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내 인생에 '화재'라는 시놉시스가 끼여있을 줄은 몰랐다.
남편이 가던 길을 접고 새로운 길을 가고자 준비하고 있을 때,
집안을 전소시키는 화재를 만났다.
나는 손님을 배웅 중이었는데 아파트 입구에서 택시를 잡느라 잠시 지체했다.
다섯 살 난 아들은 점심식사 때 갈비를 구워먹느라 쓰고 둔 휴대용 가스렌지를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손에 넣었다.
거실에 둔 걸 안방으로 가지고 가는 사이 가스가 샌 모양이었다.
몇 번 불꽃이 뛰고 커튼으로 옮겨붙었다.
십여 분 사이 불길을 걷잡을 수 없이 번졌고,
혼자 불을 꺼보겠다고 화장실에서 물을 받고 있던 아이는 결국 포기하고 나왔다.
지금도 가끔 말하곤 한다.
'때로 포기해야 살 수 있다'
우리 집에만 해당되는 명언이다.  
앞머리만 약간 그슬리긴 했지만 놀랐을 아이를 입원시키고 나서 제일 먼저 산 시계이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니 병원 근처 여관방에서 자고 출근을 해야 하는 남편을 위한 것이었다.
이십여 년이 지났지만, 수명이 다되어 가는지 흔들면 속에서 떨그럭 거리는 소리가 나긴 하지만, 아직도 알람기능을 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그 당시 얼마동안 남편이 자주 하던 말, “마누라 빼고는 다 새거다!”
“마누라도 새거였으면 싶냐?” 부창부수인 아내의 말.

‘도전과 응전’ 의 역사를 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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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3-08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경험으로 보면 어린 시절 화재 기억은 평생가더라구요. 사람 안 다친 것만도 다행입니다.

gimssim 2010-03-08 21:4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몇 해 동안 저도 시내 나갔다가 불자동차 소리만 들리면 만사를 제쳐놓고 집으로 달려오곤 했어요.
그 아이가 벌써 대학교 4학년이 되었네요.
세월이란 참...

세실 2010-03-09 0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담담하게 쓰셨지만 많이 힘든 시기를 보내셨을듯.
참으로 귀한 아드님이네요. 그만하시길 정말 다행입니다.

gimssim 2010-03-09 14:25   좋아요 0 | URL
아이들 때문에 별별 경험을 다 하고 삽니다.
그게 어려움일지라도 인생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겠지요.

페크pek0501 2010-03-09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안톤 슈냑)이란 말이 생각납니다. 큰 일을 겪으셨네요. 그 정신적 스트레스를 어떻게 견디셨을지, 헤아려 봅니다. '이보다 더한 불행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라'라는 탈무드의 구절을 생각하고, 생명을 잃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겨야 견딜 수 있었을 듯해요. 큰 일을 당하셨으니, 앞으로 좋은 일 있을 겁니다.

gimssim 2010-03-09 15:37   좋아요 0 | URL
예수쟁이인 제가 읽는 성경엔 이런 말씀이 있어요.
'사람이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신다'
아마 제가 감당할 만한 일이였나 봅니다.
그래서 또한 이렇게 용감한(?) 아줌마로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
여긴 날씨가 많이 궂습니다.
좋은 3월, 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