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를 기르다..

제비를 기르다
윤대녕 지음 / 창비 / 2007년 1월

 
내가 우리 문학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제비를 기르다'의 책으로 윤대녕님을 처음 만났다. 단편소설보다는 장편소설을 선호하는 편이라 이 책의 서평을 어떻게 써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는데 가장 많이 한 생각은 비슷비슷한 우리네 삶을 이야기하면서 저자는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었는가, 였다. 옛기억? 추억?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보내지 않은 시간들이지만 과거의 그 시절을 그리워하게 만들고 있으니 '제비'에 대한 추억이 없는것만으로도 나의 기분은 우울해진다.

 

얼핏 기억을 떠올려보니 제비를 본적이 언제였던가 싶다. 강남 갔던 제비 어쩌고 했던 말들은 벌써 옛말이 되어 버렸는지 기억속에서 가물거린다. 믿을만한 통신에 의하면 강남이 태국 어디쪽이라고 하는데 언제 한번 발걸음 할 기회가 생길런지 우리나라로 돌아올 제비들을 기다리며 목이나 빠지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단편 '제비를 기르다'를 읽은 후로는 자신이 보살펴준 제비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한 여인의 뒷모습이 눈 앞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다음해 자신의 품으로 돌아온 제비가 작년에 떠난 제비가 아니어도 제비가 날아들면 그동안의 그리움은 기쁨이 되어 버리고 떼지어 날아드는 제비를 바라보며 가슴이 뚫리는 시원함마저 느끼게 된다.  

 

언제쯤을 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봄이라고 느끼기도 전에 어느새 봄은 내 곁에 다가와 있고 꽃들은 피어나고 있었다. 누가 지금부터가 봄이라고 딱 그어서 알려주지도 않는데 자연은 그렇게 제 할일을 다하고 사람들의 곁으로 다가온다. 실체가 없는 그리움을 나의 마음속에 심어준 '제비를 기르다'. 어쩜 이렇게 글을 맛깔스럽게 쓰는지, 요모조모 인생을 버무려 놓은 저자의 글을 읽고 있으려니 마음속에 그리움만 쌓여간다. 어느새 책과 한몸이 되어 동화되어 버린다. 하지만 중반이후부터는 몰입이 잘 되지 않는데, 앞서 살아간 사람들의 노곤한 삶에 대한 이야기와 작은 물건 하나에도 그리움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통속적인 남녀의 이야기라 역시 감정이 머물지 않는가 보다.

 

"탱자", "고래등", "낙타 주머니"등 저자의 여덟편의 단편들을 통해 삶과 인생을 들여다 보게 되는데 그 깊이를 헤아려 보기도 전에 시간은 흘러 흘러 나의 손아귀를 벗어나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그저 남은 것이라고는 기억속에서 이제는 희미해지는 추억 뿐, 힘들고 가슴 아팠던 기억들도 훗날 돌이켜 보며 헛웃음을 날리는 여유가 생기건만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동안 왜그리 모질게 살아내야만 했는지, 그러나 그네들의 인생을 통해 나의 삶이 평온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이것도 아이러니한 일이다. 

 

빡빡한 인생의 노곤함에서 '이것도 인생이다'라고 깨닫게 되는 것을 보면 책을 읽는 동안 일평생을 산듯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동화되어 읽었나 보다. 나의 인생도 이렇게 그리움이 묻어나게 맛깔스럽게 쓸 수 있다면 좋을텐데, 나의 글재주 없음이 참 슬프다.

1896년 뉴욕에서 벌어지는 일들.

이스트 사이드의 남자 1 ㅣ 뫼비우스 서재
칼렙 카 지음, 이은정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11월

 
1896년 뉴욕에서 끔찍한 연쇄살인이 벌어진다. 누구의 삶이든 의미없는 인생이 있을까만은 어린 소년들이 희생양이 되는 것을 보며, 책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아무리 최면을 걸어도 책장을 넘기는게 쉽지 않았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앤서니 콤스톡, 폴 켈리 등 1896년 실존했던 유명 인사들을 등장시켜 현실감이 더해진 이유도 있겠지만 빈민층으로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삶이, 자신의 생명이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 모습에 가슴이 아파온다.  

 

이민자들을 잘 통제하기 위해 살인사건이 벌어져도 내버려두려는 권력자들과 그들과 맞서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지휘 아래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모인 크라이즐러, 존, 새러, 마커스와 루시어스 경사 그리고 빈민가의 소년들을 성적인 노리개로 공급하는 업소, 이렇게 세 세력의 다툼에 희생양이 되는 소년들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고 모든 이들의 관심은 연쇄살인범에 몰려 있다. 지금은 널리 쓰이고 있는 지문채취와 크라이즐러에 의해 그 시대에선 혁신적이었던 프로파일링 기법을 이 사건에 적용시켜 점점 뚜렷하게 실체화 되어가는 연쇄살인범에게 존 처럼 나 또한 동정심을 가지게 되었다.

 

범죄의 심리를 연구하는 정신과 의사 크라이즐러는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확립하기 위해 연쇄살인범을 쫓는다. 진정으로 소년들이 죽지 않기를 바라는 '존'과는 대조적인 인물로, 사건을 파헤치는 중 그에게 닥친 불운한 사건에도 동정심을 느낄 수 없었다. 연쇄살인범을 잡고 난 뒤에 그가 한 행동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죽은 소년에 대한 감정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이론이 정립되면 뒤에 벌어질 사건들을 쉽게 해결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때문에 가까운 사람에게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된 후에도 끝까지 자신의 연구에만 몰두한다. 크라이즐러의 손에서 첫 사건이 벌어지고 연쇄살인범이 잡히기까지의 모든 퍼즐이 맞춰진다.

 

경찰들이 발로 뛰며 범인을 잡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자료로 사건을 파헤치는지라 속도감이 떨어져 조금 지루하지만 범인의 윤곽이 그려지면서 점점 범인에게 가까이 다가가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언제, 어떤 곳에서 살인이 벌어지게 될지 예측하고도 계속 벌어지는 살인을 막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싸우며 범인이 살고 있는 곳을 찾아내는 존과 새러, 마커스와 루시어스. 하지만 오히려 이들을 감시하고 있었던 살인범에 의해 또 다른 살인이 일어나게 된다. 과연 이들은 살인범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 1896년 뉴욕 맨해튼에서 벌어진 이 사건이 그 시대를 암울하게 만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로 인해 희망을 느낀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도 뉴욕 밤거리를 누비는 어린 소년들의 모습이 눈앞에서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아 힘들었지만 완벽하게 재현한 1896년 뉴욕을 알 수 있어 의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일들.

악의 수도원 - 오드 토머스 세 번째 이야기 ㅣ 오드 토머스 시리즈
딘 R. 쿤츠 지음, 조영학 옮김 / 다산책방 / 2008년 11월

 
이런, 당하고야 말았다. 오드 토머스는 죽음을 볼 수 있기에 그의 주변에 나타나는 사람들이 살아있는 자인지, 죽은 자들인지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데 '죽음의 여신'에서는 속지 않았는데(내심 나 자신이 뿌듯하기도 했다.) '악의 수도원'에서는 오드 토머스의 설명이 있고서야 알아차렸으니 그때서야 "아, 당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친다. 오드 토머스의 이야기들은 그가 화자가 되어 직접 글을 쓰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독자들을 배려하여 똑같은 내용이 반복적으로 나오는 곳들이 많다. 이를테면 앞서 일어난 사건이나 사랑하는 사람 스토미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신변에 대한 이야기들 말이다. 처음부터 읽은 사람들에게는 지루할수도 있지만 독립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어 어떤 책을 읽어도 독자들이 알 수 있도록 친절하게 설명한다는 점에서는 꼭 첫 번째 이야기부터 읽지 않아도 되니 괜찮은 것 같다.

 

마음의 안정을 얻고 편안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찾아온 세인트 바르톨로뮤 수도원, 이곳에도 삶과 죽음은 공존한다. 일반 사람들보다 오드의 능력을 이해하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지만 폐쇄적인 환경이 주는 공간적인 제약이 개방된 사회보다 더 음침하고 음울한 느낌을 준다. 오드 토머스의 첫 번째 이야기부터 읽으면서 깨닫게 된 것은 죽은 자들이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것보다 살아있는 자들이 저지른 사건들때문에 많은 이들이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곳 세인트 바르톨로뮤 수도원에서도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잠재되어 있던 어린시절의 고통이 잘못된 방향으로 발산되어 사건이 벌어지는데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보는 듯 두 개의 자아를 가진 그를 상대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물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살인예언자'에서 오드의 곁은 떠난 스토미가 죽은 자들이 있는 곳과 우리가 사는 이 곳의 가교 역할을 하며 오드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정보원까지 수도원에 침투하여 사건을 풀어가는 것을 보면서 오드 토머스의 시리즈 중 제일 잘 짜여진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드의 글 솜씨가 나아진 것일까? 수도원에서 벌어진 사건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안되지만 글을 씀으로써 자신의 어깨 위를 내리 누르는 무거운 짐들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기에 사건에 대해 글을 남기는 오드를 보며 이렇게 내가 그의 세 번째 이야기 '악의 수도원'을 읽을 수 있도록 용기를 내준 그에게 감사한다. 감옥에 가게 된다는 협박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수도원에 출몰하는 뼈다귀 괴물의 정체는 가까운 미래에서나 볼 수 있는 존재처럼 보이는데(솔직히 미래에서도 만나고 싶지 않은 존재다.) 오드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눈을 통해서도 볼 수 있어 이 녀석들은 실체를 가지고 있다. 눈이 많이 내려 시야가 막힌 상황에서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이 괴물과 마주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드가 늘 실체가 있는 존재와 싸워왔지만 이번에 나타난 녀석들은 나조차도 간담이 서늘할 정도였는데 이 또한 인간의 욕심이 빚어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존재는 '사람'이라는 것에 동조하게 된다. 사건이 모두 해결되고 오드가 '심령자석'의 이끌림에 의해 또 다른 사건에 뛰어들게 되는데 이는 조금 억지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것이 네 번째 이야기의 서막을 알린다. 벌써부터 오드 토머스의 유머가 그리워지는 것을 보니 내가 그를 많이 좋아하는 모양이다. 빨리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위험에 빠진 대니를 구해야 하는 오드 토머스.

죽음의 여신 - 오드 토머스 두 번째 이야기 ㅣ 오드 토머스 시리즈
딘 R. 쿤츠 지음, 조영학 옮김 / 다산책방 / 2008년 11월

왜 이 책의 제목을 '죽음의 여신'이라고 지었는지 모르겠다. 책속에 등장하는 밀교에 빠진 다투라의 이미지와 맞지도 않고, 그녀가 '죽음의 여신'이라 불리울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근간에 오드 토머스 네 번째 이야기까지 출간이 되는 모양인데 "살인예언자" 이후 오드 토머스가 겪게 되는 사건들이 이어지는지라 책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비슷하게 다가온다. 다투라에게서 친구 대니를 구해내야 하는 긴장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도 오드 토머스는 그 특유의 유머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지만 일일이 모든 생각을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그의 독백을 보고 있으면 지루하고 답답해진다. 죽음을 보는 오드 토머스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있어 긴장감을 높여야 할 때는 사건을 빠르게 전개시켜 독자들이 오롯이 몰입할 수 있게 해 줘야하는데, 늘어지는 느낌때문에 책장을 넘기는게 쉽지 않았다.

 

"살인예언자"에서 오드 토머스가 영웅으로 그려졌다면 "죽음의 여신"에서는 친구 대니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조금은 평범한 오드의 활약을 볼 수 있다. 사건의 시작은 대니가 죽은 사람을 본다는 오드의 이야기를 다투라에게 함으로써 벌어진 일이지만 대니를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 놓는 오드의 모습은 독자들에게 감동을 안겨 준다. 유령을 보고 싶다며 소환해달라 요구하는 다투라의 모습은 너무 억지스럽고 이해가 가지 않는데, 다투라에게서 어떻게 대니를 구해낼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함께 탈출하게 되는지, 그 결말을 보기 위해선 그녀의 철없는 행동을 지켜볼 수 밖에 없다.

 

이번에도 경찰의 도움없이 홀로 다투라에게 맞서는 오드, 그가 사는 곳에서는 대체 경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하다. 서장은 오드를 내세워 범인을 쫓고 모든 사건이 끝난 다음에야 수습을 하니 늘 위험에 노출되어 생명의 위협까지 받는 건 오드 뿐이다. '죽음의 여신'은 개인적인 일이 연결 되었다는 점에서 "살인예언자" 보다는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죽은 사람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하는 오드를 그려낸 저자의 생각은 이해가 안되기도 하는데 다른 책과 영화에서처럼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이야기하는 유령들을 등장시키지 않은 점은, 오드가 홀로 모든 것들을 알아내어 범인들과 맞서는 이유가 되어 주기도 한다.

 

오드의 주변에는 늘 죽은 사람들이 있어 이번에는 대니의 아버지 제섭 박사의 등장에 놀라진 않았다. 수도원으로 떠나는 오드, 그가 '악의 수도원'에서 겪게 되는 세 번째 이야기가 탄생하게 되는가 본데,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 수도원으로 떠난 오드의 일상에 또 어떤 큰 사건이 벌어지는지 궁금해진다.

피에 물든 미국 서부 국경지대.

핏빛 자오선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1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책으로 코맥 매카시를 처음 만났다. 몇 권의 책을 읽지 않았지만 저자는 평범한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재로 다루지 않고 인간 본성과 욕망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독자들을 사건과 전혀 무관하지 않은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이 책 '핏빛 자오선'에서도 전직 신부 토빈, 토드빈, 판사 홀든, 글랜턴 등 이름있는 이들을 화자로 내세우지 않고 그저 이름 없는 한 어린 소년을 등장시켜 독자의 시선과 맞추어 피에 물든 미국 서부 국경지대에 함께 있는 듯한 느낌에 나의 몸까지도 전율하게 된다.

 

저자는 처음부터 친절하게 이 사람은 이렇게 만나 이렇게 인연을 맺게 되고, 이 사건은 이렇게 벌어진 것이다, 라고 설명해주지 않는다. 행간의 뜻을 파악하는 것은 오로지 독자들의 몫이다. 뜬금없이 길을 가다 소년이 만나게 되는 토드빈과 홀든 판사를 보며 갑자기 전개되는 이야기에 어리둥절 하게 된다. 나중에야 소년이 감옥에서 다시 만난 토드빈과 함께 글랜턴과 홀든 판사가 있는 무리에 합류하여 인디언들을 학살하고 머리 가죽을 벗겨 주 정부로부터 돈을 받는 사냥꾼이 되면서 그들과의 연결고리가 이어지지만 첫 만남에서는 도저히 예측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사건들이 탁탁 끊어지는 느낌에 답답해지기도 한다.

 

소년은 화자일뿐 주인공은 아니다. 여러 사람들을 곳곳에 등장시켜 그들을 지켜보게 되지만 인디언의 습격을 받거나 위험에 처할 때 나는 소년에 대해서는 그 존재조차 잊고 있었다. 비정규군의 부대에 들어갔을 때 코만치들의 습격에서 유일하게 살아남거나 글랜턴 무리들이 유마 인디언의 습격에 대부분이 학살당했을 때 다리에 화살을 맞고도 이 곳을 빠져 나오는 소년을 보며 "이 아이가 아직 살아있구나'라는 생각에 깜짝 놀라게 된다. "아아, 나의 무심함이여". 살아있는 사람의 머리 가죽이 벗겨지는 것을 보며 내가 고통을 당하는 듯 끔찍함에 몸을 떨게 되어 이 작은 소년에게 계속 관심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을까. 욕망의 경계선은 어디까지인가. 그 경계선이 있기는 한 것일까. 타인의 생명도 아무렇지 않게 빼앗는 것을 보며 과연 그들이 옳은 것인지, 옳지 않은 것인지 선과 악을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인디언뿐만 아니라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누구라도 죽여서 머리 가죽을 벗기는 글랜턴 무리들을 보며 인간다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인류까지 생각하는 거창한 것은 모르겠다. 그저 내 앞에서 벌어지는 이 끔찍한 살육을 외면하고 싶을 뿐이다.

 

마을에서 만난 저능아를 데려가는 글랜턴, 그에게서 이 저능아를 돌봐주겠다는 동정심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왜 데려간 것일까. 홀든 판사가 물에 빠진 저능아를 살려주고 데리고 다니는 것을 보면서 조금은 인간적인 모습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소년의 말대로 식량으로 쓰기 위해 데리고 다녔다면 실날같이 이어지던 인간다움에 대한 경계선은 이제 그 흔적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되어 버린다.

 

홀든 판사가 왜 유마 인디언의 습격에 살아남은 토드빈과 전직 신부와 소년을 죽이려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데 세월이 흘러 더이상 소년이 아닌 중년이 된 그를 만난 홀든 판사가 "인간 존재 자체가 전쟁과 죽음을 위한 것이다"라는 말로 그들이 한 행동에 분명한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인디언 살육에 함께한 그들의 무리와 나도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에 컴컴한 어둠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공포에 휩싸인다. 인류가 걸어온 역사속에 사라진 수많은 이들, 붉게 물든 사막을 보며 그들의 고통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피에 물들고 폭력이 난무했던 미국 서부 국경지대에서 이유도 모른채 죽어간 많은 이들이 떠올라 마지막 책장을 덮는 것이 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