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눈의 야화
아사쿠라 다쿠야 지음, 최선임 옮김 / 지식여행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신비로움이 내 몸을 감싸고 끊임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 보노라면 하늘로 빨려올라가 버릴 것 같은 느낌. 어렸을때 부산에도 큰 눈이 왔던적이 있었다. 눈덩이를 굴리며 나보다 더 큰 눈사람을 만들며 즐거워 했던 기억이 있기에 요즘 같이 눈이 많이 내리지 않아도 눈 이야기가 반이상을 차지하는 "눈의 야화"속으로 성큼 들어설 수 있었다. 겨울이 없는 곳에 살았다면 시종일관 '눈이란 어떻게 생겼을까?'를 생각하느라 책 이야기에 집중할 수도 동화되지도 않고 끝까지 읽어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하얗게 내리는 눈을 상상할 수 있는 나는 분명 축복 받았음에 틀림없다.
차가운 느낌의 눈이 왜 이렇게 따스하게 느껴지는 걸까? 아마도 "유키코"라는 15살난 여자아이 때문인가 보다. 눈이 내리는 날 집 앞 공원의 유키코를 찾아가면 어김없이 "가즈키"의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그녀. 아주 오랫동안 15살로 머물러 있는 그녀이기에 '혹 귀신인가? 하지만 이렇게 이쁜데 귀신일까? 아님 유령?' 이런 생각들로 갑자기 등골이 서늘하고 으스스한 기분이 된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가끔 보이고 쑥 커버린 어른들에겐 보이지 않는 존재라 가즈키가 알아보는데 놀란건 그녀다. 죽음과 새로운 탄생의 중간에 머물러 있는 유키코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들은 왜이리 어렵기만 한지. 가즈키와 함께 듣노라면 시간가는 줄 모르겠지만 그녀가 말하는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아 있는 사실이라고 수긍하기 힘들다. 그래서 그녀가 내뱉는 한마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실이 아닌 건 아니다. 그럼 난 존재하지 않는거냐?" 라는 말에 대답할 말이 없어 입을 닫고 그저 바라만 보게 된다.
세상에 때가 많이 묻고 속물적인 나같은 사람은 볼 수도 없는 존재이기에 신비스러움을 느끼다가도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허상이나 환청이 되어 버린 그녀가 참 외롭고 슬퍼보인다. 어쩌면 그래서 가즈키의 닫혀 버린 마음을 열어주는 유일한 상대가 되지 않았을까. 회사를 나오며 마음의 문을 닫아버려 세상과 단절하고 벽을 쌓은 그에게 "왜 그러냐? 말을 해라 앞으로 어떻게 할꺼냐"하며 답답해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과는 다르게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함께 있기만을 바라는 유키코가 오로지 그의 마음을 열어주는 열쇠인 것 같다. 그녀 자신도 15살에 머물러있는 이 세계에 작별을 고할 이유를 찾아가는 만남이긴 하지만.
내리는 하얀 눈이 내는 빛으로 인해 세상은 더 밝게 보이나 보다. 빛이 있어야 세상을 보지만 눈으로 인해 다른 세계도 볼 수 있다니 유키코는 더이상 생경한 존재가 아니다. 하늘로 올라가 점이 되어 사라지는 그녀를 보면 오히려 마음이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15살이지만 태산도 품을 수 있는 맘자리 넉넉한 아이라서 그럴까? 어쩌면 내가 늙어 할머니가 되어도 그녀가 15살이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다행히 그녀의 결말은 아름답다. 끝이 아닌 또 다른 윤회의 세상이 있음을 알려주기에 세상이 그저 각박하고 피 튀기며 살아야할 전쟁터라는 느낌은 잠시 손에서 내려놓게 하는 마력을 지닌다. 가즈키를 통해 바라본 세상이지만 차가운 눈이 더이상 위험한 존재로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에는 눈이 내리면 미끄러운 노면으로 인해 사고가 끊이지 않아 사상자가 생겨나고 넘어져서 다치고 하지만 이 곳은 오로지 눈 내리는 소리만 "사각사각, 뽀드득, 뽀드득" 하고 들리는 듯 하다. 어릴적 감성을 잊고 살아온 세월이 느껴지는 하루였다. 나에게만 보이고 나의 말만 들어주는 소녀가 나에게도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세상을 내가 움직여 볼 수도 있다는 허황된 꿈도 꿀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나란 존재가 허상이 아닌데 그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루를 보내다 보면 세상에서 난 과연 인식되는 존재인지 유키코처럼 그저 보이지 않는 허상이 되어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드는 요즘이고 보면 남에게 말하지 않는 비밀을 가슴속 깊숙히 묻어놓은 그런 기분을 느끼게 될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세상에 떠들면 나보고 미쳤다고 손가락질을 할테니 내 가슴속에 묻어두는 편이 낫겠지. 오히려 그렇게 해야할 현실이 각박하게 느껴질 뿐이다. "눈의 야화"가 아름답다고 느껴질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