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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평점 :
그러니까 누나가 대학2∼3학년때였으니까 나는 아마도 국민학교 6학년이었거나 중학교 1학년쯤 되었지 싶다. 누나는 꼬부랑 영어가 가득 쓰여진 복사지 몇 장과 삼중당 문고 한 권, 그리고 영어사전, 필기도구 같은 것들을 밥상위에 어지럽게 펼쳐놓고(자고로 일 못하는 넘이 옷은 제일 많이 더럽히고 공부 못하는 것이 책은 온 방에 어지럽게 펼쳐 놓는 법이다.) 머리를 끌적이며, 볼펜을 입에 물었다, 귀에 꼽았다, 손위에서 빙그르르 돌렸다하며 꿍꿍거리며 무슨 번역 숙제같은 것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누나의 밥상을 기웃거리다가 어깨너머로 만나게 된 책이 바로 <오만과 편견>되겠다. 그 첫 만남이후로 그러다 저러다 문득 20여년이란 세월이 훌러덩벌러덩 지나가 버렸다.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뒤 돌아보는 세월은 정말 금방이고 한방이다. 순식간이자 찰나같지만 지나간 시간이나 앞으로 올 시간이나 그 양과 길이가 여일하다는 것은 만고풍상에도 변하지 않는 수학적 진리되겠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책의 제목을 오래 기억하고 있었고 또 머지않아 이 책이 영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위대한 고전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되었지만 마음먹고 펴들기까지는 보시다시피 아시다시피 오랜시간이 걸렸다.
이건 삼천포로 들어서는 이야기지만 문득 떠오른 생각이 섭섭해 할 것 같아 한마디 하고 넘어가고 싶으다. (잘나가다가 엉뚱한 소리 주께는 것을 흔히 '삼천포로 빠진다'고 하는데 삼천포 사시는 분들이 언젠가 신문같은 데서 항의한 기억이 난다. 이런 항의가 과연 적절한가 그렇지 않은가는 얼른 판단이 서질 않는다. 어쨌든 간에) 누나가 그때 보던 그 삼중당 문고. 크기는 손바닥만 하고 종이질은 누리끼리 나빳고 글짜는 정말로 깨알같아 흔들리는 버스같은 데 앉아서 읽자면 눈알이 다 툭 튀어나와 거의 빠져버릴 지경이었지만, 그 목록만은 동서고금의 기라성같은 작가들의 주옥같은 명편들로 빽빽하게 넘쳐났던 것으로 기억되는 그 삼중당 문고. 서점마다 빼곡하게 꼽혀있던 그 많던 삼중당 문고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이 시점에서 결정적으로 장정일의 시 '삼정당 문고'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삼중담 문고에 바치는 그의 헌사다.
......
150원 했던 삼중당 문고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두터운 교과서 사이에 끼워 읽었던 삼중당 문고
위장병에 걸려 1년간 휴학할 때 암포젤 엠을 먹으며 읽은 삼중당 문고
간행목록표에 붉은 연필로 읽은 것과 읽지 않은 것을 표시했던 삼중당 문고
경제개발 몇 개년 식으로 읽어 간 삼중당 문고
급우들이 신기해 하는 것을 으쓱거리며 읽었던 삼중당 문고
깨알같이 작은 활자의 삼중당 문고
검은 중학교 교복 호주머니에 꼭 들어맞던 삼중당 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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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하고, 이 책의 줄거리를 말하자면 대강 이렇다. 이해심 많고 선량하지만 오만한 한 남자와 재치있고 발랄하지만 편견에 사로잡혀있었던 한 여자의 사랑이야기이다. 남자는 돈 많은 귀족출신이지만 여자의 집안을 별 볼일 없고......둘이 만나서 처음에는 오해도 하고 하다가 결국은 서로의 진심을 알게되어 잘먹고 잘살았다는 그런 이야기다. 그녀의 언니와 그 남자의 친구인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도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다. 그래서 그렇고 그런 연애소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읽어보면 다르다. 등장인물들의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을 무슨 족집게로 흰머리카락 골라내듯이 적절한 단어와 문장으로 똑 떨어지게 표현한 문장들과 재치있는 대사들을 읽는 것은 정말 즐거운 경험이었고, 당시 영국 사교계의 분위기(그들의 생활방식이며, 초청하고 초대를 받아들이는 방법이며, 그 과장된 친절과 배려로 포장된 대화 등등)를 조금이나마 알게된 것도 이 책을 읽은 보람이라면 보람이다. 르네젤위거의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오만과 편견>의 현대판 리메이크라고 한다. 맞나?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