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지음 / 길찾기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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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삶은 더이상 '명랑만화'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명랑만화가 아님을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을 애써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은 기억 저편에 숨어 있는 옛 추억에 대한 것들 까지도 현실이라는 냉혹한 질서에 파묻어 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린 날의 추억만은 지켜야 우리도 가끔 '회상'이라는 작업을 통해 그때의 아련한 감정을 다시 불러올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우연히 읽게 된 '만화책'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는 언제까지나 우리에게 어린시절의 즐거운 추억들을 회상해줄 것만 같았던 '둘리'라는 캐릭터에 '현실'이라는 불편한 옷을 입혀 놓고 말았다.
 
아기공룡 둘리를 청년공룡 둘리로 변모시켜 그가 '낯선' 이 대한민국이라는 현실에 대응하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를 상상해 본 작가 최규석의 시선은 내게 가히 '충격적'이라 할만큼 낯설고 신선했다(충격이라는 말과 낯설다는 말, 그리고 신선하다는 말이 이렇게 서로 어울릴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 그대로 피할 것은 되도록 피하고 보고싶은 것만을 보고 사는 우리들에게 최규석은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불편한 진실'에 대하여 생각해보기를 권하고 있는 듯 하다.

타임머신을 통하여 개발될 땅을 알아보았다는 도우너에 꾐에 빠져 가사를 탕진한 끝에 사망한 고길동, 삶에 대한 회의를 폭력으로 풀어내는 희동이, 자신의 집에 화를 불러 일으킨 둘리 일당들을 하나씩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철수, 철수에 계획에 의해 동물원에 팔려나간 타조 또치, 마찬가지로 어느 과학자에게 해부용으로 팔려나간 외계인 도우너, 그리고 이들을 구하려 노력하지만 '프레스 기계'에 손가락이 절단되어 더이상 '호이' 하며 마법을 부릴 수 없는 노동자 둘리.

이러한 캐릭터의 설정을 보며 나는 과연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만다. 설령 웃는다 해도 이것은 씁쓸한 웃음일 수밖에 없을 것이며, 운다고 해도 안타까운 눈물일 수밖에 없는 애매한 경계를 최규석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책을 덮으면 잊혀지고 다시 펴면 그대로 거기 있을 것만 같던 이들 주인공들은 어쩌면 언제라도 우리가 꺼내어 회상할 수 있는 '미화되어 있는 추억'이라는 대상과 같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순수한 자아'가 마치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화면과 같이 늘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애써 인정하고 싶어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이런 '소박한' 착각은 최규석에 의해 여지없이 깨뜨려지고 만다.

우리의 순수한 자아를 상징하는 둘리는 변모된 모습으로 냉혹한 현실 속에서 삶에 대한 커다란 벽을, 힘겨운 한계를 느끼고 만다. 마찬가지로 영원히 그대로 일 것이라고 착각했던 우리 추억속의 순수함은 현실적으로 변모해가는 우리 자신과 더불어 변해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거긴 살만 한가요? 여긴... 만만치가 않네요." 또치의 말대로 삶은 "이젠 더이상 '명랑만화'가 아니며", 마이콜의 말대로 "자신의 삶만을 생각해도 벅찬" 현실속에서 둘리는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그와의 '공존'을 인정하지 않은 채, 그를 기억 저편에 '방치'한 셈이다.

최규석은 명랑만화의 주인공들은 나이도 먹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언제까지나 유쾌하고, 행복하고, 즐거울 것이라는 불문율을 단번에 깨트리며,  우리 스스로 자신의 삶을 반추해보기를 권하고 있다. 우리의 힘겨운 삶이 결국 이 명랑만화의 주인공들을 비롯하여 우리 내면에 있는 순수함까지도 삶의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것은 아닐지, 우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의 아이들이 과연 '아기공룡 둘리'를 보며 우리가 그랬듯 유쾌하게 웃을 수 있는 환경을 우리가 물려주고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오늘 저녁에는 포장마차에 들려 한 쪽 구석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둘리에게 소주 한 잔 사주어야 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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