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진우의 이명박 추격기 - 저수지를 찾아라
주진우 지음 / 푸른숲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동안 주진우 기자의 책을 죄다 구입해서 읽었지만, 많은 사건들을 다루어서 그런지 사건의 제시가 다소 산만하기도 하고, 읽다보면 맥락이 뚝뚝 끊어지는 느낌이 드는 그의 글(문체) 자체를 솔직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의 신간이 나오면 어김없이 구입하는 이유는, 직업만 기자일뿐 다른 기사를 그대로 베끼거나 유명인 트위터와 페이스북 받아 쓰기를 하고 있는 기레기들은 차마 할 수 없는 사실들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취재하는 그의 기자정신과 뚝심에 탄복하기 때문이며, 소시민인 나로써는 차마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을 끈질기게 해내고 있는 그를 응원할 방법이 이것 밖에는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큰 돈이 사라졌는데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찾지 않고,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 그 돈 이야기를 하면 경계하고, 돈 이야기를 다시 꺼내면 빨갱이라고 한다. - 20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
김민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영어 학습법이나 방법론에 관한 책은 웬만하면 사서 읽는 편이다. 영어를 잘 하고 싶다는 욕망이 책을 읽게 되는 가장 큰 동기가 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 내 상황이나 내 학습방법이 괜찮은지를 비교해보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부'라는 단어를 접하면 나는 너무나도 당연히 조용한 도서관에 앉아 몇 시간을 몰입하고 있는 모습을 그리곤 한다. 그리고 그렇게 도서관에 가서 앉아 있은지 이미 너무나도 많은 세월이 지나가 버린 현재는 공부에서 손을 놓다 못해 떼고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을 하며 산다. 그러나 이러한 공부에 대한 고정관념, 판타지, 핑계, 자기합리화를 이 책은 여지없이 깨버린다. 영어가 늘지 않는다고 늘상 투덜대면서 정작 영어책 한 권 외워볼 생각은 왜 안하냐는 반문에 딱히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한다.


언제부터 시작이라는 시작점을 미리 설정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당장. 독립된 시간과 장소가 없음을 탓하지 말고, 출퇴근 시간과 같은 짜투리 시간을 이용해 짬짬이 하루 한 문장이라도. 가시적인 성과에만 목말라하지 말고, 지치지 않게 꾸준히. 이렇게만 보면 저자가 제시하는 방법은 어찌보면 당연한 공부방법이지만, 그동안 이 당연한 방법을 유독 영어에만은 적용하지 않았던 이유를 모르겠다.


단순히 "~해라", "~하지 마라"라는 조언이 아니라, 스스로 경험했던 바를 통해 유용한 팁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이 책의 효용은 충분하다. 수험용 영어공부라 아니라면, 최적화된 방법론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기웃거릴 필요 없이 영어책 한 권부터 시작하면 된다. 문제는 언제나 실천이다.

"I wish I could tell you it gets better. But, it doesn‘t get better. You get better."
"상황이 좋아질 거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렇지는 않을 거야. 대신 네가 더 나은 사람이 될 거야."
시트콤을 보다가 순간 멍해졌습니다. ‘상황은 더 좋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버틴다면, 너는 더 나은 인간이 될 것이다.‘
"나 이제 때려치울 거야!"하고 물러나면 나의 한계가 거기까지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버티는 자에게는 한계가 없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그날까지 버텨야겠어요. - 6,7쪽

무엇보다 가장 힘든 때는, 몇 달째 열심히 했는데도 실력이 나아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그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야 합니다. 적어도 첫 번째 계단을 만날 때까지는 버텨야 합니다. 양질 전환이 이루어지는 첫 번째 전환점 말입니다. 이 첫 고비를 넘기면 영어 공부에 재미가 붙을뿐더러, 인생에서도 힘든 순간에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책 한 권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기 위해서는 매일 한 과씩 외우고, 전날까지 외운 것을 복습하는 공부가 중요합니다. 복습을 할 때 핵심은 책을 보지 않고도 영어 문장이 떠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책을 보고 읽으면 다 아는 것 같은 착각이 생기거든요. - 24쪽

<지속하는 힘>의 저자 고바야시 다다아키의 다음 문장이 제 생각을 대변해주는 듯 해요.
매일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해도 훗날 영어를 사용하는 일을 하게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올림픽에 출전하고 싶어 혹독한 훈련을 견뎌내고 있지만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다고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세상은 그런 것이다. (중략) 영어 공부를 그만두면 영어를 쓰는 일에 종사하게 될 가능성은 제로다. 훈련을 그만두면 올림픽 대표 선수도 선발될 가능성은 없다고 보면 된다. - <지속하는 힘> (고바야시 다다아키 지음, 정은지 옮김, 아날로그) - 28쪽

우린 돈으로 모든 것을 사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어요. 건강도, 외모도, 행복도 다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사실 이 모든 것은 돈으로 살 수 없어요. 오로지 시간으로만 살 수 있습니다. 영어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싼 돈을 들여야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시간입니다. - 117쪽

인출 연습
어떤 책을 읽을 때 한 번에 여러 번 읽기보다 한 번 본 다음 기억에서 꺼내보는 연습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영어 문장을 눈으로만 보지 말고 눈을 감거나 다른 곳을 보면서 외워보는 거지요. 셀프 쪽지시험을 치면서 외운 것을 확인하는 과정은 장기 기억에도 유리하고, 모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 효율적인 공부가 되게 해줍니다. 책을 보고 계속 읽으면 다 아는 것 같지만, 눈을 감고 문장을 외워보면 기억이 나지 않는 문장이 뭔지 알 수 있거든요. 그 문장만 집중해서 다시 외울 수 있습니다. - 13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왕따의 정치학 - 왜 진보 언론조차 노무현·문재인을 공격하는가?
조기숙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선 전에 읽은 책인데, 연휴 때 책 정리를 하다가 이제야 읽었다는 기록을 남긴다. SNS를 하다가 우연히 한 동영상에서 신좌파에 대한 설명자료를 접하게 되었다. 기존 자본 vs 노동의 대립을 통하여 좌와 우를 구분하던 이분법이 현재는 더이상 유용하지 않으며, 탈권위주의를 추구하는 새로운 이념이 이른바 신좌파를 창출하였다는 짧은 설명은 꽤 흥미로웠다. 그 동영상 자료 말미에 바로 이 책에 대한 광고가 덧붙여져 바로 구매해서 읽었다. 


'노무현과 문재인 죽이기'(1장), '구좌파 진보언론 대 신좌파 노무현'(2장), '호남 왕따와 친노 왕따, 그 불가분의 관계'(3장)라는 구성과 강렬한 표현을 보면, 대선 당시의 언론구도와 탄핵 이후 좌우의 극렬한 대립, 중도라 칭하는 이들의 선전 등 혼란스러웠던 상황이 그려지는듯 하다. 저자는 노무현과 문재인에 대한 그동안의 진보와 보수언론의 프레임을 비판적으로 제시하여, 이른바 진보언론이라고 불리우는 한경오마저도 이러한 프레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를 설명한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현재는 아직까지도 자본과 노동의 대립의 프레임에 갇혀 있는 낡은 사고들이 탈권위적, 탈물질적, 탈이념적 색채를 갖고 있는 신좌파의 이념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 시점이다. 그러면서 진보언론마저도 자본을 비판하며 결국 자본으로 회귀하는 순환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글이 일련의 시간적 흐름으로 서술된 것이 아니라, 저자가 강조하는 포인트가 시기상 노사모, 대선,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절 등을 전후로 이동하며 그때마다 설명이 되고 있어 다소 산만한 감은 없지 않다. 물론 이해의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겠지만 각 장 마지막에 붙어 있는 '정봉주와의 대담'은 팟캐스트의 대화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어서 어수선하다는 느낌도 들었다.그럼에도 보수를 막연하게 싫어하는 내가 정말 진보라 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자문할 수 있었다는 점은 이 책의 내용만이 아니라 책을 읽었다는 것 자체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더불어 정치에 관심이 없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지만 조기숙이라는 이름이나 그를 둘러싼 여러 논쟁들에 그렇게 익숙하지 않았고,노무현 vs 조중동의 대립에서는 조중동을 비판하면서도, 노무현 vs 한경오의 대립에서는 나름 진보적인척하며 한경오의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으며, 노동 이외의 가치들을 모두 경원시하는 시각을 견지하려 했던 지난 날의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보통 가해자와 피해자만 있으면 왕따가 성립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왕따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구조와 집단의 협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는 의식하든 하지 않든, 왕따가 발생하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왕따에 대한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왕따 현상은 피해자와 가해자만이 아니라 동조자, 방관자가 있어야 비로소 성립된다. - 92, 93쪽

즉, 노무현은 호남 왕따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그래서 노무현은 호남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되는 데 성공했다. 이는 가해자 입장에서는 매우 무서운 일이었을 것이다. 가해자는 최초의 방어자를 철저히 제압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야 제2, 제3의 방어자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노무현을 철저히 왕따시켰다. - 97쪽

서구에서는 20세기에 좌우 대립이 있었다. 영국에선 자유당이 보수당에 일부 흡수되면서 사라지고, 노동당이 좌파 정당으로 등장해 복지권이 확립되었다. 그래서 20세기에는 경제적 민주화를 추구하면 좌파, 경제적 자유(사유재산권)를 추구하면 우파가 되었다. 경제 문제가 정당을 가르는 핵심 균열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 68혁명이 일어났다. 68혁명은 경직되고 비인간화 된 공산주의에 대한 염증을 표출했다. 20세기의 자본이냐 노동이냐 하던 경제적 균열은 둘 다 물질주의일 뿐이다. 물질주의는 빈곤과 전쟁 등을 겪은 세대에게는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68세대는 2차 대전 이후 평화화 풍요 속에서 자란 중산층의 자녀들이다. 이들은 전후 세대로서 배고픔과 전쟁의 위협을 모른다. 이들에겐 물질이 더는 중요하지 않기에 진보와 보수, 좌와 우가 기본적으로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히려 좌우가 서로 싸우면서도 똑같이 권위주의적이라는 점을 혐오했다.
권위주의 문화는 기본적으로 집단주의에 기초한다. 집단주의는 집단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데, 이것이 유럽의 신세대에게는 설득력이 없었다. - 156쪽

노사모를 연구한 김용호 교수에 따르면, 이들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인주의적이고 탈물질주의적인 특성을 나타낸 집단이라고 한다. 나는 노사모가 우리나라 최초의 68혁명 세대라고 생각한다. 19세기 말의 자유주의는 사유재산을 지키기 위한 참정권운동이었다. 즉 제1세대 시민권을 목표로 했었다. 그러나 노사모에서 시작된 친노 세력은 참여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제3세대 시민권자였다. 참여정부에서 일했던 모든 인사가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노무현을 지지하고 지금 문재인을 지지하는 친노 시민들은 신좌파라고 할 수 있다.
2004년 탄핵 반대 집회는 시민단체들이 주최했지만 자발적 시민들의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에서 신좌파적인 특징을 띠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와 같은 ‘민주주의 2.0’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 173쪽

민주주의는 모든 발언을 허용하는 게 아니라 민주주의의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의 발언만 허용한다. 민주주의를 위협에 빠뜨리는 일베의 자유는 사법적 처벌의 대상이라는 게 선진 민주국의 기준이다. - 189쪽

참여정부 말기, 소위 진보 지식인들이 "노무현, 유시민, 조기숙은 진보가 아니니 진보 논쟁에 끼지 말라"고 일갈한 적이 있다. 20세기 이야기라면 이들이 맞다. 좌파가 진보였다. 그런데 노무현은 21세기 최초의 대통령이다. 나는 오히려 구좌파만이 진보라고 생각하는 그들이 더는 진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노동만이 최고의 가치이고 노동자만이 사회의 진보를 이룬다는 생각은 이미 20세기의 흘러간 노래일 뿐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1968년의 혁명과 세대교체를 거치면서 유럽은 혁명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우리는 1987년 참정권을 획득했고, 1988년부터 1990년대 초까지 지속된 노조의 파업과 노동쟁의로 노동자의 인권과 권익 측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이때 제2세대 시민권을 위해 가장 열심히 싸웠던 사람이 노무현, 문재인 같은 노동.인권 변호사였다. - 192쪽

노 대통령이 한.미FTA를 체결하자 소위 진보언론과 지식인은 왼쪽 깜빡이 켜고 우회전을 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세계화와 자유무역이 신자유주의라며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합리적 토론을 막는 정치공세일 뿐이다. 우리는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다. 수출이 우리만큼 중요하지 않은 유럽의 대다수 좌우 정당도 EU에 동의했다. EU는 자유무역뿐 아니라 화폐의 통일, 노동력의 이전까지 포함하는 거대한 세계화다. 여기에 반대하는 건 소수의 극우 세력뿐이다. 트럼프나 샌더스 같은 극우, 극좌파만이 보호무역을 지지한다. - 194쪽

미국의 흑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민주당 대통령 후보와 조용히 협상할 뿐, 공화당을 찍겠다고 협박하진 않는다. 공화당 찍어봐야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조용히 협상하는 이유는 대놓고 협상하다 백인들을 자극해 그들이 공화당으로 결집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흑인들이 조심했음에도 2016년 미국 대선에서는 백인 남성만 공화당으로 결집한 게 아니라 백인 여성의 53%가 트럼프를 찍었다. 빼앗기는 것에 대한 가진 자들의 두려움이 더 갖기 위한 못 가진자들의 마음보다 더 절실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 289, 290쪽

국민의당은 결국 호남과 민주당을 이간질하고 지역주의를 부추김으로써 호남에서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호남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호남 왕따의 방어자였던 친노와 호남 사이를 갈라놓은 것이다. 이들이 호남 왕따로 국민을 분열시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한 역대 대구 출신 대통령들과 무엇이 다른가? 국민의당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호남인 스스로 왕따를 자초하게 했고, 대구 출신 역대 대통령들은 외부에서 호남인을 왕따시켰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둘 다 호남 왕따 현상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 290쪽

우리나라에서 내각제 개헌이 위험한 이유는 정당의 당원이 힘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의원들에게 권력을 주면 국회의원 선거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내각제에서 지도부가 되려면 다선 의원이 유리하므로, 국민은 자기 지역 의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계속 뽑아줘야만 한다. 지금 다선 의원들이 국민의 삶에 무슨 도움을 주는지 한번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북한과 대치 상태에서 우리나라의 이념적 지형은 매우 좁다. 결국 국회 선진화법 핑계로 여도 야도 없이 180명의 의원이 손잡고 돌아가면서 죽을 때까지 권력 나눠 먹기를 하겠다는 이야기다. 이들이 그리는 이상은 딱 일본이다. - 315쪽


페이스북에서 ‘신좌파(참여민주파)’라는 용어에 대해 설왕설래가 있었다. 이 책을 통해 더 명확해졌겠지만 신좌파는 서구적 맥락에서 1968년 이후에 만들어진 용어다. 신좌파는 좌파의 아류가 아니라 20세기 이념인 좌우를 모두 거부하면서도 진보적인 삶을 지향해서 붙어진 용어다.
좌파는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기에 개인을 억압한다. 우파는 시장의 역할을 강조하기에 소비만능주의가 된다. 국가와 시장 모두를 거부하면서 자유로운 개인의 모임인 공동체를 통한 제3의 영역 확장을 강조하는 게 신좌파다.
신좌파의 시각으로는 구좌파와 우파가 권위주의적이란 면에서 차이가 없다. 신좌파는 좌우를 모두 부정하기에 탈권위주의적이고 탈 물질적이며, 탈이념적이다. 문화적으로 리버럴하고, 경제적으로는 실용적이며, 정치에 관심이 많고 정치 지식도 많다. 부당한 권위를 부정하지만 대인 신뢰가 높도 기부도 잘 한다. 정치적 의사표현이 적극적이라 시위와 항의에도 적극 참여하며, 유머를 즐기고 정치를 문화의 영역으로 승화시킨다. - 329쪽

국민통합은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전체주의적 발상이다. 문재인을 찍지 않은 국민에게도 시민권을 보장하고 정책의 수혜 대상으로부터 배제하지는 말아야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사람을 쓰려면 정당정치가 왜 필요한가. - 33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애란 작가만큼 사실적인 상황과 감정의 묘사를 그려낼 줄 아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그 상황이, 그 장소가, 그곳에서의 냄새가 어느새 밀려온다. 내겐 '믿고 보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있는 신뢰가는 작가이다. 대개 단편집의 제목은 그 단행본에 실린 여러 단편 중 대표적인 것을 내세우기 마련인데, 이번 책은 그렇지 않다. '바깥은 여름'이라는 제목의 단편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바깥은 여름>이라는 제목은 이 단편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관통하는 어떤 상황에 대한 표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내의 살뜰함으로 아파트를 얻은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이를 잃은 부부(입동), 주워키운 개의 약값으로 최신형 휴대폰을 구매하는 즐거움에 빠졌다가 결국 동생같은 개를 잃은 소년(노찬성과 에반), 공시생으로 만나게 되어 동거를 시작했지만 결국에는 현실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다시 공시생이된 남자와 결국에는 이별하는 한 여성(건너편), 다른 교수의 허물을 고스란히 뒤집어 쓰고도 결국 그 학교에 임용되지 못한 시간강사(풍경의 쓸모), 아들의 심성이 자신이 바라는 모습이 아니었던 것을 의심하며 아들이 그동안 자신이 알던 것과는 다를 수도 있음을 알아채가는 엄마(가리는 손), 제자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은 남편의 곁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여행을 떠나지만 결국엔 다시 돌아오고 마는 아내(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같은 시간과 공간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다른 체감을 느끼며 사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단편들 중 <침묵의 미래>는 읽어보아도 나로써는 잘 이해가 안되는 터라 어떻게 다른 작품과 같이 연결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이 단편들을 평범하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로 여기는 것은 매우 게으른 단정이다. 우리가 너무나도 쉽게 상정해버리는 '평범'이야말로 개인이 이상적으로 상상하는 꽤 괜찮은 삶의 상황일뿐, 실재(實在)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평범과 비범의 시각은 다분히 상대적인 것이어서, 어찌보면 '일반'이라고 통칭해버릴 수 있는 사람이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말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결국 평범함의 반의어로서의 특별함이란 상황의 차이가 아닌 상황을 대하는 태도로 귀결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단편들에 등장하는 이들은 다른 '무리'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감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라는 작가의 말이 이 모든 상황을 표현해준다. 더욱이 그것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는 계절에 대한 체감이다. 안은 무상하게 변하는데, 밖의 내게는 아직도 오지 않은 계절, 여전히 멈추어 있거나 더디게 흘러가는 시간,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저편... 세상은 변했으되 나만은 변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변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정체감을 느끼고 있는 요즘의 내 머릿속에는 '바깥은 여름'이라는 이 짧은 제목이 지워지지 않은 채 계속 맴돌고 있다.

아내에게는 정착의 사실뿐 아니라 실감이 필요한 듯했다. 쓸모와 필요로만 이뤄진 공간은 이제 물렸다는 듯, 못생긴 물건들과 사는 건 지쳤다는 듯. 아내는 물건에서 기능을 뺀 나머지를, 삶에서 생활을 뺀 나머지를 갖고 싶어했다. - 16쪽

그리고 그렇게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가 쌓여 계절이 되고, 계절이 쌓여 인생이 된다는 걸 배웠다. - 20쪽

누군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악의도 던져놓은 국화 같았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탄식과 안타까움을 표한 이웃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기 시작했는지. 그들은 마치 거대한 불행에 감염되기라도 할 듯 우리를 피하고 수군거렸다. 그래서 흰 꽃이 무더기로 그려진 벽지 아래 쪼그려앉은 아내를 보고 있자니, 아내가 동네 사람들로부터 ‘꽃매’를 맞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많은 이들이 ‘내가 이만큼 울어줬으니 너는 이제 그만 울라’며 줄기 긴 꽃으로 아내를 채찍질 하는 것처럼 보였다. - 36, 37쪽

보드라운 뺨과 맑은 침을 가진 찬성과 달리 할머니는 늙는 게 뭔지 알고 있었다. 늙는다는 건 육체가 점점 액체화되는 걸 뜻했다. 탄력을 잃고 물컹해진 몸 밖으로 땀과 고름, 침과 눈물, 피가 연신 새어나오는 걸 의미했다. - 50쪽

일본 어느 도시에서는 벚꽃이 피었다 하고, 뉴욕 한낮 기온도 십팔 도를 넘었다 했다. 여러모로 올 겨울은 겨울 같지 않았다. 파이프에서 물이 새듯 미래에서 봄이 새고 있었다. - 86, 87쪽

모교에서 첫 강의를 ‘트고’, 이 고장 저 고장으로 강의를 나가기 시작했을 때, 고속도로 주변에 펼쳐진 풍경을 보며 좀 심란했다. 여행중 몇 번 오간 길인데도 그랬다. 풍경이 더 이상 풍경일 수 없을 때, 나도 그 풍경의 일부라는 생각이 든 순간 생긴 불안이었다. 서울 토박이로서 내가 ‘중심’에 얼마나 익숙한지, 혜택에 얼마나 길들여졌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내가 어떻게 중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지 잘 보였다. - 158쪽

강의를 마치고 돌아올 때 종종 버스 창문에 얼비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어떤 사건 후 뭔가 간명하게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을 불만족스럽게 요약하고 나면 특히 그랬다. ‘그 일’ 이후 나는 내 인상이 미묘하게 바뀐 걸 알았다. 그럴 땐 내가 내 과거를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화는, 배치는 지금도 진행중이었다. - 173쪽

말한다고 네가 알까.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재이야, 어른들은 잘 헤어지지 않아. 서로 포개질 수 없는 간극을 확인하는 게 반드시 이별을 의미하지도 않고. 그건 타협이기 전에 타인을 대하는 예의랄까. 겸손의 한 방식이니까. 그래도 어떤 인간들은 결국 헤어지지. 누가 꼭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해. 서로 고유한 존재 방식과 중력 때문에. 안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날 수 없는 거야. 맹렬한 속도로 지구를 비껴가는 행성처럼. 수학적 원리에 의해 어마어마한 잠재적 사건 두 개가 스치는 거지. 웅장하고 고유하게 휙. 어느 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고 빠른 속도로 휙. 그렇지만 각자 내부에 무언가가 타서 없어졌다는 건 알아. 스쳤지만 탄 거야. 스치느라고. 부딪쳤으면 부서졌을 텐데. 지나치면서 연소된 거지. 어른이란 몸에 그런 그을음이 많은 사람인지도 모르겠구나. 그 검댕이 자기 내부에 자신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암호를 남긴. 상대가 한 말이 아닌, 하지 않은 말에 대해 의문과 경외를 동시에 갖는. - 213, 214쪽

그런데 무슨 말을 하다 여기까지 왔지? 그래, 엄마랑 아빠는...... 지쳐 있었어.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라, 자리에 누울 땐 벗는 모자처럼 피곤하면 제일 먼저 집어던지게 돼 있거든. - 214쪽

- 밖에 있으면 안에서 쌓은 게, 안에 있으면 밖에서 만든 게 부러운 모양이더라. 공부하는 사람들. - 25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3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너무도 익숙한 제목때문에 읽지도 않은 책을 읽었다고 착각하며 지나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책도 그러하다. 최근 영화화 된 <살인자의 기억법>은 벌써 몇 년 전 그 책이 출간된 초기에 읽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 책에서는 제목이 주는 익숙함 외에는 도무지 떠오르는 잔상이 없었다. 착오로 같은 책을 두번 읽는 것이 아니기를 바라며 책을 사서 펴보았다. (다행이었다. 읽지 않았던 책이다)


5장의 목차로 구성된 이 책은 작가가 초기에 제시하는 세 편의 그림 <마라의 죽음>, <유디트>, <사르다나팔의 죽음>과 동일한 소제목을 하나씩 담고 있다. 그림이 아닌 제목은 3장과 4장의 에비앙과 미미로, 이는 유디트와 같은 등장인물(여성)의 별칭이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마라의 죽음>과 <사르다나팔의 죽음> 사이에서 유디트, 에비앙, 미미라는 세 여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셈이다. 남성으로 추정되는 화자가 접한 죽음들이 왜 유독 여성으로만 이루어져 있을까 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작가도 화자도 남성이기에 죽음, 에로티시즘, 여성을 하나로 묶어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액자식 구성인 이 소설 1장 <마라의 죽음>에서는 자살을 기도하는 이들을 고객으로 맞이하고 그 행위를 돕는 화자가 이 글을 쓰는 이유를 밝힌다. 그는 신이 되고 싶어 한다. 신이 되기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두 가지 일은 창작과 살인을 행하는 것이다. <마라의 죽음>은 후에 '미미의 죽음'으로 형상화 되고, <사르다나팔의 죽음>은 유디트, 에비앙, 미미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 화자 자신으로 형상화된다.


한계령 어느 국도에서 폭설로 갖힌 채, 차 안에서 C와 유디트가 나누는 대화는, 현재의 밀폐된 공간에서의 탈출을 넘어선 '극'적인 장소의 갈망으로 이어진다. 이곳이 아닌 '북극'을 갈망하는 유디트와 C의 대화, 결국 사라져 찾을 수 없는 유디트의 자취는 현학적이고 몽롱하여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추후 화자는 유디트를 북극(죽음)으로 안내한다. 유디트의 만남은 그녀의 죽음으로 끝을 맺지만, 그녀를 기억하기 위해 클림트의 <유디트>를 보기 위해 떠난 비엔나에서 에비앙을 만나게 된다. 비록 에비앙을 직접적인 죽음으로 이끌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홍콩으로 돌아갔을지를 궁금해 하는 그는 에비앙에게서도 죽음의 그림자를 엿보기라도 한 듯 하다.


비엔나에서 돌아온 그는 C와 유디트, 유디트와 K, K와 미미로 이어지는 관계를 통하여 다시 한번 유디트를 둘러싼 이들을 접하게 된다. K와의 관계를 제대로 풀어가지 못한 미미 또한 유디트와 같이 자살할 수 있도록 도운 후 그는 소설의 끝을 맺으며 다른 곳으로 떠나려 한다. 책을 다 읽고 덮으니 글의 맨 마지막 문장이자, 제목 밑에 작은 글씨로 쓰여 있는 부제가 보인다.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그는 다른 장소에서 또다른 에비앙을, 또 다른 상처를, 또 다른 죽음을 만나게 될까.



자코뱅 당의 거두였던 마라가 죽은 후,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시작된다. 다비드는 자코뱅의 미학을 알고 있었다. 공포라는 연료 없이 혁명은 굴러가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그 관계가 뒤집힌다. 공포를 위해 혁명이 굴러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공포를 창출하는 자는 초연해야 한다. 자신이 유포한 공포의 에너지가 종국엔 그 자신마저 집어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로베스피에르는 결국 기요틴에 의해 목이 잘렸다. - 8, 9쪽

셰익스피어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죽음이 감히 우리에게 찾아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 비밀스런 죽음의 집으로 달려들어 간다면 그것은 죄일까?" - 16쪽

"너도 똑같구나. 그런 질문이나 해대고 말야. 넌 이해 못 해. 그리고 앞으로 이딴 거 묻지 마. 난 뭐 물어보는 인간들 질색이야. 질문이 많은 남자들은 숨길 게 많은 놈들이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면 될걸 꼭 남에게 묻는단 말야." - 39쪽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은 유쾌하다. 그 시간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책을 읽어도 되고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해도 재미있다.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어떤 부채의식에도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다. 반대로 누군가를 기다리게 하는 일은 불쾌하다. 그 시간은 사람을 조급하고 비굴하게 만든다. - 93쪽

"인간들은 불멸에 대한 강박 때문에 참된 아름다움을 박제하죠. 그들은 죽은 예술에 길들여진 노예들이에요." - 10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