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1.2권 합본) - 우리 소설로의 초대 4 (양장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는 동안 가끔가끔 이성복의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에 나오는 시편들과 김종해 시인의 데뷔작이자 신춘문예 당선작인 [내란]이 문득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둘러보면 적막강산이요 내려보면 아득한 천길 벼랑이니 막막하고 답답하며 외롭고 고달프며 무기력하여 쓸쓸한 이 소설의 분위기가 이성복의 시들을 생각나게 했을 것이고, '종묘와 사직이 여기 있는데 과인이 어디로 가겠느냐' 하면서도 끝내는 서울을 버리고 도망치듯 몽진길에 오르며 터뜨린 임금의 울음과 부서져 불타버린 종묘를 생각하며 엎드려 흘린 임금의 눈물과 백척간두의 위태로운 사직을 창호지 잘라 쓴 한 장 교지속의 장려곡진한 문장으로 간신히 붙들고 있는 임금의 적막함이 아마도 김종해의 시 [내란]을 생각나게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나는 몇 구절을 여기 옮겨본다.

...목단이 시드는 가운데 지하의 잠, 한반도가/ 소심한 물살에 시달리다가 흘러들었다 벌목/ 당한 女子의 반복되는 임종, 病을 돌보던/ 청춘이 그때마다 나를 흔들어 깨워도 가난한/ 몸은 고결하였고 그래서 죽은 체했다.../ 이성복 [정든유곽에서]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 치는 노인과 편통의 다정함을.../ 이성복 [그날]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나무는/ 채 꽃 피기 전에 아주 작은 열매를 맺고/ 不姙의 살구나무는 시들어 갔다/...그러나 어떤/ 놀라움도 우리를 무기력과 불감증으로부터/ 불러내지 못했고 다만.../ 이성복 [1959년]

낙엽이나린다. 우산을들고/ 제왕은운다헤맨다.../...깊은밤인경은/ 시녀같이누각에서운다누각에서떠난다./ 아한장의풀잎인가미궁속에서/ 내전에세워둔내동상은흔들리고/ 나는거기가서꽂힌비수가되고/ 한밤동안석전을내리는물든가랑잎에/ 붉은용상은젖어/ 우산을들고제왕은운다헤맨다/ 김종해 [내란]

각설하고, 책을 읽다가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한 끼니앞에서 무효였다'(p197)는 대목에 이르러 나도 모르게 문득 무릎을 치며 탄식을 흘리고 말았다 아하!!. 과거에 매 끼니를 온갖 진수성찬 산해진미로 이어왔다하더라도 오늘 아침에 일어나 입에 넣을 끼니가 없다면 과연 과거의 먹고 마셨던 그 모든 끼니가 오늘 닥친 이 끼니앞에서, 그 기아의 서글픔과 서러움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다. 항상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원인없는 결과가 없듯이 현재는 과거와 연결되어 있으니 과거에 미리 준비했다면 어찌 오늘 끼니 걱정이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다시 한번 그러나, 아무리 대비를 하고 준비를 했다고 한들, 결국은 한 끼니의 식사를 위해 지렁이처럼 꾸불꾸불한 무료급식소의 기다란 대기 행렬 끝으로 후줄근한 발걸음을 옮길 수 밖에 없었던 그런 경우도 있을 것이다.(우리는 기이한 병이나 부당한 권력에 의해 하루아침에 몰락한 행복 단란한 가정들을 TV 등에서 흔히 보아왔다). 이런 것을 일러 아마도 팔자라고 할것이며 또는 운명이라고도 할 것이다. 운명 앞에 진인사(盡人事)는 무력하다. 다만 그런 팔자가 아니길 바랄뿐이다.

작가의 글이 모국어 산문미학의 한 진경을 보여준다는 일부 평가에 나도 일부 동조하지만 <칼의 노래>를 읽으면서 느낀 점을 말해보자면, 상기와 같은 폐부를 깊숙히 찌르는 문장들도 없지 않지만, 대체로 중언부언 또한 적지 않다는 생각이다.되나 마나 마구 지껄이다 보면 좋은 말 한 두마디 나오기 마련이다...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무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감히 김훈의 글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그냥 그런 생각도 문득 들었다는 이야기다). <칼의 노래>는 간결한 문장들로 주로 구성되어 있고 그 단문들 중 어떤 것들은 의미내용이 애매모호하여 소설의 각 장이 마치 한편의 긴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이다. 이것이 작가에게나 소설에게 있어 공과득실 그 어디에 해당되는지 나는 알지 못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