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다르게 보아온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 세상은 왠지 거꾸로 흘러가는 느낌이다. 아니 세상이 실제 거꾸로 흘러가고 있다. "세계는 하나다"라며 지구촌 가족이라고 침을 튀기며 이야기하고 대중매체를 통해 "이웃이 누군지도 모른다"며 너무 각박한 세상이라고 성토하지만 우리가 외면해 온 세계에 대해선 다들 어찌 하려는가. 내 가까이에 있는 누군가는 존재의 이유조차 모른채 살아가고 있는 것을. 진정 장애인들을 투명인간 취급을 한 채 병신, 바보, 구걸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하고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엎드린 채 세상을 바라본 사람 장향숙님을 통해 나는 세상의 구석, 사각지대의 현실을 오롯이 보게 되었다. 알고는 있으나 외면 해 온 세계다. 나 자신의 고통이 더 크다는 변명을 하면서 말이다.
요즘 자기계발서를 많이 읽게 된다. 내용 중 "긍정적인 삶"이란 말을 많이 보게 되지만 진정한 자기 긍정은 장?숙님을 통해서 보게 된 것 같다. 그녀의 깊은 사색을 따라가다 보면 장애인인 자신의 삶보다 거울속의 나를 보는 듯 똑같이 닮아있는 사람들을 통해 깊은 긍정을 이루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너는 이 책을 읽고 깊은 긍정을 이루었느냐?"고 질문하면 아니다. 삶의 끝을 보지 않아서인지 아직 내 손아귀에 쥐어진 것을 바라보기에 급급해서인지 내면을 바라보는 것이 참 힘들다. 세상을 올곧게 바라보는 것도 아니면서 내면도 힘들다니 세상의 질문들에 대답할 자격도 없어지는 듯 하다. 어떻게 하면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을까? 거꾸로 흘러가는 세상이니 거꾸로 보면 되는 것일까?
장향숙님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어김없이 종교, 정치에 맞닥드리게 된다. 꿈속의 계시를 통해 꿈에 보인 집을 찾아가니 200만원을 선뜻 내놓는다든지 솔직히 종교와 정치 이야기라면 고개부터 절재절래 흔드는지라 일단 거부감부터 들고 신의 계시를 통해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그녀를 보면 눈앞에 보이지 않는 허상을 통해 하는 일이라 인정하기 힘들다. 하지만 곳곳이 등장하는 신의 존재 어떻든 그녀를 일으키는 존재라면 그리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되는거 아닌가. 장애인이라는 것을 먼저 인정하고 타 장애인들을 위한 큰 뜻을 품고 힘들게 조금씩 나아가는 그녀를 보면 종교야 어떻든 그 신념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이제는 국회의원 장향숙. 22살에서야 세상의 빛을 향해 첫 발을 내디딘 그녀의 삶은 이제 다른이들을 위한 걸음을 내딛고 있다. 비록 첫 여정이 100미터도 나아가지 못한 길이었으나 이제는 그녀를 원하는 곳이면 세계 어디든 갈 수 있다. 노동의 현장에서 보고 겪게 되는 여성장애인들의 문제들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할 길을 알았고 집안에서조차 냉대받아 존재의 이유조차 사라진 사회에서 투명인간이었던 그들을 위해 전면에 나섰다. 맘이 차가워진 그들이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다고 따뜻한 곳이라고 알게 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몸은 불편하지만 영혼이 맑은 그들을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마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겠지. 1년간 찾아보지 않은 밀알선교원. 여긴 장애인들이 아니 요즘은 친구라는 개념으로 장애우라고 부른다. 장애우들이 예배를 보는 곳이다. 나를 반갑게 맞아준 그 곳 이곳에 가면 맘이 참 포근했었다. 비록 휴대폰에 찍어서 대화를 할 지라도 작은 소통에 기꺼워하며 짧은 대화나마 만족하며 손을 잡았던 나의 장애우 친구들 오히려 맘은 비장애인보다 순수하고 열정이 가득한데 단지 몸이 불편하여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이 왜그렇게 안타까운지. 유일하게 가족으로 대해준 엄마가 암으로 죽어간다는 소식에 눈물 짓는 장애우의 모습은 오래도록 나의 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부모들은 몸이 불편한 자식보다 하루만이라도 더 살기를 원하는가 보다. 장애인의 반대말은 정상인이 아니다. 비장애인이다. 비장애인. 그들은 지극히 정상적이란 것이다.
몸이 불편한 것 뿐 사념의 세계는 우주보다 넓고 깊은 그들을 요즘 만나지 않아 그런가 마음이 옹졸해져서 바늘틈 하나 들어갈 곳이 없다. 먼저 연락을 하는 그들에게 난 어떤 존재일까? 난 진정 그들을 나와 똑같이 생각했던 걸까? 지레짐작하여 배려한답시고 먼저 밀어낸 건 아니었는지 반성이 된다.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해 나가는 장향숙님의 발걸음이 가볍기를 희망해 본다. 비록 휠체어에 의지하는 삶일지라도 나와는 다르게 세상을 제대로 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