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개정신판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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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제대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만나면 "오랜만에 뵙습니다" 라며 초면이 아닌 것처럼 인사를 잘할 수 있을까. 연암 박지원의 생의 한 부분과 압록강을 건너고 요동을 거쳐 연경에서 열하 그리고 열하에서 연경까지 그가 남긴 [열하일기]를 통해 그와 그의 작품을 조금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으니 분명 다음에 만난다면 초면이 아닌 게다.  

 

 저자 고미숙은 여행기에도 유머가 있어야 한다며 '유머의 천재' 연암 박지원 [열하일기]의 웃음을 사방에 전염시키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얼마나 재미있는데 아직 읽지 않았냐고 호통을 치는 듯 했다. 나도 왜 이제서야 이 재미있는 책을 알게 되었는지(학창시절 무수히 많이 들어보고 시험의 답으로 대면했었지만) 안타까울 정도. [열하일기]가 얼마만큼의 유머를 담고 있든 그 어려운 말들에 유머 코드를 적절히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모두가 웃는 가운데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누가 설명이라도 해주면 뒤늦게야 "아!하!" 하며 무릎을 치겠지. 한 번이면 괜찮으련만 이것이 매번 이리 된다면야 나에게 [열하일기]는 유머나 해학적이나 도통 알아차릴 수가 없어 분명 지루한 책이 될 것이다. 저자 고미숙이 [열하일기]의 내용을 써 내려가며 연암 박지원이 왜 이렇게 글을 썼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언급하는 말들에 연암 박지원의 유쾌함을 오롯이 담기 위해 노력하여 더불어 독자인 내가 연암 박지원의 전하는 뜻을 다 이해할 수 있어 웃어야 할 곳에서 적절하게 웃음이 터져 나왔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무엇이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글인지 어디가 저자 고미숙의 글인지, 다만 현대에 맞게 자세히 설명하니 그 구별이 갈 뿐이다.

 

 [열하일기]는 압록강을 건너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강을 건너기 전 이번 길에 아무일 없기를 바라며 하인 장복, 창대를 위해 그리고 말을 위해 빌었다. 여행의 설렘보다 우선은 무사히 다녀올 수 있기를 빌었다. 그 때에는 여행을 떠남에 있어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었을 것이다. 깊은 물을 건넌 후 서로 살아 있음에 축하하고 이보다 더 깊은 물을 건너야 함에 놀라는 장면, 대부분의 글들이 이렇게 살아있는 문장으로 시각적으로 눈 앞에 그려진다. [열하일기]는 연경에 도착후 열하로 여행지가 이어지고 바뀌며 계획에 없던 여행이 시작되며 그 누구도 쓸 수 없는 글이 만들어진다. 가는 곳곳마다 연암 박지원은 지식을 나누는데 벗을 가리지 않고 몰래 빠져나가기를 밥 먹듯이 하니(빠져나가다가 잡혀서 나가지 못하는 일은 없으니 대단할 밖에) "특별한 의미가 있건 없건 신기하고 새로운 건 무조건 기록"했다는 저자 고미숙의 말대로 무엇이든 알고자 했던 호기심은 그 어떤 이유로도 그를 막지 못했다. 연암 박지원은 여행을 연경에서 끝냈을 수도 있으나 열하에 가는 것을 결정하며 그의 삶도 전혀 새로운 여정으로 들어선다. [열하일기]가 정조의 문체반정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서게 된다.

 

 연암 박지원과 동시대를 살다간 다산 정약용은 연암 박지원을 이야기 할 때 꼭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일 것이다. 같은 시대를 살았으나 벗으로 마음을 나누거나 지식을 나누지 않은 두 사람, 저자 고미숙은 "두 사람은 만나지 않았고 서로에 대해 침묵했다"고 말했다. 만나지 않기야 했겠냐만은 서로에 대해 무심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아니 무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글을 쓰는 문체는 물론 세상을 바라보는 그 마음까지 달라 서로가 가는 길이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은 자신의 글에 짧게 언급(저자 고미숙에 의하면 다산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열하일기]에 관한 간단한 멘트를 남겼다고 한다)이야 했지만은 그렇게 둘은 안타깝게도 비껴갔다.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깊이 있게 알 수가 없어 안타까운데 둘은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느라 서로를 돌아볼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연암 박지원에게 우정이란 '지금, 여기'에서의 생을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나'의 경계를 넘어 끊임 없이 다른 것으로 변이되는 능력의 다른 이름으로 아내는 잃어도 다시 구할 수 있지만 친구는 한 번 잃으면 결코 다시 구할 수 없는 법, 존재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절대적 비극이라 하였다. 홍대용, 이덕무, 유득공, 정철조, 백동수 등 수많은 친우들과 지식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었던 박지원에게 대화를 나눌 친구, 글을 쓸 수 있는 종이와 먹, 벼루, 붓 거기에 술 한 잔만 있으면 행복했던 그에게도 우울증은 이따금 찾아들고 말년에 친우들이 세상을 많이 떠나며 그의 곁이 쓸쓸했으나 그는 이를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치유한다. 그는 장터에서 굴러다니는 돌 하나, 시끌벅적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들, 지나다니는 개, 고양이의 모습도 눈여겨 보고 관심을 가지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행랑채 하인이 밥 투정하는 자식을 혼내는 것을 보며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그는 높은 곳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신분이 낮은 이에 대해 배려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누이의 죽음에 이르러, 어린 시절 누이가 시집가던 날을 떠올리며 누이를 추억하고 슬퍼하며 글을 통해 자신의 슬픔을 치유해 나간다. 이렇듯 그의 많은 문장들은 시각적으로 상상이 더해지는데 이는 다시 선명한 색채를 가지고 타인의 삶까지 선명하게 만든다. 이것이 [열하일기]까지 이어진다.

 

 벽돌, 집, 수레, 의학, 코끼리 등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담았다. "아무런 까닭 없이 갑자기 돈이 앞에 느닷없이 굴러올 땐 뱀을 만난 듯이 조심하라"고 까지 쓴 글을 보건대 삶의 지혜까지 적힌 그의 글들은 도대체 이 여행기에 담기지 않은 것이 무엇일까 그것이 궁금해진다. 대체 담지 않은 것이 있기나 할까. 정조의 "문체반정"의 중심에 있었던 연암 박지원의 연암체, 그것이 어떤 문체인지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저자 고미숙은 연암체에 대해 "경직된 코드를 거부하고 우주와 생의 약동하는 리듬을 포착한다"고 했는데 이 글을 읽어도 상상이 가지 않는다. 현재 그가 살아있다면 어떤 문장으로 세상에 통렬한 가르침을 줄 것인가 나처럼 궁금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을 내어 보자면 그가 그랬다. "사마천과 반고가 다시 태어난다면 새글로 문장을 만들 것이다. 그들의 문장은 이미 지난시대의 문장이다"라고 했으니 자신의 문장 또한 이미 지난시대의 문장으로  현대에 맞게 새로운 연암체를 탄생시켰을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읽을면 읽을 수록 연암 박지원을 알 수가 없다. 어떻게 깊이 알면 "나는 너고, 너는 나다"가 될 수 있는지 읽으면 읽을수록 더 자신과 닮아진다고 쓴 글을 나는 이해하기 힘들다. 먼 훗날 꿈 속에서나 오롯이 알 수나 있을까. 허나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현재 사람들이 담아내는 여행기와 그 세월의 간극만 느낄 수 있을 뿐 별반 다름을 느끼지 못하니  어려운 그의 문체에만 적응된다면 참으로 유쾌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게 힘들다면 이 책부터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다음에 [열하일기]를 만난다면 나처럼 초면이 아니어서 좀 더 그를 잘 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근데 나는 분명 [열하일기] 중 "초란공" 이야기에 웃음이 터졌는데 재밌는 이야기라고 "초란공"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니 이야기를 하는 나도 재미가 느껴지지 않고 듣는 이도 웃지를 않으니 뭐가 문제일까. 말하는 것에도 어떤 힘이 필요한가 보다. 이렇듯 연암체 이것은 말하는데도 너무 많은 내공을 필요로 하고 있으니 쉬운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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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사 - History of Writing History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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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는 역사다운 역사를 이야기했다. 이 책은 헤로도토스부터 유발 하라리까지 '역사가 무엇인가' 알아가는 패키지 여행이라고 했다. 여기에 대해 깊이 있게 알아가는 시간인 '역사가 무엇인가'에 대한 자유로운 여행은 각자 독자의 몫으로 남겼다. 그런데 패키지 여행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자유로운 여행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저자 유시민이 쓴 [역사의 역사]에서 언급된 모든 책들을 읽어야만이 패키지 여행이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이 책을 읽은 후의 나의 느낌은 그랬다. 어려웠다.

 

 역사이야기를 다루는 사극의 원작소설, 주변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역사소설을 좋아하는 나는 이 패키지 여행의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하고 있으나 역사에 대해 박학다식한 사람에게는 이 책이 그저 평범한 일상처럼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저자 고미숙이 자신이 쓴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서 그랬다. "최고의 오지인 강원도 정선군에 속한 산간부락인 '조동'리 출신이라 이국적 풍경에 대한 호기심이 별로 없어 또 다른 '풍경'을 찾아다니지 않았다"고. 

 

 나는 역사란 있었던 일 그대로 적은 글이라 생각했다. 여기서 언급된 과거를 있었던 그대로 보여준다는 '랑케필법'이 역사라 생각했으나 작가는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역사의 교훈을 전하기 위해 깎을 것은 깎고 보탤 것은 보탠 '춘추필법'과 과거를 있었던 그대로 보여준다는 '랑케필법' 사이 어딘가에 있다"고 했다. "역사에 기록될 수 있었던 사실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개인의 생각과 서사가 덧붙여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 사실을 기록한 단 한 줄의 역사를 가지고 역사소설을 쓰고 드라마를 만드는 지금의 현재에서 이것들은 역사의 의미를 가질까, 가지지 않을까. 궁금함이 생긴다. 나는 어려운 역사서보다 재미와 유쾌함 또는 감동이 있는 역사가 조금 가미된 소위 퓨전이야기들을 더 좋아한다. 아마 이런 나의 이야기를 들은 작가가 그러겠지. 당신에겐 이 패키지 여행이 정말 필요하다고. 역사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과거, 현재, 미래까지 알아가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이렇듯 정답은 정해져 있는 것을 물어서 무엇 하겠나.

 

 작가는 처음에 학창시절 시험을 위해 열심히 외웠던 우리에게 익숙한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의 이야기로 독자를 안내한다. 처음 책장을 넘길 때의 진입장벽이 그리 높지 않다. 작가는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크게 4가지에 대해 중점을 두고 말하는데 난 그 중에서 사실로 엮어 만든 '이야기'에 관심을 두었다. "모든 사건은 일어난 그 순간 곧바로 상실과 망각과 소멸의 운명을 맞고 사건 당사자가 그 역사를 쓴다고 해도 그 때의 일을 정확하게 쓰지 못한다"고 했다. 여기에서 작게는 개인이 자신의 일생을 글로 남긴다고 했을 때 단 한 줄의 문장으로 '언제 태어났다'. '무슨 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했다'고 쓰는 소위 이력서에 쓰는 글처럼 나열했다가는 후세에까지 그 글이 남겨질 수는 있으나 나의 글을 읽어주는 독자(여기에서는 가족이겠다.)에게 오랜시간 선택을 받아 읽혀질 수 없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역사의 역사]에서는 전쟁과 문명, 과학혁명까지 헤로도토스부터 문명을 이야기한 아놀드 토인비, [호모데우스]를 쓴 유발 하라리까지 언급하고 있는데 역사란 과거를 기록하고 현재, 미래까지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과거를 이야기 하는 것에도 어려움이 따르나 미래를 논한다는 것은 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지금의 사람들의 삶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 것인가. 역사서에 미래까지 담는다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미래는 이럴 것이라고 짐작해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주 먼 과거에서부터 역사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역사서를 남기며 이어달리기를 하듯 서로 이어 받아 현재에 이르러 미래를 가장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미래를 가장 가깝게 맞추고 예측한 역사서가 타인에게 빈번히 읽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일 터. 지구제국의 개념으로 살아야 함의 중요성을 말하며 인류의 멸종이 올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유발 하라리의 글은 우리들에게 경종을 울리며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미래이기에 자못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재난 영화에서처럼 지구제국에 종말이 와서 오롯이 한 사람만 남는다면 그 때까지 기록된 모든 역사서들은 오롯이 남아 있는 그 한 사람이 죽고 난 후에도 남겨질 수는 있으나 세월의 무상함에 남겨질 그 무엇도 없으니 기록된 역사서도 결국 소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역사가 지속되려면 인간 개인의 삶과 함께 타인의 기억속에서 이어져 가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수명은 정해져 있어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동안 역사가는 최선을 다해서 사실을 평가하고 그 기록을 남긴다. 궁형을 당했지만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목숨을 건 사마천, 권력과 종교가 일치하는 곳에서 역사서를 쓴 이븐 할둔, 지금처럼 검색만 하면 지식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기록하는 역사와 달리 과거에는 직접 다니며 알아보고 사실과 가까운 역사를 선택해서 목숨을 걸고 기록하고 남긴 것이다. 작가는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재래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 유발 하라리의 [호모 사피엔스]보다 이븐 할둔, 사마천이 쓴 역사서에 더 높은 점수를 준다. 진실에 가깝게 서사를 입혔고 전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음에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담긴 것은 알겠으나 이 책들은 모두 각각 다른 이야기들을 전한다. 훌륭함과 감동, 존재 의미에 대해 가치 있는 메세지를 따질 필요가 있을까?

 

 마지막으로 사족을 덧붙이자면 작게 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이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자신의 삶을 모두 자신의 역사로 남기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모두가 역사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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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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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한권의 책을 읽는 시간은 전체적인 느낌 또는 찰나의 감정의 여운을 느낄 사이도 없이 아주 빠르게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런 내가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를 천천히 조금씩 음미하며 읽기 시작했다. 꼼꼼하게 메모해 가며 읽는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자신이 집필한 그 어떤 책이든 어떤 주제, 어떤 의미를 남겨야 한다는 강한 의식을 가지고 써 내려가지 않았다고 하며 나의 행위를 제지할 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란 질문 따윈 없다고. 그런데 말이다. 작가는 실패한 여행도 글을 써 내려갈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졌지만 나에겐 그런 능력이 없으니 작가의 시선에 따라 그 자취를 따라가며 작가가 남긴 감정의 여운을 느껴 보고 싶다고 한다면 그 때도 나를 제지할까? 

 

 작가는 "무슨 이유에서든지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은 현재 안에 머물게 된다."고 했는데 걱정거리가 있으면 여행을 오롯이 즐겁게 느낄 수 없는 나는 현재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아닐까. 여행지에 가서도 나는 여전히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걱정한다. 그래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사라지지 않는 문제들이 늘 나를 압박한다.

 

 우리가 지구라는 별에 태어나 타인의 환대속에 살아가는 것과 현지인의 도움을 꼭 필요로 하는 여행, 이 둘은 닮아있다고 했다. 작가가 언급한 이 글은 나에게 "새로운 시각"을 선사했다. '인간은 왜 태어났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죽을 때까지 고민하며 살아가는데 우리는 지구라는 별에 여행을 왔다고 하니 꽤 만족스럽진 않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여행의 이유]는 이렇듯 철학책이 아닌데도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작가는 여행을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그런 마법적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또한 우리의 인생과 맞닿아 있음을 말하고 있으며 그는 23살의 중국 여행이 지금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연결해 나가며 '추구의 플롯'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작가는 왜 [여행의 이유]를 썼을까. 과거 이동이 잦아 친구가 없고 호텔 예약 후 호텔에 도착했을 때 자신의 이름이 있고 그 곳에서 받아들여졌다는 안도감, 글을 쓰는 이유 또한 자신이 만든 낯선 새로운 세상에서 받아들여졌다는 안도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누구도 질문하지 않는 내밀한 이야기들과 '자신이 왜 그랬을까?'에 대해 자주 자문해 보던 질문의 답을 찾았기에 너무나 이 이야기들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 누가 묻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답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가벼운 여행담은 아니었다. 작가의 살아온 이야기였고 그를 스쳐가는 시절의 이야기도 담겨 있었다. "이 책을 쓰는데 모든 여행의 경험이 필요했다"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다. 짧게 언급되는 이전의 작품들의 에피소드들, 현재의 이야기들이 아닌 과거의 시점에서 일어난 일들을 들려주며 [여행의 이유]는 유명한 곳을 찍은 수많은 사진들과 여행지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나가는 여행기와 다름을 명백히 드러낸다.

 

"인생과 여행", 이 둘이 맞닿아 가는 길의 끝에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에 품었던 꿈과 성공적인 삶을 위한 목표였던 많은 것들이 점점 그 꿈의 여정에서 멀어져 가지만 결코 실패한 길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에 있으며 그 누구라도 처음부터 완벽하게 준비하고 길을 떠나지 않으며 많은 불안요소를 안고 나아가고 또한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과 여행은 그래서 신비롭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일상 생활에서조차 '나'를 드러내지 못하고 아무 것도 아닌 '나'라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나는 일상에서도 여행지에서도 아직 '나'를 찾지 못했다. 나의 여행은 시작되지 않았고 아직은 일상 속에 머물며 숨 고르기를 한다. 팍팍한 현실 안에서 조금의 여유를 즐기기 위해 '나'는 늘 여행을 꿈꾼다. 제대로 된 '나'를 만나기 위해. '나'는 나의 이야기들을 언제쯤 들려줄 수 있을까. 어쩌면 첫 문장을 쓸 기회조차 없이 끝나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을 살아가고 살아내고 있다. 지구라는 별에서 겪은 여행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줄 그 날이 올 때까지 열심히 살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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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보경심 세트 - 전3권
동화 지음, 전정은 옮김 / 파란썸(파란미디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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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하지 않았지만 시간여행이라는 같은 주제의 책들인 이리리의 '연의 바다'와 동화의 '보보경심'을 읽으면서 내가 원한 결말은 무엇일까, 참으로 많은 고민을 했다. 팍팍한 현실을 감내하기 힘든 우리들은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남녀 주인공이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습니다?"라는 결말을 원하므로 21세기에서 파라오 토드모세가 통치하는 이집트로 시간여행을 하게 된 연하와 300년 전으로 타임슬립한 약희의 존재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작가가 이것을 그려냈으니, 어떤 결말이든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 고집을 피워서라도 행복한 결말을 그려내라 강요하고 싶어진다. 허나 작가의 손에서 만들어진 등장인물이지만 스스로가 생명을 가지는 것인지 생과 사를 결정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흘러가며 벌어지는 일들은 결코 작가의 머리와 손끝에서 벌어지는 것이라 단언할 수가 없다. "구르미 그린 달빛"의 저자는 윤성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기 위해 이 작품을 마무리 했다고 했으니 주인공들은 물론이고 등장인물들의 생과 사는 그들 스스로 결정 짓는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의 일대기를 보는 것만큼 허무한 것이 있을까. 로맨스 소설은 더 그러할 것이다. 여러 황자들과 우정을 맺고 역사의 흐름을 바꾸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약희는, 우정을 위해서라면 목숨조차 내어 놓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 소위 의리가 있음에도 왜 팔황자 윤사에게만은 죽을 각오로 그와 온전히 사랑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보보경심'의 작가는 꽤 많은 세월이 흘러가며 약희의 감정은 물론이고 사황자 윤진, 팔황자 윤자, 십사황자의 감정까지 세밀하게 그려내어 약희 그녀의 마음이 서서히 어디로 향하는지, 왜 팔황자에게 온전히 마음을 다 주지 못했는지 알 수 있지만 역사의 흐름을 바꾸지 않기 위해 노력한 그녀는 그녀 자체의 존재만으로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이므로 황궁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 속에서 오롯이 홀로 흘러갈 순 없었다.


가장 자연스럽게 이끌어낸 약희의 삶, 그것은 그녀가 개입하지 않으려 노력했던 역사의 흐름에 가장 알맞은 결말을 맞았다. 그럼에도 좀 더 행복할 순 없었나 하는 아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세월은 누구나에게 공평하고 약희와 황자들이 모여 큰소리로 웃으며 보냈던 시절은 이젠 빛바랜 추억속에서나 꺼내어 볼 수 있는 일이 되어 버렸고 역사속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시간들이 되었다. 허나, 약희 그녀를 향한 사랑, 그 마음만큼은 사황자, 팔황자, 십사황자의 마음안에서 사라지지 않으니 이름하여 '추억'이라는 것으로 여전히 남아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약희, 다시 이곳으로 올 수 있다면 그때도 지금과 같은 삶을 살 건가요? 처음부터 온전히 사황자만을 바라볼 건가요. 상대만을 오롯이 바라보는 두 사람 곁에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가슴아픈 사랑은 늘 내 마음속에 깊은 여운을 남기고, 약희 그녀가 현대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음에 조금 아쉬움을 느낀다. '연의 바다'에서는 몇 번이나 연하가 살던 곳으로 갈 수 있었음에도 강제에 의해 막히고, 스스로 떠날 수 있었던 때는 스스로 그 기회를 떠나 보내며 토드모세의 곁에서 함께 하는 삶을 선택하기 때문에 독자로서 조금 기대하는 바, 바라던 바가 철저히 막혀 버렸지만 연하는 자신의 선택에 의한 완전한 사랑을 선택할 수 있었고 약희는 돌아가지 못하고 마이태 약희의 몸에서 진짜 약희가 어떤 삶을 살고 싶었을지 알지 못한채 장효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으로 약희의 몸으로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치열하게 살아가며 그 삶을 마무리 하게 된다.  


허구잖아요? 소설일 뿐인데 왜 이렇게 마음 아파하고 깊은 여운을 느껴야 하는지, 시간의 흐름에 갇힌 주인공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떠나보내기 위해 나의 마음을 오랜시간 달래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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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구르미 그린 달빛 세트 - 전5권
윤이수 지음, 김희경 그림 / 열림원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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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 형, 정말 괜찮으신 거지요?" 월하노인의 팔찌를 라온이에게 채워준 그의 마음은 온통 라온이뿐이었는데, 이번 생에서는 그 인연을 이어갈 수 없음을 알고 그 마음 내려 놓는 것을 보는 제가 왜 더 힘든 것일까요. "윤성, 당신도 괜찮은 것이지요?" 가면을 쓰고 늘 웃음을 머금고 살아온 그가 라온을 만나게 된 후 진짜 웃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 버렸는데 이대로 라온이와의 인연을 놓게 된다는 건 너무 가혹한 것 아닌가요. 드라마와 달리 병연과 윤성은 참으로 참으로 라온이를 많이 아낀다.윤성은 세자의 손에서 라온이를 빼앗아 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고, 병연은 라온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조차 아끼지 않는다. 물론 윤성 또한 그러했다. 하지만 하늘은 화초저하와 라온이의 사랑만을 이어줬을 뿐, 다른 두 사람에게는 그 사랑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다음 생에서는 라온, 그녀의 손을 결코 놓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윤성을 보며 마음이 많이 아팠더랬다.


홍경래의 여식 홍라온,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정해진 그녀의 출생의 비밀은 화초저하의 곁에서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수 없을 것이라 짐작하게 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외척세력을 제거한다는 목적으로 세자빈까지 끌어내어 그 자리에 라온을 앉힌다? 앉힐 수 있나? 세자가 누구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했으니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홍경래의 여식이라 이미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을 했으나 어떻게 화초저하와 라온이가 행복해질 수 있을지 그 결말을 가늠조차 할 수가 없었다. 허나 역시 작가는 대단하다. 사실에 바탕을 두고 허구의 내용을 잘 결합하여 그려낼 수 있는 가장 좋은 결말을 이끌어냈기에 대단하다 감탄하면서도 실은 그 결말에 대해 할 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홍라온과 화초저하가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습니다. 네, 네 맞습니다. 이 결말을 위해 그동안 늦은 밤까지 수많은 책장을 넘겼지요. 어머니와 여동생 단희를 위해 여인이라도 비록 속아서 된 것이긴 하나 환관이 되어 열심히 살아온 라온, 세자가 언제쯤 그녀가 여인이라는 것을 알게 될까 가슴졸이며 두근두근 설레어 하며 기다렸건만 두 사람의 사랑은 그리 순탄한 길을 걸을 수 없었지요. 권력의 정점에서 화초저하가 선택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멋있는 선택이랄 수 있을까요. 네, 모든 것을 내려 놓은 그에게 최고의 선택, 가장 현명한 선택일 것입니다. 라온의 어머니와 단희의 안전은 물론 그 삶까지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게 바꿔 놓을 수 있었으니까요.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결말로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조금은 짐작을 하면서도 이리 유쾌하게 맺는 결말이 아닌, 조금은 진지하게, 진중하게 맺었다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한답니다. 어쨌든 두 사람 행복하잖아? 대체 네 진심이 뭐야?라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만 이들의 이야기가 금세 끝나는게 아쉬워 이러나 봅니다. 


홍라온에게 도움을 준 이들은 참 많았더랬다. 비록 홍라온의 이야기로 여유로운 궐 생활을 한 '도기'를 포함한 불통내시들, 라온이가 이어준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으리라. 딱히 원작소설과 드라마의 경계가 불분명해져 그 내용조차 서로 헷갈리는 요즘이지만 원작소설에서의 화초저하가 여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지병(?)으로 소소한 에피소드가 있었던 그 시간들이 좋았다. 라온이는 가슴졸이며 보낸 시간들이었지만 어떻게 라온이가 여인인 것을 알게 되는 그 상황은 지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드라마 소재로도 훌륭하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가슴 설레이는 장면이다. 동화의 '보보경심'의 한 장면 중 눈 길을 걷는 팔황자와 약희를 떠올리는 것만큼이나 가슴 설레인다. 서로만을 바라보던 그 때, 오롯이 그들뿐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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