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
지난 봄, 이사를 하면서 대충 꽂아두었던 책들을 잠깐씩 시간을 내어 정리를 합니다.
소설, 시, 수필, 종교, 심리학, 자기개발, 취미 등으로 분류를 합니다.
그러다가 눈이 가는 책 한 권을 발견했습니다.
오래된 책입니다.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아마 고등학교 시절에 산 책이라 생각됩니다.
한때 사진책을 살 정도로 사진에 대한 애착과 갈망이 있었나 봅니다.
오래 전의 일이라 한 줄기 아련한 연기 같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런저런 이유로 꿈을 접어야 했겠지요.
학교를 마치고 결혼을 하고 두 남매를 낳아 기르면서 숨 가쁘게 살아, 이 자리에까지 왔습니다.
그동안 숱하게 이사를 다녔고 십여 년 전에는 집안이 전소되는 화재를 만나 살림살이들을 잃고, 겨우 서재의 한쪽 벽에 쌓아두었던 책만 몇 권 건졌습니다.
이 책은 그때 살아남은 책인 듯 싶습니다.
표지의 낙서는 아마 그림을 좋아하는 딸아이의 솜씨인 것 같습니다.
자라면서 어느 한 때, 사람 그림을 보기만 하면 이렇게 낙서를 하곤 했었으니까요.
이제 아이들이 자라 내 품을 떠나고, 남편도 가끔은 안뜰에서 내어 쫓습니다.
이 나이가 되면(?) 사무치게 혼자만의 안뜰이 그리울 때가 있거든요.
외람되지만 삶이, 일상이 서른 번도 더 읽은 소설책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짧은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삶이, 그 일상이 더욱 소중한 것으로 다가옵니다.
시절은 햇빛이 정수리에 쏟아지며 더욱 치열하게 살아라 하는 여름인데 저는 늦은 가을을 살고 있는 듯, 다소 멜랑꼬리, 센티멘탈입니다.
어제 밤, 눈을 부비며 읽은 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자기 연민은 감사하는 마음과 공존할 수 없다’
그래요. 너무 오래 자기연민에 빠져 있지는 않을 겁니다.
오래, 마음의 갈피에 아무도 모르게 간직해 두었던 ‘사진’에의 향수가 요즘 편식을 하는 이유쯤이라고 해 두지요.
구입하는 도서도 온통 사진에 관한 책이고, 세 권까지 빌릴 수 있는 도서관에서도 모두 사진 책을 빌려올 때가 있습니다.
이런 변명도 사실을 자기 연민일 터입니다.
그러나 때로 나 자신을 위로하고 보듬어야 될 때도 있습니다.
매미 소리가 아직은 싱그러운 여름날 오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