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 바크르는 죽기 직전에 후계자 선출 과정의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움마의 유력 인사들을 불러 우마르를 차기 칼리프로 추대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우마르는 아부 바크르가 처음 칼리프로 추대될 때 제일 먼저 충성을 맹세한 사람이었고 아부 바크르의 통치기간 동안 그의 오른팔이자 권좌의 뒤에 있던 실권자였다.

 

아부 바크르의 의견에 유력 인사들은 순간 멈칫했는데 우마르가 비록 예언자의 가장 가까운 동지였고 심성이 착하다고 하더라도 그는 언제나 최고의 무법자였으며 무시무시한 분노를 잘 터뜨리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항상 절제하고 겸손한 아부 바크르와는 다른 인물이었다. 하지만 알리가 우마르를 지지하고 나서자 움마는 우마르를 두 번째 지도자로 받아들였다.

 

우마르는 보통 사람보다 머리 반 개는 더 솟은 거인 같은 남자였다. 완전히 대머리였으며 얼굴이 불그레하고 구레나룻이 거대했다. 황소처럼 강인했으며 성미가 불같았다. 그는 기마술과 검술이 뛰어났으며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전에는 메카의 격투기 챔피언이기도 했다.

 

우마르는 2대 칼리프로 10년 동안 움마를 다스렸다. 그 기간동안 그는 이슬람의 신학적, 정치적, 문화적 체제를 정립했으며, 팔레스타인, 시리아, 이라크, 이집트에서 정복전쟁을 이끌어 종국에는 로마제국보다 더 큰 제국을 건설하게되는 기반을 마련했다. 말하자면 그는 이슬람 제국의 진정한 설립자였다. 우마르는 사도 바울, 칼 마르크스, 로렌초 데 메디치에 나폴레옹을 합쳐놓은 인물과도 같았다. 뛰어난 야전 사령관들이 그를 보좌하기도 했지만 우마르는 큰 그림을 그리는 군사 전략가로서 알렉산더 대왕이나 카이사르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우마르는 결코 허세를 부리지 않는 가식이 없는 사람이었다.

 

우마르는 아부 바크르처럼 생계를 위해 이웃의 소젖을 짜는 아르바이트를 하지는 않았지만 칼리프의 급여로 평균적인 아랍인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액수 정도만을 요구했다. 또한 그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예를 따라 자신의 옷을 언제나 직접 꿰맸는데 때로는 중요한 국정을 수행할 때조차 그랬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출정한 군대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던 우마르의 일화가 전해진다.

 

전령 하나가 곧바로 기쁜 소식을 전하러 말에 올라타서 아라비아로 내달렸다. 메디나에 가까웠을 때 전령은 길가에서 괴상한 늙은이를 지나쳤는데, 기워 고친 외투를 입은 그 소박한 노인이 펄쩍 뛰면서 전령에게 카디시야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렇소.” 전령이 대답했다. “어떤 소식인가? 어떤 소식인가?” 노인이 간절하게 물었다. 하지만 전령은 잡담이나 하느라 멈출 수 없다고 한 뒤 계속 달렸다. 노인은 빠른 걸음으로 전령을 따라오며 귀찮게 질문을 계속했다. 그들이 도시의 문을 지났을 때 군중이 모여들었다. “길을 비켜라.” 전령은 거만하게 소리쳤다. “나는 당장 칼리프를 뵈어야 한다. 칼리프 우마르는 어디 계신가?” 군중은 요란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당신 뒤에 있지 않소.”1)

 

644년 우마르는 메디나에서 한 페르시아 노예에게 피살당했다. 독이 묻은 칼에 6차례나 찔렸지만 3일간이나 견뎌냈다. 그동안에 그는 6명으로 구성된 자문단인 슈라를 지명해서 그들이 새로운 칼리프를 선택하고 움마의 동의를 얻게 했다.

     

1. 타밈 안사리,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류한원 옮김, 뿌리와이파리, 2015. p100

 

제2대 칼리프 우마르의 캘리그래피

 

 

이스탄불에 있는 터키 이슬람 예술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캘리그래피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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