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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개정신판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 제대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만나면 "오랜만에 뵙습니다" 라며 초면이 아닌 것처럼 인사를 잘할 수 있을까. 연암 박지원의 생의 한 부분과 압록강을 건너고 요동을 거쳐 연경에서 열하 그리고 열하에서 연경까지 그가 남긴 [열하일기]를 통해 그와 그의 작품을 조금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으니 분명 다음에 만난다면 초면이 아닌 게다.
저자 고미숙은 여행기에도 유머가 있어야 한다며 '유머의 천재' 연암 박지원 [열하일기]의 웃음을 사방에 전염시키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얼마나 재미있는데 아직 읽지 않았냐고 호통을 치는 듯 했다. 나도 왜 이제서야 이 재미있는 책을 알게 되었는지(학창시절 무수히 많이 들어보고 시험의 답으로 대면했었지만) 안타까울 정도. [열하일기]가 얼마만큼의 유머를 담고 있든 그 어려운 말들에 유머 코드를 적절히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모두가 웃는 가운데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누가 설명이라도 해주면 뒤늦게야 "아!하!" 하며 무릎을 치겠지. 한 번이면 괜찮으련만 이것이 매번 이리 된다면야 나에게 [열하일기]는 유머나 해학적이나 도통 알아차릴 수가 없어 분명 지루한 책이 될 것이다. 저자 고미숙이 [열하일기]의 내용을 써 내려가며 연암 박지원이 왜 이렇게 글을 썼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언급하는 말들에 연암 박지원의 유쾌함을 오롯이 담기 위해 노력하여 더불어 독자인 내가 연암 박지원의 전하는 뜻을 다 이해할 수 있어 웃어야 할 곳에서 적절하게 웃음이 터져 나왔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무엇이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글인지 어디가 저자 고미숙의 글인지, 다만 현대에 맞게 자세히 설명하니 그 구별이 갈 뿐이다.
[열하일기]는 압록강을 건너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강을 건너기 전 이번 길에 아무일 없기를 바라며 하인 장복, 창대를 위해 그리고 말을 위해 빌었다. 여행의 설렘보다 우선은 무사히 다녀올 수 있기를 빌었다. 그 때에는 여행을 떠남에 있어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었을 것이다. 깊은 물을 건넌 후 서로 살아 있음에 축하하고 이보다 더 깊은 물을 건너야 함에 놀라는 장면, 대부분의 글들이 이렇게 살아있는 문장으로 시각적으로 눈 앞에 그려진다. [열하일기]는 연경에 도착후 열하로 여행지가 이어지고 바뀌며 계획에 없던 여행이 시작되며 그 누구도 쓸 수 없는 글이 만들어진다. 가는 곳곳마다 연암 박지원은 지식을 나누는데 벗을 가리지 않고 몰래 빠져나가기를 밥 먹듯이 하니(빠져나가다가 잡혀서 나가지 못하는 일은 없으니 대단할 밖에) "특별한 의미가 있건 없건 신기하고 새로운 건 무조건 기록"했다는 저자 고미숙의 말대로 무엇이든 알고자 했던 호기심은 그 어떤 이유로도 그를 막지 못했다. 연암 박지원은 여행을 연경에서 끝냈을 수도 있으나 열하에 가는 것을 결정하며 그의 삶도 전혀 새로운 여정으로 들어선다. [열하일기]가 정조의 문체반정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서게 된다.
연암 박지원과 동시대를 살다간 다산 정약용은 연암 박지원을 이야기 할 때 꼭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일 것이다. 같은 시대를 살았으나 벗으로 마음을 나누거나 지식을 나누지 않은 두 사람, 저자 고미숙은 "두 사람은 만나지 않았고 서로에 대해 침묵했다"고 말했다. 만나지 않기야 했겠냐만은 서로에 대해 무심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아니 무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글을 쓰는 문체는 물론 세상을 바라보는 그 마음까지 달라 서로가 가는 길이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은 자신의 글에 짧게 언급(저자 고미숙에 의하면 다산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열하일기]에 관한 간단한 멘트를 남겼다고 한다)이야 했지만은 그렇게 둘은 안타깝게도 비껴갔다.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깊이 있게 알 수가 없어 안타까운데 둘은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느라 서로를 돌아볼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연암 박지원에게 우정이란 '지금, 여기'에서의 생을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나'의 경계를 넘어 끊임 없이 다른 것으로 변이되는 능력의 다른 이름으로 아내는 잃어도 다시 구할 수 있지만 친구는 한 번 잃으면 결코 다시 구할 수 없는 법, 존재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절대적 비극이라 하였다. 홍대용, 이덕무, 유득공, 정철조, 백동수 등 수많은 친우들과 지식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었던 박지원에게 대화를 나눌 친구, 글을 쓸 수 있는 종이와 먹, 벼루, 붓 거기에 술 한 잔만 있으면 행복했던 그에게도 우울증은 이따금 찾아들고 말년에 친우들이 세상을 많이 떠나며 그의 곁이 쓸쓸했으나 그는 이를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치유한다. 그는 장터에서 굴러다니는 돌 하나, 시끌벅적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들, 지나다니는 개, 고양이의 모습도 눈여겨 보고 관심을 가지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행랑채 하인이 밥 투정하는 자식을 혼내는 것을 보며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그는 높은 곳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신분이 낮은 이에 대해 배려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누이의 죽음에 이르러, 어린 시절 누이가 시집가던 날을 떠올리며 누이를 추억하고 슬퍼하며 글을 통해 자신의 슬픔을 치유해 나간다. 이렇듯 그의 많은 문장들은 시각적으로 상상이 더해지는데 이는 다시 선명한 색채를 가지고 타인의 삶까지 선명하게 만든다. 이것이 [열하일기]까지 이어진다.
벽돌, 집, 수레, 의학, 코끼리 등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담았다. "아무런 까닭 없이 갑자기 돈이 앞에 느닷없이 굴러올 땐 뱀을 만난 듯이 조심하라"고 까지 쓴 글을 보건대 삶의 지혜까지 적힌 그의 글들은 도대체 이 여행기에 담기지 않은 것이 무엇일까 그것이 궁금해진다. 대체 담지 않은 것이 있기나 할까. 정조의 "문체반정"의 중심에 있었던 연암 박지원의 연암체, 그것이 어떤 문체인지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저자 고미숙은 연암체에 대해 "경직된 코드를 거부하고 우주와 생의 약동하는 리듬을 포착한다"고 했는데 이 글을 읽어도 상상이 가지 않는다. 현재 그가 살아있다면 어떤 문장으로 세상에 통렬한 가르침을 줄 것인가 나처럼 궁금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을 내어 보자면 그가 그랬다. "사마천과 반고가 다시 태어난다면 새글로 문장을 만들 것이다. 그들의 문장은 이미 지난시대의 문장이다"라고 했으니 자신의 문장 또한 이미 지난시대의 문장으로 현대에 맞게 새로운 연암체를 탄생시켰을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읽을면 읽을 수록 연암 박지원을 알 수가 없다. 어떻게 깊이 알면 "나는 너고, 너는 나다"가 될 수 있는지 읽으면 읽을수록 더 자신과 닮아진다고 쓴 글을 나는 이해하기 힘들다. 먼 훗날 꿈 속에서나 오롯이 알 수나 있을까. 허나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현재 사람들이 담아내는 여행기와 그 세월의 간극만 느낄 수 있을 뿐 별반 다름을 느끼지 못하니 어려운 그의 문체에만 적응된다면 참으로 유쾌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게 힘들다면 이 책부터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다음에 [열하일기]를 만난다면 나처럼 초면이 아니어서 좀 더 그를 잘 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근데 나는 분명 [열하일기] 중 "초란공" 이야기에 웃음이 터졌는데 재밌는 이야기라고 "초란공"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니 이야기를 하는 나도 재미가 느껴지지 않고 듣는 이도 웃지를 않으니 뭐가 문제일까. 말하는 것에도 어떤 힘이 필요한가 보다. 이렇듯 연암체 이것은 말하는데도 너무 많은 내공을 필요로 하고 있으니 쉬운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