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코끼리
스에요시 아키코 지음, 양경미.이화순 옮김, 정효찬 그림 / 이가서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노란 아기 코끼리안에 있는 요군의 가족들을 표지에서 먼저 만나니 웃음이 풋~하고 터져나온다. 엄마의 눈밑에 왠 다크서클? 초보운전자의 전형적인, 아주 긴장한 모습을 하고 있기에 내가 처음 차를 운전했을때가 생각나서 잠깐 추억에 잠기게 된다. 아빠가 아닌 엄마가 운전하는 모습은 요군의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마냥 웃고 있을 수 없어 근엄한 표정을 짓고 책장을 넘긴다. "여자는 운전하면 안되나?" 그런말이 아니다. 아빠가 다른 여자가 생겨 집을 떠나고 요군과 나나, 그리고 엄마가 함께 지내는 좌충우돌 늘 사건이 끊이지 않는 생활을 보여주기에 이 표지만으로도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일이 있을땐 나나의 손을 맞잡고 깡충깡충 뛰고, 원고를 쓸때면 마귀할멈 같은 얼굴로 끙끙 신음소리를 내며 머리를 쥐어짜내는 엄마의 모습을 보니 가장으로서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한편으론 아이들처럼 순수한 모습을 가진 엄마가 조금, 아니 많이 덜렁거린다고 해도 요군은 엄마에게 너무 면박을 주는 것 같다. 물론 애정어린 쓴소리겠지만 아이 둘을 데리고 살아간다는 것은 남자뿐 아니라 여자에게도 힘든일이기에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해 요군이 엄마에게 듬직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버릇없다는 생각보다 어찌나 귀여운지, 막내 동생같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어진다. 아, 이렇게 하면 아마 구로사와 아저씨처럼 요군에게 만나기 싫은 사람으로 낙인찍히겠군.  


노란 아기 코끼리는 운전에 미숙한 엄마때문에 상처가 많이 난다. 아이들과 함께 '아라모도리데'에 가서 크게 사고가 나기도 하고 무엇이든 자신 없어 하던 엄마는 생채기 난 모습을 한 노란 아기 코끼리로 인해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고 어디론가 떠나볼까 하는 마음도 가지게 되어 노란 아기 코끼리와 함께 한 시간이 무척이나 행복하다. 아버지가 떠나고 조수석이 자신의 자리라 생각하는 요군, 좀 더 자라 소녀티가 나는 나나, 엄마는 노란 아기 코끼리를 타며 참 기분이 좋았다. 앞으로도 덜렁대며 실수를 많이 하게 되겠지만 이제는 당당한 모습으로 세상 앞에 설 수 있을 것 같다.  


노란 아기 코끼리와 함께 했던 많은 시간들, 차 열쇠를 두고 차문을 잠궈 버려 순찰자 3대가 달려오는 해프닝, 순찰차를 세웠다며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요군, 오줌을 옷에 싸 버린 여동생 나나에게 어른스럽게 "아버지가 없는 아이는 오줌 좀 싼 걸 가지고 울면 안돼. 강하고 씩씩하게 살아야 한단 말이야." 말해주는 요군, 아버지가 집을 떠나고 많이 어른스러워진 요군을 보는 건 가슴이 아프지만 앞으로 세 식구는 거친 세상을 정말 잘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두렵기도 하고 앞으로 힘든 일이 많이 생기겠지만 말이다. 열한 번째 생일을 맞은 요군이 엄마와 함께 지내면서 얼마나 더 많은 사건을 겪게 될까. 늘 낙천적으로 생각하는 엄마와 함께 큰 상처 받지 않고 이 세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티 이야기 카르페디엠 9
벤 마이켈슨 지음, 홍한별 옮김 / 양철북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아여, 아여!"

피티 할아버지가 인사를 한다. 책을 읽은 나야 만나면 "안녕"이라는 말인줄 알고 반듯하게 "안녕하세요"라고 대답해 줄 수 있겠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 할 것이다. 솔직히 나도 뒤틀려진 몸을 가진 피티 할아버지를 보게 되면 내 눈속에서 '혐오감'을 벗어 던질 수 있을지 장담할 순 없다. 이 책은 피티가 뇌성마비로 태어나 트레버에게 할아버지라고 불리울 일흔이 넘은 나이까지의 일생을 보여주기에 숙연해지기도 하고 그의 이야기에 눈물이 나 눈앞이 부옇게 흐려져 글을 읽는것조차 힘이 들고 가슴벅차는 감동을 느꼈다.

 

피티는 태어나서 뇌성마비 진단을 받고 부모님의 품에 있다가 윔스프링스 정신병원으로 가게 된다. 부모들이 피티의 양육을 포기하여 시설에 맡기는 것인데 하필 정신병원이라니, 사람들은 피티가 '백치' 상태라고 생각하지만 피티는 사람들과 대화도 하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기에 좋은 시설에서 제대로 된 간호를 받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래도 여기 있는 동안 생쥐 '에스테반'을 가족과 같이 생각하게 되고 평생의 친구인 '캘빈'을 만나게 되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보호원들과 깊이 있는 감정을 교류하며 사람들이 떠나갈때마다 가슴이 아픈 피티에게 어느 날 캘빈마저 다른 곳으로 가게 되어 두렵기만 하다. 자신도 '보즈먼 요양소'로 떠나게 되어 전혀 새로운 장소로 가야한다는 두려움에 더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겠다" 결심하는 피티. 윔스프링스에서 자신들을 동물에 비유한 나쁜 보호원도 있었지만 가족같이 대해준 사람들이 있었으니, 피티가 사랑한 '캐시', 크리스마스의 기쁨을 알게 해준 '조', 조 덕분에 "키,키,키", "크크크크"하며 장난감 권총으로 총싸움 놀이도 하고 그 시절 정말 행복한 추억이 많았는데 모두들 왜 그렇게 떠나기만 하는지, 잠깐 머물다 떠나는 사람들에게 피티와 캘빈이 느꼈을 상실감이 떠올라 마음이 아파온다. 

 

피티는 세월이 흘러 계속 나이를 먹는다. 20대, 30대. 어느 새 칠십이 넘어버렸다. 보즈먼 요양소에서의 삶은 매일 똑같은 반복적인 삶이었으니 그의 삶이 얼마나 단조로웠을지 짐작이 가리라. 그래도 언제나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웃음을 잃지 않는 피티로 인해 사람들이 행복감을 느끼고 그의 곁엔 시시와 트레버, 쇼나가 있어 닫았던 마음을 열어 사람들속에서 함께 하는 피티의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자신이 가진 것 외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 피티, 단지 평생의 친구인 캘빈을 보고 싶은 그를 위해 트레버는 캘빈을 찾고 결국 만날 수 있게 도와주게 된다. 잠깐이었지만 이 둘의 만남은 나의 가슴을 울렸다.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타인에 의해 갈라져 볼 수 없게 되었을때 얼마나 힘들고 가슴 아팠을까 그 마음이 짐작되기에 이 둘의 만남에 마음까지 숙연해지는 것이다. 거기다 자신들을 잘 대해준 보호원이었던 '이언'까지 만나게 되니 피티에겐 트레버와의 만남이 인생에 있어서 크나큰 선물이 아니었을까.  

 

트레버는 잦은 이사로 친구가 없어 외롭게 지내던 아이었다. 그러나 이젠 피티 할아버지를 만나 성격도 밝아지고 소소한 기쁨을 알아간다. 피티 할아버지에게 자신의 할아버지가 되어 달라 말하는 트레버, 피티에게도 이젠 가족이 생겼다. 피티의 가족이라 자청하는 이들이 많은 것을 보니 피티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육체에 갇혀 자유롭게 지내지 못한 피티에게 이런 말을 하면 뭐라고 할지 모르지만 트레버의 말대로 다음 생에서는 정말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많은 것을 가져도 행복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요즘 세상이고 보면 피티이야기를 읽으며 작은 것을 통해 얻는 기쁨이 무엇인지, 그리고 행복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피티의 부모들은 왜 한번도 피티를 보러 오지 않았을까. 보러 가진 않아도 자식을 버렸다는 죄책감에 그리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을텐데, 피티를 한번만 만나보았다면 그 인생이 풍요로웠을 것인데, 참 안타깝다. 피티는 살아있는 동안 가족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단지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기쁨, 바람, 꽃향기 등 밖에 나가서 접할 수 있는 것들을 동경하며 살았다. "아이, 고아(아이좋아)"라고 외치며 다른 세상의 모습에 들떠있는 피티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하지만 그도 마음속으로는 가족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얼마나 간절히 원했을 것인가. 캘빈, 조, 이언, 트레버 등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으리라. 이젠 피티가 없어도 재밌게 잘 지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 것, 사는 동안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니 주어진 인생에 만족하며 기쁨과 행복을 찾으려 노력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방각본 살인 사건 - 상 - 개정판 백탑파 시리즈 1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열하광인"을 먼저 읽고 이 책을 읽으니 시간이 거꾸로 흘러가는 것 같다. 죽었던 사람들이 멀쩡하게 살아있는 모습을 보니 반갑기도 하지만 추억속에 잠긴 듯 아련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어쨌든 "방각본 살인사건"을 먼저 읽지 않은 후회는 사라지지 않으니 그저 나의 게으름만 탓할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목이 졸린채 죽고 그 방에 어김없이 놓여 있는 청운몽의 서책, 이것으로 의금부 도사 이명방은 청운몽을 잡아 들였겠지만 끝끝내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고 말하던 청운몽이 모든 죄를 자백하고 죽으면서 이 책은 시작되고 있다. 먼저 범인을 잡고 그 사유를 적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극구 자신이 하지 않았다 이야기 하던 그가 돌연 왜 모든 죄를 자백했을까. 나는 여기에서 그가 진범이 아님을 알아보았다. 그럼 죄인을 잡아들인 이명방이 진범을 잡는다 해도 죄를 면하기는 어렵게 되었으니 앞으로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가 될지 궁금해진다.

 

청운몽이 죽었음에도 장안에는 여전히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청운몽이 범인이 아님을 밝힘과 동시에 진범을 잡기 위해 이명방이 다시 나서게 된다. 이 일로 화광 김진을 만나게 되니 이것으로 "백탑파 시리즈"가 세상에 빛을 보는 그 서막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매설가 청운몽을 그리워하는 백탑파 사람들과 함께 이 일을 파헤치는 이명방, 과연 진범을 잡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세상을 앞서 보는 김진이 있어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단지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고 일의 전황이 모두 명확해진 다음에야 말해주는 김진이 야속하고 그저 답답한 내 가슴만 칠 뿐이다.

 

나는 정치에 대해선 모른다. 지금이나 아주 아주 옛날이나 정치가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급급하긴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화근이 될 싹들을 미리 자르고 임금이라도 죽일 마음을 먹었던 사람들 "더럽고 치졸하다"며 이명방이나 김진처럼 손가락질 하고 싶다. 어느 새 이렇게 정조와 홍국영이 가깝게 느껴졌던가. 드라마 '이산'에서 자주 보아 가깝게 느껴지니 '방각본 살인사건'의 시대가 전혀 낯설게 다가오지 않아 다행스럽다. 연쇄살인의 배후에는 조정의 신료 다섯 명이 관련 되어 있다. 그러나 더 이상 파헤치지 않고 묻어 두는 정조와 홍국영, 자신들이 치고 받고 하는 사이에 다른 이가 얻을 이득을 생각했겠지만 머리터지는 싸움을 하는 이들을 보고 있으려니 억울하게 죽은 청운몽만 불쌍하게 되었다. 민심에 빠르게 침투하는 방각본들을 불에 태우라 명하는 정조의 어심을 따라가다 보니 이 모든 원흉을 매설가에게 뒤집을 씌우는 듯 하여 내 심기마저 편하지가 않다.

 

추리소설을 읽을때면 끝까지 범인을 찾아내지 못하는 내가 이 책에서는 왠일인지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고야 말았다. 누구든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진범을 찾는 것이 '방각본 살인사건'의 끝이 아니다. 그 배후를 밝히고 왜 그가 살인자가 되었는지 그 속내도 밝혀내야 한다. 찾아내는 사람들마다 자객들에게 목숨이 끊어지니 사건의 전모를 알아낼 수 있는 길은 그저 김진의 이야기를 통해 듣는 수 밖에 없다. 나는 솔직히 연쇄살인범의 살해 동기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살인범의 배후들이 겨눈 칼 끝이 백탑파 사람들이라 그와 친분이 있는 청운몽을 엮어 모두들 파멸시키려 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조정대신들과 손을 잡은 범인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그가 얻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자멸뿐이었다. 그런데 뭘 믿고 죽어가는 순간까지 죽지 않게 될 것이라 당당했던 것일까. 얻는 것이 없었던 살인범의 살해 동기, 이것의 미흡함으로 김진의 자세한 설명을 들으면서도 나는 이 책에 완전히 몰입할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억지로 꿰어 맞춘듯 했으니까. 이 소설에서 잃은 것이 있는 사람은 이명방이 청운몽의 여동생 청미령을 사랑한 마음일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자신의 이익을 챙겼으므로 잃은 것이 없었으니까. 청미령만이 오빠 청운몽의 죽음을 애틋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일뿐이었다. 정치란, 이렇듯 알면서도 서로 속고 속이며 이익을 취하는 관계인가 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민 -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지독한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온화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전쟁영웅 '호프밀러'는 타인의 주목을 받는 사실에 분노를 느끼고 사람들의 시선을 거북해한다. 이 훈장은 전쟁속으로 도망친 '도주병'으로 얻은 결과라고 이야기 하는 호프밀러, 사람들의 존경어린 시선에 화가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왜 전쟁속으로 도주해야만 했었는지를.......

 

사랑에는 여러 빛깔과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 첫눈에 반한 사랑, 슬픔에 젖어 있는 눈길을 바라보다 사랑을 느끼거나, 밝고 유쾌한 모습에 반하거나, 지극정성에 감복하여 마음이 열리거나, 그 사연을 들어보면 핑크빛이기도 하고 어두운 색깔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어떤 색깔을 가지고 있건 이것은 '사랑'의 여러 모습들이기에 모두 '사랑'이라고 이름 붙여주고 싶다.

 

어느 날 케케스팔바의 저택에 초대 받은 호프밀러는 케케스팔바의 딸, 에디트에게 춤을 신청한다. 손님된 입장에서 지극히 예의를 차린 것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케케스팔바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어떤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춤 신청을 받은 에디트는 경련을 일으킬 듯이 몸을 떨고 울게 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는 중추신경계의 마비로 걸을 수 없는 장애자였던 것이다.  

 

그녀에게 사과하려고 꽃을 보내고 이후 계속 이 저택을 방문하면서 자신안에 싹튼 '연민'의 감정으로 에디트를 대한 호프밀러. 하지만 에디트는 갇혀 있는 생활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곁에 다가온 호프밀러에게 사랑을 느낀다. 어린아이라고, 장애자라 그저 도와줘야 하는 존재로 인식했던 에디트가 자신을 사랑할 줄이야. 그때 분명한 거절을 했어야 하나 가족들은 걷지 못하고 폐쇄적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에디트를 동정하여 그녀의 사랑에 긍정적으로 동조를 하고 있어 호프밀러가 사실을 말하길 원치 않는다. 나는 호프밀러가 '연민'이라고 애써 부정했던 감정이 '사랑'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단순한 연민때문이었다면 그렇게 매일 방문할 수 있었을까. 물론 일로나에게 첫눈에 반해 이 저택을 계속 방문했다고 해도 일로나에게 약혼자가 있음을 알았으니 한때의 마음을 접었을 것이다.

 

착하고 여린 성격을 가진 호프밀러에겐 에디트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환하게 웃는 에디트의 얼굴을 바라보는 호프밀러의 모습은 분명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몇 번이나 그녀의 곁에서 도망가 버리더니 결국 전쟁속으로 도피하다니, 이런 상황이었으니 그가 얻은 훈장이 어디 자랑스러웠겠는가. 다쳐도, 죽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에 내달렸던 결과로 얻은 것이 훈장이었으니 부끄러웠을 것이다. 호프밀러는 에디트가 선택한 삶에 분명 책임이 있다. 의사 콘도르처럼 고쳐주지 못한 환자를 위해 책임감으로 결혼을 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건 두 사람에게 모두 불행만 가져다 줄 뿐이니까. 적어도 솔직했어야 하지 않을까. 비겁하게 도망쳤으니 평생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게 옳을 것이다.

 

에디트의 사랑에 가슴이 아프다. 그녀의 마을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는 언제나 호프밀러가 있었으니까. 동정심이나 연민이 아닌 순수한 마음으로 호프밀러가 다가왔기를 바라는 에디트, 감히 그녀의 사랑에 돌을 던질수가 없다. 장애자라고 사랑을 하지 말아야 하는것은 아니니까. 자신의 몸이 그러니 건강한 사람에게 짐이 되면 안된다고 말하는 것은 그녀를 두 번 죽이는 것이다. 한번은 자신이 걷지 못하게 될 때 삶을 버렸다. 호프밀러와 에디트가 잘 되었으면 좋겠고 행복했으면 하는 바램은 너무 이기적인 것일까. 

 

오로지 에디트를 중심으로 호프밀러, 일로나, 의사 콘도르, 애디트의 아버지 케케스팔바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연민'은 그래서인지 전개가 아주 느리다. 이렇다 할 큰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랑이야기이긴 하지만 애틋한 마음을 들게 하는 것도 아니다. 호프밀러와 에디트의 밀고 당기는 심리전, 에디트의 상황에 초점이 맞춰진 내용들로 한장 한장 넘기기가 힘들었다. '연민'이라는 이 단어하나로 두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답답하기도 했다. 아마도 무엇이든 "빠르게, 빠르게"를 외쳐대는 세상속에서 이렇듯 잔잔하게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이야기들이 낯설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케케스팔바가 이 저택을 얻기 위해, 그리고 에디트의 엄마와 어떻게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 콘도르가 해 주는 이야기는 흥미가 있었다. 그의 절절한 사랑으로 태어난 에디트가 걷지 못하게 된 불행한 상황이 부각되어 그녀가 왜 행복해져야 하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난설헌, 나는 시인이다
윤지강 지음 / 예담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소녀들은 언젠가 여인이 되고 아버지가 짝 지어준 사람에게 시집을 가야 한다. 이처럼 삶의 뿌리가 송두리째 옮겨지는 것을 경험해야 했던 여인들의 마음속은 아마 시커멓게 타 버려 재도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초희는 새가 되어 자유로운 세계로 날아가고 싶어했다. 요즘 시대에 태어났어도 이름을 알리고 유명해졌을 초희, 허난설헌은 조선시대, 여인의 재주를 억압하고 그저 조상을 모시고 아이를 낳아 가문을 대를 잇는 존재로밖에 인식되지 않았던 그 시대를 오롯이 견뎌냈다. 아니, 그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와 '시'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가문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려 애썼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황연과 맺어지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간 것이 그녀의 불행의 시작이었을까. 아님 시대를 잘못 태어난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을까. 너무나 뛰어난 재주로 인해 자신의 능력을 다 펼쳐보이지도 못하고 살아갔을 그녀의 삶에 가슴이 쓸쓸해져온다. 초희가 살던 곳에서 뛰쳐 나와 이혼을 당했을 때 나는 그녀가 황연과 다시 맺어지기를 얼마나 바랬던가. 오로지 초희가 여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하기만을 바라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무지한 짓이었는지. 가슴속에 꺼지지 않는 불꽃을 안고 사는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인 황연을 따라가지 않고 자신 안에 있는 그 사랑을 지워야 했을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마음을 표현한 '시'를 짓는 것이었다. 아마 '시'가 없었다면 그녀의 삶은 황폐해졌을 터이고 더이상 살아갈 의미조차 없었을 것이다. 희윤이가 죽었을 때 이미 그녀는 죽었으므로.

 

비루한 양반들을 호통치고 그 앞에 앉아 '시'를 지어 따끔한 충고를 하는 그녀의 모습은 기생 "황진이"의 모습과 닮아있다. 대장부 보다 더 호기롭게 소리치는 모습이 이름 높은 사람들과 어깨를 견주어 대등하게 학문을 논하던 황진이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일까 초희가 기생이 되고 싶어하던 어린시절이 떠오른다. 어디든 발길 닿는대로 갈 수 있는 기생을 부러워 했었다. 남편이 닭이면 닭을 따르고 남편이 개면 개를 따라야했던 그 시대에서 여인네의 삶이란 붙박혀 어디로든 갈 수 없는 자유롭지 못한 인생이었으니 왜 기생이 부럽지 않았겠는가. 고단하게 살았을 그녀의 삶에 가슴이 아려올 뿐이다.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 죽고나서야 훨훨 날아가는 새가 되었을까. 자유를 꿈꾼 그녀는 죽어서야 그 삶에서 놓여날 수 있었으니 이 시대까지 그녀의 이름을 들을 수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기엔 재주 많은 그녀의 삶이 슬프다. 물론 죽어서도 김씨 문중에 뼈를 묻었으니 떠나는 발길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놓여날 수 없었던 그녀의 삶은, 죽어서도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 글이 어디까지 진실을 전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자유롭게 날고 싶었던 그녀의 삶을 잘 표현해 놓은 것 같아 나의 곁에서 그녀의 숨소리를 듣는 것처럼 가까이에서 그녀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여자이기에 그녀의 입장을 옹호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꽃 피우지 못하고 쓰러져간 그녀의 삶이 너무 안쓰럽지 않은가. 꽃들이 활짝 피어나는 이 봄날, 나는 허난설헌 그녀가 그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