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득이 - 제1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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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한테 눈 부릅뜨는 거 봐라. 너 말이야. 사실이 그런 건 그냥 그렇다고 말해버리는 게 속 편하다."
"무슨 사실이요?"
"한 번, 한 번이 쪽팔린 거야. 싸가지 없는 놈들이야 남의 약점 가지고 계속 놀려먹는다먄, 그런 놈들은 상대 안 하면 돼. 니가 속에 숨겨놓으려니까, 너 대신 누가 그걸 들추면 상처가 되는 거야. 상처가 되기 싫으면 그냥 그렇다고 니 입으로 먼저 말해버려."
"뭐가요!"
"그 '뭐' 말이야, 새끼야. 니 나이 때는 그 뭐가 좆나게 쪽팔린데, 나중에 나이 먹으면 쪽팔려한 게 더 쪽팔려져. 나가, 새끼야. 나 졸려."-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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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꼼수다 뒷담화
김용민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0월
절판


'나는 꼼수다'의 승승장구 요인을 분석하라면 아마도 '속살 노출'에 있지 않을까. 홍보전략이 주효했다느니, 탄탄한 제작 구성의 개가라느니 하는 건 'X도' 없다. 욕설을 하건, 비아냥대건, 귀에 거슬리는 너털웃음을 폭발하건 속에 있는 말을 모두 하자는 주의다. 편집 없이 그대로 내되 그 평가를 온전히 청취자에게 맡기자는 것이다.
이런 주의에는 '청취자는 똑똑하다'는 가치가 내재돼 있다. 이는 대중은 아둔하기에 그들을 선동하는 대신 계몽해야 한다는 수구적 사고로부터 탈피인 셈이다. 주요 방송 매체를 장악해 여론을 호도해도 낡은 정치를 하나하나 청산하는 대중을 어찌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스마트폰을 통한 청취자는 '스마트하다'는 믿음, 성문화되지 않았으나 이 프로그램의 제작 정신 1호다.
-22-23쪽

"좆까!"
내 의견을 김어준 총수는 이렇게 일축했다. 그러고는 "아, 다음 주면 감옥에 갈 정봉주 의원 나오셨네요. 들어가면 사식 넣어줄게!"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후에 김어준 총수의 말에 나는 무릎을 쳤다. "만약 우리가 슬프게 나가면 청취자는 같이 슬퍼하는 게 아니라 공포에 절게 될 거야. 생각해봐. '이명박에게 덤볐더니 결국 좆된다'는 공식만 확인해주는 꼴 아니야?" 어떤가. 그래서 앞으로는 다음주에 정봉주 의원이 사형집행을 당하더라도 깔깔대고 웃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저들의 권력은 공포 조장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어떤 겁박에도 굴하지 않고 웃으며 대응하는 상대는 결코 이길 수 없는 법이다. 개념인들은 이제 승리의 비법을 알아차렸다. 웃는 것, 즐기는 것, 아파하지 않는 것, 쫄지 않는 것이다. <닥치고 정치>라는 제목의 책을 낸 김어준 총수는 '쫄지마!'라는 문구를 사인으로 대신한다. 그 사인 옆에다 사인해 달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각하는 쫄아도 돼요!'라고 쓴다.-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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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의 몸값 1 오늘의 일본문학 8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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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공중그네>, <인더풀>의 강한 이미지로 인하여 흔히들 오쿠다 히데오를 단지 유머러스하거나 가벼운 소설을 쓰는 작가로 인식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전작 <남쪽으로 튀어>를 성실하게 읽은 독자라고 한다면, 아니 <공중그네> 등에서 등장하고 있는 인물들 또한 이 사회가 요구하는 일정한 범주에 편입하지 못하거나, 일반적 시선에서 소외당하거나, 정상적인(?) 삶의 방식에 부적응하고 있는 사람들 임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면, 그의 이번 작품인 <올림픽의 몸값>에서는 기존에 그가 보여주었던 '비틀림의 해학'이 강조되지 않는다는 것에 그다지 큰 실망을 하지 않은 채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개발, 발전, 실용, 편리, 윤택이라는 문구들이 우리 일상의 큰 주제가 되어버린 시점에서 1964년 일본의 이야기를, 그것도 성공리에 개최되었다고 평가받는 도쿄올림픽의 이야기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그리고 왜 하필 '올림픽'일까. 경제성장과 국가발전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자신들의 건재함을 증명이라도 해보이려는 듯 경쟁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올림픽, 월드컵이라는 스포츠 전쟁의 유치 또한 자본과 성장이라는 괴물들이 만들어내고 변질시키고 있는 또 하나의 부작용이란 말일까.

작가는 지금 일본이 갖고 있는 부조리의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자 시발점으로 도쿄올림픽을 설정했던 것 같다. 전 세계를 상대로 한 무모한 전쟁에서 처참하게 패망했던 일본, 그 폐허를 복구한 것이 불과 19년 이라는 기적같은 짧은 시간이었으며, 그것을 전 세계에 과시라도 하듯 올림픽을 준비함으로써 세계에 자신들의 입지를 다시 한번 확인시키려 했던 일본. 그렇기 때문에 1964년의 도쿄올림픽은 전후 일본사회를 가름짓는 하나의 거대한 분기점이 된다.

그렇지만 외부로 보여지는 위용은 충분히 내재되지 않은 허울일 뿐임을, 그 껍데기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많은 이들이 겪게 되는 부당함, 비인간이고 불평등한 처우에는 누구 하나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음을, 그리고 현재의 우리는 과거의 모든 것들을 잊은 채 헐떡거리며 살아가고 있음을, 작가는 지적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올림픽이라는 국가적 행사를 명목으로 하층민들의 희생은 당연히 여기는 국가권력과 비참한 생활과 비인격적 대우를 당하면서도 저항할 방법을 알지 못하는 하층민들의 모습으로부터 고뇌하는 룸펜 프롤레탈리아 시마자키 구니오의 모습에서 우리의 젊은 시절들을 본다. 부당한 국가권력에 맞서고자했던 지식인의 고뇌, 예정되어 있는 레드카펫이 아닌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선택한 선량한 양심, 그리고 국가에 대응하기 위하여 테러리즘이라는 강력한 카드를 꺼내 든 강한 의지. 젊음이란 모름지기 그럴 수 있고, 그래야 하는 것 아닐까.

밥벌이 이상의 돈벌이를 위해 나 스스로를 더 삭막하게 내던지고 있는 현실 앞에서, 소비의 달콤함에 빠져들어 자각 없는 소시민적 삶을 살고 있는 내게, 이 소설은 부르주아는 더더욱 싫었지만 룸펜 프롤레타리아가 되기 싫다고 되뇌였던 내 풋내기 대학시절을 떠올리게 하였다. 불안한 결말을 예상하면서도 눈을 떼지 않고 책장을 넘기며 나는 어느새 이 연약한 도쿄대생을 응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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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박범준.장길연 지음, 서원 사진 / 정신세계원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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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TV <인간극장>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장길연, 박범준 부부의 이야기를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당시 나에게는 다소 낯설었던 이들의 행보는 충격적이기 까지 했다. 그것은 이들이 평범한(?) 귀농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 것이다. 서울대와 카이스트 출신의 엘리트 부부(흔히 이러한 미사여구로 인해 어쩌면 이들이 그렇게 주목받은 것인지도 모르지만)가 '잘 나가는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시골로 떠났다 하여 화제가 되었던 프로그램이다. 그 내용도 신선했지만 무엇보다도 대중에게 어필하기 위하여 조작된 것이 아닌 이들 부부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때문에 이 책을 서슴없이 집어들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책 선택에 걱정도 되었으니... 적당한 시골생활의 유유자적함으로 포장된 수필정도가 아닐까 라는 생각에서 였다. 

그러나 책장 가득히 펼쳐진 이들의 글과 사진을 보고 생각을 좀 달리하기 시작했다.

낡은 그네 의자에 나란히 앉아 마주보며 웃고 있는 이들 부부의 사진. 도시에서의 삶이라면 거져줘도 쓰지 않을 것 같이 낡고 초라해 보였지만, 그들 부부의 웃음 덕인지, 유쾌한 기운마저 전해지는 의자였다. 그 의자가, 그리고 그 의자 위에 앉아 함박웃음을 짓고 있던 부부가,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모습이 왜 그리도 마음을 끌렸는지 모르겠다. 내 손은 어느새 다시 그 책장을 펼쳐 들고 있었다. 그러자 내가 한동안 또 잊은 채 살아가던 것들이 새록새록 피어나는 듯 했다.

물론 이들의 이야기가 유명세를 탄 데에는 '엘리트 출신'이라는 타이틀이 무시 못할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산, 들, 바다로 떠난 부부가 어디 그들뿐이겠는가. 그럼에도 유독 그들이 주목을 받은 것은 그들의 배경이 적잖이 기폭제의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편견'없이 책을 대한다면, 그들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환경 앞에 서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그 다른 환경을 기반으로 자신의 재능을 새롭게 발견해가는 '무모한' 과정이 놀랍기만하다. 

그러한 결단과 용기의 근본적인 의문의 기저에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과연 난 언제쯤 행복해질까?

행복해진다는 것은 물론 그리 쉬운 일이 아닐 지도 모른다. 그래, 만약 행복이 어려운 것이라면 행복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우리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우리가 가장 얻기 힘든 것에 행복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 객관식 시험문제에 하나의 정답이 있듯이 행복이라는 것이 어떤 하나의 모습으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행복을 너무 어렵고 거북스럽게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언제부턴가 물질적인 여유를 누리는 것, 그 하나가 우리 모두의 목표인 것처럼 느껴지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런 물질적인 富란 어차피 한정된 숫자의 사람들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데 말이다. 그렇게 행복을 승부와 결쟁의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어려워하는지도 모른다. 승자의 자랑거리 또는 패배으 아픔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과연 행복은 그런 것이어야만 할까? (pp. 8-9)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행복의 다양성'이다. 일률적인 부의 축적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삶의 형태에서 다른 행복을 찾아가자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거추장스러운 현실의 껍데기를 기꺼이 벗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내가 지금 딛고 있는 땅이 도시의 아스팔트이든 산골의 흙마당이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선택으로 이곳에 와서 이곳에서 우리의 행복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p. 67)

소위 웰빙시대라 하여 이제는 자연, 친환경, 건강이 고가의 상품이 되어 버렸고, 우리는 또다시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동적 소비자로 전락해버렸다.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행복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춘기 시절 느닷없이 "엄마는 행복해?" 라며 물었을 때, 나를 이상하게 보던 엄마의 낯선 눈빛처럼, 행복은 동화속에서만 존재하는 그런 '파랑새'가 아닌 것이다.

비단 시골에서의 삶에만 무게를 두어 그것을 두둔하자는 것은 아니다. 도시인들을 어쩔 수 없이 참고 살아가는 '부품'으로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농촌생활에 대한 도시인의 막연한 동경을 자극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어렵기만한 행복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며, 주위를 다시 한번 돌아보자는 것이며, 나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정말 용기가 부족해 하지 못한 삶을 정말 한번 뜨겁게 '살아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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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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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의 삶은 무기력 그 자체였다. 그녀는 이 땅위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쾌락과 즐거움을 자신이 겪었다고 자부했다. 이후에 다가오는 삶은 반복의 연속일 뿐이었다. 변화라곤 찾아볼 수 없을 그 평탄함이 그녀는 괴로웠다. 부모님의 말을 따라 열심히 공부했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도서관 사서라는, 어떻게 보면 보잘 것 없는 직업이 전부였다. 더 나아질 것이라곤 조금도 없는 것 같은 이 시점에서 그녀에게 허락된 것은 죽음을 결심하는 것뿐. 죽음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만큼 영예로운 것도 없으리라. 그녀는 수면제 과다 복용이라는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덜 폐를 끼칠 수 있을 것 같은 방법을 택했고, 자신의 조국 슬로베니아를 알리는 글을 쓰는 것을 마지막으로 생을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육체를 이탈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무한한 자유가 아니었다. 굵은 튜브와 의료 기기들에 의지한 자신의 모습은 실패자의 그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젊고 예뻤으며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왔지만, 이제부터 그녀의 이름은 ‘미치광이’에 불과했다. 빌레트. 그 이름만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공포감을 일으킬 수 있는, 이미 오래전 사라졌어야 하는 전기치료도 감행되고 있다는 그곳에 이제 그녀는 누워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심장은 앞으로 그녀에게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반쯤 성공한 죽음이라고 할까? 그것은 벗어나고 싶은 형태의 죽음이었다. 그녀는 머지않아 어차피 죽게 된, 그런 인생을 살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젊음은 그녀에게 많은 가능성이 존재함을 의미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분명 자살시도를 했지만 정신병원에 갇힐 만큼 미치진 않았다. 그랬기에 그녀는 두려웠다. 모두가 미쳐있는 그 공간에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미친 척 하는 것이 최선의 방침임을, 그리고 그녀에게 남아있는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은 그녀에게 용기를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는 발견했다. 빌레트를 안락하게 여기고 미친 척 하며 살아가고 있는 ‘형제 클럽’ 사람들이 있음을. 미쳤다고 일컬어지는 이들에게도 각자 나름대로의 삶이 있으며,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그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 때부터 그녀는 살고 싶어지기 시작했다. 마음 속 가득 찼던 근원 모를 분노를 피아노 선율과 함께 쏟아내 버린 어느 날, 그 밤마다 자기 음악의 유일한 청중으로 존재하는 에뒤아르와의 교감 속에서, 그녀는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발견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남아있는 시간은 아무리 길어도 일주일이 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에뒤아르는, 단 한마디의 말도 내뱉지 못하는 정신분열증 환자인 것이다. 그녀에게 살아야겠다는 이유를 불러 일으킨 것이 무엇인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자신의 마음 속에서 싹트고 있던 ‘사랑’의 존재를 그녀는 어쩌면 의도적으로 외면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의 틀을 뛰어넘어 빌레트라는 하나의 작은 사회도 변화시키고 있었다. 죽기에는 너무 젊은, 하지만 죽음에 임박한 그녀의 삶은 제드카와 마리아에게 지금껏 존재치 않던 용기를 발산토록 만들었다. 그들은 베로니카를 통해 지금껏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세상으로 돌아가고 팠지만 그럴 수 없게 만들었던 벽을 뛰어넘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이 편한 세상(빌레트)를 놔두고 혼란의 물결이 이는 보스니아로, 자신의 쓰임을 믿으며 떠나버린 마리아를 향해 ‘형제 클럽’ 사람들은 이제 그녀가 완전히 미쳤다고 말했지만, 정작 미친 건 그들이었음을 그들은 결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삶을 꿈꾸게 해준 존재 에뒤아르에게 ‘사랑한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 베로니카는 죽음의 향기를 뛰어넘어 기적적으로 허락된 또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영원히 기적일, 그 삶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삶은 소중한 거니까, 당신 마음이 가는 대로, 사람들이 당신에게 원하는 것보다 자신이 원하는 걸 해 봐요. 사람들이 당신을 미쳤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건 단지 관점의 차이일 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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