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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마인드 - 역사가 주는 12가지 경고
로런스 리스 지음, 조행복 옮김 / 책과함께 / 2025년 9월
평점 :
들어가며
1. 음모론 퍼뜨리기
"1차대전이 나치의 정신뿐만 아니라 독일 전체의 정신에도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 한 가지 이유는 그 전쟁으로 엄청난 감정의 동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1918년의 최종적인 굴욕은 꼭 4년 전 전쟁이 선포되었을 때 많은 독일인이 기대에 부풀어 즐거워했던 만큼 더욱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나타난 음모론자들은 그 초기의 도취가 없었다면 그만큼의 힘을 지닐 수 없었을 것이다." "사회심리학자인 캐런 더글러스 교수는 대다수 음모론자가 〈비난할 자를 찾아〉 나서면서 〈막후에서 조종하는 자들이 있다〉는 관념이 그들의 〈무기력함과 환멸감〉을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연구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때때로 자기 집단을 보호하거나 그 가치를 드높이는 방법으로 다른 집단에 관한 음모론을 믿는다. 특히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해 나르시시즘에 빠진 자들은 다른 집단에 관한 음모론을 더 쉽게 믿는 경향이 있다.〉 독일군 최고사령부는 자신들이 세계 최고의 군인이라고 생각했다."(25, 37)
"독일군 병사들은 비록 패배했음에도 집으로 돌아왔을 때 굴욕을 당한 군대의 일원이라는 취급을 받지 않았다. 새로운 총리 에베르트가 왜 독일군이 패배하지 않았다고 거짓을 설파했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혁명이 터질 위험성이 있었고, 진실의 왜곡이 병사들의 충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 방침은 루트비히 베크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더 큰 해로운 거짓말에 부채질을 했다. 전선의 군대가 독일 내부의 후방에 있는 적들에 의해 〈등에 칼을 맞았다〉는 거짓말이다. 이것이 이듬해 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 중 하나인 육군 원수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이용한 음모론이다. 그는 그 전쟁의 재앙 같은 경과에 책임을 져야 했지만 비난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군대는 정성을 들여 힌덴부르크를 '타넨베르크의 영웅'으로, 1914년 동부전선에서 그가 지휘해 거둔 승리의 영웅으로 선전했다. 그 이후의 패배들은 이 초기의 승리와 나란히 언급되지 않았다."948-9)
2. ‘그들’과 ‘우리’를 구분하기
"폴크스게마인샤프트Volksgemeinschaft를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국민의(또는 민족의) 공동체'가 되겠지만, 이는 그 낱말의 복잡한 의미를 크게 무시한다. 폴크Volk라는 낱말은 단지 '국민'이 아니라 서로 공유한 일련의 민족적·문화적 신념 전체를 암시한다. 폴크스게마인샤프트는 훨씬 더 복잡하다. 그것은 모든 독일인이 특정한 성격의 공동체로 결집해야 하며 그 공동체는 개개인보다 더 중요해야 한다는 점을 의미했다. 나치는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종족적 순수함에 집중함으로써 그 관념에 더 강렬하고 종족주의적인 방식으로 초점을 맞추었다." "폴크스게마인샤프트 관념이 사람들을 '그들과 우리'라는 범주로 나누는 나치 분류법의 심오한 표현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이 종족의 관점에서 '순수한' 독일인으로 판정한 사람만이 폴크스게마인샤프트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개인이 이 무리에 합류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피'가 곧 운명이라는 것이 나치의 견해였다."(76-7)
"1923년 5월 독일 북부에서 술 취한 남자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훗날 악명을 떨치는 나치 마르틴 보어만과 루돌프 회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각별히 뜻깊은 범죄다. 마르틴 보어만은 2차대전 중에 히틀러의 유력한 조언자였으며, 루돌프 회스는 1940년에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설립에 힘을 보태고 그 사령관으로서 역사상 최대 규모의 대량학살 현장을 감독했다." "그들이 유죄 선고를 받은 범죄는 문명국의 법률 제도에서는 공격 행위가 되겠지만, 회스와 보어만은 이것이 부패한 체제에 맞서 싸우는 혁명가들의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법'만 인정했으며 그로써 용서를 받았다고 느꼈다. 중요한 것은 회스가 폭력에 길들여졌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그는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에게 자주 빠지기도 했다. 〈우리를 분열시키는 자는 누구든 재앙을 떠안으리라!〉 이는 뿌리 깊은 '그들과 우리'라는 사고방식이었다. 바로 히틀러가 장려한 사고방식이다."(94-5, 98-9)
3. 영웅으로서 인도하기
"1924년 봄 뮌헨의 법정에서 히틀러는 마침내 오랫동안 되고 싶었던 영웅의 이미지를 투사할 수 있었다. 히틀러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원형이 되는 중이었다. 지도력의 심리학에 관한 전문가인 알렉스 해슬람은 지도력이 〈위대한 나〉에 관한 문제라는 것은 흔한 오해라고 믿는다. 그는 말한다. 〈지도력은 언제나 오직 '우리'에 관한 문제다.〉 해슬람은 개인적 자질의 점검 목록을 갖고 있다고 좋은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이끌어야 할 집단의 열망을 이해하고 공동의 목적을 위해 진력해야만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히틀러는 바로 이 점을 이해했기에 재판 중에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의 파괴자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선언했다. 그의 추종자들이 공유한 목적이었다. 게다가 히틀러는 전쟁 중에 '보통의 병사'였다는 사실 덕분에 전통적인 지도층에 배반당했다고 느끼는 수백만 명의 평범한 독일인 중 한 사람으로 처신할 수 있었다. '우리'라는 속성을 이보다 더 잘 증명해주는 것이 있는가?"(116-7, 119)
"나치의 주요 인사인 루돌프 헤스는 히틀러가 보여준 확신에 찬 미래상을 이렇게 인식했다. 히틀러는 〈학자가 하듯이 찬성과 반대를 동등하게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청중에게 다른 것이 옳다고 생각할 자유를 절대로 주지 말아야 한다. (···) 위대한 대중 지도자는 위대한 종교 창시자와 비슷하다. 그는 자신의 말을 듣는 자들에게 자명한 진리를 전달해야 한다.〉 만일 히틀러가 지지자들의 요청에 응해 정책 사안에 대한 토론과 당 강령의 수정을 준비했다면, 이는 단지 그가 다른 이들의 말을 기꺼이 들을 의사가 있음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를 약한 사람으로 보이게 했을 것이다. 따라서 히틀러는 합의정치인consensus politician의 정반대였지만, 역설적이게도 동료들이 그의 비전을 실현하려 애쓰는 과정에서는 그들에게 상당한 자유를 허용했다. 바로 이러한 조합 덕분에 그는 매우 효율적인 지도자가 되었고, 그가 '위대한 나'가 아니라 '우리 중 한 사람'으로 일하고 있다는 인식이 유지되었다."(136-7)
4. 청년 타락시키기
"1930년대 초에 나치당에 가입하려는 '유혹'을 유달리 강하게 느낀 사람들은 20대 청년이었다. 나치당의 유사다윈주의 성격은 젊고 건강한 사람들에게 확실히 매력이 있었다. 그들 거의 전부가 너무 어려서 참전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아동기에 그림자를 드리운 전쟁의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관념도 역시 매력적이었다. 많은 대학교가 여러 해 동안 민족주의 운동의 보루였고, 전후 협정에서 독일 영토를 상실해 뼈저리게 느낀 고통은 여전했다. 그들 다수가 훗날 나치의 대의를 위해 싸우게 된다." "베른부르크 지역의 사회주의 신문은 이런 사실에 한탄했다. 〈이 젊은이들은 대체로 풍파를 겪지 않았지만 이제는 생계 수단을 찾을 수 없게 된 가정의 출신으로 (···) 이 [상황에] 대한 분노 때문에, 정치적 무지(학교와 부모는 이 점에서 철저히 무능했다) 탓에 정치적 승부사들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나치는 이 청년들에게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약속했다. 이러한 약속은 구체적이지 않을수록 더욱 강력하다.〉"(149-51)
5. 엘리트층과 공모하기
"1933년 1월 30일,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했다. 힌덴부르크와 그 주변의 엘리트들에게 집단적 사고group think의 경향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 심리적 현상은 집단의 구성원들이 비록 모든 부정적 합의와 잠재적 대안들을 적절히 고려하지 않았다고 해도 문제의 올바른 해법에 도달했다고 확신할 때 발생한다. 이들의 오만함은 민족주의자 정치인이요 부유한 언론 거물인 알프레트 후겐베르크가 잘 보여주었다. 그는 히틀러가 총리가 되면 불가피하게 자신처럼 노련한 정치인들에 의해 억눌릴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이렇게 호언장담했다. 〈우리는 그를 가둬놓고 있다.〉 비극이었다. 최악의 경기 침체가 곧 끝나리라는 신호들이 있었기에 더욱 비극적이었다. 1932년 여름 로잔 회담에서 독일 대표단은 베르사유 조약이 부과한 배상금 지불을 끝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성공을 거두었다[거의 90퍼센트가 삭감되었다]. 독일이 경제 회복의 길에 접어드는 데 나치 총리는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였다."(203-4)
6. 인권 공격하기
"서른 두 살의 직업 경찰 하인리히 뮐러는 공산주의를 몹시 싫어했지만 나치를 지지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경력은 화려하게 꽃을 피웠고, 결국 그는 게슈타포Gestapo(국가비밀경찰)의 수장이 되었다. 1937년 지구당의 칭찬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뮐러는 1933년 이전에 좌파 단체들을 탄압했다. 〈그러나 뮐러가 우파를 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면 분명히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보고서의 결론은 이러했다. 〈야심이 크고 추진력이 강한 그는 누가 지배자가 되든지 주어진 체제에서 인정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근원적인 심리적 특성을 드러낸 사람이 하인리히 뮐러만은 아니었다. 엄청나게 많은 독일인이 과거의 충성을 신속하게 내던지고 새로운 질서에 순응했다. 1933년 초에 100만 명이 넘는 독일인이 나치당에 가입했다. 이 모든 사람이 갑자기 일종의 집단적인 개심의 순간을 경험해 히틀러의 주장이 타당함을 깨달았다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상당수는 그저 기회주의자였을 뿐이다."(229)
"이제 법치의 외양은 사라졌다. 그러나 훨씬 더 주목할 만한 것은 '긴 칼의 밤' 숙청 이후 독일 안에서 히틀러의 인기가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나치가 언론을 통제했기에 그 살인은 나라의 질서를 회복하려는 히틀러의 영웅적 노력으로 꾸며질 수 있었다. 사람들이 신문에서 읽은 내용은 이러했다. 히틀러는 극심한 무질서를 예방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무력만 사용했다. 게다가 히틀러는 국민의 더 큰 이익을 위해 과거의 지지자들을 처벌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모든 매체에서 똑같은 말만 들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놀라운 사례였다. 독일의 모든 라디오 방송과 신문이 한결같이 정부의 방침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해 전했기 때문에, 수백만 국민은 히틀러의 범죄를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잘했다고 칭찬했다. 법치의 파괴. 자유 언론의 말살. 경찰과 군대의 매수. 히틀러는 독재자가 되려면 이 세 가지를 다 실행해야 한다는 점을 입증했다."(244)
7. 믿음 이용하기
"여호와의 증인은 나치의 표적이 된 집단들 중에서도 독특했다. 그들은 신앙을 포기하면 즉각 석방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많은 신도가 그러한 길을 걷는 대신 무서운 박해를 감내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친위대와 여호와의 증인 사이의 관계가 모욕적인 억압의 관계만은 아니었다. 친위대는 여호와의 증인이 지닌 뜨거운 믿음이 부러웠다.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의 절대적인 헌신에 감명을 받은 사람이 루돌프 회스만은 아니었다. 하인리히 힘러와 다하우 수용소 사령관 테오도어 아이케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이렇게 선언했다. 〈친위대원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그들의 여호와에게 보여준 것처럼 열광적이고 흔들림 없이 민족사회주의의 이상과 아돌프 히틀러를 신뢰해야 한다. 모든 친위대원이 그 신념을 열광적으로 추구할 때에만, 아돌프 히틀러의 국가는 영원히 안전할 것이다.〉 이는 친위대 지도부가 자신들이 믿음 위에 세워진 조직을 이끌고 있음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발언이었다."(258-60)
"많은 홀로코스트 가해자들의 출발점은 독일 민족이 희생자라는 인식이었다. 1차대전에서 패배하고 그 직후 고초를 겪은 것은 내부에 있는 적의 배반과 다른 민족들의 기만적인 행태가 초래한 결과였다. 마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듯이, 전쟁이 끝난 후 몇 년 동안 독일은 동쪽의 슬라브족 인구가 증가한 탓에 종족적으로 소멸할 위험에 처했다. 이는 볼셰비즘을 장악한 유대인이 획책한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이 잘못을 바로잡는 역사적 과업을 떠맡은 자들은 근본적인 원인에 조금도 책임을 느끼지 않았다. 문제는 그들이 야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문제의 해결책이었다." "나치가 스스로를 혁신적인 사상가로, 세상의 현실이 아무리 잔인하더라도 그 현실에 당당히 맞설 준비가 된 유일한 사람들로 여겼다는 사실도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이 나치 지식인들은 대부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에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둘러 임무를 완수하려 한 행동가였다."(265-6)
8. 적 평가하기
"히틀러는 종종 극적인 양자택일을 제시했다. 승리하지 않으면 파멸한다. 이는 그의 정치 이력 초기부터 지속된 사고방식이었다. 고상한 정치사상가들이 이러한 접근법을 조롱하기는 쉽다. 그러나 이는 엄청나게 효과적이었다. 고대 이래로 〈가장 무시무시한 대재앙〉을 막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보다 더 목숨이 중요한 때가 어디 있겠는가? 이는 조지 오웰이 지체 없이 간파한 진실이었다. 〈히틀러는 그 개성이 지닌 매력이 없었다면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순교자요 희생자, 바위에 사슬로 묶인 프로메테우스, 승산이 거의 없음에도 자신을 희생하며 홀로 싸우는 영웅이다. 그는 쥐 한 마리를 죽이더라도 그것이 마치 용인 듯이 보이게 하는 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 사회주의는, 심지어 자본주의도 마지못해 사람들에게 '좋은 시절을 주겠다'고 말했지만, 히틀러는 '투쟁과 위험, 죽음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그 결과로 하나의 민족 전체가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299)
"1938년 여름에 개최된 에비앙 회의는 초청받은 나라들이 저마다 '난민' 문제에 공감을 표명하는 공론장이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것은 거의 제안되지 않았다. 히틀러는 국제사회의 태도를 이렇게 요약했다. 〈도움은 주지 않고 도덕만 얘기한다.〉 에비앙 회의가 보여준 위선은 히틀러가 투사하려 한 세계관, 즉 독일이 주장만 앞세우고 실천하지는 않는 나라들의 희생양이라는 세계관에 잘 들어맞았다." "〈그들은 원주민의 의견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잔인한 폭력으로 여러 대륙을 정복했다. 그러나 독일이 식민지를 되찾겠다고 하자, 그들은 불쌍한 원주민의 운명이 경악스럽다는 듯이 그들을 절대로 그러한 운명에 처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고 선언한다.〉 그렇게 히틀러는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커다란 위선을 포착해냈다. 다른 나라들은 유대인 난민을 받아들일 공간이 충분한데도 여전히 그들의 수용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독일인들이 더 편안히 살아갈 공간을 확보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321-3)
9. 저항 분쇄하기
"1939년 11월, 서른여섯 살의 목수 게오르크 엘저는 대담하게도 아돌프 히틀러는 폭탄으로 날려버리려 했다. 엘저는 히틀러가 11월 8일 맥줏집 폭동 기념일에 뮌헨의 맥줏집 뷔르거브로이켈러에서 연설하기로 한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폭탄을 만들어 목공품에 숨겨 연단 가까운 곳에 두었다. 그는 여러 날 동안 맥줏집에 잠복해 있으면서 영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밤새 폭발 장치를 숨겨둘 것을 만들었다. 폭탄은 계획대로 11월 8일 오후 9시 30분 직전에 폭발해 여덟 명이 사망하고 많은 사람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피해를 모면했다. 날씨가 나빠서 비행기 대신 기차를 타고 베를린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면서 연설 시간을 앞당겼기 때문이다." "보안국과 현지 경찰의 보고서는 히틀러 암살 시도에 엄청난 분노가 터져 나왔다고 강조했다. 〈거의 전 국민이 이 극악무도한 행위에 몸서리쳤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거듭했다. '신은 분명히 퓌러 편이고, 그가 다치지 않아서 정말로 다행이다.'〉"(350, 356)
"1939년 11월로 예정된 서유럽 침공 계획은 1914년의 실패한 군사 행동의 반복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장군들은 서유럽 공격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더 창의적인 접근법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이 아르덴 숲을 지나 전진할 때 연합군이 이를 탐지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도박'이었다. 만일 공습에 취약한 그 숲에서 발각된다면 전쟁에서 패할 것이 거의 확실했다. 그럼에도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자였던 히틀러는 새로운 계획에 열광했다. 도박은 적중했다." "히틀러는 자신이 옳았음을 증명했고, 반대했던 장군들은 틀렸음이 입증되었다. 독일군 장군들은 다음번에 히틀러를 믿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 이 순간을 기억하게 될 것이었다." "이제 히틀러에 대한 저항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워졌다. 7월 6일 베를린의 개선 열병식은 그때까지 보지 못한 풍경이었다. 무아지경의 흥분 상태에 빠진 군중이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이제 누가 그에게 반대할 수 있겠나?"(369-71)
10. 종족주의 강화하기
"1939년 9월 1일 독일군 전차가 국경 너머 폴란드로 진격한 순간부터 종족주의적 대결이었지만, 그 종족주의는 이제 새로운 차원으로 격상되었다. 히틀러의 장군들이 이 〈절멸 전쟁〉에 반대하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들 다수는 소련 주민들에 대한 종족주의적 편견을 공유했다." "이 전쟁에서 적을 비인간화하는 나치의 행태는 거의 초월적인 수준에 이르게 된다. 그 침공에 참여한 모든 독일군 병사는 사전에 새로운 적에게서 최악을 예상하라는 말을 들었다. 다시 말해 적은 종족적으로 열등할 뿐만 아니라(사실상 인간 이하의 존재였다) 전쟁 규칙 따위는 무시하고 싸우는 자들이었다. 이는 많은 침공군 병사의 마음속에 엄청난 두려움과 공격성을 불러일으켰다. 그 전쟁은 인간과의 싸움보다 짐승과의 싸움에 더 가까웠다. 뱀을 신뢰할 수 없듯이 러시아인도 신뢰할 수 없었다. 우리의 뇌는 친구는 개인으로 보고 적은 집단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러시아인들'은 하나의 들짐승 무리로 인식되었다."(376-8)
"밀그램의 연구에서 발견되는 다른 깨달음이 있다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일반적이라는 사실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공정한 세상' 가설이라고 부른다. 이로부터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은, 상당히 많은 사람이 권위자로부터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필요하니 걱정 말고 하라는 말을 들으면 쉽게 그렇다고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치 학살자들과 관련하여 볼 때, 분명코 권위자의 역할이 집단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하이드리히와 힘러는 이 점을 잘 알았고, 학살 부대의 활동에 개인적으로 깊은 관심을 가졌다." "대체로 각각의 학살자 집단은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애초부터 살인을 즐긴다고 생각한 자들이 있었다. 학살을 시작한 그 순간부터 살인은 사실상 가능하다고 생각한 자들이 있었다. 총을 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할 수 있음을 깨달은 자들이 있었다. 대다수가 중간 집단에 속하는 이 3분할을 학살자의 심리에서 거듭 보게 될 것이다."(385-6)
11. 멀리서 죽이기
"1941년 8월 말, 카를 프리치는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인간의 모습을 한 짐승〉인 소련군 포로들에게 수용소에서 의복 소득과 이 퇴치에 사용한 치클론B라는 치명적인 살충제를 사용한다는 중대한 발상을 내놓았다. 그 두 가지를 결합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해충 박멸에 쓰이는 화학약품으로 적을 죽이는 것만큼 그들의 '타자성', 즉 '그들'의 속성을 더 잘 중명할 수 있는 것이 있겠는가? 나치는 그와 같은 동물의 비유를 좋아했다. 그 전해에 제작된, 역사상 최악의 선전 영화 중 하나로 꼽히는 〈영원한 유대인〉에서는 쥐 떼의 장면과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 이미지가 교차했다. 그 영화를 감독한 프리츠 히플러는 이렇게 말했다. 〈괴벨스가 쥐가 나오는 장면을 요구했다. 쥐가 유대인의 상징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사령관 루돌프 회스는 〈총살로써 절멸을 수행한다는 생각에 언제나 몸서리쳤다.〉〈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관여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안도했다.〉〈우리는 그 모든 유혈극을 피할 수 있었다.〉"(413-5)
"그해 가을의 처음 몇 주 동안은 나치에게 몹시 즐거운 낙관적인 시간이었다. 10월 3일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이 적[소련군]은 이미 무너졌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한 주가 지나기도 전에 나치당 언론담당관 오토 디트리히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군사적인 의미에서 소련은 끝났다.〉 이튿날 독일의 신문들은 머리기사로 〈동쪽의 승리〉를 대서특필했다." "괴벨스가 디트리히의 선전의 오류에 그토록 격분한 것은 바로 독일 국민이 '미개'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디트리히는 사실상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단순한' 메시지를 전달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괴벨스는 국민에게 나중에 이행하지 못할 구체적인 약속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거짓말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진실을 전하되 가장 단순한 사람도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군데군데 고쳐 보여주어야 한다. 반대로 뻔한 거짓말은 언젠가 돌아와 역효과를 낼 뿐이다.〉"(420-2)
12. 두려움 키우기
"독일의 전 역사를 통틀어 이와 같은 패배는 없었다. 1943년 2월 2일 스탈린그라드의 재앙 이후, 나치 지도부가 해결해야 할 난제는 분명했다. 그렇게 심리적으로 위축된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국민의 충성을 유지하고 최후의 순간까지 싸울 태세를 갖출 수 있겠는가?" "진심으로 믿는 자들 중에서도 가장 진심이었던 요제프 괴벨스는 여태껏 겪지 못한 가장 어려운 심리적 과제에 직면했다. 그는 믿음이 무너지는 사람들에게 역경에 맞서 굳건하게 버티라고 설득해야 했다." "괴벨스는 독일인들에게 계속 싸울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할 열쇠는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때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는 이런 메시지를 설파하는 데 몰두한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것이 그대들 개인에게도 이익이다. 왜냐하면 동쪽의 '인간 이하의 존재들'이 강간, 살해, 복수의 의도를 품은 채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항복은 이 야만인들의 도착을 더욱 앞당길 뿐이다. 바로 그가 좋아하는, 감정을 건드리는 노골적인 메시지였다."(453, 456)
"괴벨스는 연합국이 홀로코스트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기 며칠 전에 선전 회의를 열어 〈공격이 최선의 방어〉이기 때문에 독일은 적에 맞서 '잔학행위 선전atrocity propaganda'[적이 저질렀다는 실제와 가공의 잔학한 범죄에 관해 정보를 퍼뜨리는 전략]을 조직적으로 펼쳐야 한다고 선언했다." "독일 국민의 심리에 영향력을 행사할 최선의 방법은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라는 믿음에 따라, 괴벨스는 기운을 북돋는 다른 화제들로써 공포심을 조장하는 '잔학행위 선전'의 효과를 더욱 높여야 한다는 점을 이해했다." "괴벨스는 1943년 2월 18일 '총력전' 연설에서 한편으로는 자기희생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반면 2주 후에는 독일 역사상 가장 많은 비용을 들인 판타지 오락 영화 한 편을 공개했다. 〈뮌히하우젠Münchhausen〉은 가공의 독일 남작이 펼친 모험을 보여주는 컬러 장편영화였다. 마술사, 열기구를 타고 가는 달 여행, 사치스러운 연회, 하렘의 욕장에서 젖가슴을 드러내고 목욕하는 젊은 여인들이 나온다."(458-9)
맺으며
"나치였던 자들은 자신들의 범죄를 상대화하려 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사령관 루돌프 회스의 주장에 따르면, 그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민간인을 살해한 것과 연합군 폭격기 조종사들이 독일 도시의 민간인을 살해한 것은 다를 바가 없었다." "이는 여러가지 이유에서 잘못된 비유다. 특히 독일 도시들에 대한 폭격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멈추었지만, 나치의 민간인 학살은 독일이 전쟁에서 이겼다면 계속되었을 것이다. 물론 유대인 여자와 아이를 절멸하라는 나치의 지침은 있었던 반면, 독일의 여자와 아이를 몰살하라는 연합국의 지침은 없었다. 그러나 연합국이 나치와 똑같이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생각은 많은 독일인에게 매력적이었다. 나치였던 자들에게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함부르크에 살던 작가 마틸데 볼프묀케베르크는 친구들과 함께 〈온힘을 다해〉 나치 정권의 〈몰락〉을 위해 노력했지만, 그들은 연합국의 위선도 비난했다. 그녀의 결론은 간명했다. 〈우리는 모두 똑같다. 똑같은 죄인이다.〉"(50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