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류시화 지음 / 더숲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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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찾아 본 류시화의 책이다. 요즘 같이 삶이 팍팍해지고 여유 없어지면, 가끔 이런 류의 책을 찾고는 한다. 내가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한 즉각적인 해답이 아닌, '나'와 나를 둘러싼 상황을 한 발자국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고자 할 때, 특히 그런 것 같다(물론, 아주 실용적인 책을 읽는다고 해서 Do It Now가 가능한 것도 아니다). 어쩌면 내가 이런 시기와 기분을 느낄 때즘 의례히 삶에 관한 에세이를 찾는 것이 그가 말한 '퀘렌시아의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철학의 본질은 대체적으로 유사하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같은 화두를 삶을 통해 스스로 끊임없이 삶의 방향과 태도에 대해 묻고 답해야 하는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방황, 상처의 치유, 자아의 회복, 공감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와 상념들로 구성된 이 책은 목적없이 바쁘게만 움직이는 내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한 템포 쉴 수 있게 해주었다. 누구나 철학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철학 없는 삶은 부표 없는 항해와도 같다. 


사실 이런 류의 책은 반복되는 표현이나 유사한 우화, 에피소드가 많다. 유사한 책 몇 권을 읽다보면 '또 그 얘기냐' 생각하기 십상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하는 행동이나 말이 그 사람 삶의 마지막 순간이 될 수도 있다", "내 감정은 내가 아니다. 나는 그저 관찰자여야 한다"라는 등의 이야기들. 그러나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은 다르다고 했던가.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대목은 저자가 배우 김혜자와 네팔 여행을 갔을 대의 이야기다. 노상에서 울고 있는 여인을 가만히 안아 주며 같이 동감해주던 김혜자가, 그녀가 좌판에서 파는 물건 중 싸구려 팔지 하나를 골라 300달러를 지불하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횡재를 하고 싶지 않겠어요? 인생은 누가에게나 힘들잖아요"라고 말했다던 장면에서 절로 탄성이 나왔다. 진정한 공감과 연민이라는 것은 그 상황에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통찰과 애정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나무에 앉은 새는 가지가 부러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무가 아니라 자신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다"라는 뒷표지의 글귀가 가슴에 팍 박혀버렸다. 어찌 내 주변에는 나뭇가지에 자신의 발을 칭칭 동여맨 이들만 있을까, 나도 모르게 실소를 날리며, 과연 나는 내 날개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책을 덮고 일상으로 넘어가면 또 똑같은 태도로 삶을 살겠지만, 입에서는 예전과 같이 악에 받친 말이 나오겠지만, 내 방향과 맞지 않는 것을 죄악시하고 또 반대하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멈칫하거나 한 번쯤은 더 생각하고 말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 말했듯이, 인생은 쉼표 없는 악보와 같기 때문에 연주자가 필요할 때마다 스스로 쉼표를 매겨 가며 연주해야만 한다.
가장 진실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퀘렌시아이다. 나아가 언제 어디서나 진실한 자신이 될 수 있다면, 싸움을 멈추고 평화로움 안에 머물 수 있다면, 이 세상 모든 곳이 퀘렌시아가 될 수 있다. 신은 본래 이 세상을 그런 장소로 창조했다. 자연스러운 나로 존재하는 곳으로, 아메리카 인디언들처럼 세상과 대지와의 교감 속에서 활력을 얻고 영적으로 충만해지는 장소로. 그런 세상을 투우장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다. - 15, 16

우리가 누군가에게 하는 행동이나 말이 그 사람 삶의 마지막 순간이 될 수도 있으며, 그 사람은 그 느낌을 간직하고 떠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 29

우리 자신도 목표 지점과 원하는 결과를 향해 가느라 삶이 그 여정에서 선물하는 것들을 지나치기 일쑤이다. 삶은 그 여정들로 이루어지는 것인데도 말이다. 한 사람은 도중의 난관들을 피해 서둘러 목적지에 도착하느라 마음이 급하지만, 또 한 사람은 과정에서 발견하는 신비와 뜻밖의 경험들에서 순수한 기쁨을 얻는다. 그에게 삶은 놓칠 수 없는 소중한 선물이며, 목적지는 오히려 그 과정들을 경험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설정한 지점에 불과하다. 목적지에 이르면 또 다른 목적지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모든 과정과 순간순간이 목적이’라는 말은 트레킹뿐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진리이다. - 34, 35

여행이 내게 준 선물은 삶과 세상에 대한 예찬, 그것이다. 광부는 수많은 돌들에 불평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광부의 눈은 보석을 발견할 뿐이다. 예찬하는 마음 역시 모든 돌들을 보석으로 만든다. 부자는 누구인가? 많이 감동하는 사람이다.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다.
<지상의 양식>에서 앙드레 지드는 말한다.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 가듯이 바라보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 62

‘우리가 곤경에 빠지는 것은 뭔가를 몰라서가 아니라 뭔가를 확실히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라는 말은 진리이다. 자세히 볼수록 더 모르게 된다. 그것이 존재의 신비이다. 한 존재를 아는 것은 한 세계를 끌어안는 일이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모르는 그 무한한 세계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이름과 성별과 직업으로 분류하고 규정짓는 순간, 나는 그 무한한 세계를 사랑하기를 포기한 것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그냥 ‘그대’라고 불렀다. 그 자체로 존중이고 사랑이다.
당신은 이름 없이 나에게로 오면 좋겠다. 나도 그 많은 이름을 버리고 당신에게로 가면 좋겠다. 이름을 알기 전에 서로를 느끼면 좋겠다. - 66, 67

이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모든 행위는 고유한 파장이 있고, 그 파장과 일치하는 존재들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다. 아무리 어둔 길이라도 혼자 걷는 길은 없다. 혼자라고 믿는다면, 자신을 도우러 오는 수많은 존재들을 외면하는 것이다. 그러면 시공간을 초월한 협력의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 인생은 혼자 걷는 길이라고 말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이 세상 안에서는 혼자 내던져지는 법이 없다. 단지 우리가 혼자라고 믿는 것일 뿐이다. - 77, 78

화살에 맞으면 아픔을 느끼되 그 아픔을 과장하지 말라고 붓다는 충고했다. 병이 난 제자를 찾아가서도 아파하되 그 아픔에 깨어 있으라고 가르쳤다. 상처에 너무 상처 받지 말 것, 실망에 너무 실망하지 말 것, 아픔에 너무 아파하지 말 것 – 이것이 두 번째 화살을 피하는 방법이다. 잠시 아플 뿐이고, 잠시 화가 날 뿐이고, 잠시 슬플 뿐이면 되는 것이다. 그 순간이 지나면 우리는 다시 맑고 투명해진다.
우리는 첫 번째 화살에 반응을 보이는 데는 익숙하지만, 두 번째 화살을 다루는 데는 매우 서툴다. 칼루 린포체는 말한다.
"용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해방시켜 주는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을 향한 원망과 분노와 증오에서 나 자신이 해방되는 일이다." - 137

즐겁고,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사는 것을 방해하는 교리들은 잘못 베낀 것일 가능성이 높다. 모든 정의와 도그마를 넘어 두려움 없이 지금 이 순간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면 언제든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이 살아 있는 경전이다. 인생은 필사본이 아니라 각자 스스로 써 나가는 책이다. 우리는 예술가이며 예술 그 자체이다. - 149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3인의 현대 시인 중 한 명인 올라브 H. 하우게의 시가 있다.

모든 진리를 가지고 나에게 오지 말라
내가 목말라한다고 바다를 가져오지는 말라
내가 빛을 찾는다고 하늘을 가져오지는 말라
다만 하나의 암시, 이슬 몇 방울, 파편 하나를 보여달라
호수에서 나온 새가 물방을 몇 개 묻혀 나르듯
바람이 소금 알갱이 하나 실어 나르듯 – 164

당신이 추구의 길에 있을 때, 누군가가 자신이 모든 해답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 그를 따르지 말아야 한다. 그 해답은 당신의 목적지가 아닌 그의 목적지로 데려갈 것이기 때문이다. 목말라하는 당신을 위한다고 바다를 주려고 하는 사람은 믿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당신의 갈증을 해결해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빛을 찾는 당신에게 누군가가 하늘을 가져다준다면 당신은 오히려 눈이 멀 것이다. – 164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고 있다. 한 마리는 악한 늑대이다. 그것은 분노이고, 질투이고, 탐욕이다. 거만함이고, 거짓이고, 우월감이다. 다른 한 마리는 선한 늑대이다. 그것은 친절이고, 겸허함이고, 공감이다. 기쁨이고, 평화이고, 사랑이다."
귀 기울여 듣던 손자가 물었다.
"어느 쪽 늑대가 이기죠?"
체로키 노인이 말했다.
"네가 먹이를 주는 쪽이 이기지." - 174

우리가 겪는 일들은 삶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사건들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일어난다. 예기치 않았던 불행은 껍질을 태워 버리는 불과 같아서 껍질 속에 가려져 있던 우리 본연의 모습을 보게 한다. - 181

"문제는 물병의 무게가 아니라, 그대가 그것을 얼마나 오래 들고 있는가이다. 과거의 상처나 기억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오래들고 있을수록 그것들은 이 물병처럼 그 무게를 더할 것이다."
과거를 내려놓고 현재를 붙잡는 것이 삶의 기술이다. 오래전에 놓아 버렸어야만 하는 것들을 놓아 버려야 한다. 그다음에 오는 자유는 무한한 비상이다. 자유는 과거와의 결별에서 온다.
뉴욕 어느 서점의 유리에 붙어 있던 작자 미상의 글귀 하나가 내 마음에 오래도록 남아 있다. ‘나무에 앉은 새는 가지가 부러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는 나무가 아니라 자신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다.’ - 204

생각은 내가 아니다. 본래의 나는 생각들이 아니라 그것들의 관찰자이다. 그 ‘나’의 알아차림이 없으면 생각이 우리 삶의 주인이 되고, 현존이 아니라 끊임없는 중얼거림이 일상을 차지한다. 이 중얼거림에서 깨어나 미소 짓지 않겠는가? - 210

어두울 때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때 빛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시인 시어도어 로스케도 썼다.
‘어둠 속에서 눈은 비로소 보기 시작한다.’ - 237

인간에 대한 가장 나쁜 예의는 ‘너는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바로잡아야만 한다.’는 자세이다. 각자의 내면에 훌륭한 교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일이다. 자신이 가진 유일한 연장이 망치일 때는 모든 대상을 튀어나온 못으로 보게 된다. 자신이 옳은 길을 걷고 있다고 해서 그 길만이 옳은 것은 아니다. 그 길은 많은 옳은 길 중 하나일 뿐이다. 행복한 관계는 비평이나 조언이 아니라 상대방의 ‘순수 존재’를 잊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찾아온다. -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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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부기 셔플 - 2017 제5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이진 지음 / 광화문글방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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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장강명의 <당선, 합격, 계급>을 읽던 중 그가 직접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는 사례에서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다. "<기타 부기 셔플>이 너무 재미있어서 다른 원고에는 마음이 가지 않았다"는 대목을 읽던 중 책을 잠시 접어 두고, 이 책을 바로 구매한 후 읽던 책을 계속 읽었다. 다른 이의 평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아니지만,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현역 작가가 '너무 재미있다'고 밝힐 정도면 정말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더욱이 <당선, 합격, 계급>에서도 나왔듯이, "새로운 작가의 새로운 장편소설을 읽고 싶어 하는 시대의 요구"는 이제 독자들이 책을 선택하는 트렌드 또한 'ㅇㅇ(문학)상 수상작'을 통해 검증된 선택을 하게 만들고, 나 또한 그러한 풍토에서 자유롭지는 않은 것 같다.


책을 그리 빨리 읽는 편은 아닌데, 하루만에 다 읽었을 정도로 흡입력이 강하고 전개가 빠른 소설이다. 우리의 과거사에서 서구의 음악이 유입되며 대중화되기 전의 시점을 포착하여, 한국전쟁 이후 피폐한 사회상 속에서 생계도 제대로 해결할 수 없었던 한 개인이 우연히 미8군을 대상으로 한 쇼단에 소속되어 음악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렸다. 먹고 살기도 힘든 재건 상황에서 음악을 통하여 생계를 해결하고 자아성취를 이룬 주인공(현)의 삶은 일반 국민들의 삶과는 다르고 이질적이다. 국가, 경제력, 인종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질화될 수 있는 유일한 요소인 언어, 그것을 둘러싼 음악의 힘이 그를 포함한 그룹(와일드 캐츠)을 한국에 속하지만 전혀 다른 영역인 캠프, 미합중국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전에는 차마 생각할 수도 없었던 부와 인기를 누리게 된 그들의 앞 길에는 또다른 소멸이 기다리고 있다.


한국전쟁, 미군정, 군부독재, 유신과 같은 거시적인 비극은, 그 시대를 사는 한 개인의 삶에 맞닿아 구체화됨으로써 더 큰 비극으로 또는 전혀 다른 방향의 희극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책을 읽는 내내 과거로부터 이어진 현 시대를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내가 살아보지 못한 과거시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또 얼마나 생경한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작가의 말을 읽던 중 현재의 낯섦과 부적응이라는 고독의 근원을 과거로부터 살펴본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시간을 들여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즐거움과 더불어 인생에서 나 자신에 대한 시공간을 재편해보려는 시도를 해봐야겠다는 삶의 숙제를 받은 것 같았다.

사람을 무대 위에 서게 만드는 근본적인 힘은 지극히 본능적이며 육체적인 것이었다. 모든 딴따라들의 영혼에 찍힌 낙인, 속된말로 ‘끼’라고 불리는 그 재능은 최초에는 이성의 관심을 끌어보려는 풋내기다운 욕망에서 시작한다. 쇼를 거듭해갈수록 그 욕망은 덩치를 부풀려 수백 수천 청중의 우레 같은 갈채를 갈구하게 된다. 무대라는 단상 위에서 기독교 부흥회의 장로처럼 접신을 한다. 인간을 초월하여 신에 가까워지고자 하는 욕망. 딴따라의 야생적 끼가 도달하는 궁극적인 지점에는 역설적으로 종교적인 숭고함이 있었다. - 110

전쟁 이후 세상은 쭉 무저갱이었다. 혁명이 일어난 지 일 년 만에 또 다른 혁명이 일어나고,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새로운 법리와 규율들, 자고 일어나면 어제의 명사가 사형수가 되고, 가도를 헤매던 부랑아와 걸인들은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철철이 찾아오는 천재지변과 전염병 속에서 오직 재수와 요행수만이 개인의 운명을 판가름했다. - 132, 133

하지만 누가 노예일까? 따져보자면 꿈 한 번 못 꾸고 사는 쪽이 노예가 아닐까? 나는 스무 해를 살면서 단 한 번도 내 마음속에 노예를 품어본 적이 없어. - 186

예외가 존재하는 혁명이란 모순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모순은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라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 187

"키키도 아예 잊었어요? 형에게 키키는 뭐였나요?"
"키키? 음악이랑 똑같아. 전부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
대답하며, 강엽 형은 눈을 감고 벽에 기댄 채 천천히 모로 쓰러졌다. - 238

전부이되 아무것도 아닌 것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동경하고 사랑하지만 끝내 손에 쥘 수 없는 것, 그러기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것. - 242

내가 사는 시공간은 항상 낯설었다. 책과 말과 미디어로 배운 세상과 내 눈에 비치는 세상은 서툴게 깎은 톱니바퀴들처럼 아귀가 맞지 않고 어긋나 있었다. 때로는 내가 먼 미래에서 뚝 떨어진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정반대로 과거에서 온 미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예 사람이 아닌 존재인 것처럼도 느껴졌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공간에 의문을 품는다는 것, 사회에 부적응한다는 것은 그렇게 고독해지는 일이었다. - 256(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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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의 미래 - 헬레나와의 대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지음, 최요한 옮김 / 남해의봄날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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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에 이은 저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세계화와 관련하여 파생하는 다양한 문제점들이 ‘같은 원인‘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해결 또한 동시에 할 수 있다는 주장은 거대하고 복합적인 문제점들을 일거에 단순화 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현 생태계에서 지역화의 동기와 지속성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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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309동1201호(김민섭)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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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법(고등교육법 일부개정안) 시행을 앞둔 시점에 시간강사들과의 계약을 해지하는 대학들이 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며 다시 책을 폈다. 시간강사들에게 교원의 지위를 제공함으로써 처우를 개선하고, 1년 이상의 임용기간을 보장함으로써 강사 개인이나 대학에 보다 충실한 강의전담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2007년 비정규직법의 시행에 따른 대량해고 사태가 이번에는 고스란히 기업이 아닌 '대학'에 적용되는 것은 아닌지 적잖은 우려를 갖게 된다. 


수강생이 많은 대규모 교양강의의 대부분을 시간강사들에게 맡기는 반면, 그들에 대한 처우는 시간당 5~6만원 정도로 책정하는 대학의 태도에 절망한 지 오래이고, 강사들은 그나마 강의라도 없는 방학이면 어떠한 수당도 받지 못하는 '계절적 실업자'임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학문'을 계속 하고 싶어 대학원에 진학한 저자의 분투기를 따라 읽노라면, 착취를 당연시 여기는 구조와 시스템에 눈살이 찌푸려 진다. 저자는 모두들 알고 있었지만 당연하게 생각했던 대학의 구조적 착취라는 '불편한 진실'을 담담하지만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알바 이하의 취급을 받는 강사의 처우에 대한 공론을 촉발시켰다. 


특히, "숨 쉬는 비용을 제외하고도 삼백만 원이 비었다"는 말로 대학원 등록금도 다 커버하지 못하는 조교, 연구원 생활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과연 이러한 터전에서 학업을 계속할 수는 있는 것일지, 명문대졸업→유학→교수임용과 같은 엘리트 코스를 밟지 않고서 교수가 된다는 것이 가능은 한 일인지, 그런 교수 밑에서 '잡일'을 해가며 학위를 딴들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는 있을 것인지, 오히려 우리나라 대학원이라는 것이 싼 값에 사람을 부리고, 그들을 결국 고학력 실업자로 내모는 시스템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1부(대학원생의 시간)를 통해 드러낸 이런 처연한 상황은, 2부(시간강사의 시간)에서 어느 정도 해소되는 듯 하다. 교수와 동기사회에서 벗어나 학생들과의 직접적인 호흡에 직면한 강의실에서 저자는 초짜의 어설픔을 솔직함과 배움(교학상장)의 태도로 승화시킨다. 대학원을 거친 시간강사의 생활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만족할 수 없는 처우임에도, 습득한 지식을 나누며 서로 배울 수 있다는 대학 본연의 기능이, 삶의 극단으로 몰리고 있던 비정규직 강사에게 전혀 다른 차원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주는 것 같다.


그럼에도 책을 다 읽은 후의 기분은 그리 좋지가 않다. 여전히 초학자들을 중요한 구성원으로 생각하지 않는 대학이, 입시시험의 성적 순으로 배열된 집합소임을 부인하지 않는 대학이, 취업을 위하여 적절한 간판을 제공해주는 기업으로 전락한 지 오래인 대학이, 과연 우리사회에서 그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런 대학에서 배우는 학문이, 그 실제 내용과는 별도로 학점이라는 숫자로 표기되는 형식 이상의 이미를 지닐 수 있을지, 기괴하고 편협한 아집을 생산하는 것이 아닌, 유연하고 포용적인 사고를 끌어낼 수 있는 배움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기대해볼만 한 것일까.

‘대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괴물이다. 대학원생에서 시간강사로 이어지는 착취의 구조는 이미 공고한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구조 조정을 가속화해온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다. 그런데 대학은 스스로에게 숭고함과 신성함이라는 환상을 덧입히는 동시에 그 어느 집단보다도 기민하게 자본의 논리에 영합해왔다. 흔히 대학은 그렇지 않을 거야, 하고 미루어 짐작하지만 대학은 그 어느 기업보다도 노동권의 치외법권 지대에 있다. - 13

지방시를 쓰며 스스로의 삶을 쉽게 규정할 수 없는 데 대해 놀라고, 또한 절망했다. 사회인으로도, 노동자로도, 학생으로도, 나의 과거와 현재를 쉽게 규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전까지 나에게 대학은 신성하고 숭고한 공간이었다. 지성, 학문, 연구, 진리, 이러한 단어들의 총체였고, 나에게는 그 일원이라는 자부심이 언제나 있었다. 하지만 대학의 맨얼굴과 점차 마주하며, 그러한 환상은 무참히 깨어져 나갔다. 나는 그저 대학을 배회하는 유령에 지나지 않았구나, 하는 처연한 자기 규정을 하게 됨과 동시에,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 15

그래서 원망은 나를 둘러싼 주변인들, 그러니까 선후배 연구자나 지도 교수에게 가서 닿았다. 지방시를 인터넷에 연재하던 초기에는 그들을 향한 공격적인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연재를 거듭하며 점차 나를, 그리고 모두를 포위한 어떤 거대한 ‘괴물’이 조금씩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어떤 개별 주체가 아닌 대학이 구축한 ‘시스템’ 그 자체였다. 학부생이든, 대학원생이든, 시간강사든, 교수든, 교직원이든, 대학의 그 누구든, 그 안에서는 온전히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비로소 인식했다. - 15, 16

지식을 만드는 공간이, 햄버거를 만드는 공간보다 사람을 위하지 못한다면, 참 슬픈 일이다. - 42

언제가부터 나타난 많은 ‘힐링 전도사’들은 ‘꿈’, ‘도전’, ‘열정’과 같은 단어들을 청년의 미덕으로 제시한다. 듣기엔 참 좋은 말이다. 그런데 이들이 구축한 ‘청년론’은 젊은 세대들의 아픔을 그저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규정해내기에 문제가 된다. 이 마법의 논리를 구성하는 핵심은 바로 ‘노력’이다. 취직하지 못하는 것, 연애하지 못하는 것, 그 어떤 모든 것들이 기성세대만큼의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청년 세대를 위한 위안이나 동기부여가 되지 못한다. 그저 자기혐오감을 증식하는 수단이 될 뿐이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을 들여다볼 여지를 주지 않는다. 기성세대는 스스로의 역할을 뒤돌아보는 대신 그저 청년의 노력을 심사하는 엄격한 평가자가 된다. 결국,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시대적 계발의 논리는 기성세대를 위한 것도, 청년 세대를 위한 것도 아니다. 그저 지금의 세대 갈등을 더욱 심화하고 있을 뿐이다. - 52, 53

함께 꿈꾸던 친구들은 서른이 넘어 다시 만난 자리에서 보통 자신의 과거를 철없던 행동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여유가 생기면 다시 시작할 ‘취미’로 ‘꿈’을 격하한다. 괜찮다, 살다 보면 그런 것이다. 비난할 만한 일도 아니고 오히려 ‘사회인’이 되었음을 축하해야 한다. 하지만 허벌과 같은, 혹은 제도권에 한 발 걸치고 있지만 여전히 반사회적 인간인 나와 같은 인간들과 대면했을 때, 그것을 철없음으로 여기는 일만은 없었으면 한다. 그것은 서로의 과거에 대한, 그리고 아직도 후진 기어를 넣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과거진행형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우리도 어쨌든 자신이 선택한 도로에서 열심히 달리고 있다. - 74, 75

나는 지금껏 많은 논문을 썼지만, 아직 한 번도 ‘글값’을 받아보지 못했다. 학술진흥재단의 연구자 지원 제도는 대부분 정규직 교수를 위한 것이고, 박사과정 수료 신분의 시간강사가 지원할 수 있는 항목은 아예 없다. 물론 내 연구가 학술진흥재단 등재지에 게재 판정을 받고 좋은 연구자의 논문에 피인용된 것을 봤을 때 느끼는 기쁨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다. 하지만 연구자에게 연구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숭고’가 아닌 ‘생계’가 되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그래야 강의에 충실할 수 있다. - 195

청년들에게 ‘좋아하는 일’은 다시 태어나야 한 번쯤 선택해볼 만한 일이 되었다. 젊은 세대들은 미리 쓰는 유언장에서조차 자신의 꿈을 고이 접어두고 만다. 인생을 두 번 선택할 수 없는 이상 당연히 ‘해야하는 일’을 해야 하는, 꿈꾸는 것이 꿈이 되어버린 시대, 그래서 지금은 ‘헬조선’이 된다. 신자유주의가 가속화된 이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드러내는 신조어다. - 232

삶의 가치 판단을 할 자격은, 그리고 자격을 정할 자격은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있다. 행복을 정할 자격 역시 자기 자신에게 있다. 그 누구도 타인의 삶을 멋대로 평가할 수 없고, 그것은 이미 모두가 혐오해 마지않는 ‘갑질’이 될 뿐이다. 누군가는 내게 ‘교수’가 되기 위해 ‘지방시’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것 아닌가 묻는다. 그러니 본인이 그러한 삶을 선택했다고도 말한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언젠가 운 좋게 교수가 되면 모든 삶을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 잠시 상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나의 하루하루를 갉아먹었고, 나의 현재를 그 무엇도 아닌 것으로 격하해버렸다. 간신히 빠져나와 주위를 둘러보니, 오로지 교수가 되기 위해 존재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다만 강의실에서든 연구실에서든 노동자로 존재하기 위해 모두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정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자격을 정하는 데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

삶의 가치 판단을 할 자격은, 그리고 자격을 정할 자격은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있다. 행복을 정할 자격 역시 자기 자신에게 있다. 그 누구도 타인의 삶을 멋대로 평가할 수 없고, 그것은 이미 모두가 혐오해 마지않는 ‘갑질’이 될 뿐이다. - 236

누군가는 내게 ‘교수’가 되기 위해 ‘지방시’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것 아닌가 묻는다. 그러니 본인이 그러한 삶을 선택했다고도 말한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언젠가 운 좋게 교수가 되면 모든 삶을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 잠시 상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나의 하루하루를 갉아먹었고, 나의 현재를 그 무엇도 아닌 것으로 격하해버렸다. 간신히 빠져나와 주위를 둘러보니, 오로지 교수가 되기 위해 존재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다만 강의실에서든 연구실에서든 노동자로 존재하기 위해 모두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정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자격을 정하는 데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 236,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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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은 어떻게 돼? - 각자의 속도로, 서로의 리듬으로
박철현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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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잘 몰랐는데, 저자가 꽤 많은 팬이 있는 전직 에세이스트(?) 였나 보다(나중에 알았지만, 경향신문에 연재된 글을 출판한 것이라고 한다). 저자를 알지 못함에도 페이스북을 통해 그 지인들이 이 책을 홍보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기가 아는 사람이 책을 썼으니 이 정도 홍보는 할 수 있겠지, 라고 생각하며 넘겼는데, 책의 내용에 대한 것보다는 "4쇄 가자"와 같은 구매를 강조하는 노골적인 표현들이 더 많이 보이기 시작해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모르게 눈쌀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입소문이 아닌 입'광고'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소문의 근원에는 무언가가 있겠지라는 생각에 책을 폈다.


저자는, 현대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 4명의 아이를 둔 아빠이자, 일본인 여성과 결혼을 한 한국인 남성이다. 우리나라에서 생활하는 외국인 남성이 글을 썼다면, 부모 중 1인이 외국인인 가정에 대한 차별과 부당함에 대한 사례가 많았겠지만, 저자는 일본 정부의 사회복지 시스템의 혜택을 차별 없이 받으며, 그리 많지 않은 수입에도 불구하고 큰 걱정이나 불안 없이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한일 양국 간의 복지시스템이나 외국인에 대한 태도를 적극적으로 비교 분석하는 내용은 아니다. 일본 사회의 관용과 포용성은 도드라지게 강조되지는 않지만 각각의 에피소드에 녹아서 표현되어 있다.

  

책의 구성은 만남, 관계, 성장, 독립으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구성들이 아이들의 탄생에서부터 독립까지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 있는 것은 아니고, 각 장의 제목에 맞는 에피소들을 적절히 분산시켜 편집한 것이다. '4명의 아이'라는 특징 때문에 가장 많은 에피소드는, 단연 아이들과 관계된 것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아이들은 불필요한 과외 공부에서 벗어나 스스로 학습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에 대한 관념을 기르고, 학교와 이웃은 부모의 국적이나 직업에 따라 아이를 평가하지 않는다. 아빠와 엄마의 구분 없이 학교나 유치원 대소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부모는 일부로 자기 아이를 돋보이게 하려 하지 않지만 아이가 하고 싶다고 생각한 바를 믿고 지지해준다. 


에피소드를 읽다보면 부모가 오히려 아이들로부터 배운다는 말이 딱 맞는 경우가 많이 등장한다. 저자는 자신이 미쳐 생각하지 못한 아이들의 생각에 동의를 하고 지지해줌으로써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게 돕는 한편, 스스로도 부모로서 성장하게 된다. 아이들 부모의 소유가 아닌 독립적인 인격체로 대우하고, 우리와 같은 신파가 아니라 죽음과 이별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굳은 마음, 한국과 일본 어느 한쪽을 배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을 길러주고 싶어하는 저자(와 그의 아내)의 태도에서는 너무 각박하게 극단으로 치닫는 지금의 한국사회를 살펴보게 한다.


글은 쉽고 매우 빨리 읽힌다. 다른 이의 삶을 엿보는 재미로 생각하면 적당한 수준일 수 있으나, 편집자나 광고가 밝히듯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닮은 가족 드라마"라는 표현에는 고개를 갸웃하고 만다. 내가 볼 때는 '일본'이 배경이라는 것과 식구들이 많다는 것 외에 공통점을 찾을 수가 없는데, <어느 가족>, <태풍이 지나가고>, <바닷마을 다이어리>,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같이 꼬여 있는 가족관계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장치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서이다. 기대만큼은 아니지만, 아이들에 대한 믿음과 포용이 가정을 얼마나 긍정적으로 만드는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혼혈을 보통 ‘하프(half)’라고 표현한다. 절반씩 피가 섞였다는 건데 이 하프라는 표현이 부정적 의미라고 받아들여져 요즘엔 하프 대신 ‘더블(double)’이라는 표현을 의식적으로 쓰는 매체나 사람들이 늘고 있다. 아이들도 당연히 더블 전도사다. - 53

발단은 카렌이 미우에게 "너 정말 하프야?"라고 물은 데서 시작됐다. 카렌 입장에서는 외모상 순수한 일본인과 아무런 차이가 안 나는 미우가 ‘혼혈’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은 듯 물은 것인데 이 질문에 미우가 "응. 근데 하프 아니고 더블이 맞아"라고 답하는 게 아닌가? 그러자 카렌이 되물었다.
"왜 더블이야? 하프 아닌가?"
"하프는 2분의 1이잖아. 더블은 2이고."
"그런가?"
"카렌은 2분의 1이 좋아? 2가 좋아?"
"당연히 2가 좋지."
"그럼 앞으로 더블이라고 말해. 너 러시아어 하지?"
"응. 엄마한테 배워서 조금 하지."
"봐봐. 일본어도 하고 러시아어도 하니까 더블이잖아."
"와! 진짜 그러네!"- 53, 54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한국에 있었을 때는 거리에서 장애인들을 별로 보지 못했다. 그래서 ‘장애인이 별로 없나 보다’라고 단순히 생각했는데, 16년 전 일본에 온 이후부턴 거의 매일 한두 번 정도는 길거리에서 장애인을 목격한다. 잠시 다녔던 자원봉사단체에도 휠체어를 탄 장애인 청년이 있었는데 항상 밝은 얼굴이었던 것이 인상에 남는다.
그러니까 어느 사회에나 장애인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지만 한국은 밖에 안 나올, 아니 못 나올 환경인 것이다. 혼자서는 움직이기 불편한 도로 사정도 있겠고, 사회적 편견도 (예전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여전히) 어느 정도는 남아 있을 것이라 본다. - 125

독립된 인격과 삶은 서로가 서로를 소유물로 생각하지 않는 마음가짐에서 나온다. 그래서 나는 항상 아이들에게 18세가 되면 독립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강조는 표면적으로는 아이들에게 다짐을 받는 것이고 또 그들을 세뇌하는 것이지만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애지중지 키웠던 아이들이 떠나간다는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해놓는 것이다. 나중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들을 구속하고, 속박하지 않겠다는 반복적 자기세뇌다. - 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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