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금요일, 바닷가 찻집에서 친구부부와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남편 폰으로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2박3일 휴가를 받아서 서울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집에까지 내려오기가 너무 고단할 것 같아서-많이 보고 싶지만 부모의 마음이란 게 늘 자식들의 형편이 우선이다-서울 외삼촌집에서 하루밤 묵으라고 얘기했다.
연말 쯤이면 얼굴을 볼 수 있으려나 기대를 했건만 갑자기 시절이 '하수상'해지는 바람에 기대를 접었었다.
아들은 경기도에서 장교로 복무하고 있다.
제 아버지 생신도 지나버리고 성탄절에도 못왔으니 집으로 내려오겠단다.
다섯 살 때 집안이 전소되는 화재를 만나서 자칫하면 가슴에 묻을 뻔한 아이였다.
그리고 중간에 제 아버지가 하던 일을 그만 두고 자리를 바꿔앉는 바람에 초등학교를 네 곳, 중학교를 세 곳이나 거쳐서 졸업을 하였다. 더 이상 전학시키기가 무서워 고등학교는 아예 기숙학교로 보냈었다. 집에 한 번 오려면 차를 다섯 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창의력과 다양성이 그 어느때보다도 요구되는 시대에 고지식한 부모 만나서 출발부터 고전을 할까봐 고등학교 1학년 때 오백만원 빚을 얻어, 수학 보충을 해야 한다고 툴툴거리는 아들의 등을 떠밀어 3주짜리 호주 연수를 보냈었다.
더 넓은 세계를 한 번 보여주고 싶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아이에게 해 준 최대의 호사였다.
그리고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호주 워킹을 2년 다녀왔다.
다행히 아들은 영어는 신경쓰지 않아도 될 정도의 실력을 닦아서 왔다.
우리나라에서 영어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여유가 있고 선택의 폭을 넓힐 수있다는 의미가 된다.
요즘 심심찮게 오르내리는 학생들의 슬픈 기사들을 보면서 부모로서 참 많이 마음이 아프다.
무엇이 그 아이들을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었을까,
이 '미친' 사회를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어야 할까, 하는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된다.
하루 밤을 자고 가면서 인간관계에서 고전하고 있는 제 아버지 이야기를 잠시 했더니 아들은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갔다.
"엄마, 상대방의 마음을 얻으려면 그 사람이 원하는 말을 해줘야 해."
단면을 보는 것이 아니고 그 이면의 과정들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춘기 시절을 이사를 다니느라 수없이 전학을 하고 부모와 떨어져 지냈지만 어미로서 나는 아이들을 놓친 적이 없었다. 수없이 편지를 썼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감을 편지로, E-메일로 메웠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나에게는 '애끓는 모정' 이었겠지만 아이들 편에서 보면 '부담스런 모정'이었을 것이다.
소개한 책은 모두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글이다.
<보리밥과 쌀밥>은 모 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는 오빠가 쓴 글이다.
김훈의 책은 아들이 호주 워킹 갔을 때 보내주었더니 아들이 영어 공부하러 왔는데 국어책은 왜 보냈냐고 한 책이다.
나는 부모가, 우리 사회가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으면 길은 있다고 본다.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어떤 문제보다도 아이들의 아픔과 상처와 고단함을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튼 멀리 떨어뜨려놓고 눈물로 키웠던 그 아들이 와서 잠깐 얼굴을 보여주고 돌아갔다.
새해 벽두에 하나님께서 - 나는 예수쟁이다 - 내게 주신 선물이다.
차카게(착하게)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