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2

도서관에 갔다.
알라딘에는 좀 미안한 소리이지만 연말까지 긴축재정으로 살아야 해서 당분간 책사기는 좀 어려울 것 같다.
대신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소장할 가지가 있다고 판단되면 다 읽은 후에라도 사곤 한다.
이미 뒤에 있는 약속 시간을 넘긴 터라 마음이 바빴다.
검색대에서 청구번호를 출력해서 그 자리에 가서 찾았지만 책을 찾을 수가 없었다.
출발하기 전, 집에서 도서관으로 전화를 걸어서 책이 있다는 확인까지 했는데 말이다.
이삼십 분 사이에 벌써 대출이 된 것 같지는 않았다.
나이가 들면 순발력이 떨어진다. 마음이 급하니 더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내가 낑낑거리는 것보다 도움을 받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섰다.
나이가 들면 상황적응력은 높아진다.
암기는 어려워도 논리에 따른 글쓰기는 오히려 쉬워지는 것이 그 때문이다.
노란색 조끼를 입은 자원봉사자가 바로 옆에 있었다.
청구번호쪽지를 보여주며 분명 이 근처인데 책을 못 찾겠다며 찾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녀도 쪽지를 보더니 여기가 맞는데 책이 없다고 했다.
다시 앞쪽에 앉아있는 젊은 사서에게 갔다.
좀 전에 책이 있다는 확인을 했다. 근데 아무래도 책이 제 자리에 꽂혀있지 않은 모양이다.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 고 물었더니 사서의 대답은 ‘No’였다.
하는 수 없이 다른 책 두 권을 빌려서 무인대출기계 앞에 섰다. 『어느날 사진이 가르쳐준 것들』『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나는 이런 기계가 너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바쁘지만 않으면 사서에게 가서 책을 대출한다.
도서관에서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서 속삭이는 맛도 있어야 한다.
보통 때는 앞에 두어 사람이 대출을 하고 있어도 기다린다.
그래서 순서가 되면 소리를 죽여서 “이거 대출할게요.” 한다.
그러면 사서 역시 낮은 목소리로 반납일이 며칠이에요, 알려준다.
나는 요즈음 낯선 사람이지만 한두 마디 말을 건네보려고 노력한다.
어떤 날은 멀리 움직이지 않거나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하루 종일 열 마디의 말도 하지 않을 때가 있다.
지독한 길치인 내가 버틸만큼 버티다가 이번 여름 휴가 때 내비게이션을 마련했다. 여행은 가다가 막히면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묻는 맛도 있어야 한다. 그게 낯선 지방을 여행할 때 갖는 맛이다.
그런데 요즈음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길을 물어보면 좀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한다.
그리고 내비게이션이 보편화 되어선지 가르쳐 주는 사람도 길을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낭패를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자랄 때, 그 때는 전화 있는 집도 드물었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오면 우리 아버지는 나를 바꿔주기 전에 온갖 것을 시시콜콜 물으셨다. 술 한 잔을 기분 좋게 걸치신 날에는 친구들은 그야말로 고문을 당하는 것이었다.
이름이 뭐냐, 어디 사냐, 우리 딸 하고는 친하냐, 아버지는 뭐하시냐, 형제는 몇이냐, 그러고는 기어이 공부는 잘 하냐, 까지 물으셨다. ‘
내 친구들은 ‘아버지 교육’ 좀 시키라고 아우성이었다.
오늘 나는 그런 아버지가 그립다.

이야기가 좀 엉뚱한 데로 흘렀다.
이것도 나이탓이다.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
아무튼 다른 두 권을 빌려 무인대출기 앞에 섰을 때, 아까 그 자원봉사자가 내가 찾던 책을 들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공손하게 “아까 찾으시던 책 이거 맞지요?” 했다.
이런 세상에.
고마운 마음에 “어떻게 찾으셨어요?” 물었더니 역으로 추적을 해서 책을 갖다 꽂는 사람이 헷갈릴 만한 번호를 서너 가지 조합을 해보았다는 것이었다.
그런 수고까지 하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을 상황이다. 더구나 월급을 받는 직원도 아니지 않는가.
그 마음씀씀이가 너무 고마웠다.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도서관을 나와서 운전을 하고 가면서 느닷없이 가슴이 뭉클했다.
이름이라도 알아둘 껄, 하는 후회가 들었다.
월요일은 휴관이니 화요일쯤 다시 가볼 생각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마음이 씁쓸해지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 중 하나는 점점 사람을 믿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을 본능처럼 갖고 있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몇 번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쉽게 말을 하거나,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경험하고 나면 다시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알게 모르게 마음의 벽을 쌓게 된다.
나 역시도 내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타인에게 그런 상처들을 주고 살아왔을 것이다.
내가 도서관에서 겪은 이 작은 일들이 가슴깊이 새겨지는 것은 바로 그런 상처들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 사이에서 인간관계로 인한 어려움을 확대해석 하지는 말일이다.
살다보면 이렇게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도 만나게 마련이다.

내게 이런 사연들은 안겨준 책은 한겨레신문 논설주간을 지낸 김선주의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집에 와서 책을 읽는 동안  에피소드 하나가 보태졌다. 다음 호를 기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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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11-08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도서관 이야기를 자꾸 보게되어,
저두 코알라와 주말에 한번 가보려구요, 즐거울 듯 해요.

얼마전 영화관 CGV를 갔는데,
표 파는 사람은 싹 사라지고, 몽땅 무인 발권기로 바뀐거예요.
하아- 하고 한숨이 먼저 나오더라구요. 물론 편한 부분도 있지만,
사람과 말하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고, 영화관 인력 고용도 줄어들 것이고.. 등등.
별별 생각이 휙 스쳐지나가더라구요.

좋은 한주되셔요, 중전 언니~

gimssim 2010-11-09 06:32   좋아요 0 | URL
마고님.
코알라 애칭 너무 귀여워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 많이 데리고 다니면서 함께 한 사연을 많이 만드시기 바래요.
세월은 얼마나 빠른지 금방 부모곁을 떠나게 되더라구요.
네 좋은 가을 되세요^^

순오기 2010-11-08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림의 가을에 이어 오늘은 도서관의 아름다운 꽃이네요~ 늘 감동스런 중전님의 글!
저는 반납일이 10일이라 모레 도서관 가야겠어요.^^

gimssim 2010-11-09 06:34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서민들이 살기엔 좀 빡빡한 세상이라 저는 글이라도 좀 미담을 쓸려고 노력하고 있지요.
저도 오늘 쯤 도서관에 갔다가 양동마을 은행나무가 물들었다는 전언이 와서 가 보려고 하는 데 바람이 엄청 부네요.
이 체중 유지한 거 잘한 일인 거 같습니다. ㅎㅎ

sslmo 2010-11-09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저기서 도서관 얘기를 하니까,저도 도서관이 이용하고 싶어지는 걸요.^^

저 또한 씁쓸하지만,이 말이 와 닿아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을 본능처럼 갖고 있다."

서영은은 읽었구요,김선주는 읽고 싶어요~

gimssim 2010-11-09 06:36   좋아요 0 | URL
김선주는 참 따뜻한 시선을 가진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칼럼이니 세상을 보는 눈도 느낄 수 있는 거에요.

일이 년 뒤 스페인에 가볼까 생각중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