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테메레르를 기다려왔다. 단숨에 읽기 보다 나의 기대감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조금씩 읽어나갔다. 제목이 "흑색화약전쟁"이지만 중반부까지는 이스탄불에 가서 용의 알을 받아오라는 명령에 따라 먼길을 이동하기에 약간 지루해질 수 있다. 그러나 용싱왕자의 용 리엔이 이스탄불에 와 있는 것을 보고 차츰 테메레르와 로렌스 일행은 위험을 감지한다. 용알의 대금을 지불한 것 같은데 이 돈의 행방도 알 수 없고 이스탄불에서는 용알을 내어줄 수 없다고 버티니 참으로 난감하다. 거기다 리엔까지 용싱왕자를 죽게한 악감정을 드러내며 프랑스에 합류해 버리니 리엔과 테메레르간의 충돌이 일어날 것이란 예측이 가능해 난 리엔이 무섭고 미워질려고 한다. 이들에게 부과된 임무가 혹 누군가 허위로 작성하여 위험에 빠뜨리기 위한 계책은 아닐까? 안내자로 따라나선 사막에서 말없이 자주 사라지는 타르케의 존재도 의심스럽기만 하니 쉽지 않은 임무가 될 터 앞으로 큰일이다. 원리원칙을 따지던 로렌스가 변한 것 같다. 중국에 있으면서 용의 권리를 찾아줘야 한다는 발언을 일삼고 다른 용들에게 이런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테메레르에게 "지금은 전시중"이란 사실을 각인시켜야 하는 것이 괴로운 로렌스, 이스탄불에서 용알을 내주지 않으며 미적거릴때 멋지게 용알들을 탈취하여 떠나는 계획을 세운다. 참 멋지지 않은가. 그러나 용알들을 싣고 떠날때 알 세개를 갖고 날아올랐는데 알라만 알이 떨어져 이것을 잡으려던 딕비가 함께 희생되어 마음이 무겁다. 공군에 지원하는 사람들의 연령이 낮아 한창 아이들과 뛰어놀아야 할때 전쟁에 참전하여 죽는 아이들을 보는것이 참으로 슬프다. 이런 희생으로 알을 탈취했으면 멋지게 날아서 영국으로 날아가야 하는데 중간에 또 발이 묶이다니, 이제야 본격적으로 '흑색화약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사람들의 말속에만 나타나던 나폴레옹이 드뎌 모습을 드러낸다. 리엔과 함께 있는 나폴레옹, 역시 프러시아와의 전쟁에 임하는 그가 생각하는 전략은 치밀하다. 후퇴를 거듭하는 프러시아를 따라다니던 로렌스와 테메레르 일행은 이번에도 역시 단독행동에 들어가는데 영국으로 가는 길이 왜이리 멀다냐. 내 입안이 바짝 타들어가는 것 같다. 내 눈엔 테메레르가 제일 멋져 보이기에 전쟁에 나가면 영웅적인 대접을 받으며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존재가 되길 바랬으나 아직은 무리인 모양이다. 프랑스편에 있는 리엔이 조종하는 프랑스용들에게 큰 힘을 쓰지 못해 안타깝다. 프러시아 장군들의 자주 바뀌는 전략이 혼란을 더해 주기만 하고 "프리드리히 대왕께서 직접 증명하셨다"며 그들의 전략을 바꾸려 하지 않는 것이 패전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지만 용들에게 군인들을 태워 먼 곳까지 실어나르는 나폴레옹의 전략은 탁월했다. 그래서 '테메레르 3권'에서는 테메레르가 위험한 상황을 많이 겪게 되는 것 같다. 전쟁을 치르며 나아가야 했기에 그러했으리라. 테메레르에게 피해만 준 야생용 아르카디와 몇마리가 나중에 테메레르를 어떻게 도와주는지, 알에서 깨어난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이스키에르카라고 붙인 용의 활약상을 본다면 조금은 마음이 유쾌해지리라. 야생용들의 행동이 마음에 감동을 몰고 온다. 정말 그랬다. 새끼용 이스키에르카는 태어나고 나서 테메레르 못지 않게 귀엽고 사랑스럽다. 한마리 키우고 싶은 생각이 들정도다. 뭐 수시로 불을 뿜어대니 이점을 고려해봐야하긴 하지만 말이다. "우리는 고향으로 날아간다네. 다 같이 고향으로 간다네"의 노래처럼 이들이 어서 영국땅을 밟길 바란다. 나도 막시무스와 릴리가 그립다. 3권에서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기에.
이 책의 제목이 왜이리 정감있게 느껴지나 했더니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친절한 금자씨"때문인가 보다. 총 9편의 단편들속엔 저자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 같다. 중년의 나이나 환갑, 진갑을 보낸 사람들이 이 책의 주인공이라 저자의 나이를 살짝 봤더니 1931년 출생으로 "역시 그 나이즈음을 표현했구나"하고 생각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나도 너무 싫다. 10대에는 빨리 어른이 되어서 금지되는 장소가 없이 자유롭게 드나들고 싶었고 20대에는 품어왔던 이상과 현실의 다름을 인정하기가 힘들었었다. 지금 30대는 어쩜 세월의 속도가 이리 빠를까 눈가의 주름을 신경쓰며 살고 있으니 그 많던 날들 다 어디로 흘러갔을까.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을 무엇으로 제일 처음 느끼게 될까. '주름'이겠지만 목소리도 늙어가지 않던가. 마음이야 늘 소녀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내 머릿속도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어려서 이해되지 않았던 어른들의 행동을 내가 지금 그대로 따라하고 있으니까. '친절한 복희씨'의 단편들을 읽다보면 저자의 살아온 인생도 보이지만 그녀가 세월에 따라 나이가 들어가는 것도 보이는 것 같다. 아둥바둥 사는 모습보다 한발 뒤로 물러서서 인생을 바라보는 느낌이 묻어난다고 할까. 유독 자주 등장하는 "땅이 화수분이다"라는 말, 흙과 가까이 살고 싶은 소망이 담겨져 있는 것 같다. 시골에서 살며 텃밭을 가꾸고 싶다기 보다 예전 시골인심이 그리워서 땅에 대한 애착을 나타내겠지. 벽사이에 갇혀서 살아가다 보면 내 다리가 참 불쌍하다는 생각을 한다. 부드러운 흙의 느낌을 전해줘야할텐데 늘 딱딱한 바닥을 걷게 하니까. 치매가 무서운것은 내 가족도 몰라보고 자신을 잃어간다는 것일 것이다. 간혹 정신이 돌아올때면 얼마나 황망할까. 어릴적 친구들과 놀고 있으면 날 찾아다니며 "누구야, 밥 먹어라"는 말이 아이들과의 놀이를 마치게 하여 참으로 싫더니 가족을 이루고 살다보니 친정엄마가 해 주시던 따뜻한 밥이 그리워진다. 그래서 "후남아, 밥 먹어라" 단편은 내 마음까지 아프게 만든다. 미국으로 시집 간 딸이 얼마나 마음이 쓰였으면 어릴적에 곧잘 부르던 "후남아, 밥 먹어라"고 부르실까. 가슴이 뭉클해진다. 단편들을 읽다보면 다양한 사람들의 유형을 본다. 여기에 등장하는 각각의 주인공들은 또 다른 나의 모습이다. "촛불밝힌 식탁"에서처럼 시댁과 마주보고 살면서 시부모님이 오는 것이 싫어 불끄고 집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사는, 내 실속 다 차리는 아들내외를 보면 나도 뜨끔해지는 것이다. 사실 나도 시댁이 어려워 가까이 사는게 싫고 가는 것이 아주 부담스럽다. 하물며 자주 찾아오는것을 어찌 반길까. 뭐 한번도 안오시는 것이 지금은 더 섭섭하긴 하지만. 뛰어난 능력을 지닌 주인공들이 아닌 내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삶을 엿보는 것은 내 삶에 비추어 비교해 보며 마음의 안식을 얻을때가 많다. 고만고만하게 사는 것을 보며 "인생은 다 그런 것이다"라고 체념하고 자족하게 되는 것이다.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며 '그리움'을 느낄때가 많은데 '친절한 복희씨'에 있는 글들을 보면 그 아련한 느낌이 지속된다. 저자가 경험한 삶을 들려주어 내가 이 속에 담긴 삶의 지혜를 찾아낸다면 이들의 삶을 통해 위로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리라. 삶이란 다 그런 것이니까.
외출금지 시간에 한마리의 지하표범이 되어 외출을 감행한 프로피가 던롭 경사를 만난 것은 불행이라고 해야할까,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외출금지 시간에 돌아다닌 다른 한 아이는 채찍질 50대를 받았다고 하니 아무일 없이 집으로 돌아온 프로피에겐 다행한 일이다. 프로피와 벤허 그리고 치타가 전쟁놀이를 하듯 FOD(자유 아니면 죽음)라는 단체를 만들어 영국인에게 대항하는 모습은 어른들의 세계를 모방한 것일 뿐이지만 나름대로 진지하고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기에 그저 아이들의 장난일뿐이라고 생각하진 못할 것이다. 친구인 벤허가 미행을 당하는 듯 하여 옥상에서 감시를 하던 중 야르데나가 옷을 갈아있는 장면을 목격한 후로 야르데나에게 사과를 해야하는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갈등 할 정도로 순수한 어린아이의 모습도 가지고 있는 프로피. 던롭을 만나 영어를 배우고 그에겐 히브리어를 가르쳐 줌으로써 우정을 다져 나간다. 사실 프로피는 던롭을 만나는 것을 첩보 활동으로 생각하여 중요한 정보를 빼내는 것이라고 친구들에게 말했지만 FOD(자유가 아니면 죽음)의 총사령관 벤허는 프로피의 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지 않았는가, "적을 사랑한다"고. 분명 프로피에겐 던롭이 적이다. 그런데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으니 친구들이 자신을 '배신자'라고 해도 할말이 없는게 아닐까. 이때의 프로피에겐 영국인에게 호감을 가지는 것이 분명 자신의 신념에 반대되는 상황이여서 많이 괴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사랑을 한다면 그 누구도 배신자가 아니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어린나이에는 이해하기 힘든 말이지만 역시 '배신자'라는 낙인은 기분이 나쁘다. 프로피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그가 처한 상황이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다가 아버지가 슬로건을 만들고 부상자들을 몰래 치료해주는 어머니를 보면서 사태가 긴박하게 흐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여러번의 수색으로 몇몇 사람들이 투옥되고 수류탄에 사용되는 지렛대가 치타의 아파트에서 발견되어 치타의 아버지 한 명도 끌려가는 사태에 이르게 되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긴장하게 된다. 많은 세월이 흘러 회상하며 쓰는 어린시절의 프로피를 보고 있노라니 '나는 참 편안하고 행복한 어린시절을 보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기억하며 쓰는 글이란 삶의 한부분을 불안한 도시에서 보냈을 어린 프로피에겐 기억하고 꼭 글로 남겨야 하는 사명감마저 갖고 있었던게 아닐까. 내가 겪었던 일을 타인에게 들려줌으로써 그저 살아가는 일상생활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겪었던 심각하고 위험한 상황을 타인에게 깊이있게 느끼게 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더불어 자신도 그때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프로피가 친구들과 했던 행동들로인해 나는 그저 그들이 어릴때 흔히 하던 전쟁놀이인줄 알았다. 아이들이 무엇을 알겠냐고 말하지 말자. 어른들이 겪고 느끼던 세계를 아이들도 똑같이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그때 아이들의 마음속엔 무엇이 있었을까. 친구들과 함께 할 놀이에 대한 생각이 아닌 어른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아이들도 고스란히 함께 느꼈다는 것을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나름대로 유혹을 떨치고 적국의 사람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슬픔이 되어 마음에 머물게 된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프로피는 그 시절을 그리워할까. 아니면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까. 프로피가 그 뒤로 무슨 일을 겪었는지 궁금하지만 이야기는 짧게 끝을 맺어 조금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