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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 대량학살자의 밝혀지지 않은 삶
베티나 슈탕네트 지음, 이동기.이재규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2월
평점 :
서론
"자신이 〈아돌프 히틀러가 만든 절멸 작동기계의 작은 톱니바퀴 중 하나일 뿐〉이라고 한 아이히만의 진술은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옛 신문을 읽어보니 아이히만의 말도, 연구서들의 서술도 뭔가 사실과는 다른 것 같다는 의심이 들었다." "사실 그는 재판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이미 대부분의 나치보다 더 많은 별칭─칼리굴라, 유대인의 차르, 민족 학살의 관리자, 이단 대심문관, 유대인 학살 기술자, 최종해결사, 관료, 대량학살자─을 가지고 있었다. 그 별칭은 모두 1939년부터 1960년 사이에 아이히만을 일컫던 것이었다. 그것은 은밀하지 않았다. 신문이나 유인물, 책에 다 나와 있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해 언제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를 파악하고자 했다면 누구나 그것을 접할 수 있었다. 당시 정확히 한목소리로 정반대 사실을 주장한 집단이 있었다. 그들은 아이히만의 옛 동료와 전후 잔존 나치들이었다. 그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다로 자신들이 아는 바를 대수롭지 않은 일로 만들고자 했다."(24-5)
"이제껏 논의에서 빠진 관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여론이다. 장 자크 루소의 통찰에 따르면, 월권과 그로 인한 불의에서는 늘 두 가지 인물 유형이 존재한다. 즉 무언가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그대로 따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아돌프 아이히만의 공적 영향력을 살펴보면, 그 두 부류 인간의 기괴한 협력 과정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악명 높은 '유대인 담당관' 시절의 아이히만처럼 우리가 그 협력 과정을 제대로 통찰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아이히만의 역사를 그의 범죄 연대기나 행위의 발전사로 서술하지 않고 그의 영향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서술한다. 누가 언제 아이히만을 알았고, 사람들은 그에 대해 언제 어떤 생각을 했으며, 사람들이 자신을 알고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는 사실에 그는 어떻게 대응했는가? 얼마나 많은 자기 연출이 아이히만 현상에 깔려 있는가? 그의 역할극은 그의 학살 이력과 우리의 역사상에 어떤 의미를 지녔는가?"(26-7)
1장 “제 이름은 상징이 됐죠”
"나치스 첩보기관인 보안국 대원 시절 아이히만은 유대인 행사를 찾아다니며 유대인들과 교류했다. 유대인들은 아이히만을 호기심 많고 성격 좋은 사람으로 여겼다. 아이히만은 (상관이 두 번이나 말렸는데도) 선생을 찾아 히브리어를 배우려 했고 자기 동료들이 그랬던 것처럼 유대 문헌 연구에 열중했으며 600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과 유대인 신문을 탐독했다. 아이히만은 국제관계를 살폈고 심지어 한 유대인으로부터는 팔레스타인을 방문해달라고 초대받기도 했다. 나중에 아이히만은 그것을 〈3년 동안의 학습〉이라고 불렀다. 그런 방식의 삶에 속아 아이히만을 정치적으로는 다소 천박하지만 학문에는 관심이 많은 문예 애호가로 오인하기 쉽다. 특히 카페에서 잡담하고 글을 쓰며 발표하거나 동료들과 전문 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와중에도 유대인을 고발하기 위해 꼼꼼히 일하면서 반유대주의 선전 작업을 수행하고 게슈타포와 함께 체포하며 조사한 일들이 사료에 드러나지 않았다면 그러기 쉽다."(48)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최초의 인물이 아니었다. 상징과 이상의 활용은 나치즘의 성공 요인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그의 명성은 피해자들이 그를 알게 됨으로써 높아져갔다. 〈언론을 통해 아이히만이란 이름은 상징이〉 되었다. 〈어쨌든 유대인이란 말은 아이히만이란 이름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치의 권력관은 개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것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 권력관의 작동 방식은 지도부에만 영향을 미친 게 아니었다. 아이히만과 동료들도 권력을 행사하는 데 총통식의 지도자가 얼마나 유용한지를 금세 알아차렸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뒤로 물러서지 않고 자기 연출을 주저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였다. 유대인 문제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 간판 인물이 필요했고 〈아이히만〉은 바로 거기에 딱 맞았다. 나중에 아이히만은 자신이 상징 인물이 된 것을 우연으로 치장하려고 했다. 아이히만의 역할을 다룬 책이나 논문들도 더러 그런 견해를 따른다."(79-80)
"아이히만이 이민과 재정 확보 문제를 놓고 아직 유대인과 협상하고 국제 단체의 협력을 필요로 했을 때는 협박이 유용했다. 하지만 목표가 이민이 아니라 살해라면 더 이상 협상할 이유가 없었다. 협상용 대화를 하는 데 꽤 도움이 되었던 위협 이미지가 살해 의도를 감추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이제는 협박하기보다는 안정시키고 달래고 분위기를 바꾸며 진정시켜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대량 이송을 수행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이송 주체들은 이송 대상, 즉 우선 다른 곳으로 이송된 뒤 그곳에서 가능한 한 눈에 띄지 않게 살해될 그 사람들로부터 우선은 아주 조금이나마 신뢰를 얻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품고) 열차에 올라타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측 협상 파트너들을 양보와 협력으로 이끄는 데 항상 성공했다. 그 이유는 주로 유대인 협상가들이 아이히만과 〈협상〉하면 결국에는 더 나쁜 상황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기 때문이다."(88-9)
"그의 부하들이 아이히만을 〈그에 걸맞는 존경〉으로 대우했기 때문에 아이히만은 자신의 지위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었다. 영민한 관찰자인 구스타프 그륀트겐스는 그 기제를 간명히 설명했다. 〈왕의 역할을 하는 이들은 왕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다.〉 권력자를 무대에서 보여주려 한다고 해서 무조건 왕의 역할을 탁월하게 수행하는 배우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신하 역을 잘하는 배우들이 왕을 향한 그들의 행동을 통해 무대의 그림자를 왕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은 권력자 혼자만이 아니라 집단적 역동성이 만들어내는 현상이다. 집단적 역동성이 비로소 권력자를 만든다. 어떤 식으로든 그 현상을 알아본 사람은 효과를 높이기 위해 희생자들의 무력한 행동을 이용할 수도 있다. 아이히만의 부하들은 그 역할을 수행하는 데 자질을 갖췄고 아이히만도 자기 역할에 잘 맞는 사람이었다. 한층 효과적이었던 것은 아이히만이 권력자들 사이에서 더 센 권력을 가진 것처럼 연출했다는 사실이다."(102-3)
"나치 시기 막바지에 아이히만은 앞서 자신이 만든 이미지로 인해 도리어 위험해지는 일을 겪었다. 별로 유명하지 않던 사람이라면 전후 자기 명성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전후에 아이히만을 잊거나 빠뜨릴 가능성은 전무했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먼저, 그의 이름은 너무 잘 알려져 있었다 그가 유대인 정책의 상징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두 번째로, 그런 명성으로 인해 자기 죄로부터 벗어나려는 모든 사람에게 아이히만은 완벽한 투사 대상이 되었다. 아이히만은 항상 다른 이를 밀치고 앞으로 나갔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이제 누구든 아이히만 뒤에 숨기가 편했다." "크루메이는 진실이 알려지기를 원하며 자신이 끔찍한 사건을 밝혀줄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쿠르트 베커는 편을 바꿈으로써 살아남았다. 그들은 홀로코스트에 공개적으로 거리를 둘 기회라면 뭐든 찾아 나섰으며 그런 연유로 아이히만의 역할이 특별했음을 부각시켰다. 이는 전후 자신을 방어하는 데 매우 유용했다."(112, 116-7)
"그 잔악한 허풍쟁이는 자신이 총통 사후에 살아남기 위해 실제로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베를린의 어느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아이히만은 오래전부터 새 이름이 적힌 새 신분증들을 안전한 장소에 마련해두었다. 게다가 그는 디터 비슬리체니와 빌헬름 회틀에게 가족과 연락이 끊겼다고 거짓말했으며 도주 계획에 대해서도 가짜 정보를 흘렸다. 두 사람은 그 거짓말을 여기저기 퍼뜨렸다. 아이히만은 정말로 그렇게 조심해야 했다. 그의 부하들은 오래전부터 아이히만을 희생시켜 자신들은 피해를 보지 않은 채 새로운 시대로 진입했으면 하는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심지어 상관이기도 하고 오스트리아 시절 그를 당으로 인도한 오랜 절친 에른스트 칼텐부르너마저 체포되기 전에 그 달갑잖은 아이히만과의 관계를 끊으려고 갖은 애를 썼다. 마지막에는 아이히만의 오랜 부관들이 그에게 자신들을 떠나라고 요청했다. 〈수배 중인 전범〉과 가까이 하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다."(124)
"지하에서 활동하는 모임이 있고 1945년 이후 친위대 대원이라면 누구나 자동으로 그 회원이 될 수 있으며 그 조직이 흔들림 없이 존속할 것이라는 생각은 분명 공포와 희망의 판타지가 낳은 결과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분명한 것은 이데올로기에 투철한 추종자들은 이데올로기 발현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강화 요인인 국가가 무너졌다고 해서 이데올로기를 버리거나 동료들과의 결속을 버리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옛 친위대 대원들로 구성된 대규모 지하조직이 따로 존재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하에서, 특히 비합법적 상황에서 협력은 추천과 내밀한 관계를 통해 이루어졌다." "새로운 고향에서 아이히만의 멋진 출발을 약속해주는 것도 다름 아닌 옛 이름의 명성이었다. 친구들은 바로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그를 도우려 했다. 아이히만에게 리카르도 클레멘트는 처음부터 그저 신분증상의 이름에 불과했다. 아르헨티나로 도항하면서 그는 자유민이 아니라 이름도 되찾는다."(176, 181)
2장 막간극
"아르헨티나는 일시적으로나마 아이히만에게 안전한 곳이었다. 우선 은신처를 영리하게 잘 골라서 상당 기간 발각될 위험이 없었다. 게다가 아돌프 아이히만이 어둠 속에서 장기간 지낼 수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권력을 한창 과시할 때 그를 만난 동료와 피해자들은 그를 민첩하고 오만하며 야심 많은 인물로 기억했다." "사람들은 아이히만이 지하에서 사는 데 만족할 가능성은 없다고 봤다. 지배 인종의 일원으로 인간의 경계를 넘어버린 사람이 어떻게 작은 장소에서 무명의 존재로 사는 데 만족할 수 있을까? 아돌프 아이히만이란 사람이 기괴한 이상을 위해 싸우는 일을 정말로 중단할 수 있을까? 아이히만 추적이 초기에 엉뚱한 길로 빠졌지만 추적자들은 바로 그런 의문을 계속 갖고 있었다. 1945년 이후 아이히만 스스로도 그 질문이 가장 곤혹스러웠다. 1961년 이스라엘의 감옥에서 자문했을 때 그의 대답은 명료했다. 그는 〈익명으로 살아야 했기에 정신적으로 힘들었〉다."(195-6)
3장 아르헨티나의 아이히만
"오늘날 우리가 1950년대 초 사람들이 나치 범죄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었으며 무엇을 알고자 했는지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사실상 그들은 당시 어떤 것도 알지 못했다. 재건과 갱신의 와중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유대인 절멸에 대해 그래도 관심이 있었다면 이와 관련된 거의 모든 정보는 신문 보도, 다시 말해 전범 재판 보도를 통한 것이었다. 전쟁에 패한 국가에서 열리는 그 재판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승자 재판' '선전-증언' '흑색선전' '집단 책임' '복수 심판' 등의 용어가 퍼졌고 '600만 명'이라는 숫자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워 조금이라도 이해가 되도록 하려면 증거나 설명이 필요했다. 하지만 1953년에는 설명과 증거가 전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가장 손쉬운 대응은 불신과 억압이었다. 심지어 공범들조차 〈사실 정확한 것은 아무도 몰라요〉라고 말하면서 안도했다. 그런 상황에서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손쉽게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255-6)
"그런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한 인물인 아돌프 아이히만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 과거사를 부인하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아이히만은 그들이 정해놓은 진실, 즉 상황은 뉘른베르크에서 나온 이야기와는 전혀 달랐고 '유대인들이' 그런 규모의 대량학살을 지어냈다고만 말해야 했다. 아이히만의 진술은 독일인들에게 죄의 부담을 덜어내는 것이어야 했다." "당시 정말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이따금 그런 사람들이 있다. 여러 문헌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진실을 뒤집는 그런 억지 주장에서 주범 아돌프 아이히만은 그들이 내세우는 진실을 보증할 주요 증인으로 여겨졌다. 1950년대에 그 편집증적인 구원 희망은 광범위하게 퍼졌다. 그것은 아이히만 체포 직후에 우파 언론의 반응에서만 분명히 확인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히만의 증언이 유쾌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며 이스라엘에 경고하는 목소리는 도처에서 들렸다."(257-9)
"1955년, 독일에서든 망명지에서든 나치 몽상가들은 그해 몇 번이나 나쁜 소식을 접했다. 오스트리아는 국가 조약을 체결했다. 서독에서는 점령이 끝났고, 연방군이 창설되었다. 서독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고 할슈타인 원칙으로 외국에서 독일의 이익을 단독으로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여전히 나치 신념을 지닌 사람들에게 그것은 모든 대독일주의 이익의 거부 그리고 전승국, 특히 경멸 대상국인 미국에 귀속되는 것을 의미했다." "1955년 중반 쾰른에는 이스라엘 대사관의 전신인 이스라엘 공관이 생겼다. 그런데도 아르헨티나의 독일 애국 동지들은 여전히 대사면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제국으로서의 의지〉나 〈영원한 독일인의 불굴의 정신〉 같은 것은 볼 수 없었다. 독일로 돌아가 권력을 잡을 가능성은 전보다 더 희박해졌다. 향후 수년 동안 아르헨티나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독일에 잔존한 소수의 용감한 동지에게 일종의 초월적인 인종 승리에 대해 희망을 품도록 하는 것뿐이었다."(307-8)
# 할슈타인 원칙 : 대동독 강경책으로 동독과 외교관계를 맺으면 서독은 그 국가와 외교관계를 맺지 않겠다고 한 원칙
"부에노스아이레스인들은 유대인 학살에 관한 질문들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사는지를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상황을 아주 잘 알았기에 공적 영향이 매우 클 것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세계관 투쟁 다음 단계에서 필요한 일이었다. 그 증인, 즉 아이히만은 유대인의 음모를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기대되었다. 힘러의 참모장 경력자나 수용소 '의사' 경력의 요제프 멩겔레같이 소심한 사람들과는 달리 아이히만은 그런 기대에 조응했다. 아이히만이 보기에 대화는 자신에게 두 가지 이점이 있었다. 먼저, 뒤러 서클을 통해 아이히만은 혼자서는 확보할 수 없었던 신간들을 얻을 수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독일 책을 구입하는 것은 너무 비쌌다. 게다가 언론 매체 경험이 풍부한 동료들을 통해 아이히만은 급히 다시 갈구했던 것, 즉 자신의 역사적 의미를 만들고자 했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식들이 아버지의 아들임을 편하고 뿌듯하게 공개적으로 밝힐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319)
4장 이른바 사선 인터뷰
"아르헨티나에서, 말을 하려는 아이히만의 욕구는 그의 경계심보다 언제나 더 컸다. 이미 봤듯이, 그는 믿을 만하다고 여긴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신을 결코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사교 모임이나 퇴근 후 술집에서의 우연한 담소는 에버하르트 프리치와 빌럼 사선이 계획하고 있던 것, 즉 역사서와 시사 문제들에 대한 정연한 이야기와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그러므로 실행 계획을 세우고 그 프로젝트에 누가 더 참여할 수 있을지 고려하는─금전적인 이유로─진지한 협의가 이미 이루어져 있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훗날 빌럼 사선, 에버하르트 프리치, 아돌프 아이히만 모두 각자 확인해준 바에 따르면, 그들은 이 시점에 서로 계약을 맺어, 그 책의 판매 수익을 똑같이 나누어 갖기로 합의했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준 것이 〈유혈의 꿈〉이었단 할지라도, 그들 모두에게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재빨리 한밑천을 챙기는 꿈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삶에는 언제나 〈용병〉의 삶 같은 면이 있었다."(324-5)
"아이히만은 사람들 앞에 극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좋아했고, (자신이 대량학살 집행자로써 쓴 역사를 넘어) 후세에 뭔가를 남겨주고 싶어했는데, 이러한 점은 단지 망명에 따른 반작용이 아니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세 가지 상황이 그의 의욕을 더욱 북돋웠다. 첫째, 1955년에 유대인 절멸에 대한 첫 책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히만은 그 책들을 수많은 신문 기사와 마찬가지로 〈적의 문헌〉이자 도발로 여겼다. 둘째, 제3제국 몰락 이후 이념적 투사들에게는 글쓰기와 선전이라는 단 하나의 무기밖에 남지 않았다. 셋째, 그는 펜을 들고 실제로 이 싸움에 임하고 있는 사람들과 이때 처음 어울리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네 마음대로 이용가능한 출판사를 갖고 있었고, 또한 가장 중요한 점인데, 그들은 아이히만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관심 있어 보였다. 이 사람들이 바로 빌럼 사선과 에버하르트 프리치였다. 그의 시각에서는 극우 출판계에서 『길』이 맡고 있는 역할이 굉장해 보였을 것이다."(339)
"아이히만 같은 사람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 글을 쓴다. 역사 연구를 방해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몰아가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이다. 이런 글들이 확인시켜주는 신뢰할 만한 것은 단 한 가지로, 글이라는 것에는 그것이 진실을 말하든 거짓을 말하든 사고 작용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자기소개와 역사 왜곡을 해석하면서 드러나는 새로운 역사적 사실은 그의 생각 그 자체다." "아이히만은 이 책을 이용해 독일에서 자신의 이름뿐 아니라 자기 삶도 되찾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1950년대 초 서독의 형사 소추 실태를 살펴본다면 아이히만의 계획이 전혀 가망 없는 일이 아니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사형은 한 건도 없었고, 대체로 나치 범죄자들에 대한 기소는 비교적 관대한 처벌로 끝났다. 아이히만은 아무 문제 없이 독일에서 계속 잘 살고 있는 수많은 옛 동료를 알고 있었다. 전범들은 낮은 형량을 받으리라 기대할 수 있었고, 심지어 주요 나치 범죄자들에게도 공소시효가 만료될 것이었다."(343-4)
"아이히만의 〈내면적 도덕〉의 척도가 되는 것은 어떤 정의 관념이나 보편적 도덕 범주가 아니었고, 심지어 자기 성찰 같은 것도 아니었다. 아이히만이 보기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모든 평결이 잘못된 정치적 입장─〈조국의 윤리〉에서 벗어난, 결과적으로 독일 민족의 관점에서 벗어난 척도─에 기초하리라는 것은 너무나 뻔했다. 처음 읽으면 보편적 정의의 소환이나 모든 사람이 어떤 공통의 인간 법률에 따라 심판받아야 한다는 호소처럼 들리는 것이 면밀히 들여다보면 사실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평등권〉임이 드러난다. 아이히만은 자신도 인간이니 자신에게도 어떤 공통의 인간 법률이 적용되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의 요구는 어떤 민족사회주의적 도그마에 대한 인정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즉 모든 사람이, 무엇보다 독일 민족이 어떻게든 스스로를 변호하는 데 준거로 삼을 수 있는 것으로서 그 도그마를 인정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를 변호하는 것을 멈춘 적이 없었다."(349)
"아이히만은 〈이 총력전에서의 승리 아니면 독일 민족의 몰락〉임을 여전히 믿고 있었다. 승리가 선행되지 않은 〈평화 추구〉란 있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적〉 또한 유죄 인정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유일한 보편적 요소는 〈유죄〉이지 〈정의〉가 아니다. 전시의 모든 행동이 유죄로 분류되니 유죄임은 마찬가지다. 전쟁 범죄와 반인륜 범죄의 실제 가해자들은 집단 범죄 이론을 늘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것은 그들이 광범위한 유죄 군중 속으로 사라지게 해주었고, 나머지 사람들에게 그들이 공범이었다고 설득하게 해주었다. 보편적 유죄 주장은 또한 아이히만의 회피 구실이 되었다. 우선, 다른 모든 사람이 바로 아이히만과 똑같이 유죄라고 인정해야 했고, 그래야만 그도 유죄를 인정할 것이다. 모두가 유죄라면 아무도 유죄가 아닌 셈이며, 자백에 대해 법적인 결과가, 혹은 사실상 도덕적인 결과가 따르지 않을 수 있다. 이런 회피의 곡예는 비난에 의한 정당화라고 불릴 만하다. 이것이 규칙을 만드는 지배자 민족이었다."(350-1)
"아이히만의 말에 따르면 1944년 말에 한 통계학자가 힘러와 히틀러를 위해 어떤 수치들을 만들었고, 그래서 그는 그 수치들을 이용할 수 있었다. 〈특히 당시 두 차례 '총통 보고서' 초안을 수정해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훗날 그는 코르헤어 보고서로 악명 높았던 이 문서와의 관련성을 줄곧 부정했다. 하지만 진짜 거짓말은 세부에 숨어 있다. 이 통계 수치들은 사실 1943년 3월에 잡힌 것인데, 그는 이 통계학자의 보고서 날짜를 1944년 말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이런 식으로 날짜를 바꾸는 데 능숙했고, 자신을 좀 더 좋은 모습으로 그리기 위해 이런 기법을 자주 사용했다. 만약 누군가 그의 숫자 놀음을 눈치채면 그는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혼동할 수도 있다고 믿어주는 사람들의 마음에 의지했다. 1943년 초의 수치를 최종 수치로 제시함으로써 아이히만은 2년에 가까운 시간과 100만 명 이상의 살인을 지워버린 셈이다. 그것도, 앞선 수치가 애당초 맞는 것이었다는 전제하에 말이다."(358-9)
"아이히만은 자칭 〈제3제국〉의 지도자가 선언한 것처럼 정연명령이 사실상 〈자기 본질에 따라 살고 자기 인종의 가치를 수호하라〉라는 의미라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칸트의 가르침도 다른 어떤 철학도 인종생물학적 투쟁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분명히 깨달았다. 그에게 칸트는 절멸 정책을 시행하려 하는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인 〈이른바〉 도덕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칸트의 사상은 〈민족적인〉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아이히만의 일관된 민족사회주의적 태도의 증거이지만, 또한 절대적 권력에 대한 한결같은 욕망의 증거이기도 하다. 근본주의적 사상의 힘은 상급자가 내린 명령의 힘보다 훨씬 크다. 아이히만이 전체주의 체제에 그토록 수용적이었던 것은 그가 이미 전체주의 사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을 하고 하고 싶어했지만, 무엇보다 올바른 일을 했다는 존중을 받고 싶어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전향시키고 싶어했다."(382-3)
"이스라엘에서 아이히만은 끊임없이 글을 썼다. 그는 자기변호를 위해 상상 가능한 온갖 주제에 대한 광범위한 문서들을 생산했고, 언론을 위한 대중적인 글들도 썼다. 사람들이 그를 교수대로 데려가려고 왔을 때도 그는 여전히 마지막 문장들을 쓰고 있었다. 아이히만을 글을 쓴 변명자로 보는 것은 분명 옳지만, 이 홍수 같은 말을 읽는 사람은 다른 동기를 간과할 수 없다. 아이히만은 논쟁 놀이, 말의 힘, 그리고 자신의 조작 능력을 즐기고 있었다. 아이히만의 글에는 영향을 미치려는 욕구, 즉 독자를 제 뜻대로 이끌어 자신의 사고 구조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들려는 욕구가 항상 나타나 있다. 문명사회의 모든 규칙에서 벗어난 아이히만의 제안, 의견, 계획이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시기가 한때 있었다. 반유대인 정책이 절멸이라는 아이디어를 향해 나아가는 동안 그의 생각은 반유대인 정책의 개발에 영향을 미쳤다. 글로 쓰인 말의 힘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아이히만이었다."(398-9)
"1957년 가을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전후의 나치들에게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콘라트 아데나워가 서독 선거에서 과반 득표로 승리한 것이다. 독일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극우 운동은 이 선거의 승리를 막고 전후의 독일 정치에 전환점을 가져오는 것을 꿈꿨다. 그것은 1950년대에도 이미 현실과는 크게 동떨어진 꿈이었다. 이는 수포로 돌아갔으며, 그 길을 따라 다시금 독일의 상석으로 돌아간다는 전망 또한 좌절되었다. 아데나워가 깨달았듯이, 독일 국민은 더 이상 실험을 갈망하지 않았다. 이제 돌아갈 길이 없다는 것을 모두가 이해했고,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새로운 세계에 적응해야 할 터였다." "아르헨티나에서도 세상은 꽤나 달라져 있었다. 1957년에 이 나라는 앞선 10년간 페론 통치하에 누렸던 활기찬 호황기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 〈운동〉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고, 과거에 갇혀 있을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면 새로운 세계와 그 세계의 가능성에 보조를 맞추기 시작해야 했다."(524-5)
5장 안전하다는 착각
"뒤러 프로젝트가 실패하면서 아이히만과 사선이 계획했던 출판도 무산되었고, 이는 두 사람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다. 독일-아르헨티나 커뮤니티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나치 위계에서 하위에 속했던 〈덜 위태로운〉 망명자 다수는 자신이 자란 곳으로 돌아갈 필요를 느껴 유럽으로 돌아갔다. 서독과 오스트리아의 공소시효와 기타 회생법은 사형죄나 전쟁 범죄를 (또는 적어도 누군가 증명하려 애쓰고 있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만 아니라면 돌아와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에버하르트 프리치조차 1958년 3월 초 출판사를 포함해 모든 것을 싹 정리하고 잘츠부르크 근처의 집으로 이사했다. 아르헨티나의 독일 민족주의 공동체는 중요한 준거를 잃었고, 사선은 직장을 잃었다." "사선은 여전히 아이히만을 가끔 만났지만, 이제 더 흥미로운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 땅에 남겨진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541-3)
"아르헨티나에서 아이히만을 만난 적이 있거나 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그가 재판을 받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그들은 아이히만의 생각을 알고 있었고, 더 중요한 것은, 아이히만이 한 말을 들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그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나치 네트워크, 탈출 및 원조 조직, 통신 경로에 대해 알고 있기에 사람들의 삶은 매우 불편해질 수 있었고, 아이히만이 독일 당국에 그것들에 대해 발설할 경우 미칠 여파는 생각도 하기 싫은 것이었다." "아이히만의 재판 회부 가능성을 걱정하는 것은 아르헨티나의 망명자들만이 아니었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있는 많은 사람에게 심각한 문제가 야기될 것이었다. 너무나 많은 옛 나치가 서로의 개인사를 무해한 것처럼 보이도록 다듬어 새로운 경력을 만들었다. 아이히만이 등장하면 그의 옛 동료들이 세심하게 쌓아 올린 외관은 무너질 위험에 처할 것이다. 당시 위기에 처한 것은 그들의 깨끗한 경력, 높은 지위, 높은 급여였다."(545-7)
"1960년 5월 23일, 아이히만의 재등장 소식이 빠르게 퍼졌고, 흥분된 움직임이 일어났다. 아이히만 납치는 1945년 5월 패배 이후의 그 어떤 사건보다 친위대 사람들과 기타 대량학살 가해자들의 삶을 더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그것은 그들 서로 간의 상호작용 방식을 영원히 바꾸어놓았다. 편안한 망명생활과 옛 동료들 간의 자연스러운 신뢰는 갑자기 끝났다. 유대인 절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사람들의 경우에는 새로 알게 된 사실로 인해 향수의 감정을 떨쳐버리게 되었고, 또 다른 사람들은 다시 한번 갑자기 도망자가 되었다. 그들은 정상 상태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그들은 (주의를 환기한) 내가 옳았음을 안다.〉 동요된 요제프 멩겔레는 일기에 이렇게 썼고, 1960년 10월에 더 멀리 브라질로 이주했다. 전쟁이 끝난 지 15년 후, 해외 거주자들은 자신들이 주의를 끌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갑자기 상기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전략을 짤 시간이 조금밖에 없었다."(591, 599)
"이스라엘에서의 최종 진술에서 아이히만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대리인으로서 재판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햇다. 그 스스로가 세상 어떤 처벌도 충분치 않을 정도의 죄를 진 만큼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이상적인 대리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독일 민족은 아이히만 혼자서 600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할 수 있어서 무척 기뻤다. 〈독일 청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공개적으로 목매달겠다는 그의 제안은 기괴했지만, 그 재판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드러냈다. 이스라엘은 카타르시스를, 집단적 죄에 대한 집단적 반성을 바라고 있었고, 심지어 아이히만은 자신의 왜곡된 순교가 자신의 비참한 상황에 비애와 장렬함을 부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하지만 가해자, 협력자, 자발적 동조자들은 그저 자신들의 희생양을 없애고 싶을 뿐이었다. 아이히만은 가족에게 보낸 작별 편지에서 〈역사가 평가를 만들어내도록 맡겨두자〉라고 썼다."(604-5)
6장 역할 변경
"아이히만이 예상치 못하게 자신의 대적에 의해 투옥되었을 때, 그는 유포되고 있는 자신의 이미지들 중 어떤 것이 자기변호에 가장 유용할지를 이미 정해놓은 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아르헨티나에서 생산해낸, 유죄를 뒷받침하는 글들 없이, 신중한 관료의 이미지를 내놓았다. 이 역할을 통해 그는 자신을 교수대에서 구해주리라고 기대한 두 가지를 하나로 합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 학살에 대한 독점적 지식과 자신의 무죄였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통찰력을 내세울 여지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알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그 유명한 〈유대인 문제〉 전문가이자 절멸 프로젝트의 부처 간 조정자, 상관들과 함께 난롯가에서 코냑을 마시며 그 일의 실행을 축하했던 남자가, 스스로는 아무 힘도 없는 무력한 회의록 작성자로 변신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책략을 매우 자랑스러워했고, 관찰력 있는 심문관은 이 피의자가 전략적 계책을 부릴 때 특히 활기를 띤다는 것을 알아챘다."(610-1)
"권력을 갖고 있던 시절에 아이히만은, 처한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으려는 희생자들의 희망을 가지고 기만적인 게임을 벌여, 저항도 없이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아르헨티나에서 그는 옛 동지들의 존경과 도움을 얻기 위해서, 민족사회주의가 절멸의 명령과는 별개일 수 있다는 그들의 기대를 확인해주었다. 이스라엘에서 그는 자신이 〈유대인의 본능〉이라고 여기는 것, 즉 이해하고 앎을 얻으려는 유대인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려 노력했다. 사람들이 목숨을 걱정하고 있었든, 아니면 그가 악의 이론을 사실로 확인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든 간에, 그는 거울처럼 사람들의 두려움과 기대를 반영했다. 그 모든 거울 이미지 뒤에는 아이히만의 권력의지와 사람들의 생각을 통제하려는 그의 욕망이 근면함으로 위장된 채 놓여 있었다. 단 한 가지가 줄곧 아이히만을 부주의하게 만들고 따라서 취약하게 만들었는데, 그것은 바로 〈개인의 익명성〉을 떨쳐내야 했던 그의 확연한 인정 욕구였다."(616)
7장 막후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