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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종교적 우파의 기원과 본질 - 낙태와 동성애 이면에 감춰진 인종차별이라는 불편한 진실
랜달 발머 지음, 노동래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25년 10월
평점 :
서문
1부 종교적 우파 이전의 복음주의
"제2차 대각성에 이은 19세기 초의 몇십 년 동안 복음주의자들은 학교, 평화 십자군, 노예제도 폐지, 금주, 교도소 개혁, 여성의 권리 같은 사회개혁에 매진했다. 그들의 노력에 생기를 불어넣은 요소는 그들이 경건의 규범에 따라 사회를 개혁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땅 위에─좀 더 특별하게는 이곳 미국에─가져올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신학자들은 이를 '후천년설'이라고 부른다. 이 교리는 요한계시록 책에 예언된 평화와 의의 천 년이 지난 '후' 예수가 이 땅에 재림하실 것이라고 본다. 그 교리의 추론으로서 신자들은 사회를 개혁하고 예수의 〈재림〉을 위한 길을 닦아야 한다. 복음주의자들의 집요한 사회개혁 촉구에 분노한 남부는 결국 연방에서 탈퇴했다. 그러나 남북전쟁 자체가 후천년설을 재고하도록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끔찍한 사상자 수는 말할 것도 없고, 게티즈버그와 앤티텀과 머내서스의 전쟁터들은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사회의 완벽성에 관한 후천년설의 낙관주의를 재조사하도록 자극했다."(43-4)
"복음주의 사회 개혁가들은 19세기 말에 시작하여 20세기가 한창 진행될 때까지 계속된 묵시주의(apocalypticism)라는 과속방지턱을 만났다. 복음주의자들 중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영국 형제단(이후 플리머스 형제단으로 알려졌다)의 구성원인 넬슨 다비의 아이디어를 전용하기 시작했다. 다비는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에게 그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알려줬다. 예수는 천 년 '후'가 아니라 천 년 '전'에 이 땅으로 돌아오실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순간에라도 재림을 기대할 수 있는데, 재림 때 그들은 하늘로 〈들려 올라가고〉 〈남겨진〉 자들은 신적 심판을 맞이할 것이다. 다비의 해석 체계는 인간의 모든 역사를 세대들(ages 또는 dispensations)로 나눴기 때문에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 또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라고 불렸다. 다비의 전천년설(예수가 천년왕국 '전'에 돌아오실 것이다)의 결과로 복음주의자들이 사회적 병폐들을 해결할 책임에서 벗어났다."(45-6)
"1925년 7월에 테네시주 동부는 뜨거웠는데, 데이튼의 레아 카운티 법원 청사 2층보다 뜨거운 곳은 없었다. 존 토머스 스콥스가 테네시주의 버틀러 법(Butler Act)을 위반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풋볼 코치이자 시간제 과학 교사였던 스콥스는 그 법의 합헌성을 시험하기 위해 그 지역 시민 운동가들에게 고용되었다." "상징적인 면에서 스콥스 재판은 전환점이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일반 사회의 문화를 한층 더 거부했다. 이미 예수가 어느 때에라도 재림하셔서 의롭지 않은 자들에게 심판을 내리실 것이라는 교리인 전천년설을 수용한 복음주의자들은 회중, 교파, 성경 캠프, 성경 연구소, 대학, 신학교, 선교 단체, 출판사들이 맞물린 네트워크인 복음주의 하위문화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반 사회의 문화는 그것 자체가 부패했으며 타인을 부패시키지만, 복음주의 하위문화는 안전한 공간으로서 점점 세속화되는 사회의 위험으로부터 도피처를 제공한다고 주장했다."(51, 54-5)
"단기적으로는, 20세기 중엽에 복음주의자들은 대체로 정치에 무관심했다. 그들은 대체로 정치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특히 조직적인 방식으로는 확실히 참여하지 않았다. 전투적인 밥 슐러, 빌리 제임스 하기스, 칼 매킨타이어 등 목소리를 낸 소수의 복음주의자가 있었지만, 그들은 주변 인물들이었다. 이 시기의 많은 복음주의자는 그들의 전천년설 신앙과 미국 사회의 부패에 관한 확신에 근거해서 유권자 명부에 등록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정치는 사탄의 영역이며, 더욱이 이 덧없는 세상은 심판을 향해 기울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신경을 쓰겠는가? 그러나 복음주의 하위문화의 구축은 또 다른 장기적은 효과를 낳았다. 복음주의자들이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쏟았던 시간과 에너지와 돈이 종종 아무것도 없던 데서 시작하여 수십 년 뒤에 결실을 거두기 시작했다. 이런 기관들, 특히 학교와 복음주의 단체와 언론 기관은 복음주의자들이 1970년대에 공적 영역에 재진입할 토대를 제공했다."(56-7)
2부 낙태 신화와 종교적 우파의 부상
"종교적 우파가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고 가장 영속력이 있는 신화는 그들의 기원 신화다. 제리 폴웰과 패트 로버트슨 및 수없이 많은 다른 사람에 의해 자주 표명되는 이 내러티브에 따르면,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1973년 1월 22일 미국 연방 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Roe v. Wade) 사건 판결에 의해 그들의 정치적 무사안일에 대해 충격을 받았다." "이 기원 신화가 폴웰과 다른 복음주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연체동물 같은 탈정치적 무감각에서 벗어나 낙태 합법화에 대한 도덕적 분노의 싸움에 나서게 했다. 혹자는 자신을 노예제도라는 해악을 근절하려고 했던 남북전쟁 전의 복음주의 선배들과 연결시키려고 〈신 폐지론자〉라는 이름을 사용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자세히 조사해 보면 낙태가 종교적 우파 부상의 기폭제였다는 주장이 무너진다. 복음주의자들은 1970년대 말까지 낙태를 〈가톨릭의 문제〉라고 여겼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의 대부분에 복음주의자들은 대체로 낙태를 중요한 문제로 보기를 거부했다."(71-3)
"종교적 우파의 진정한 기폭제는 법원의 결정이었지만 그것은 '그린 대 코널리'(Green v. Connally) 소송에서 컬럼비아 특별구 지방 법원의 하급심이 내린 결정이었다. 1971년 6월 30일 그 법원은 인종 분리나 인종 차별에 관여한 어떤 조직도 정의상 자선 기관이 아니며, 따라서 면세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다고 결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몇십 년 동안 복음주의자들, 특히 북부의 백인 복음주의자들은 공화당 쪽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이런 편애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자들은 적어도 조직적으로는 정치적 영역 밖에 머물렀다. 폴 웨이리치는 자기가 그것을 바꿀 수 있다면 복음주의자들의 수가 많기 때문에 자기들이 엄청난 유권자 집단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자기가 보수적인 대의하에 그들을 규합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정치적 힘이 달성되면 도덕적 다수파(moral majority)에게 이 위대한 나라를 재창조할 기회가 것이다.〉 웨이리치는 그런 제휴의 정치적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믿었다."(83, 86-7)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수십 년 동안 자기들의 교육 기관이 연방의 돈을 받지 않기 때문에(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는 점은 제외하고) 정부가 자기들에게 학교를 어떻게 운영하라고 지시할 수 없다고 자랑해왔다. 그러나 그런 궤변은 세금 면제가 공적 부조의 한 형태라는 중요한 사실을 무시하는 처사다. 교회들과 비영리 기관들은 (임금에 대한 사회보장세를 제외한) 세금을 낼 필요가 없는데, 이는 납세하는 시민들이 공원과 경찰의 보호와 국방 등 모든 공적 서비스 공급에 필요한 예산의 차액을 부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웨이리치와 종교적 우파의 기타 창시자들은 그들의 정치적 행동주의의 논거를 인종 분리 방어로부터 종교 자유 방어로 세심하게 이동시키는 한편, 종교 기관들이 세금 면제를 포기하기만 하면 어떤 인종 정책이든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무시했다. 실제로 종교적 우파에 대한 가장 명백하고 상식적인 이해는 보수적인 인종 분리를 방어하기 위해 복음주의자들이 동원되었다는 것이다."(90-2)
"웨이리치와 폴웰 및 신생 종교적 우파의 지도자들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낙태를 정치적 이슈로 만들기 위해 영입이 불가능해 보였던 지지자를 확보했다. 그 인물은 바로 기독교적 가치의 쇠퇴와 그가 〈세속적 인문주의〉라고 부른 것의 전진을 경고하고 있던 신학자 프란시스 A. 쉐퍼였다. 쉐퍼는 낙태 합법화가 유아 살해와 안락사로 이어질 것이라며 열심히 경종을 울렸다. 웨이리치의 간계와 쉐퍼의 비탄 사이에서 복음주의자들은 서서히 낙태 이슈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1980년 무렵에는 지미 카터가 조지아 주지사로서 및 대통령으로서 낙태 사례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그가 낙태를 불법화하는 헌법 개정을 거부하자 그것이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에게 용서할 수 없는 죄로 여겨졌다. 그해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 로널드 레이건이 1967년 캘리포니아주 주지사 시절에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낙태법에 서명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 삼지 않고서 말이다."(109-12)
3부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1980년 11월 로널드 레이건이 선출된 뒤 종교적 우파는 열심히 자기들의 이해관계를 통합했다. 1980년 공화당 강령은 〈카터 행정부의 국세청장에 의해 시작된 독립적인 학교들에 대한 위헌적인 규제상의 보복을 중단〉하기로 서약했으며, 종교적 우파는 복음주의 학교들을 국세청으로부터 보호하려고 했다. 레이건은 도덕적 다수파(moral majority)의 창립자 중 한 명인 로버트 빌링스를 교육부의 여러 지역 교육국 중 한 곳의 국장으로 임명했다. 빌링스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인종 분리 정책을 취하는 학교들의 면세를 폐지하려는 국세청의 시도를 막았다. 낙태와 관련해서는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C. 에버레트 쿠프를 공중위생국장으로 임명하도록 압력을 행사했고, 레이건은 이에 동의했다. 레이건의 첫 번째 임기가 끝날 때쯤에는 많은 일반 대중 복음주의자가 낙태 반대 운동을 완전히 받아들였다. 혹자는 공공연하게 자기가 한 가지 이슈만 보고 투표하는 사람이라고 선언했다."(123-4)
"레이건의 1966년 주지사 선거운동(과 이후의 다른 선거운동들)은 〈법과 질서〉라는 표어를 자유롭게 사용했는데 이 어구에는 〈국가의 권리〉라는 어구와 마찬가지로 인종차별적인 함의가 있으며, 그 어구는 일반적으로 흑인들을 그들의 자리에 묶어두려는 암호 언어로 여겨진다. 로버트 L. 코트가 말한 바와 같이 〈레이건은 인종 차별을 언급할 때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레이건이 한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한다.〉" "1980년 8월 3일, 레이건은 16년 전 쿠 클럭스 클랜(Ku Klux Klan) 단원들이 보안관과 공무해서 시민권 운동가 세 명을 납치·폭행·살해한 곳인 미시시피주 필라델피아에서 대통령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20,000명의 백인 앞에서─그들 중 많은 사람이 남부 연합의 기를 흔들며 〈우리는 레이건을 원한다〉라고 외쳐댔다─조지 C. 월리스와 수없이 많은 다른 분리주의자의 반항적인 슬로건인 〈나는 국가의 권리를 믿습니다〉를 소환했다."(129-31)
"종교적 우파는 결코 성경적 가치들을 진척시키기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현대의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복음주의 행동주의는 인종 분리의 영속화에 뿌리를 둔 운동인데, 그 운동이 1970년대 말에 시작된 보수적 운동이 극우 변두리와 제휴하여 복음주의 자체의 가장 좋은 전통들과 일치하지 않는 돌연변이 형태를 낳았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은 소외된 사람들을 돌봄으로써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고 했던 선조들의 개혁에 대한 열정을 되찾는 대신, 명백히 복음주의 전통의 바깥에 위치한 사람, 복음주의 사회개혁의 오래되고 고귀한 전통을 잘 알지 못하거나 경멸하는 사람과 동맹을 맺었다. 이 묘사는 정치적 우파의 지도자들에게도 적용된다. 그들이 자기들의 전통을 잘 알지 못했다면 그들은 가치 있는 선배들의 모범을 통해 인도받을 기회를 놓친 것이다. 그들이 지지한 정치인들과 정책들에 비춰볼 때, 종교적 우파 지도자들이 그 전통을 경멸했을 가능성이 좀 더 높다."(143-4)
"나는 복음주의자들이 일단 낙태 신화와 종교적 우파에 내장된 인종차별주의를 인정하게 되면 그들이 자기들의 정치적 의제의 다른 측면들, 즉 종교적 우파와 공화당 극우파의 융합을 통해 과도하게 좌우된 의제를 재조사할 수도 있으리라고 희망한다. 배고픈 자를 먹이고 외인을 환영하라는 예수의 명령을 새롭게 읽거나 19세기의 복음주의 사회개혁을 이해한다면 복음주의자들이 이민과 공공교육에 관한 견해, 교도소 개혁과 여성의 권리에 대한 태도, 부자 감세에 대한 지지를 재고할지도 모른다. 결국 예수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이들 중 가장 작은 자〉를 돌보라고 명령하셨는데, 이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복음주의자들의 정치적 에너지의 방향을 재설정하고, 한 가지 이슈를 토대로 투표하는 행태를 재고하고 정치적 이슈들을 좀 더 넓고 종합적으로 평가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재고는 또한 유색 인종 복음주의자들과의 화해를 위한 문을 제공할지도 모른다. 회개는 영혼에 유익하다."(1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