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껍다. '사자개'가 어떤 동물일까 생각하기 전에 이 책을 보고 먼저 받은 첫인상은 그러했다. 두께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쉽게 넘어가는 책장들. 지금은 생소한 이름이 되어버린 사자개의 존재로인해 마음이 아파온다. 아들이 아버지의 이야기를 덤덤히 풀어놓는데 빠짐없이 등장하는 사자개. 정말 전생에 아버지는 사자개였을까. 깡르썬거를 구하기 위해 목숨까지 내던지는 모습은 영웅의 모습을 넘어 사자개에 대한 가슴 뭉클한 애정을 보여준다. 대대로 샹아마와 시제구의 사람들은 원수다. 그 속에 인간들과 함께 하는 사자개 또한 그 사람들속에서 역사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 말못하는 짐승이라 하기엔 인간의 언어와 마음을 너무 잘 헤아린다. 어쩌면 조석으로 변하는 사람보다 더 우직하고 진실된 모습을 한 사자개. 주인에 대한 복종에 마음을 담았기에 예사 동물로만 생각되지 않아 강력한 힘마저 느끼게 된다. 화자가 풀어내는 사자개의 삶. 주인의 명령으로 샹아마와 시제구 아이들의 싸움에 나서지만 그들사이의 규칙도 있다. 깡르썬거를 구한 아버지를 적으로 간주하는 나르. 자신을 죽일뻔한 나르에게 손길을 뻗는 아버지의 모습은 나르에게 생소하지만 그 정성에 적으로서의 마음은 버린지 오래다. 두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시제구의 영지견들이나 사자개들에게 분명 배반적인 행동일 것이다. 깡르썬거에 대한 마음이 깊어 샹아마와 시제구 아이들의 싸움에서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마니석 무더기를 들이받고 죽으려고 하는 모습은 정말 가슴 뭉클하게 한다. 동물을 만지지 못하는 나는 사자개가 옆에 있어 내게 충직한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무서움에 아마 곁에 두기도 꺼려질 것이다. 마음을 담아 내게 호소해 와도 그 마음을 받아들일 마음의 그릇이 작은 나는 외면하겠지. 아마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심마저 가지게 될 것 같다. 하지만 정말 책속에서 묘사된 사자개라면 평생 가족처럼 곁에 두고 싶기도 하다. 천국의 열매라고 생각하는 땅콩을 샹아마의 아이들이 먹고 땅콩을 준 아버지를 따라 시제구에 들어온 것이 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그를 따라온 아이들이 곤경에 처하는 것을 보지 못해 목숨까지 내던졌던 아버지로 인해 사자개 깡르썬거는 물론 샹아마의 아이들의 손목 또한 구하게 된다.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이기에 나에게는 영화에서처럼 사람들을 구하는 영웅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물론 주인과 함께 하고자 하는 충직한 사자개 깡르썬거도 여기서는 사자개의 왕으로서 당당한 면모를 보이게 되지만. 샹아마와 시제구의 오랜 숙원은 모르겠다.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나. 손목을 자르다니. 정당하게 싸움을 해서 패배한 결과이긴 하지만 너무도 끔찍한 일이기에 손목이 잘려나갈 그 시점에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사자개들의 삶과 사람들의 삶이 교차되는 가운데 사람들속에 살아가면서 역사에 거스를수 없어 티베트의 모든 것을 파괴했던 문화대혁명을 맞은 사자개들은 그들의 야성을 빼앗기게 되어 슬픈 모습으로 다가온다. 초원을 뛰어다니는 사자개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건만 그저 인간 옆에 있기에도 허락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아버지가 임종시 눈앞에 그린것은 아마도 초원을 활개치고 다니는 깡르썬거의 모습이었을테다. "아오떠지, 아오떠지"를 외치는 빠어추쭈의 목소리에 이어 "마하커라뻔썬바오, 마하커라뻔썬바오"라고 외치며 달려가는 샹아마의 아이들의 모습이 가슴에 오래도록 남는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갚기 위해 "아오떠지"만 외치는 빠어추쭈가 밉지만 그들의 역사속에 나는 함께하지 않았기에 그저 '용서하며 살라'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담담히 바라볼 뿐이다.
한조각의 기억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워한적이 있을땐 그 때의 기억만큼을 머릿속에서 도려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훌훌 털어버리지 못하는 속좁은 내 성격을 탓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인생이 살만하다고 느끼는 것은 행복한 기억이 더 많기 때문일텐데 이런 기억조차 없이 그저 규칙에 의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면 그보다 더 큰 불행이 있을까. 조너스는 열두살이 되어 직위 받기 기념식에 나가게 된다. 난 열두살때 친구들과 놀이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때였는데 직위 받기 기념식을 통해 열두살 아이들은 어른의 세계에 들어서다니 원로원들에 의해 아이들의 적성을 찾아내어 적절한 곳에 배치하는 것은 참으로 부럽기까지 하지만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주어진대로 살아가는 모습은 정말 답답하다. 대체적으로 자신의 적성대로 맡는다고 하지만 말이다. 아직도 내 적성과는 상관없이 평생을 돈을 위해 직장을 다녀야 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물론 나도 포함된다)에게 희소식이 될 것 같긴 하다. 살짝 부럽기도 하지만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그렇게 말한 것을 사과한다"며 기계적으로 사과를 하고 자기반성을 하는 모습은 따뜻한 피가 흐르는 모습이 아닌 마음이 차가운 사람들이 모인듯 하여 낯설게만 느껴진다. 난 이미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속에서 정을 나누며 살아와서 그런지 도통 이해하기 힘들뿐더러 이 마을에서 살게 해 준다고 해도 거절할 것 같다. '항상 같음'을 유지하여 무채색인 환경과 성욕조차도 약으로 억제하여 산모의 직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아이를 받아서 키우는 모습은 사랑으로 이루어진 가족이 아니여서 인생에 있어서 진정한 행복을 모르고 살아가는 불행한 모습의 인간을 보는 것 같다. 쌍둥이가 태어나면 체중이 덜 나가는 아이를 임무 해제하는 모습이라니 이건 스타르타보다 더 지독하게 사람을 가려내지 않는가. 아이가 자라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 될지 누가 알 수 있다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임무해제라니 울컥 울분이 치솟아 오른다. 이것은 노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 씁쓸하기까지 하다. 울타리 안에서 우물안 개구리로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감정들이 없다. 희노애락은 물론 사람들 사이의 '정'도 갖고 있지 않다. 그저 현재의 규칙이 심어준 기억만 가지고 있을뿐. 그래서 옛날 옛날 아주 오래전부터 세상의 모든 기억들을 기억전달자만 가지고 있을 뿐 고통의 기억은 물론 행복한 기억조차 마을 사람들은 가지고 있지 않다. 조너스가 받은 직위 기억전달자의 임무는 열두살의 아이가 짊어지기엔 너무도 끔찍하다. 한사람에게 모든 기억들을 떠 넘긴다는 것은 너무한 처사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기억을 모두 갖고 가기도 힘든데 내 부모님조차 끔찍한 임무해제에 동조하고 있다니 조너스에겐 과히 충격적이다. 감정을 가진 사람들에게 규칙만 강요하는 것은 감옥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 느낌일텐데. 하긴 이곳이 감옥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해당되는 말이 아니겠지만 타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난 내내 갑갑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세월이 흘러 흘러 정말 이런 마을이 생겨난다면 어찌 살아갈 것인가. 썰매를 타고 햇볕을 쪼이고 색색가지의 꽃들을 볼 수 있는 세상을 그리워하게 될테지.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곳을 정말 소중히 생각해야겠다고 깨닫게 되었다. 오존층 파괴니 지구온난화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는 요즘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도 접어둘 일은 아닌것 같다
늘 똑같은 일상이 재미가 없거나 멋지고 능력있는 사람들틈에 한없이 평범한 나 자신을 발견하는것은 삶조차도 무미건조하게 느껴지게 된다. 하지만 나같은 왕평범한 면이 오히려 타인에게 탁월한 능력으로 인정받는다면? 정말 멋진 인생이 펼쳐지는 것이다. 생각만해도 신나는 일이다. 아직 마음속으로야 소심하고 주눅든 자신의 모습이 담겨져 있기에 어깨를 당당하게 펴지 못한다고 해도 나의 매력 발산은 주위 사람들에게 충분히 작용하고 있으니 성격을 좀 쾌할하고 당당하게 바꿔줄 필요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케이티는 나처럼 내세울것이 없는 무지 평범한 여성이다. 하지만 그녀를 알아갈수록 얼마나 매력적인 여성인지 알게 된다. 마법에 면역력이 있다니, 어느날 출근길에 날개 달린 요정을 보는 것은 강심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충격적인 일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거기다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혼자 바보가 되는건 시간문제라 어디 터 놓고 이야기 할 상대를 찾기도 힘들다. 점심시간에 주린배를 안고 식당을 전전하며 밥을 먹으러 돌아다니는 수고가 없이 펑~하고 나타나는 음식들은 마법이 얼마나 편리한가 부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 위하여 계속 마법으로 위장하는것은 그들에게도 피곤하긴 마찬가지. 케이티도 친구나 가족들에게 자신이 속한 직장에 대하여 말을 할 수도 속상한 일에 대하여 의논을 할 수도 없는 외로운 처지다. 평범한 데이트를 꿈꾸지만 늘 마법이 자신에게 영향을 끼쳐 속이 이만저만 상하는 것이 아닌 케이티.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오언은 친구라고 못박고 늘 거리를 두니 이래저래 인생이 찬란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하지만 왜 모를까. 평범하다고 소리치는 그녀조차 신데렐라처럼 멋진 남자들의 시선을 받는 몸이라는 것을. 갖은 푸념을 이야기 하지만 조금은 얄미운 생각도 드니 이건 대체 어떤 마음인걸까. 책속의 그녀에게 질투라니. 아마도 나처럼 평범하다고 믿는 케이티이기에 그런가 보다. 어딜가나 흑마법을 부리는 악당은 하나씩 있기 마련인데 이드리스는 케이티의 주위에서 깐죽거리고 텍사스에서 부모님이 오셨을때조차 무례한 행동을 일삼는다. 악당이라곤 하지만 큰 힘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저 질투심에 어린 분노를 펼쳐 보인다는 생각이 들뿐이니 해리포터에서 등장하는 악당처럼 긴장감을 선사해 주지는 않는다. 판타지 소설이라고 하지만 케이티의 사랑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 뿐이다. "저게 뭐니?" 날개 달고 있는 가고일을 바라보는 엄마, 정말 케이티의 심장이 오그라들만 하다. 자신의 면역력이 엄마에게 받은 것인데 어쩌랴. 수습을 할 밖에 느는것은 거짓말뿐이긴 하지만. 이런 작은 에피소드에 간간이 웃음이 터져 나온다. 마법 주식회사의 최고경영자 멀린의 존재는 아서 왕을 비롯한 여러 소설에 등장하는 예언자 멀린이라니 그가 21세기를 살아가는 모습은 전화조차 제대로 쓰지 못할 정도이니 현대에 맞게 재미있게 각색하여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 마케팅이니 경영서적에 대해 공부하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오니 나도 현실세계가 참 무미건조하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케이티처럼 "난 너무 평범하다"고 외치지만 나에게도 뭔가 멋진 일이 일어났으면 하는 바램을 늘 가지고 있기에 읽는 동안 참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난 바리데기의 이야기를 '바리'처럼 할머니에게 옛날 이야기를 듣듯이 알게 된 건 아니고 '전설의 고향'에서 바리데기의 이야기를 방영하는 것을 보고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 정도는 알고 있다. 할머니 다리에 머리를 괴고 누워 도란도란 옛이야기를 듣는 모습은 평온해 보이지만 바리가 있는 북선의 상황은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는 바리. 그녀가 영국에 갔을 때 기아에 허덕이며 죽어가는 가족들과 동족들을 생각하며 자신들이 버려진 상태로 느끼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화려한 불빛 아래 먹고 사는 문제를 제쳐두고 유흥에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을 바라볼때 배신감마저 들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삶에 순응하며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울분도 회한도 없이. '난 얼마나 운이 좋은가'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돈에 팔려 짐승처럼 배 밑바닥에서 한달을 견디고 도착한 런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보다 몸을 팔아서 사는 곳에 가지 않은 것이 얼마나 운이 좋은가를 생각하는 바리를 보니 편하게 앉아서 밥을 먹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샹 언니의 남편 쩌우에게 배워둔 발마사지로 이곳 런던에서 돈을 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물론 주위에서 도움을 주는 루 아저씨, 탄 아저씨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린 나이에 많은 것을 겪는 그녀는 어릴 때 장질부사 염병을 앓고 이승과 저승을 오가고 죽은 영혼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무녀의 모습을 보는 듯 하여 조금은 생소하다. 유체이탈을 경험하고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이란 그리 내세울만한 자랑거리는 아니기에 숨기면서 살아가지만 발마사지를 하며 그들이 살아온 인생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은 조금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죽은 사람들의 한풀이라도 해 주려는 것일까. 그래서 바리데기처럼 생명수를 구하러 저승으로 가고자 하는가. 북선에서 머나먼 런던으로 가는 모습은 황석영님의 소설 "심청"에서 청이의 모습과 닮아있다. 중국으로 팔려가 몸을 파는 생활을 하는 청이의 모습이 바리의 모습위에 겹쳐져 보인다. 바리는 시대의 아픔마저 가지고 있기에 실제 일어났던 일들속에 그녀의 삶이 무너지는 것을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인 북선을 뒤로한채 식구들과 뿔뿔이 흩어져 영국으로 가게 된 것이 큰 변화요 이해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희망을 전하고 있다. 내가 숨쉬는 공간과 멀리 떨어져있지만 자신의 고국이 아닌 타국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바리에게 우리는 당당해질 수 없다. 온몸을 던져 다른이의 고통까지 함께 짊어지려 한 그녀이기에 손을 뻗어 의지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바리', '바리데기' 이데올로기, 종교, 테러 등 모든 것을 초월한 모습이 '바리'의 진정한 모습일 것이다. 시대의 변천사를 통해 우리의 역사를 알아가는 것도 좋지만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통해 밑바닥까지 보여주는 그들의 생활을 보며 알아가는 삶.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는 어떤 책보다 더한 감동을 전해준다.
여름에만 즐길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파르페는 꼭 여름에만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여름과 잘 어울린다. 그래서일까 "여름철 트로피컬 파르페 사건"의 책은 반드시 여름에 읽어야 할 것 같은 사명감을 느끼게 한다. 고등학생인 고바토와 오사나이가 겪는 일들은 평소 낯익은 것도 아니고 평범한 일도 아니다. 일본소설을 읽게 되면 우리나라와 다르게 무척 자유분방만 사고와 행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책 또한 특별한 일을 겪고 사건을 해결해 나가기에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바라보게 된다. 내가 너무 나이가 들었는지. 입시열풍에 몸살을 앓는 학생들의 모습은 늘 갇혀있는 세상에 있기에 아무래도 이 책속의 주인공들을 자유스럽게 느끼나보다. 소시민으로 살기를 원하는 고바토와 오사나이. 그러나 쓸데없이 머리를 굴려 타인의 구린구석을 알아내는 고바토, 복수의 칼날을 갈며 즐기는 오사나이는 결코 평범해질 수가 없다. 진한 우정으로 뭉쳐져 만나는 관계가 아닌 서로 소시민으로 살수 있게끔 그저 협력하는 사이이기에 한쪽 마음이 뚫린 듯이 허전함을 느끼는 오사나이, 그래서 고바토에게 관계를 정리하자고 말하지만 별로 마음이 아프진 않다. 참 이해할 수 없는 사이다. 학교 밖에서는 거의 만날일이 없는 오사나이가 이번 여름방학 때 "오사나이 스위트 섬머 설렉션"을 하자며 지도를 한장 준다. 소위 맛집을 돌자는 건데 이것이 탐정기질이 있는 고바토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들기 시작하는 발단이 된다. 이것 모두 의미있는 일의 시작이라니. 아니 모든 사건의 발단은 몇년 전으로 돌아가지만. 나는 사건의 말미에 와서도 도통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오사나이의 유괴사건으로 사건은 긴박하게 돌아가고 예상대로 고바토와 친구 겐고의 노력으로 사건이 해결되는 것을 볼 때 이것이 전부인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반전이 있을줄이야. 내가 몰랐으니 반전이라고 해 두자. 맛난 먹거리들을 먹고 싶다는 생각에 입안에 군침이 잔뜩 돌아 거기에만 신경 쓰는 사이 사건이 벌어지고 해결되고 나는 완전히 바보가 된 기분을 느낀다. 그저 실제로 맛집의 음식들을 눈앞에 보고 싶다는 생각이었으니까. 그정도로 평범해 보이는 이야기들이었다. 고바토는 오사나이가 시키는대로 따라다니면서도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을 잡아냈는데도 말이다. 역시 나는 탐정기질이 없나 보다. 복수를 하는 오사나이. 없는 죄까지 뒤집어 씌우고 공포스러운 맘을 버리고 맞서지만 왜 이사가와의 유괴사건에 스스로 몸을 던졌는지 그 발단에 대해서는 입을 함구하여 궁금해진다. 구타당하고 담뱃불로 지지려는 공포에 몸을 맡기며 그녀가 무엇을 돌려주려 한 것일까. 이 한권의 책으로는 많은 것을 알려주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서로 협력하는 관계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서로를 잘 아는 두사람. 관계를 끊지 않고 그 우정 영원히 변치 말았으면 좋겠다. 두사람의 능력을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쓴다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 그래야 가을에는 무슨 사건이 일어나려나 생각 해 볼 수 있을테니 말이야. 전혀 예측불허의 두 사람이긴 하지만 소시민으로 살기엔 너무나 특별한 사람들이기에 또 사건들이 일어날 것 같다. 그 땐 이 두사람이 좀 더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상태가 되어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