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이네 집 - 작지만 넉넉한 한옥에서 살림하는 이야기
조수정 지음 / 앨리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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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어디 사세요?"라는 질문에, '래미안', '자이', '롯데캐슬'이라는 이름을 대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우리는 어쩌면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집'이라는 개념을 큰 건설회사에 내어 주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 회사의 브랜드 네임이 우리 집의 가치와 내 자산의 건실함을 입증해주는 또 하나의 지표가 되어버렸고, 우리는 어느새 그것을 자랑스러워하며 살게 되었다.
 

 예전 (지금도 간혹 그렇지만) 대문 앞에는 문패가 있었다. '아무개'라고 적어 놓은 반듯한 이름은 이 집의 주인은 누구인지, 누가 살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또 다른 표시의 하나였다. 그 대문 틈 사이로 살짝 보이는 마당의 풍경은 집 주인의 삶의 방식이 어떠한지, 어떤 풍류를 즐기는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장이었다. 즉, 집은 그 사람의 삶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단면인 셈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집은 우리네 삶을 닮아가는 것이 아닌가?

 

 도심지 한 가운데에 높이 솟은 아파트, 부촌이라 일컬어지는 곳에 위치한 넓은 평수의 단독주택, 풍경이 좋은 언덕 위에 위치한 유럽식 전원주택 등 거대자본은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현혹시킨다. 마치 우리가 그곳에 살아아만 사회적, 인격적으로 품위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 처럼 말이다. 이는 집이 우리네 삶을 닮아간다는 것과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우리가 한평생 집을 쫓고 있는 셈이다.

 

 일곱살 박이 어린 아이와 고양이들과 함께 한옥으로 이사한 젊은 부부. 그들이 한옥으로 이사를 한 것은 많은 돈이 있어서도 아니고, 넓은 집에 살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낡은 집을 손수 수리하거나 집에 어울리는 작은 소품들을 배치하는 기쁨, 좁은 한옥에 살기 위해 그동안 불필요하게 지니고 있었던 물건들을 하나 둘씩 비워내면서 느끼게 되는 아름다움을 기꺼이 자신들의 삶으로 받아들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막연한 전원생활과 상품화된 녹색의 삶을 추종할 것이 아니라, 이들처럼 자신의 삶의 지향점을 두고 현재의 삶 속에서 그것을 닮아가는 터전을 서둘지 않고 천천히 만들어 간다는 생각이 우리에게 더 필요한 본질적인 요소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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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지음 / 길찾기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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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삶은 더이상 '명랑만화'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명랑만화가 아님을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을 애써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은 기억 저편에 숨어 있는 옛 추억에 대한 것들 까지도 현실이라는 냉혹한 질서에 파묻어 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린 날의 추억만은 지켜야 우리도 가끔 '회상'이라는 작업을 통해 그때의 아련한 감정을 다시 불러올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우연히 읽게 된 '만화책'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는 언제까지나 우리에게 어린시절의 즐거운 추억들을 회상해줄 것만 같았던 '둘리'라는 캐릭터에 '현실'이라는 불편한 옷을 입혀 놓고 말았다.
 
아기공룡 둘리를 청년공룡 둘리로 변모시켜 그가 '낯선' 이 대한민국이라는 현실에 대응하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를 상상해 본 작가 최규석의 시선은 내게 가히 '충격적'이라 할만큼 낯설고 신선했다(충격이라는 말과 낯설다는 말, 그리고 신선하다는 말이 이렇게 서로 어울릴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 그대로 피할 것은 되도록 피하고 보고싶은 것만을 보고 사는 우리들에게 최규석은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불편한 진실'에 대하여 생각해보기를 권하고 있는 듯 하다.

타임머신을 통하여 개발될 땅을 알아보았다는 도우너에 꾐에 빠져 가사를 탕진한 끝에 사망한 고길동, 삶에 대한 회의를 폭력으로 풀어내는 희동이, 자신의 집에 화를 불러 일으킨 둘리 일당들을 하나씩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철수, 철수에 계획에 의해 동물원에 팔려나간 타조 또치, 마찬가지로 어느 과학자에게 해부용으로 팔려나간 외계인 도우너, 그리고 이들을 구하려 노력하지만 '프레스 기계'에 손가락이 절단되어 더이상 '호이' 하며 마법을 부릴 수 없는 노동자 둘리.

이러한 캐릭터의 설정을 보며 나는 과연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만다. 설령 웃는다 해도 이것은 씁쓸한 웃음일 수밖에 없을 것이며, 운다고 해도 안타까운 눈물일 수밖에 없는 애매한 경계를 최규석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책을 덮으면 잊혀지고 다시 펴면 그대로 거기 있을 것만 같던 이들 주인공들은 어쩌면 언제라도 우리가 꺼내어 회상할 수 있는 '미화되어 있는 추억'이라는 대상과 같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순수한 자아'가 마치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화면과 같이 늘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애써 인정하고 싶어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이런 '소박한' 착각은 최규석에 의해 여지없이 깨뜨려지고 만다.

우리의 순수한 자아를 상징하는 둘리는 변모된 모습으로 냉혹한 현실 속에서 삶에 대한 커다란 벽을, 힘겨운 한계를 느끼고 만다. 마찬가지로 영원히 그대로 일 것이라고 착각했던 우리 추억속의 순수함은 현실적으로 변모해가는 우리 자신과 더불어 변해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거긴 살만 한가요? 여긴... 만만치가 않네요." 또치의 말대로 삶은 "이젠 더이상 '명랑만화'가 아니며", 마이콜의 말대로 "자신의 삶만을 생각해도 벅찬" 현실속에서 둘리는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그와의 '공존'을 인정하지 않은 채, 그를 기억 저편에 '방치'한 셈이다.

최규석은 명랑만화의 주인공들은 나이도 먹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언제까지나 유쾌하고, 행복하고, 즐거울 것이라는 불문율을 단번에 깨트리며,  우리 스스로 자신의 삶을 반추해보기를 권하고 있다. 우리의 힘겨운 삶이 결국 이 명랑만화의 주인공들을 비롯하여 우리 내면에 있는 순수함까지도 삶의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것은 아닐지, 우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의 아이들이 과연 '아기공룡 둘리'를 보며 우리가 그랬듯 유쾌하게 웃을 수 있는 환경을 우리가 물려주고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오늘 저녁에는 포장마차에 들려 한 쪽 구석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둘리에게 소주 한 잔 사주어야 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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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학교의 행복 찾기
여태전 지음 / 우리교육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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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중학교 문제가 교육계의 또 다른 쟁점으로 되어 도마 위에 올라 있고 주변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도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자문하며 갈등하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에서 <간디 학교의 행복 찾기>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답답한 사회분위기와 교육현실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도 이제 한 아이의 아빠가 되어버린 내게도 머잖아 닥칠 아이 교육에 대한 문제는 벌써부터 나를 옥죄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대안학교'나 '홈 스쿨링'에 나는 막연하게나마 적잖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누구는 벌써 튼튼영어 한다는데?"라며 갓 돌이 지난 아이를 고문(?)하고 있는 한심한 부모들의 이야기에 대한 반발로, 말로는 "우리 아기는 내가 가르칠꺼야"라고  공언하며 아이 엄마 앞에서는 아이의 조기교육 문제에 대한 논란을 단 한 마디로 일축시키지만, 어디 그게 만만한 일인가? 내뱉은 말에 대하여 곰곰히 생각해보던 중에 '내가 과연 정규교육을 무시한 채 내 아이를 가르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의혹이 있었음은 사실이다. 그동안 착실하게(?) 정규교육을 받아온 나로써는 어쩌면 교사 '자격증'이 있는 이들이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한 논리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지만 이러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냉혹한 '승자독식'의 사각 링에 초반부터 아이를 밀어넣고 싶지는 않았다. 돌아보면 나 스스로도 중고등학교 생활이 전혀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교라는 집단이 결국 '인성' 중심이 아닌 '적응' 중심의 사회인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본다면, 향후 내 아이가 들어가게 될 학교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 분명하였다. 이러한 고민 중에 만나게 된 <간디 학교의 행복 찾기>라는 책은 내게 교육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 고마운 책이다.  


 그동안 그 실험적 시도에 대하여 가타부타 논의가 분분하였던 '간디 학교'는 어느새 그 논란들을 잠식시키고 이제는 우리나라 '대안교육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현재의 상징성이 그간의 간디 학교에 대한 비판을 잠재울 수 있는 충분한 요건은 되지 못한다. 예전부터 '귀족학교'라는 미명하에 "대안학교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다"는 근본적인 회의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충분히 인식한 듯 저자는 대안학교에 대한 일방적인 찬양(?)이나 일방적인 성토를 감행하지 않는다. 저자 나름대로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간디 학교를 평하려는 노력을 한 모습이 보인다. 
 
 우선, 저자는 '자율'을 강조하는 간디 학교에서 "입학을 하고 한학기를 논다"는 사실, 그리고 학생 스스로가 무언가를 깨닫는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높은 평가를 하고 있다. 어떤 학생은 "간디 교에 와서 배운 것이 없다"는 비판을 스스럼 없이 하기도 했는데, 저자는 한 학생이 단순히 현 교육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육의 주체로서 자율화되기 위해 생각하고 고민한 끝에 그 단순한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또한 "간디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
 
 반면, 입시교육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점(간디 학교의 교장 양희규 선생은 대안교육이 입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입시를 원하는 학생들에게 '자율'을 빙자한 '나태함'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 선생들이 충분히 확보되지 못하고 정착하기 힘들거나 타 학교와 똑같이 매너리즘에 빠진다는 점 등의 문제점 또한 사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렇기에 간디 학교는 '완성된' 것이 아니며 현재도 '진행 중'인 학교인 셈이다. 이렇게 새롭게 트인 싹을 잘 가꾸어 약으로 삼을지 독으로 삼을지는 비단 간디 학교 관계자와 학생들, 그 학부모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 교육의 구조적 모순은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와 간디 학교 사람들이 다른 점은 그들은 적어도 교육이라는 문제를 정부와 제도의 탓으로 돌린채 외면하고만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정말 그들 말대로, "비판만 하고 있기에는 우리 아이들이나 우리 자신에게 인생이 너무나 짧고 소중하다."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별 헤는 맘으로 없는 길 가려네

 사랑하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낯선 길 가려 하네

 아름다운 꿈꾸며 사랑하는 우리

 아무도 가지 않는 길 가는 우리들

 누구도 꿈꾸지 못한

 우리들의 세상 만들어 가네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우리 알고 있네 우리 알고 있네

 배운다는 건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간디학교 학생과 교사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 <꿈꾸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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