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 따뜻한 변화 에너지
박태현 지음 / 웅진윙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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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려면 소통하라" 고인물은 썩기 마련인데 나의 삶은 이렇게 사방팔방이 막힌 답답한 상황에서 머릿속을 배회하는 모든 정신과 사념들이 서서히 썩어가고 있다. "마음을 다해 가슴으로 대화한적이 있던가?" 세상을 향해 날 알아달라 호소하다 안되면 자포자기의 "내면적 욕구의 포기"상태에 들어가 버리곤 했던 삶이었으니 소통에 대한 뜻이나 알고 살아왔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난 성격이 이래서 할 수 없다"는 늘 자기변명을 하고 살아온 세월이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이렇게 절박한 상황에 "소통"이란 책은 나의 숨구멍을 탁~틔워줄 소중한 녀석이다. 시중에 판매되는 자기계발서의 서적들은 극히 어렵고 "이러이러 해야한다"고 많은 지침서를 던져준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면 머릿속에 남는건 늘 책 제목이나 한 두줄의 문장들뿐. 나와 늘 동떨어진 상황으로 생각하고 그저 글자들만 읽어온 시간이었나 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봤음에도 왜 그랬는지. 너무나 광범위한 내용에 질려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브레멘 음악대"라는 재밌는 동화에서 소재를 끌어와 아주 쉽게 화두를 던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쉽게 봐야할 책은 아니다. 많은 생각과 자기 성찰을 해 볼 수 있게 퍼니, 로티, 보이스, 익스퍼 4마리 동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작가가 내게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주변인물들의 성향은 어떠한지 생각하며 읽으라고 해서 읽는 동안 나름 고민을 해 봤었다. 관계지향형 퍼니인가? 조직충성형 로티? 아니면 가치지향형 보이스? 이도 아니면 성장추구형 익스퍼? 정확히 어떤 성향이라고 딱 꼬집어서 말하진 못하겠다. 일을 맡겼을때 정확히 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로티의 일면이 있는 것 같고 가족같은 분위기 속에서 지내려고 노력하는 면에서는 또 퍼니같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 것을 보면 보이스 같기도 하니 어디다 초점을 맞춰서 봐야할지 모르겠다. 아마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4마리의 성향을 다 가지고 있을 듯 하다.  

브레멘을 향해 떠나는 이들의 시련은 너무 크다. 브레멘에 도착해서도 기득권을 주장하는 그들과 조화롭게 살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소망하는 바가 너무 컸던 것일까? 그래서 느끼는 절망감도 클 수 밖에 없지만 한걸음 나아가 진솔한 대화를 통해 이들은 '있던 자리에서 이겨내지 못하면 어디를 가든 똑같다'는 생각에 다시금 각자의 보금자리로 돌아가자고 결론을 내린다. 아~하지만 주인들이 가만 놔둘까? 걱정이 앞선다. 퍼니는 채찍질에 맞아 죽지 않을까? 로티는 삼복더위에 팔리는 신세가 되지 않을지 노파심에 한장 한장 넘기기가 두렵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녀석들이 떠나고 소중한 존재임을 그제서야 아는 주인들. 너무 해피엔딩이다. 그래서 피식~웃음이 흘러나온다. 괜한 걱정을 했다. 

그러나 조금 불만스럽다. 현실은 전혀 이렇게 술술 풀리는 결말을 내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단점을 극복하고 관계개선을 통해 자아실현을 해 나가는 그들이고 보면 책이지만 이런 이상적인 세계라면 못할 것이 없게 느껴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각자의 노력이 우선시 되어 이루어진 결과이므로 모든 일이 잘 끝나고 또 제 2의 퍼니, 로티, 보이스, 익스퍼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그들을 보면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이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너무 안일하게 사는거 아니야? 이리와 무슨 문제가 있어?"하며 퍼니가 나의 문제에 대해 상담을 해 줄 것 같다.   

지금까지 난 늘 자리 지키기에 급급하고 나의 진가를 알아봐 주지 않는다고 징징거리는 어린애 같은 삶을 살아왔다. 부단히 노력하여 원만한 대인관계의 초석을 다지고 자기계발을 조금씩 해 나가다 보면 카리스마를 갖춘 리더가 될 자격을 얻을 수 있을까? 그렇다고 강압적인 리더가 아니고 퍼니, 로티, 보이스, 익스퍼를 적절히 섞은 아주 이상적인 리더가 되는 것을 목표로 매진해 나간다면 훗날 지금보다 더 발전적인 사람이 되어 있겠지? 어린애가 아닌 성장한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결코 이루지 못할 꿈은 아닐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순간 이미 한발 내딛였으니까. 첫발을 내딛기가 힘들지 그 다음은 그냥 나아가면 된다.  

그럼 당신들의 문제는 뭔지 퍼니에게 먼저 속을 털어놔 보는 것은 어떨지? 인간관계의 가장 기본이 소통이고 보면 막힌 문제들 중 뚫리지 않는 문제들은 없어 보이지 않나? "마음을 여는 것" 이것이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인 것 같다. 누구나 주변을 밝게 비춰주는 북극성이 되려고 한다면 소통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들과 함께 새로운 세계로 떠날 준비는 되었나? 그럼 나와 함께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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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야화
아사쿠라 다쿠야 지음, 최선임 옮김 / 지식여행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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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비로움이 내 몸을 감싸고 끊임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 보노라면 하늘로 빨려올라가 버릴 것 같은 느낌. 어렸을때 부산에도 큰 눈이 왔던적이 있었다. 눈덩이를 굴리며 나보다 더 큰 눈사람을 만들며 즐거워 했던 기억이 있기에 요즘 같이 눈이 많이 내리지 않아도 눈 이야기가 반이상을 차지하는 "눈의 야화"속으로 성큼 들어설 수 있었다. 겨울이 없는 곳에 살았다면 시종일관 '눈이란 어떻게 생겼을까?'를 생각하느라 책 이야기에 집중할 수도 동화되지도 않고 끝까지 읽어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하얗게 내리는 눈을 상상할 수 있는 나는 분명 축복 받았음에 틀림없다.

차가운 느낌의 눈이 왜 이렇게 따스하게 느껴지는 걸까? 아마도 "유키코"라는 15살난 여자아이 때문인가 보다. 눈이 내리는 날 집 앞 공원의 유키코를 찾아가면 어김없이 "가즈키"의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그녀. 아주 오랫동안 15살로 머물러 있는 그녀이기에 '혹 귀신인가? 하지만 이렇게 이쁜데 귀신일까? 아님 유령?' 이런 생각들로 갑자기 등골이 서늘하고 으스스한 기분이 된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가끔 보이고 쑥 커버린 어른들에겐 보이지 않는 존재라 가즈키가 알아보는데 놀란건 그녀다. 죽음과 새로운 탄생의 중간에 머물러 있는 유키코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들은 왜이리 어렵기만 한지. 가즈키와 함께 듣노라면 시간가는 줄 모르겠지만 그녀가 말하는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아 있는 사실이라고 수긍하기 힘들다. 그래서 그녀가 내뱉는 한마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실이 아닌 건 아니다. 그럼 난 존재하지 않는거냐?" 라는 말에 대답할 말이 없어 입을 닫고 그저 바라만 보게 된다.   

세상에 때가 많이 묻고 속물적인 나같은 사람은 볼 수도 없는 존재이기에 신비스러움을 느끼다가도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허상이나 환청이 되어 버린 그녀가 참 외롭고 슬퍼보인다. 어쩌면 그래서 가즈키의 닫혀 버린 마음을 열어주는 유일한 상대가 되지 않았을까. 회사를 나오며 마음의 문을 닫아버려 세상과 단절하고 벽을 쌓은 그에게 "왜 그러냐? 말을 해라 앞으로 어떻게 할꺼냐"하며 답답해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과는 다르게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함께 있기만을 바라는 유키코가 오로지 그의 마음을 열어주는 열쇠인 것 같다. 그녀 자신도 15살에 머물러있는 이 세계에 작별을 고할 이유를 찾아가는 만남이긴 하지만.  

내리는 하얀 눈이 내는 빛으로 인해 세상은 더 밝게 보이나 보다. 빛이 있어야 세상을 보지만 눈으로 인해 다른 세계도 볼 수 있다니 유키코는 더이상 생경한 존재가 아니다. 하늘로 올라가 점이 되어 사라지는 그녀를 보면 오히려 마음이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15살이지만 태산도 품을 수 있는 맘자리 넉넉한 아이라서 그럴까? 어쩌면 내가 늙어 할머니가 되어도 그녀가 15살이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다행히 그녀의 결말은 아름답다. 끝이 아닌 또 다른 윤회의 세상이 있음을 알려주기에 세상이 그저 각박하고 피 튀기며 살아야할 전쟁터라는 느낌은 잠시 손에서 내려놓게 하는 마력을 지닌다. 가즈키를 통해 바라본 세상이지만 차가운 눈이 더이상 위험한 존재로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에는 눈이 내리면 미끄러운 노면으로 인해 사고가 끊이지 않아 사상자가 생겨나고 넘어져서 다치고 하지만 이 곳은 오로지 눈 내리는 소리만 "사각사각, 뽀드득, 뽀드득" 하고 들리는 듯 하다. 어릴적 감성을 잊고 살아온 세월이 느껴지는 하루였다. 나에게만 보이고 나의 말만 들어주는 소녀가 나에게도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세상을 내가 움직여 볼 수도 있다는 허황된 꿈도 꿀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나란 존재가 허상이 아닌데 그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루를 보내다 보면 세상에서 난 과연 인식되는 존재인지 유키코처럼 그저 보이지 않는 허상이 되어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드는 요즘이고 보면 남에게 말하지 않는 비밀을 가슴속 깊숙히 묻어놓은 그런 기분을 느끼게 될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세상에 떠들면 나보고 미쳤다고 손가락질을 할테니 내 가슴속에 묻어두는 편이 낫겠지. 오히려 그렇게 해야할 현실이 각박하게 느껴질 뿐이다. "눈의 야화"가 아름답다고 느껴질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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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이는 女子들, 길들여진 男子들
에스테 빌라 지음, 조선희 옮김 / 지향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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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도에 처음 출간된 책이라지만 어떻게 이렇게 요즘 세태를 제대로 찝어내지?' 란 생각이 든다. 처음엔 나도 무지 충격을 받아 욕을 하면서 읽었다. 하지만 너무나 직설적으로 나에게 공격을 가해오므로 피할 곳이 없어서 으르렁대며 "어디 두고보자"는 심정으로 끝까지 읽었다. 길들여진다는 것보다 솔직히 길들이는 편이 좋아 제목에 끌렸었다. "길들이는 여자들" 얼마나 좋게 들리나? 하지만 이런 반전이 있을줄이야. 온통 여자에 대한 단점투성이의 단어들뿐이다. 이성이라고는 없는 그저 남자를 꼬시기 위해 화려하게 화장하고 꾸밀줄만 알고 도통 지식을 쌓을 줄 모르는 무식하고 돈만 아는 창녀. 이것이 내가 이 책에서 느낀 여자의 존재이다.  

여자를 인류(남성, 여성으로 분류된)에 넣는 것조차 부끄러워 하며 평생을 안락하게 보내기 위해 남자를 그저 돈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보고 길들이는 여자들을 정말 신랄하게 비판한다. 작가는 이 책을 내고 돌은 안맞았는지 걱정스러워진다. 지금도 충격인데 1971년도에는 말해 무엇하랴. 아마 요즘은 여자들도 사회에 나가서 큰 성공을 거두는 예가 많고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이들이 늘어가는바 더 충격일지 모르겠다.

"여성은 일시적으로 일을 하던지 또는 전혀 하지 않는다."는 말에는 부정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소수이지만 활발하게 사회에서 제 몫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라며 반박을 해 보지만 나 자신이 결혼을 하고 집에 칩거하며 남성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가족"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당연시 여기게 만드는 길들이기를 하고 있어 감히 입을 ‹呼痴뗏?없다. 정말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가족임을 앞세워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는 여성들이 과연 젊음을 내세울 수 없을때 남성들이 자신을 책임지고 부양하게 만들려고 아이를 낳는단 말인가? 세계의 중심이 남성들로 인해 돌아가고 있지만 여성들을 위해 발명하고 돈을 벌며 그 속에서 길들여지는 남성들에게 "권고하느니 제발 벗어나라"고 종용하는 자체는 어찌 바라봐야 하는가. 정말 남자는 노예인 것인가?  

아이의 양육에 대해서도 가히 부정적이다. 남자아이는 어릴때부터 길들여지고 여자아이는 어릴때부터 창녀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몇시간을 화장하는데 공을 들이고 생물학이나 지구과학 같은 과목을 능한시 그저 단순한 과목만 열심히 하는 여자아이들이고 보면 이미 그 죄는 엄마인 여성에게 돌아간다. 역시 "세상을 움직이는건 남성이지만 그 남성을 낳은 사람은 여자다?" 이 말과 책 내용이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분명 읽는 사람 누구나 혼란스러울 것이다. 아니 여성혐오증이 있는 사람은 쾌재를 부르며 읽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임신과 출산에 이르러서는 여성혐오증이 있는 이 남성도 어머니는 따뜻한 시각으로 바라보기에 부정적인 의견을 보일지도 모른다.  

진정 여성해방을 여자들이 원하지 않을까? 이 안락한 가정의 테두리안에 안주하기 위해서? 아니. 가족은 생명을 잉태하고 영혼이 쉴 수 있는 곳이다. 행복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 여성들은 사회에 맞서 나갈수 있다. 그저 남성들에게 기대어 살지 않는다. "어머니는 강하다고 하지 않던가?" 여성의 권위가 신장되는 요즘이다. 글을 깨우치지 못하고 남편 잘 만나는 것이 여자의 행복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던 시절과 다르다. 자신의 이름이 사회에 불리어지길 원하고 아이에게 떳떳한 부모이고 싶어한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다시 씌어져 수정해야 될 것 같다. 오롯이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기엔 내가 여성이라는 것이 너무 슬퍼지기 때문이다.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하고 행복을 추구한다.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귀속되어 편안한 삶과 행복을 보장받는 대가로 돈을 벌어다 주고 여성을 위해 인생을 받친들 어떠랴.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나를 닮은 자식들과 같이 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리라. 어찌 이것을 노예의 삶이라고 부른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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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긍정 - 장향숙의 만리장서 이야기
장향숙 지음 / 지식의숲(넥서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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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다르게 보아온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 세상은 왠지 거꾸로 흘러가는 느낌이다. 아니 세상이 실제 거꾸로 흘러가고 있다. "세계는 하나다"라며 지구촌 가족이라고 침을 튀기며 이야기하고 대중매체를 통해 "이웃이 누군지도 모른다"며 너무 각박한 세상이라고 성토하지만 우리가 외면해 온 세계에 대해선 다들 어찌 하려는가. 내 가까이에 있는 누군가는 존재의 이유조차 모른채 살아가고 있는 것을. 진정 장애인들을 투명인간 취급을 한 채 병신, 바보, 구걸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하고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엎드린 채 세상을 바라본 사람 장향숙님을 통해 나는 세상의 구석, 사각지대의 현실을 오롯이 보게 되었다. 알고는 있으나 외면 해 온 세계다. 나 자신의 고통이 더 크다는 변명을 하면서 말이다.

 요즘 자기계발서를 많이 읽게 된다. 내용 중 "긍정적인 삶"이란 말을 많이 보게 되지만 진정한 자기 긍정은 장?숙님을 통해서 보게 된 것 같다. 그녀의 깊은 사색을 따라가다 보면 장애인인 자신의 삶보다 거울속의 나를 보는 듯 똑같이 닮아있는 사람들을 통해 깊은 긍정을 이루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너는 이 책을 읽고 깊은 긍정을 이루었느냐?"고 질문하면 아니다. 삶의 끝을 보지 않아서인지 아직 내 손아귀에 쥐어진 것을 바라보기에 급급해서인지 내면을 바라보는 것이 참 힘들다. 세상을 올곧게 바라보는 것도 아니면서 내면도 힘들다니 세상의 질문들에 대답할 자격도 없어지는 듯 하다. 어떻게 하면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을까? 거꾸로 흘러가는 세상이니 거꾸로 보면 되는 것일까?

 장향숙님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어김없이 종교, 정치에 맞닥드리게 된다. 꿈속의 계시를 통해 꿈에 보인 집을 찾아가니 200만원을 선뜻 내놓는다든지 솔직히 종교와 정치 이야기라면 고개부터 절재절래 흔드는지라 일단 거부감부터 들고 신의 계시를 통해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그녀를 보면 눈앞에 보이지 않는 허상을 통해 하는 일이라 인정하기 힘들다. 하지만 곳곳이 등장하는 신의 존재 어떻든 그녀를 일으키는 존재라면 그리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되는거 아닌가. 장애인이라는 것을 먼저 인정하고 타 장애인들을 위한 큰 뜻을 품고 힘들게 조금씩 나아가는 그녀를 보면 종교야 어떻든 그 신념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이제는 국회의원 장향숙. 22살에서야 세상의 빛을 향해 첫 발을 내디딘 그녀의 삶은 이제 다른이들을 위한 걸음을 내딛고 있다. 비록 첫 여정이 100미터도 나아가지 못한 길이었으나 이제는 그녀를 원하는 곳이면 세계 어디든 갈 수 있다. 노동의 현장에서 보고 겪게 되는 여성장애인들의 문제들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할 길을 알았고 집안에서조차 냉대받아 존재의 이유조차 사라진 사회에서 투명인간이었던 그들을 위해 전면에 나섰다. 맘이 차가워진 그들이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다고 따뜻한 곳이라고 알게 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몸은 불편하지만 영혼이 맑은 그들을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마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겠지. 1년간 찾아보지 않은 밀알선교원. 여긴 장애인들이 아니 요즘은 친구라는 개념으로 장애우라고 부른다. 장애우들이 예배를 보는 곳이다. 나를 반갑게 맞아준 그 곳 이곳에 가면 맘이 참 포근했었다. 비록 휴대폰에 찍어서 대화를 할 지라도 작은 소통에 기꺼워하며 짧은 대화나마 만족하며 손을 잡았던 나의 장애우 친구들 오히려 맘은 비장애인보다 순수하고 열정이 가득한데 단지 몸이 불편하여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이 왜그렇게 안타까운지. 유일하게 가족으로 대해준 엄마가 암으로 죽어간다는 소식에 눈물 짓는 장애우의 모습은 오래도록 나의 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부모들은 몸이 불편한 자식보다 하루만이라도 더 살기를 원하는가 보다. 장애인의 반대말은 정상인이 아니다. 비장애인이다. 비장애인. 그들은 지극히 정상적이란 것이다. 

몸이 불편한 것 뿐 사념의 세계는 우주보다 넓고 깊은 그들을 요즘 만나지 않아 그런가 마음이 옹졸해져서 바늘틈 하나 들어갈 곳이 없다. 먼저 연락을 하는 그들에게 난 어떤 존재일까? 난 진정 그들을 나와 똑같이 생각했던 걸까? 지레짐작하여 배려한답시고 먼저 밀어낸 건 아니었는지 반성이 된다.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해 나가는 장향숙님의 발걸음이 가볍기를 희망해 본다. 비록 휠체어에 의지하는 삶일지라도 나와는 다르게 세상을 제대로 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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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다 히데오 지음, 임희선 옮김 / 북스토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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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girl)로 돌아가고 싶어서 읽느냐고? 아님 30대 초반 전업주부로서의 길도 허무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아 읽으냐고? 아마 둘 다 일거 같다. 젊음은 젊음 하나만으로도 빛이 나니까 좀 더 누려보지 못한 소녀시절을 아직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청바지에 면티 하나만 걸치고 나가도 그렇게 이뻐 보일수가 없고 노란고무줄 달랑 하나만 질끈 묶고 흰운동화를 신고 나가도 참 이쁘게 보인다. 어른들에게 "살아가는 동안 제일 이쁠 때가 언제냐?"고 물어보면 왜 눈부시게 아름다운 시절은 고등학생 시절이라고 이야기 하는지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제일 이쁜데 무슨말이야"라며 의아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알 것 같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풋풋한 시절이기에 가슴 시리도록 아름답다는 것을. 요즘 더 어리게 보이고 싶어 피부를 탱탱하게 만들려고 노력한다든지 아줌마이면서도 "아줌마"라고 불리면 왜 그렇게 발끈하게 되고 눈물이 나도록 서글픈지 이 책을 통해 기운을 좀 받아봐야겠다.   

어랏, 근데 이게 무슨 내용이야? 책을 들고 소녀적인 감상을 엿보아도 기죽지 말자고 다독이며 옹골찬 마음을 들이대고 읽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5명의 여성 아니 주변인들까지 하면 더 많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내 나이 또래의 여성들이다. 젊은 시절이 빨리 지나감을 한탄하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자기 목소리를 당당하게 내지르는 커리어우먼들의 이야기였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동지를 만난 느낌일까? 하지만 직장에서 당당히 자기 목소리를 내는 그네들을 보니 맘을 당차게 먹고 읽어도 부러워지고 내가 작아지는 느낌은 벗어 던져지지가 않는다. 

내가 남녀평등주의자는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회 통념적으로 여자에게 가해지는 질시와 억누름은 가슴 콩닥이게 신경질내며 읽게 된다. 직장 상사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주간지를 들여다보며 거들먹거리며 앉아 있는 '아마이'의 모습은 화가 나서 왜이러냐며 멱살잡이라도 하고 싶어진다. 이거 왜이러나 내가 독립투사도 아니고 진정하자. 아니 머리에 띠라도 두르고 나가 열렬히 "남녀는 평등하다"는 팜플렛이라도 뿌려야 하는거 아닐까? 나 같으면 아마 지레 의기가 꺽여 직장을 박차고 튀어나왔을지도 모르지만 당당하게 "여자가 없는 스모협회나 가라"고 소리치는 세이코의 모습에 나까지 뿌듯해지는건 왠말인가. 같은 성별을 가진 동질감? 어쩌면 내가 가질 수 없는 모습에 대리만족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머리뿔로 치 받는게 아닌 내 목소리를 내는것 조차 두려워 하는 나는 이래서 전업주부로서의 타고난 소질도 못내지만 내가 안주할 곳은 가정이라고 목소리를 조그맣게 내며 후퇴하는지도 모른다. 

아름답게 보이고 싶고 꾸미고 싶은 건 여자의 본능이려나 나는 이제 결혼해서 집에만 콕 박혀 편한 옷만 찾고 사랑하는 반쪽이 생겼다는 명분으로 꾸미고 있지 않으니 뭐 이제 어쩌겠냐 하는 심보도 있지만 '난 여자이기를 포기하고 사는 걸까?'하는 생각도 들고 내 자신이 참 초라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멋진 커리어우먼도 자신의 인생에 대해 불안해 하고 결혼하여 아이 둘 쯤 낳은 전업주부를 부러워 하는 것을 보면 조금은 기분이 업 되기도 하지만 왠지 인생이 밑지는 듯한 느낌은 버릴수가 없다. 생활에 대한 안정을 얻었다고 하지만 돈에 대한 강박증은 늘 가지고 사니 안정되었다고 말하지도 못하고 그저 감정적으로야 결혼을 했으니 인생의 한고비는 넘긴 거라는 생각은 하지만 뭐지? 이 황량한 느낌은? 손에 맛있는 것을 쥐고 있다 쏙~빠져나간 느낌이다. 

요즘 드라마중에서 "달자의 봄"을 즐겨본다. 유쾌하기도 하지만 30대에 들어선 여인의 적나라한 심리묘사가 공감이 가서 보게 되는 듯 하다. 직장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올랐지만 결혼이라는 결말을 잡기위해 이리저리 따져보고 재는 모습을 보면 아무래도 내가 우위의 위치에서 보게 되는가 보다. 물론 성공적인 직장생활에는 박수를 보낸다니까. 단지 그녀보다 아줌마가 일찍 되었다는 것에만 우위라는 말이다. 달자의 모습은 '요코'의 모습과 닮아있다. 신참으로 들어온 띠동갑의 연하남 '신타로'가 아마 장동건처럼 정신나가게 잘 생긴 사람으로 묘사되어 지지만 넋이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요코'를 보면 조금 추하다는 느낌도 가졌다. 하지만 감정조절을 잘해서 남자가 아닌 직장인으로 대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면 "연상연하의 로맨스"를 기대한 나에게 단편으로 끝나버리는 내용은 어딘가 바람이 푹~하고 빠지는 느낌이다.  

20대를 추억하며 그네들의 탱탱한 젊음을 부러워 하지만 켜켜히 쌓인 인생 노하우도 무시할 수 없는 법 지나간 젊음을 생각하기 보다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이 땅의 여성들에게 무한한 존경과 박수를 보내면서 멀지 않은 시일내에 나도 거기에 편승하길 기대한다면 그것이 욕심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겠지? 아직은 젊으니까 걸(girl)이 아니면 어떠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을. 내가 젊다고 생각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테니까 소녀가 아니라고 결코 우울해 하지는 않는다. 아직도 걸이 부러운가? 당신은 걸(girl)보다 아름답다 용기를 가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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