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의 시간 - 제2차 세계대전 패망 후 10년, 망각의 독일인과 부도덕의 나날들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들
하랄트 얘너 지음, 박종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들어가는 말: 불행 사이로 비치는 행복 7 


"1945년 여름, 독일 땅의 7500만여 명의 무리를 하나의 인간 사회라고 부르기는 어려워 보였다. 대신 '공백기' 혹은 '늑대의 시간'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인간은 다른 모든 인간에게 늑대'라는 말이다. 다들 자기 자신이나 자기 무리에만 신경을 쓰는 분위기는 1950년대 깊숙이 들어서도 이 나라의 자화상을 이루었다. 1950년대 후반에는 상황이 나아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만의 보호 공간인 가족 속으로 숨어들었다. 1950년대 후반부에 공동체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설립된 '게마인진Gemeinsinn' 시민운동가들이 다수의 비정치적인 독일인을 비난하는 말로 사용했던 그 유명한 '오네미헬 씨'의 모습에도 그 늑대는 계속 살아 있었다. 예전에 대동단결했던 민족 동지들이 이제 자기만 아는 늑대로 타락해버린 것이다." "이 책은 뿔뿔이 흩어졌거나, 강제로 끌려갔거나, 도망쳤거나, 남아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다시 뒤섞여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고, 이전의 민족 동지들이 어떻게 다시 서서히 시민이 되어갔는지를 다룰 것이다."(8-9)


# Ohnemichel. 'Ohne'(Without)와 'mich'(me)를 합성한 말로서 '나 없이 하라는 뜻'인데, 'mich'에다 'el'을 붙인 미헬은 일반적인 독일인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나는 나와 내 가족만 신경 쓰고 살겠다는 독일인을 의미한다. 


"이 책의 중점은 잔해 청소와 사랑, 도둑질, 쇼핑 같은 일상의 문명적 측면에서 차츰 정신생활과 미적 디자인 같은 문화적 측면으로 넘어간다. 전쟁 이후 사람들은 오늘날보다 훨씬 더 예술을 사랑하고, 섬세한 감각을 즐기고, 끊임없이 진지한 토론에 빠졌다. 좋았던 옛 시절로 미화되던 19세기와 함께 끝나버린 사교 형식을 다시 이어가기라도 하는 듯했다. 오늘날 우리는 홀로코스트에 대해 많은 것을 안다. 반면에 당대인들이 홀로코스트의 그늘 속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는 잘 모른다.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 수백만 명을 살해한 나라가 어떻게 도덕과 문화를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 양심이 있다면 어떻게 그런 것을 다시 입에 올릴 수 있었을까? 무엇이 좋고 나쁜지는 그들의 자식들이 스스로 찾도록 내버려두어야 하지 않았을까? 언론의 해석권도 호황을 누렸다. 모두가 '의미에 대한 갈증'을 이야기했다. '실존의 폐허 더미' 위에서 철학을 하는 것은 정신의 약탈 행위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감자를 훔치듯 의미를 훔쳤다."(14-5)


1. 제로 시간?


"후대에 침울한 통곡의 대가로 기억될 26세의 극작가 볼프강 보르헤르트는 계속 살아가는 것의 짐을 자기 세대의 절박한 선언으로 바꾸고자 했다. 한 장 반짜리 텍스트 〈이별 없는 세대〉에서 그는 말 그대로 과거가 사살되어버린 세대의 새 출발을 격정적인 단호함으로 노래했다. '이별 없는 세대'는 제로 시간의 선언이었다. 〈우리는 귀향 없는 세대다. 귀향할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도착 세대다. 어쩌면 새로운 별에, 새로운 삶에 완벽하게 도착한 세대일지 모른다. (···) 우리는 이별 없는 세대지만, 모든 도착이 우리 것임을 알고 있다.〉 '이별 없는 세대'는 돌아볼 용기가 없는, 남겨진 자들의 시적 선언이다. 이 모든 일이 어떻게 그런 식으로 일어날 수 있었는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는 다수 독일인의 충격적인 태도가 여기서 원칙으로 대두한다. 경험한 것이 적힌 칠판은 지워지고, 새로운 글과 '새로운 신'을 위한 자리가 마련된다. 바로 '새로운 별'에의 도착이다. 그것은 의식적인 과정이다."(29-30)


2. 폐허 속에서


"폐허 영화가 인기를 끈 이유는 단순했다. 파괴된 도시의 파노라마가 이색적으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끔찍한 모습이라고만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는 아무리 봐도 폐허에 질리지 않았다. 자기 내면의 거울로 느낀 것이다. 심지어 누군가는 전쟁 이전 세상의 본질을 이루고 있던 것이 이제야 마침내 눈앞에 똑똑히 드러나는 것 같은 느낌까지 받았다. 그들은 폐허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이러한 완전한 몰락 속에 숨겨진 내적 연관성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 폐허가 세상의 진짜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는 느낌이 많은 사람을 엄습했다. 그들은 카메라를 들고 폐허 속으로 들어가 '경고 사진'을 찍었다. 황량한 잿더미를 보여주는 사진마다 한결같이 붙은 제목이었다. 물론 그들은 폐허의 모습에서 자신들을 사로잡은 공포를 묘사하고 싶었다. 하지만 산산조각 나고 검게 그을린 드레스덴처럼 끔찍한 광경조차 이 재앙에서 눈앞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끄집어내려는 사진작가들의 야심을 가로막지는 못했다."(55-6)


3. 대이동


"피난민 행렬에는 무척 대조적인 두 그룹이 있었다. (외국인) 강제 징용자와 동쪽의 실향민이었다. 해방된 징용자들에 대한 군정의 태도는 여러 차례 바뀌었다. 해방 직후에는 온정주의적 시선이 지배했다. 그래서 강제 징용자들은 잔학한 나치의 희생자로서 여건이 허락하는 한 폭넓은 지원을 받았다. 예를 들어 연합군은 징용자들에게 우선적으로 풍족하게 배급할 것을 각 상점에 지시했다. 이는 독일인들에게 동요와 증오를 일으켰다. 그렇지 않아도 물건은 달리고 배급량도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수년 동안의 수용소 노예 생활은 많은 징용자에게 심각한 행동장애를 일으켰다. 그들은 자신의 불만을 난동으로 풀었고, 마음에 차지 않으면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에게까지 공격적이고 폭도적인 태도를 보였다. 예를 들면 여러 사정으로 그들이 원하는 만큼 보살펴줄 수 없었던 연합군 군인들에게 말이다. 그들의 이런 파괴적인 행동 때문에 급기야 연합군 병사들도 존중과 이해심을 잃을 때가 많았다."(82-3)


"수용소의 긴장 상황은 연합군 군정이 최대한 많은 징용자를 집으로 돌려보내려던 1946년 여름부터 반대 방향에서 밀려든 새로운 사람들로 더욱 꼬였다. 동유럽, 특히 폴란드에서 10만 명이 넘는 유대인 난민이 독일로 한꺼번에 몰려왔다." "나치 치하에서 살아남은 얼마 안 되는 폴란드 국적의 유대인들은 이미 그전에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충분히 겪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재차 끔찍한 학대의 희생자가 되었다. 이번 가해자는 폴란드인들이었다." "수백만 명의 폴란드 징용자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동안 반대 방향에서도 폴란드 국적의 유대인들이 독일 땅으로 들어오면서 방금 비워진 수용소 공간을 채웠다. 이들 유대인의 탈출은 런던의 폴란드 망명 정부와 유대인 이주 단체 '브리하Brichach(탈출)'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 단체의 목표는 팔레스타인 이주를 원하는 유대인 징용자들의 유입을 최대한 장려함으로써 미국이 영국에 압력을 가해 팔레스타인 정착 금지 조치를 해제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87-9)


"1960년대에 독일연방공화국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외쳤던 '통합의 기적'은 사실 내용 면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니었다. 많은 독일인이 고향을 잃고 떠나온 동쪽의 동포들을 외국인 징용자만큼이나 야멸차게 대했다. 누군가는 그걸 보고, 독일인들의 그런 이기적인 행동이 적어도 인종주의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끄집어내며 스스로를 위안할지 모른다. 아무튼, 동쪽의 실향민들은 금발이건 파란 눈이건 상관없이 하찮은 '집시 떼거지'로 멸시받을 때가 많았다. 게다가 그들은 헝가리나 루마니아 이웃들에게서 특별한 취향을 물려받았는데, 일례로 파프리키와 마늘에 대한 선호가 그렇다. 이는 서독 주민들에게 상당한 혐오감을 자아냈다. 그럼에도 선의를 가진 사람들은 늘 공통의 민족적 뿌리를 입에 올리며 통합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당시 당국이 '전입자'라고 부른 새로운 이주민들은 거부의 벽에 부딪혔다. 결국 '통합의 기적'은 경찰의 개입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106-8)


"인종주의는 죽지 않았다. 다만 이제는 그 창끝이 내부로 향했다. 당시에는 하나의 독일 민족이 아닌 '독일 부족들'이라는 말이 자주 회자되었다. 그러니까 오버바이에른 사람이건 프랑켄 사람이건, 아니면 팔츠나 튀링겐 사람이건 여러 부족의 피가 섞이는 것은 지역적으로 뿌리내린 민족 집단의 고유성을 해치는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다. 독일제국의 붕괴 이후 민족 공동체의 이념은 빛을 잃었지만, 독일인들의 오만함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나치의 선전 구호였던 하나의 단일 민족은 부인되었고, 사람들은 이제 정체성의 결정적 특징으로 갑자기 지역을 부각시켰다. 많은 사람이 독일의 내부 이주를 일종의 다문화적 공격으로 보았다. 그와 함께 부족주의가 성행했고, 사람들은 부족의 일원으로서 풍습, 관습, 종교 제의, 방언을 통해 다른 지역민들과 자신을 구분했다. 특히 보헤미아계 독일인이나 바나트 슈바벤인, 슐레지엔인, 포메른인, 베사라비아 독일인 같은 온갖 '폴란드 잡것들'과는 더더욱 거리를 두었다."(110-1)


4. 댄스 열풍


"우리는 전후 시대를 지극히 어두운 시기로 상상한다. 시대의 이미지, 특히 후대의 잔상은 주로 찡그린 얼굴과 절망적인 표정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 시대의 곤궁과 불안은 결코 낯설지 않다. 하지만 야간 폭격의 공포와 점령 초기의 불확실성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살아남은 것에 대한 기쁨이 화산처럼 분출되었다. 폐허 더미에서 느끼는 일상의 상실조차 이런 에너지를 가로막지 못했다. 아니, 그 반대였다. 재앙에서 벗어났다는 감정과 예측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미래는 오히려 삶에 대한 집중도를 더 높였다. 많은 사람이 순간을 위해 살았다. 순간이 아름다우면 마지막까지 만끽하고 싶어 했다. 이는 끓어오르는 삶의 기쁨으로 분출되었고, 때로는 거의 광적으로까지 비치는 향락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삶의 위협은 여전히 곳곳에 존재했기에 사람들은 삶을 마음껏 즐기고 싶어 했다. 그야말로 댄스 열풍이 불었고, 가능한 곳이며 어디서건 정신없이 놀았으며, 남이야 눈살을 찌푸리든 말든 미친 듯이 웃어댔다."(139-40)


"카니발은 전후 독일인들의 야누스적 측면을 드러내는 인기 있는 메타포였다. 항복 사회는 서서히 쾌락주의 사회로 넘어갔다." "전후 시기의 파티는 가라앉고 있는 배가 아니라 이미 가라앉은 배 위에서의 춤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아직 살아 있음에 스스로 깜짝 놀랐고, 그 기분에 취해 이상한 바보 같은 짓에 발작적으로 덤벼들었다. 역사가 프리드리히 프린츠는 많은 독일인을 사로잡은 이 이해할 수 없는 들뜬 분위기를 보면서 전통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장례식 뒤에 여는 추모의 연회를 떠올렸다. 〈전쟁의 신 마르스가 들판을 깨끗이 휩쓸고 지나가자〉 궁핍과 불행이 대지에 만연했지만, 〈시신을 땅에 묻고 공동묘지에서 돌아오는 조문객들이 식당에 마련된 커다란 추모의 연회장에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자신들도 모르게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런 분위기가 퍼지곤 했다. 처음에는 주저하다가 점점 더 뚜렷해지는 명랑함, '살아 있는 자의 달콤한 습관'에서 아직 벗어나지 않았다는 기쁨의 감정이〉."(165-6)


5. 파괴된 도시의 사랑


"전쟁 기간에 여자들은 남자 없이도 대도시가 충분히 운영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아버지 없는 가족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서로에게 의지하는 자기들만의 은밀한 공동체로 바뀌어갔다." "남편이 돌아왔을 때 어머니들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계속 맡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싸우지 않고는 얻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역할에 더는 적합해 보이지 않던 대부분의 남자들이 욕설과 분노 같은 정말 최악의 수단으로 자신들의 옛 자리를 고수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아내들의 주도하에 경제적 형편이 더 나아질수록 자신들이 집에서 잉여 인간이라는 느낌을 억누를 수 없었다. 반면에 가족이 궁핍에 시달릴 경우 귀향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가족의 부양에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수치심에서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다. 여자들의 역할과 분투를 애써 깎아내린 것이다."(174-7)


"아무리 위험한 시대여도 사랑의 요구는 별로 줄지 않았다. 마르그레트 보베리가 일기에 썼던 〈죽음과의 지속적인 밀착〉으로 인한 〈삶의 기쁨〉의 무한한 상승은 성적인 측면으로 표출되었다. 많은 여성이 이제야 드디어 다시 뭔가를 경험하고 싶어 했다. 전후 첫 몇 개월을 지배했던 새 출발의 설레는 분위기, 그리고 불안과 외로움이 만들어낸 야릇한 흥분은 기괴한 특성을 띤 성적 굶주림으로 이어졌다." "전후 여자들의 성적 활동은 당대에 회자되던 여성 과잉으로 날개를 달았다. 아름다운 여자는 많았지만 남자는 희박했다. 살아남은 남자들도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 목발을 짚거나, 가래 끓는 소리를 내거나, 아니면 피를 토했다. 여성의 존엄에 상처를 낸 것이다. 그러나 이건 사랑의 문제만이 아니라 생계의 문제이기도 했다. 특히 노동 시장의 전망이 곧 다시 악화되자 생업 활동은 모든 여성에게 지상 최대의 행복으로 비치지는 않았다. 여성 과잉은 취업 전선에서 여성들 간에 반목의 싹이 되었다."(193, 199-202)


"어디서건 풀어헤친 자세로 앉아 있거나 편안하게 구는 미국식 생활 방식은 누군가에겐 거부감을 불러일으켰지만 누군가에겐 매력적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적국에서도 그렇게 자유롭고 편안하게 행동하는 남자들 속에서 자신들이 모르고 있던 사적 친밀감과 편안한 남성성을 인지했다. 즉 부담 없는 남성상이었다." "이런 아가씨들은 곧 '베로니카 당케쇤Veronika Dankeschön'이라 불렸다. 성병Venereal Disease의 약자 VD를 변형한 말장난이었다. 그러나 이런 위험에도 독일 여자들과 미군은 전력을 다해 관계를 맺었다." "젊은 독일 여성들이 미군을 찾은 데는 문화적 또는 하위 문화적 동기도 숨어 있었다. 즉, 고루한 독일적 삶의 방식과 비좁고 숨 막히는 환경에서 탈출하려는 욕망도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대다수 독일 역사가들은 당시 여성들에게 낯선 것에 대한 욕망이 존재했고, 바로 그 속에 미군들에게 매력을 느낀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오랫동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222-4)


6. 약탈, 배급, 암거래: 시장경제를 위한 수업


"약탈의 순간에는 미친 듯한 탐욕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어디에 쓸지 알 수 없는 물건도 일단 맹목적으로 확보하려 했다. 중요한 것은 남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제정신이 돌아오면 그렇게 기를 쓰고 모은 물건들을 그냥 길에 버리기도 했다." "새로운 시장들은 연합국의 지시로 예전의 행정 관료와 직원들을 다시 일터로 불러들였다. 종전 상황의 혼란 속에서 명맥만 남은 공공 업무를 정상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에 대한 정치적 심사는 나중에야 이루어졌는데, 이 심사로 나치 전력이 있는 사람들은 미국과 소련 점령 지구에서 자주 해고되었다. 반면에 프랑스와 영국 점령 지구에서는 탈나치화가 좀 더 느슨하게 진행되었다." "점령 지구 내의 관료들은 개인적 정치 성향과 상관없이 집권 세력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독일 관료주의의 전통적 이상을 따라, 나치 정권에 충성했던 것과 같은 태도로 연합국 행정부의 지시에 순순히 따랐다."(239-42)


"거의 종전 직후부터 배급표가 다시 발급되었기에 사람들은 이 시스템을 앞으로도 계속 공정하게 관리할 국가기관도 분명 존재할 거라고 생각했다. 배급표는 〈살아갈 권리 증명서〉로서 그 소유자에게 전면적인 패배 이후에도 생존권을 문서 형태로 쥐고 있다는 일종의 확신을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배급표가 거기에 명시된 양 만큼의 식료품과 지방, 설탕을 실제로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실망감은 더욱 커졌다. 약속된 1550칼로리는 곧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최악의 궁핍 시기인 전후 첫 3년 동안에는 고작 800칼로리만 배급될 때도 있었다." "연합군의 지시로 강제 노역과 강제 수용에서 해방된 외국인들에게 식량 배급 면에서 특혜가 주어지는 것에 대해 시기와 분노를 느끼는 독일인이 많았다. 사실 그 사람들이 독일인들보다 더 많은 칼로리를 제공받은 것은 수년 동안 영양실조에 빠져 있던 건강 상태를 고려한, 정당한 의학적 조치였다. 그럼에도 많은 독일인이 그에 대해 분개했다."(246-50)


"세상 사람들의 눈에 '독일인들'은 전쟁 범죄와 제노사이드를 통해 가해자로 낙인찍힌 지 오래였다. 그들은 문명과 작별했고,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국제 사회의 대열에서 이탈했다. 망명 독일인들만 그런 국가의 일원임을 스스로 거부했다. 국내에서는 정권을 수치스러워했던 나치 반대자들조차 국제 사회에서 자신들의 이미지가 얼마나 추락했는지 분명히 알지는 못했다. 다수 독일인은 유대인 수백만 명에 대한 학살과 독일 국방군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무척 특별한 방식으로 질서와 품격을 갖춘 나라라는 감정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궁핍의 시기에 범죄가 사회적 일상이 되었다는 사실에 더더욱 경악했다. 집단적 인식이 이보다 더 왜곡될 수는 없어 보인다. 국외에서는 전후의 시스템 붕괴를 독일을 재사회화할 기회로 바라본 반면에 독일인들은 이제야 범죄의 구렁텅이에 빠진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이 두려워한 문명의 몰락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지만, 그들의 머릿속엔 그런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265)


7. 경제 기적과 부도덕에 대한 염려


"서독을 무기한 먹여 살릴 뜻이 없었던 미국은 경기를 부양할 방법을 찾았고, 그에 결정적인 장애물이 사람들에게 별 인기가 없는 라이히스마르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할 여유가 없다'는 말은 전후에 자주 나돈 말 가운데 하나였다. 앞서가는 건 항상 암시장이었다. 독일 노동력의 절반 이상이 물물교환과 좀도둑질, 불법 거래에 매달렸다. 오직 주거권과 식량 배급표만 얻기 위해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도 많았고, 일자리를 얻은 다음에는 더 중요한 일로 눈을 돌렸다. 이런 상황에서 정규 경제를 활성화하려면 신권 화폐의 필요성을 일깨움으로써 암거래의 매력을 떨어뜨리는 일뿐이었다. 실제로 화폐 개혁이 이루어지자 정규 직업에 종사하려는 사람과 불법 거래 대신 정상적으로 거래하려는 상인의 수는 빠르게 증가했다." "식량 배급 제도는 아직 없어지지 않았고 많은 사람이 곧 찾아온 물가 상승의 파고로 힘들어했지만, '상품 세계'의 갑작스러운 증가는 사람들에게 최소한 미래에 대한 뚜렷한 희망을 안겨주었다."(291-2)


"자동차 공장 도시 볼프스부르크는 통일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혼돈의 조합이었다. 석방되었지만 오갈 데 없는 군인들, 전쟁을 경험한 뒤로 어떤 형태의 안락함도 견디지 못하는 고향을 잃은 젊은이들, 그리고 더는 집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는 이전의 강제 노역자들로 이루어진 외롭고 좌초된 남자들의 수용소였다." "1948년 니더작센 지방 선거에서 볼프스부르크는 최악의 모습을 보였다. 극우 정당인 독일우파당DRP이 2만 4000표 가운데 1만 5000표를 얻어 시의회에서 원내 1당이 된 것이다. '볼프스부르크의 충격'으로 역사에 기록된 이 참담한 결과가 나온 지 몇 개월 뒤 선거 결과는 무효화되고 볼프스부르크 사람들은 재투표를 해야 했다." "이유는 빠르게 밝혀졌다. 너무 많은 남자, 너무 많은 피난민, 너무 많은 실향민, 너무 많은 퇴역 군인, 너무 많은 젊은이 때문이었다. 사회가 유지되려면 영속 가능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이 도시엔 그런 믿음을 담보해줄 것이 전혀 없었다."(309-12)


"공장은 볼프스부르크 사람들에겐 전부였고, 공장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대규모 감원 조치에도 여전히 남아 있던 중하위급 소수 핵심 직원들은 나치 시대와 독일노동전선의 이념에 아직도 깊이 경도되어 있었다. 반면에 과학 기술에 대한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기술자들은 온 마음으로 자신들과 공장이 하나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금속 노조가 볼프스부르크에 파고들 여지는 거의 없었다." "볼프스부르크는 이른바 '공장 사회'의 이상이 되었다. 어떤 공장도 그 악명 높은 '국가독점자본주의'를 이보다 더 명확하게 보여줄 수는 없을 듯하다. 국가독점자본주의는 국가와 민간 자본이 서로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하나로 밀착해서 움직이는 시스템을 가리킨다. 1960년 폭스바겐법VW-Gesetz에 따라 공장은 민영화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나더작센주와 연방공화국은 각각 20퍼센트의 지분을 소유했다. 그런 까닭에 폭스바겐이 '독일'이라는 주식회사의 준 국유 기업이라는 인상은 바뀌지 않았다."(313, 316-7)


8. 재교육자들


"연합국들이 합의한 탈나치화와 재교육 정책은 처벌과 신뢰 구축 사이의 균형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러니까 국내에 남은 진짜 나치 반대자들의 도움을 받아 나치 잔당을 배제하고 단순 부역자는 순화 교육을 시키자는 것이다. 승자의 선의에 대한 기본 신뢰 없이는 지속적인 평화를 장담할 수 없었다. 이 일에서 소련은 이론적으로 비교적 쉬웠다. 소련의 역사 인식에서 독일인들이 자신을 공격했다는 사실은 프롤레타리아의 객관적 이익에 부합하지 않았다." "소련은 파시즘을 노동자 계급에 대한 극악한 독재로 해석하면서 신속한 용서로 나아가는 이데올로기적 길을 제시했다. 그들은 독일 국민이 파시즘에 충분히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가 있다고 보았을 뿐, 많은 미국인이 의심하는 것처럼 독일인들 속에 근본적인 악이 존재한다고는 보지 않았다. 현실에서 소련은 미국이나 영국보다 독일 국민에게 훨씬 더 큰 공포를 안겨주었지만, 그들은 첫날부터 독일인들에게 화해의 비전을 제시했다."(349-50)


"미국에서 독일의 고급 문화를 이해하고 예찬하는 사람은 기껏해야 소수의 독문한 전공자나 이민자밖에 없었다. 대다수 미국인은 독일의 문화 전통에 회의적인 눈초리를 보냈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 많이 배웠다는 독일 교수들이 왜 하필 최악의 나치에 동조했는지 의문을 품었다. 그러다 보니 새로 재건되는 언론에 독일의 전직 언론인들이 대거 참여하는 것에도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스 하베는 연합군이 독일인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야 옥석을 가려낼 수 있고, 그래야 탈나치화에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베는 1945년 10월 17일, 그가 책임 편집을 맡고 미군정의 정보관리부에 의해 출간된 전국지 《노이에차이퉁》을 탄생시켰다. 신문은 적어도 절반 정도는 독일 지식인들의 의견 발표장이기도 했다." "이런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를 미 당국은 의심의 눈초리로 주시하고 있었다. 하베는 곧 사상적으로 별 믿음이 안 가고, 독일인 동족한테 완전히 속아 넘어간 헛똑똑이로 여겨졌다."(354-5, 358)


"종전 이후 모든 독일인이 당연히 연합군의 의심을 받았다. 그건 전쟁의 논리였다. 반면에 나치 공동체의 논리도 있었다. 망명에서 돌아온 독일인들은 자신들을 심판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조국이 싫어서 도망친 자들에게 어떻게 그럴 자격이 있겠는가? 따라서 돌아온 망명객들이 국내 독일인들을 심판대에 세우거나 교육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심각한 월권행위로 여겨졌다. 하베는 가까운 독일인 그룹에선 좋은 평가를 받았을지 몰라도 안전한 편집국만 벗어나면 가슴을 답답하게 짓누르는 혐오감을 느꼈다. 독일인들은 망명에서 돌아온 자들의 오만함에 맞서 단단한 밀집대형을 갖추었다. 그건 결코 은밀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나쁜 의도를 가진 나치 잔당들의 단순한 불평불만에 그치지도 않았다. 이제는 숨어 투덜거릴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전후의 서쪽 지구에서는 토론 문화가 활발하게 발전하면서 서방 연합군의 비호를 받던 망명객들을 공개적으로 공격할 장이 활짝 열렸기 때문이다."(360-1)


9. 예술 냉전과 민주주의 설계


"전후 독일에서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미술이었다. 첫 전시회가 열리자마자 예술적 양식 문제는 정치적 노선의 시험대가 되었다. 그림에서 '뭔가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럴 필요가 없는지 하는 문제는 일반 사람들뿐 아니라 정치 진영과 국가들까지 갈라놓았다. 그림 위의 한 밝은 점은 그냥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즐겨야 하는가, 아니면 그림 외부의 어떤 실제적인 것을 암시해야 하는가 하는 추상미술의 결정적 쟁점은 세계를 둘로 나누었다. 이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예술이 냉전의 전쟁터가 되면서 추상미술은 서방의 창조적 횃불이 되었고, 사실주의는 사회주의의 미학적 계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워하는 관객을 위해 많은 신문에 동시대의 예술 경향에 대한 설명이 잇따라 실렸다. 거부 반응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독일 사회에는 현대미술에 대한 거부감 외에 새로운 것을 알고자 하는 욕구와 문화에 대한 진지한 관심도 팽배했다."(392-3, 396)


"동쪽과 서쪽의 독일인들이 점점 더 멀어질수록 추상미술은 서독에서 주도권을 잡기가 한결 쉬워졌다. 동독의 구상미술 원칙이 분명해질수록 추상미술 역시 정치 체제의 미학적 대안으로 자리매김하고, 서독의 대표적 예술 양식으로 올라서는 것이 한층 수월해졌다는 말이다. 자유의 예술로 이해되는 추상미술은 신앙고백과 같은 카리스마를 얻었고, 이 카리스마는 정치와 분명히 선을 그을 때 더욱 설득력 있게 발산되었다. 추상미술은 존재의 유희적 축제를 묘사했고, 커다란 캔버스 위에 자유롭게 분출된 순수 생명 에너지를 구현했다. 또한 물감은 주걱으로 퍼서 바르거나, 방울방울 떨어뜨리거나, 표면에 두꺼운 덧칠을 함으로써 재료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가치의 구현이기도 했다. 미국 정보 요원 도널드 제임슨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인들은 추상미술의 도움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실제보다 훨씬 더 양식화되고 경직되고 편협한 것으로 비치게 하는 데 성공했다.〉 따라서 그들은 추상미술을 힘껏 장려했다."(406-7)


10. 억압의 소리


"인간은 억압을 소리 없는 과정으로 상상하기 좋아한다. 그런 면에서 당시엔 전후의 정적, 무기와 언어의 침묵에 대한 글이 많이 나왔다. 심지어 전후 독일인들은 옛 시절을 회고할 때 스스로를 그동안 겪은 일을 일단 말없이 견뎌내야 했던 위대한 침묵자로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말을 삼가는 분위기는 여기저기 있었을지 모르지만, 대체로 말이 없지는 않았다. 아니, 현실은 그 반대였다. 특히 많은 독일인이 자기 문제에서는 그야말로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독일인들의 고통을 다른 민족의 어떤 고통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최상급으로 표현한 글은 언론과 소책자, 논문에 넘쳐난다. 이 대목에서 말 그대로 억압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글의 저자들은 진정한 희생자들에 대한 일말의 고려도 없이 오직 자신들의 고통에만 빠져 허우적거렸다. 어떤 이는 당시에 이미 패자의 신분으로 세계정신의 꼭대기에 오르기라도 한 듯 자신들의 극심한 치욕을 정신 영역의 리더십에 대한 요구로 바꾸었다."(430-1)


"그들을 불행으로 몰아넣은 것이 악마든 광기든 자본이든, 혹은 그들 자신의 탐욕이든 독일인 다수는 이제 그 문제를 잊자고 하면서 어깨를 으쓱하고는 비판의 대오를 해산했다. '나는 내 문제만으로도 벅차.' '이제부터는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할 거야.' 독일인들이 서로에게서 확인한 것은 기본적으로 회의적인 태도였다. 이런 태도는 그전의 민족 공동체가 요구한 '대동단결'에 대한 역사적 대답이었다. 이제 독일인들 사이에서는 불신과 피로감이 넘치고, 꼭 필요한 것으로만 축소된 결속이 만연했으며, 그 속에 자신들의 엄청난 모순을 숨겼다. 사람들은 암시장에서의 일상적인 속임수에서, 그리고 거처와 빵, 석탄을 얻으려는 치열한 싸움에서 이미 자신들의 진면목을 충분히 깨닫고 있었다. 이런 싸움에서는 당원이든 나치 반대자든 별 차이가 없었다. 다만 전반적인 도덕적 붕괴 속에서도 웬만큼 예의 바르게 행동했는지, 혹은 아무리 절실한 생존경쟁 속에서도 어느 정도 금도는 지켰는지가 도덕적 평가의 기준이 되었다."(443)


"대다수 독일인이 스스로를 히틀러의 희생자로 여기는 이런 집단적 자기 합리화는 학살당한 수백만 명에 대한 견디기 힘든 모독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는 서독의 민주주의 확립을 위해 받아들여야 하는, 어쩌면 불가피한 전제 조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로써 새로운 시작을 위한 심리적 토대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히틀러의 희생자라는 확신은 스스로를 불명예스럽고 비겁하고 기회주의적인 존재로 느끼지 않으면서 몰락한 정권에 대한 충성심을 버릴 수 있는 선행 조건이었다." "스스로 기만당하고 착취당했다는 확신과 함께 나치의 이념적 불씨는 외견상 완전히 꺼져버렸고, 독일인들은 마치 자신과의 혹독한 정신적 대결을 통해 내적 탈나치화의 기적을 이루어내기라도 한 듯 아무런 가책 없이 온 마음으로 민주주의에 집중할 수 잇었다. 자기들끼리 다정한 말로 다독인 이 희생자 논리 덕분에 대다수 독일인은 나치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범죄와 대면해야 할 심리적 부담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451-2)


맺음말: 삶은 계속된다 460


"전후 독일 사회가 진실과 마주하는 면에서 아무리 무능했다고 비난하더라도 그들의 억압 능력 덕분에 후손들이 막대한 이익을 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억압은 항상 시간만 지연시킬 뿐이다. '과거 청산'은 훗날 후손들이 떠맡았다. 그들은 과거 청산을 부모 세대에 대한 역사적 승리로 여겼다. 가장 거친 국면에서는 마치 내전처럼 보이기도 했던 부모와의 싸움에서 말이다. 1968년의 세계적인 저항 물결이 서독에서만큼 부모 세대에 대한 가차 없는 개인적 청산과 결합된 곳은 없었다. 자신의 자식들에게 거의 광적으로 지탄받은 것은 1945년 이후 독일인들이 스스로에게 가했던 억압의 후유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노에서 이어진 실제적인 결과는 별로 없었다. '68세대'조차 부모 세대의 나치 연루 혐의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데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대신 자본주의를 독재의 전 단계로 낙인찍고 그들이 겪은 사회적 탄압을 파시스트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새로운 파시즘 이론을 만들어냈다."(46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