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자 - 제138회 나오키 상 수상작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남자"라는 말, 참 가슴 떨리게 한다. 현재 시점에서 과거로 옮겨 가는 이 책의 전개방식은 이전까지 읽었던 다른 책들과 다르게 다가와 낯설긴 하지만 과거의 시간으로 이야기가 옮겨감에 따라 하나와 그녀의 양아버지 준고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게 한다. 2008년 6월 현재 결혼을 앞둔 하나가 양아버지 준고의 품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아 보이는데 무언가 사연이 있는 두 부녀를 보면 무사히 결혼을 마칠 수 있을지 위태위태하다. 결혼식을 위해 요시로의 요청으로 준고가 섬씽 올드로 가져온 낡은 카메라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음침하고 은밀한 사건이 하나와 준고를 이어 주는 것 같은데 한눈에 보이게도 남녀의 사랑이 느껴져 이 사랑이 그리 아름답지 않아 보인다.

 

준고와 하나가 살고 있는 벽장 안에 무언가가 있다. 2005년 11월, 요시로는 그녀의 집 안에서 나는 뭔가가 썩어가는 듯한 이 냄새를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오래된 집에서 맡을 수 있는 것으로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린다. 거기다 하나가 준고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를 보노라면 대체 요시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고 묻고 싶어진다. 책을 읽는 내가 보기에도 뭔가 야릇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하긴 스물 일곱살에 초등학교 4학년인 하나를 딸로 맡았으니 이것부터 이상해서 다른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버리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남자가 혼자 사는 곳에 딸로 들어간다는 것은 아무리 애정이 있다 해도 썩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가족들을 모두 잃고 홀로 된 하나를 선뜻 맡겠다고 나서는 이가 준고뿐인 것도 아니었는데 이 두 사람을 누구도 갈라놓지 못하게 무언가 단단한 것이 연결되어 있어 부녀관계로 살아가는 것은 운명으로 여겨지긴 한다. 준고가 과거 하나의 부모님에게 잠시 의탁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예측해 볼 수 있어 하나와 준고의 관계가 누가 떼어놓는다고 떼어질 수 있는 관계가 아니란 것을 알수 있다.

 

나는 이 사랑에 먼저 손을 내민 사람이 하나인 줄 알았다. 가족들을 잃고 새로운 가족이 생긴 그녀에게 준고는 결코 놓쳐서는 안될 사람이었고 '사랑'만이 그 가족을 이루어 사는데 필요한 조건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과거로 갈수록 부모에 의해 삐뚤어진 사랑을 하게 된 준고의 집착을 보면서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양아버지와 딸로 만나게 된 지금이 아닌 훨씬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닿는 잘못된 만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는 뼈가 되어도 준고와 함께 하고 싶었던 마음이 변해 훗날 결혼하여 준고를 벗어나게 될 것이라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이렇듯 현재에서 과거로 시선이 옮겨지게 되면 독자들은 두 사람의 절절한 사랑에 더 빠져들게 된다.

 

 지금도 과거에 매달려 살아 가고 있을 하나는 자신과 준고때문에 희생된 사람들을 생각하며 자신이 지켜온 '사랑'에 여전히 확신을 가지고 있을까. 혹자는 이미 결혼을 했으므로 그 사랑에 손을 놔 버렸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언제든 그녀가 준고에게 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탓할 것인가. 누구도 두 사람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영혼이 이어진 두 사람의 위험한 사랑을 나는 선뜻 밀어낼 수가 없다. 벽장속에서 나던 부패하던 냄새가 코 끝을 스쳐가는 그런 암울한 사랑이지만 두 사람이 아닌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하나와 준고 사이에 있는 요시로가 전혀 이질적인 존재로 느껴지지 않을만큼, 나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다가가게 되는 것이 '사랑' 아닌가. 요시로와 하나는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결말을 듣고 싶은지도 모른다. 이런 가슴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사랑은 싫다. 타인의 사랑 또한 행복한 결말을 맞길 바라는 마음, 너무 이기적인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 종말 리포트 1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유일한 인간 생존자인 '눈사람'이 증언하는 인간 멸망의 역사". 나는 이 문장을 보면서도 왜 '눈사람'을 겨울에 내리는 눈으로 만든 그 '눈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마지막 책장을 덮은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에 떠오른 그의 이미지는 눈으로 만든 '눈사람'이니 어찌 그가 예전에는 '지미'란 이름을 쓴 나와 다름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빨리 머릿속에 만들어 놓은 그의 이미지를 떨쳐버려야 그가 들려준 이야기들을 할 수 있을텐데 걱정이다.

 

'눈사람'은 크레이크의 창조물 크레이커들과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생존자로 여겨진다. 물론 세계 곳곳 어디엔가 한 두명쯤은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전설이다' 같은 영화에 보면 적에 대항해 살아가는 멋진 주인공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눈사람'이 싸울 존재는 돼지구리와 늑개 정도 뿐이다. 홀로 남은 '눈사람'에게 돼지구리와 늑개는 목숨까지 위협하는 존재이니 이렇게 가볍게 말하면 안되겠지. 인간의 이기심으로 창조된 것들이니 훗날 위협이 될 존재가 되리란 것은 충분히 짐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눈사람이 이 모든 것을 다 떠안아야 하는 건지 모를 일이다.

 

이 책을 모두 읽어야만 첫 장면부터 이해가 가능하다. 시간의 순서에 따라 사건이 일어난 시점부터 설명하는 것이 아닌 이미 벌어진 일을 놓고 '눈사람'의 과거 기억에 따라가자니 진행속도도 더디고 왜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궁금해서 답답하고 미칠 지경이 된다. 2권 중반쯤 가야 지미의 친구 크레이크가 이 세상에 내린 끔찍한 재앙이 뭔지, 자신의 창조물을 왜 지미에게 맡겼는지 알 수 있어 '눈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은 정말 지루하다.

 

솔직히 크레이크가 창조한 크레이커들의 모습이 '눈사람'만큼이나 현실적인 존재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 이미지가 괴물로 그려지는데 크레이크가 만든 이 창조물들이 세월이 많이 흘러도 지금의 우리처럼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파괴된 이곳을 미래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원시인들이 살던 시대로 퇴보한 것 같다. 물론 풀을 먹으며 생존해 나갈 수 있는 존재들이긴 하지만 '눈사람'이 먹을 물고기를 잡는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크레이크가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해진다.

 

크레이크와 오릭스를 자신들의 창조주로 생각하는 크레이커들, 크레이크가 지미에게 모든 것을 맡긴 것은 의도된 것일까. 자연스러운 일이었을까. 물론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제각각이겠지만 책임을 져야할 크레이크가 없어 그 답을 알 수 없어 안타까운데, 세상을 편리하게만 만들고자 한 우리의 이기심이 이제는 창조물을 만들어내기까지 하다니 세상이 무서워진다. 멸망의 순간이 오지 않아야겠지만 만약 그 순간이 온다면 이 책의 결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환희이상' 알약으로 인해 세상이 파괴되어 가는 것을 좀 더 빠르게 전개 시켰다면 좋았을텐데 더디게 넘어간 책장으로 인해 끔찍한 재앙이 눈 앞에서 그려지지 않아 오히려 한가롭게 느껴져 참 곤혹스러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있는 이곳이 지옥이 아님을 알게 해 준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향 사진관
김정현 지음 / 은행나무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고향사진관'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학창시절 학교 밑에 있던 사진관이 떠오른다. 허름하긴 했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기가 망설여지지 않았던 편안함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 사진관이 사라져 나의 기억속에서나 존재하는 추억의 한 장소가 되어 버렸다. 늘 지나다니던 그 길에 이젠 나의 발자국조차 남아 있지 않지만 지나 온 내 청춘시절을 누가 뚝 잘라 먹기라도 한 듯 마음이 섭섭해진다.

 

책 표지에 등장하는 '고향사진관', '양지이발소', '숙다방' 등은 이제는 드라마 세트장에서나 볼 수 있다. 옛 건물을 재현한 건물 앞에 서서 웃으며 사진을 찍고 예전에 우리들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나, 생각하며 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곳, 그런 장소로 주목받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고향사진관'은 아버지가 하시던 사진관을 지키며 친구들이 가끔 들르며 안부를 주고 받는 사랑방 역할을 해 실체가 있는 존재로 자리를 지킨다. 대를 이어서 일을 이어받는 것이 아닌 쓰러진 아버지가 깨어나길 바라며 아버지가 쓰시던 물건을 그대로 둔 채 아들 용준은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한결 같은 마음으로 '고향사진관'을 지키게 된다.  

 

저자가 친구 용준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목소리도 간간이 넣어 실화를 바탕으로 해서 글을 구성해서 그런지 용준이의 삶이 더 구구절절하게 다가온다. 용준이가 결혼을 한 후 큰 딸 혜주가 어른이 될 때까지 아버지는 그렇게 눈을 감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셨다. 십칠 년이 넘게, 자신의 인생을 접어둔 채 아버지를 돌보아 온 용준, 세상 사람들은 그를 보며 효자라며 대단하다고 쉽게 말들 하지만 "한 삼사년이면 끝날 줄 알았던 세월이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다"며 그 때 먹은 마음이 죄송스러워 고개를 차마 들지 못하는 용준이를 보니 나의 가슴도 아파온다.

 

용준이 놓아 버린 청춘, 아름답던 그 시절이 생각나서일까, 아버지를 떠나보낸 후의 그의 인생에 기어이 눈물이 터져 버렸다. 이제는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도 될텐데.......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던 그가 하고 싶은 일이란 가족들과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니, 물론 이것이 소중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던 용준이 놓아 버린 많은 것들이 생각나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 책장을 넘길 때까지 부옇게 흐려진 눈길속에 기어이 목놓아 울고 있는 용준의 어머니가 눈 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책의 중반까지 읽을 때만해도 이야기가 툭툭 끊어지는 느낌에 몰입이 잘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하시던 '고향사진관'을 맡고 나서는 용준이의 행동에 마음 또한 가지 않았다. 안정된 미래가 있어 그가 포기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군대를 제대한 용준이 자신이 맞게 된 상황에 답답해하며 모든 짐을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고 가는 모습은 어딘가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이제는 안다. 용준이가 아버지를 돌보며 살아간 긴 세월을 책에 담아내려 했기에 이야기가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집안에 병자가 있으면 암울하고 우울하기 마련인 삶을 아무렇지 않은 척 감정을 툭 뱉어내지 않으면 사는 것조차 힘에 겨웠을 용준을 생각하니 이제야 내가 받은 느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병상에 누워 지낸 아버지는 그 긴 세월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용준의 삶이 더이상 힘들어지지 않도록 먼 곳에 사셔서도 돌봐주셨다면 좋았을텐데, 그의 인생이 나의 가슴 속에 박혀 슬픔이 되어 버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어째서 김연수의 책들은 이렇게 어려운 주제를 던져주는가. 이런 말을 하고 보니 꼭 그의 책들을 다 읽은것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과 이 책 '밤은 노래한다'를 읽었을 뿐인데 말이다. 두 권의 책이 모두 내가 읽기에는 너무 무겁기 때문일까, '밤은 노래한다'는 비슷한 시대, 우리의 삶과 인생, 또는 역사를 대중들에게 들려주던 조정래님의 책과 너무도 다르게 다가온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장소 중 '용정'은 박경리님의 '토지'에서 등장했던 지명이라 그런지 그곳 사투리가 익숙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반가운 것도 잠시, 1930년대 초반 북간도의 항일유격근거지(한인 소비에트) 내부에서 있었던 피비린내 나는 사건인 '반민생단 투쟁'에 관한 내용을 담은 책이라 가슴에 무거운 돌이 내리 누르는 듯 답답해지니 마지막 책장까지 가는 길이 쉽지 않은 여정이 될 모양이다.

 

붉은 색 표지에 그려진 남자, 그 눈빛마저도 붉다. 죽은 시체만이 자신이 누구인지 말 할 수 있었던 그 시절에 왜 죽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간 이들이 많다. '민생단 사건'에 대해서는 이전에 들어 본적이 없어 김연수님의 '밤은 노래한다'를 읽으며 처음 접했다. 우리네 이야기인데 몰랐다는 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나 이런 주제에 선뜻 손을 내미는 것은 나에겐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김해연이라는 인물이 화자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 '정희'를 잃은 슬픔에 대해 이야기 하는 '밤은 노래한다'. 한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여기에서는 지극히 가벼운 주제로 다가올 수 있으나 김해연과 다르게 '정희'라는 인물은 그리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 독자의 입장에서야 김해연이 정희의 죽음때문에 말을 잃을 정도로 힘들어하고. '자신을 사랑한 것이 맞는지' 그 해답을 얻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 그녀의 죽음을 파헤치는 것이 조금은 이 책을 읽어내는 것이 쉬운 것은 사실이나 큰 사건속에서 이렇게 사랑에 매달리는 김해연이라는 존재가 조금 뜬금없이 다가오기도 한다. 물론 얽힌 관계속에서 그 또한 역사의 한 페이지에 놓이게 되나 500여 명의 혁명가가 적이 아니라 동지의 손에 죽어간 사건을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후반을 넘어서면 김해연을 '그'라고 칭하며 제 3자가 화자로 등장하는데 이때쯤되면 김해연 또한 역사속에 살아간 한 인물로 다가온다.

 

박도만이 유격대 사람들을 하나씩 죽일 때 긴장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적이 아닌 같은 목적을 위해 뭉친 사람들에 의해 죽어간 이들이 대체 얼마나 되는 것일까. 죽으면서까지 자신이 왜 죽어야 했는지 몰랐을 그들을 보며 가슴이 점점 무겁게 가라앉는다. 쉽지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밤은 노래한다'는 '혁명'이니 '민생단', '유격대' 등 어느 것 하나 익숙하게 다가오는 단어가 없어 읽는 것이 곤혹스럽다. 1930년 암울했던 그 시절을 복원한 작가의 글이 대중적이지 않아 이렇게 서평을 쓰는 것도 힘들다. 우리의 역사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싶은 작가를 보며 또 어떤 책을 대중에게 보여줄지 기대되지만, 이보다 더한 무거운 주제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김해연의 입장에서 바라본 사건들이 지나고 난 뒤에 그의 기억에 의해 서술되거나 시간을 건너 뛰는 느낌에 이야기들이 툭툭 끊어져 아쉽긴 하지만 정희가 김해연에게 보낸 처음이자 마지막 서신을 읽으며 결말을 맺는 점은 마음에 든다. 살아갈 이유가 하나라도 있어야 살아지는 것이 삶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라예보의 첼리스트
스티븐 갤러웨이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포탄과 피로 얼룩진 이야기들을 싫어해서 이 책을 읽기까지 많이 망설였다. 곳곳에 테러가 일어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제는 텔레비전 화면속에서만 볼 수 있는 다른 세상의 일이라 넘길 수 없었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일을 지켜 보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단 한발의 총탄으로 22명이 사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다친 곳에서 알비노니의 '아다지오'가 울려퍼진다"고 소개한 글을 본 후 1992년 사라예보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잊혀지길 두려워 하던 그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던 이들에게 떨어진 포탄, 이 포탄으로 22명이 죽는 것을 지켜본 한 첼리스트는 사람들이 죽은 그 자리에서 22일동안 이들을 위해 알비노니의 '아디지오'를 연주한다. 포탄이 떨어지고 총에 맞아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일상이 되어가는 이들에게 그가 연주하는 음악은 결코 죽을 것 같은 이 시기를 탈출시켜줄 수 있는 해답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목숨을 걸고 물을 구하러 양조장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마실 물을 제공할 수 있는 것도 아님을 알지만 음악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예전의 과거를 떠올리며 행복해 한다. 정말 가능한 일일까? 무너졌던 건물이 다시 세워지고 가족들이 행복하게 웃던 그 시절이 정말 눈 앞에 떠오를까. 직접 이곳에 발을 디디지 않은 내가, 사각의 화면속만을 바라보며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 기사를 통해 그들의 실상을 전해들은 내가 "맞다, 아니다"를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연주로 인해 포탄이 떨어지고 사람들이 죽는 이 끔찍한 상황속에서 한 줄기 따뜻한 햇살을 보는 듯 나도 안도감을 느꼈다.

 

총알이 빗발치는 거리에서 연주에 빠져드는 첼리스트를 보며 나는 최근에 읽은 김연수님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 생각났다. 유대인들이 가스실에 들어가기 전 그들 앞에서 집시들이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 것인가. 내가 죽으러 들어가는데, 저들은 저렇게 살아 음악을 연주한다고 화를 냈을까. 절망을 느꼈을까. 아니 행복했던 옛 기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수용소에서 죽어갈 날을 기다리는 그들에게도 웃음이 있었고 삶이 있었다는 글을 통해 사람들에게 잊혀질까 두려운 이 상황에서도 사라예보에는 희망이 피어나고 있었다.  

 

드라간은 빵을 받으러 가야 하는 저격수에게 노출된 이 거리를 건너기 위해선 목숨을 걸어야 함을 알지만 그는 오늘도 그 길을 건넌다. 빵 하나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삶을 예전에는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상황, 숨이 넘어갈 듯 뛰어가도 총에 맞지 않는다 확신할 수 없는 그 때 드라간은 산책가듯 천천히 그 길을 건넌다. 그에겐 이것만이 유일하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다친 사람을 옮기는데 동참하지 못하지만 죽은 사람을 옮기고 이 길을 천천히 예전처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참으로 쓸쓸하지만 그에게서도 희망이 보인다.  

 

1992년 사라예보에서 많은 이들이 고통을 당하고 살아내기 위해 힘든 시간을 보냈을텐데 이 책에서는 몇 사람의 삶 밖에 이야기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만으로도 충분히 그들의 삶을 짐작해볼 수 있어 더 슬프고 끔찍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이제는 사라예보의 사람들에게 상징적인 존재가 된 첼리스트를 죽이기 위해 저격수가 이곳으로 온다. 이 저격수를 저지하기 위해 애로는 첼리스트를 보호하게 되는데, 무수히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이곳 사라예보에서 저격수의 손에서 첼리스트를 구해야 하는 상황은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탕, 탕 총소리가 들리고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외에 조용한 이 거리에 '아다지오'의 선율이 들린다. 상상해보라. 나는 이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행복했던 지난 과거로 돌아가게 될 것이고 첼리스트가 저격수의 총에 맞아 죽는 순간, 지금까지 느꼈던 그 어떤 불행보다 더 깊은 상실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사라예보에서 그를 지켜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첼리스트를 중심으로 같은 장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담고 있는 '사라예보의 첼리스트', 그 이야기가 짧아 아쉬움이 들지만 그가 연주하는 선율이 가슴속에 남아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는다. 포탄과 피로 얼룩진 도시 사라예보의 모습이 사라지고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 모습만이 눈 앞에 그려져 더 가슴아프고 슬프게 다가온다. 이 상황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까 겁이 났던 그들은 이제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할 그들에게 이 음악이 '행복'이었음을 누구든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