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바리데기의 이야기를 '바리'처럼 할머니에게 옛날 이야기를 듣듯이 알게 된 건 아니고 '전설의 고향'에서 바리데기의 이야기를 방영하는 것을 보고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 정도는 알고 있다. 할머니 다리에 머리를 괴고 누워 도란도란 옛이야기를 듣는 모습은 평온해 보이지만 바리가 있는 북선의 상황은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는 바리. 그녀가 영국에 갔을 때 기아에 허덕이며 죽어가는 가족들과 동족들을 생각하며 자신들이 버려진 상태로 느끼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화려한 불빛 아래 먹고 사는 문제를 제쳐두고 유흥에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을 바라볼때 배신감마저 들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삶에 순응하며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울분도 회한도 없이. '난 얼마나 운이 좋은가'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돈에 팔려 짐승처럼 배 밑바닥에서 한달을 견디고 도착한 런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보다 몸을 팔아서 사는 곳에 가지 않은 것이 얼마나 운이 좋은가를 생각하는 바리를 보니 편하게 앉아서 밥을 먹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샹 언니의 남편 쩌우에게 배워둔 발마사지로 이곳 런던에서 돈을 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물론 주위에서 도움을 주는 루 아저씨, 탄 아저씨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린 나이에 많은 것을 겪는 그녀는 어릴 때 장질부사 염병을 앓고 이승과 저승을 오가고 죽은 영혼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무녀의 모습을 보는 듯 하여 조금은 생소하다. 유체이탈을 경험하고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이란 그리 내세울만한 자랑거리는 아니기에 숨기면서 살아가지만 발마사지를 하며 그들이 살아온 인생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은 조금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죽은 사람들의 한풀이라도 해 주려는 것일까. 그래서 바리데기처럼 생명수를 구하러 저승으로 가고자 하는가. 북선에서 머나먼 런던으로 가는 모습은 황석영님의 소설 "심청"에서 청이의 모습과 닮아있다. 중국으로 팔려가 몸을 파는 생활을 하는 청이의 모습이 바리의 모습위에 겹쳐져 보인다. 바리는 시대의 아픔마저 가지고 있기에 실제 일어났던 일들속에 그녀의 삶이 무너지는 것을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인 북선을 뒤로한채 식구들과 뿔뿔이 흩어져 영국으로 가게 된 것이 큰 변화요 이해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희망을 전하고 있다. 내가 숨쉬는 공간과 멀리 떨어져있지만 자신의 고국이 아닌 타국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바리에게 우리는 당당해질 수 없다. 온몸을 던져 다른이의 고통까지 함께 짊어지려 한 그녀이기에 손을 뻗어 의지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바리', '바리데기' 이데올로기, 종교, 테러 등 모든 것을 초월한 모습이 '바리'의 진정한 모습일 것이다. 시대의 변천사를 통해 우리의 역사를 알아가는 것도 좋지만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통해 밑바닥까지 보여주는 그들의 생활을 보며 알아가는 삶.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는 어떤 책보다 더한 감동을 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