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미국의 배신과 흔들리는 세계 교양 100그램 7
김준형 지음 / 창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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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격변의 시대


탈냉전과 팍스 아메리카나


두번의 위기와 슈퍼맨의 약점


미국 패권은 자신의 장점을 과시하기도 했지만, 주로 ‘나쁜 쪽, 나쁜 국가’들의 존재를 통해 반사적 정당성을 얻었습니다. 2001년 발생한 9·11 테러는 미국의 대외 정책 결정자들에게 다시금 세계를 아군과 적군으로 나눌 수 있는 빌미를 주었습니다. 문제는 막강한 미국의 상대로 몇십명의 테러리스트가 빌런이라는 구도는 모양도 빠질 뿐만 아니라 정당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대상이 바로 배후국가들입니다. 테러리스트들의 배후를 색출하면서 만들어낸 적이 바로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이란, 이라크, 그리고 북한 세 국가입니다. 거기에 시리아, 리비아, 쿠바, 아프가니스탄을 합쳐서 일곱개의 ‘불량국가 또는 깡패국가’(Rogue states)를 국제사회의 적으로 규정합니다. 미국은 이 깡패국가들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져야 독재자들이 사라지고 진정한 세계평화가 온다는 전제하에 전쟁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일어난 전쟁이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13-4)


균열을 보이던 미국 패권체제를 거세게 흔드는 중요한 사건이 또 하나 일어납니다. 2008년의 세계 금융위기입니다. 리먼 브라더스 사태가 일어나면서 월스트리트가 폭삭 내려앉습니다. 첫번째 전환점이었던 9·11 테러가 미국에 심리적인 타격을 입히고 대외 정책을 변화시켰다면, 2008년의 금융위기는 소련을 붕괴시킨 자본주의가 드디어 그 모순의 폐해를 실제로 드러내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때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을 모색하며 만들어진 것이 지금 우리나라도 참여하고 있는 G20(미국 중국 등 19개의 주요 국가와 2개의 국가연합을 더한 20개의 국가 및 지역 모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했던 바탕에는 중국이라는 나라의 비약적인 성장이 있었습니다. 사실상 중국이 세계 금융위기의 충격을 흡수해준 덕분에 자본주의가 다시 살아난 셈입니다. 이를 통해 미국은 다시 냉전 직후의 질서를 어느정도 회복합니다. 그럼 미국은 중국에 고마워할 법도 한데, 그보다는 중국이 이렇게 강해졌다는 데 큰 충격을 받습니다. 14-5)


신냉전이 아니다, 파편화다


금융위기가 발생한 지 8년이 지난 2016년에는 우리가 말하는 서구, 선진국이었던 유럽과 미국에서 사건이 하나씩 발생합니다. 유럽에서는 브렉시트(Brexit), 즉 영국이 EU(유럽연합)에서 떨어져나가는 일이 벌어졌고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이 두가지 사건은 본질적으로 똑같습니다. 실제로 구호도 ‘미국/영국을 다시 위대하게’로 같았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각종 국제기구와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만든 장본인이 바로 미국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든 기구와 질서로 인해 오히려 불리해졌으니 거기서 빠져나오거나 무력화시켜버리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셈입니다. 미국 경제에 손해만 끼친다며 WTO(세계무역기구)에 기금도 내지 않고 자유무역체제를 부정하고, 멋대로 관세를 부과하는 상황이 대표적입니다. 트럼프 1기에서는 중국 같은 특정 국가와 상품에 선별적으로 관세를 부과했지만, 2기에 와서는 전세계를 대상으로 관세 부과에 나섬으로써 보호무역주의를 한층 강화합니다. 16)


지금까지 미국에 이익을 줬던 국제 협력체제 혹은 세계화 구조가 더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미국은 이제 자의적으로 규칙을 바꾸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변화의 엔진인 동시에 결과물이 트럼프이고, 트럼피즘입니다. 트럼피즘은 세가지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번째는 앞에서 말한 미국 우선주의로 국제협력을 지향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무너뜨리고 미국의 이익을 중시하는 차원입니다. 두번째는 백인 우선주의를 포함합니다. 세번째는 트럼프 개인 차원의 우선주의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트럼프의 선거 구호)의 실천 방식이 매우 권위주의적이고, 심지어 독재적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무시하고 트럼프라는 한 권력자가 대내외 중대사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트럼프는 의회를 통하지 않고 행정명령을 남발합니다. 대통령에 취임하고 하루 동안은 독재자가 되고 싶다고도 말했습니다. 헌법적으로 불가능한 3선도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17)


‘신냉전’은 미중 패권 경쟁을 일컫는 자극적인 용어이긴 하지만, 오히려 지금 세계를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용어는 이것일 겁니다. ‘파편화’(fragmentation). 이 말의 기원은 정치철학자 홉스(T. Hobbes)로 홉스가 당시의 영국 정치를 설명했던 단어가 ‘적자생존’입니다. 협력이 아닌 공포의 세계 속에서 가장 힘센 자가 가장 많이 갖게 되는 적자생존, 즉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오늘날 일국뿐만 아니라 국제정치에서도 작동하고 있습니다. 시장 자본주의의 폐해로 양극화가 극심해지고 이를 제어하는 제도들이 다 무너지면서, 사람들의 불안과 불만이 높아지기 시작하자 생겨난 현상들 중 하나가 안보 포퓰리즘입니다. 이런 불안을 이용하는 자들이 나타나는데, 그런 사람들을 ‘(극우적) 스트롱맨’이라고 합니다. 내부적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이민자나 난민, 소수자들에게 덮어씌우고, 대외적으로는 불안을 조장하고 민족주의 감정을 호소하면서 외부 세력을 혐오하게끔 만듭니다. 18-9)


분열된 나라: 똑 닮은 미국과 한국


트럼프의 외교 전략: 각개격파와 삥 뜯기


트럼프의 세계관에서 한국과 일본, 유럽 등 미국의 기존 우방국들은 미국에 이른바 ‘빨대를 꽂아’ 피를 빠는 존재들입니다. 실제로 트럼프는 이들 국가를 ‘거머리’라고 표현한 적도 있습니다. 과거 소련, 현재는 중국의 위협과 대응으로부터 미국이 제공하는 안보 우산을 공짜로 이용하고, 경제적으로는 불공정한 무역으로 막대한 이득을 챙긴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적자를 보고 있는 상위 10개국 중, 중국은 1위, 우리나라는 8위입니다. 그래서 트럼프가 외치는 것이 ‘페이백 타임’(Payback time), 지금까지 미국을 상대로 이득을 보았던 것을 다 정산할 때라는 겁니다. 이 정산을 위한 수단이 바로 관세 부과입니다. 자유무역(free trade)이 아니라 공정무역(fair trade)을 하자면서요. 물론 그 공정 여부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동의할 수 없죠. 그러나 트럼프는 상황을 아주 단순화해서 미국이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당했고, 특히 우방국한테 당한 것을 참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24)


미국의 대외정책에 영향을 끼치는 또 하나의 관점은 네오콘(Neo Conservatives, 신보수주의자)의 세계관입니다. 조지 W. 부시(George W. Bush)로 대표되는 네오콘은 철저하게 선악의 세계관으로 무장해 있습니다. 미국이 공공선이라는 예외주의(exceptionalism)에 입각해서 전쟁을 불사하고서라도 악을 소멸시켜야 평화의 세계가 도래한다고 주장합니다. 네오콘에게 중국은 악이자 굴복시켜야 할 상대인 거지요. 존 볼턴(John Bolton)이나 마이크 폼페이오(Mike Pompeo) 등 네오콘 인사들이 트럼프 1기 정부의 외교와 안보의 한 축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트럼프는 이들 네오콘과도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1기 때 대외정책이 네오콘의 방해를 받았다며 이들 없이 재선에 성공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요. 트럼프는 이익이 되면 하고, 손해가 되면 빠진다는 철저한 거래주의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트럼프와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트럼프에게는 평화에 대한 강박 비슷한 게 있습니다. 26)


그렇다면 트럼프는 미중 경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가 궁금해집니다. 트럼프에게도 중국은 미국의 위상에 도전하기에 꺾어야 할 대상이며, 미국이 만든 질서에서 불공정한 반칙행위를 통해 이익을 챙기며 미국에 손해를 끼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는, 트럼프는 중국을 미국의 자원을 총 투입해 사생결단의 승부를 내야 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 압박할 수도 타협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트럼프는 미국에 이득만 된다면 유럽은 러시아가, 아시아는 중국이 관장해도 된다는 생각에까지 이릅니다. 이미 러우 전쟁에서 러시아 편에 서고 ‘유럽의 방위는 유럽이 알아서 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전세계를 미중러의 세 영향권으로 나누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 전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新) 얄타체제’로 이름 붙이기도 하는데요.  그런 질서가 실현 가능할지 가늠하기도 쉽지 않지만, 트럼프의 MAGA가 품고 있는 실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26-7)


한국의 트럼프 대망론이 가리키는 것


케네스 왈츠(Kenneth Waltz)나 존 미어샤이머(John Mearsheimer) 같은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들은 핵을 많이 보급할수록 평화가 온다는 역설적인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반대합니다. 핵 때문에 오히려 전쟁을 못할 거라는 논리인데, 핵무기로 인해 전면전이 일어날 것 같지 않으니까 인도와 파키스탄처럼 오히려 국지적인 전쟁이 더 많이 일어나는 게 현실입니다. 지속가능한 평화를 이루려면 군사력 강화를 통해 적이 공격하지 못하게 막는 억제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적과의 외교를 통해 적대감을 해소시키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물론 전쟁을 막을 완벽한 제도는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제동장치와 평화를 향한 가속페달은 다양하게 있습니다. 가능한 많은 도구를 확보해야 하지요. 그것이 UN일 수도 있고, 자유무역 질서일 수도 있습니다. 전쟁은 더 일어나기 쉬워졌고 전쟁이 났을 때 해결할 수 있는 방법들은 사라진 상황입니다. 하루빨리 재건해야 합니다. 29-30)


새로운 관점으로 보는 한미동맹과 평화체제


논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동맹은 전쟁 상태에서 가장 강합니다. 즉 공동의 적대국이 확실할 때 동맹관계는 굳건해집니다. 한미동맹에 적용하면, 남북관계가 악화할수록 한미동맹의 역할과 중요성은 커지죠. 그러니 우리가 계속 분단된 상태에서 북한과 적대관계로 남아 있으면 한미동맹이 더 안정적이 될 겁니다. 반대로 우리가 평화체제로 넘어가고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한미동맹은 약화되는 게 자연스럽지요. 심하게 얘기하면 분단이 계속되고 남북한과 북미 간에 긴장이 고조될수록 한미동맹은 강해지고, 교류와 협력이 높아지면 역설적으로 동맹은 약해지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한미동맹이 평화의 상징으로 너무나도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남북관계의 개선이 이뤄질 때마다 오히려 동맹 약화를 걱정하는 역설이 벌어집니다. 역대 진보 정부들이 남북협력을 이루려고 하면 어김없이 한미동맹을 흔든다는 비판이 나오고 이는 국민에게 강한 소구력을 가져왔습니다. 31)


남북한의 미래, 평화와 통일 등에 있어서 남북이 같은 민족이냐 아니면 구별된 두 국가냐 하는 문제는 우리 내부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지요. 사실 분단구조에서는 둘 다 맞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이 두개를 억지로 합치려고 합니다. ‘두 국가’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의 민족이라는 사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니 필연적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열심히 주장한다고 해서 엄연한 분단현실과 두 국가체제를 부정할 수 없지요. 한 민족과 두 국가라는 이 두 정체성은 매우 불편하지만 같이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하나를 외면하거나, 또는 억지로 둘을 통합하려는 시도 모두 무리수입니다. 두 국가이기 때문에 그만큼 통일이 어렵다는 현실을 인정하되,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도 놓치지 않아야겠죠. 두개의 정체성이 갖는 모순은, 먼 미래에 통일이라든지 분단체제가 해소되어야 해결되기 때문에 지금의 분단구조 안에서는 두 정체성 중 어느 하나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32)


트럼프 태풍에 맞서는 일은 가능할까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국제적으로 연대가 필요합니다. 특히 트럼프에게 당한 피해국들의 연대가 필요합니다. 트럼프는 지금 ‘일 대 일’로 상대하려 합니다. 많은 국가가 안보와 경제를 미국에 기대고 있기에 쉽사리 반트럼프 연대에 나서지 못할 거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국제질서가 현재 훨씬 더 다극화되고 평등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극화 흐름이 러시아가 추구하는 것처럼 나쁜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지만, 가령 한국과 일본, 그리고 EU 등이 주도해서 새로운 형태의 자유무역 질서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독자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에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한중일 3국의 역내 협력도 주목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3국이 전세계 제조업에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도 중요하지만, 합치면 절대적입니다. 3국이 함께 적극적으로 개방된 공급망과 자유무역을 지탱해준다면 트럼프의 보호주의 태풍을 견뎌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33)


바로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라는 가능성


사실 한국은 역사적으로 계급사회가 뒤집힌 적이 없습니다. 조선시대 양반 사회의 기득권이 뒤집힌 적도 없지요. 동학농민운동을 비롯해 다수의 혁명이 있었지만, 신분제를 타파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또한 일제강점기가 끝난 이후에도 친일파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그리고 분단의 대결구조에서 군대의 힘이 막강해졌습니다. 연속적 독재정권의 등장으로 경찰과 검찰도 강해졌습니다. 게다가 유교적인 집단주의 문화도 갖고 있습니다. 이런 국가라면 사실 시장이나 시민사회가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동학농민운동부터 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1987년 민주화항쟁, 2024년 남태령대첩까지, 국가가 선을 넘을 때마다 시민이 봉기했지요. 저는 이것이 대한민국이 가진 엄청난 저력이고 진정한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장이 잘못되고 불평등이 생길 때는 공적 국가를 키워서 고쳐내고, 국가가 반민주·반헌법을 자행할 때는 시민과 시장이 제어하는 겁니다.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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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물리학은 처음인데요 : 수식과 도표 없이 들여다보는 물리학의 세계 - 수식과 도표 없이 들여다보는 물리학의 세계
마쓰바라 다카히코 지음, 이인호 옮김 / 행성B(행성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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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물리학은 아름답다


물리학은 이 세계가 어떤 규칙으로 돌아가는지 탐구하는 학문이다. 이를 위해 물리학 연구에서는 되도록 단순한 상황을 가정하고, 이 상황을 정확히 표현할 방법을 찾아낸다. 물리학에서 이상적인 상황을 가정하는 이유는 그것이 현실의 복잡한 현상을 단순한 요소로 분해할 수 있는 강력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현상을 단순한 요소로 분해하고 관찰한 다음에 그 현상의 배후에 있는 질서를 밝혀낸다. 과학은 이런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가령 공기저항을 무시하고 중력만 작용하는 상황을 연구하면 중력의 성질을 알아낼 수 있다. 한편으로 중력을 무시하고 공기저항만 작용하는 상황을 연구하면 공기저항의 성질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두 가지 힘의 성질을 각각 알아낸 다음 이를 합치면 중력과 공기저항이 둘 다 작용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상적인 상태에서 각 요소를 개별적으로 알아낸 다음 이를 조합함으로써 현실적인 문제를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다. 11-2)


제2장 천상 세계와 지상 세계는 똑같다


천동설에서 벗어나 지동설로 넘어가려면 먼저 원운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선입관을 버려야만 했다. 요하네스 케플러는 스승인 튀코 브라헤가 남긴 방대한 관측 자료에 태양 중심설을 적용함으로써 행성 궤도가 타원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케플러의 발견은 단순히 원을 타원으로 교체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타원 운동을 하는 행성의 속도도 알아냈다. 비교적 태양과 거리가 가까운 행성은 속도가 빠르고, 반대로 거리가 먼 행성은 속도가 느리다. 또한, 행성 하나의 속도를 봐도 태양과 가까워질수록 빨라지고 멀어질수록 느려진다. 케플러는 이를 수치상으로 명확하게 밝혀냈다. 겉보기에 아름다운 원운동의 조합에서 벗어난 일은 근대 물리학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천동설은 완전함의 상징인 원에 집착한 결과 진실에 다가가지 못한 것이다. 이 일은 자연계의 올바른 법칙을 찾는 과정에서 ‘자연이 완전한 아름다움을 지닐 것이다’라는 선입관에 사로잡힌 결과 잘못된 결론에 이른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27)


이탈리아의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당시에 발명된 지 얼마 안 된 망원경을 직접 개량하여 천체를 관측하다가 목성 주위를 도는 위성 4개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목성 근처에 있는 별인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목성 주위를 도는 천체였다. 천동설에서는 기본적으로 모든 천체가 지구 주위를 돈다. 하지만 갈릴레오의 발견은 지구가 아닌 천체가 운동의 중심이 될 수 있음을 보인 것이었다. 즉 지구를 모든 것의 중심으로 설명하는 천동설에 반하는 사실이었다. 또한, 갈릴레오는 금성이 차고 이지러지는 동시에 크기가 변하는 것을 관찰했다. 금성도 지구와 마찬가지로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이며, 지구보다 안쪽 궤도를 돌고 있다. 그래서 지구와 거리가 가까워지면 크게 보임과 동시에 그늘 부분이 커져서 초승달 모양이 된다. 반대로 지구와 멀어지면 크기가 작아지고 그늘 부분도 줄어서 보름달처럼 전체가 빛나 보인다. 천동설로는 무척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지동설에서는 당연한 현상일 뿐이다. 29)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함으로써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갑작스럽게 바뀌었다. 천상과 지상의 구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천상 세계와 지상 세계는 서로 다른 법칙이 지배하는 개별적인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천상과 지상이 모두 우주라는 커다란 공간 속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뉴턴 역학의 등장과 함께 몇 가지 기본 법칙으로 세계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물리학의 기본 방침이 정착했다. 그러나 물체 사이에는 만유인력뿐만 아니라 다른 다양한 힘도 작용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힘이 만유인력뿐이면 정말 큰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물체는 다른 물체를 지탱할 수 있을까? 우리 눈에 보이는 물체는 모두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물체가 한 덩어리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이웃한 원자끼리 강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중력을 거스르며 의자 위에 앉아있을 수 있는 이유는 원자 사이에 작용하는 힘 덕분이라는 소리다. 왜냐하면 모든 물체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31, 34-5)


원자 사이에서 작용해 물체의 형태를 유지하는 힘의 정체는 만유인력이 아니다. 만유인력은 서로 끌어당기기만 하는 힘인데, 실제로는 물체를 이용해 다른 물체를 밀어낼 수도 있고 끌어당길 수도 있다. 즉 끌어당기는 힘인 인력뿐만 아니라 밀어내는 힘인 척력도 작용한다는 뜻이다. 인력과 척력을 둘 다 지니는 힘이라고 하면 즉시 떠오르는 것이 있을 것이다. 바로 전기력이다. 양전하와 음전하 사이에서는 인력이 작용하며, 양전하끼리와 음전하끼리는 척력이 작용한다. 원자는 양전하를 띤 원자핵과 음전하를 띤 전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기의 힘으로 제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원자와 원자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도 전기력이며, 원자가 모여서 분자를 이루는 것도 전기력에 의한 현상이다. 전기력과 유사한 힘으로 자기력이 있다. 실은 전기와 자기는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이 두 가지를 합쳐서 전자기력이라고 부른다. 중력을 제외하면 우리 주변에서 보이는 힘은 모두 전자기력으로 설명할 수 있다. 36-7)


제3장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빛이란 파동의 한 종류다. 우리는 평소에 빛이 파동이라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데, 이는 빛의 파장이 극단적으로 짧기 때문이다. 파동이란 어떤 규칙적인 변화가 퍼져 나가는 현상이다. 그 규칙적인 변화에는 기본 길이가 있으며, 이를 파장이라고 한다. 가령 바다에 이는 물결인 파도를 보면 물의 높이가 가장 높은 마루와 가장 낮은 골이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된다. 이때 마루와 마루 사이의 거리, 혹은 골과 골 사이의 거리가 바로 파장이다. 빛의 파장은 극단적으로 짧다. 눈에 보이는 빛을 가시광선이라고 하는데, 가시광선의 파장은 거의 400nm에서 700nm 정도다(1nm는 0.000001mm이다). 파장이 길수록 빨갛게 보이고, 파장이 짧을수록 파랗게 보인다. 원자의 크기는 1nm보다 작은데, 이는 가시광선의 파장보다 훨씬 짧다. 따라서 광학 현미경의 배율이 아무리 높다 해도 원자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 그 어떤 작은 물체라도 확대하면 잘 보일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의 경험을 확대 해석한 잘못된 추측일 뿐이다. 45-6)


화학 반응식을 배운 사람이라면 물질이 원자와 분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화학 반응식을 보면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수소 분자 H2와 산소 분자 O2가 결합하면 물 분자 H2O가 생기는데, 이때 수소 분자와 산소 분자와 물 분자의 개수비는 반드시 2:1:2가 된다. 그래야만 수소 원자 H와 산소 원자 O의 개수가 반응 전후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근대적인 원자론은 19세기 초에 제창되었다. 영국의 교사였던 존 돌턴은 화학 반응을 비교적 간단한 정수비로 나타낼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원자가 존재한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돌턴은 원자의 상대적인 무게인 원자량을 밝혀냈다. 돌턴은 수소와 산소 등의 기체가 원자가 아닌 분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그의 이론은 정확하지 않았다. 돌턴의 이론을 수정해 수소와 산소 등은 원자가 2개씩 결합한 분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면 기체의 반응을 정확하게 나타낼 수 있다. 47, 50)


기체 성질에 관한 연구에서도 간접적으로 원자의 존재를 암시하는 단서가 나타났다. 기체 분자운동론이란 기체가 미세한 입자로 이루어져 있고, 각 입자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운동한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기체의 기본 성질을 유도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기체의 압력은 기체가 들어 있는 용기 내벽에 입자가 충돌하면서 생기는 힘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기체에는 압력이 일정할 때 온도가 높을수록 부피가 커진다는 성질이 있는데, 이는 ‘샤를의 법칙’이라고 불린다. 예를 들어 열기구는 이 성질을 이용해서 하늘을 난다. 공기를 데워서 팽창시키면 열기구 안에 든 공기의 양이 줄어서 바깥 공기보다 가벼워지므로, 그 부력을 이용해 위로 뜨는 것이다. 이 샤를의 법칙은 기체 입자가 날아다니는 평균 속도에 따라 온도가 결정된다고 생각함으로써 설명할 수 있다. 입자의 속도가 빠를수록 기체가 담긴 용기 내부의 압력이 커진다. 이때 용기 외부의 압력이 일정하다면 내부 기체가 용기를 밀어내며 부피가 팽창하는 것이다. 51)


제4장 미시 세계로 들어가다


플랑크가 해명하려 한 열역학 문제는 물체가 전자기파를 방출하는 복사 현상이었다. 물체는 온도에 따라 전자기파를 방출하는 성질이 있다. 뉴턴 역학에서는 에너지를 1개, 2개로 셀 수 없는 연속적인 값으로 본다. 하지만 플랑크의 이론에 따르면 미시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물질에 의한 복사가 작은 입자(오늘날 말하는 원자)의 진동 때문에 발생한다고 했을 때, 그 진동을 통해 방출되는 에너지에는 진동수에 따른 최소 단위가 있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진동을 통해 방출되는 에너지에 최소 단위가 있다고 가정하면 플랑크의 수식이 유도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플랑크의 수식은 모든 파장 영역에 걸친 실험 결과에 들어맞았다. 그러한 에너지의 최소 단위를 ‘양자’라고 부른다. 뉴턴 역학에 따르면 진동의 에너지는 연속적이므로, 진동을 통해 방출되는 에너지는 어떤 값이든 지닐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 진동 에너지에는 최소 단위가 있다. 다시 말해 진동 에너지는 반드시 그 최소 단위의 정수배가 되어야 한다. 63-4)


플랑크의 발견은 미시 세계에서 뭔가 기묘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시사했다. 플랑크의 수식은 실험 결과를 잘 나타내는 유용한 공식이었지만, 수많은 물리학자가 ‘진동 에너지에 최소 단위가 있다’는 엉뚱한 가정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플랑크 자신도 이를 임시로 도입한 기술적인 가정일 뿐이라 여겼으며, 그곳에 물리학의 근본에 관한 중대한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플랑크의 이론을 발전시킨 사람은 바로 천재 물리학자로 유명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었다. 플랑크는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가 진동하면서 방출하는 에너지에 최솟값이 있다고 가정했는데, 아인슈타인은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아인슈타인은 방출되는 전자기파 그 자체의 에너지에 최솟값이 있다고 보았다. 아인슈타인은 전자기파 자체가 양자화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광양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광양자 이론에 따라 물체에서 방출되는 전자기파를 계산해도 플랑크의 수식이 유도됨을 보였다. 65)


아인슈타인은 이 가설을 다른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도 응용해 성공을 거두었다. 바로 광전효과라 불리는 금속에 빛을 비추었을 때 전자가 튀어나오는 현상이다. 빛을 파동으로 본다면 이 현상은 파동의 에너지가 전자를 금속에서 떼어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빛의 세기가 셀수록 튀어나오는 전자의 에너지도 커질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리 센 빛을 비춰도 튀어나오는 전자의 개수가 늘어날 뿐이었다. 한편으로 빛의 파장이 짧을수록 튀어나오는 전자의 에너지가 커졌다. 광전효과의 이러한 현상은, ‘빛의 에너지는 연속적이지 않으며 광양자로 되어 있다’는 아인슈타인의 가설로 설명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광양자라고 부른 것은 오늘날 ‘광자’라고 불린다. 파장이 짧아질수록 광자의 에너지가 커지므로 튀어나오는 전자의 에너지도 커진다. 한편으로 파장은 똑같은데 빛의 세기만 강하게 하면, 광자의 수가 늘어나서 튀어나오는 전자 수가 늘어나기는 하지만 전자 하나하나의 에너지는 커지지 않는다. 65-6)


고전물리학에 따라 원자 모형을 설명하면 전자는 금세 원자핵과 만나고 만다는 결론이 나온다. 전자의 운동 에너지가 줄다가 결국 0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자 가설에 따르면 원자 안에 있는 전자의 운동 에너지값은 연속적이지 않고 띄엄띄엄 떨어진 값이다. 또 전자의 운동 에너지에는 최솟값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자가 원자핵과 만나지 않는다는 말은 그 최솟값이 0이 아닐 것이며, 최소 에너지 상태에서 원자가 안정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보어는 이러한 가설에 따라 원자 모형을 고안했다. 원자는 종류에 따라 정해진 파장의 빛을 방출한다. 양자 가설에 따르면 빛의 파장은 광자 하나의 에너지와 대응하므로, 바꿔 말해 원자가 일정한 에너지를 지닌 광자를 방출한다고 할 수 있다. 원자의 에너지가 양자화되어 띄엄띄엄 떨어진 값밖에 지닐 수 없다면, 그 띄엄띄엄 떨어진 차이만큼의 에너지가 바로 방출되는 광자의 에너지일 것이다. 이러한 에너지 계단을 결정하는 원리는 무엇일까? 69)


드 브로이는 전자가 입자의 성질과 파동의 성질을 모두 지닌다는 가설을 제안했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광양자 가설의 반대 버전이다. 파동인 줄로만 알았던 빛이 사실은 입자의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면, 반대로 입자인 줄 알았던 전자도 파동의 성질을 지니고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다. 입자가 지니는 파동의 성질을 ‘드 브로이파(물질파)’라고 한다. 드 브로이파의 파장은 매우 짧다. 그래서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원자 내부처럼 매우 작은 세계에서는 전자가 지니는 파동의 성질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 보어의 양자조건은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돌면서 드 브로이파에 따라 안정하게 진동하는 조건과 똑같다. 그 조건이란 전자 궤도 한 바퀴의 길이가 드 브로이파 파장의 정수배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전자가 궤도를 한 바퀴 돌았을 때 드 브로이파의 진동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어의 양자조건을 만족했을 때 전자의 드 브로이파는 원자 안에서 안정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70)


제5장 기묘한 양자의 세계


하이젠베르크는 원자 속에서 전자가 뭘 하고 있는지 알아내려 해 봤자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전자가 원자 속에서 어떤 궤도로 운동하느냐는 오직 머릿속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이며, 실제로 관측해서 확인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이젠베르크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더는 관측할 수 없는 일에 관해 고민하지 말자. 실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 다시 말해 관측 가능한 값에만 의미가 있다. 그리고 관측 가능한 값이 어떤 수치가 될지 이론적으로 예언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처럼 하이젠베르크는 전자 궤도 등 관측할 방법이 없는 문제는 이론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실천에 옮기기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하이젠베르크는 실제로 그러한 이론을 구축해 물리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은 직관적인 상상을 완전히 배제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추상적이고 수학적인 이론이 되었다. 오직 관측할 수 있는 값에 주목해 그 사이에서 성립하는 수학적 관계를 알아내려 했다. 72)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이 성립하려면 곱셈의 순서를 바꿨을 때 결과가 달라진다는 기묘한 규칙이 필요했다. 2×3이나 3×2나 둘 다 6이 되는 것처럼, 보통 곱셈을 할 때는 순서를 바꿔도 결과가 똑같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에서는 순서를 바꾸면 결과가 달라지는 이상한 곱셈을 사용해야 했다. 당시 물리학자는 대부분 그런 이상한 곱셈에 관해 알지 못했다. 이는 하이젠베르크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이상한 곱셈을 써야만 하는 자신의 이론에 의미가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전해진다. 하이젠베르크는 새 이론에 관한 논문을 완성한 다음 자신의 스승이자 물리학자인 막스 보른에게 의견을 구했다. 얼마 후 보른은 그 이상한 곱셈이 수학자 사이에서 알려져 있던 행렬연산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행렬이란 말 그대로 숫자를 행과 열로 나열한 것이다. 두 행렬을 곱하면 새로운 행렬이 나온다. 이 행렬끼리의 곱셈은 순서를 바꾸면 결과가 전혀 달라진다는 성질이 있다. 73)


당시 물리학자가 행렬역학을 보고 당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오래 가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행렬역학이 발견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서 전혀 다른 형태의 양자역학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양자역학은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가 발견했다. 슈뢰딩거는 하이젠베르크와 달리 더 직관적인 방법으로 원자 내부를 이해하려 했는데, 당시에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드 브로이파를 이용했다. 슈뢰딩거는 처음으로 드 브로이파의 파동 방정식을 찾아냈다. 이를 ‘슈뢰딩거 방정식’이라고 한다. 즉 슈뢰딩거는 행렬역학과 다른 새로운 양자역학을 발견한 것이다. 슈뢰딩거의 양자역학을 ‘파동역학’이라고 한다. 행렬역학은 직관적인 이해를 배제한 채 복잡한 계산을 해야 하지만, 파동역학은 시각적인 이해가 가능한 데다 물리학자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계산할 수 있다. 둘 다 똑같은 결론에 이르는 이론이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은 자연히 행렬역학을 버리고 파동역학을 이용하게 되었다. 75)


슈뢰딩거는 파동역학의 파동이 실재한다고 보았으며, 전자 등의 입자를 그 파동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전자 등은 사실 입자가 아니며, 오직 겉으로만 입자처럼 보일 뿐이다. 파동의 파장이 너무나 짧아서 마치 파동이 아닌 입자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슈뢰딩거의 해석에는 문제가 많았다. 아무리 파동을 작은 영역에 가두려 해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넓게 퍼져 나가 버린다. 이유는 간단하다. 수면에서 파문이 시간에 따라 넓게 퍼져 나갈 수밖에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벽으로 가로막히지 않은 수면에서는 물결을 좁은 공간에 가두어 둘 수 없다. 이래서는 전자가 언제나 입자처럼 관측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면 파동함수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그 해답을 내놓은 사람은 이론물리학자 막스 보른이었다. 보른이 내놓은 해석은 참으로 놀라운 내용이었다. 파동함수가 나타내는 파동은 물결이나 음파처럼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자가 존재할 확률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78)


어떤 위치에 대한 파동함수가 크면 클수록 그곳에서 입자를 발견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 양자역학의 확률 해석이다. 파동함수는 시간과 공간으로 결정되는 함수이니, 바꿔 말하면 시간과 공간에 따라 입자를 발견할 확률을 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즉, 언제 어디서 입자가 발견되기 쉬운지 알려주는 셈이다. 이론의 근본 부분에 확률이 존재한다는 것은 전통적인 물리학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왜냐면 뉴턴 역학 이후의 물리학에서는 한 시점의 물리적인 상황을 완전히 알고 있다면, 그 후에 일어날 일을 완전히 예언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볼츠만의 통계역학에서 확률이 쓰이기는 했지만, 이는 단지 입자 개수가 너무 많아서 물리적인 상황을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는 이해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확률은 더 근원적인 것이다. 양자역학에서는 설사 물리적인 상황을 완전히 알고 있다 해도 그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확률적으로밖에 예언할 수 없다. 80)


가령 전자가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에너지값 중 하나를 지니고 있다고 해보자. 전자의 에너지값은 지금보다 더 작은 다른 값으로 바뀔 수 있는데, 이때 원래 값과 나중 값의 차이만큼의 에너지를 지닌 광자를 방출한다. 그런데 여기서 ‘더 작은 값’의 후보가 여러 개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전자의 에너지는 다양한 값으로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최초의 물리적인 상황을 완전히 알고 있다 해도, 다음에 전자의 에너지값이 어떤 값으로 바뀔지는 확률적으로만 예상할 수 있다. 이 에너지값으로 변할 확률은 얼마이며, 저 에너지값으로 변할 확률은 얼마라는 식이다. 따라서 방출되는 광자의 에너지도 확률적으로만 예언할 수 있다. 게다가 광자가 어느 방향으로 방출될지도 확률적으로만 알 수 있다. 에너지 단계가 높은 원자가 하나 있을 때, 그 원자에서 어느 방향으로 얼마만큼의 에너지를 지닌 광자가 방출될지 정확하게 예상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오직 가능성과 확률만을 예언할 수 있을 뿐이다. 81)


제6장 시간과 공간의 물리학


맥스웰 방정식은 전기장과 자기장에 관한 방정식이다. 맥스웰은 이 방정식을 통해 전기장과 자기장이 서로 영향을 미치며 생겼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하는 파동의 형태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게다가 이 파동은 물질이 전혀 없는 진공 속에서도 전달될 수 있다. 전기장과 자기장이 서로 얽힌 채로 진행하는 이 파동을 ‘전자기파’라고 한다. 맥스웰 방정식을 이용하면 전자기파의 속도를 계산할 수 있다. 맥스웰이 그 속도를 계산한 결과 빛의 속도와 거의 유사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는 엄청난 발견이었다. 그동안 아무도 몰랐던 빛의 정체가 바로 전자기파였음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전자기파가 진공 속을 나아간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참으로 기묘하다. 일반적으로 파동은 물질을 흔들면서 나아간다. 즉 파동을 매개하는 물질이 필요하다. 그런데 전자기파는 물질이 없는 진공 속에서도 전파된다. 전자기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존재인 전기장과 자기장을 흔들면서 나아간다. 110)


진공 속에서 전달되는 파동이 기묘한 이유는 파동의 속도가 대체 무엇에 대한 속도냐는 점이다. 물결의 속도는 물에 대한 속도이며, 음파의 속도는 공기에 대한 속도이다. 즉, 파동의 속도란 파동을 전달하는 물질에 대한 속도인 셈이다. 그런데 진공 속에서 퍼져 나가는 파동에는 이를 매개할 물질이 없다. 그렇다면 전자기파, 즉 빛의 속도는 대체 무엇에 대한 속도일까? 기준이 없다면 속도는 상대적으로만 정할 수 있다. 즉 누가 측정하느냐에 따라 속도가 달라진다. 어떤 사람이 보기에는 초속 30m로 움직이는 물체일지라도, 이를 초속 10m로 쫓아가고 있는 사람이 보기에는 초속 20m로 보일 것이다. 기준으로 삼을 만한 물체가 없다면, 속도는 결국 측정하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맥스웰 방정식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이라면, 빛이 진공 속을 나아가는 속도는 누가 측정해도 똑같아야 한다. 즉, 서로 움직이고 있는 관찰자 두 사람이 한 빛의 속도를 각각 측정했을 때 똑같은 속도가 나와야 한다. 110-2)


아인슈타인은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애초에 속도(이동 거리를 걸린 시간으로 나눈 결과값)란 어떤 개념인지를 되짚어봤다. 빛이라면 1초에 30만km를 이동하므로 초속 30만km가 된다. 이때 빛을 초속 10만km로 쫓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멈춰 있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 이 사람은 1초 후에 10만km 앞에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빛은 1초 후에 30만km 앞에 있을 것이므로, 움직이고 있는 사람과 빛의 거리 차이는 1초 후에 20만km가 될 것이다. 즉 빛과 이를 쫓아가는 사람의 거리가 1초 만에 20만km 벌어졌다. 속도가 거리를 시간으로 나눈 값인 이상,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때 빛을 쫓아가는 사람이 측정한 빛의 속도는 초속 20만km라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이때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어떤 사실이 있다. 바로 움직이는 사람과 멈춰 있는 사람이 똑같은 시간과 똑같은 거리를 측정하고 있다는 가정,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은 멈춰있는 사람에게도 움직이는 사람에게도 똑같다는 전제다. 115-6)


이렇게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이 관찰자에 따라 서로 다르게 보인다는 비상식적인 이론을 펼쳤다. 이것이 바로 ‘특수상대성이론’이다. 시간과 공간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것이 아니며, 측정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즉 상대적인 것이라는 점이 이 이론의 핵심이다. 그래서 이 이론이 상대성이론이라 불린다. 특수란 말이 붙은 이유는 훗날 아인슈타인이 중력까지 포함하여 일반화한 일반상대성이론과 구분하기 위해서다. 초속 30만km로 멀어지는 빛을 초속 10만km로 쫓아가는 사람은 멈춰 있는 사람과 다른 시간과 공간을 경험한다. 그래서 멈춰 있는 사람 눈에는 움직이는 사람이 빛과 초속 20만km로 멀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도, 움직이는 사람은 그와 다른 시간과 거리를 경험하므로 빛의 속도가 똑같이 초속 30만km로 측정되는 것이다. 그 결과 발견된 수식은 비교적 단순했으며 ‘로런츠 변환’이라 불린다. 로런츠 변환에 따르면 서로 움직이고 있는 관측자의 시간과 공간은 서로 뒤섞여 있다. 116)


요점은 멈춰 있는 사람과 움직이는 사람 사이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서로 얽혀 있고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이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어느 쪽 시간이 느린지 분명하지 않으므로 모순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느 쪽이 느리고 어느 쪽이 빠르다는 생각 자체가 절대적인 시간을 전제로 한 것이다. 어떤 기준으로 삼을 만한 시간의 흐름이 있다면 이에 비해 빠른지 느린지를 논할 수 있겠지만, 그런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상대의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또한, 내가 빠르게 움직인다고 해서 자기 자신의 시간이 느려졌다는 자각은 할 수 없다. 상대가 보기에는 내 뇌를 포함한 내 주변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 때문에 내가 느끼는 시간 감각에는 변화가 없다. 즉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보인다는 것뿐이지, 내가 느끼기에는 달라지는 것이 없다. 다른 사람이 없어도 내 시간은 잘 흐르므로 다른 사람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느냐로 내 시간이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118)


제7장 시공간이 낳는 중력


일반상대성이론의 중요한 특징은 중력이라는 힘을 시간과 공간의 성질로 설명해 냈다는 점이다. 전철에 탔을 때를 떠올려 보자. 멈춰 있는 상태에서 전철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이렇게 가속할 때는 진행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밀리는 느낌이 든다. 특히 서 있을 때는 손잡이를 잡지 않으면 넘어질 수도 있다. 이 힘은 ‘관성력’으로 알려져 있다. 전철이 움직이기 시작해도 나 자신은 계속 멈춰 있으려고 한다. 즉 전철만 먼저 앞으로 나가 버리다 보니, 전철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마치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뒤로 미는 것처럼 보인다. 그 힘을 상쇄하기 위해 뒤에서 힘을 가하면 자신도 전철과 함께 움직이게 된다. 이처럼 관성력이란 가속하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힘이 작용하는 것처럼 느끼는 현상이다. 이 힘은 무게를 지닌 모든 물체에 작용한다. 그리고 무거울수록 관성력도 커진다. 이처럼 관성력과 중력은 성질이 비슷한데, 실제로 이 두 가지 힘은 구별할 수 없다. 122-3)


중력과 관성력이 똑같다면 중력은 이제 물체끼리 서로 직접 끌어당기는 힘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가속하고 있는 관측자가 똑바로 움직이는 물체를 보면 물체가 똑바로 움직이지 않고 휘어져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달리던 전철이 멈추려고 감속할 때는 모든 물체가 앞으로 힘을 받는다. 따라서 진행 방향과 수직으로 공을 굴리면 앞으로 휘어지는데, 이것이 관성력이다. 하지만 전철 밖에서 관찰하면 공은 똑바로 굴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관성력은 관측자의 가속 때문에 생긴다. 가속이란 속도의 변화를 시간으로 나눈 것이므로 시간 · 공간과 관련되어 있다.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속도가 서로 다른 관측자들 사이에서는 시간과 공간도 달라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속하는 관측자의 시간과 공간은 가속하지 않는 관측자의 시간과 공간과는 다르다. 따라서 가속하고 있는 관측자에게는 시공간이 휘어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중력은 무언가에 끌리는 힘이 아니라 시공간이 휘어져서 생기는 힘이라는 것이다. 124-5)


# 등가 원리 : 관성력과 중력은 등가, 즉 똑같은 것이라는 개념


뉴턴이 제시한 만유인력의 법칙에서는 무게가 있는 물체에 직접 중력이 작용한다고 한다. 무게가 0인 물체에는 힘이 전혀 작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러한 물체는 중력 때문에 진로가 휘어지지 않을 것이다. 가령 멀리서 날아온 입자가 별 근처를 스쳐 지나간다고 생각해 보자. 이 입자의 무게가 0이라면 별의 영향을 받지 않고 그냥 똑바로 나아갈 것이다. 하지만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별 주변에 있는 시공간이 휘어져 있으므로 무게가 0이라 해도 똑바로 나아갈 수는 없으며, 진로가 다소 별 쪽으로 휘어진다. 이를 관측할 방법이 있다. 태양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다른 별빛을 관찰하는 것이다.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별빛은 태양 주변에서 약간 진로가 휘어진 다음 지구에 도착한다. 즉 태양 근처에서 빛이 굴절하므로, 별이 원래 보여야 할 위치보다 태양에서 약간 벗어난 위치에 보일 것이다. 따라서 원래대로라면 태양 때문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아야 할 별빛도 태양 표면 아슬아슬한 곳에서 보일 수 있다. 128)


제8장 물리학이 나아갈 길


현대 물리학에 있는 수많은 이론은 양자론과 상대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기초 물리학 분야에서는 양자론과 특수상대성이론을 기반으로 ‘양자장론’이 발전했다. 원래 양자장론은 전자기력을 양자론과 융합시키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었다. 양자역학은 본디 입자의 운동을 양자적으로 다루는 학문인데, 이를 전기장과 자기장 등 공간에 퍼져 있는 현상에도 적용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양자론과 전자기학을 융합시킨 ‘양자 전기역학’이라는 이론이 만들어졌다. 이 이론은 특수상대성이론도 포함하며 실험 결과와도 매우 잘 맞아떨어지는 성공적인 이론으로 볼 수 있다. 양자 전기역학은 ‘양자장론’이라 불리는 이론 형식의 한 가지 사례다. 또한, 양자장론을 통해 원자핵 안에 있는 양성자와 중성자의 정체를 밝혀내기에 이르렀다. 양성자와 중성자는 각각 세 가지 쿼크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그 쿼크가 어떠한 물리 법칙을 따르는지도 알려져 있다. 이에 관한 물리 법칙도 양자장론의 형태로 정리되어 있다. 137)


우리가 양자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을 동시에 다뤄야 할 상황에 맞닥뜨릴 일은 없다. 양자론의 효과는 미시 세계에서 현저해지는 한편, 일반상대성이론의 효과는 거시 세계에서 현저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리적으로는 미시 세계에서도 일반상대성이론의 효과가 현저하게 나타날 때가 있다. 바로 매우 큰 에너지가 집중되어 있을 때다. 에너지는 질량과 같은 것이라서 그 자체가 시공간을 휘어지게 만든다. 미시 세계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집중되면 시공간이 심하게 휘어지므로 기본 입자의 세계에서도 일반상대성이론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내려면 엄청난 에너지를 매우 작은 영역에 집중해야 한다. 이는 우주가 태어난 직후의 상태이며, 그 상태를 이해하려면 우주 자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즉, 우주의 기원을 밝혀내려면 양자론이나 일반상대성이론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함께 기술할 수 있는 이론이 필요하지만, 그런 이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140-1)


모든 것의 이론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처럼 보이지만, 이는 모순을 품고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정말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라면, 자기 자신이 옳은 이유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옳음을 스스로 증명할 수는 없다. 외부에 있는 객관적인 증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빗대면 알기 쉬울 것이다. 한 사람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한다 해도, 증거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처럼 어떤 이론이 옳다는 사실을 그 이론 내에서 증명할 수는 없다. 이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라고 하는 수학적 사실이다. 모든 것의 이론이라 불릴 만한 것이 있더라도, 그 이론 안에는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한 가지 기본 법칙이 있을 것이다. 정말 그런 이론이 있다면 모든 것의 이론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 기본 법칙이 왜 성립하느냐는 의문은 남는다. 즉 모든 근본적인 의문이 풀리고 더는 탐구할 필요가 없는 완전한 이론은 존재할 수 없다.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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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출출할 땐, 주기율표 - 먹고사는 일에 닿아 있는 금속 열전
곽재식 지음 / 초사흘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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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스칸듐: 야구장 간식을 고르며 Sc


합금을 만들면 왜 성능이 좋아질까? 세상의 모든 물체처럼 금속 덩어리도 크게 확대해 보면 원자라는 아주 작은 알갱이들이 모여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그 원자들은 왜 낱낱이 흩어지지 않고 그렇게 덩어리지어 붙어 있을까? 간단히 이야기하면 원자 속에 있는 전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원자 속에 있는 전자는 ⊖전기를 띤다. 바로 그 전자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두 원자가 달라붙게 해 준다. 전자 하나가 두 원자를 휘감아 돌고 있으면 두 원자는 그 전자의 움직임 때문에 서로 붙어 있으려고 할 것이다. 원자의 중심부 핵에는 ⊕전기가 있으니 ⊖전기를 띤 전자에 잘 이끌릴 수밖에 없다. 상황에 따라서는 이와 반대로 원래 붙어 있던 원자들이 전자의 움직임 때문에 떨어질 수도 있다. 대체로 원자들이 잘 붙어 있느냐, 떨어지기도 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자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원자가 어떻게 붙어 있느냐에 따라 물질의 성질이 바뀌는데, 화학은 바로 그런 변화를 연구하는 일이다. 9-10)


원자의 종류가 무엇이냐에 따라 하나의 원자 속에 있는 전자의 개수가 다르고, 전자가 들어 있는 모양도 다르다. 수소에는 원자 하나당 전자가 1개 있고, 헬륨에는 원자 하나당 전자가 2개 있고, 알루미늄에는 원자 하나당 전자가 13개 있으며, 스칸듐에는 원자 하나당 전자 21개가 있다. 또한, 그 전자들이 주로 원자의 겉면 쪽을 돌아다니는지, 아니면 원자의 중심부 쪽을 돌아다니는지도 원자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그러므로 서로 잘 맞는 성질을 가진 원자들을 적절히 섞어 놓으면 원자 사이를 밀고 당기며 돌아다니는 전자들이 원자들을 최대한 잘 묶어 놓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튼튼한 합금이 만들어진다. 필요하다면 원자들이 잘 들러붙지 않는 조합으로 합금을 만들어서 쉽게 녹이고 가공하기 편리한 재료를 얻을 수도 있다. 학자들은 알루미늄에 스칸듐을 약간 더해서 잘 섞어 주면 그냥 알루미늄 덩어리보다 더 성능이 뛰어난 재질이 되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야구 방망이가 바로 스칸듐 합금 방망이다. 10)


22 타이타늄: 외계인 초코볼을 집어 들며 Ti


색소를 사용하는 분야에서 타이타늄이라고 하면 보통 흰색을 띠는 이산화타이타늄을 일컫는 경우가 많듯이, 금속 재료를 사용하는 분야에서 타이타늄이라고 하면 타이타늄 합금을 줄여서 말한 것일 때가 많다. 골프채 같은 운동기구에서 군사용 무기까지 타이타늄 합금 재료의 용도는 상상외로 넓다. 가볍고 튼튼하며 녹이 잘 슬지 않는 타이타늄은 사람 몸과 관련된 부품을 만드는 데도 많이 사용된다. 수술로 사람 몸에 장치하는 부품이 쉽게 상한다면 수리나 교체를 하느라 거듭 수술을 해야 할 것이므로 그런 일이 없도록 처음부터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너무 무거우면 사람이 움직이는 데 힘이 들므로 가벼울 필요도 있다. 아울러 사람 몸은 60% 이상이 수분으로 되어 있으니 물과 산소가 닿더라도 쉽게 녹슬지 않아야 한다. 다행히 타이타늄을 잘 이용하면 그런 소재를 만들 수 있다. 치아 임플란트에서도 가짜 이를 잇몸에 고정하는 뿌리 부분을 타이타늄을 이용해서 만들곤 한다. 19-21)


타이타늄은 땅에 있는 웬만한 금속 중에서도 양이 무척 풍부한 편이다. 우주 전체로 보면 세상에서 가장 풍부한 원소는 수소인데, 지구의 땅에는 수소보다도 타이타늄이 더 풍부한 것으로 추정된다. 화학 분야에서 대단히 유명한 치글러-나타Ziegler-Natta 촉매가 타이타늄을 가공해서 만든 물질이라는 사실도 기억해 둘 만하다. 치글러-나타 촉매가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바로 플라스틱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석유를 가공해서 뽑아내는 에틸렌이라는 기체에 치글러-나타 촉매를 조금만 떨어뜨려 주면 에틸렌 기체가 마법처럼 서로 엮여 굳으면서 플라스틱으로 변한다. 이렇게 해서 만드는 물질이 비닐봉지부터 볼펜까지 흔하게 쓰이는 대표적인 플라스틱 폴리에틸렌polyethylene이다. 타이타늄의 가장 큰 단점은 가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타이타늄을 철처럼 다루면 깨지고 부서지기 쉽다. 어찌 보면 너무 튼튼하고 강해서 생기는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22-3)


23 바나듐: 생수 맛을 음미하며 V


원래 바나듐은 금속 제품의 재료를 만들 때 조금씩 섞어 넣는 물질로 유명했다. 금속 공업이 발달한 한국에서는 매년 8,000t 이상의 바나듐을 수입한다. 특히 널리 사용되는 금속인 철 제품을 만들 때 바나듐을 조금 섞으면 철이 더 튼튼해지고 충격을 잘 흡수하며 열에도 강해진다고 알려져 있다. 보통 강철에 바나듐을 1% 정도만 섞어도 성질이 확 좋아진다고 하는데,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이현복 선생이 쓴 글에 따르면 고속도공구강high speed steel이라는 재료는 “바나듐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바나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고속도공구강은 다른 금속을 깎고 자르는 도구를 만들기 위한 강철 재료를 말한다. 즉, 바나듐을 섞은 강철 덕분에 좋은 공구를 만들 수 있고, 그런 공구로 금속 재료를 세밀하고 정교하게 가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바나듐이 있어야만 세밀하고 정교한 금속 부품을 만들 수 있고, 나아가 그런 부품이 들어가는 정교한 기계도 만들 수 있다. 26)


화학물질이 서로 반응을 하고 안 하고는 물질에 들어 있는 전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따라 달라지곤 한다. 바나듐은 금속인 만큼 잘 움직이는 전자를 꽤 많이 품고 있어서 잘만 사용하면 독특한 화학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게다가 희귀한 물질도 아니어서 다방면에 활용할 수 있다. 자동차 매연이나 굴뚝 연기 성분 중에 이산화황이라는 해로운 물질이 있다. 이산화황은 몸에 좋지 않은 스모그의 원인이자 산성비의 주원인으로도 지목되는 물질이다. 공기오염을 줄이기 위해 시도했던 많은 방법 가운데 하나가 굴뚝을 통과하는 연기를 공기 중에 바로 내뿜지 않고 물에 한 번 적셔서 그 속의 오염 물질인 이산화황을 잡아채는 장치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이 많은 이산화황을 어쩌면 좋을까? 이럴 때, 모아 놓은 이산화황에 오산화바나듐을 넣어 화학반응을 일으키면 황산을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만든 황산 또는 이산화황 계통의 성분을 빼내고 남은 물질은 그 물질이 필요한 곳에 돈을 받고 팔 수 있다. 29)


24 크로뮴: 쌀밥을 한술 뜨며 Cr


오랫동안 철로 만든 숟가락이 널리 쓰이지 않은 것은 바로 녹이 잘 슨다는 문제 때문이다. 다른 용도로 사용할 때는 최대한 물에 닿지 않도록 하거나 기름칠을 해서 녹스는 것을 피해 볼 수 있겠지만, 항상 음식물에 닿고 입에 넣고 빨아야 하는 숟가락, 젓가락은 그런 방법을 쓸 수가 없다. 이 때문에 철은 여러 가지 장점이 있는데도 식기를 만드는 데는 잘 쓰이지 않았다. 그런데 20세기 초쯤에 유럽의 과학기술인들이 철에 크로뮴chromium이라는 금속을 조금 섞어 철과 굉장히 비슷하면서 녹이 슬지 않는 합금을 만들었다. 그 기본 원리는 철에 녹이 슬기 직전에 크로뮴 성분이 먼저 녹슨 상태로 변하면서 미세하게 철을 뒤덮는 현상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아주 얇은 크로뮴 막이 철을 감싸서 철이 공기나 물과 닿아 녹스는 것을 막아 버린다. 녹이 스는 문제만 해결되면 철은 숟가락, 젓가락에도 얼마든지 쓰일 수 있다. 그 덕택에, 한국의 금속 식기는 놋쇠에서 스테인리스강으로 빠르게 바뀌어 갔다. 34-5)


주변 원자와 달라붙는 데 특히 요긴하게 활용되어서 그 원자의 성질을 따질 때 잘 살펴봐야 하는 전자들을 원자가전자valence electron라고 부른다. 크로뮴 원자 하나가 다른 원자와 연결되어 덩어리를 이룰 때는 크로뮴 원자 속에 있는 전자 3개가 쓰이기도 하고, 6개가 쓰이기도 한다. 다시 말해 크로뮴은 원자가전자가 3개일 때도 있고, 6개일 때도 있다. 전자 3개를 이용해서 주변의 다른 원자와 연결된 크로뮴을 “3가 크로뮴”이라고 하고, 전자 6개를 이용해서 연결된 크로뮴은 “6가 크로뮴”이라고 표현한다. Cr3+, Cr6+라고 쓰기도 한다. 여기서 Cr6+라는 말은 크로뮴 원자 하나가 ⊖전기를 띤 전자 6개를 소모해서 주변의 원자들과 달라붙었기 때문에, 원래 상태보다 ⊖전기가 6만큼 부족해졌고, 이에 따라 ⊕전기를 6만큼 띠게 되었다는 뜻이다. 간단히 말해 Cr3+는 3가 크로뮴이라는 뜻이고, Cr6+는 6가 크로뮴이다. 둘 중에 몸에 병을 일으킬 수 있어서 나쁜 중금속 물질로 손꼽히는 것은 6가 크로뮴이다. 39-4)


25 망가니즈: 깻잎나물을 무치며 Mn


과거에 망간이라고 불렸던 망가니즈는 금속인 만큼, 철 덩어리를 만드는 제철소에서 가장 중요하게 활용한다. 철의 성분을 조절한다는 말은 철의 성질을 원하는 정도로 맞추고, 철이 균일하게 나오도록 한다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제일 기본으로 따져야 할 문제는 철에 탄소가 얼마나 들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탄소가 많을수록 철이 단단해지는데, 그렇다고 너무 많으면 너무 딱딱해서 오히려 부서지기 쉽다. 그래서 탄소의 양을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 탄소가 많이 들어 있어서 아주 딱딱한 철을 무쇠라고 하고, 탄소가 적당히 들어 있어서 튼튼하고 질긴 철을 강철이라고 한다. 그런데 무쇠는 강철과 비교하면 너무 잘 부서진다. 그러니까 무쇠 팔, 무쇠 다리보다는 강철 팔이 더 튼튼한 셈이다. 고로에서 녹아 나온 쇳물을 이용해 보통 철을 강철로 만드는 과정에 망가니즈를 사용한다. 망가니즈는 녹은 쇳물이 굳을 때 공기 거품을 제거해 주는 데도 도움이 되며, 철을 부서지게 하는 불순물인 황을 없애는 데도 도움을 준다. 44)


망가니즈가 많은 곳으로 유명한 곳은 바다 밑이다. 왜 바다 밑에 망가니즈 덩어리가 있을까? 바닷속에 사는 고래나 상어 같은 생물 또는 다른 몇몇 작은 생물들이 죽으면 그 뼈와 이빨, 껍질이 물속에 가라앉는다. 마침 그곳이 충분히 깊은 바다라면 그 이빨 조각, 껍질 조각이 바다 밑에 가라앉을 때까지 꽤 긴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 동안 바닷물에 드러난 이빨의 겉면 성분과 바닷물 속에 녹아 있는 아주 약간의 여러 금속 성분이 서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수가 있다. 운이 좋으면 그중 일부는 바닷물에 들어 있는 아주 적은 양의 망가니즈 계통 성분을 서서히 끌어당기는 물질로 변하기도 한다. 이렇게 변한 상어 이빨 따위가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으면, 그 상태로 아주 천천히 바닷물 속에 들어 있는 망가니즈를 겉면에 붙이고 또 붙이게 된다. 이렇게 망가니즈 성분을 많이 품고서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는 덩어리를 망간단괴라고 한다. 망간단괴 속에는 망가니즈뿐 아니라 니켈, 구리 등 다른 금속 원소도 포함되어 있다. 48)


26 철: 도다리쑥국을 기다리며 Fe


철은 핏속에서 붉은색을 내는 물질인 헤모글로빈hemoglobin에 들어 있다. 사람의 몸 구석구석에 꼭 필요한 산소를 운반하는 역할을 헤모글로빈이 맡고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 숨을 쉬면 허파 속에 퍼져 있는 혈관 속을 흐르는 핏속의 헤모글로빈에 산소가 달라붙는다. 그리고 그 피가 온몸 구석구석에 퍼진다. 따라서 헤모글로빈이 산소를 붙여 왔다가 떼어 주는 일은 쉼 없이 일어나야 한다. 만약 헤모글로빈에 산소가 붙고 떨어지는 일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으면, 사람이 아무리 숨을 헐떡이더라도 들이마신 산소가 정작 필요한 부위로 퍼져 나가지 못할 것이다. 만약 몸속에서 헤모글로빈 대신에 다른 물질을 이용해 산소를 운반하는 생물이라면 사정이 좀 다를지도 모른다. 문어나 오징어의 경우, 철이 들어 있는 헤모글로빈 대신에 구리가 들어 있는 헤모시아닌hemocyanin이라는 물질을 활용해서 살아간다. 따라서 문어나 오징어의 피는 붉은 색이 아니다. 헤모시아닌 계통의 물질은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경우가 많다. 51-2)


핵융합은 한 번 일어나면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다. 별 속에서는 이런 일이 수억 년, 수십억 년 동안 이어진다. 그러면서 한 원소가 다른 원소와 합쳐지면서 새로운 원소들이 계속 만들어진다. 그런데 여기에 단 한 가지 이상한 걸림돌 같은 현상이 있다. 그게 바로 철이다. 원소들이 뭉쳐서 새로운 원소들이 생겨나다가 철이 만들어지면, 그때부터는 사정이 달라진다. 철은 거기에 무슨 다른 원소를 억지로 갖다 붙여 핵융합을 일으키려 해도, 다른 원소들의 핵융합이 일어날 때만큼 열을 내뿜지 않는다. 도리어 주변을 더 차갑게 식힌다. 따라서 일단 철이 생겨나면, 핵융합으로 발생한 열이 연달아 핵융합을 일으키는 현상이 더는 이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철은 별이 핵융합으로 빛을 내면서 여러 원소를 만드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만들어지며 열의 연결 고리를 끊는 물질이다. 그러니 우주에서 저렇게 많은 별이 빛나는 만큼, 별이 빛을 내고 남기는 잿더미인 철도 자연히 우주 곳곳에 많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53)


27 코발트: 김밥을 말며 Co


비타민은 몸에 많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전혀 섭취하지 않으면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병이 들므로 항상 조금씩은 챙겨 먹어야 한다. 그런데 비타민B12는 곡식이나 채소에서는 좀체 발견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대개 고기에 들어 있는 영양소로 간주한다. 원소로 따져 보면 우리 몸의 성분은 대체로 산소, 수소, 탄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질소도 비교적 많은 편이다. 다른 생물도 대개 비슷하다. 비타민 중에서도 비타민A, 비타민C 등은 산소, 수소, 탄소로 이루어져 있다. 다들 흔한 재료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비타민B12는 너무나 독특하게도 코발트cobalt라는 금속 성분을 품고 있다. 그나마 한국인들은 고기를 별로 먹지 않아도 비타민B12 부족 증상을 덜 겪을 것으로 추정된다. 답은 해조류에 있었다. 한국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김, 미역, 다시마 같은 해조류를 많이 먹는 편이다. 맛도 독특하고 비타민B12처럼 고기가 아니고서는 찾기 힘든 귀한 영양소도 들어 있는 김은 한국의 개성 있는 식재료다. 59-61)


코발트60은 자연 상태에서는 찾기 어려운 물질로, 보통 원자력을 이용해서 만들어 낸다. 코발트60은 보통 자연에서 캐내는 코발트보다 무게가 약간 더 나가는데, 59:60 정도로 무겁다. 이름이 코발트60인 것 역시 그런 성질 차이 때문이다. 코발트60의 가장 주목할 만한 성질은 방사선을 꽤 긴 시간 동안 강하게 내뿜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방사선을 쏘아 파괴해야 하는 물질이 있을 때 코발트60을 그 곁에 갖다 놓으면 없앨 수 있다. 이 때문에 1963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방사선 치료 방법을 이용해서 암을 치료하려고 할 때, 바로 코발트60을 활용했다. 코발트60을 최대한 암세포 가까이 두면 코발트60에서 나오는 방사선이 암세포를 파괴하도록 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파괴하는 소독 작업을 철저히 해야 할 때도 소독하고 싶은 물건을 코발트60 근처에 놓아두면 거기서 나오는 방사선이 미생물을 파괴해 버린다. 코발트60은 이렇듯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물질이다. 65)


28 니켈: 초콜릿을 조심하길 Ni


과거에 니켈은 철을 만들 때 성질을 좋게 하려고 조금 섞어 넣는 용도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철에 크로뮴을 섞으면 녹슬지 않는 강철이라는 뜻의 스테인리스강이 되는데, 스테인리스강을 만들 때 니켈도 약간 넣어 주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요즘 들어 니켈의 새로운 용도가 생기면서 산업계에 니켈이 한층 더 많이 필요해졌다. 바로 배터리를 만들기 위한 용도다. 특히 한국의 배터리 회사들은 리튬과 니켈, 코발트, 망가니즈를 함께 이용하면 가벼우면서도 오래가는 전지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바로 NCM(Nickel-Cobalt-Manganese) 배터리다. NCM배터리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는 본래 코발트였다. 코발트를 많이 넣어 주면 성능을 끌어 올리기에 유리했다. 그런데 코발트는 가격이 너무 비싸서 고민거리였다. 그래서 한국 회사들은 배터리를 만들 때 코발트를 줄이고, 그보다 구하기 쉬운 니켈을 많이 넣는 방법을 다양하게 연구해 왔다. 이렇게 니켈 성분을 많이 넣은 배터리를 흔히 하이니켈배터리라고 부른다. 73)


니켈과 철을 적절히 섞어 만든 재료 중에는 열을 받아도 변하지 않는 특성이 있는 것도 있다. 모든 물체는 온도가 높아지면 크기가 좀 불어나고 온도가 낮아지면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정밀 가공을 해야 할 때 온도에 따라 크기가 자꾸 변하면 정확하게 작업하기가 어려워진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온도에 따른 변화가 크지 않은 니켈계 재료가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인바invar라고 하는 재료인데, 보통 철 64%에 니켈 36%를 섞어 만들기 때문에, 니켈 함량 36%를 강조하여 FeNi36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니크롬선nichrome wire을 만드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니켈의 소중한 용도다. 니켈과 크로뮴을 섞어서 가느다란 선을 만들면 전기가 계속해서 쭉쭉 흐르기는 하는데, 어느 정도는 저항 때문에 전기가 잘 안 흘러서 열이 많이 생긴다. 그래서 이 선에 전기를 흘려 주면 주변을 뜨겁게 데울 수 있는 장치가 된다. 이것을 니켈과 크로뮴을 섞어 만든 선이라고 해서 니크롬선이라고 부른다. 74-5)


29 구리: 꽃게를 손질하며 Cu


구리는 문명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사용하기 시작한 금속이다. 철은 녹는 온도가 1,500℃가 넘는 데 비해, 구리는 1,080℃ 정도만 되면 녹아내린다. 그만큼 녹여서 가공하기가 쉽다는 뜻이다. 그러니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옛사람들에게는 구리가 사용하기 좋은 재료였을 것이다. 구리가 철보다 덜 녹슨다는 장점은 현대에도 요긴하게 활용될 때가 많다. 건물을 지을 때 물이 통과하는 파이프로는 구리로 만든 관, 즉 동파이프를 사용하면 좋다. 동파이프를 난방용으로 바닥에 묻어 두면 뜨거운 물이 돌 때마다 금속인 구리가 열을 잘 전달해서 바닥이 금방 따뜻해진다. 게다가 구리가 철보다 약하기 때문에 철로 된 공구로 자르거나 두들기면 쉽게 가공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그 외에도 조선 시대에 금속활자를 사용해 책을 인쇄할 때가 있었는데, 이때도 구리로 금속활자를 만들곤 했다. 여기에 청동을 비롯해 구리와 다른 금속을 섞어 만드는 오동, 백동 등의 재료까지 합치면 용도는 더욱 많아진다. 79-80)


주기율표에서 아래위로 같은 줄에 적혀 있는 원소들끼리는 성질이 비슷하다. 같은 줄에 적혀 있는 원소들은 같은 족group에 속한다는 말도 자주 쓴다. 그런데 주기율표를 보면 구리 아래에 은이 있고 은 아래에 금이 있다. 구리와 금의 닮은 점으로 녹이 잘 슬지 않는 성질을 꼽는다면, 구리와 은의 닮은 점으로는 전기가 잘 통하는 성질을 꼽을 수 있다. 구리는 은보다는 조금 부족하지만, 전기를 아주 잘 전달하는 재료다. 그러면서 가격은 구리가 은보다 훨씬 더 싸기 때문에 예부터 구리로 만든 가느다란 선이 전기를 전달하는 재료로 자주 쓰였다. 그 때문에 구리선이라고 하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전선의 대표로 꼽힐 정도였다. 철이나 석유도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끼치는 유용한 자원이기는 하지만, 철은 가격이 흔들리기에는 너무 흔하게 구할 수 있고, 석유는 반대로 너무 귀해서 몇몇 나라를 중심으로 가격을 조절할 수도 있다. 그래서 구리만큼 세계 경제를 잘 보여 주는 물질도 없다는 이야기가 생겼다. 80-1)


30 아연: 굴전을 부치며 Zn


아연은 전기적으로 다채롭고 특이한 성질을 내는 금속 원소다. 사람 몸속에서도 복잡하고 특이한 물질을 만드는 데 조금씩 활용된다. 특히 몇 가지 호르몬을 만드는 화학반응에 아연이 필요한 때가 있다고 한다. 사람의 몸은 음식으로 먹은 재료를 소화해서 분해하여 다양한 원자들을 얻고, 그 원자들을 재조립해서 몸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질을 만들어 낸다. 호르몬도 이런 방식으로 생겨난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해내려면 여러 가지 재료를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역할을 하는 기계 장치 내지는 도구에 해당하는 물질도 몸속에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바로 그 준비 작업에 아연이 아주 약간 필요하다. 반대로 말하면 아연이 부족하면 몸에서 호르몬을 만드는 작업을 하는 도구를 제대로 만들 수 없게 되고, 결국 호르몬도 필요한 만큼 만들어지지 않는다. 음식 중에서도 고기나 조개류에 아연이 많다고 하며, 곡식 중에서는 통곡물에 아연이 어느 정도 있다고 한다. 아연 성분이 많은 음식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 굴일 것이다. 85)


현대에는 구리와 아연을 주성분으로 한 합금 소재를 황동이라고 따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니까 조선 시대에 쓰던 놋쇠 중에는 황동이 아닌 것도 있지만 황동도 그 일종으로 포함된다고 보는 게 맞다. 황동을 영어로는 brass라고 하는데, 트럼펫이나 트롬본 같은 금관 악기를 많이 사용하는 악단을 브라스 밴드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악기를 흔히 황동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황동은 구릿빛을 띤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 때 순수한 구리 못지않게 자주 쓰인다. 아연의 양을 잘 조절하면 구리만 사용할 때보다 훨씬 딱딱하고 튼튼한 재질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 발견하는 금속 재질 물건 중에 반짝이는 구릿빛이나 황금색 비슷한데 순수한 구리나 금은 아닌 것 같을 때, 구리와 아연이 섞인 황동이라고 생각하면 대체로 맞다. 총알은 튼튼하면서도 녹슬지 않고 오래가야 하며, 열과 압력을 잘 견뎌야 한다. 그런데 총알의 겉면인 탄피 부분은 황색을 띤다. 이것은 탄피를 황동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87-8)


31 갈륨: 쌈 채소를 씻으며 Ga


LED는 반도체의 일종으로, 전기를 받으면 빛을 내는 성질이 있는 특별한 물질을 이용해 만든다. LED라는 부품이 개발된 초창기부터 빨간색 빛을 뿜는 제품은 만들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빨간색 빛을 내는 전자 제품이 그렇게 흔했던 것이다. 이와 달리 LED로 흰색 빛을 내기는 너무나 어려웠다. 그런데 흰 빛은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 빛이 섞인 결과가 사람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파란색 빛을 내는 재료를 만들기가 몹시 어려웠다. 이 문제는 1990년대에 들어와 주로 일본 과학자들의 활약으로 해결되었다. 당시 갈륨gallium이라는 금속 물질과 질소의 원자를 규칙적으로 잘 엮어 만든 물질을 이용하면 파란색 LED의 재료로 쓸 수 있다는 사실까지는 알려져 있었다. 문제는 갈륨과 질소를 잘 엮는 작업이 매우 어렵다는 점이었다. 일본의 화학 회사 연구원이었던 나카무라 슈지なかむらしゅうじ와 동료들이 질화갈륨 결정을 만드는 절묘한 기술을 개발한 덕분에 LED 시대가 열렸다. 92-4)


갈륨은 석탄이나 금처럼 덩어리로 뭉쳐 있는 것을 캐낼 수 있는 물질이 아니다. 갈륨은 다른 원소들과 반응한 상태로 이곳저곳에 조금씩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보통 다른 금속을 돌 속에서 뽑아내고 점점 순수하게 정제하는 과정에서 불순물로 걸러낸 물질을 분리해 갈륨을 찾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광산에서 캔 돌에서 무엇인가를 뽑아내는 공장이 많은 곳에서 갈륨도 많이 생산된다. 사실 순수한 갈륨 덩어리는 좀 웃기고 재미난 물질이다. 갈륨은 금속치고는 매우 쉽게 녹아내리는 물질이어서 차가울 때는 꼭 철 덩어리처럼 보이지만 30℃ 정도의 온도만 되어도 은색 페인트처럼 흐물흐물하게 변해 버린다. 그래서 갈륨 덩어리로 칼이나 바늘을 만들어서 누구에게 써 보라고 건네주면, 그것을 받은 사람이 막상 사용하려고 할 때 체온 때문에 녹아 버려서 깜짝 놀라게 된다. 그러고 나서도 다시 모양을 잡아 준 뒤에 찬 바람만 좀 쐬어 주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튼튼한 강철 덩어리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96-8)


32 저마늄: 도라지무침을 먹으며 Ge


게르마늄이라고도 부르는 저마늄은 최초로 개발된 트랜지스터의 주원료 물질이었다. 저마늄 덩어리는 전기가 통할 듯한 특성을 많이 갖춘 금속이기는 한데, 막상 전기를 흘려 보면 그다지 잘 통하지는 않아서 부도체에 가깝기도 한 애매한 물질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바로 이 어중간한 성질을 잘만 이용하면 훌륭한 전자 부품을 개발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1947년에 미국의 과학자들이 진공관 대신 사용할 수 있는 더 좋은 부품을 개발했다. 전기가 잘 흐르지 않던 저마늄에 불순물을 조금 섞어 넣으면 평소에는 전기가 흐르지 않다가 조건이 맞을 때만 전기가 흐르게 할 수 있었다. 이것을 잘 활용하면 릴레이를 대신할 수 있고, 진공관을 대신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트랜지스터라는 부품이다. 다시 말해 트랜지스터도 “스위칭” 기능을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진공관보다 크기도 훨씬 작고, 고장도 잘 나지 않고, 전기도 훨씬 덜 들었다. 이렇게 개발된 저마늄 트랜지스터를 일반적으로 반도체 산업의 시작으로 본다. 102-4)


# 릴레이 : 전기신호가 약해지는 지점에 기계 장치를 설치해 본래의 전기 신호를 계속 연결하는 방식, 스위칭도 비슷한 개념이다. 


요즘은 트랜지스터 대신 저마늄이 사용되는 다른 분야가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다. 저마늄으로 만든 유리는 규소로 만든 보통 유리보다 적외선을 잘 통과시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적외선을 잘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카메라를 만들 때 저마늄 유리 렌즈를 자주 사용한다. 적외선을 감지하는 기능은 어두운 밤에도 물체를 볼 수 있게 해 주는 장비나, 열을 내뿜는 물체가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관찰하는 열화상 카메라 등에 사용할 수 있다. 저마늄으로 만든 유리가 활용되는 또 다른 분야도 있다. 요즘 인터넷 통신을 이용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장비로 광케이블이 있는데, 광케이블은 광섬유라는 재료로 만든다. 그러니까 인터넷으로 정보를 주고받을 때 그 정보는 광섬유를 따라 흘러간다. 전선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전기를 전달해 준다면, 광섬유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빛을 전달해 준다고 보면 된다. 과학자들은 광섬유를 만들 때 약간의 저마늄을 같이 조합하면 성능이 더 뛰어난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104-5)


33 비소: 곶감 사건을 생각하며 As


비상이 사람에게 독이 되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비소砒素라는 원소 때문이다. 비소는 꼭 산소와 연결되지 않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사람 몸에 독이 될 가능성이 큰 물질이다. 이것은 꽤 특이한 성질이다. 탄소의 경우, 탄소와 산소 원자가 하나씩 연결된 물질은 일산화탄소이며, 이것은 연탄가스 중독의 원인이 되는 대표적인 위험 물질이다. 하지만 탄소와 산소, 수소 원자가 다른 형태로 일정하게 연결된 탄수화물은 달콤한 음식이 된다. 염소 역시 염소끼리만 모여서 염소 기체를 이루면 대표적인 독가스 무기가 되지만, 염소와 소듐이 1:1로 붙어 있으면 음식 맛을 내는 데 빠져서는 안 되는 소금이 된다. 그런데 비소는 다른 원소를 어떻게 활용해서 무슨 물질을 만들든 대부분 사람 몸에 해를 끼치는 위험한 물질이 된다. 더군다나 중금속 물질은 주로 사람 몸에 어느 정도 쌓였을 때 피해가 나타나지만, 비소는 적은 양으로도 사람 목숨을 빠르게 빼앗는 위험한 물질이 되는 경우가 많다. 109-10)


지금은 비소의 위험성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는 시대다. 그러나 현대에도 우연한 비소 중독 피해가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조선 시대에 이미 비석이나 웅황을 구해서 사용했고 비상을 제조하기도 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비소 성분은 돌과 흙 속에서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그렇기에 유독 비소가 많은 지역에서 지하수를 개발해 물을 마시거나 그런 땅에서 농작물을 길러 먹는다면, 물이나 작물에 녹아든 비소를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먹게 될 수 있다. 개중에 몇몇 농산물은 특히 비소가 잘 쌓이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하필 이런 농산물을 비소가 있는 땅에 심어 기르면 문제가 될 수 있다. 가끔은 수입하는 농산물 중에 검사 결과 비소가 나온 것이 있다고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우물을 파고 지하수를 개발해서 쓸 때, 그 물속에 비소가 있는 것을 모르고 사용하다 피해를 보는 곳이 많다. 방글라데시,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 등이 자주 언급되는 곳들이다. 113-4)


34 셀레늄: 조기를 구우며 Se


양자이론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물체가 가진 에너지를 변화시키려고 할 때 일정한 단계별로만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시속 20km로 달리고 있는 자동차가 있다고 해 보자. 이 차를 운전하면서 가속 페달을 잘 밟으면 시속 22km로 달리게 할 수도 있고, 시속 25km로 달리게 할 수도 있으며, 시속 31km로 달리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양자이론을 적용하면 그렇지 않다. 주변 조건에 따라 자동차의 속도를 바꿀 수 있는 단계가 정해져 있다. 시속 20km에서 더 빠르게 달리게 하면 그다음 단계인 시속 30km가 되어야만 한다. 그 사이의 단계는 없다. 반대로 더 느리게 달리게 하면 그 전 단계인 시속 10km가 되어야만 한다는 식이다. 양자점은 국내에서는 흔히 약자로 QD(quantum dot)라고 부르기도 한다. 과학자들이 양자점의 첫 번째 유용한 특성으로 꼽는 것은 에너지가 단계별로 정확히 정해져 있다는 점이다. 이 특징을 잘 활용하면 정확하게 정해진 색깔의 빛만 내뿜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119)


양자점을 만들려면 고작 수십 나노미터, 그러니까 10만분의 1mm 정도밖에 안 되는 극히 고운 가루를 일단 만들어야 한다. 그런 물질을 대량 생산해서 사용하려면 그것을 끝도 없이 만들어 내야 한다. 그렇게 곱고 고운 가루를 오차 없이 항상 같은 크기로 만든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양자점을 어떤 부품이나 장치에 넣어 활용하려면 양자점을 보호하기 위해 주위에 다른 물질을 살짝 발라서 씌워야 한다. 이런 작업을 핵core 주위에 껍질shell을 씌운다고 말한다. 이때 그 작디작은 가루 알갱이 하나하나마다 보호용 껍질이 제대로 씌워지지 않으면 실패다. 껍질을 씌운 뒤에는 이 알갱이들을 다른 물체에 고정하고 연결해서 쓰기 위한 일종의 갈고리나 접착제 역할을 하는 배위자ligand라고 하는 물질들을 껍질 위에 붙여 줘야 한다. 제대로 된 배위자를 만들어 고르게 붙이지 못하면 역시 실패다. 이렇게 빛을 내는 용도로 사용하는 양자점의 핵을 만드는 재료로 널리 사용되던 물질이 바로 셀레늄이다. 119-20)


35 브로민: 어묵탕을 끓이며 Br


다시마를 우린 국물이 맛있는 이유는 아무래도 다시마 속에 들어 있는 글루타메이트glutamate 성분이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요리할 때 조금만 넣어도 감칠맛이 확 도는 화학조미료 중에 글루탐산나트륨monosodium glutamate이라는 것이 있다.  다시마 같은 해조류는 바닷속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 몇 가지 특이한 물질이 끼어 있는 경우가 많다. 코발트나 아이오딘iodine, 요오드 같은 물질이 대표적인데, 과거에 브롬이라고 했던 브로민bromine도 해조류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이한 물질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완도금일수협의 특산물 안내 자료를 보면 다시마에는 브로민이 0.02~0.09% 정도 들어 있다고 한다. 매우 작은 수치인 것 같지만, 대다수 동물이나 지상 식물 몸속에서는 이보다 훨씬 적은 양의 브로민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니 고추의 매운맛이 캡사이신 덕분에 나는 것이라면, 다시마는 대략 그 정도만큼은 브로민 맛이 나는 음식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124)


만약 브로민만 모은 덩어리가 담긴 병을 보게 된다면 꽤 신기할 것이다. 찰랑거리는 액체가 되어서 마치 핏방울 비슷하게 불그스름한 색깔을 띠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가지 원소만 모아 놓았을 때 저절로 액체 상태가 되는 물질은 매우 드물다. 금속으로 분류되지 않는 원소 중에서는 오직 브로민밖에 없고, 금속 중에서는 수은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모든 원소 중에서 그것 한 가지만 모아 놓았을 때 저절로 액체가 되기 쉬운 물질은 브로민과 수은, 단 두 가지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런 특이함은 지구의 평범한 환경에서만 그렇게 여겨진다. 철이나 구리 같은 쇳덩이도 아주 높은 온도로 달구면 결국 흐물흐물 녹아서 액체가 되기 마련이고, 헬륨 같은 물질도 아주 낮은 온도 속에 집어넣으면 굳어서 액체가 될 수 있다. 즉, 어떤 물질이 액체냐, 고체냐, 기체냐 하는 것은 주변 조건에 달린 문제일 뿐이다. 하필이면 액체 상태가 된 순수한 수은 덩어리와 순수한 브로민 덩어리는 둘 다 몸에 해로운 것으로 유명하다. 129)


36 크립톤: 포장마차 앞에 서서 Kr


빛은 전기의 힘과 자기의 힘이 서로 얽혀서 공간을 날아가고 있다. 전기장과 자기장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빛을 전자기파라고도 부른다. 빛이 가진 전기의 힘은 빛이 날아가는 동안 빛을 따라가며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한다. 그런데 이 변화는 아주 규칙적이다. 즉, 빛이 날아가는 동안 전기의 힘은 똑같은 정도로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이렇게 빛이 날아갈 때 전기의 힘이 한 번 커졌다가 작아지는 동안 빛이 날아간 거리를 파장이라고 한다. 크립톤에서 나오는 빛도 날아가는 동안에 전기의 힘이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규칙적으로 반복한다. 그리고 이 현상이 일어나는 정도, 그러니까 파장은 빛의 성질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이 현상이 규칙적으로 반복된다. 따라서 크립톤 원자에서 나온 그 빛이 날아갈 때 전기의 힘이 커졌다가 작아지는 반복이 한 번 일어나는 거리, 즉 파장이 얼마인지를 측정해서, 거기에 1,650,763.73을 곱하면 그게 바로 1m라는 길이가 된다. 133)


주기율표를 살펴보면 크립톤은 헬륨, 네온, 아르곤 같은 원소와 아래위로 같은 줄에 적혀 있다. 따라서 크립톤 역시 화학반응을 거의 하지 않는다. 이런 원소를 비활성기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사람 주위에 있다고 해서 냄새가 나지도 않고 몸에 악영향을 미칠 일도 없다. 어떤 원소 하나만의 성질을 정확히 측정하는 실험을 할 때 순수한 크립톤을 구해 실험하면 편리하다. 특정 원자가 내뿜는 빛을 관찰하려면, 그 원자가 빛을 내뿜도록 전기를 걸거나 온도를 올려 주어야 한다. 만약 이런 실험에 화학반응을 잘 일으키는 수소 기체나 염소 기체를 이용한다면 원자가 전기나 열을 받아 빛을 내뿜기도 전에 화학반응을 일으켜 다른 물질에 들러붙으면서 엉뚱한 상태로 바뀌어 버릴 것이다. 이것이 1m를 정할 때 하필이면 크립톤이라는 낯선 물질로 실험하는 이유 중 하나다. 특히 크립톤은 빛이 선명하게 잘 보이고 정확하게 잘 나오는 특징까지 있다. 그래서 1m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처럼 정밀한 실험을 하기에 좋다. 134)


# 지금은 빛이 날아가는 속력을 기준으로 1m의 길이를 정하고 있다.


37 루비듐: 곰취나물과 밥을 비비며 Rb


루비듐 중에는 방사성을 띠는 루비듐82라는 물질이 있다. 루비듐82는 보통 루비듐과는 다르게 반물질antimatter을 뿜어내는 놀라운 특성이 있다. 루비듐82가 뿜어내는 반물질은 양전자positron라는 것이다. 이 물질은 전자 제품 속을 돌아다니는 평범한 전자와 거의 모든 점에서 똑같아 보이지만, 전자가 ⊖전기를 가진 것과 반대로 ⊕전기를 가진다.  루비듐82가 뿜어내는 양전자와 정반대 전기를 띤 전자와 부딪혀 반응하게 만든다. 그러면 양전자와 전자가 서로 소멸하며 강력한 빛을 내뿜는다. 이 빛은 맨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지간한 물질을 다 뚫고 나온다. 그리고 정확히 반대인 방향으로 두 줄기 빛이 동시에 나오기 때문에 어느 위치에서 빛이 나오는지 관찰하기가 좋다. 그래서 양전자가 소멸하면서 나오는 강력한 빛을 관찰하면 그 양전자가 몸속 어디에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양전자를 내뿜는 물질을 몸에 주입하면 그 물질이 몸속에서 돌아다니는 위치를 정밀하게 알 수 있다는 뜻이다. 140)


루비듐은 과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밝히는 데도 큰 도움을 준 물질이다. 루비듐이 금속이면서도 쉽게 녹고 잘 끓어오르기 때문이다. 금속은 수천억 개의 원자들, 수천조 개의 원자들이 서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엄청나게 많은 원자의 덩어리이다. 이런 상태라면 원자 하나하나에 각각 영향을 주어야 하는 정밀한 조작을 하기가 어렵다. 원자를 하나하나 조작하려면 덩어리가 아니라 원자를 하나하나 떼어 놓은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가장 쉬운 방법은 물질을 기체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어지간한 금속을 녹여서 액체로 만들려고만 해도 쇠가 녹을 정도로 높은 온도가 필요하다. 하물며 그렇게 쇳물이 된 금속을 끓여서 기체로 만들기는 더욱더 어렵다. 그런데 루비듐은 쉽게 녹고 쉽게 끓는다. 그러니 어떤 작업을 금속으로 해야 하는데, 원자 하나하나를 움직여야 한다면 루비듐이 좋은 재료가 된다. 그런 이유로 레이저를 이용해 원자 하나하나를 각기 붙잡고 따로 움직이는 실험을 할 때 루비듐은 단골 실험 대상이다. 144-5)


38 스트론튬: 솜사탕을 건네주며 Sr


옛날식 텔레비전의 기본 원리는 전자가 부딪히면 빛을 내는 물질을 유리판에 발라 놓고, 전자를 원하는 방향으로 빠르게 발사하는 전자총을 이용해서, 유리판을 향해 전자를 이리저리 발사하는 것이다. 그 유리판을 멀리 떨어져서 보면 전자가 유리판에 부딪혀 생긴 빛이 그림을 이루게 된다. 전자는 ⊖전기, 즉 음전기를 띠고 있다. 그래서 이런 장치를 음극관cathode ray tube, CRT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옛날 텔레비전은 전자총으로 전자를 발사해서 CRT에 원하는 모양으로 빛이 나오게 하는 방식으로 영상을 만들어 내는 장치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전자가 유리판에 부딪혀 영상을 만들어 낸 후에 문제가 생긴다. 이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전자가 충돌해서 갑자기 속력을 잃다 보면 엑스선 등의 방사선이 나온다. 그래서 텔레비전에서 생기는 엑스선을 흡수하거나 엑스선이 튀어나오지 못하게 방해하는 물질을 일종의 방어막처럼 텔레비전 화면에 얇게 발라야 했다. 여기에 적합한 물질이 바로 스트론튬이었다. 149)


스트론튬은 여러 방사성 물질 중에서도 특히 골칫거리로 자주 언급되는 물질이다. 정확히 말하면 보통 스트론튬보다 약간 더 무거운 스트론튬90이 문제다. 보통 스트론튬과 무게를 비교하면 88:90 정도로 약간 무겁다. 스트론튬90은 방사선을 오랫동안 꾸준히 내뿜는 점도 문제지만, 사람에게 피해를 줄 가능성이 커 보인다는 점에서도 걱정스러운 물질이다. 주기율표에서 스트론튬 바로 위에는 칼슘이 적혀 있다. 방사성 물질이라고 해도 몸속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금방 몸 밖으로 나온다면 별 피해가 없을 수도 있다. 실제로 방사성 물질 중에는 그런 것도 여럿 있다. 그런데 스트론튬은 하필 칼슘과 성질이 비슷하고, 칼슘은 뼈에 많이 들어 있다. 그렇기에 스트론튬이 몸속에 들어오면 우리 몸은 스트론튬을 칼슘으로 착각해서 뼈를 만드는 데 칼슘 대신 스트론튬을 사용할 수 있다. 만약 그것이 보통 스트론튬이 아니라 방사성을 띤 스트론튬90이라면, 뼛속에 스트론튬90이 끼어들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151)


39 이트륨: 양배추를 썰며 Y


스웨덴에서 광산 개발과 관련된 산업과 기술이 발전했던 역사는 주기율표에도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이트륨yttrium이다. 스웨덴의 이테르뷔Ytterby라는 마을에서 발견된 돌에서 나온 원소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현대에 희토류로 분류되는 광물들은 이테르뷔에서 발견된 이트륨과 비슷한 물질이라고 생각하면 대체로 들어맞는다. 주기율표에서 이트륨 바로 위에 적혀 있는 스칸듐과 이트륨 바로 아래 칸 근처에 있는 란타넘lanthanum이 대표적인 희토류이기 때문이다. 란타넘의 경우에는 주기율표 모양이 그 근처에서 확장되는 형태로 바뀌기 때문에 정확히 이트륨 바로 아래 칸에 적혀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트륨과 같이 엮기에 큰 무리는 없다. 그리고 란타넘과 비슷한 점이 있어서 란타넘족 원소라고 분류하는 네오디뮴neodymium, 디스프로슘dysprosium 등 여러 원소까지 모두 합쳐 희토류라고 부른다. 그러니 화학 발전의 역사에서는 이트륨이 희토류의 대표라고 할 만하다. 155-6)


흔히 야그 레이저라고도 하는 YAG 레이저는 Y, A, G 세 가지 물질을 주성분으로 하는 레이저 발생 장치를 말한다. 여기서 Y, A, G는 각각 이트륨, 알루미늄, 가닛garnet을 가리킨다. 레이저는 빛과 물질 속의 전자가 서로 독특한 반응을 일으키는 현상을 이용해 특수한 빛을 내뿜는 것을 말한다. 자연 상태의 빛은 여러 성질이 섞여 있고, 진행하는 동안 사방팔방으로 퍼져 버린다. 이와 달리 레이저는 빛의 성질이 잘 가다듬어져 있으며, 잘 퍼지지 않고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나간다. 이런 빛을 만들려면 물질 속에 들어 있는 전자를 잘 조정해야 한다. 원하는 색깔의 빛이 생기도록 전자가 특정한 속력으로 움직이고 적절한 힘을 받으며 돌아다니게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과학자들은 온갖 물질을 조합해 보다가 이트륨, 알루미늄, 가닛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 놓으면 그 물질 속을 돌아다니는 전자들이 레이저로 쓰기에 좋은 조건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렇게 해서 YAG 레이저가 실용화되면서 다양한 용도로 쓰이게 되었다. 156-7)


40 지르코늄: 과자 봉지를 뜯으며 Zr


촉매 연구는 화학에서 가장 마법 같은 분야다. 원래는 안 일어날 화학반응을 촉매를 써서 일어나게 만들면 그야말로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예를 들어 사람이 설탕물을 많이 먹으면 살이 찐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화학의 눈으로 살펴보면 이것은 대단히 신비롭고 놀라운 일이다. 설탕이라는 별것 아닌 재료가 어떻게 사람의 살이라는 귀중하고 복잡한 물질로 변하는 것일까? 설탕물 1kg을 주면서 그것으로 사람 살 1kg을 만들어 보라고 하면 말도 안 되는 기적을 일으키라는 요구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몸에서는 그런 일이 너무나 당연하게 일어난다. 촉매라고 볼 수는 없지만, 과학자들은 지르코늄이 물에서 수소를 뽑아내는 화학반응을 어느 정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단, 주변을 뜨겁게 만들어야만 이런 반응이 일어난다. 이 말은 연료를 사용해 불길로 주변을 뜨겁게 덥혀 주어야 수소가 생긴다는 뜻이다. 지르코늄의 이 반응 때문에 후쿠시마에서 커다란 사고가 발생했다. 163-4)


지르코늄은 중성자와 반응하지 않는 특성이 있다. 그 때문에 중성자가 많이 돌아다니기 마련인 원자로 내부에 들어갈 재료로 지르코늄을 사용하는 일이 많다. 평상시라면 이것은 매우 좋은 생각이다. 원자로에서는 중성자를 잘 조절하여 원하는 만큼 핵반응을 일으켜야 하는데, 여기에 지르코늄 재료를 이용하면 중성자 조절 작업에 방해가 되지 않으므로 안전에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후쿠시마 사고 후 온도가 1,200℃에 가까워지자 지르코늄이 물과 반응해 수소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지금은 물에서 수소를 뽑아내는 반응을 전혀 할 필요가 없는 상황인데, 높은 온도라는 조건이 갖춰지자 지르코늄은 아무도 바라지 않는 수소 생성 반응을 시작한 것이다. 평상시 안전을 위한 방어 판 같은 용도로 넣어 두었던 지르코늄이 이런 비상 상황에서 오히려 수소라는 불쏘시개를 잔뜩 만들어 낸 셈이다. 수소가 좋은 연료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불이 잘 붙는 물질이라는 뜻이다. 결국, 수소는 불이 붙어 폭발을 일으켰다.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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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모든 것의 기원 : 예일대 최고의 과학 강의
데이비드 버코비치 지음, 박병철 옮김 / 책세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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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우주와 은하 … 13


빅뱅이 일어나기 전에는 현재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원자보다 훨씬 작은 영역에 똘똘 뭉쳐 있었으므로, 온도와 압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았을 것이다. 이 상태는 10^-43초 동안 계속되었는데(참고로 10^-2는 0.01이며, 10^-43은 소수점 아래로 0이 42개 붙은 후 비로소 1이 등장한다), ‘시대’라는 이름으로 부르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지만 아무튼 이 시간대를 ‘플랑크 시대Planck epoch’라 한다. 그후 우주는 10^-35초 동안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빠르게 팽창했다. 이 시간대를 인플레이션 시대Inflation epoch라 한다. 우주는 이 짧은 시간 동안 10^70배 가까이 커졌는데, 그래봐야 크기는 직경 몇 m에 불과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인플레이션 시대의 팽창 속도가 빛보다 훨씬 빨랐다는 점이다. 인플레이션은 하나의 역장力場, force field에 저장되어 있던 에너지가 방출되면서 일어났으며, 이 에너지는 훗날 우주에 존재하게 될 모든 물질과 에너지의 원천이 되었다. 17-8)


인플레이션론이 우주배경복사CMB의 분포를 설명함으로써, 빅뱅이론은 우주 탄생의 정설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우주배경복사는 우주 전체에 걸쳐 온도가 거의 같다. 빅뱅이 일어나고 거의 140억 년이 지났는데 우주 반대편에 있는 두 지점의 온도가 아직도 같다는 것은 태초에 이 지점들이 꽤 긴 시간 동안 접촉 상태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만일 두 지점이 접촉 상태에 있지 않았다면 아무런 정보도 교환되지 않았을 것이므로, 오늘날 온도가 같은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과거의 빅뱅이론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한동안 위기에 처했다가 인플레이션이론 덕분에 극적으로 살아났다. 하나의 점에 가까웠던 우주가 급속도로 팽창하여 유한한 크기에 도달하면 모든 영역이 동일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후에도 우주는 이전보다 느린 속도로 계속 팽창했지만 공간의 모든 지점이 이미 정보를 교환했기 때문에 균일한 온도 분포가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다. 18) 


인플레이션이 끝난 후 10^-5초 사이에 물질과 반물질이 거의 비슷한 양만큼 형성되었다. 모든 입자는 자신과 질량이 같고 전하의 부호가 반대인 파트너를 갖고 있는데, 이들을 반입자antiparticle라 한다. 예를 들어 전자의 반입자는 양전자positron이고, 뉴트리노의 반입자는 반뉴트리노anti-neutrino이다. 일반적인 입자로 이루어진 물질을 그냥 ‘물질’이라 하고, 반입자로 이루어진 물질을 ‘반물질antimatter’이라 한다. 물질과 반물질이 따로 존재할 때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나지만, 둘이 접촉하면 복사에너지를 방출하면서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 과정을 쌍소멸pair-annihilation이라 하는데, 이때 방출된 복사에너지의 양은 E=mc2을 통해 결정된다(여기서 m은 물질과 반물질의 질량의 합이다). 빅뱅 후 10^-5초가 지났을 때 이들은 짧은 시간 동안 공존하다가 서로 만나면서 다량의 복사에너지를 남기고 사라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물질이 반물질보다 조금 많았기 때문에 별과 은하, 행성 등 다양한 천체들이 존재할 수 있었다. 18-9)


빅뱅 후 1초~10만 년 동안은 우주 전체가 광자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복사 시대Radiation epoch’라고 한다. 이 시대가 끝날 무렵에 질량과 광자의 밀도가 낮아져서 드디어 빛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즉 우주가 투명해진 것이다. 그리고 빅뱅 후 약 38만 년이 지났을 무렵에 온도가 충분히 낮아져서 드디어 완벽한 원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시작된 물질 시대Matter epoch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우주배경복사는 이 시기에 마지막으로 방출된 에너지의 흔적이다. 암흑기가 끝날 무렵, 수소-헬륨 기체의 밀도에 약간의 요동이 일어났고 여기에 중력이 작용하여 밀도가 높은 지역으로 질량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특정 지역에 질량이 집중되면 그곳의 중력이 주변보다 강해져서 더욱 많은 질량이 모여든다. 그리고 중력의 세기는 거리에 관계하기 때문에(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기체가 집중되다 보면 자연스럽게 구형을 띠게 된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별’이었다. 20)


# 암흑기 : 복사 시대가 끝난 후 3억 년 동안 온도가 충분히 내려가고 물질이 넓은 영역으로 충분히 퍼져 나갔기 때문에 광원光源, light source이 사라진 기간


2장 별과 원소 … 41


질량이 태양의 15배 이상인 별들은 중심 온도가 1,500만°C에 도달해도 계속 수축되면서 무거운 원소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온도가 1억°C에 도달하면 헬륨이 핵융합 반응을 일으켜 탄소와 산소가 생성되고, 이보다 큰 초거성超巨星, supergiant들은 핵융합을 여러 번 반복하여 철까지 만들 수 있다. 무거운 원소를 생산하는 핵융합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헬륨 원자핵인 알파 입자(양성자 2개와 중성자 2개로 이루어져 있다)의 융합이다. 그중에서도 3개의 알파 입자가 두 차례의 반응을 거쳐 탄소로 변환되는 ‘3중 알파 입자 반응triple-alpha process’은 매우 드물게 일어나는 사건이어서, 탄소보다 무거운 원소가 생성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필수 과정이자 반드시 넘어야 할 장벽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단 탄소가 생성되기만 하면 알파 입자 연쇄 반응alpha chain process이 뒤를 이어받아 한 번에 알파 입자 한 개씩을 추가하여 탄소C→산소O→네온Ne→마그네슘Mg→실리콘Si→……→철Fe까지 연이어 만들어낸다. 29)


1869년, 러시아의 화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Dmitri Mendeleev는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원소를 특정 규칙에 따라 나열한 주기율표periodic table를 만들었다. 이 표에서 철의 원자번호는 26번이고 가장 무거운 천연 원소인 우라늄U은 92번이므로, 철을 기준으로 가벼운 원소는 25종이고 무거운 원소는 66종이다. 그러나 철보다 무거운 원소들은 생성되기가 어렵기 때문에 극히 소량만 존재한다. 이들 중 대부분은 별의 내부에서 진행되는 ‘느린 중성자 포획slow neutron capture’을 거쳐 생성되며, 이 과정은 철이 다른 융합 반응에서 생성된 중성자를 포획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철의 무거운 동위원소는 상태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생성되는 즉시 전자를 방출하면서 중성자 한 개가 양성자로 변하여 코발트Co(원자번호 27)가 되고, 그후에도 이와 비슷한 과정이 계속되면서 점점 더 무거운 원소가 만들어진다. 반면에 모든 과정이 빠르게 진행되는 ‘빠른 중성자 포획rapid neutron capture’은 거성이 최후를 맞이할 때 일어난다. 31)


거성이 수명을 다하여 초신성 폭발을 일으키면 대부분의 질량은 외부로 흩어지지만, 중심부는 계속 수축하여 초고밀도 상태로 남는다. 이 잔해의 질량이 태양의 2~3배 정도라면, 모든 원자의 부피를 유지시켜주는 전자구름이 잔해의 내부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원자핵이 있는 곳까지 압축되어 양성자를 중성자로 변환시킨다. 별이 폭발하고 남은 잔해의 질량이 태양의 3배가 넘으면 중성자들끼리 더욱 강하게 밀착되어 중성자별보다 밀도가 높아진다. 이런 천체에서는 중성자가 쿼크 단위로 분해되기 때문에 ‘쿼크별quark star’이라 부르는데, 아직 발견된 사례는 없다. 잔해의 질량이 태양의 5배가 넘으면 쿼크조차도 압력을 이기지 못하여 아주 작은 부피로 수축된다. 바로 이것이 그 유명한 블랙홀이다. 블랙홀에서는 중력이 하도 강해서 중심으로부터 유한한 거리에서 방출된 빛까지도 아래로 떨어진다. 이런 천체에서 가운데를 중심으로 빛의 탈출을 허용하지 않는 가장 큰 구면을 ‘사건지평선event horizon’이라 한다. 32)


3장 태양계와 행성 … 63


우리의 태양계는 거의 50억 년 전에 거대한 먼지구름이 수축되면서 탄생했다(이 구름을 ‘모태구름’이라고 하자). 아마도 이 무렵에 근처에서 초신성이 폭발하여 구름의 수축을 유발했을 것이다. 이런 추측이 가능한 이유는 지구로 떨어진 운석에 초신성이 폭발할 때에만 생성될 수 있는 철의 무거운 동위원소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구름이 수축되어 태양과 비슷한 별이 되려면 그 규모가 최소 1~3광년은 되어야 하며, 거성이 되려면 무려 10광년에 걸쳐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은하수의 크기(약 10만 광년)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모태구름에서 중심부에 있는 일부만이 태양계가 되는데, 이 부분을 구름핵cloud core이라 한다. 수축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구름핵의 99.9%는 태양이 되고 남은 0.1%가 행성계를 이룬다. 태양계가 형성될 때 행성에 할당된 질량의 대부분은 목성에 돌아갔고, 목성은 태양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태양계가 보유한 각운동량의 대부분은 목성이 차지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38-9)


현재 태양계에는 8개의 행성과 160여 개의 위성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행성으로 자라지 못했으면서 태양에 흡수되지 않고 외계로 날아가지도 않은 채 태양계 주변을 떠도는 물체들도 많다. 해왕성과 명왕성 너머에는 오르트구름(Oort cloud, 20세기 네덜란드의 천문학자 얀 오르트Jan Oort가 발견했다)라는 거대한 구형球形 구름이 태양계를 에워싸고 있는데, 이 구름과 태양 사이의 거리는 지구와 태양 사이 거리의 5만 배, 태양과 해왕성 사이 거리의 2,000배에 달한다. 이 정도면 거의 1광년에 가까운 거리다. 오르트구름보다 가까운 곳에는 또 다른 얼음 혜성의 집합인 카이퍼 벨트(Kuiper belt, 20세기에 미국의 천문학자 제라드 카이퍼Gerard Kuiper가 발견했다)가 자리 잡고 있는데, 태양과의 거리는 약 30~50AU이다. 카이퍼 벨트는 핼리혜성Halley’s Comet(주기=76년)과 같은 단주기 혜성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오르트구름과 카이퍼 벨트는 행성이나 위성에 편입되지 못한 잔해들의 집합일 것으로 추정된다. 45-6)


화성과 목성 사이에 있는 소행성 벨트도 행성에 편입되지 못한 잔해들의 집합이다. 이곳에는 TV나 자동차만 한 크기에서 베스타처럼 직경 500km에 이르는 다양한 크기의 소행성들이 궤도운동을 하고 있으며, 개중에는 직경 950km짜리 세레스처럼 왜소행성으로 분류된 것도 있다. 소행성 벨트는 목성에 아주 가깝기 때문에, 작은 소행성들이 뭉쳐서 큰 덩어리가 되면 목성의 강력한 조력潮力이 작용하여 덩어리를 산산이 흩어놓는다. 마지막으로, 내태양계의 금성과 화성 사이에는 아모르Amor와 아폴로Apollo, 그리고 아텐Aten이라는 세 개의 소행성 집단이 존재한다. 화성과 목성 사이의 소행성 벨트보다는 밀도가 훨씬 낮지만 아폴로와 아텐에 속한 소행성 중에는 지구의 공전궤도와 교차하는 것들이 꽤 많아서 시도 때도 없이 지구로 떨어지고 있다. 6,500만 년 전에 유카탄반도에 떨어져서 공룡을 멸종시킨 주범도 바로 이곳에서 날아온 소행성이었다(이 소행성의 직경은 약 10km로, 웬만한 소도시 크기였다). 46-7)


4장 지구의 대륙과 내부 … 95


지구 내부에 관한 대부분의 정보는 지진학적 분석을 통해 얻어진다. 지구의 내부는 크게 3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깥 표면은 가벼운 바위로 이루어진 얇은 지각地殼, crust(육지가 자라나면서 점차 두꺼워졌다)으로 덮여 있고, 그 밑으로 지구 반지름의 절반에 해당하는 부분은 무거운 바위로 이루어진 맨틀mantle로 채워져 있으며, 가장 깊은 중심부에는 맨틀보다 무거운 철 코어iron core(중심핵이라고도 한다)가 자리 잡고 있다. 맨틀과 핵의 두께는 거의 같지만 맨틀이 핵을 에워싸고 있기 때문에 부피는 맨틀이 압도적으로 크다. 지구 전체에서 맨틀이 차지하는 비율은 80%가 넘는다. 지진학자들은 다양한 파동을 분석한 끝에, 지구의 핵이 액체 상태이며 평균 밀도는 철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지진 때 발생하여 지구 내부를 가로지르는 굽힘파bending wave가 중심부를 통과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코어는 액체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액체 코어의 가장 깊은 중심부는 고체 상태의 철로 이루어져 있다. 51-2)


맨틀은 워낙 부피가 크고 움직임이 굼뜨기 때문에 불에 달궈진 커다란 돌멩이와 달리 식을 때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맨틀의 상부는 차갑고 무거워서 아래로 가라앉았고, 중심핵에 가까운 하부는 뜨겁게 달궈지면서 위로 떠올랐다. 뜨거운 것은 위로 올라가고 차가운 것은 아래로 내려가는 현상을 열대류熱對流, thermal convection, 또는 자유대류free convection라 하는데, 맨틀은 물론이고 바다와 대기, 행성과 별, 그리고 당신의 책상 위에 놓인 커피 잔에서도 항상 일어나는 범우주적 현상이다. 지구에서 대류는 태풍과 뇌우, 해류를 일으키고 태양의 대류는 흑점을 만든다. 단, 대류가 일어나려면 물질의 유동성이 높아야 한다. 그래야 뜨겁고 가벼운 물질과 차갑고 무거운 물질이 쉽게 자리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맨틀은 고체 상태였지만 긴 시간규모에서 볼 때 (압력, 즉 압착력이나 장력을 받으면) 유체처럼 행동했다. 빙하가 녹거나 흔들리지 않고 갈라지지도 않으면서 서서히 이동하는 것과 비슷하다. 53)


맨틀의 대류는 지각판을 움직이게 하고, 지진과 화산활동을 일으켜 대형 산맥을 만들기도 한다. 또한 맨틀의 대류는 지구를 서서히 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구 자체가 식는 속도는 맨틀이 식는 속도보다 빠를 수 없기 때문이다. 대류는 유체의 열을 식히는 방법 중 하나이다. 지표면 근처의 차가운 물질이 대류를 타고 가라앉아서 내부의 뜨거운 물질과 섞이면 전체적인 온도는 내려간다(뜨거운 물에 얼음을 담갔을 때 온도가 내려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중심부의 뜨거운 물질이 대류를 타고 위로 올라가서 표면의 차가운 물질과 섞일 때도 빠른 속도로 열이 손실된다. 그러므로 지구는 자신과 크기가 같은 거대한 돌덩어리보다 식는 속도가 빠르다. 그래도 맨틀의 대류 자체가 워낙 느리게 진행되기 때문에,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거의 정체 상태나 다름없다. 이런 식으로 맨틀은 지난 수십억 년 동안 지각판을 서서히 이동시켜왔고, 그 덕분에 지구는 안정적인 기후를 유지하면서 생명체를 잉태할 수 있다. 54-5)


우리는 대륙의 기원을 추적하면서 지구의 내부 구조와 이동 패턴을 살펴보다가 두 가지 신기한 현상에 직면했다. 첫째, 맨틀의 대류는 모든 행성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오직 지구만이 지질구조판을 갖고 있으며, 지구의 맨틀대류는 지진 및 화산활동과 함께 마그마를 표면으로 밀어 올렸고 물과 이산화탄소를 맨틀에 유입시켰다. 우리가 아는 한 다른 행성에서는 마그마를 표면으로 밀어 올려 화산활동을 촉발했을 뿐, 물과 이산화탄소가 맨틀에 유입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둘째, 지구는 강한 자기장을 갖고 있는 유일한 행성이다. 지자기장은 대기권 밖까지 뻗어 있는데, 놀랍게도 자기장의 에너지원은 지구의 중심부에 있는 액체 상태의 철이다. 지구의 깊은 내부와 전체적인 크기는 금성과 거의 비슷하지만, 환경 차이(태양과의 거리와 달)가 두 행성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다행히도 지구에는 자기장과 지질구조판, 그리고 물이 존재했고 이들 덕분에 생명체가 번성하는 유일한 행성이 될 수 있었다. 62)*


5장 바다와 대기 … 147


‘내생기원설Endogenous Origin’은 바다와 대기가 외계에서 온 것이 아니라 지구 내부에 숨어 있었다는 가설이다. 물은 바위의 표면에서 수화된 미네랄의 형태로 존재할 수 있으며, 이산화탄소는 바위의 내부에서 탄산염(석회암, 백악白堊 등)으로 존재할 수 있다. 맨틀을 구성하는 바위에도 물과 이산화탄소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지만, 양은 그리 많지 않다(전체 무게의 몇 %밖에 안 된다). 그러나 지구에 바다가 생성되기 위해 맨틀이 다량의 수분을 보유할 필요는 없다. 현재 바닷물의 총무게는 맨틀 무게의 0.03%에 불과하기 때문에, 맨틀이 축축하게 젖지 않아도 바닷물을 얼마든지 숨길 수 있다. 지금까지 확보된 증거에 의하면 지구의 대기는 내부의 바위에 숨어 있다가 마그마 바다가 응고되면서, 또는 화산활동을 통해 밖으로 분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최초의 대기는 지금과 완전 딴판이었을 것이다. 특히 화산을 통해 분출되었다면 대기의 주성분은 이산화탄소와 수증기였을 것이다. 80-2)


원래 지구와 금성의 대기는 이산화탄소와 수증기로 가득 차 있었고 표면 온도와 압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았다. 다행히도 지구는 태양과의 거리가 금성보다 멀었고 기압은 지금보다 훨씬 높았기 때문에 물이 액체 상태로 존재할 수 있었다. 대기의 압력이 1기압(1atm)일 때 물은 100°C에서 끓지만, 기압이 높으면 더 높은 온도에서 끓는다(부엌에서 쓰는 압력솥은 이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지구의 대기압이 60기압이었던 시절, 물은 200~300°C에서도 액체 상태로 존재했고(정확한 비등점은 270°C이다) 대기중 이산화탄소가 물과 바위에 스며들면서 기온이 서서히 내려갔다(온실효과가 완화되었기 때문이다). 기온이 내려가니 물의 양도 자연히 많아지고, 물이 많아지면 이산화탄소가 더 많이 녹아서 기온은 더 내려가고…… 마치 피드백 회로처럼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지각판의 운동이 활발해졌고, 대기 중 이산화탄소 함유량은 꾸준히 감소하여 아주 소량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바위 속으로 흡수되었다. 83)


흔히 말하는 ‘날씨’란 대기의 가장 낮은 층인 대류권troposphere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대류권의 고도는 지표면에서 약 10km까지이며, 바로 이 영역에서 빠르고 변화무쌍한 열역학적 대류가 일어나고 있다. 대류권 위의 공기층을 성층권stratosphere이라 한다. 대류권과 달리 성층권에서는 위로 올라갈수록 온도가 높아진다. 성층권의 꼭대기에 있는 공기는 따뜻하면서 안정하기 때문에 스프레이로 뿌린 연무제aerosol나 화산 먼지가 이 영역에 도달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고 갇히게 된다. 성층권은 고도 50km까지 계속되고, 성층권 위로 고도 100km까지를 중간권mesosphere이라 한다. 중간권에서는 열복사가 훨씬 효율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성층권보다 온도가 낮다. 중간권 위로는 온도가 훨씬 높으면서 밀도가 희박한 열권thermosphere(고도 600km 이하)이 있고, 열권 위로 1만km까지를 외기권exosphere이라 한다. 외기권 밖으로 나가야 비로소 우주(행성 간 공간)라 할 수 있다. 84-5)


# 연무제aerosol : 기체 속에 고체나 액체가 섞여 있는 상태


6장 기후와 서식 가능성 … 171


뭐니뭐니해도 지구의 환경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태양 빛이다. 지표면에 도달한 햇빛은 표면의 특성에 따라 흡수되기도 하고 반사되기도 한다. 어두운 해수면은 다량의 빛을 흡수하고, 밝은 대륙은 빛의 일부를 반사하여 우주로 돌려보낸다. 또한 그린란드와 남극대륙을 덮고 있는 얼음은 대부분의 빛을 반사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지면의 평균 흡수율은 약 70%이며(반사된 30%는 달빛moonshine과 비슷한 지구광earthshine을 만든다), 어느 정도 데워진 후에는 열(또는 적외선)의 형태로 복사에너지가 방출된다. 지구에 대기가 없다면 복사에너지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우주로 날아가서 표면 온도는 -20°C까지 내려갈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대기에 섞여 있는 수증기와 이산화탄소가 지면에서 복사된 적외선을 흡수하여 열이 우주로 달아나는 것을 막아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지구의 기후는 ‘지면의 햇빛흡수율’과 ‘대기 중 온실가스함유량’이라는 두 가지 요인에 의해 좌우된다. 94-5)


지질학적 탄소순환(신선한 광물의 침식과 풍화에 의해 양이 줄었다가 화산활동을 통해 보충되는 순환)은 아직 확증되지 않은 가설이지만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핵심은 단연 음성 피드백이다. 광물질의 풍화와 침식은 몇 가지 경로를 통해 온도의 영향을 받는다. 첫째, 온도가 높으면 물의 증발량이 많아져서 비가 자주 내리고, 그 결과 침식이 더 빠르게 진행된다. 둘째, 신선한 광물을 탄소와 결합시키는 탄화나 풍화 과정은 온도가 높을수록 빠르게 진행된다. 따라서 화산이 폭발하여 여분의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에 유입되면 숲에 대형 화재가 발생하거나 화석연료를 태우고, 온실효과로 기온이 높아져서 비가 내리면 광물의 침식과 풍화가 더욱 빠르게 진행되어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다시 낮아진다(수백만 년이 소요된다!). 간단히 말해서 지질구조판은 주기적 변화를 겪으면서 수억 년 동안 기후를 안정된 상태를 유지해왔다. 여기서 ‘안정적’이라 함은 평균 기온이 수십 ℃ 이상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97-8)


지질구조판 위에 놓인 바다와 대기, 그리고 얼음은 기후변화를 초래하는 양성 피드백을 낳는다. 이런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타나는 밀란코비치 주기Milankovitch cycle는 세 가지 주기운동을 결합한 결과인데, 그중 가장 짧은 주기는 지구 자전축의 세차운동歲差運動, precession이다. 지구의 자전축은 회전하는 팽이의 회전축처럼 가느다란 원뿔을 그리면서 26,000년을 주기로 서서히 돌고 있다. 두 번째 주기는 지구의 자전축이 공전면에 대하여 기울어진 정도가 변하는 주기이다. 현재 지구의 자전축은 공전면에 대하여 23.5°쯤 기울어져 있는데, 이 값이 40,000년을 주기로 변하고 있다(변화 폭은 22.5°~24.5°이다). 마지막으로 공전궤도의 이심률(원에서 벗어난 정도)도 약 10만 년을 주기로 변하고 있다. 이심률이 변하면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가 변하기 때문에 당연히 기후에 영향을 미친다. 밀란코비치 주기는 해양 퇴적물에 남아 있는 과거의 기후변화 패턴을 통해 거의 맞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98)


# 음성 피드백은 효과를 반감시키는 일련의 과정이고, 양성 피드백은 효과를 증폭시키는 일련의 과정이다.


7장 생명 … 207


생명이란 화학반응을 이용해서 주변 환경으로부터 물질과 에너지를 취하여 성장하고 번식하는 생물학적 개체를 의미한다.  생명체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은 결과물이 반응 자체를 촉진한다는 점에서 자가촉매적autocatalytic이다. 예를 들어 식물은 물과 이산화탄소, 그리고 태양에너지를 이용하여 길다란 사슬 구조의 포도당 분자를 만들어내는데, 이것은 식물의 몸체를 구성하는 주요 성분이다(세포벽의 주성분인 셀룰로스cellulose의 형태로 존재한다). 즉 광합성의 결과물이 더 많은 광합성을 촉진하는 것이다. 반면에 동물과 같은 호기성 생물好氣性은 음식과 태양에너지를 취하여 더 많은 세포를 만들어내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음식을 취한다. 생명은 자원을 소모할 뿐만 아니라, 복잡한 분자를 만들어서 기존에 있는 분자의 생명 활동을 촉진하고 자신과 닮은 개체를 재생산한다. 또한 생명은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을 통해 진화한다. 이 과정은 ‘생명체의 의지’가 아닌 ‘불완전한 복제’를 통해 이루어진다. 106-7)


# 호기성 생물好氣性~, aerobic~ : 산소를 이용하여 신진대사를 하는 생물


대기 중 산소 농도가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은 생명 활동을 통해 만들어진 유기물(포도당, 지방, 메탄가스 등)이 산소와 반응하여 이산화탄소와 물로 변환되기 때문이다. 화학에서는 이런 경우를 정상상태定常~, steady state라 한다. 즉 광합성에서 생성된 산소가 역반응을 통해 소진되는 소모량과 균형을 이루었다는 뜻이다. 오늘날 대기에 섞여 있는 산소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백분율로는 약 20%이고, 무게로는 거의 10억×10억kg이나 된다. 그렇다면 이 많은 산소와 균형을 이루는 거대한 유기물 저장소(광합성의 산물인 포도당 저장소)가 지구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이 유기물의 대부분은 대기와 닿지 않는 곳에 숨어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다양한 방법으로 산소와 반응하여 이산화탄소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의 유기물 저장소는 깊은 바다 속 해저면이나 산이 침식되면서 형성된 퇴적층 밑에 있다. 사실 생태계는 아주 작은 시스템으로, 산소의 생산량과 소비량이 거의 균형을 이룬 상태이다. 113)


진핵세포는 원핵세포와 달리 세포골격으로 지탱되는 막膜, membrane 안에 세포핵과 DNA가 갇혀 있고, 세포의 가능을 수행하는 다양한 세포기관을 갖고 있다. 진핵세포의 기원을 설명하는 가장 그럴듯한 이론은 ‘세포내공생설細胞內共生說, endosymbiosis’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2개의 원핵세포가 한 몸이 되어 진핵세포로 진화했다(하나가 다른 하나를 잡아먹었을 수도 있고, 약한 상대를 침범했을 수도 있지만 굳이 구별할 필요는 없다). 아마도 이 과정은 고세균古細菌이 박테리아를 흡수하거나 그 반대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두 생명체 사이에 공생이 시작된 것이다. 예를 들어 산소로 포도당을 만들어서 에너지를 얻는 호기성 세균은 산소를 싫어하는 고세균에게 최상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 또는 광합성 세균이 큰 세포 안에서 포도당을 생산하면 세균과 숙주에게 모두 이득이 된다. 이와 같은 공생 조합은 진핵생물에게 커다란 이점으로 작용하여 생태계에서 더욱 확고한 입지를 굳히게 된다. 114)


8장 인류와 문명 … 239


메소포타미아와 서부 및 중앙유라시아 문명의 태동에는 7,000년 전에 일어났던 흑해의 범람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홍적세 말기에 유라시아를 덮고 있던 얼음이 녹아 지중해로 흘러들었고, 흑해는 더운 날씨 때문에 서서히 증발하여 지중해와 흑해의 수위 차가 140m까지 벌어졌다. 중력이 작용하는 한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에 지중해의 짠물은 보스포루스해협Bosporus Strait을 타고 흑해로 유입되었고, 담수淡水였던 흑해는 지금과 같은 염수鹽水로 변했다. 물론 이 과정은 서서히 진행되었지만 흑해의 가장자리가 살짝 경사져 있기 때문에 수위가 비교적 빠르게 상승하여 결국 해안의 농경지로 범람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농경민들은 새로운 땅을 찾아 중앙아시아와 서유럽으로 진출했는데, 특히 흑해 연안에 거주해왔던 인도-유럽어족과 셈족Semitic tribes, 우바이드족Ubaid 등 다양한 인종들이 메소포타미아로 모여들어 최초의 문명 도시인 수메르를 건설하게 된다. 125-6)


지질구조판 중 유라시아판은 지질학적으로 유리한 점이 많았다. 대륙의 축이 동-서 방향으로 뻗어 있어서 기후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으며, 다양한 농경민들이 모여들어 다양한 기술을 개발할 수 있었다. 반면에 다른 대륙들은 대부분 남-북 방향으로 뻗어 있기 때문에 기후가 비슷한 동-서 방향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어려웠고, 남-북으로 진출하면 곡물과 가축들이 서식 가능 지역을 벗어나 큰 피해를 입었다(이들이 사냥에 의존했다면 남-북 방향 진출이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유라시아 문명권이 확장됨에 따라 다양한 종의 가축들도 함께 퍼져나갔고, 점령지의 토착민들은 새로운 병원균에 노출되어 혹독한 대가를 치르면서 면역력을 키워나갔다. 유리시아는 다른 대륙으로 진출할 때 수천 가지 군사 기술과 함께 토착민들이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병균도 가져갔다.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가 소규모의 원정대만으로 잉카제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병균 덕분이었다. 126-7)


화석에너지는 환경을 파괴하고 기후를 변화시키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당장 누리는 편리함이 압도적으로 크기 때문에, 사람들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생활습관을 바꾸려면 꽤 긴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문명의 부작용은 이뿐만이 아니다. 기술과 의학으로 무장한 인간은 지난 수십 억 년 동안 적용되어왔던 자연선택의 섭리를 교묘하게 피해왔다. 그러나 자원이 고갈되어 자연선택을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면, 가장 하찮게 여겼던 미생물의 먹이로 전락할 것이다. 사실 이것은 탐욕이나 나태함의 문제가 아니다. 주어진 자원을 무분별하게 낭비하는 것은 경쟁자가 없는 생명체에게 흔히 나타나는 성향이다. 그러나 인간은 언어와 역사, 그리고 과학을 이용하여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이므로, 위기가 닥치기 전에 대비책을 세울 능력이 충분히 있다. 우리가 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다면, 그것은 생명의 역사, 아니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업적이 될 것이다. 1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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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휴가 갈 땐, 주기율표 - 일상과 주기율표의 찰떡 케미스트리
곽재식 지음 / 초사흘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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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소와 매실주 H


수소 원자는 ⊕전기를 띠기 쉽다. 그런데 수소 원자는 그냥 깔끔하게 ⊕전기를 띠는 상태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살짝 ⊕전기를 띠는 듯 마는 듯한 느낌으로 ⊖전기를 띠기 쉬운 다른 물질을 약간만 끌어당기는 묘한 상태가 될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상태로 수소 원자가 ⊖전기를 띠기 쉬운 다른 물질을 슬쩍 잡아당기는 현상을 수소결합hydrogen bond이라고 한다. 수소결합은 그다지 힘이 세지 않다. 그러다 보니 수소결합으로 연결된 부분은 어떨 때는 살짝 붙어 있다가, 어떨 때는 다른 힘을 못 이겨 떨어지기도 한다. 즉, 여러 가지 다양한 경우가 생긴다. 이 같은 성질 덕분에 수소는 갖가지 복잡하고 이상한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특히 온갖 물질이 별별 복잡한 형태로 다채로운 화학반응을 일으켜야 하는 생명체의 몸속에서 수소결합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예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말하자면 생명체가 복잡한 이유의 근원은 수소결합의 힘이 애매한 정도라서 조건에 따라 다른 결과를 갖고 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0-1)


수소결합, 즉 수소 원자가 ⊖전기를 띠기 쉬운 물질을 적당한 힘으로 끌어당기는 이 이상한 특징은 생명체가 유전 받은 대로 자기 몸을 키워 나가는 과정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유전자가 들어 있는 DNA는 자기와 똑같은 DNA를 복사해서 한 벌 더 만들어 내거나, 짝이 맞는 RNA를 만들어 내는 등의 화학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런데 이 화학반응에서 DNA가 서로 끌어당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수소결합이다. 이런 화학반응은 생명체가 선대로부터 유전된 그대로 자신의 몸을 만드는 현상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체에서 수소가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수소가 흔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단, 지구를 기준으로 보면 오직 수소 원자만 모여서 생긴 수소 기체는 그리 흔치 않다. 수소 기체는 지구에 드물지만 다른 원자 옆에 붙어 있는 수소 원자는 흔한 편이다. 물에는 산소 원자와 함께 수소 원자가 들어 있다. 그러므로 바다는 수소 원자를 가득 품은 거대한 저장고다. 11-2)


2. 헬륨과 놀이공원 He


사실 태양은 전체 무게의 70% 이상을 수소가 차지하고 있으므로 거대한 수소 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수소 원자들은 엄청나게 높은 온도와 압력에서 몇 단계에 걸쳐 서로 합쳐져 헬륨 원자로 변하는 수가 있다. 이런 현상을 원자의 핵끼리 서로 붙는다고 해서 핵융합nuclear fusion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 때문에 태양이 강한 빛과 열을 사방으로 내뿜는 것이고, 그 덕분에 우리는 환하고 따뜻한 세상에서 살 수 있다. 헬륨이 쓸모가 많은 까닭은 특이한 화학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 아니다. 정반대로 헬륨은 아무 화학반응을 일으키지 않아서 유용하다. 헬륨은 불을 댕겨도 타오르지 않고, 금속을 헬륨 속에 놓아두어도 녹슬지 않는다. 한마디로 헬륨은 아무 성질이 없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성질인 물질이다. 주기율표에서 헬륨과 같은 열에 있는 네온, 아르곤 같은 물질들은 다들 이렇게 화학반응을 거의 일으키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런 물질들을 묶어서 비활성기체noble gas라고 부른다. 20-2)


매우 정밀한 가공작업을 하거나 높은 열을 가해야 하는 작업장을 생각해 보자. 세밀하게 뭔가를 만들어야 하는데 화학반응을 잘하는 물질이 주변에 나돌고 있으면 불필요한 화학반응이 일어나 재료가 손상될 수 있다. 바로 이럴 때, 제조 시설에 헬륨을 불어 넣어 주면 주위가 헬륨으로 가득 차 불필요한 화학반응을 일으킬 대상이 아예 없는 깨끗한 환경이 마련된다. 당연히 불이 붙지도 않는다. 헬륨은 워낙에 아무 화학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성질을 띤 까닭에 자기들끼리도 잘 반응하지 않는다. 그래서 액체로 만들기가 어렵다. 평범한 1기압에서 날아다니던 헬륨 원자들이 서로 들러붙어 액체가 되게 하려면 온도를 영하 269℃까지 낮추어야만 한다. 액체로 만들기 위해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온도를 낮춰야 하는 물질이다 보니, 일단 액체로 만든 헬륨을 뿌리면 주변 온도 역시 아주 낮게 만들 수 있다. 게다가 헬륨은 화학반응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재료에 미칠 영향을 걱정하지 않고 냉각 작업에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 23-5)


3. 리튬과 옛날 노래 Li


리튬 원자는 전자를 잃고 ⊕전기를 띠는 상태로 쉽게 변하는 성질이 있다. 리튬 배터리는 간단히 말해 리튬 원자가 ⊕전기를 잘 띤다는 점을 이용해서 그 전기를 뽑아 쓰는 장치라고 보면 된다. 리튬은 세상 모든 원자 중에 수소, 헬륨 다음으로 평균 무게가 적게 나가는 원자다. 가볍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수소, 헬륨, 리튬은 모두 성질이 확연히 다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 원자들의 차이는 원자핵에 양성자가 몇 개 있느냐 하는 것밖에 없다. 양성자가 한 개만 있으면 수소 원자가 되어 불에 잘 타는 물질이 되기 쉽지만, 똑같은 양성자인데도 두 개가 꼭 붙어 있으면 헬륨 원자가 되어 아무런 화학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성질을 갖게 된다. 마찬가지로 수소 원자를 이루고 있는 것과 똑같은 양성자가 한 개가 아니라 세 개가 달라붙어 있으면 리튬 원자가 되는데, 이번에는 금속 덩어리가 되기 쉽다.  100종이 넘는 세상 모든 원소 간의 차이는 원자의 핵에 양성자가 몇 개 들어 있는지 그 개수의 차이밖에 없다. 29-31)


주기율표에서 리튬은 소듐의 바로 위 칸에, 포타슘은 소듐의 바로 아래 칸에 써넣는 원소다. 즉, 세 가지 원소는 주기율표의 같은 열에 주르륵 적혀 있다. 이는 현대의 화학자들이 리튬, 소듐, 포타슘을 성질이 비슷해 하나로 묶을 만하다고 본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 원소들은 다들 원자가 ⊕전기를 잘 띠고, 화학반응을 잘하며, 한데 뭉쳐 있을 때는 쇳덩어리 비슷한 모양을 이룬다. 주기율표에서는 이들 모두 맨 첫 번째 열에 나열돼 있어서 1족 원소group 1 family라고 부르기도 한다. 리튬을 주원료로 하지는 않더라도, 다른 물질들의 화학반응이 잘 일어나도록 돕느라 리튬을 쓰는 일도 있다. 가만히 두면 화학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물질들에 적당한 촉매catalyst를 섞어 주면 그때부터 화학반응을 일으킬 때가 있다. 이 과정에서 촉매 자신은 거의 변하지 않으면서 다른 물질은 계속 빠르게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변화하도록 도와준다. 이 때문에 많은 화학 회사에서는 적합한 촉매를 개발하는 일을 핵심 기술로 여긴다. 34-6)


4. 베릴륨과 보물찾기 Be


우라늄은 중성자neutron와 충돌하면 원자핵이 둘로 나뉘어 다른 원자로 변하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원자핵이 쪼개지는 현상을 핵분열nuclear fission이라고 하며, 핵분열 현상이 일어날 때는 강한 열이 나온다. 그런데 이 과정을 유지하려면 한 가지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중성자들이 원자로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고 계속 우라늄 사이를 돌아다니도록 무엇인가로 막아 주어야 한다. 중성자는 이름 그대로 전기를 띠지 않는 중성 상태의 입자다. 그래서 딱히 다른 물질과 화학반응을 일으키지도 않고, 서로 밀고 당기는 일도 거의 없다. 유령 같은 중성자를 원자로 안에 가두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행히 중성자는 다른 원자의 중심부인 핵 근처에서 그 핵을 이루는 양성자 또는 중성자에 이끌릴 수 있다. 그러니까 중성자는 대체로 다른 물질들을 그냥 통과하는 편이지만, 가끔 다른 원자의 정중앙 근처를 지나게 될 때는 그 원자핵에 들어 있는 양성자나 중성자에 이끌려 붙잡히거나 진행 방향이 바뀔 수 있다. 42-3)


베릴륨은 세상의 모든 원자 중에 평균 무게가 네 번째로 가볍고, 그만큼 원자 자체의 크기도 작은 편이다. 베릴륨의 원자핵은 대개 양성자 네 개와 중성자 다섯 개로 이루어져 있다. 주기율표에서 수소, 헬륨, 리튬에 이어서 네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까닭이 바로 양성자가 네 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성자가 베릴륨의 원자핵 근처를 지나갈 때면 강하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은 오묘한 수준의 힘에 이끌린다. 그리고 이 힘 때문에 중성자의 진행 방향이 꺾여서 엉뚱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이런 현상이 연달아서 일어나면 마치 중성자가 베릴륨에 부딪혀 튕겨 나가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 즉, 베릴륨이 중성자를 튕겨내는 반사재reflector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원자력발전소에서는 원자로 안에 베릴륨을 넣어 그릇처럼 만들고, 그 안에 중성자와 우라늄을 넣어 반응을 일으킨다. 이렇게 하면 제아무리 유령 같은 중성자라도 베릴륨에 가로막혀 계속해서 튕겨 나가고, 원자로 안에서는 연쇄반응이 꾸준히 일어난다. 43)


5. 붕소와 애플파이 B


유리는 규소와 산소 원자들이 서로 붙어 있는 물질을 주재료로 만든다. 특별한 공정을 거치지 않으면 여기에 소듐과 칼슘 원자도 약간 섞여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유리는 갑작스러운 온도 변화에 약하다. 특히 유리를 뜨겁게 하면 유리를 이루고 있는 원자들이 떨린다. 사실 어떤 물체가 ‘뜨겁다’거나 ‘온도가 높다’는 말 자체가 그 물체를 이루고 있는 원자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유리의 온도가 높아지면서 모든 원자가 빠르게 떨리다 보면 규소 원자와 산소 원자 사이에 끼어든 소듐 원자 근처에 틈이 생길 수 있다. 원자들 사이에 틈이 생기면 유리의 강도가 약해진다. 다행히 요즘 주방에서 사용하는 유리 제품들은 제법 높은 열에도 잘 견디는 것들이 있다. 유리를 만들 때 붕소 성분을 약간 넣기 때문이다. 규소 원자와 산소 원자 사이에 섞여 있는 소듐 원자 때문에 틈이 생길 만한 자리마다 붕소 원자가 끼어들게 해서 그 틈을 메워 버리는 것이다. 붕소 원자의 크기는 그런 역할을 하기에 꼭 맞다. 49-50)


붕산boric acid은 황산이나 염산, 질산처럼 다른 물질을 무시무시하게 녹이지는 않는다. 그런 대표적인 산성 물질에 비하면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정도도 훨씬 덜하다. 붕산은 이처럼 어중간한 산성을 띠는 덕분에 살충제로 요긴하게 쓰인다. 붕소는 반도체를 만드는 핵심 재료다. 반도체의 주재료는 규소인데, 순수한 규소에는 전기가 잘 흐르지 않는다. 여기에 규소와 성질이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른 붕소를 불순물처럼 아주 조금 넣어 주면 훌륭한 반도체가 된다. 규소에 붕소를 살짝 뿌려 주는 이 작업을 도핑dopping이라고 한다. 도핑 작업을 거치면 규소와 붕소의 비슷한 듯 다른 듯한 미묘한 성질 차이 때문에 어떤 때는 전기가 흐르고 어떤 때는 흐르지 않는 반도체의 특징이 생겨난다. 베릴륨이 중성자를 잘 튕겨 내서 핵분열을 부채질하는 것과 반대로 붕소는 중성자를 잘 흡수하는 성질을 지녔다. 그래서 핵분열이 과도하게 일어나서 원자력이 지나치게 강해질 것 같으면 붕소를 넣어 핵분열을 줄인다. 52-3)


6. 탄소와 스포츠 C


탄소를 이용하면 다양한 물질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들어 내기가 무척 편리하다. 아주 단순한 것부터 별 희한한 성질을 띠는 복잡한 물질까지, 탄소 원자를 이리저리 조합하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 탄소가 이렇게나 다양한 물질의 재료가 될 수 있는 까닭은 탄소 원자 한 개가 다른 원자 네 개와 결합하려는 성질을 띠기 때문이다. 탄소 원자 하나에 다른 원자를 붙잡을 수 있는 갈고리가 네 개 달렸다고 상상하면 적당하겠다. 갈고리가 네 개나 있는 탄소를 이리저리 붙여 가면서 뭔가를 만든다면 다른 원소를 재료로 삼는 것보다 더 다양하고 복잡한 모양을 만들 수 있다. 게다가 탄소 원자가 다른 원자와 달라붙는 힘은 너무 강하지도, 너무 약하지도 않다. 어떤 조건이 갖추어지느냐에 따라 아주 튼튼하게 달라붙을 수도 있고, 조건이 바뀌면 조금만 충격을 받아도 쉽게 떨어지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같은 탄소로 이루어진 물질이라도 원자끼리 어떻게 붙어 있느냐에 따라 성질이 달라진다. 56)


지구에 사는 모든 유기체, 즉 생명체의 몸에는 탄소가 많이 들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탄소는 모두 어디서 왔을까? 공기 속의 이산화탄소가 식물의 몸이 되었다가, 다시 그 식물을 먹은 동물의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지구의 공기 중에는 이산화탄소가 별로 없다. 지구의 공기는 질소가 78%, 산소가 21%를 차지하고, 생명체를 이루는 재료인 이산화탄소는 고작 0.04%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도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가 금방 바닥나는 일은 없다. 생명체가 죽으면 곰팡이와 세균이 화학반응을 일으켜 유해를 썩게 하는데, 이 과정에서 생명체의 몸은 다시 이산화탄소로 변해서 공기 중으로 돌아간다. 그러니 지상의 수많은 생물이 살아가는 모습을 요약하면 공기 중에 0.04%밖에 없는 이산화탄소 중 일부가 화학반응을 거치며 탄수화물이 되고, 단백질과 지방의 재료로도 활용되어, 마침내 생물의 몸이 되었다가, 생명 활동을 마친 뒤 분해되어 다시 이산화탄소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58-60)


7. 질소와 목욕 N


사람 몸은 단백질로 이루어졌는데, 단백질은 아미노산amino acid이라는 물질이 수없이 붙어 있는 덩어리다. 그런데 여기서 아미노amino라는 말은 질소가 들어 있는 대표적인 물질 암모니아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공기를 들이마셔도 그 속에 있는 질소를 아미노산과 단백질의 재료로 활용할 수가 없다. 생명체가 질소 기체를 몸속에서 단백질 재료로 바꾸지 못하는 것은 질소 원자 특유의 성질 때문이다. 질소 원자 자체는 화약으로 만들 수 있을 만큼 다른 원자들에 달라붙으며 화학반응을 잘한다. 그런데 같은 질소 원자 둘이 달라붙을 때는 갈고리 역할을 하는 세 전자가 모두 한꺼번에 서로서로를 이끌어 붙이는 갈고리 역할을 해서 질소 원자 둘이 아주 야무지게 붙어 있게 한다. 이런 모습을 가리켜 질소가 삼중결합을 했다고 표현한다. 이 때문에 생명체가 질소 기체를 아무리 들이마셔 봤자 어지간해서는 질소 원자 두 개를 서로 떼어 낼 수가 없고, 당연히 질소 원자를 재료 삼아 다른 물질을 만들 수도 없다. 66-8)


그렇다면 동식물이 몸속에서 질소 원자를 활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질소 기체가 아닌 화학반응을 잘하는 다른 물질 속에 들어 있는 질소 원자를 흡수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질소 기체의 삼중결합을 끊어서 화학반응을 잘하는 다른 물질로 바꾸어야 한다. 그래야 동식물이 그 물질 속에 있는 질소 원자로 몸에 꼭 필요한 아미노산과 단백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다행히도 지구에는 오랜 옛날부터 이런 일을 해 온 특별한 생물이 있다. 다름 아닌 세균들이다. 수많은 세균 중 몇몇 종류가 공기 중의 질소 기체를 흡수해서 화학반응을 잘하는 다른 형태의 물질로 바꾼다. 식물은 땅속 세균들이 바꿔 놓은 물질을 뿌리로 빨아들여 그 속에 든 질소 원자를 이용해 단백질 등 여러 가지 필요한 물질을 만든다. 그리고 동물들은 바로 그 식물을 먹는다. 질소 기체의 삼중결합을 끊어 생명체가 활용하기 좋은 질소 원자로 바꿔 주는 이 세균들이 없다면 식물이 자라지 못하고, 동물도 살아갈 수 없다. 68)


8. 산소와 일광욕 O


지구 상공에는 자외선을 흡수하는 보호막이 있다. 바로 지구를 감싸고 있는 오존층ozone layer이다. 오존층은 오존ozone이 많이 모여 있는 공기층을 일컫는 말로, 지상에서 대략 20~25km 높이에 해당한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지상의 생명체들을 위해 오존층을 선물로 준 것이 누구인지 짐작하고 있다. 바로 세균, 그중에서도 남세균 종류다. 수십억 년 전에 전 세계 바다에 나타난 남세균들이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광합성을 하면서 산소oxygen 원자가 두 개씩 붙은 산소 기체를 공기 중에 내뿜었다. 이 세균들이 수억 년 동안 줄기차게 산소 기체를 내뿜자, 지구는 산소 기체가 풍부한 행성으로 변했다. 지구 대기에 산소 기체가 풍부하다 보니, 자외선이 쏟아지는 저기 하늘 높은 곳에서는 산소 기체가 자외선을 맞고 오존으로 변한다. 산소 원자가 두 개씩 서로 짝지어 있는 것이 보통 산소 기체의 모습인데, 그러다 자외선을 맞으면 원자들이 떨어지고, 이내 세 개씩 다시 들러붙어 새로운 물질로 바뀐다. 이것이 바로 오존이다. 75-6)


남세균이 지구에 산소 기체를 이만큼이나 공급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산소는 화학반응을 무척 잘하는 원소다. 어쩌다 산소 원자 두 개가 달라붙어 산소 기체가 되더라도 그 상태로 가만히 있기보다는 뭔가 화학반응을 일으켜 다른 물질로 변해 버릴 가능성이 크다. 즉, 산소 기체가 자꾸 다른 물질로 변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지금처럼 공기 중 산소 기체의 양을 넉넉하게 유지하려면 다른 물질로 변해서 없어지는 것을 보충하고도 남을 정도로 남세균들이 계속해서 산소 기체를 내뿜어야 한다. 그러니 남세균은 그 수도 어마어마하게 많았을 것이고, 대단히 긴 시간 동안 꾸준히 광합성을 했을 것이다. 산소를 이용하는 다른 생물들은 남세균이 만든 산소 기체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호흡으로 산소 기체를 들이마시는 수많은 동물 역시 산소 기체가 화학반응을 잘한다는 점을 활용해 살아간다. 사람 역시 호흡으로 산소 기체를 들이마시고 있으니, 산소 기체의 화학반응 능력을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76)


9. 플루오린과 아이스크림 F


물 같은 액체 상태의 물질이 마르면서 기체 상태로 변할 때, 주변의 열을 가져가면서 시원해지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렇게 액체가 기체로 변하면서 가져가는 열을 기화열heat of vaporizatio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냉장고 정도의 냉각 효과를 내려면 아주 쉽게 기체로 변하는 물질이 유리하고, 기왕이면 재활용하기 위해 기체로 변한 뒤에 액체로 되돌리기 편리한 것이 좋다. 이런 용도로 이용하는 물질을 냉매refrigerant라고 한다. 염소chlorine, 플루오린fluorine, 탄소carbon 원자를 조합해 만든 냉매 물질을 각 원소 이름의 알파벳 첫 글자를 따서 CFC라고 부르는데, 이 물질의 상품명인 프레온Freon이 유명해져서 흔히 프레온가스라고 한다. 그런데 CFC가 공기 중으로 빠져나오면 하늘 높이 올라가서 오존층을 파괴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때문에 CFC 대신 오존층을 파괴하지 않는 HFC라는 물질을 쓰기도 한다. HFC는 수소, 플루오린, 탄소 원자 등을 성분으로 만드는 물질이므로, 여기에도 플루오린은 들어간다. 82-4)


플루오린은 예전에 플루오르fluor 또는 불소라고도 불렀던 물질이다. 플루오린은 화학반응을 극히 잘 일으키는 물질이어서 도저히 화학반응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물질을 건드려 끝내 화학반응을 일으키곤 한다. 수소와 플루오린이 연결된 물질을 플루오린산fluoric acid, 혹은 불산불화수소산이라고 하는데,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불산은 산성을 띤다. 아주 강한 산성은 아니지만, 다른 물질과 쉽게 화학반응을 일으키면서 자꾸 스며들고 파고드는 경향이 있어서 사람 피부나 다른 생물에 닿으면 위험하다. 반도체를 생산하려면 작은 칩 위에 수없이 많은 부품이 연결된 회로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반도체 부품은 크기가 1만 분의 1mm, 10만 분의 1mm 정도로 매우 작다. 이렇게 작은 부품을 아주 정밀하게 만들려면 재료를 세밀하게 깎아야 한다. 그 작은 부품을 조각칼 같은 도구로 깎을 수는 없으므로, 적절한 화학물질을 이용해서 불필요한 부분이 삭게 한다. 바로 이 공정에 불산을 쓴다. 85, 88-9)


10. 네온과 밤거리 Ne


가이슬러관에 기체를 넣고 강한 전기를 걸면, 기체 원자 속에 있던 전자가 전기의 힘 때문에 튀어나온다. 전자는 ⊖전기를 띠므로 전자를 잃은 기체 원자는 ⊕전기를 띠게 된다. 이렇게 전기를 띤 상태로 돌아다니는 기체 원자를 요즘에는 플라스마plasma라고 부른다. 플라스마, 그러니까 ⊕전기를 띤 기체 원자는 자연히 ⊖전기 쪽으로 이끌려 날아간다. 플라스마가 유리관 안에서 다른 기체 원자들과 이리저리 부딪히면서 ⊖전기가 있는 쪽으로 날아가다 보면 다른 원자 안에 들어 있는 전자들과 부딪히거나 서로 이끌리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전자들은 힘을 받기도 하고 잃기도 한다. 전자가 갑자기 속도를 잃을 때는 전자파를 내뿜는다.  따라서 가이슬러관에 넣은 기체의 종류와 양, 압력을 잘 조절하면 전자파를 끊임없이 만들어 낼 수 있고, 그 전자파의 주파수도 조절할 수 있다. 만약 플라스마가 내뿜는 전자파의 주파수를 4억~8억 MHz 정도로 유지할 수 있으면, 그 전자파는 사람 눈에 감지되어 빛으로 보인다. 94-5)


주기율표에서 네온은 헬륨 바로 아래 칸에 적혀 있다. 같은 열에 배치된 것에서 알 수 있듯 네온은 헬륨과 성질이 비슷하다. 화학반응을 잘 일으키지 않는 비활성기체이며, 헬륨처럼 우주 전체로 보면 비교적 흔하지만, 지구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물질이다. 1871년 드미트리 멘델레예프Dmitry Mendeleev가 대체로 가벼운 것부터 무거운 것 순서로 원소 이름을 써넣으면서, 성질이 비슷한 것들은 세로로 같은 줄에 오도록 배치한 것이 주기율표다. 그런데 이 원칙대로 정리했더니 어떤 칸에는 써넣을 것이 없었다. 빈칸이 생겼으니 주기율표를 만드는 원리가 틀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주기율표가 틀린 것이 아니라 빈칸에 들어갈 원소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언젠가 새로운 물질이 발견되어 그 자리를 채울 거라고 예상할 수 있다. 실제로 1898년에 네온이라는 새로운 물질이 공기 중에 0.002% 정도 섞여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 물질이 주기율표의 빈칸을 채우게 됐다. 99)


11. 소듐과 냉면 Na


소듐은 ⊕전기를 띠려는 성질이 강하다. 소듐의 전기적인 특성을 이용하면 독특한 노란색 빛을 내는 전등을 만들 수도 있다. 나트륨등은 유리관에 소듐을 넣고 전기를 걸어 아주 높은 온도에서 녹아내리고 끓어오르게 해서 기체 상태로 유리관 안을 떠다니며 빛을 내뿜게 만든 것이다. 순수한 소듐 덩어리를 물에 던지면 빠르게 폭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소듐이 그만큼 격렬하게 화학반응을 일으킨다는 증거다.  가성소다는 가혹한 성질을 지닌 소듐 물질이라는 뜻으로, 가성소다가 동물의 살갗에 닿으면 피부에 해를 입는다. 하지만 다른 물질을 잘 녹이는 성질을 적당히 이용하면 가성소다로 세탁물의 찌든 때를 녹여 없앨 수 있다.  양잿물이 바로 가성소다, 즉 수산화소듐을 말한다. 가성소다가 다른 물질을 잘 녹이는 까닭은 이 물질이 대표적인 염기base이기 때문이다. 소금은 소듐과 염소 원자가 규칙적으로 붙어 있는 덩어리다. 그래서 염화소듐sodium chloride 또는 염화나트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03-5)


우리 몸에서 소듐이 꼭 필요한 곳은 신경이다. 사람과 동물은 온몸에 신경이 퍼져 있다. 거대한 신경 덩어리라고도 할 수 있는 뇌에서 몸을 어떻게 움직이라고 보내는 신호가 신경을 통해 해당 부위에 전달돼야만 몸이 제대로 움직이고 여러 가지 감각도 느낄 수 있다. 이때 사용되는 신호는 전기신호다. 그리고 신경을 통해 전달할 전기신호를 만들기 위해 인체가 사용하는 물질이 바로 ⊕전기를 잘 띠는 소듐과 포타슘이다. 사람의 신경에는 가까이 있는 물질 중에서 ⊕전기를 띤 소듐만 골라서 한쪽으로 흘러가게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부위가 있다. 소듐통로sodium channel와 소듐-포타슘 펌프Na+ K+ pump라고 부르는 부위인데, 소듐통로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전기를 띤 소듐이 한곳으로 모이는 바람에 상당한 전기가 걸린다. 그러니 몸속에 소듐이 전혀 없다면 신경에서 전기를 일으킬 수가 없고, 신경을 통해 신호가 전달되지 않으면 온몸이 한마음으로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소듐이 없으면 몸은 뇌와 연결되지 못한다. 106)


12. 마그네슘과 숲 Mg


식물에서 초록색을 내는 화학물질을 엽록소chlorophyll라고 한다. 엽록소를 커다랗게 확대해서 보면 핵심이 되는 부분에서도 가장 눈에 잘 띄는 위치에 금속으로 분류되는 마그네슘 원자가 자리 잡고 있다. 즉, 엽록소라는 물질을 정확히 설명하자면, 마그네슘계 유기화학물질을 이용한 광화학반응 목적의 색소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것은 싱그러운 숲의 초록빛을 정확하게 일컫는 말이다. 곡식이나 과일을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 관점에서 보면, 광합성은 식물이 햇빛 속의 힘을 흡수해서 영양분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 그런데 엽록소의 중심에 있는 마그네슘 관점에서 보면, 마그네슘 원자와 다른 원자들이 이어진 아주 작은 회로가 햇빛의 힘을 받아 작동하면서 전자로 만든 광선 검 같은 장치가 가동되어 물 분자를 조각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조각난 물 분자의 파편인 수소가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화학반응을 일으킨 결과로 다른 동물들이 원하는 당분 같은 물질이 생겨난다고 볼 수 있다. 111-3)


⊕전기를 잘 띠는 마그네슘의 특징을 이용하면 다른 금속이 녹슬지 않게 보호할 수 있다. 금속의 전자가 떨어져 나가는 현상, 즉 녹스는 현상은 주위에 있는 무엇인가가 금속에서 전자를 떼어 내 가져가려고 하니까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금속의 전자를 가져가려고 하는 물질이 나타날 때마다 금속보다 먼저 나서서 전자를 던져 주는 장치가 있다면 보호하고자 하는 금속 안에 있는 전자는 뜯겨 나가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 원리를 이용하면 마그네슘으로 금속이 녹슬지 않게 보호할 수 있다. 장치는 간단하다. 보호하고 싶은 금속과 마그네슘 덩어리를 전선으로 연결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보호하려는 금속에서 전자가 튀어나오려 할 때마다 마그네슘이 재빨리 자기 전자를 떼어서 전선을 통해 전달해 준다. 이렇게 해서 마그네슘은 하나둘 전자를 잃어 ⊕전기를 띠는 상태로 변한 뒤 화학반응을 일으키면서 삭아 가고, 반대로 보호하고자 했던 금속은 마그네슘 덕분에 전자를 잃지 않아서 녹슬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 116-7)


13. 알루미늄과 콜라 Al


지표면의 돌과 모래를 이루는 원자를 분석하면 산소와 규소 원자가 매우 많은 편이고, 바로 그다음 순위를 차지하는 것이 알루미늄이다. 사람들은 흔히 쇳덩어리라고 하면 철을 떠올리는데, 이는 철이 지구에 흔한 금속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루미늄은 철보다 더욱 흔하다. 지표면을 이루는 원자의 8% 정도가 알루미늄이라는 통계도 있다. 그렇지만 돌이나 흙에서 알루미늄 원자만을 골라내서 금속 덩어리로 만들기가 너무 어려웠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최초로 전환점을 마련한 인물은 (베릴륨을 발견하고 요소를 합성한) 독일의 위대한 화학자 프리드리히 뵐러였다. 뵐러는 화학반응을 아주 잘 일으키는 물질인 포타슘을 염화알루미늄aluminium chloride과 반응시키는 과정을 이용해서 상당히 순수한 알루미늄 가루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알루미늄을 뽑아내는 방법이 점점 더 발전해서, 힘들긴 해도 알루미늄 원자가 들어 있는 돌에서 알루미늄을 뽑아내 조금씩 덩어리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124-5)


그래도 초창기에는 알루미늄 덩어리를 만들기가 힘들었다. 연-알루미늄-술에 결국 성공한 인물로는 보통 프랑스의 폴 에루Paul Héroult와 미국의 찰스 마틴 홀Charles Martin Hall이 손꼽힌다. 1880년대 후반, 두 사람이 각자 발견한 기술은 알루미늄을 뽑아낼 수 있는 재료에 전기를 걸어 주는 독특한 화학반응을 통해 알루미늄을 녹여낸 뒤에 다시 훑어 내는 방법이었다. 요즘에는 주로 보크사이트bauxite라는 돌에서 알루미늄을 뽑아내며, 예전보다 훨씬 더 발전된 기술을 이용한다. 하지만 여전히 알루미늄을 생산하는 데는 전기가 많이 든다. 다행히 요즘은 돌에서 뽑아내지 않아도 알루미늄을 얻을 방법이 있다. 바로 재활용이다. 게다가 알루미늄을 재활용하면 돌에서 직접 알루미늄을 뽑아낼 때보다 전기를 훨씬 절약할 수 있다. 재생 작업에 소모하는 전기는 돌에서 직접 뽑아낼 때 소모하는 전기의 20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오늘날 알루미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널리 쓰이고 있다. 126, 128, 130)


14. 규소와 선글라스 Si


유리와 수정의 재료가 되는 물질에는 비슷한 점이 있다. 둘 다 규소silicon 원자에 산소 원자가 둘씩 달라붙은 이산화규소silicon dioxide에서 출발하는 물질이다. 이산화규소를 이루는 산소와 규소는 둘 다 지구에 흔한 원소다. 지표면을 이루는 원자 중에 산소와 규소가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의 75% 가까이나 된다. 한반도에서는 또 다른 물질이 유리를 능가하는 인기를 끌었다. 이산화규소 덩어리였던 유리와 달리 그 새로운 물질은 규소를 중심으로 알루미늄이나 철 등 여러 원자가 다양하게 섞인 것이었다. 그 물질은 다름 아닌 도자기다. 여기에 현대의 기술을 더해 규소 원자가 이루는 모양을 적절히 조절하면 더 튼튼하고 더욱 쓰기 좋은 재료를 만들 수 있다. 이런 원리로 만들어 낸 도자기 계통의 재료를 흔히 세라믹ceramic이라고 한다. 고대의 유리구슬부터 중세의 도자기에 이어 현대의 세라믹까지, 이 모든 것에는 규소가 있고, 규소를 어떻게 녹이고 굳히느냐에 따라 제품의 품질이 달라진다. 134, 137-8)


1950년대의 학자들은 전기가 잘 흐르는 도체와 그렇지 않은 부도체의 중간 성격을 띠는 어중간한 물질을 잘만 이용하면 원하는 경우에만 전기가 흐르게 조절할 수 있는 전자부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바로 이런 물질을 반도체semiconductor라고 한다. 이런 생각을 공유하고 있던 강대원과 아탈라는 규소를 주재료로 삼고 다른 화학물질들을 조금씩 이용해 정말로 이렇게 동작하는 전자부품을 만들어 냈다. 이 부품을 금속산화물 반도체 전계효과 트랜지스터metal oxide semiconductor field effect transistor라고 한다. 보통은 줄여서 MOSFET로 쓰고, ‘모스펫’이라고 읽는다. 1979년에 나온 모스펫 2만 9,000개짜리 장치가 바로 최초의 IBM PC 핵심 부품이었던 8088 CPU였다. 전기를 받으면 빛을 내뿜도록 반도체를 만들면 LED가 된다. 반대로 빛을 받으면 전기를 내뿜는 반도체를 만들 수도 있는데, 이렇게 만든 장치는 태양광발전소가 된다. 태양광발전 장치를 만들 때도 역시 규소를 주재료로 사용한다. 140-1)


15. 인과 기차 여행 P


화재 위험을 해결할 수 있는 마법의 가루가 바로 난연제flame retardant라는 물질이다. 그리고 그 난연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인phosphorus 원자가 들어 있는 성분이다. 난연제는 플라스틱 같은 재료에 섞어 넣어 불이 잘 붙지 않게 하는 약품을 말한다. 보통은 불이 잠깐 붙었다가도 번져 나가지 않고 그냥 사그라들게 하는 효과를 주는 것들이 많다. 만약 불에 잘 타지 않으면서 푹신한 가죽 소파 같은 느낌이 나는 제품을 만들고 싶다면 가죽과 같은 질감의 플라스틱에 난연제를 섞어 소파를 만들면 되고, 불에 안 타는 벽지가 필요하다면 종이와 같은 질감의 플라스틱을 벽지 모양으로 가공한 다음 난연제를 섞어 두면 된다. 난연제는 화재 위험을 낮추고 싶은 그 어디에나 활용할 수 있다. 예컨대 전자제품이 전기 합선으로 불이 날까 봐 걱정된다면, 난연제를 첨가한 플라스틱으로 제품을 만들면 된다. 난연제 덕택에 플라스틱은 무엇이든 만들 수 있고 불에 잘 타지 않으면서 값도 싼 환상적인 재료가 되었다. 146-7)


꼭 난연제가 아니어도 인 원자를 이용한 화학물질은 오늘날 세계 여러 나라에서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인과 수소, 산소가 붙어 있는 물질인 인산phosphoric acid이다. 인이 들어 있는 물질을 이렇게나 많이 만들어 내는 이유는 이 물질이 비료로 쓰이기 때문이다. 인 원자가 들어 있는 비료를 뿌려 줘야만 농작물이 잘 자란다. 인이 있어야 잘 자라는 것은 농작물이나 식물만이 아니다. 사실은 세상 모든 생물이 자라는 데 인이 꼭 필요하다. 사람이 사는 데도 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인 원자가 들어 있는 물질인 아데노신삼인산adenosine triphosphate이 모든 생물의 몸이 움직이는 데 사용되는 핵심 연료이기 때문이다. 특히 아데노신삼인산이 아데노신이인산adenosine diphosphate으로 바뀌는 화학반응을 일으켜 몸 곳곳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에 활용한다. 몸속에서는 워낙에 별별 곳에 다 사용되는 물질이라 아데노신삼인산이라는 긴 이름 대신 ATP라고 줄여서 표기하는 일이 많다. 147-8) 


16. 황과 긴 산책 S


생명체에서 뽑아낸 다른 많은 물질처럼 고무나무에서 뽑아낸 고무에도 탄소 원자가 주로 많이 들어 있다. 고무 속의 이 많은 탄소 원자는 대개 서로서로 줄줄이 연결되어 기다란 끈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황 원자는 다른 원자 두 개와 잘 결합하려는 성질이 있다. 갈고리가 두 개 달린 원자라고 생각해도 된다. 그래서 고무에 황을 넣어 주면 이쪽과 저쪽 탄소 가닥 사이에 황이 끼어들어 양쪽으로 갈고리를 걸고 붙어 버린다. 탄소가 많이 들어 있는 실 가닥 같은 물질들 사이사이에 황 원자가 들어가서는 접착제처럼 탄소 실 가닥 곳곳을 붙여 버린다고 상상해도 비슷하겠다.  바로 이 때문에 고무에 황을 적당히 넣어 주면 탄소 가닥들이 서로 엉겨 붙으면서 고무가 더 탱탱해진다. 생물의 몸속에 있는 단백질에서도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 황은 수소결합보다 더 강한 접착제 역할을 한다. 황 덕택에 단백질의 모양이 더 다양해질 수 있고, 생명체는 더욱 다양한 단백질을 이용하며 더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 158)


술파제sulfa drug는 세균의 몸 속에 들어가면 엽산folacin을 만들 때 쓰이는 원료처럼 반응한다. 지구의 생명체들은 모두 DNA와 단백질로 몸을 만들어 가는데, 몸속에서 각종 영양분을 활용해 DNA와 단백질을 만들 때 조금이지만 엽산이 필요하다. 그래서 세균은 몸속에서 화학반응을 일으켜 스스로 엽산을 만든다. 그런데 세균 몸에 술파제가 들어가면 세균은 술파제를 이용해 엽산을 만들려고 한다. 그러면 오류가 발생해 엉뚱한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아마도 술파제에 붙어 있는 황과 다른 원자들의 모양과 성질이 원래 세균에게 필요했던 물질과 묘하게도 비슷해서 혼동을 일으키는 게 아닌가 싶다. 엽산이 없으면 DNA와 단백질도 제대로 만들 수 없으므로 결국 세균은 몸을 유지할 수 없게 되어 죽는다. 이와 달리 사람 몸에는 애초에 엽산을 만드는 능력이 없다 보니 술파제의 방해를 받을 일도 없다. 술파제가 등장한 뒤로 인류는 드디어 몸속에 감염된 세균을 제대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164)


17. 염소와 수영장 Cl


염소는 바닷물 속에 ⊖전기를 띤 상태로 넉넉히 녹아 있다. 바닷물에서 얻는 소금이 바로 소듐 원자와 염소 원자가 한 개씩 쌍쌍이 붙어 있는 물질이다. 수영장 냄새는 염소chlorine로 물을 소독해서 나는 냄새다. 염소 원자 둘이 붙어 있는 물질인 염소 기체를 직접 물에 섞어 소독하는 방법도 있고, 염소 원자를 다른 원자들과 함께 이용해 만든 소독약을 쓰는 방법도 있다. 염소는 주기율표에서 플루오린 바로 아래에 적혀 있는 만큼 플루오린과 성질이 비슷하다. 염소도 플루오린처럼 화학반응을 잘 일으키는 편이고, ⊖전기를 띠는 상태로 쉽게 변한다. 염소 기체를 이용해 소독할 수 있는 까닭도 염소 원자가 화학반응을 잘 일으키기 때문이다.  특히 염소 기체는 아주 조금만 물에 넣어도 세균을 비롯해 물속에 사는 여러 미생물의 세포와 화학반응을 일으켜 미생물의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을 다른 물질로 바꿔 버려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만든다. 몸의 각 부분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미생물은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다. 167-9)


염소 원자가 들어 있는 위험한 물질을 꼽자면 염산hydrochloric acid을 빼놓을 수 없다. 쇳덩이를 녹일 만큼 강한 산성 물질로 잘 알려진 염산은 염소 기체를 물에 뿌리기만 해도 물과 화학반응을 해서 저절로 생겨날 수 있다. 독가스로 퍼트린 염소 기체를 병사들이 들이마셨을 때 해를 입는 이유 중 하나도 염소 기체가 몸속의 수분과 반응해서 염산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강한 산성을 자랑하는 염산은 알고 보면 우리 몸속에도 있다. 위에서 음식을 소화하기 위해 분비하는 위액의 중요한 성분이 다름 아닌 염산이다. 특히 위액 중에서 단백질을 분해하는 펩신pepsin이라는 물질은 산성 환경에서 화학반응을 가장 잘 일으키는데, 산성 물질인 염산은 펩신이 활발하게 단백질을 분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 그뿐 아니라 염산은 위 속에서 산성에 버티지 못하는 세균들을 녹여서 없애는 역할도 맡고 있다. 사람 위액 속에 염산이 없었다면 입으로 세균이 조금만 들어와도 그것에 감염될 가능성이 지금보다 더 높았을 것이다. 171)


18. 아르곤과 제주도 Ar


아르곤은 헬륨과 마찬가지로 다른 원자와 화학반응을 거의 일으키지 않는 물질이다. 어찌나 반응을 안 일으키는지 그저 낱낱이 흩어져 기체 상태로 날아다니기만 한다. 헬륨은 지구에서 구하기 쉽지 않은 물질이지만, 아르곤은 공기 중에 1% 가까이 들어 있다. 공기 성분 중 질소 기체, 산소 기체 다음으로 많은 것이 아르곤이다. 그렇다면 아르곤은 어떤 일에 쓰일까? 헬륨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반응도 일으키지 않으면서 재료를 보호하거나 작업장을 깨끗하게 유지해야 할 때 아르곤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아르곤 용접을 들 수 있다. 쇠를 녹여 붙이는 용접 작업을 할 때는 높은 온도로 쇠붙이 주위를 녹이는데, 주변의 잡다한 물질이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끼어들어 용접 부위를 더럽힐 수 있다. 공기 중의 산소만 해도 화학반응을 일으켜 쇠를 녹슬게 할 수 있고, 먼지가 타서 재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럴 때 아르곤을 넣어 주면 불필요한 반응을 일으킬 만한 것을 모두 날려 버리고 깨끗하게 용접할 수 있다. 179-81)


그렇다면 결코 화학반응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하는 아르곤과 무엇이든 화학반응을 일으키려고 하는 염소나 플루오린을 서로 섞어 두면 어떻게 될까? 아르곤과 플루오린이 서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상태 중에 전기적으로 특수한 상황이 되는 것을 아르곤-플루오린 엑시머 또는 Ar-F 엑시머라고 한다. 세상에는 에너지를 가하면 빛을 내는 물질이 여러 가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물질은 전기를 걸면 빛을 내고, 어떤 물질은 높은 열을 가하면 빛을 낸다. 그런데 만약 빛을 쐬어 주면 그 결과로 똑같은 빛을 내는 물질이 세상에 있다면 어떨까? 이런 물질은 쐬어 준 빛을 받아서 빛을 내는데, 자기가 내뿜는 그 빛 때문에 다시 더 빛을 내게 될 것이다.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생겨난 특이하고 강한 빛을 레이저laser라고 한다. 아르곤-플루오린 엑시머 역시 이런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물질 중 하나다. 아르곤-플루오린 엑시머로 만든 레이저는 일상적인 물질을 깔끔하고 정교하게 깎아 내기에 유리해서 그런 작업에 많이 쓰인다. 182-3)


19. 포타슘과 바나나 K


아랍어로 알칼리al qalīy는 원래 식물 따위를 태운 재를 뜻하는 말인데, 실제로 식물을 태운 재를 잘 골라 물에 녹이면 염기성, 즉 알칼리성 용액이 되기도 한다. 조선시대 이전 우리 조상들도 식물의 재를 녹인 물을 잿물이라 부르고 세탁에 이용했다. 염기성을 띠는 잿물에는 단백질 등의 얼룩이나 때를 이루는 성분을 파괴하는 성질이 있어서 이를 빨래하는 데 이용한 것이다. 식물의 몸을 이루는 수많은 원자 중에 탄소, 산소, 수소 같은 원자들은 태우면 화학반응을 일으켜 낱낱이 떨어져 나왔다가 다시 서로 적당히 붙어서 이산화탄소와 수증기가 된다. 공교롭게도 이 물질들은 기체여서 연기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간다. 따라서 식물이 타고 남은 재에는 기체가 되어 날아가지 않는 원자들만 남게 된다. 마침 칼륨 원자는 재로 남는 쪽에 속한다. 지금처럼 정밀한 화학반응 기술이 없었던 시절에 식물을 태워서 얻은 재로 알칼리성 물질을 만들었던 옛사람들의 기술은 상당히 실용적이었던 셈이다. 187-8)


사람의 신경은 전기신호를 전달하면서 제 역할을 한다. 몸의 특정 부위에서 감지한 것을 뇌에 전달하고, 정보를 받은 뇌가 다시 신체 각 부위로 명령을 전달함으로써 몸이 움직이는데, 이때 전기신호를 전달하는 통로가 바로 신경이다. 그러므로 전자제품을 사용하기 위해 배터리를 충전하듯이 사람 몸에서도 충전과 비슷한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사람의 몸은 생명체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항상 연료로 활용하는 ATP라는 물질을 반응시켜서 충전한다. 이때, 충전 과정에서 핵심이 되는 물질이 세포의 겉면에 있는데, 이름하여 소듐-포타슘(칼륨) 펌프Na+ K+ pump다. 우리가 골똘히 생각해야 할 때나 무엇인가를 느끼고 행동해야 할 때, 우리 몸은 평소에 소듐-포타슘 펌프를 가동해 모아 둔 전기를 이용해서 신체 각 부분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다. 결국 우리가 삶을 사는 수고의 10분의 1쯤은 소듐과 포타슘을 몸속 세포 이쪽 편에서 저쪽 편으로 보내는 데 소모하는 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191-2)


20. 칼슘과 전망대 Ca


요즘 사용하는 콘크리트란 시멘트에 모래와 자갈 그리고 물을 섞어 사용하는 건설 재료를 말한다. 시공할 때는 묽은 반죽 같은 상태지만 시간이 지나면 굳어서 아주 튼튼해진다. 콘크리트의 재료 중 모래와 자갈은 흙 바닥에서 흔히 볼 수 있으니 그보다 핵심 재료처럼 보이는 것은 역시 시멘트다. 시멘트는 접착제 역할을 해서 다른 재료들을 돌처럼 단단하게 붙잡아 준다. 현대 시멘트의 성분을 살펴보면 칼슘, 탄소, 산소, 알루미늄 같은 다양한 원소들이 보인다. 알루미늄이야 흙 속에 워낙 많이 있는 물질이니 이 중에 눈에 띄는 주성분이라고 할 만한 것은 칼슘과 탄소다. 특히 시멘트의 재료라고 하면 칼슘 원자 하나에 탄소 원자 하나, 산소 원자 세 개씩의 비율로 붙어 있는 탄산칼슘calcium carbonate 같은 것을 꼽을 만하다. 칼슘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몸속에 있는 뼈의 성분을 떠올릴 텐데, 우리 몸속에 있는 칼슘을 제외하고 살면서 가장 많이 마주치는 칼슘이 아마 시멘트 속에 있는 칼슘이 아닐까 싶다. 197-8)


사람은 스스로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몸속에서 칼슘 성분을 다양한 화학반응에 활용하곤 한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사람의 뼈를 이루는 물질의 상당량은 칼슘이다. 우리가 멸치나 우유 같은 음식을 먹으면 그 속에 있던 칼슘이 물에 녹아서 흘러 다니다가 적당한 곳에서 다른 물질과 결합하면서 단단하게 굳어 뼈를 이룬다. 사람의 뼈는 화학의 황제인 탄소와 인 등의 물질이 칼슘과 튼튼하게 붙어 있는 구조로 만들어져서 가벼우면서도 아주 튼튼하다. 몸속에서 칼슘이 수시로 사용되는 현상은 뼈에 역으로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동물은 칼슘이 필요하면 뼈에 잔뜩 들어 있는 칼슘을 녹여서 사용한다. 사실 몸의 활동에 꼭 필요한 인 성분도 뼈에 저장되어 있던 것을 녹여서 사용할 때가 많다. 그러니까 뼈가 몸 여러 기관에 필요한 칼슘과 인의 저장고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 외에도 사람이 살다 보면 뼈가 낡고 상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뼈는 항상 조금씩 없어지기도 하고 생겨나기도 하면서 유지되어야 한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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