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프 선출 6인 위원회는 최종 후보자인 알리와 우스만 중에서 우스만을 다음 칼리프로 선택했다. 우스만은 무함마드의 12촌의 아들로 당시 68세였다. 그는 쿠라이시 부족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크고 나중에 최초의 이슬람 왕조를 개창하게 되는 우마이야 가문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메카에서 가장 부유한 상인으로 손꼽히는 사람이었다. 우스만은 스무 살에 아버지의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았는데, 사업 수완이 뛰어났던 그는 곧 재산을 몇 배로 불려서 메카 전역에서 우스만 가니 즉 부자 우스만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이전에도 술을 전혀 마시지 않고 여자를 밝히지도 않는 등 금욕적인 생활을 했던 그는 남들이 아름답다고 말할 정도로 잘생긴 남자였다.

 

뭐 하나 부러울 것이 없었던 그였지만 그에게는 일종의 우울증 증세가 있었다. 우스만은 자신의 정신적인 문제를 절친한 친구인 아부 바크르에게 털어놓았고, 바크로로부터 예언자 무함마드가 전하는 유일하고 전능한 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우스만은 바로 그 자리에서 이슬람을 믿는다고 선언했다. 우스만의 개종에 그 가족들은 분개했고, 그의 두 아내는 새로운 신앙을 거부했으므로 우스만은 그들과 이혼하고 예언자의 아름답기로 유명한 딸 루카이야와 결혼했다. 나중에 루카이야가 죽자 무함마드의 또 다른 딸 움 쿨툼과 결혼했다.

 

칼리프 임기 중 그가 한 가장 중요한 사업은 꾸란의 확정판을 정리하는 작업이었고 또 다른 중요한 사업은 경제 개혁이었다. 정복한 영토들로부터 막대한 부가 흘러들어오고 있었지만 초기 이슬람 공동체의 허술한 경제 체제는 이를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스만은 자신의 사업가적 수완을 십분 발휘하여 경제 개혁을 추진했다. 우스만 행정부는 제국 곳곳에 5,000개가 넘는 모스크를 새로 지었고 또한 곳곳에 운하를 파고 도로를 건설하고 관개시설을 개선했다. 건축 붐이 일어났고 이슬람 공동체는 엄청난 번영을 맞이하고 있었지만 그 속에는 압제와 부패의 어두운 그림자도 서서히 생겨나고 있었다

 

우스만은 개인적으로는 금욕적이고 신실하고 경건한 사람이었으나 지도자로서는 안목이 넓지 못하고 나약한 면이 있었다. 우스만의 경제개혁으로 가장 많은 이득을 본 세력은 그의 씨족인 우마이야 가문이었다. 우스만은 자신의 친척들을 여러 요직에 앉혔고, 결과적으로 우마이야 가문이 이슬람 세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우스만이 가장 총애하는 사람 중에 사촌인 무아위야가 있었다. 2대 칼리프 우마르가 무아위야를 다마스쿠스 총독으로 임명했는데 우스만은 무아위야가 다스리는 지역을 더 넓혀주었다. 무아위야의 아버지 아부 수피안은 이슬람 초기에 메카와 메디나 사이에 벌어진 세 번의 전투 중 두 차례나 무슬림을 공격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이었고 무아위야의 어머니 힌드는 두 번째 전투인 우후드 전투에서 숨진 무함마드의 삼촌인 함자의 간을 잘라먹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었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원한 따위를 품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마이야 일족이 항복하고 이슬람을 받아들이자 예언자는 이들을 모두 용서하고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무아위야는 특히 유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까이에 두었다. 하지만 예언자 사후에 다마스쿠스에 자리를 잡은 무아위야는 자신에게만 충성을 바치는 군대를 양성하고 있었다.

 

우스만 통치 말기에 제국 곳곳에서 불평이 터져 나왔다. 우스만의 수양 형제 압둘라가 총독으로 있는 이집트에서는 폭동이 일어났다. 총독의 가렴주구에 분노한 주민들이 칼리프에게 총독의 소환을 청원했지만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하자 사절단을 메디나로 파견했다. 이들을 면담한 우스만은 총독을 교체하겠다고는 약속을 했다. 우스만의 약속을 믿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이집트인들은 마침 이집트 총독에게 보내는 우스만의 편지를 가진 노예를 한 명 붙잡았다. 그 편지에는 사절단이 도착하면 즉시 체포하여 처형하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격노한 사절단은 다시 메디나로 돌아가 우스만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칼리프는 그 편지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사실 우스만의 사촌이며 다마스쿠스 총독 무아위야의 협력자인 마르완이 칼리프의 서명을 날조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여든 살이 넘은 우스만은 정국을 통제하고 있지 못했다. 폭도로 변한 사절단은 마르완의 소환을 요구했지만 칼리프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폭도들은 다시 우스만에게 칼리프의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칼리프는 이 요구도 거절했다. 광분한 폭도들은 결국 칼리프의 집안으로 난입하여 자신들의 늙은 지도자를 때려죽였다. 우스만은 향년 82세였다.

 

3대 칼리프 우스만의 캘리그래피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박물관 내에 걸려있는 우스만의 캘리그래피 원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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