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종교적 우파의 기원과 본질 - 낙태와 동성애 이면에 감춰진 인종차별이라는 불편한 진실
랜달 발머 지음, 노동래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2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문


1부 종교적 우파 이전의 복음주의 


"제2차 대각성에 이은 19세기 초의 몇십 년 동안 복음주의자들은 학교, 평화 십자군, 노예제도 폐지, 금주, 교도소 개혁, 여성의 권리 같은 사회개혁에 매진했다. 그들의 노력에 생기를 불어넣은 요소는 그들이 경건의 규범에 따라 사회를 개혁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땅 위에─좀 더 특별하게는 이곳 미국에─가져올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신학자들은 이를 '후천년설'이라고 부른다. 이 교리는 요한계시록 책에 예언된 평화와 의의 천 년이 지난 '후' 예수가 이 땅에 재림하실 것이라고 본다. 그 교리의 추론으로서 신자들은 사회를 개혁하고 예수의 〈재림〉을 위한 길을 닦아야 한다. 복음주의자들의 집요한 사회개혁 촉구에 분노한 남부는 결국 연방에서 탈퇴했다. 그러나 남북전쟁 자체가 후천년설을 재고하도록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끔찍한 사상자 수는 말할 것도 없고, 게티즈버그와 앤티텀과 머내서스의 전쟁터들은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사회의 완벽성에 관한 후천년설의 낙관주의를 재조사하도록 자극했다."(43-4)


"복음주의 사회 개혁가들은 19세기 말에 시작하여 20세기가 한창 진행될 때까지 계속된 묵시주의(apocalypticism)라는 과속방지턱을 만났다. 복음주의자들 중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영국 형제단(이후 플리머스 형제단으로 알려졌다)의 구성원인 넬슨 다비의 아이디어를 전용하기 시작했다. 다비는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에게 그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알려줬다. 예수는 천 년 '후'가 아니라 천 년 '전'에 이 땅으로 돌아오실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순간에라도 재림을 기대할 수 있는데, 재림 때 그들은 하늘로 〈들려 올라가고〉 〈남겨진〉 자들은 신적 심판을 맞이할 것이다. 다비의 해석 체계는 인간의 모든 역사를 세대들(ages 또는 dispensations)로 나눴기 때문에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 또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라고 불렸다. 다비의 전천년설(예수가 천년왕국 '전'에 돌아오실 것이다)의 결과로 복음주의자들이 사회적 병폐들을 해결할 책임에서 벗어났다."(45-6)


"1925년 7월에 테네시주 동부는 뜨거웠는데, 데이튼의 레아 카운티 법원 청사 2층보다 뜨거운 곳은 없었다. 존 토머스 스콥스가 테네시주의 버틀러 법(Butler Act)을 위반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풋볼 코치이자 시간제 과학 교사였던 스콥스는 그 법의 합헌성을 시험하기 위해 그 지역 시민 운동가들에게 고용되었다." "상징적인 면에서 스콥스 재판은 전환점이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일반 사회의 문화를 한층 더 거부했다. 이미 예수가 어느 때에라도 재림하셔서 의롭지 않은 자들에게 심판을 내리실 것이라는 교리인 전천년설을 수용한 복음주의자들은 회중, 교파, 성경 캠프, 성경 연구소, 대학, 신학교, 선교 단체, 출판사들이 맞물린 네트워크인 복음주의 하위문화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반 사회의 문화는 그것 자체가 부패했으며 타인을 부패시키지만, 복음주의 하위문화는 안전한 공간으로서 점점 세속화되는 사회의 위험으로부터 도피처를 제공한다고 주장했다."(51, 54-5)


"단기적으로는, 20세기 중엽에 복음주의자들은 대체로 정치에 무관심했다. 그들은 대체로 정치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특히 조직적인 방식으로는 확실히 참여하지 않았다. 전투적인 밥 슐러, 빌리 제임스 하기스, 칼 매킨타이어 등 목소리를 낸 소수의 복음주의자가 있었지만, 그들은 주변 인물들이었다. 이 시기의 많은 복음주의자는 그들의 전천년설 신앙과 미국 사회의 부패에 관한 확신에 근거해서 유권자 명부에 등록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정치는 사탄의 영역이며, 더욱이 이 덧없는 세상은 심판을 향해 기울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신경을 쓰겠는가? 그러나 복음주의 하위문화의 구축은 또 다른 장기적은 효과를 낳았다. 복음주의자들이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쏟았던 시간과 에너지와 돈이 종종 아무것도 없던 데서 시작하여 수십 년 뒤에 결실을 거두기 시작했다. 이런 기관들, 특히 학교와 복음주의 단체와 언론 기관은 복음주의자들이 1970년대에 공적 영역에 재진입할 토대를 제공했다."(56-7)


2부 낙태 신화와 종교적 우파의 부상


"종교적 우파가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고 가장 영속력이 있는 신화는 그들의 기원 신화다. 제리 폴웰과 패트 로버트슨 및 수없이 많은 다른 사람에 의해 자주 표명되는 이 내러티브에 따르면,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1973년 1월 22일 미국 연방 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Roe v. Wade) 사건 판결에 의해 그들의 정치적 무사안일에 대해 충격을 받았다." "이 기원 신화가 폴웰과 다른 복음주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연체동물 같은 탈정치적 무감각에서 벗어나 낙태 합법화에 대한 도덕적 분노의 싸움에 나서게 했다. 혹자는 자신을 노예제도라는 해악을 근절하려고 했던 남북전쟁 전의 복음주의 선배들과 연결시키려고 〈신 폐지론자〉라는 이름을 사용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자세히 조사해 보면 낙태가 종교적 우파 부상의 기폭제였다는 주장이 무너진다. 복음주의자들은 1970년대 말까지 낙태를 〈가톨릭의 문제〉라고 여겼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의 대부분에 복음주의자들은 대체로 낙태를 중요한 문제로 보기를 거부했다."(71-3)


"종교적 우파의 진정한 기폭제는 법원의 결정이었지만 그것은 '그린 대 코널리'(Green v. Connally) 소송에서 컬럼비아 특별구 지방 법원의 하급심이 내린 결정이었다. 1971년 6월 30일 그 법원은 인종 분리나 인종 차별에 관여한 어떤 조직도 정의상 자선 기관이 아니며, 따라서 면세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다고 결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몇십 년 동안 복음주의자들, 특히 북부의 백인 복음주의자들은 공화당 쪽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이런 편애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자들은 적어도 조직적으로는 정치적 영역 밖에 머물렀다. 폴 웨이리치는 자기가 그것을 바꿀 수 있다면 복음주의자들의 수가 많기 때문에 자기들이 엄청난 유권자 집단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자기가 보수적인 대의하에 그들을 규합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정치적 힘이 달성되면 도덕적 다수파(moral majority)에게 이 위대한 나라를 재창조할 기회가 것이다.〉 웨이리치는 그런 제휴의 정치적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믿었다."(83, 86-7)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수십 년 동안 자기들의 교육 기관이 연방의 돈을 받지 않기 때문에(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는 점은 제외하고) 정부가 자기들에게 학교를 어떻게 운영하라고 지시할 수 없다고 자랑해왔다. 그러나 그런 궤변은 세금 면제가 공적 부조의 한 형태라는 중요한 사실을 무시하는 처사다. 교회들과 비영리 기관들은 (임금에 대한 사회보장세를 제외한) 세금을 낼 필요가 없는데, 이는 납세하는 시민들이 공원과 경찰의 보호와 국방 등 모든 공적 서비스 공급에 필요한 예산의 차액을 부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웨이리치와 종교적 우파의 기타 창시자들은 그들의 정치적 행동주의의 논거를 인종 분리 방어로부터 종교 자유 방어로 세심하게 이동시키는 한편, 종교 기관들이 세금 면제를 포기하기만 하면 어떤 인종 정책이든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무시했다. 실제로 종교적 우파에 대한 가장 명백하고 상식적인 이해는 보수적인 인종 분리를 방어하기 위해 복음주의자들이 동원되었다는 것이다."(90-2)


"웨이리치와 폴웰 및 신생 종교적 우파의 지도자들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낙태를 정치적 이슈로 만들기 위해 영입이 불가능해 보였던 지지자를 확보했다. 그 인물은 바로 기독교적 가치의 쇠퇴와 그가 〈세속적 인문주의〉라고 부른 것의 전진을 경고하고 있던 신학자 프란시스 A. 쉐퍼였다. 쉐퍼는 낙태 합법화가 유아 살해와 안락사로 이어질 것이라며 열심히 경종을 울렸다. 웨이리치의 간계와 쉐퍼의 비탄 사이에서 복음주의자들은 서서히 낙태 이슈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1980년 무렵에는 지미 카터가 조지아 주지사로서 및 대통령으로서 낙태 사례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그가 낙태를 불법화하는 헌법 개정을 거부하자 그것이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에게 용서할 수 없는 죄로 여겨졌다. 그해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 로널드 레이건이 1967년 캘리포니아주 주지사 시절에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낙태법에 서명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 삼지 않고서 말이다."(109-12)


3부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1980년 11월 로널드 레이건이 선출된 뒤 종교적 우파는 열심히 자기들의 이해관계를 통합했다. 1980년 공화당 강령은 〈카터 행정부의 국세청장에 의해 시작된 독립적인 학교들에 대한 위헌적인 규제상의 보복을 중단〉하기로 서약했으며, 종교적 우파는 복음주의 학교들을 국세청으로부터 보호하려고 했다. 레이건은 도덕적 다수파(moral majority)의 창립자 중 한 명인 로버트 빌링스를 교육부의 여러 지역 교육국 중 한 곳의 국장으로 임명했다. 빌링스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인종 분리 정책을 취하는 학교들의 면세를 폐지하려는 국세청의 시도를 막았다. 낙태와 관련해서는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C. 에버레트 쿠프를 공중위생국장으로 임명하도록 압력을 행사했고, 레이건은 이에 동의했다. 레이건의 첫 번째 임기가 끝날 때쯤에는 많은 일반 대중 복음주의자가 낙태 반대 운동을 완전히 받아들였다. 혹자는 공공연하게 자기가 한 가지 이슈만 보고 투표하는 사람이라고 선언했다."(123-4)


"레이건의 1966년 주지사 선거운동(과 이후의 다른 선거운동들)은 〈법과 질서〉라는 표어를 자유롭게 사용했는데 이 어구에는 〈국가의 권리〉라는 어구와 마찬가지로 인종차별적인 함의가 있으며, 그 어구는 일반적으로 흑인들을 그들의 자리에 묶어두려는 암호 언어로 여겨진다. 로버트 L. 코트가 말한 바와 같이 〈레이건은 인종 차별을 언급할 때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레이건이 한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한다.〉" "1980년 8월 3일, 레이건은 16년 전 쿠 클럭스 클랜(Ku Klux Klan) 단원들이 보안관과 공무해서 시민권 운동가 세 명을 납치·폭행·살해한 곳인 미시시피주 필라델피아에서 대통령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20,000명의 백인 앞에서─그들 중 많은 사람이 남부 연합의 기를 흔들며 〈우리는 레이건을 원한다〉라고 외쳐댔다─조지 C. 월리스와 수없이 많은 다른 분리주의자의 반항적인 슬로건인 〈나는 국가의 권리를 믿습니다〉를 소환했다."(129-31)


"종교적 우파는 결코 성경적 가치들을 진척시키기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현대의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복음주의 행동주의는 인종 분리의 영속화에 뿌리를 둔 운동인데, 그 운동이 1970년대 말에 시작된 보수적 운동이 극우 변두리와 제휴하여 복음주의 자체의 가장 좋은 전통들과 일치하지 않는 돌연변이 형태를 낳았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은 소외된 사람들을 돌봄으로써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고 했던 선조들의 개혁에 대한 열정을 되찾는 대신, 명백히 복음주의 전통의 바깥에 위치한 사람, 복음주의 사회개혁의 오래되고 고귀한 전통을 잘 알지 못하거나 경멸하는 사람과 동맹을 맺었다. 이 묘사는 정치적 우파의 지도자들에게도 적용된다. 그들이 자기들의 전통을 잘 알지 못했다면 그들은 가치 있는 선배들의 모범을 통해 인도받을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들이 지지한 정치인들과 정책들에 비춰볼 때, 종교적 우파 지도자들이 그 전통을 경멸했을 가능성이 좀 더 높다."(143-4)


"나는 복음주의자들이 일단 낙태 신화와 종교적 우파에 내장된 인종차별주의를 인정하게 되면 그들이 자기들의 정치적 의제의 다른 측면들, 즉 종교적 우파와 공화당 극우파의 융합을 통해 과도하게 좌우된 의제를 재조사할 수도 있으리라고 희망한다. 배고픈 자를 먹이고 외인을 환영하라는 예수의 명령을 새롭게 읽거나 19세기의 복음주의 사회개혁을 이해한다면 복음주의자들이 이민과 공공교육에 관한 견해, 교도소 개혁과 여성의 권리에 대한 태도, 부자 감세에 대한 지지를 재고할지도 모른다. 결국 예수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이들 중 가장 작은 자〉를 돌보라고 명령하셨는데, 이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복음주의자들의 정치적 에너지의 방향을 재설정하고, 한 가지 이슈를 토대로 투표하는 행태를 재고하고 정치적 이슈들을 좀 더 넓고 종합적으로 평가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재고는 또한 유색 인종 복음주의자들과의 화해를 위한 문을 제공할지도 모른다. 회개는 영혼에 유익하다."(153-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 대량학살자의 밝혀지지 않은 삶
베티나 슈탕네트 지음, 이동기.이재규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론


"자신이 〈아돌프 히틀러가 만든 절멸 작동기계의 작은 톱니바퀴 중 하나일 뿐〉이라고 한 아이히만의 진술은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옛 신문을 읽어보니 아이히만의 말도, 연구서들의 서술도 뭔가 사실과는 다른 것 같다는 의심이 들었다." "사실 그는 재판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이미 대부분의 나치보다 더 많은 별칭─칼리굴라, 유대인의 차르, 민족 학살의 관리자, 이단 대심문관, 유대인 학살 기술자, 최종해결사, 관료, 대량학살자─을 가지고 있었다. 그 별칭은 모두 1939년부터 1960년 사이에 아이히만을 일컫던 것이었다. 그것은 은밀하지 않았다. 신문이나 유인물, 책에 다 나와 있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해 언제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를 파악하고자 했다면 누구나 그것을 접할 수 있었다. 당시 정확히 한목소리로 정반대 사실을 주장한 집단이 있었다. 그들은 아이히만의 옛 동료와 전후 잔존 나치들이었다. 그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다로 자신들이 아는 바를 대수롭지 않은 일로 만들고자 했다."(24-5)


"이제껏 논의에서 빠진 관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여론이다. 장 자크 루소의 통찰에 따르면, 월권과 그로 인한 불의에서는 늘 두 가지 인물 유형이 존재한다. 즉 무언가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그대로 따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아돌프 아이히만의 공적 영향력을 살펴보면, 그 두 부류 인간의 기괴한 협력 과정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악명 높은 '유대인 담당관' 시절의 아이히만처럼 우리가 그 협력 과정을 제대로 통찰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아이히만의 역사를 그의 범죄 연대기나 행위의 발전사로 서술하지 않고 그의 영향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서술한다. 누가 언제 아이히만을 알았고, 사람들은 그에 대해 언제 어떤 생각을 했으며, 사람들이 자신을 알고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는 사실에 그는 어떻게 대응했는가? 얼마나 많은 자기 연출이 아이히만 현상에 깔려 있는가? 그의 역할극은 그의 학살 이력과 우리의 역사상에 어떤 의미를 지녔는가?"(26-7)


1장 “제 이름은 상징이 됐죠”


"나치스 첩보기관인 보안국 대원 시절 아이히만은 유대인 행사를 찾아다니며 유대인들과 교류했다. 유대인들은 아이히만을 호기심 많고 성격 좋은 사람으로 여겼다. 아이히만은 (상관이 두 번이나 말렸는데도) 선생을 찾아 히브리어를 배우려 했고 자기 동료들이 그랬던 것처럼 유대 문헌 연구에 열중했으며 600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과 유대인 신문을 탐독했다. 아이히만은 국제관계를 살폈고 심지어 한 유대인으로부터는 팔레스타인을 방문해달라고 초대받기도 했다. 나중에 아이히만은 그것을 〈3년 동안의 학습〉이라고 불렀다. 그런 방식의 삶에 속아 아이히만을 정치적으로는 다소 천박하지만 학문에는 관심이 많은 문예 애호가로 오인하기 쉽다. 특히 카페에서 잡담하고 글을 쓰며 발표하거나 동료들과 전문 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와중에도 유대인을 고발하기 위해 꼼꼼히 일하면서 반유대주의 선전 작업을 수행하고 게슈타포와 함께 체포하며 조사한 일들이 사료에 드러나지 않았다면 그러기 쉽다."(48)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최초의 인물이 아니었다. 상징과 이상의 활용은 나치즘의 성공 요인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그의 명성은 피해자들이 그를 알게 됨으로써 높아져갔다. 〈언론을 통해 아이히만이란 이름은 상징이〉 되었다. 〈어쨌든 유대인이란 말은 아이히만이란 이름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치의 권력관은 개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것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 권력관의 작동 방식은 지도부에만 영향을 미친 게 아니었다. 아이히만과 동료들도 권력을 행사하는 데 총통식의 지도자가 얼마나 유용한지를 금세 알아차렸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뒤로 물러서지 않고 자기 연출을 주저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였다. 유대인 문제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 간판 인물이 필요했고 〈아이히만〉은 바로 거기에 딱 맞았다. 나중에 아이히만은 자신이 상징 인물이 된 것을 우연으로 치장하려고 했다. 아이히만의 역할을 다룬 책이나 논문들도 더러 그런 견해를 따른다."(79-80)


"아이히만이 이민과 재정 확보 문제를 놓고 아직 유대인과 협상하고 국제 단체의 협력을 필요로 했을 때는 협박이 유용했다. 하지만 목표가 이민이 아니라 살해라면 더 이상 협상할 이유가 없었다. 협상용 대화를 하는 데 꽤 도움이 되었던 위협 이미지가 살해 의도를 감추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이제는 협박하기보다는 안정시키고 달래고 분위기를 바꾸며 진정시켜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대량 이송을 수행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이송 주체들은 이송 대상, 즉 우선 다른 곳으로 이송된 뒤 그곳에서 가능한 한 눈에 띄지 않게 살해될 그 사람들로부터 우선은 아주 조금이나마 신뢰를 얻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품고) 열차에 올라타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측 협상 파트너들을 양보와 협력으로 이끄는 데 항상 성공했다. 그 이유는 주로 유대인 협상가들이 아이히만과 〈협상〉하면 결국에는 더 나쁜 상황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기 때문이다."(88-9)


"그의 부하들이 아이히만을 〈그에 걸맞는 존경〉으로 대우했기 때문에 아이히만은 자신의 지위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었다. 영민한 관찰자인 구스타프 그륀트겐스는 그 기제를 간명히 설명했다. 〈왕의 역할을 하는 이들은 왕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다.〉 권력자를 무대에서 보여주려 한다고 해서 무조건 왕의 역할을 탁월하게 수행하는 배우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신하 역을 잘하는 배우들이 왕을 향한 그들의 행동을 통해 무대의 그림자를 왕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은 권력자 혼자만이 아니라 집단적 역동성이 만들어내는 현상이다. 집단적 역동성이 비로소 권력자를 만든다. 어떤 식으로든 그 현상을 알아본 사람은 효과를 높이기 위해 희생자들의 무력한 행동을 이용할 수도 있다. 아이히만의 부하들은 그 역할을 수행하는 데 자질을 갖췄고 아이히만도 자기 역할에 잘 맞는 사람이었다. 한층 효과적이었던 것은 아이히만이 권력자들 사이에서 더 센 권력을 가진 것처럼 연출했다는 사실이다."(102-3)


"나치 시기 막바지에 아이히만은 앞서 자신이 만든 이미지로 인해 도리어 위험해지는 일을 겪었다. 별로 유명하지 않던 사람이라면 전후 자기 명성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전후에 아이히만을 잊거나 빠뜨릴 가능성은 전무했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먼저, 그의 이름은 너무 잘 알려져 있었다 그가 유대인 정책의 상징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두 번째로, 그런 명성으로 인해 자기 죄로부터 벗어나려는 모든 사람에게 아이히만은 완벽한 투사 대상이 되었다. 아이히만은 항상 다른 이를 밀치고 앞으로 나갔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이제 누구든 아이히만 뒤에 숨기가 편했다." "크루메이는 진실이 알려지기를 원하며 자신이 끔찍한 사건을 밝혀줄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쿠르트 베커는 편을 바꿈으로써 살아남았다. 그들은 홀로코스트에 공개적으로 거리를 둘 기회라면 뭐든 찾아 나섰으며 그런 연유로 아이히만의 역할이 특별했음을 부각시켰다. 이는 전후 자신을 방어하는 데 매우 유용했다."(112, 116-7)


"그 잔악한 허풍쟁이는 자신이 총통 사후에 살아남기 위해 실제로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베를린의 어느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아이히만은 오래전부터 새 이름이 적힌 새 신분증들을 안전한 장소에 마련해두었다. 게다가 그는 디터 비슬리체니와 빌헬름 회틀에게 가족과 연락이 끊겼다고 거짓말했으며 도주 계획에 대해서도 가짜 정보를 흘렸다. 두 사람은 그 거짓말을 여기저기 퍼뜨렸다. 아이히만은 정말로 그렇게 조심해야 했다. 그의 부하들은 오래전부터 아이히만을 희생시켜 자신들은 피해를 보지 않은 채 새로운 시대로 진입했으면 하는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심지어 상관이기도 하고 오스트리아 시절 그를 당으로 인도한 오랜 절친 에른스트 칼텐부르너마저 체포되기 전에 그 달갑잖은 아이히만과의 관계를 끊으려고 갖은 애를 썼다. 마지막에는 아이히만의 오랜 부관들이 그에게 자신들을 떠나라고 요청했다. 〈수배 중인 전범〉과 가까이 하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다."(124)


"지하에서 활동하는 모임이 있고 1945년 이후 친위대 대원이라면 누구나 자동으로 그 회원이 될 수 있으며 그 조직이 흔들림 없이 존속할 것이라는 생각은 분명 공포와 희망의 판타지가 낳은 결과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분명한 것은 이데올로기에 투철한 추종자들은 이데올로기 발현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강화 요인인 국가가 무너졌다고 해서 이데올로기를 버리거나 동료들과의 결속을 버리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옛 친위대 대원들로 구성된 대규모 지하조직이 따로 존재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하에서, 특히 비합법적 상황에서 협력은 추천과 내밀한 관계를 통해 이루어졌다." "새로운 고향에서 아이히만의 멋진 출발을 약속해주는 것도 다름 아닌 옛 이름의 명성이었다. 친구들은 바로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그를 도우려 했다. 아이히만에게 리카르도 클레멘트는 처음부터 그저 신분증상의 이름에 불과했다. 아르헨티나로 도항하면서 그는 자유민이 아니라 이름도 되찾는다."(176, 181)


2장 막간극


"아르헨티나는 일시적으로나마 아이히만에게 안전한 곳이었다. 우선 은신처를 영리하게 잘 골라서 상당 기간 발각될 위험이 없었다. 게다가 아돌프 아이히만이 어둠 속에서 장기간 지낼 수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권력을 한창 과시할 때 그를 만난 동료와 피해자들은 그를 민첩하고 오만하며 야심 많은 인물로 기억했다." "사람들은 아이히만이 지하에서 사는 데 만족할 가능성은 없다고 봤다. 지배 인종의 일원으로 인간의 경계를 넘어버린 사람이 어떻게 작은 장소에서 무명의 존재로 사는 데 만족할 수 있을까? 아돌프 아이히만이란 사람이 기괴한 이상을 위해 싸우는 일을 정말로 중단할 수 있을까? 아이히만 추적이 초기에 엉뚱한 길로 빠졌지만 추적자들은 바로 그런 의문을 계속 갖고 있었다. 1945년 이후 아이히만 스스로도 그 질문이 가장 곤혹스러웠다. 1961년 이스라엘의 감옥에서 자문했을 때 그의 대답은 명료했다. 그는 〈익명으로 살아야 했기에 정신적으로 힘들었〉다."(195-6)


3장 아르헨티나의 아이히만


"오늘날 우리가 1950년대 초 사람들이 나치 범죄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었으며 무엇을 알고자 했는지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사실상 그들은 당시 어떤 것도 알지 못했다. 재건과 갱신의 와중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유대인 절멸에 대해 그래도 관심이 있었다면 이와 관련된 거의 모든 정보는 신문 보도, 다시 말해 전범 재판 보도를 통한 것이었다. 전쟁에 패한 국가에서 열리는 그 재판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승자 재판' '선전-증언' '흑색선전' '집단 책임' '복수 심판' 등의 용어가 퍼졌고 '600만 명'이라는 숫자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워 조금이라도 이해가 되도록 하려면 증거나 설명이 필요했다. 하지만 1953년에는 설명과 증거가 전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가장 손쉬운 대응은 불신과 억압이었다. 심지어 공범들조차 〈사실 정확한 것은 아무도 몰라요〉라고 말하면서 안도했다. 그런 상황에서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손쉽게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255-6)


"그런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한 인물인 아돌프 아이히만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 과거사를 부인하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아이히만은 그들이 정해놓은 진실, 즉 상황은 뉘른베르크에서 나온 이야기와는 전혀 달랐고 '유대인들이' 그런 규모의 대량학살을 지어냈다고만 말해야 했다. 아이히만의 진술은 독일인들에게 죄의 부담을 덜어내는 것이어야 했다." "당시 정말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이따금 그런 사람들이 있다. 여러 문헌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진실을 뒤집는 그런 억지 주장에서 주범 아돌프 아이히만은 그들이 내세우는 진실을 보증할 주요 증인으로 여겨졌다. 1950년대에 그 편집증적인 구원 희망은 광범위하게 퍼졌다. 그것은 아이히만 체포 직후에 우파 언론의 반응에서만 분명히 확인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히만의 증언이 유쾌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며 이스라엘에 경고하는 목소리는 도처에서 들렸다."(257-9)


"1955년, 독일에서든 망명지에서든 나치 몽상가들은 그해 몇 번이나 나쁜 소식을 접했다. 오스트리아는 국가 조약을 체결했다. 서독에서는 점령이 끝났고, 연방군이 창설되었다. 서독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고 할슈타인 원칙으로 외국에서 독일의 이익을 단독으로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여전히 나치 신념을 지닌 사람들에게 그것은 모든 대독일주의 이익의 거부 그리고 전승국, 특히 경멸 대상국인 미국에 귀속되는 것을 의미했다." "1955년 중반 쾰른에는 이스라엘 대사관의 전신인 이스라엘 공관이 생겼다. 그런데도 아르헨티나의 독일 애국 동지들은 여전히 대사면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제국으로서의 의지〉나 〈영원한 독일인의 불굴의 정신〉 같은 것은 볼 수 없었다. 독일로 돌아가 권력을 잡을 가능성은 전보다 더 희박해졌다. 향후 수년 동안 아르헨티나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독일에 잔존한 소수의 용감한 동지에게 일종의 초월적인 인종 승리에 대해 희망을 품도록 하는 것뿐이었다."(307-8)


# 할슈타인 원칙 : 대동독 강경책으로 동독과 외교관계를 맺으면 서독은 그 국가와 외교관계를 맺지 않겠다고 한 원칙


"부에노스아이레스인들은 유대인 학살에 관한 질문들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사는지를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상황을 아주 잘 알았기에 공적 영향이 매우 클 것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세계관 투쟁 다음 단계에서 필요한 일이었다. 그 증인, 즉 아이히만은 유대인의 음모를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기대되었다. 힘러의 참모장 경력자나 수용소 '의사' 경력의 요제프 멩겔레같이 소심한 사람들과는 달리 아이히만은 그런 기대에 조응했다. 아이히만이 보기에 대화는 자신에게 두 가지 이점이 있었다. 먼저, 뒤러 서클을 통해 아이히만은 혼자서는 확보할 수 없었던 신간들을 얻을 수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독일 책을 구입하는 것은 너무 비쌌다. 게다가 언론 매체 경험이 풍부한 동료들을 통해 아이히만은 급히 다시 갈구했던 것, 즉 자신의 역사적 의미를 만들고자 했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식들이 아버지의 아들임을 편하고 뿌듯하게 공개적으로 밝힐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319)


4장 이른바 사선 인터뷰


"아르헨티나에서, 말을 하려는 아이히만의 욕구는 그의 경계심보다 언제나 더 컸다. 이미 봤듯이, 그는 믿을 만하다고 여긴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신을 결코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사교 모임이나 퇴근 후 술집에서의 우연한 담소는 에버하르트 프리치와 빌럼 사선이 계획하고 있던 것, 즉 역사서와 시사 문제들에 대한 정연한 이야기와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그러므로 실행 계획을 세우고 그 프로젝트에 누가 더 참여할 수 있을지 고려하는─금전적인 이유로─진지한 협의가 이미 이루어져 있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훗날 빌럼 사선, 에버하르트 프리치, 아돌프 아이히만 모두 각자 확인해준 바에 따르면, 그들은 이 시점에 서로 계약을 맺어, 그 책의 판매 수익을 똑같이 나누어 갖기로 합의했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준 것이 〈유혈의 꿈〉이었단 할지라도, 그들 모두에게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재빨리 한밑천을 챙기는 꿈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삶에는 언제나 〈용병〉의 삶 같은 면이 있었다."(324-5)


"아이히만은 사람들 앞에 극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좋아했고, (자신이 대량학살 집행자로써 쓴 역사를 넘어) 후세에 뭔가를 남겨주고 싶어했는데, 이러한 점은 단지 망명에 따른 반작용이 아니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세 가지 상황이 그의 의욕을 더욱 북돋웠다. 첫째, 1955년에 유대인 절멸에 대한 첫 책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히만은 그 책들을 수많은 신문 기사와 마찬가지로 〈적의 문헌〉이자 도발로 여겼다. 둘째, 제3제국 몰락 이후 이념적 투사들에게는 글쓰기와 선전이라는 단 하나의 무기밖에 남지 않았다. 셋째, 그는 펜을 들고 실제로 이 싸움에 임하고 있는 사람들과 이때 처음 어울리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네 마음대로 이용가능한 출판사를 갖고 있었고, 또한 가장 중요한 점인데, 그들은 아이히만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관심 있어 보였다. 이 사람들이 바로 빌럼 사선과 에버하르트 프리치였다. 그의 시각에서는 극우 출판계에서 『길』이 맡고 있는 역할이 굉장해 보였을 것이다."(339)


"아이히만 같은 사람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 글을 쓴다. 역사 연구를 방해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몰아가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이다. 이런 글들이 확인시켜주는 신뢰할 만한 것은 단 한 가지로, 글이라는 것에는 그것이 진실을 말하든 거짓을 말하든 사고 작용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자기소개와 역사 왜곡을 해석하면서 드러나는 새로운 역사적 사실은 그의 생각 그 자체다." "아이히만은 이 책을 이용해 독일에서 자신의 이름뿐 아니라 자기 삶도 되찾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1950년대 초 서독의 형사 소추 실태를 살펴본다면 아이히만의 계획이 전혀 가망 없는 일이 아니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사형은 한 건도 없었고, 대체로 나치 범죄자들에 대한 기소는 비교적 관대한 처벌로 끝났다. 아이히만은 아무 문제 없이 독일에서 계속 잘 살고 있는 수많은 옛 동료를 알고 있었다. 전범들은 낮은 형량을 받으리라 기대할 수 있었고, 심지어 주요 나치 범죄자들에게도 공소시효가 만료될 것이었다."(343-4)


"아이히만의 〈내면적 도덕〉의 척도가 되는 것은 어떤 정의 관념이나 보편적 도덕 범주가 아니었고, 심지어 자기 성찰 같은 것도 아니었다. 아이히만이 보기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모든 평결이 잘못된 정치적 입장─〈조국의 윤리〉에서 벗어난, 결과적으로 독일 민족의 관점에서 벗어난 척도─에 기초하리라는 것은 너무나 뻔했다. 처음 읽으면 보편적 정의의 소환이나 모든 사람이 어떤 공통의 인간 법률에 따라 심판받아야 한다는 호소처럼 들리는 것이 면밀히 들여다보면 사실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평등권〉임이 드러난다. 아이히만은 자신도 인간이니 자신에게도 어떤 공통의 인간 법률이 적용되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의 요구는 어떤 민족사회주의적 도그마에 대한 인정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즉 모든 사람이, 무엇보다 독일 민족이 어떻게든 스스로를 변호하는 데 준거로 삼을 수 있는 것으로서 그 도그마를 인정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를 변호하는 것을 멈춘 적이 없었다."(349)


"아이히만은 〈이 총력전에서의 승리 아니면 독일 민족의 몰락〉임을 여전히 믿고 있었다. 승리가 선행되지 않은 〈평화 추구〉란 있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적〉 또한 유죄 인정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유일한 보편적 요소는 〈유죄〉이지 〈정의〉가 아니다. 전시의 모든 행동이 유죄로 분류되니 유죄임은 마찬가지다. 전쟁 범죄와 반인륜 범죄의 실제 가해자들은 집단 범죄 이론을 늘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것은 그들이 광범위한 유죄 군중 속으로 사라지게 해주었고, 나머지 사람들에게 그들이 공범이었다고 설득하게 해주었다. 보편적 유죄 주장은 또한 아이히만의 회피 구실이 되었다. 우선, 다른 모든 사람이 바로 아이히만과 똑같이 유죄라고 인정해야 했고, 그래야만 그도 유죄를 인정할 것이다. 모두가 유죄라면 아무도 유죄가 아닌 셈이며, 자백에 대해 법적인 결과가, 혹은 사실상 도덕적인 결과가 따르지 않을 수 있다. 이런 회피의 곡예는 비난에 의한 정당화라고 불릴 만하다. 이것이 규칙을 만드는 지배자 민족이었다."(350-1)


"아이히만의 말에 따르면 1944년 말에 한 통계학자가 힘러와 히틀러를 위해 어떤 수치들을 만들었고, 그래서 그는 그 수치들을 이용할 수 있었다. 〈특히 당시 두 차례 '총통 보고서' 초안을 수정해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훗날 그는 코르헤어 보고서로 악명 높았던 이 문서와의 관련성을 줄곧 부정했다. 하지만 진짜 거짓말은 세부에 숨어 있다. 이 통계 수치들은 사실 1943년 3월에 잡힌 것인데, 그는 이 통계학자의 보고서 날짜를 1944년 말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이런 식으로 날짜를 바꾸는 데 능숙했고, 자신을 좀 더 좋은 모습으로 그리기 위해 이런 기법을 자주 사용했다. 만약 누군가 그의 숫자 놀음을 눈치채면 그는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혼동할 수도 있다고 믿어주는 사람들의 마음에 의지했다. 1943년 초의 수치를 최종 수치로 제시함으로써 아이히만은 2년에 가까운 시간과 100만 명 이상의 살인을 지워버린 셈이다. 그것도, 앞선 수치가 애당초 맞는 것이었다는 전제하에 말이다."(358-9)


"아이히만은 자칭 〈제3제국〉의 지도자가 선언한 것처럼 정연명령이 사실상 〈자기 본질에 따라 살고 자기 인종의 가치를 수호하라〉라는 의미라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칸트의 가르침도 다른 어떤 철학도 인종생물학적 투쟁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분명히 깨달았다. 그에게 칸트는 절멸 정책을 시행하려 하는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인 〈이른바〉 도덕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칸트의 사상은 〈민족적인〉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아이히만의 일관된 민족사회주의적 태도의 증거이지만, 또한 절대적 권력에 대한 한결같은 욕망의 증거이기도 하다. 근본주의적 사상의 힘은 상급자가 내린 명령의 힘보다 훨씬 크다. 아이히만이 전체주의 체제에 그토록 수용적이었던 것은 그가 이미 전체주의 사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을 하고 하고 싶어했지만, 무엇보다 올바른 일을 했다는 존중을 받고 싶어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전향시키고 싶어했다."(382-3)


"이스라엘에서 아이히만은 끊임없이 글을 썼다. 그는 자기변호를 위해 상상 가능한 온갖 주제에 대한 광범위한 문서들을 생산했고, 언론을 위한 대중적인 글들도 썼다. 사람들이 그를 교수대로 데려가려고 왔을 때도 그는 여전히 마지막 문장들을 쓰고 있었다. 아이히만을 글을 쓴 변명자로 보는 것은 분명 옳지만, 이 홍수 같은 말을 읽는 사람은 다른 동기를 간과할 수 없다. 아이히만은 논쟁 놀이, 말의 힘, 그리고 자신의 조작 능력을 즐기고 있었다. 아이히만의 글에는 영향을 미치려는 욕구, 즉 독자를 제 뜻대로 이끌어 자신의 사고 구조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들려는 욕구가 항상 나타나 있다. 문명사회의 모든 규칙에서 벗어난 아이히만의 제안, 의견, 계획이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시기가 한때 있었다. 반유대인 정책이 절멸이라는 아이디어를 향해 나아가는 동안 그의 생각은 반유대인 정책의 개발에 영향을 미쳤다. 글로 쓰인 말의 힘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아이히만이었다."(398-9)


"1957년 가을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전후의 나치들에게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콘라트 아데나워가 서독 선거에서 과반 득표로 승리한 것이다. 독일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극우 운동은 이 선거의 승리를 막고 전후의 독일 정치에 전환점을 가져오는 것을 꿈꿨다. 그것은 1950년대에도 이미 현실과는 크게 동떨어진 꿈이었다. 이는 수포로 돌아갔으며, 그 길을 따라 다시금 독일의 상석으로 돌아간다는 전망 또한 좌절되었다. 아데나워가 깨달았듯이, 독일 국민은 더 이상 실험을 갈망하지 않았다. 이제 돌아갈 길이 없다는 것을 모두가 이해했고,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새로운 세계에 적응해야 할 터였다." "아르헨티나에서도 세상은 꽤나 달라져 있었다. 1957년에 이 나라는 앞선 10년간 페론 통치하에 누렸던 활기찬 호황기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 〈운동〉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고, 과거에 갇혀 있을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면 새로운 세계와 그 세계의 가능성에 보조를 맞추기 시작해야 했다."(524-5)


5장 안전하다는 착각


"뒤러 프로젝트가 실패하면서 아이히만과 사선이 계획했던 출판도 무산되었고, 이는 두 사람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다. 독일-아르헨티나 커뮤니티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나치 위계에서 하위에 속했던 〈덜 위태로운〉 망명자 다수는 자신이 자란 곳으로 돌아갈 필요를 느껴 유럽으로 돌아갔다. 서독과 오스트리아의 공소시효와 기타 회생법은 사형죄나 전쟁 범죄를 (또는 적어도 누군가 증명하려 애쓰고 있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만 아니라면 돌아와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에버하르트 프리치조차 1958년 3월 초 출판사를 포함해 모든 것을 싹 정리하고 잘츠부르크 근처의 집으로 이사했다. 아르헨티나의 독일 민족주의 공동체는 중요한 준거를 잃었고, 사선은 직장을 잃었다." "사선은 여전히 아이히만을 가끔 만났지만, 이제 더 흥미로운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 땅에 남겨진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541-3)


"아르헨티나에서 아이히만을 만난 적이 있거나 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그가 재판을 받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그들은 아이히만의 생각을 알고 있었고, 더 중요한 것은, 아이히만이 한 말을 들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그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나치 네트워크, 탈출 및 원조 조직, 통신 경로에 대해 알고 있기에 사람들의 삶은 매우 불편해질 수 있었고, 아이히만이 독일 당국에 그것들에 대해 발설할 경우 미칠 여파는 생각도 하기 싫은 것이었다." "아이히만의 재판 회부 가능성을 걱정하는 것은 아르헨티나의 망명자들만이 아니었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있는 많은 사람에게 심각한 문제가 야기될 것이었다. 너무나 많은 옛 나치가 서로의 개인사를 무해한 것처럼 보이도록 다듬어 새로운 경력을 만들었다. 아이히만이 등장하면 그의 옛 동료들이 세심하게 쌓아 올린 외관은 무너질 위험에 처할 것이다. 당시 위기에 처한 것은 그들의 깨끗한 경력, 높은 지위, 높은 급여였다."(545-7)


"1960년 5월 23일, 아이히만의 재등장 소식이 빠르게 퍼졌고, 흥분된 움직임이 일어났다. 아이히만 납치는 1945년 5월 패배 이후의 그 어떤 사건보다 친위대 사람들과 기타 대량학살 가해자들의 삶을 더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그것은 그들 서로 간의 상호작용 방식을 영원히 바꾸어놓았다. 편안한 망명생활과 옛 동료들 간의 자연스러운 신뢰는 갑자기 끝났다. 유대인 절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사람들의 경우에는 새로 알게 된 사실로 인해 향수의 감정을 떨쳐버리게 되었고, 또 다른 사람들은 다시 한번 갑자기 도망자가 되었다. 그들은 정상 상태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그들은 (주의를 환기한) 내가 옳았음을 안다.〉 동요된 요제프 멩겔레는 일기에 이렇게 썼고, 1960년 10월에 더 멀리 브라질로 이주했다. 전쟁이 끝난 지 15년 후, 해외 거주자들은 자신들이 주의를 끌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갑자기 상기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전략을 짤 시간이 조금밖에 없었다."(591, 599)


"이스라엘에서의 최종 진술에서 아이히만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대리인으로서 재판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햇다. 그 스스로가 세상 어떤 처벌도 충분치 않을 정도의 죄를 진 만큼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이상적인 대리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독일 민족은 아이히만 혼자서 600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할 수 있어서 무척 기뻤다. 〈독일 청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공개적으로 목매달겠다는 그의 제안은 기괴했지만, 그 재판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드러냈다. 이스라엘은 카타르시스를, 집단적 죄에 대한 집단적 반성을 바라고 있었고, 심지어 아이히만은 자신의 왜곡된 순교가 자신의 비참한 상황에 비애와 장렬함을 부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하지만 가해자, 협력자, 자발적 동조자들은 그저 자신들의 희생양을 없애고 싶을 뿐이었다. 아이히만은 가족에게 보낸 작별 편지에서 〈역사가 평가를 만들어내도록 맡겨두자〉라고 썼다."(604-5)


6장 역할 변경


"아이히만이 예상치 못하게 자신의 대적에 의해 투옥되었을 때, 그는 유포되고 있는 자신의 이미지들 중 어떤 것이 자기변호에 가장 유용할지를 이미 정해놓은 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아르헨티나에서 생산해낸, 유죄를 뒷받침하는 글들 없이, 신중한 관료의 이미지를 내놓았다. 이 역할을 통해 그는 자신을 교수대에서 구해주리라고 기대한 두 가지를 하나로 합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 학살에 대한 독점적 지식과 자신의 무죄였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통찰력을 내세울 여지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그 유명한 〈유대인 문제〉 전문가이자 절멸 프로젝트의 부처 간 조정자, 상관들과 함께 난롯가에서 코냑을 마시며 그 일의 실행을 축하했던 남자가, 스스로는 아무 힘도 없는 무력한 회의록 작성자로 변신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책략을 매우 자랑스러워했고, 관찰력 있는 심문관은 이 피의자가 전략적 계책을 부릴 때 특히 활기를 띤다는 것을 알아챘다."(610-1)


"권력을 갖고 있던 시절에 아이히만은, 처한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으려는 희생자들의 희망을 가지고 기만적인 게임을 벌여, 저항도 없이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아르헨티나에서 그는 옛 동지들의 존경과 도움을 얻기 위해서, 민족사회주의가 절멸의 명령과는 별개일 수 있다는 그들의 기대를 확인해주었다. 이스라엘에서 그는 자신이 〈유대인의 본능〉이라고 여기는 것, 즉 이해하고 앎을 얻으려는 유대인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려 노력했다. 사람들이 목숨을 걱정하고 있었든, 아니면 그가 악의 이론을 사실로 확인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든 간에, 그는 거울처럼 사람들의 두려움과 기대를 반영했다. 그 모든 거울 이미지 뒤에는 아이히만의 권력의지와 사람들의 생각을 통제하려는 그의 욕망이 근면함으로 위장된 채 놓여 있었다. 단 한 가지가 줄곧 아이히만을 부주의하게 만들고 따라서 취약하게 만들었는데, 그것은 바로 〈개인의 익명성〉을 떨쳐내야 했던 그의 확연한 인정 욕구였다."(616)


7장 막후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고독서정 - 서양 철학자 강유원의 한시 읽기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곁에 두고 문득 들여다본 한시 /
어차피 머무르지 않는 한세월 /
덜어내고 보니 사무친 한시름 /
한데 엉기어 다행인 듯 한적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나치 마인드 - 역사가 주는 12가지 경고
로런스 리스 지음, 조행복 옮김 / 책과함께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들어가며 


1. 음모론 퍼뜨리기 


"1차대전이 나치의 정신뿐만 아니라 독일 전체의 정신에도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 한 가지 이유는 그 전쟁으로 엄청난 감정의 동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1918년의 최종적인 굴욕은 꼭 4년 전 전쟁이 선포되었을 때 많은 독일인이 기대에 부풀어 즐거워했던 만큼 더욱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나타난 음모론자들은 그 초기의 도취가 없었다면 그만큼의 힘을 지닐 수 없었을 것이다." "사회심리학자인 캐런 더글러스 교수는 대다수 음모론자가 〈비난할 자를 찾아〉 나서면서 〈막후에서 조종하는 자들이 있다〉는 관념이 그들의 〈무기력함과 환멸감〉을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연구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때때로 자기 집단을 보호하거나 그 가치를 드높이는 방법으로 다른 집단에 관한 음모론을 믿는다. 특히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해 나르시시즘에 빠진 자들은 다른 집단에 관한 음모론을 더 쉽게 믿는 경향이 있다.〉 독일군 최고사령부는 자신들이 세계 최고의 군인이라고 생각했다."(25, 37)


"독일군 병사들은 비록 패배했음에도 집으로 돌아왔을 때 굴욕을 당한 군대의 일원이라는 취급을 받지 않았다. 새로운 총리 에베르트가 왜 독일군이 패배하지 않았다고 거짓을 설파했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혁명이 터질 위험성이 있었고, 진실의 왜곡이 병사들의 충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 방침은 루트비히 베크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더 큰 해로운 거짓말에 부채질을 했다. 전선의 군대가 독일 내부의 후방에 있는 적들에 의해 〈등에 칼을 맞았다〉는 거짓말이다. 이것이 이듬해 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 중 하나인 육군 원수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이용한 음모론이다. 그는 그 전쟁의 재앙 같은 경과에 책임을 져야 했지만 비난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군대는 정성을 들여 힌덴부르크를 '타넨베르크의 영웅'으로, 1914년 동부전선에서 그가 지휘해 거둔 승리의 영웅으로 선전했다. 그 이후의 패배들은 이 초기의 승리와 나란히 언급되지 않았다."948-9)


2. ‘그들’과 ‘우리’를 구분하기 


"폴크스게마인샤프트Volksgemeinschaft를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국민의(또는 민족의) 공동체'가 되겠지만, 이는 그 낱말의 복잡한 의미를 크게 무시한다. 폴크Volk라는 낱말은 단지 '국민'이 아니라 서로 공유한 일련의 민족적·문화적 신념 전체를 암시한다. 폴크스게마인샤프트는 훨씬 더 복잡하다. 그것은 모든 독일인이 특정한 성격의 공동체로 결집해야 하며 그 공동체는 개개인보다 더 중요해야 한다는 점을 의미했다. 나치는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종족적 순수함에 집중함으로써 그 관념에 더 강렬하고 종족주의적인 방식으로 초점을 맞추었다." "폴크스게마인샤프트 관념이 사람들을 '그들과 우리'라는 범주로 나누는 나치 분류법의 심오한 표현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이 종족의 관점에서 '순수한' 독일인으로 판정한 사람만이 폴크스게마인샤프트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개인이 이 무리에 합류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피'가 곧 운명이라는 것이 나치의 견해였다."(76-7)


"1923년 5월 독일 북부에서 술 취한 남자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훗날 악명을 떨치는 나치 마르틴 보어만과 루돌프 회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각별히 뜻깊은 범죄다. 마르틴 보어만은 2차대전 중에 히틀러의 유력한 조언자였으며, 루돌프 회스는 1940년에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설립에 힘을 보태고 그 사령관으로서 역사상 최대 규모의 대량학살 현장을 감독했다." "그들이 유죄 선고를 받은 범죄는 문명국의 법률 제도에서는 공격 행위가 되겠지만, 회스와 보어만은 이것이 부패한 체제에 맞서 싸우는 혁명가들의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법'만 인정했으며 그로써 용서를 받았다고 느꼈다. 중요한 것은 회스가 폭력에 길들여졌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그는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에게 자주 빠지기도 했다. 〈우리를 분열시키는 자는 누구든 재앙을 떠안으리라!〉 이는 뿌리 깊은 '그들과 우리'라는 사고방식이었다. 바로 히틀러가 장려한 사고방식이다."(94-5, 98-9)


3. 영웅으로서 인도하기 


"1924년 봄 뮌헨의 법정에서 히틀러는 마침내 오랫동안 되고 싶었던 영웅의 이미지를 투사할 수 있었다. 히틀러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원형이 되는 중이었다. 지도력의 심리학에 관한 전문가인 알렉스 해슬람은 지도력이 〈위대한 나〉에 관한 문제라는 것은 흔한 오해라고 믿는다. 그는 말한다. 〈지도력은 언제나 오직 '우리'에 관한 문제다.〉 해슬람은 개인적 자질의 점검 목록을 갖고 있다고 좋은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이끌어야 할 집단의 열망을 이해하고 공동의 목적을 위해 진력해야만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히틀러는 바로 이 점을 이해했기에 재판 중에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의 파괴자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선언했다. 그의 추종자들이 공유한 목적이었다. 게다가 히틀러는 전쟁 중에 '보통의 병사'였다는 사실 덕분에 전통적인 지도층에 배반당했다고 느끼는 수백만 명의 평범한 독일인 중 한 사람으로 처신할 수 있었다. '우리'라는 속성을 이보다 더 잘 증명해주는 것이 있는가?"(116-7, 119)


"나치의 주요 인사인 루돌프 헤스는 히틀러가 보여준 확신에 찬 미래상을 이렇게 인식했다. 히틀러는 〈학자가 하듯이 찬성과 반대를 동등하게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청중에게 다른 것이 옳다고 생각할 자유를 절대로 주지 말아야 한다. (···) 위대한 대중 지도자는 위대한 종교 창시자와 비슷하다. 그는 자신의 말을 듣는 자들에게 자명한 진리를 전달해야 한다.〉 만일 히틀러가 지지자들의 요청에 응해 정책 사안에 대한 토론과 당 강령의 수정을 준비했다면, 이는 단지 그가 다른 이들의 말을 기꺼이 들을 의사가 있음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를 약한 사람으로 보이게 했을 것이다. 따라서 히틀러는 합의정치인consensus politician의 정반대였지만, 역설적이게도 동료들이 그의 비전을 실현하려 애쓰는 과정에서는 그들에게 상당한 자유를 허용했다. 바로 이러한 조합 덕분에 그는 매우 효율적인 지도자가 되었고, 그가 '위대한 나'가 아니라 '우리 중 한 사람'으로 일하고 있다는 인식이 유지되었다."(136-7)


4. 청년 타락시키기 


"1930년대 초에 나치당에 가입하려는 '유혹'을 유달리 강하게 느낀 사람들은 20대 청년이었다. 나치당의 유사다윈주의 성격은 젊고 건강한 사람들에게 확실히 매력이 있었다. 그들 거의 전부가 너무 어려서 참전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아동기에 그림자를 드리운 전쟁의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관념도 역시 매력적이었다. 많은 대학교가 여러 해 동안 민족주의 운동의 보루였고, 전후 협정에서 독일 영토를 상실해 뼈저리게 느낀 고통은 여전했다. 그들 다수가 훗날 나치의 대의를 위해 싸우게 된다." "베른부르크 지역의 사회주의 신문은 이런 사실에 한탄했다. 〈이 젊은이들은 대체로 풍파를 겪지 않았지만 이제는 생계 수단을 찾을 수 없게 된 가정의 출신으로 (···) 이 [상황에] 대한 분노 때문에, 정치적 무지(학교와 부모는 이 점에서 철저히 무능했다) 탓에 정치적 승부사들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나치는 이 청년들에게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약속했다. 이러한 약속은 구체적이지 않을수록 더욱 강력하다.〉"(149-51)


5. 엘리트층과 공모하기 


"1933년 1월 30일,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했다. 힌덴부르크와 그 주변의 엘리트들에게 집단적 사고group think의 경향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 심리적 현상은 집단의 구성원들이 비록 모든 부정적 합의와 잠재적 대안들을 적절히 고려하지 않았다고 해도 문제의 올바른 해법에 도달했다고 확신할 때 발생한다. 이들의 오만함은 민족주의자 정치인이요 부유한 언론 거물인 알프레트 후겐베르크가 잘 보여주었다. 그는 히틀러가 총리가 되면 불가피하게 자신처럼 노련한 정치인들에 의해 억눌릴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이렇게 호언장담했다. 〈우리는 그를 가둬놓고 있다.〉 비극이었다. 최악의 경기 침체가 곧 끝나리라는 신호들이 있었기에 더욱 비극적이었다. 1932년 여름 로잔 회담에서 독일 대표단은 베르사유 조약이 부과한 배상금 지불을 끝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성공을 거두었다[거의 90퍼센트가 삭감되었다]. 독일이 경제 회복의 길에 접어드는 데 나치 총리는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였다."(203-4)


6. 인권 공격하기 


"서른 두 살의 직업 경찰 하인리히 뮐러는 공산주의를 몹시 싫어했지만 나치를 지지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경력은 화려하게 꽃을 피웠고, 결국 그는 게슈타포Gestapo(국가비밀경찰)의 수장이 되었다. 1937년 지구당의 칭찬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뮐러는 1933년 이전에 좌파 단체들을 탄압했다. 〈그러나 뮐러가 우파를 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면 분명히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보고서의 결론은 이러했다. 〈야심이 크고 추진력이 강한 그는 누가 지배자가 되든지 주어진 체제에서 인정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근원적인 심리적 특성을 드러낸 사람이 하인리히 뮐러만은 아니었다. 엄청나게 많은 독일인이 과거의 충성을 신속하게 내던지고 새로운 질서에 순응했다. 1933년 초에 100만 명이 넘는 독일인이 나치당에 가입했다. 이 모든 사람이 갑자기 일종의 집단적인 개심의 순간을 경험해 히틀러의 주장이 타당함을 깨달았다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상당수는 그저 기회주의자였을 뿐이다."(229)


"이제 법치의 외양은 사라졌다. 그러나 훨씬 더 주목할 만한 것은 '긴 칼의 밤' 숙청 이후 독일 안에서 히틀러의 인기가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나치가 언론을 통제했기에 그 살인은 나라의 질서를 회복하려는 히틀러의 영웅적 노력으로 꾸며질 수 있었다. 사람들이 신문에서 읽은 내용은 이러했다. 히틀러는 극심한 무질서를 예방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무력만 사용했다. 게다가 히틀러는 국민의 더 큰 이익을 위해 과거의 지지자들을 처벌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모든 매체에서 똑같은 말만 들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놀라운 사례였다. 독일의 모든 라디오 방송과 신문이 한결같이 정부의 방침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해 전했기 때문에, 수백만 국민은 히틀러의 범죄를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잘했다고 칭찬했다. 법치의 파괴. 자유 언론의 말살. 경찰과 군대의 매수. 히틀러는 독재자가 되려면 이 세 가지를 다 실행해야 한다는 점을 입증했다."(244)


7. 믿음 이용하기 


"여호와의 증인은 나치의 표적이 된 집단들 중에서도 독특했다. 그들은 신앙을 포기하면 즉각 석방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많은 신도가 그러한 길을 걷는 대신 무서운 박해를 감내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친위대와 여호와의 증인 사이의 관계가 모욕적인 억압의 관계만은 아니었다. 친위대는 여호와의 증인이 지닌 뜨거운 믿음이 부러웠다.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의 절대적인 헌신에 감명을 받은 사람이 루돌프 회스만은 아니었다. 하인리히 힘러와 다하우 수용소 사령관 테오도어 아이케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이렇게 선언했다. 〈친위대원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그들의 여호와에게 보여준 것처럼 열광적이고 흔들림 없이 민족사회주의의 이상과 아돌프 히틀러를 신뢰해야 한다. 모든 친위대원이 그 신념을 열광적으로 추구할 때에만, 아돌프 히틀러의 국가는 영원히 안전할 것이다.〉 이는 친위대 지도부가 자신들이 믿음 위에 세워진 조직을 이끌고 있음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발언이었다."(258-60)


"많은 홀로코스트 가해자들의 출발점은 독일 민족이 희생자라는 인식이었다. 1차대전에서 패배하고 그 직후 고초를 겪은 것은 내부에 있는 적의 배반과 다른 민족들의 기만적인 행태가 초래한 결과였다. 마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듯이, 전쟁이 끝난 후 몇 년 동안 독일은 동쪽의 슬라브족 인구가 증가한 탓에 종족적으로 소멸할 위험에 처했다. 이는 볼셰비즘을 장악한 유대인이 획책한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이 잘못을 바로잡는 역사적 과업을 떠맡은 자들은 근본적인 원인에 조금도 책임을 느끼지 않았다. 문제는 그들이 야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문제의 해결책이었다." "나치가 스스로를 혁신적인 사상가로, 세상의 현실이 아무리 잔인하더라도 그 현실에 당당히 맞설 준비가 된 유일한 사람들로 여겼다는 사실도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이 나치 지식인들은 대부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에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둘러 임무를 완수하려 한 행동가였다."(265-6)


8. 적 평가하기 


"히틀러는 종종 극적인 양자택일을 제시했다. 승리하지 않으면 파멸한다. 이는 그의 정치 이력 초기부터 지속된 사고방식이었다. 고상한 정치사상가들이 이러한 접근법을 조롱하기는 쉽다. 그러나 이는 엄청나게 효과적이었다. 고대 이래로 〈가장 무시무시한 대재앙〉을 막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보다 더 목숨이 중요한 때가 어디 있겠는가? 이는 조지 오웰이 지체 없이 간파한 진실이었다. 〈히틀러는 그 개성이 지닌 매력이 없었다면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순교자요 희생자, 바위에 사슬로 묶인 프로메테우스, 승산이 거의 없음에도 자신을 희생하며 홀로 싸우는 영웅이다. 그는 쥐 한 마리를 죽이더라도 그것이 마치 용인 듯이 보이게 하는 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 사회주의는, 심지어 자본주의도 마지못해 사람들에게 '좋은 시절을 주겠다'고 말했지만, 히틀러는 '투쟁과 위험, 죽음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그 결과로 하나의 민족 전체가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299)


"1938년 여름에 개최된 에비앙 회의는 초청받은 나라들이 저마다 '난민' 문제에 공감을 표명하는 공론장이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것은 거의 제안되지 않았다. 히틀러는 국제사회의 태도를 이렇게 요약했다. 〈도움은 주지 않고 도덕만 얘기한다.〉 에비앙 회의가 보여준 위선은 히틀러가 투사하려 한 세계관, 즉 독일이 주장만 앞세우고 실천하지는 않는 나라들의 희생양이라는 세계관에 잘 들어맞았다." "〈그들은 원주민의 의견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잔인한 폭력으로 여러 대륙을 정복했다. 그러나 독일이 식민지를 되찾겠다고 하자, 그들은 불쌍한 원주민의 운명이 경악스럽다는 듯이 그들을 절대로 그러한 운명에 처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고 선언한다.〉 그렇게 히틀러는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커다란 위선을 포착해냈다. 다른 나라들은 유대인 난민을 받아들일 공간이 충분한데도 여전히 그들의 수용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독일인들이 더 편안히 살아갈 공간을 확보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321-3)


9. 저항 분쇄하기 


"1939년 11월, 서른여섯 살의 목수 게오르크 엘저는 대담하게도 아돌프 히틀러는 폭탄으로 날려버리려 했다. 엘저는 히틀러가 11월 8일 맥줏집 폭동 기념일에 뮌헨의 맥줏집 뷔르거브로이켈러에서 연설하기로 한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폭탄을 만들어 목공품에 숨겨 연단 가까운 곳에 두었다. 그는 여러 날 동안 맥줏집에 잠복해 있으면서 영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밤새 폭발 장치를 숨겨둘 것을 만들었다. 폭탄은 계획대로 11월 8일 오후 9시 30분 직전에 폭발해 여덟 명이 사망하고 많은 사람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피해를 모면했다. 날씨가 나빠서 비행기 대신 기차를 타고 베를린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면서 연설 시간을 앞당겼기 때문이다." "보안국과 현지 경찰의 보고서는 히틀러 암살 시도에 엄청난 분노가 터져 나왔다고 강조했다. 〈거의 전 국민이 이 극악무도한 행위에 몸서리쳤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거듭했다. '신은 분명히 퓌러 편이고, 그가 다치지 않아서 정말로 다행이다.'〉"(350, 356)


"1939년 11월로 예정된 서유럽 침공 계획은 1914년의 실패한 군사 행동의 반복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장군들은 서유럽 공격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더 창의적인 접근법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이 아르덴 숲을 지나 전진할 때 연합군이 이를 탐지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도박'이었다. 만일 공습에 취약한 그 숲에서 발각된다면 전쟁에서 패할 것이 거의 확실했다. 그럼에도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자였던 히틀러는 새로운 계획에 열광했다. 도박은 적중했다." "히틀러는 자신이 옳았음을 증명했고, 반대했던 장군들은 틀렸음이 입증되었다. 독일군 장군들은 다음번에 히틀러를 믿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 이 순간을 기억하게 될 것이었다." "이제 히틀러에 대한 저항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워졌다. 7월 6일 베를린의 개선 열병식은 그때까지 보지 못한 풍경이었다. 무아지경의 흥분 상태에 빠진 군중이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이제 누가 그에게 반대할 수 있겠나?"(369-71)


10. 종족주의 강화하기 


"1939년 9월 1일 독일군 전차가 국경 너머 폴란드로 진격한 순간부터 종족주의적 대결이었지만, 그 종족주의는 이제 새로운 차원으로 격상되었다. 히틀러의 장군들이 이 〈절멸 전쟁〉에 반대하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들 다수는 소련 주민들에 대한 종족주의적 편견을 공유했다." "이 전쟁에서 적을 비인간화하는 나치의 행태는 거의 초월적인 수준에 이르게 된다. 그 침공에 참여한 모든 독일군 병사는 사전에 새로운 적에게서 최악을 예상하라는 말을 들었다. 다시 말해 적은 종족적으로 열등할 뿐만 아니라(사실상 인간 이하의 존재였다) 전쟁 규칙 따위는 무시하고 싸우는 자들이었다. 이는 많은 침공군 병사의 마음속에 엄청난 두려움과 공격성을 불러일으켰다. 그 전쟁은 인간과의 싸움보다 짐승과의 싸움에 더 가까웠다. 뱀을 신뢰할 수 없듯이 러시아인도 신뢰할 수 없었다. 우리의 뇌는 친구는 개인으로 보고 적은 집단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러시아인들'은 하나의 들짐승 무리로 인식되었다."(376-8)


"밀그램의 연구에서 발견되는 다른 깨달음이 있다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일반적이라는 사실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공정한 세상' 가설이라고 부른다. 이로부터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은, 상당히 많은 사람이 권위자로부터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필요하니 걱정 말고 하라는 말을 들으면 쉽게 그렇다고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치 학살자들과 관련하여 볼 때, 분명코 권위자의 역할이 집단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하이드리히와 힘러는 이 점을 잘 알았고, 학살 부대의 활동에 개인적으로 깊은 관심을 가졌다." "대체로 각각의 학살자 집단은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애초부터 살인을 즐긴다고 생각한 자들이 있었다. 학살을 시작한 그 순간부터 살인은 사실상 가능하다고 생각한 자들이 있었다. 총을 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할 수 있음을 깨달은 자들이 있었다. 대다수가 중간 집단에 속하는 이 3분할을 학살자의 심리에서 거듭 보게 될 것이다."(385-6)


11. 멀리서 죽이기 


"1941년 8월 말, 카를 프리치는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인간의 모습을 한 짐승〉인 소련군 포로들에게 수용소에서 의복 소득과 이 퇴치에 사용한 치클론B라는 치명적인 살충제를 사용한다는 중대한 발상을 내놓았다. 그 두 가지를 결합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해충 박멸에 쓰이는 화학약품으로 적을 죽이는 것만큼 그들의 '타자성', 즉 '그들'의 속성을 더 잘 중명할 수 있는 것이 있겠는가? 나치는 그와 같은 동물의 비유를 좋아했다. 그 전해에 제작된, 역사상 최악의 선전 영화 중 하나로 꼽히는 〈영원한 유대인〉에서는 쥐 떼의 장면과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 이미지가 교차했다. 그 영화를 감독한 프리츠 히플러는 이렇게 말했다. 〈괴벨스가 쥐가 나오는 장면을 요구했다. 쥐가 유대인의 상징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사령관 루돌프 회스는 〈총살로써 절멸을 수행한다는 생각에 언제나 몸서리쳤다.〉〈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관여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안도했다.〉〈우리는 그 모든 유혈극을 피할 수 있었다.〉"(413-5)


"그해 가을의 처음 몇 주 동안은 나치에게 몹시 즐거운 낙관적인 시간이었다. 10월 3일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이 적[소련군]은 이미 무너졌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한 주가 지나기도 전에 나치당 언론담당관 오토 디트리히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군사적인 의미에서 소련은 끝났다.〉 이튿날 독일의 신문들은 머리기사로 〈동쪽의 승리〉를 대서특필했다." "괴벨스가 디트리히의 선전의 오류에 그토록 격분한 것은 바로 독일 국민이 '미개'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디트리히는 사실상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단순한' 메시지를 전달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괴벨스는 국민에게 나중에 이행하지 못할 구체적인 약속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거짓말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진실을 전하되 가장 단순한 사람도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군데군데 고쳐 보여주어야 한다. 반대로 뻔한 거짓말은 언젠가 돌아와 역효과를 낼 뿐이다.〉"(420-2)


12. 두려움 키우기 


"독일의 전 역사를 통틀어 이와 같은 패배는 없었다. 1943년 2월 2일 스탈린그라드의 재앙 이후, 나치 지도부가 해결해야 할 난제는 분명했다. 그렇게 심리적으로 위축된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국민의 충성을 유지하고 최후의 순간까지 싸울 태세를 갖출 수 있겠는가?" "진심으로 믿는 자들 중에서도 가장 진심이었던 요제프 괴벨스는 여태껏 겪지 못한 가장 어려운 심리적 과제에 직면했다. 그는 믿음이 무너지는 사람들에게 역경에 맞서 굳건하게 버티라고 설득해야 했다." "괴벨스는 독일인들에게 계속 싸울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할 열쇠는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때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는 이런 메시지를 설파하는 데 몰두한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것이 그대들 개인에게도 이익이다. 왜냐하면 동쪽의 '인간 이하의 존재들'이 강간, 살해, 복수의 의도를 품은 채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항복은 이 야만인들의 도착을 더욱 앞당길 뿐이다. 바로 그가 좋아하는, 감정을 건드리는 노골적인 메시지였다."(453, 456)


"괴벨스는 연합국이 홀로코스트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기 며칠 전에 선전 회의를 열어 〈공격이 최선의 방어〉이기 때문에 독일은 적에 맞서 '잔학행위 선전atrocity propaganda'[적이 저질렀다는 실제와 가공의 잔학한 범죄에 관해 정보를 퍼뜨리는 전략]을 조직적으로 펼쳐야 한다고 선언했다." "독일 국민의 심리에 영향력을 행사할 최선의 방법은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라는 믿음에 따라, 괴벨스는 기운을 북돋는 다른 화제들로써 공포심을 조장하는 '잔학행위 선전'의 효과를 더욱 높여야 한다는 점을 이해했다." "괴벨스는 1943년 2월 18일 '총력전' 연설에서 한편으로는 자기희생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반면 2주 후에는 독일 역사상 가장 많은 비용을 들인 판타지 오락 영화 한 편을 공개했다. 〈뮌히하우젠Münchhausen〉은 가공의 독일 남작이 펼친 모험을 보여주는 컬러 장편영화였다. 마술사, 열기구를 타고 가는 달 여행, 사치스러운 연회, 하렘의 욕장에서 젖가슴을 드러내고 목욕하는 젊은 여인들이 나온다."(458-9)


맺으며


"나치였던 자들은 자신들의 범죄를 상대화하려 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사령관 루돌프 회스의 주장에 따르면, 그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민간인을 살해한 것과 연합군 폭격기 조종사들이 독일 도시의 민간인을 살해한 것은 다를 바가 없었다." "이는 여러가지 이유에서 잘못된 비유다. 특히 독일 도시들에 대한 폭격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멈추었지만, 나치의 민간인 학살은 독일이 전쟁에서 이겼다면 계속되었을 것이다. 물론 유대인 여자와 아이를 절멸하라는 나치의 지침은 있었던 반면, 독일의 여자와 아이를 몰살하라는 연합국의 지침은 없었다. 그러나 연합국이 나치와 똑같이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생각은 많은 독일인에게 매력적이었다. 나치였던 자들에게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함부르크에 살던 작가 마틸데 볼프묀케베르크는 친구들과 함께 〈온힘을 다해〉 나치 정권의 〈몰락〉을 위해 노력했지만, 그들은 연합국의 위선도 비난했다. 그녀의 결론은 간명했다. 〈우리는 모두 똑같다. 똑같은 죄인이다.〉"(508-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늑대의 시간 - 제2차 세계대전 패망 후 10년, 망각의 독일인과 부도덕의 나날들 ㅣ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들
하랄트 얘너 지음, 박종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들어가는 말: 불행 사이로 비치는 행복 7 


"1945년 여름, 독일 땅의 7500만여 명의 무리를 하나의 인간 사회라고 부르기는 어려워 보였다. 대신 '공백기' 혹은 '늑대의 시간'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인간은 다른 모든 인간에게 늑대'라는 말이다. 다들 자기 자신이나 자기 무리에만 신경을 쓰는 분위기는 1950년대 깊숙이 들어서도 이 나라의 자화상을 이루었다. 1950년대 후반에는 상황이 나아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만의 보호 공간인 가족 속으로 숨어들었다. 1950년대 후반부에 공동체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설립된 '게마인진Gemeinsinn' 시민운동가들이 다수의 비정치적인 독일인을 비난하는 말로 사용했던 그 유명한 '오네미헬 씨'의 모습에도 그 늑대는 계속 살아 있었다. 예전에 대동단결했던 민족 동지들이 이제 자기만 아는 늑대로 타락해버린 것이다." "이 책은 뿔뿔이 흩어졌거나, 강제로 끌려갔거나, 도망쳤거나, 남아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다시 뒤섞여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고, 이전의 민족 동지들이 어떻게 다시 서서히 시민이 되어갔는지를 다룰 것이다."(8-9)


# Ohnemichel. 'Ohne'(Without)와 'mich'(me)를 합성한 말로서 '나 없이 하라는 뜻'인데, 'mich'에다 'el'을 붙인 미헬은 일반적인 독일인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나는 나와 내 가족만 신경 쓰고 살겠다는 독일인을 의미한다. 


"이 책의 중점은 잔해 청소와 사랑, 도둑질, 쇼핑 같은 일상의 문명적 측면에서 차츰 정신생활과 미적 디자인 같은 문화적 측면으로 넘어간다. 전쟁 이후 사람들은 오늘날보다 훨씬 더 예술을 사랑하고, 섬세한 감각을 즐기고, 끊임없이 진지한 토론에 빠졌다. 좋았던 옛 시절로 미화되던 19세기와 함께 끝나버린 사교 형식을 다시 이어가기라도 하는 듯했다. 오늘날 우리는 홀로코스트에 대해 많은 것을 안다. 반면에 당대인들이 홀로코스트의 그늘 속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는 잘 모른다.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 수백만 명을 살해한 나라가 어떻게 도덕과 문화를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 양심이 있다면 어떻게 그런 것을 다시 입에 올릴 수 있었을까? 무엇이 좋고 나쁜지는 그들의 자식들이 스스로 찾도록 내버려두어야 하지 않았을까? 언론의 해석권도 호황을 누렸다. 모두가 '의미에 대한 갈증'을 이야기했다. '실존의 폐허 더미' 위에서 철학을 하는 것은 정신의 약탈 행위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감자를 훔치듯 의미를 훔쳤다."(14-5)


1. 제로 시간?


"후대에 침울한 통곡의 대가로 기억될 26세의 극작가 볼프강 보르헤르트는 계속 살아가는 것의 짐을 자기 세대의 절박한 선언으로 바꾸고자 했다. 한 장 반짜리 텍스트 〈이별 없는 세대〉에서 그는 말 그대로 과거가 사살되어버린 세대의 새 출발을 격정적인 단호함으로 노래했다. '이별 없는 세대'는 제로 시간의 선언이었다. 〈우리는 귀향 없는 세대다. 귀향할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도착 세대다. 어쩌면 새로운 별에, 새로운 삶에 완벽하게 도착한 세대일지 모른다. (···) 우리는 이별 없는 세대지만, 모든 도착이 우리 것임을 알고 있다.〉 '이별 없는 세대'는 돌아볼 용기가 없는, 남겨진 자들의 시적 선언이다. 이 모든 일이 어떻게 그런 식으로 일어날 수 있었는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는 다수 독일인의 충격적인 태도가 여기서 원칙으로 대두한다. 경험한 것이 적힌 칠판은 지워지고, 새로운 글과 '새로운 신'을 위한 자리가 마련된다. 바로 '새로운 별'에의 도착이다. 그것은 의식적인 과정이다."(29-30)


2. 폐허 속에서


"폐허 영화가 인기를 끈 이유는 단순했다. 파괴된 도시의 파노라마가 이색적으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끔찍한 모습이라고만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는 아무리 봐도 폐허에 질리지 않았다. 자기 내면의 거울로 느낀 것이다. 심지어 누군가는 전쟁 이전 세상의 본질을 이루고 있던 것이 이제야 마침내 눈앞에 똑똑히 드러나는 것 같은 느낌까지 받았다. 그들은 폐허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이러한 완전한 몰락 속에 숨겨진 내적 연관성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 폐허가 세상의 진짜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는 느낌이 많은 사람을 엄습했다. 그들은 카메라를 들고 폐허 속으로 들어가 '경고 사진'을 찍었다. 황량한 잿더미를 보여주는 사진마다 한결같이 붙은 제목이었다. 물론 그들은 폐허의 모습에서 자신들을 사로잡은 공포를 묘사하고 싶었다. 하지만 산산조각 나고 검게 그을린 드레스덴처럼 끔찍한 광경조차 이 재앙에서 눈앞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끄집어내려는 사진작가들의 야심을 가로막지는 못했다."(55-6)


3. 대이동


"피난민 행렬에는 무척 대조적인 두 그룹이 있었다. (외국인) 강제 징용자와 동쪽의 실향민이었다. 해방된 징용자들에 대한 군정의 태도는 여러 차례 바뀌었다. 해방 직후에는 온정주의적 시선이 지배했다. 그래서 강제 징용자들은 잔학한 나치의 희생자로서 여건이 허락하는 한 폭넓은 지원을 받았다. 예를 들어 연합군은 징용자들에게 우선적으로 풍족하게 배급할 것을 각 상점에 지시했다. 이는 독일인들에게 동요와 증오를 일으켰다. 그렇지 않아도 물건은 달리고 배급량도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수년 동안의 수용소 노예 생활은 많은 징용자에게 심각한 행동장애를 일으켰다. 그들은 자신의 불만을 난동으로 풀었고, 마음에 차지 않으면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에게까지 공격적이고 폭도적인 태도를 보였다. 예를 들면 여러 사정으로 그들이 원하는 만큼 보살펴줄 수 없었던 연합군 군인들에게 말이다. 그들의 이런 파괴적인 행동 때문에 급기야 연합군 병사들도 존중과 이해심을 잃을 때가 많았다."(82-3)


"수용소의 긴장 상황은 연합군 군정이 최대한 많은 징용자를 집으로 돌려보내려던 1946년 여름부터 반대 방향에서 밀려든 새로운 사람들로 더욱 꼬였다. 동유럽, 특히 폴란드에서 10만 명이 넘는 유대인 난민이 독일로 한꺼번에 몰려왔다." "나치 치하에서 살아남은 얼마 안 되는 폴란드 국적의 유대인들은 이미 그전에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충분히 겪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재차 끔찍한 학대의 희생자가 되었다. 이번 가해자는 폴란드인들이었다." "수백만 명의 폴란드 징용자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동안 반대 방향에서도 폴란드 국적의 유대인들이 독일 땅으로 들어오면서 방금 비워진 수용소 공간을 채웠다. 이들 유대인의 탈출은 런던의 폴란드 망명 정부와 유대인 이주 단체 '브리하Brichach(탈출)'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 단체의 목표는 팔레스타인 이주를 원하는 유대인 징용자들의 유입을 최대한 장려함으로써 미국이 영국에 압력을 가해 팔레스타인 정착 금지 조치를 해제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87-9)


"1960년대에 독일연방공화국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외쳤던 '통합의 기적'은 사실 내용 면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니었다. 많은 독일인이 고향을 잃고 떠나온 동쪽의 동포들을 외국인 징용자만큼이나 야멸차게 대했다. 누군가는 그걸 보고, 독일인들의 그런 이기적인 행동이 적어도 인종주의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끄집어내며 스스로를 위안할지 모른다. 아무튼, 동쪽의 실향민들은 금발이건 파란 눈이건 상관없이 하찮은 '집시 떼거지'로 멸시받을 때가 많았다. 게다가 그들은 헝가리나 루마니아 이웃들에게서 특별한 취향을 물려받았는데, 일례로 파프리키와 마늘에 대한 선호가 그렇다. 이는 서독 주민들에게 상당한 혐오감을 자아냈다. 그럼에도 선의를 가진 사람들은 늘 공통의 민족적 뿌리를 입에 올리며 통합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당시 당국이 '전입자'라고 부른 새로운 이주민들은 거부의 벽에 부딪혔다. 결국 '통합의 기적'은 경찰의 개입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106-8)


"인종주의는 죽지 않았다. 다만 이제는 그 창끝이 내부로 향했다. 당시에는 하나의 독일 민족이 아닌 '독일 부족들'이라는 말이 자주 회자되었다. 그러니까 오버바이에른 사람이건 프랑켄 사람이건, 아니면 팔츠나 튀링겐 사람이건 여러 부족의 피가 섞이는 것은 지역적으로 뿌리내린 민족 집단의 고유성을 해치는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다. 독일제국의 붕괴 이후 민족 공동체의 이념은 빛을 잃었지만, 독일인들의 오만함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나치의 선전 구호였던 하나의 단일 민족은 부인되었고, 사람들은 이제 정체성의 결정적 특징으로 갑자기 지역을 부각시켰다. 많은 사람이 독일의 내부 이주를 일종의 다문화적 공격으로 보았다. 그와 함께 부족주의가 성행했고, 사람들은 부족의 일원으로서 풍습, 관습, 종교 제의, 방언을 통해 다른 지역민들과 자신을 구분했다. 특히 보헤미아계 독일인이나 바나트 슈바벤인, 슐레지엔인, 포메른인, 베사라비아 독일인 같은 온갖 '폴란드 잡것들'과는 더더욱 거리를 두었다."(110-1)


4. 댄스 열풍


"우리는 전후 시대를 지극히 어두운 시기로 상상한다. 시대의 이미지, 특히 후대의 잔상은 주로 찡그린 얼굴과 절망적인 표정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 시대의 곤궁과 불안은 결코 낯설지 않다. 하지만 야간 폭격의 공포와 점령 초기의 불확실성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살아남은 것에 대한 기쁨이 화산처럼 분출되었다. 폐허 더미에서 느끼는 일상의 상실조차 이런 에너지를 가로막지 못했다. 아니, 그 반대였다. 재앙에서 벗어났다는 감정과 예측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미래는 오히려 삶에 대한 집중도를 더 높였다. 많은 사람이 순간을 위해 살았다. 순간이 아름다우면 마지막까지 만끽하고 싶어 했다. 이는 끓어오르는 삶의 기쁨으로 분출되었고, 때로는 거의 광적으로까지 비치는 향락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삶의 위협은 여전히 곳곳에 존재했기에 사람들은 삶을 마음껏 즐기고 싶어 했다. 그야말로 댄스 열풍이 불었고, 가능한 곳이며 어디서건 정신없이 놀았으며, 남이야 눈살을 찌푸리든 말든 미친 듯이 웃어댔다."(139-40)


"카니발은 전후 독일인들의 야누스적 측면을 드러내는 인기 있는 메타포였다. 항복 사회는 서서히 쾌락주의 사회로 넘어갔다." "전후 시기의 파티는 가라앉고 있는 배가 아니라 이미 가라앉은 배 위에서의 춤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아직 살아 있음에 스스로 깜짝 놀랐고, 그 기분에 취해 이상한 바보 같은 짓에 발작적으로 덤벼들었다. 역사가 프리드리히 프린츠는 많은 독일인을 사로잡은 이 이해할 수 없는 들뜬 분위기를 보면서 전통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장례식 뒤에 여는 추모의 연회를 떠올렸다. 〈전쟁의 신 마르스가 들판을 깨끗이 휩쓸고 지나가자〉 궁핍과 불행이 대지에 만연했지만, 〈시신을 땅에 묻고 공동묘지에서 돌아오는 조문객들이 식당에 마련된 커다란 추모의 연회장에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자신들도 모르게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런 분위기가 퍼지곤 했다. 처음에는 주저하다가 점점 더 뚜렷해지는 명랑함, '살아 있는 자의 달콤한 습관'에서 아직 벗어나지 않았다는 기쁨의 감정이〉."(165-6)


5. 파괴된 도시의 사랑


"전쟁 기간에 여자들은 남자 없이도 대도시가 충분히 운영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아버지 없는 가족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서로에게 의지하는 자기들만의 은밀한 공동체로 바뀌어갔다." "남편이 돌아왔을 때 어머니들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계속 맡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싸우지 않고는 얻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역할에 더는 적합해 보이지 않던 대부분의 남자들이 욕설과 분노 같은 정말 최악의 수단으로 자신들의 옛 자리를 고수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아내들의 주도하에 경제적 형편이 더 나아질수록 자신들이 집에서 잉여 인간이라는 느낌을 억누를 수 없었다. 반면에 가족이 궁핍에 시달릴 경우 귀향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가족의 부양에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수치심에서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다. 여자들의 역할과 분투를 애써 깎아내린 것이다."(174-7)


"아무리 위험한 시대여도 사랑의 요구는 별로 줄지 않았다. 마르그레트 보베리가 일기에 썼던 〈죽음과의 지속적인 밀착〉으로 인한 〈삶의 기쁨〉의 무한한 상승은 성적인 측면으로 표출되었다. 많은 여성이 이제야 드디어 다시 뭔가를 경험하고 싶어 했다. 전후 첫 몇 개월을 지배했던 새 출발의 설레는 분위기, 그리고 불안과 외로움이 만들어낸 야릇한 흥분은 기괴한 특성을 띤 성적 굶주림으로 이어졌다." "전후 여자들의 성적 활동은 당대에 회자되던 여성 과잉으로 날개를 달았다. 아름다운 여자는 많았지만 남자는 희박했다. 살아남은 남자들도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 목발을 짚거나, 가래 끓는 소리를 내거나, 아니면 피를 토했다. 여성의 존엄에 상처를 낸 것이다. 그러나 이건 사랑의 문제만이 아니라 생계의 문제이기도 했다. 특히 노동 시장의 전망이 곧 다시 악화되자 생업 활동은 모든 여성에게 지상 최대의 행복으로 비치지는 않았다. 여성 과잉은 취업 전선에서 여성들 간에 반목의 싹이 되었다."(193, 199-202)


"어디서건 풀어헤친 자세로 앉아 있거나 편안하게 구는 미국식 생활 방식은 누군가에겐 거부감을 불러일으켰지만 누군가에겐 매력적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적국에서도 그렇게 자유롭고 편안하게 행동하는 남자들 속에서 자신들이 모르고 있던 사적 친밀감과 편안한 남성성을 인지했다. 즉 부담 없는 남성상이었다." "이런 아가씨들은 곧 '베로니카 당케쇤Veronika Dankeschön'이라 불렸다. 성병Venereal Disease의 약자 VD를 변형한 말장난이었다. 그러나 이런 위험에도 독일 여자들과 미군은 전력을 다해 관계를 맺었다." "젊은 독일 여성들이 미군을 찾은 데는 문화적 또는 하위 문화적 동기도 숨어 있었다. 즉, 고루한 독일적 삶의 방식과 비좁고 숨 막히는 환경에서 탈출하려는 욕망도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대다수 독일 역사가들은 당시 여성들에게 낯선 것에 대한 욕망이 존재했고, 바로 그 속에 미군들에게 매력을 느낀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오랫동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222-4)


6. 약탈, 배급, 암거래: 시장경제를 위한 수업


"약탈의 순간에는 미친 듯한 탐욕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어디에 쓸지 알 수 없는 물건도 일단 맹목적으로 확보하려 했다. 중요한 것은 남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제정신이 돌아오면 그렇게 기를 쓰고 모은 물건들을 그냥 길에 버리기도 했다." "새로운 시장들은 연합국의 지시로 예전의 행정 관료와 직원들을 다시 일터로 불러들였다. 종전 상황의 혼란 속에서 명맥만 남은 공공 업무를 정상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에 대한 정치적 심사는 나중에야 이루어졌는데, 이 심사로 나치 전력이 있는 사람들은 미국과 소련 점령 지구에서 자주 해고되었다. 반면에 프랑스와 영국 점령 지구에서는 탈나치화가 좀 더 느슨하게 진행되었다." "점령 지구 내의 관료들은 개인적 정치 성향과 상관없이 집권 세력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독일 관료주의의 전통적 이상을 따라, 나치 정권에 충성했던 것과 같은 태도로 연합국 행정부의 지시에 순순히 따랐다."(239-42)


"거의 종전 직후부터 배급표가 다시 발급되었기에 사람들은 이 시스템을 앞으로도 계속 공정하게 관리할 국가기관도 분명 존재할 거라고 생각했다. 배급표는 〈살아갈 권리 증명서〉로서 그 소유자에게 전면적인 패배 이후에도 생존권을 문서 형태로 쥐고 있다는 일종의 확신을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배급표가 거기에 명시된 양 만큼의 식료품과 지방, 설탕을 실제로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실망감은 더욱 커졌다. 약속된 1550칼로리는 곧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최악의 궁핍 시기인 전후 첫 3년 동안에는 고작 800칼로리만 배급될 때도 있었다." "연합군의 지시로 강제 노역과 강제 수용에서 해방된 외국인들에게 식량 배급 면에서 특혜가 주어지는 것에 대해 시기와 분노를 느끼는 독일인이 많았다. 사실 그 사람들이 독일인들보다 더 많은 칼로리를 제공받은 것은 수년 동안 영양실조에 빠져 있던 건강 상태를 고려한, 정당한 의학적 조치였다. 그럼에도 많은 독일인이 그에 대해 분개했다."(246-50)


"세상 사람들의 눈에 '독일인들'은 전쟁 범죄와 제노사이드를 통해 가해자로 낙인찍힌 지 오래였다. 그들은 문명과 작별했고,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국제 사회의 대열에서 이탈했다. 망명 독일인들만 그런 국가의 일원임을 스스로 거부했다. 국내에서는 정권을 수치스러워했던 나치 반대자들조차 국제 사회에서 자신들의 이미지가 얼마나 추락했는지 분명히 알지는 못했다. 다수 독일인은 유대인 수백만 명에 대한 학살과 독일 국방군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무척 특별한 방식으로 질서와 품격을 갖춘 나라라는 감정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궁핍의 시기에 범죄가 사회적 일상이 되었다는 사실에 더더욱 경악했다. 집단적 인식이 이보다 더 왜곡될 수는 없어 보인다. 국외에서는 전후의 시스템 붕괴를 독일을 재사회화할 기회로 바라본 반면에 독일인들은 이제야 범죄의 구렁텅이에 빠진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이 두려워한 문명의 몰락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지만, 그들의 머릿속엔 그런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265)


7. 경제 기적과 부도덕에 대한 염려


"서독을 무기한 먹여 살릴 뜻이 없었던 미국은 경기를 부양할 방법을 찾았고, 그에 결정적인 장애물이 사람들에게 별 인기가 없는 라이히스마르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할 여유가 없다'는 말은 전후에 자주 나돈 말 가운데 하나였다. 앞서가는 건 항상 암시장이었다. 독일 노동력의 절반 이상이 물물교환과 좀도둑질, 불법 거래에 매달렸다. 오직 주거권과 식량 배급표만 얻기 위해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도 많았고, 일자리를 얻은 다음에는 더 중요한 일로 눈을 돌렸다. 이런 상황에서 정규 경제를 활성화하려면 신권 화폐의 필요성을 일깨움으로써 암거래의 매력을 떨어뜨리는 일뿐이었다. 실제로 화폐 개혁이 이루어지자 정규 직업에 종사하려는 사람과 불법 거래 대신 정상적으로 거래하려는 상인의 수는 빠르게 증가했다." "식량 배급 제도는 아직 없어지지 않았고 많은 사람이 곧 찾아온 물가 상승의 파고로 힘들어했지만, '상품 세계'의 갑작스러운 증가는 사람들에게 최소한 미래에 대한 뚜렷한 희망을 안겨주었다."(291-2)


"자동차 공장 도시 볼프스부르크는 통일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혼돈의 조합이었다. 석방되었지만 오갈 데 없는 군인들, 전쟁을 경험한 뒤로 어떤 형태의 안락함도 견디지 못하는 고향을 잃은 젊은이들, 그리고 더는 집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는 이전의 강제 노역자들로 이루어진 외롭고 좌초된 남자들의 수용소였다." "1948년 니더작센 지방 선거에서 볼프스부르크는 최악의 모습을 보였다. 극우 정당인 독일우파당DRP이 2만 4000표 가운데 1만 5000표를 얻어 시의회에서 원내 1당이 된 것이다. '볼프스부르크의 충격'으로 역사에 기록된 이 참담한 결과가 나온 지 몇 개월 뒤 선거 결과는 무효화되고 볼프스부르크 사람들은 재투표를 해야 했다." "이유는 빠르게 밝혀졌다. 너무 많은 남자, 너무 많은 피난민, 너무 많은 실향민, 너무 많은 퇴역 군인, 너무 많은 젊은이 때문이었다. 사회가 유지되려면 영속 가능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이 도시엔 그런 믿음을 담보해줄 것이 전혀 없었다."(309-12)


"공장은 볼프스부르크 사람들에겐 전부였고, 공장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대규모 감원 조치에도 여전히 남아 있던 중하위급 소수 핵심 직원들은 나치 시대와 독일노동전선의 이념에 아직도 깊이 경도되어 있었다. 반면에 과학 기술에 대한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기술자들은 온 마음으로 자신들과 공장이 하나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금속 노조가 볼프스부르크에 파고들 여지는 거의 없었다." "볼프스부르크는 이른바 '공장 사회'의 이상이 되었다. 어떤 공장도 그 악명 높은 '국가독점자본주의'를 이보다 더 명확하게 보여줄 수는 없을 듯하다. 국가독점자본주의는 국가와 민간 자본이 서로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하나로 밀착해서 움직이는 시스템을 가리킨다. 1960년 폭스바겐법VW-Gesetz에 따라 공장은 민영화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나더작센주와 연방공화국은 각각 20퍼센트의 지분을 소유했다. 그런 까닭에 폭스바겐이 '독일'이라는 주식회사의 준 국유 기업이라는 인상은 바뀌지 않았다."(313, 316-7)


8. 재교육자들


"연합국들이 합의한 탈나치화와 재교육 정책은 처벌과 신뢰 구축 사이의 균형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러니까 국내에 남은 진짜 나치 반대자들의 도움을 받아 나치 잔당을 배제하고 단순 부역자는 순화 교육을 시키자는 것이다. 승자의 선의에 대한 기본 신뢰 없이는 지속적인 평화를 장담할 수 없었다. 이 일에서 소련은 이론적으로 비교적 쉬웠다. 소련의 역사 인식에서 독일인들이 자신을 공격했다는 사실은 프롤레타리아의 객관적 이익에 부합하지 않았다." "소련은 파시즘을 노동자 계급에 대한 극악한 독재로 해석하면서 신속한 용서로 나아가는 이데올로기적 길을 제시했다. 그들은 독일 국민이 파시즘에 충분히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가 있다고 보았을 뿐, 많은 미국인이 의심하는 것처럼 독일인들 속에 근본적인 악이 존재한다고는 보지 않았다. 현실에서 소련은 미국이나 영국보다 독일 국민에게 훨씬 더 큰 공포를 안겨주었지만, 그들은 첫날부터 독일인들에게 화해의 비전을 제시했다."(349-50)


"미국에서 독일의 고급 문화를 이해하고 예찬하는 사람은 기껏해야 소수의 독문한 전공자나 이민자밖에 없었다. 대다수 미국인은 독일의 문화 전통에 회의적인 눈초리를 보냈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 많이 배웠다는 독일 교수들이 왜 하필 최악의 나치에 동조했는지 의문을 품었다. 그러다 보니 새로 재건되는 언론에 독일의 전직 언론인들이 대거 참여하는 것에도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스 하베는 연합군이 독일인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야 옥석을 가려낼 수 있고, 그래야 탈나치화에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베는 1945년 10월 17일, 그가 책임 편집을 맡고 미군정의 정보관리부에 의해 출간된 전국지 《노이에차이퉁》을 탄생시켰다. 신문은 적어도 절반 정도는 독일 지식인들의 의견 발표장이기도 했다." "이런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를 미 당국은 의심의 눈초리로 주시하고 있었다. 하베는 곧 사상적으로 별 믿음이 안 가고, 독일인 동족한테 완전히 속아 넘어간 헛똑똑이로 여겨졌다."(354-5, 358)


"종전 이후 모든 독일인이 당연히 연합군의 의심을 받았다. 그건 전쟁의 논리였다. 반면에 나치 공동체의 논리도 있었다. 망명에서 돌아온 독일인들은 자신들을 심판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조국이 싫어서 도망친 자들에게 어떻게 그럴 자격이 있겠는가? 따라서 돌아온 망명객들이 국내 독일인들을 심판대에 세우거나 교육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심각한 월권행위로 여겨졌다. 하베는 가까운 독일인 그룹에선 좋은 평가를 받았을지 몰라도 안전한 편집국만 벗어나면 가슴을 답답하게 짓누르는 혐오감을 느꼈다. 독일인들은 망명에서 돌아온 자들의 오만함에 맞서 단단한 밀집대형을 갖추었다. 그건 결코 은밀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나쁜 의도를 가진 나치 잔당들의 단순한 불평불만에 그치지도 않았다. 이제는 숨어 투덜거릴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전후의 서쪽 지구에서는 토론 문화가 활발하게 발전하면서 서방 연합군의 비호를 받던 망명객들을 공개적으로 공격할 장이 활짝 열렸기 때문이다."(360-1)


9. 예술 냉전과 민주주의 설계


"전후 독일에서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미술이었다. 첫 전시회가 열리자마자 예술적 양식 문제는 정치적 노선의 시험대가 되었다. 그림에서 '뭔가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럴 필요가 없는지 하는 문제는 일반 사람들뿐 아니라 정치 진영과 국가들까지 갈라놓았다. 그림 위의 한 밝은 점은 그냥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즐겨야 하는가, 아니면 그림 외부의 어떤 실제적인 것을 암시해야 하는가 하는 추상미술의 결정적 쟁점은 세계를 둘로 나누었다. 이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예술이 냉전의 전쟁터가 되면서 추상미술은 서방의 창조적 횃불이 되었고, 사실주의는 사회주의의 미학적 계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워하는 관객을 위해 많은 신문에 동시대의 예술 경향에 대한 설명이 잇따라 실렸다. 거부 반응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독일 사회에는 현대미술에 대한 거부감 외에 새로운 것을 알고자 하는 욕구와 문화에 대한 진지한 관심도 팽배했다."(392-3, 396)


"동쪽과 서쪽의 독일인들이 점점 더 멀어질수록 추상미술은 서독에서 주도권을 잡기가 한결 쉬워졌다. 동독의 구상미술 원칙이 분명해질수록 추상미술 역시 정치 체제의 미학적 대안으로 자리매김하고, 서독의 대표적 예술 양식으로 올라서는 것이 한층 수월해졌다는 말이다. 자유의 예술로 이해되는 추상미술은 신앙고백과 같은 카리스마를 얻었고, 이 카리스마는 정치와 분명히 선을 그을 때 더욱 설득력 있게 발산되었다. 추상미술은 존재의 유희적 축제를 묘사했고, 커다란 캔버스 위에 자유롭게 분출된 순수 생명 에너지를 구현했다. 또한 물감은 주걱으로 퍼서 바르거나, 방울방울 떨어뜨리거나, 표면에 두꺼운 덧칠을 함으로써 재료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가치의 구현이기도 했다. 미국 정보 요원 도널드 제임슨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인들은 추상미술의 도움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실제보다 훨씬 더 양식화되고 경직되고 편협한 것으로 비치게 하는 데 성공했다.〉 따라서 그들은 추상미술을 힘껏 장려했다."(406-7)


10. 억압의 소리


"인간은 억압을 소리 없는 과정으로 상상하기 좋아한다. 그런 면에서 당시엔 전후의 정적, 무기와 언어의 침묵에 대한 글이 많이 나왔다. 심지어 전후 독일인들은 옛 시절을 회고할 때 스스로를 그동안 겪은 일을 일단 말없이 견뎌내야 했던 위대한 침묵자로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말을 삼가는 분위기는 여기저기 있었을지 모르지만, 대체로 말이 없지는 않았다. 아니, 현실은 그 반대였다. 특히 많은 독일인이 자기 문제에서는 그야말로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독일인들의 고통을 다른 민족의 어떤 고통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최상급으로 표현한 글은 언론과 소책자, 논문에 넘쳐난다. 이 대목에서 말 그대로 억압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글의 저자들은 진정한 희생자들에 대한 일말의 고려도 없이 오직 자신들의 고통에만 빠져 허우적거렸다. 어떤 이는 당시에 이미 패자의 신분으로 세계정신의 꼭대기에 오르기라도 한 듯 자신들의 극심한 치욕을 정신 영역의 리더십에 대한 요구로 바꾸었다."(430-1)


"그들을 불행으로 몰아넣은 것이 악마든 광기든 자본이든, 혹은 그들 자신의 탐욕이든 독일인 다수는 이제 그 문제를 잊자고 하면서 어깨를 으쓱하고는 비판의 대오를 해산했다. '나는 내 문제만으로도 벅차.' '이제부터는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할 거야.' 독일인들이 서로에게서 확인한 것은 기본적으로 회의적인 태도였다. 이런 태도는 그전의 민족 공동체가 요구한 '대동단결'에 대한 역사적 대답이었다. 이제 독일인들 사이에서는 불신과 피로감이 넘치고, 꼭 필요한 것으로만 축소된 결속이 만연했으며, 그 속에 자신들의 엄청난 모순을 숨겼다. 사람들은 암시장에서의 일상적인 속임수에서, 그리고 거처와 빵, 석탄을 얻으려는 치열한 싸움에서 이미 자신들의 진면목을 충분히 깨닫고 있었다. 이런 싸움에서는 당원이든 나치 반대자든 별 차이가 없었다. 다만 전반적인 도덕적 붕괴 속에서도 웬만큼 예의 바르게 행동했는지, 혹은 아무리 절실한 생존경쟁 속에서도 어느 정도 금도는 지켰는지가 도덕적 평가의 기준이 되었다."(443)


"대다수 독일인이 스스로를 히틀러의 희생자로 여기는 이런 집단적 자기 합리화는 학살당한 수백만 명에 대한 견디기 힘든 모독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는 서독의 민주주의 확립을 위해 받아들여야 하는, 어쩌면 불가피한 전제 조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로써 새로운 시작을 위한 심리적 토대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히틀러의 희생자라는 확신은 스스로를 불명예스럽고 비겁하고 기회주의적인 존재로 느끼지 않으면서 몰락한 정권에 대한 충성심을 버릴 수 있는 선행 조건이었다." "스스로 기만당하고 착취당했다는 확신과 함께 나치의 이념적 불씨는 외견상 완전히 꺼져버렸고, 독일인들은 마치 자신과의 혹독한 정신적 대결을 통해 내적 탈나치화의 기적을 이루어내기라도 한 듯 아무런 가책 없이 온 마음으로 민주주의에 집중할 수 잇었다. 자기들끼리 다정한 말로 다독인 이 희생자 논리 덕분에 대다수 독일인은 나치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범죄와 대면해야 할 심리적 부담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451-2)


맺음말: 삶은 계속된다 460


"전후 독일 사회가 진실과 마주하는 면에서 아무리 무능했다고 비난하더라도 그들의 억압 능력 덕분에 후손들이 막대한 이익을 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억압은 항상 시간만 지연시킬 뿐이다. '과거 청산'은 훗날 후손들이 떠맡았다. 그들은 과거 청산을 부모 세대에 대한 역사적 승리로 여겼다. 가장 거친 국면에서는 마치 내전처럼 보이기도 했던 부모와의 싸움에서 말이다. 1968년의 세계적인 저항 물결이 서독에서만큼 부모 세대에 대한 가차 없는 개인적 청산과 결합된 곳은 없었다. 자신의 자식들에게 거의 광적으로 지탄받은 것은 1945년 이후 독일인들이 스스로에게 가했던 억압의 후유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노에서 이어진 실제적인 결과는 별로 없었다. '68세대'조차 부모 세대의 나치 연루 혐의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데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대신 자본주의를 독재의 전 단계로 낙인찍고 그들이 겪은 사회적 탄압을 파시스트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새로운 파시즘 이론을 만들어냈다."(46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