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의 정치학 - 왜 진보 언론조차 노무현·문재인을 공격하는가?
조기숙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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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전에 읽은 책인데, 연휴 때 책 정리를 하다가 이제야 읽었다는 기록을 남긴다. SNS를 하다가 우연히 한 동영상에서 신좌파에 대한 설명자료를 접하게 되었다. 기존 자본 vs 노동의 대립을 통하여 좌와 우를 구분하던 이분법이 현재는 더이상 유용하지 않으며, 탈권위주의를 추구하는 새로운 이념이 이른바 신좌파를 창출하였다는 짧은 설명은 꽤 흥미로웠다. 그 동영상 자료 말미에 바로 이 책에 대한 광고가 덧붙여져 바로 구매해서 읽었다. 


'노무현과 문재인 죽이기'(1장), '구좌파 진보언론 대 신좌파 노무현'(2장), '호남 왕따와 친노 왕따, 그 불가분의 관계'(3장)라는 구성과 강렬한 표현을 보면, 대선 당시의 언론구도와 탄핵 이후 좌우의 극렬한 대립, 중도라 칭하는 이들의 선전 등 혼란스러웠던 상황이 그려지는듯 하다. 저자는 노무현과 문재인에 대한 그동안의 진보와 보수언론의 프레임을 비판적으로 제시하여, 이른바 진보언론이라고 불리우는 한경오마저도 이러한 프레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를 설명한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현재는 아직까지도 자본과 노동의 대립의 프레임에 갇혀 있는 낡은 사고들이 탈권위적, 탈물질적, 탈이념적 색채를 갖고 있는 신좌파의 이념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 시점이다. 그러면서 진보언론마저도 자본을 비판하며 결국 자본으로 회귀하는 순환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글이 일련의 시간적 흐름으로 서술된 것이 아니라, 저자가 강조하는 포인트가 시기상 노사모, 대선,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절 등을 전후로 이동하며 그때마다 설명이 되고 있어 다소 산만한 감은 없지 않다. 물론 이해의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겠지만 각 장 마지막에 붙어 있는 '정봉주와의 대담'은 팟캐스트의 대화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어서 어수선하다는 느낌도 들었다.그럼에도 보수를 막연하게 싫어하는 내가 정말 진보라 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자문할 수 있었다는 점은 이 책의 내용만이 아니라 책을 읽었다는 것 자체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더불어 정치에 관심이 없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지만 조기숙이라는 이름이나 그를 둘러싼 여러 논쟁들에 그렇게 익숙하지 않았고,노무현 vs 조중동의 대립에서는 조중동을 비판하면서도, 노무현 vs 한경오의 대립에서는 나름 진보적인척하며 한경오의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으며, 노동 이외의 가치들을 모두 경원시하는 시각을 견지하려 했던 지난 날의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보통 가해자와 피해자만 있으면 왕따가 성립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왕따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사회적 구조와 집단의 협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는 의식하든 하지 않든, 왕따가 발생하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왕따에 대한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왕따 현상은 피해자와 가해자만이 아니라 동조자, 방관자가 있어야 비로소 성립된다. - 92, 93쪽

즉, 노무현은 호남 왕따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그래서 노무현은 호남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되는 데 성공했다. 이는 가해자 입장에서는 매우 무서운 일이었을 것이다. 가해자는 최초의 방어자를 철저히 제압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야 제2, 제3의 방어자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노무현을 철저히 왕따시켰다. - 97쪽

서구에서는 20세기에 좌우 대립이 있었다. 영국에선 자유당이 보수당에 일부 흡수되면서 사라지고, 노동당이 좌파 정당으로 등장해 복지권이 확립되었다. 그래서 20세기에는 경제적 민주화를 추구하면 좌파, 경제적 자유(사유재산권)를 추구하면 우파가 되었다. 경제 문제가 정당을 가르는 핵심 균열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 68혁명이 일어났다. 68혁명은 경직되고 비인간화 된 공산주의에 대한 염증을 표출했다. 20세기의 자본이냐 노동이냐 하던 경제적 균열은 둘 다 물질주의일 뿐이다. 물질주의는 빈곤과 전쟁 등을 겪은 세대에게는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68세대는 2차 대전 이후 평화화 풍요 속에서 자란 중산층의 자녀들이다. 이들은 전후 세대로서 배고픔과 전쟁의 위협을 모른다. 이들에겐 물질이 더는 중요하지 않기에 진보와 보수, 좌와 우가 기본적으로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히려 좌우가 서로 싸우면서도 똑같이 권위주의적이라는 점을 혐오했다.
권위주의 문화는 기본적으로 집단주의에 기초한다. 집단주의는 집단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데, 이것이 유럽의 신세대에게는 설득력이 없었다. - 156쪽

노사모를 연구한 김용호 교수에 따르면, 이들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인주의적이고 탈물질주의적인 특성을 나타낸 집단이라고 한다. 나는 노사모가 우리나라 최초의 68혁명 세대라고 생각한다. 19세기 말의 자유주의는 사유재산을 지키기 위한 참정권운동이었다. 즉 제1세대 시민권을 목표로 했었다. 그러나 노사모에서 시작된 친노 세력은 참여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제3세대 시민권자였다. 참여정부에서 일했던 모든 인사가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노무현을 지지하고 지금 문재인을 지지하는 친노 시민들은 신좌파라고 할 수 있다.
2004년 탄핵 반대 집회는 시민단체들이 주최했지만 자발적 시민들의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에서 신좌파적인 특징을 띠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와 같은 ‘민주주의 2.0’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 173쪽

민주주의는 모든 발언을 허용하는 게 아니라 민주주의의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의 발언만 허용한다. 민주주의를 위협에 빠뜨리는 일베의 자유는 사법적 처벌의 대상이라는 게 선진 민주국의 기준이다. - 189쪽

참여정부 말기, 소위 진보 지식인들이 "노무현, 유시민, 조기숙은 진보가 아니니 진보 논쟁에 끼지 말라"고 일갈한 적이 있다. 20세기 이야기라면 이들이 맞다. 좌파가 진보였다. 그런데 노무현은 21세기 최초의 대통령이다. 나는 오히려 구좌파만이 진보라고 생각하는 그들이 더는 진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노동만이 최고의 가치이고 노동자만이 사회의 진보를 이룬다는 생각은 이미 20세기의 흘러간 노래일 뿐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1968년의 혁명과 세대교체를 거치면서 유럽은 혁명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우리는 1987년 참정권을 획득했고, 1988년부터 1990년대 초까지 지속된 노조의 파업과 노동쟁의로 노동자의 인권과 권익 측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이때 제2세대 시민권을 위해 가장 열심히 싸웠던 사람이 노무현, 문재인 같은 노동.인권 변호사였다. - 192쪽

노 대통령이 한.미FTA를 체결하자 소위 진보언론과 지식인은 왼쪽 깜빡이 켜고 우회전을 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세계화와 자유무역이 신자유주의라며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합리적 토론을 막는 정치공세일 뿐이다. 우리는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다. 수출이 우리만큼 중요하지 않은 유럽의 대다수 좌우 정당도 EU에 동의했다. EU는 자유무역뿐 아니라 화폐의 통일, 노동력의 이전까지 포함하는 거대한 세계화다. 여기에 반대하는 건 소수의 극우 세력뿐이다. 트럼프나 샌더스 같은 극우, 극좌파만이 보호무역을 지지한다. - 194쪽

미국의 흑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민주당 대통령 후보와 조용히 협상할 뿐, 공화당을 찍겠다고 협박하진 않는다. 공화당 찍어봐야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조용히 협상하는 이유는 대놓고 협상하다 백인들을 자극해 그들이 공화당으로 결집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흑인들이 조심했음에도 2016년 미국 대선에서는 백인 남성만 공화당으로 결집한 게 아니라 백인 여성의 53%가 트럼프를 찍었다. 빼앗기는 것에 대한 가진 자들의 두려움이 더 갖기 위한 못 가진자들의 마음보다 더 절실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 289, 290쪽

국민의당은 결국 호남과 민주당을 이간질하고 지역주의를 부추김으로써 호남에서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호남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호남 왕따의 방어자였던 친노와 호남 사이를 갈라놓은 것이다. 이들이 호남 왕따로 국민을 분열시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한 역대 대구 출신 대통령들과 무엇이 다른가? 국민의당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호남인 스스로 왕따를 자초하게 했고, 대구 출신 역대 대통령들은 외부에서 호남인을 왕따시켰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둘 다 호남 왕따 현상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 290쪽

우리나라에서 내각제 개헌이 위험한 이유는 정당의 당원이 힘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의원들에게 권력을 주면 국회의원 선거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내각제에서 지도부가 되려면 다선 의원이 유리하므로, 국민은 자기 지역 의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계속 뽑아줘야만 한다. 지금 다선 의원들이 국민의 삶에 무슨 도움을 주는지 한번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북한과 대치 상태에서 우리나라의 이념적 지형은 매우 좁다. 결국 국회 선진화법 핑계로 여도 야도 없이 180명의 의원이 손잡고 돌아가면서 죽을 때까지 권력 나눠 먹기를 하겠다는 이야기다. 이들이 그리는 이상은 딱 일본이다. - 315쪽


페이스북에서 ‘신좌파(참여민주파)’라는 용어에 대해 설왕설래가 있었다. 이 책을 통해 더 명확해졌겠지만 신좌파는 서구적 맥락에서 1968년 이후에 만들어진 용어다. 신좌파는 좌파의 아류가 아니라 20세기 이념인 좌우를 모두 거부하면서도 진보적인 삶을 지향해서 붙어진 용어다.
좌파는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기에 개인을 억압한다. 우파는 시장의 역할을 강조하기에 소비만능주의가 된다. 국가와 시장 모두를 거부하면서 자유로운 개인의 모임인 공동체를 통한 제3의 영역 확장을 강조하는 게 신좌파다.
신좌파의 시각으로는 구좌파와 우파가 권위주의적이란 면에서 차이가 없다. 신좌파는 좌우를 모두 부정하기에 탈권위주의적이고 탈 물질적이며, 탈이념적이다. 문화적으로 리버럴하고, 경제적으로는 실용적이며, 정치에 관심이 많고 정치 지식도 많다. 부당한 권위를 부정하지만 대인 신뢰가 높도 기부도 잘 한다. 정치적 의사표현이 적극적이라 시위와 항의에도 적극 참여하며, 유머를 즐기고 정치를 문화의 영역으로 승화시킨다. - 329쪽

국민통합은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전체주의적 발상이다. 문재인을 찍지 않은 국민에게도 시민권을 보장하고 정책의 수혜 대상으로부터 배제하지는 말아야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사람을 쓰려면 정당정치가 왜 필요한가. - 3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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