페미니스트 아니야. 나 남자한테 오럴 섹스 해줄 수 있단 말이야. 그때 내 머릿속에는 페미니스트인 동시에 성적으로 개방적인 여자일 수 없다는 개념이 들어차 있었다. 물론 십 대와 이십 대는 이외에도 온갖 덜떨어진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차 있었던 시기이긴 하다. - 14, 15쪽

나는 페미니즘을 부인했다. 이 운동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페미니스트라는 소리를 들으면 이런 말로 들렸다. "너는 성깔 있고 섹스 싫어하고 남성 혐오에 찌든, 여자 같지 않은 여자 사람이야." 이런 우수꽝스러운 캐리커처는 페미니즘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 페미니즘이 성공하면 잃을 것이 가장 많은 사람들에 의해 조작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 15쪽

나는 페미니즘을 되도록 단순하게 해석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페미니즘이 어렵고 복잡한 개념이고 지금도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으며 빈틈도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그저 이렇게 생각할 뿐이다. 페미니즘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도 못하고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권리를 믿는다. 여성에게는 자신의 몸을 지킬 자유가 있고 필요할 때는 복잡한 절차 없이 의료 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남녀가 같은 일을 했을 때 동일한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선택이기도 하다. 어떤 여성이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지 않다면 그 역시 그녀의 권리이기에 존중한다. 하지만 그녀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 또한 나의 의무이며, 나라면 하지 않을 법한 선택을 하는 여성들을 지지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근본 원칙이라고 믿는다. - 16쪽

하지만 페미니즘에 대해 배우면 배울수록 `소문자의 페미니즘(feminism)`과 대문자로 시작하는 `페미니즘(Feminism)` 혹은 `페미니스트(Feminist)` 혹은 단 하나의 진짜 페미니즘이 모든 여성 인류를 지배한다는 `근본주의 페미니즘`의 개념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페미니즘이 어떤 대단한 사상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의 성 평등임을 안 순간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는 건 놀라울 정도로 쉬워졌다. 페미니즘은 우리 사이 교집합을 찾기 위해, 우리가 누구이고 어떻게 이 세상을 헤쳐 나가야 하는지 알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편이다. - 16, 17쪽

남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원한다. 그리고 여자들에게 그것을 가볍게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 26쪽

남자들이 그럴 수도 있다고 한 번도 아니라 여러 번 우리는 당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유명한 남자건, 악명 높은 남자건, 전혀 유명하지 않은 남자건 남성이 여성을 학대할 수 있다고 믿게 내버려 두었다. 그럴 때마다 못 본 척했고 핑계를 만들어 냈다. 이 남자들의 나쁜 행동도 괜찮다고 하고 오히려 멋지다고까지 했다. 우리는 당신에게 이 사회에 젊은 여자를 위한 자리는 없다고 말했다. 아마도 우리는 이런 메시지들을 너무나 자주, 정기적으로, 일관적으로 전달하면서 당신이 눈을 똑바로 뜬 채, 팔을 벌린 채로 폭력적이고 끔찍한 세상으로 달려가도 된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 46쪽

대게 젠더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적인 프레임 안에서 논의되곤 한다. 남자는 화성에서 왔고 여자들은 금성에서 왔다. 아니 그렇다고들 한다. 마치 남자와 여자는 태초부터 너무 다르게 태어났기에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미션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젠더 문제를 이야기하다 보면 화성과 금성이 실은 같은 태양계 안에 있으며 생각보다 가까운 행성이란 사실을 잊게 된다. 사실 이 두 행성 사이에는 지구나는 하나의 행성 밖에 없으며 둘은 같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으며 같은 광선 안에 머물고 있다. 안타깝게도 최근에 출간된 많은 책들은 젠더에 관해 생산적인 논의를 할 수 있는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편협한 시각으로 여성과 남성을 분리하여 바라보고 젠더 문제를 조금 더 신중하게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렸다. - 127쪽

어째서 여성이 더 야심이 넘치고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일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투표를 하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워야 했고, 집 밖에서 일을 해보겠다고 기를 쓰고 싸워야 했고, 성희롱 없는 근무 환경에서 일하기 위해 싸워야 했고, 대학이나 학과를 스스로 선택하기 위해 싸워 왔으며, 작은 자리라도 차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나를 증명하고 또 증명해 내야 했다. - 130쪽

나는 동정과 연민이 한정된 자원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도 않다.
크건. 작건. 비극이. 부르면. 연민이. 응답한다. 가슴이. 응답한다. - 262쪽

아, 불쌍한 페미니즘이여. 페미니즘의 어깨에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이 운동의 일차적 목표는 모든 분야에서의 양성평등임을 잊지 말자. - 364쪽

한때 내 머릿속에는 페미니스트는 특정한 부류의 여성들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페미니스트라는 사람들에 대한 부정확한 신화를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 전투적이고 정치적이며 인간으로서 완벽하고 남자를 증오하고 유머가 없는 사람들. 이러한 신화에 속았다. 나는 이런 신화에 속지 않을 만큼 똑똑한 사람이기에 이런 과거가 자랑스럽지 않고 더 이상은 속지 않으려 한다. 나는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정중하게 거절하는 여자가 되고 싶지 않다. - 3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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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원주민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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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특유의 감각으로 우리가 애써 외면하는 현실을 깊숙히 파고드는 만화가, 최규석.

그의 눈이 밝혀낸 낯선 현실이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을테지만, 반대로 우리가 느끼는 낯설음이 어쩌면 그가 너무도 견고히 견뎌낸 과거였을지도 모른다.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는 없지만 내 마음 깊숙한 곳에는,
도시에서 태어나 유치원이나 피아노학원을 다녔고 초등학교 때 소풍을 엄마와 함께 가봤거나
생일파티란 걸 해본 사람들에 대한 피해의식, 분노, 경멸, 조소 등이 한데 뭉쳐진 자그마한 덩어리가 있다.
부모님이 종종 결혼을 재촉하는 요즘 이전에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어쩌면 존재하게 될지도 모를 내 자식을 상상하게 된다.

상상하다보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 아이의 부모는 모두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고
아버지는 화려하거나 부유하지 않아도 가끔 신문에 얼굴을 들이밀기도 하는 나름 예술가요
아버지의 친구라는 사람들 중에는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인사들이 섞여 있어
그 아이는 그들을 삼촌이라 부르며 따르기도 할 것이다.
엄마가 할머니라 놀림 받지도 않을 것이고
친구들에게 제 부모나 집을 들킬까봐 숨죽일 일도 없을 것이고
부모는 학교 선생님과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할 것이며
어쩌면 그 교사는 제 아비의 만화를 인상 깊게 본 기억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른다.
간혹 아버지를 선생님 혹은 작가님 드물게는 화백님이라 부르는
번듯하게 입은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들 것이고 이런저런 행사에 엄마아빠 손을 잡고 참가하기도 하리라.
집에는 책도 있고 차도 있고 저만을 위한 방도 있으리라.
그리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리지도 않을 것이고
고함을 치지도 술에 절어 살지도 않을 것이고 피를 묻히고 돌아오는 일도 없어서
아이는 아버지의 귀가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 아이의 환경이 부러운 것도 아니요,
고통 없는 인생이 없다는 것을 몰라서 하는 소리도 아니다.
다만 그 아이가 제 환경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제 것으로 여기는,
그것이 세상의 원래 모습이라 생각하는,
타인의 물리적 비참함에 눈물을 흘릴 줄은 알아도 제 몸으로 느껴보지는 못한
해맑은 눈으로 지어 보일 그 웃음을 온전히 마주볼 자신이 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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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반양장)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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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에 따라 책을 읽고 싶지 않다는 다짐 때문일까? "나는 베스트셀러는 믿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곤 했다. 그러면서도 내 장바구니나 보관함에는 항상 당시의 베스트셀러들이 담겨 있었다. 아닌 척은 해도 결국 나도 지금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관심과 유행이 무엇인지를 흘끔거리며 궁금해 하는 속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된 지 많은 시간이 흘러서 읽게 되었다. 몇 주 반짝였던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내 기억에는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에게 1위를 내어주기 전까지) 꽤 오랜 기간 상위에 랭크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상하게도 상위 랭킹에서 떨어지자 비로소 이 책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프로이트나 융이야 워낙에 유명한 이름이어서 심리학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의 귀에도 흔한 이름이지만, 아들러라는 이름은 내게 생소했다. 더욱이 그가 프로이트, 융과 함께 3대 심리학자라고 일컬어진다고 하니, 이쯤이면 나의 무지를 탓할만 하다.


아들러의 심리학은 프로이트의 심리학과 대비된다.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원인론'이라고 한다면, 아들러의 심리학은 '목적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전자에 따르면, 지금의 나의 상태는 과거의 어떠한 원인으로 인해 형성된 것이며, 미래의 나 또한 현재의 모습이 투영된 것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내가 경험했던 과거의 '트라우마'와 같은 것이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나 후자에 의하면,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질 수는 없겠으나) 현재를 결정하는 건 과거의 그 사건이 아니라 그것을 통한 경험에 내가 어떠한 의미를 부여했느냐이다. 따라서 인과관계가 아닌 내 삶의 목적을 회복함으로써 보다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결국 필요한 것은 과거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를 변화시키기 위한 '용기'뿐이다. 그래서 아들러의 심리학을 '용기의 심리학'이라고도 한다.


이 책의 제목인 '미움받을 용기'는 스스로 자유롭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미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따온 것 같다. 자기 중심적인 인정욕구에서 벗어나 타인이 바라는 내 모습을 버리고, 나 또한 타인에게 내 바람을 강요하지 않음으로써 내가 원하는 자유로운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누군가가 부모를 빨리 실망시킬수록 자식이 빨리 자립하게 된다고 한 우스개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런 것도 일맥상통하는 것일까. 


과거의 트라우마에 빠져 현재의 삶을 망치는 것, 타인과 경쟁하느라 스스로 불행해지는 것,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려고 눈치를 보는 것... 현대인들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이것들은 '지금, 여기'의 삶을 방해하는 것들이다. 아들러는 이와 같은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했는데, 행동적 측면에서는 '자립할 것'과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을, 심리적 측면에서는 '내게 능력이 있'으며, '사람들은 내 친구'라는 의식을 갖는 것이다. 구체적인 목표라고는 했지만, 이런 뻔한 도덕 교과서 수준의 이야기를 목표라고 제시하는 것에 답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 속 철학자의 설명을 끝까지 경청하다보면 행동적 측면을 통하여 자기수용을, 심리적 측면을 통하여 타자신뢰와 타자공헌을 함으로써 나를 인정하고, 남과 비교하지 않으며, 내 본연의 삶을 찾을 수 있다는 논리에 수긍하게 된다.


저자인 기시미 이치로가 플라톤 철학과 아들러 심리학을 공부해서인지는 몰라도 책의 구성은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처럼 철학자와 청년이 대화를 하며 기존 관념의 오류를 바로잡고 새로운 인식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심리학 책이지만 아들러 심리학의 이론을 그렇게 어렵지 않게 대화를 하듯 읽을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철학자 :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지. 객관적인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라네. 자네가 보는 세계와 내가 보는 세계는 달라.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세계일 테지. - 12쪽

철학자 : 아들러 심리학은 트라우마를 명백히 부정하네. 이런 면이 굉장히 새롭고 획기적이지. 분명히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이론은 흥미진진한 데가 있어. 마음의 상처(트라우마)가 현재의 불행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지. 인생을 거대한 ‘이야기’라고 봤을 때, 그 이해하기 쉬운 인과법칙과 드라마틱한 전개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매력이 있어. 하지만 아들러는 트라우마 이론을 부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네. "어떠한 경험도 그 자체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받은 충격-즉 트라우마-으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라고. - 36쪽

청년 :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요?
철학자 : 말 그대로일세.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한다는 말이지. 가령 엄청난 재해를 당했다거나 어린 시절에 학대를 받았다면, 그런 일이 인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네. 분명히 영향이 남을 테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일이 무언가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점이야. 우리는 과거의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네. 인생이란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걸세. 어떻게 사는가도 자기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고. - 36, 37쪽

철학자 : 과거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과거를 바꿀 수 없다고 한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유효한 수단도 써보지 못한 채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네. 그 결과 어떻게 될까? 나를 둘러싼 세계에 절망하고 인생을 포기하며 살다가 결국엔 허무주의나 염세주의(pessimism)에 빠지게 되겠지. 트라우마 이론으로 대표되는 프로이트의 원인론은 형태만 다른 결정론이자 허무주의의 입구일세. 자네는 그런 가치관을 인정할 셈인가?
청년 : 그야 저도 인정하고 싶지는 않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과거의 힘은 그만큼 세다고요!
철학자 : 가능성을 생각하게. 인간이 변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한다면 원인론에 근거한 가치관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자연히 목적론에 입각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말일세. - 46쪽

철학자 : 다시 아들러가 했던 말을 인용해보지.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자네나 Y나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은 것은 ‘무엇이 주어졌는가’에만 주목하기 때문일세. 그러지 말고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주목하게나. - 53쪽

철학자 : 내가 내 키에 대해 느낀 열등감은 어디까지나 타인과의 비교-다시 말해 인간관계-를 통해 만들어낸 주관적인 감정이었네. 만약 비교해야 할 타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는 내 키가 작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자네도 지금 이런저런 열등감에 괴로워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객관적인 ‘열등성(劣等性)’이 아니라 주관적인 ‘열등감(劣等感)’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키에 관한 문제조차 주관이 개입하지. - 88쪽

청년 : 요컨대, 우리를 괴롭히는 열등감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해석’이라는 건가요?
철학자 : 그렇지. 나는 "너한테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재능이 있잖아"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네. 내 키도 사람을 편안하게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보면 나름대로 장점이 된다는 것을. 물론 이는 주관적인 해석일세.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 마음대로 생각하는 거지. 그런데 주관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점이 하나 있네. 자신의 뜻대로 선택이 가능하다는 점. 내 키를 장점으로 볼 것인가, 단점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은 모두 주관에 달린 문제라서 나느 어느 쪽이나 선택할 수 있지. - 88, 89쪽

철학자 : 그렇지 않네. 앞서 걸으나 뒤에서 걸으나 관계없어. 쉽게 말해 우리는 세로축이 존재하지 않는 평평한 공간을 걷고 있네. 우리가 걷는 것은 누군가와 경쟁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지금의 나보다 앞서 나가려는 것이야말로 가치가 있다네.
청년 : 선생님은 모든 경쟁에서 자유로우십니까?
철학자 : 물론일세. 지위와 명예를 좇지 않고 재야의 철학자로서 세속의 경쟁과는 연이 없는 삶을 살고 있으니까.
청년 : 그것은 경쟁에서 내려왔음을, 즉 패배를 인정한다는 뜻입니까?
철학자 : 아니. 승부를 다투는 장소에서 물러났다는 표현이 맞겠지. 내가 나로서 살려고 할 때 경쟁은 필히 방해가 된다네. - 107, 108쪽

철학자 : 나는 옳다, 즉 상대는 틀렸다. 그렇게 생각한 시점에서 논쟁의 초점은 ‘주장의 타당성’에서 ‘인간관계의 문제’로 옮겨가네. 즉 ‘나는 옳다’는 확신이 ‘이 사람은 틀렸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궁극적으로는 ‘그러니까 나는 이겨야 한다’며 승패를 다투게 된다네. 이것은 완벽한 권력투쟁일세.
청년 : 으음
철학자 : 애초에 주장의 타당성은 승패와 관계가 없어. 자네가 옳다고 믿는다면 다른 사람의 의견이 어떻든 간에 이야기는 거기서 마무리되어야 하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권력투쟁에 돌입해서 다른 사람을 굴복시키려고 하지. 그러니까 ‘나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곧 ‘패배를 인정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는 거라네.
청년 : 맞아요. 그런 측면이 있죠.
철학자 : 지고 싶지 않다는 일념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결과적으로 잘못된 길을 선택하게 되지. 잘못을 인정하는 것, 사과하는 것, 권력투쟁에서 물러나는 것. 이런 것들이 전부 패배는 아니야. 우월성 추구란 타안과 경쟁하는 것과는 상관없네. - 123, 124쪽

철학자 : 아들러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과 심리, 양 측면에서 아주 분명한 목표를 제시했지.
청년 : 허, 어떤 목표입니까?
철학자 : 먼저 행동의 목표로는 ‘자립할 것’과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이라는 두 가지를, 이러한 행동을 뒷받침하는 심리적 목표로는 ‘내게는 능력이 있다’는 의식을 갖는 것과 그로부터 ‘사람들은 내 친구다’라는 의식을 갖는 것을 제시했네. - 125쪽

철학자 : 함께 있으면 왠지 숨이 막히고 긴장으로 몸이 뻣뻣해지는 관계는, 연예는 가능해도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네. 인간은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랑을 실감할 수 있네. 열등감을 느끼지도 않고, 우월함을 과시할 필요도 없는, 평온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할 수 있지. 진정한 사랑이란 그런 걸세. 반면에 구속이란 상대를 지배하려는 마음의 표징이며, 불신이 바닥에 깔린 생각이기도 하지. 내게 불신감을 품은 상대와 한 공간에 있으면 자연스러운 상태로 있을 수 없겠지? 아들러는 말했네. "함께 사이좋게 살고 싶다면, 서로를 대등한 인격체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 133, 134쪽

철학자 : 자네는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네. 나도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타인의 기대 같은 것은 만족시킬 필요가 없다는 말일세. - 154쪽

철학자 : 인정받기를 바란 나머지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는 타인의 기대를 따라 살게 되지. 즉 진정한 자신을 버리고 타인의 인생을 살게 되는 거라네. 기억하게. 자네가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타인 역시 ‘자네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걸세. 상대가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더라도 화를 내서는 안 돼. 그것이 당연하지. - 155쪽

철학자 : 단적으로 말해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일세.
청년 : 네? 무슨 말씀이신지?
철학자 : 자네가 누군가에게 마움을 받는 것. 그것은 자네가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증거이자 스스로의 방침에 따라 살고 있다는 증표일세.
청년 : 아, 아니. 하지만...
철학자 : 자네 말대로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것은 괴로운 일이야. 가능하면 누구에게도 미움을 사지 않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며 살면 좋겠지.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다는 건 부자유스러운 동시에 불가능한 일일세. 자유를 행사하려면 대가가 뒤따르네. 자유를 얻으려면 타인에게 미움을 살 수밖에 없어. - 185, 186쪽

철학자 : 인정욕구의 진의를 생각해보게. 사람들이 자신을 얼마나 주목하는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즉 자신의 욕구를 얼마나 만족시켜주는가. ... 인정욕구에 사로잡힌 인간은 얼핏 타인을 보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밖에 보지 않아. ‘나’ 이외에는 관심이 없지. 즉 자기중심적이라네.
청년 : 그러면 저처럼 타인의 평가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사람도 자기중심적이라는 말입니까?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쓰고 사람들에게 맞추려고 하는데도요?
철학자 : 그래. ‘나’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의미에서 자기중심적일세. 자네는 타인에게 잘 보이려고 남들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걸세. 그것은 타인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집착이나 다름없지. - 210쪽

철학자 : 어떤 사람이 과제를 앞에 두고 망설이는 것은 그 사람에게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야. 능력이 있든 없든 ‘과제에 맞설 용기를 잃은 것’이 문제라고 보는 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견해지. 그러면 이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게 뭘까? 잃어버린 용기를 되찾는 것이겠지. - 232쪽

철학자 : 인간은 ‘나는 공동체에 유익한 존재다’라고 느끼면 자신의 가치를 실감한다네. 이것이 아들러 심리학의 대답이지.
청년 : 나는 공동체에 유익한 존재다?
철학자 : 공동체, 즉 남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끼는 것. 타인으로부터 ‘좋다’는 평가를 받을 필요 없이 자신의 주관에 따라 ‘나는 다른 사람에게 공헌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 그러면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실감하게 된다네. 지금까지 논의했던 ‘공동체 감각’이나 ‘용기 부여’에 관한 말도 전부 이와 연결되네. - 236쪽

철학자 : 과제를 분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하네. 우리는 ‘태어나면서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바꿀 수가 없어. 하지만 ‘주어진 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내 힘으로 바꿀 수가 있네. 따라서 ‘바꿀 수 없는 것’에 주목하지 말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주목하란 말이지. 내가 말하는 자기수용이란 이런 거네.
청년 : ...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
철학자 : 그래. 교환이 불가능함을 받아들이는 것. 있는 그대로의 ‘이런 나’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낸다. 그것이 자기수용이야. - 261쪽

철학자 : 편의상 지금까지 자기수용, 타자신뢰, 타자공헌이라는 순서로 설명을 했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되는, 말하자면 순환구조로 연결되어 있네.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들인다, 즉 ‘자기수용’을 한다->그러면 배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타자신뢰’를 할 수 있다->타인을 무조건 신뢰하고 그 사람들을 내 친구라고 여기게 되면 ‘타자공헌’을 할 수 있다->타인에게 공헌함으로써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실감하게 되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다, 즉 ‘자기수용’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수용을 하면... - 276쪽

철학자 : 우리는 좀 더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야 하네. 과거가 보이는 것 같고, 미래가 예측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자네가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지 않고 희미한 빛 속에서 살고 있다는 증거일세. 인생은 찰나의 연속이며,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아. 자네는 과거와 미래를 봄으로써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려하고 있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지 간에 자네의 ‘지금, 여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미래가 어떻게 되든 간에 ‘지금, 여기’에서 생각할 문제는 아니지.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고 있다면 그런 말은 나오지 않을 걸세.
청년 : 하, 하지만... - 308쪽

철학자 : 프로이트의 원인론에 서게 되면 인생을 원인과 결과로 구성된 하나의 큰 이야기로 보게 된다네.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서, 어떤 어린 시절을 보내고, 어떤 학교를 나와서 어떤 회사에 들어갔는가.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고, 미래의 내가 있다고 하는 식으로 말이야. 확실히 인생을 이야기에 비유하면 재미있고 이해하기도 쉽지. 그래봤자 그 이야기 끝에는 ‘흐릿한 미래’가 보일 뿐이야. 그럼에도 그 이야기에 따라 살려고 하지. 내 인생은 이러니까 이대로 살 수밖에 없다, 나쁜 것은 내가 아니라 과거인 환경이다. 이렇게 과거를 들먹이며 탓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면죄부를 주는 걸세. 인생의 거짓말과 다름없지. 하지만 인생이란 점의 연속이며, 찰나의 연속이다. 그것을 이해한다면 더는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을 걸세. - 308, 3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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