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내 인생에 '화재'라는 시놉시스가 끼여있을 줄은 몰랐다.
남편이 가던 길을 접고 새로운 길을 가고자 준비하고 있을 때,
집안을 전소시키는 화재를 만났다.
나는 손님을 배웅 중이었는데 아파트 입구에서 택시를 잡느라 잠시 지체했다.
다섯 살 난 아들은 점심식사 때 갈비를 구워먹느라 쓰고 둔 휴대용 가스렌지를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손에 넣었다.
거실에 둔 걸 안방으로 가지고 가는 사이 가스가 샌 모양이었다.
몇 번 불꽃이 뛰고 커튼으로 옮겨붙었다.
십여 분 사이 불길을 걷잡을 수 없이 번졌고,
혼자 불을 꺼보겠다고 화장실에서 물을 받고 있던 아이는 결국 포기하고 나왔다.
지금도 가끔 말하곤 한다.
'때로 포기해야 살 수 있다'
우리 집에만 해당되는 명언이다.
앞머리만 약간 그슬리긴 했지만 놀랐을 아이를 입원시키고 나서 제일 먼저 산 시계이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니 병원 근처 여관방에서 자고 출근을 해야 하는 남편을 위한 것이었다.
이십여 년이 지났지만, 수명이 다되어 가는지 흔들면 속에서 떨그럭 거리는 소리가 나긴 하지만, 아직도 알람기능을 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그 당시 얼마동안 남편이 자주 하던 말, “마누라 빼고는 다 새거다!”
“마누라도 새거였으면 싶냐?” 부창부수인 아내의 말.
‘도전과 응전’ 의 역사를 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