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달러 이후의 질서 - 트럼프 경제 패권의 미래
케네스 로고프 지음, 노승영 옮김 / 윌북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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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1장. 지배적 통화의 탄생


세계통화를 발행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이점이다. 반면에 세계통화 지위를 잃는 것은 뼈아픈 손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터져나오는 사회적 요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 공장과 기반시설을 재건해야 할 필요성, 식민 지배 권력을 계속 휘두르려는 욕망 등으로 인해(GDP의 240퍼센트를 넘어선 전후戰後 채무는 말할 것도 없다) 영국이 잇따라 재정 문제를 겪은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영국은 1956년, 1967년, 1976년 세 차례나 구제금융을 받으려고 국제통화기금IMF에 머리를 조아려야 했으며 이것 말고도 규모는 작지만 비슷한 여러 구제책에 기대야 했다. 파운드가 세계통화로 군림하던 영광의 시절은 아득한 추억이 되었다. 하지만 미국 달러가 이런 운명을 맞으려면 여러 번의 불운을 겪어야 할 것이다. 지배적 달러는 이제 중장년에 접어들었을지 몰라도 여전히 건강하다. 그럼에도 앞에 놓인 도전(이 책 마지막 부분에서 논의한다)을 마주하려면 우선 세계에서 어떻게 달러가 패권을 쥐게 되었는지 이해해야 한다. 21)


1부. 달러 패권에 맞선 과거의 도전자들


오늘날 유로는 국제 교역과 금융에서 확실히 달러의 가장 중요한 대안이다. 하지만 비EU 나라들 사이의 교역에서 널리 쓰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로는 세계통화가 아니다. 유로존 정부 부채 시장은 발칸화되어 있다. 투자자들은 독일의 부채와 이탈리아의 부채를 똑같이 취급하지 않으며 이는 당연하다. 강력한 재정 당국이 없다는 것은 유로화가 가진 또 다른 주요 한계의 뿌리다. 이를테면 범유로화 예금 보험 제도는 아직 하나도 없는데, 이것은 은행 연합이 온전히 발전하는 데 필요한 기본 조건이다. 자본시장 연합이나 더 온전하게 통합된 은행 시스템이 없고 유럽 정부 부채가 파편화된 상황은 달러와의 경쟁에서 유로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주요 걸림돌이다. 이런 탓에 최근 수십 년간 유럽의 성장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유럽이 역동성을 잃은 요인은 높은 세율과 방만한 복지 등 여러 가지다. 미국과의 격차 중에서 70퍼센트 이상은 낮은 생산성 때문이므로 지금의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50-3)


유로화는 부정할 수 없는 강점을 보유했으며 이 강점은 향후 수십 년 안에 전면으로 등장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유럽중앙은행ECB의 독립은 유럽연합의 기초가 되는 1992년 마스트리흐트 조약에 명시되어 있다. 이에 반해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1913년 의회 입법으로 제정되었다. 그렇기에 만일 의회가 원한다면 연방준비제도는 폐쇄되어 몇 주 안에 미국 재무부에 재흡수될 수 있다. ECB는 헌법적 지위를 누리며 주요 임무는 유로존 전역에서 낮은 인플레이션을 유지하는 것이다. 낮은 인플레이션을 유지하는 방법이 명문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초점이 좁아서 창의적 해석의 여지가 크지 않다. 반면에 물가 안정과 최대 고용을 유지한다는 연준의 이중 의무는 해석의 여지가 크며 관례적으로 연준은 이를 낮은 인플레이션과 완전고용으로 해석한다. 이를테면 연준은 인플레이션과 실업 중 어느 쪽에 비중을 둘지와 관련하여 정치적 압력을 훨씬 많이 받는다. ECB가 공동 책임으로 운영되는 것도 안정성의 한 요인이다. 53)


2부. 중국: 현재의 도전자


중진국 함정에 빠지고 마는 근거는 여럿 있다. 아마도 가장 주된 근거는 빠르게 발전하는 나라가 부유해짐에 따라 (정부 형태와 무관하게) 포퓰리즘적 재분배 압박이 어떤 식으로든 성장을 탈선시킨다는 것이다. 전형적 사례를 보자면 성장이 느려지고 정부가 성장을 지탱할 방법을 찾을 때는 대외 차입을 비롯한 금융 탈규제가 강력한 단기적 해결책일 수 있다. 신생 정부의 제도가 허약하면 급증한 차입은 생산성이 낮은 투자로 흘러들기 쉬운데, 결국에 가서는 투자를 정당화하는 데 필요한 성장을 이루지 못한다. 차입이 단기적 해결책으로 효과를 낼지도 모르지만, 성장이 불가피하게 다시 느려져 누적된 부채를 지탱할 수 없음이 분명해진다. 금융 압박과 자금 부족은 여러 해 동안 쌓이다 어느 시점이 되면 한꺼번에 폭발하기도 한다. 대외 차입이 많았다면 외국 채권자들이 도피하고 그와 더불어 환율이 폭락하고 달러 부채를 자국 화폐 소득으로 상환하는 금융 부담이 치솟는다. 그 결과는 지독한 금융위기다. 87-8)


3부. 나머지 모두의 문제: 달러와 함께 살아가기


고정환율제는 퇴출되었다. 1997~1998년 부채 위기 이후 아시아 각국은 유연한 환율제를 채택하기로 결정했다고 IMF에 보고했다. 하지만 그 나라들의 달러 환율을 흘끗 보기만 해도 대부분의 경우 변동폭이 크지 않거나 변동 속도가 빠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던 걸까? 대부분의 아시아 경제국은 환율을 안정시키려고 폭넓게 개입하면서도 자신들이 유연한 환율제를 채택했다고 IMF에 보고했으며, 이에 따라 IMF는 공식 환율 분류 문서에서 이 환율제들이 유연하다고 기록했다. 요약하자면 많은 신흥시장, 특히 아시아 신흥시장들은 워싱턴 합의를 거부했다기보다는 핵심 요건을 채택하되 나름의 개선점을 첨가하는 방안을 선택했다. 아시아의 정책 입안자들은 자본 통제와 금융시장 규제가 나름대로 유용하기는 하지만 거시경제 정책의 심각한 비일관성을 만회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준비금을 비축하고 규제를 강화하고 일부 통제를(특히 자본 유입과 관련하여) 도입했다. 131, 135-6)


2000년대 초 나를 비롯한 많은 경제학자는 아시아가 달러 보유고를 꾸준히 늘리는 바람에 세계경제의 골치 아픈 불균형이 악화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이체 방크의 세 이코노미스트(마이클 둘리, 데이비드 폴커츠-랜도, 피터 가버는 셋 다 학자 출신이다)는 아시아가 전후戰後 유럽과 같은 발전 전략을 따를 뿐이라고 주장했다. 성장을 북돋우려면 저평가된 환율을 유지해야 하므로 개입과 자본 통제를 혼합하여 구사한다는 것이다. 세 사람은 국제 통화 체제가 (미국, 유럽, 일본을 주로 아우른) 전후 브레턴우즈 체제와 비슷한 브레턴우즈 II 체제로 진화했다고 묘사했다. 그들의 관점에 따르면 이것은 위기로 비화할 위험하고 불공정한 체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아시아 경제(와 이를 모방한 몇몇 나라)가 매우 합리적인 발전 전략을 따른다고 주장했다. 즉 미국의 공공·민간 채무자들은 불평할 게 아니라 이 체제 덕분에 미국인들이 막대한 해외 자금을 유난히 낮은 금리로 빌릴 수 있다는 것에 고마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136)


환율 저평가 이야기에는 중국 당국이 자국 경제의 초경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동원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 빠졌다. 그것은 중국 농촌에서 도시와 제조업 중심부로 해마다 꾸준히 이주하는 수백만 명의 인구다. 서구 경제가 맞닥뜨린 진짜 문제는 도시의 생산 중심지에서 일할 기회를 찾아 해마다 밀려드는 중국 빈농의 물결이었다. 외환시장 개입은 중국 통화의 이른바 저평가에 일조했을지는 몰라도 그 영향은 부차적이었을 것이다. 삼인조 논문의 두 번째 주장은 아시아에서 흘러드는 값싼 자금이 미국에 순수하게 이로웠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미국 은행 규제 담당자들이 금융위기가 신흥시장에만 일어날 거라 생각하지 않고 이른바 자본 유입 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금융 규제에 허점이 있는 나라에 외국 자본이 쏟아져 들어오면 빈틈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질 수 있다. 그렇기에 미국의 명목상 대외 차입이 그 자체로 세계 금융위기를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불에 기름을 부은 것은 분명하다. 137)


4부. 대안 통화


유발 노아 하라리는 화폐가 본질적으로 사회적 관습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모두가 무언가를 화폐로 받아들이기로 한다면 그것이 미크로네시아 얍 섬의 거석이든 중세 일본의 쌀이든 실제로 화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정부가 발행하는 국가 통화는 어떤 대체물이나 사적 통화도 넘볼 수 없는 근본적 이점이 있다. 정부는 모든 피고용인과 공급업자들에게 자신의 통화로 급여를 지불할 수 있으며 정부 통화로 세금을 납부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정부는 자신의 통화로 표시된 부채를 발행할 수 있다. 미국 달러가 ‘법정통화’ 지위를 가진다는 것은 부채가 미국 달러로 상환될 경우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정부는 다양한 활동에서 자신의 통화가 법적 회계 단위로 쓰이도록 요구할 수 있다. 이 모든 이점이 어우러져 발생하는 네트워크 효과 덕분에 정부 통화는 넘볼 수 없는 우위를 누린다. 이걸로 모자란다면 은행 예금의 정부 통화 표시를 의무화하는 등의 제약을 추가할 수도 있다. 151)


규제에 반대하는 격렬한 로비 시도를 제외하면 적어도 울타리를 둘러쳐 암호화폐 이용을 제한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특히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암호화폐를 운용할 때 ‘거래소’를 이용하기 때문에 거래소를 규제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이 ‘온 체인’(블록체인 위에서) 암호화폐 거래가 너무 어렵고 너무 많은 전문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소를 잘못 입력했다가 전 재산을 영영 잃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거래소는 블록체인 용어로 스스로를 치장하려 안간힘을 쓰지만 실은 은행에 불과하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블록체인에 보유한 비트코인은 100달러 지폐와 비슷하고, 거래소에 보유한 비트코인은 은행에 넣어둔 돈과 비슷하다. 거래소는 은행과 꽤 비슷하지만 커다란 차이가 하나 있다. 거래소는 정부가 최종 대부자로서 뒤를 받쳐주지 않으며 암호화폐 업계가 기존 은행 수준으로 규제받지 않는 한 그렇게 될 가망은 없다. 다시 말해 정부는 최종 레버를 쥐었다. 152-3)


골수 암호화폐 신봉자들은 암호화폐를 규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코드가 법이다”라거나 “암호화폐는 검열에 저항력이 있다”라는 말도 있으니 말이다. 이 논리의 문제는 설령 정부가 암호화폐를 완전히 금지하지는 못할지라도 암호화폐의 이용을 번거롭고 값비싸게 만드는 법률을 제정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암호화폐가 정부 통화에 맞서 경쟁력을 가지는 데 필요한 네트워크 효과를 무력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그렇다고 블록체인 기술이 다른 측면에서 금융에 혁명적 영향을 미칠 뚜렷한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의 통화 독점은 금융위기에 대처하고 공공부채 위기를 피하는 데 필수적이다. 비트코인 본위제의 문제들 중 상당수는 금 본위제와 동일할 것이다. 간헐적으로 안정을 가져다줄 수는 있겠지만 만에 하나 위기가 일어나면 그 규모가 훨씬 커질 우려가 있다. 게다가 경기 역행적 케인스 통화 정책을 실행할 능력이 없으면 경기 순환이 훨씬 극심해질 수 있다. 153-5)


화폐에 대한 유발 노아 하라리의 설명이 비트코인 전도사들에게 더없는 희망을 선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암호화폐가 투기를 제외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생각은 암호화폐의 킬러 앱(시장에 등장하자마자 다른 경쟁 상품을 몰아내고 시장을 장악하는 새로운 서비스나 상품―옮긴이)을 무시하는 처사다. 점점 커져가는 지하경제 말이다. 역사적으로 현금은 은밀한 거래에서 선호되는 수단이었다. 비트코인이 합법적 과세 거래에서는 정당한 쓰임새가 거의 없을지 몰라도 지하경제에서 거래를 촉진하는 데 널리 쓰인다면, 이것을 순전히 투기적인 자산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규제 당국이 서투르고 법 집행이 무르다고 항의할 수는 있지만 비트코인의 본원적 가치가 0이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규칙을 어기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사회를 기준틀로 삼지 않는다면 말이다. 사실 수많은 연구에 따르면 비트코인은 폭넓은 불법 활동에 쓰이며 랜섬웨어 공격과 다크웹 시장에서 압도적으로 선호되는 통화다. 157-9)


스테이블코인은 비트코인과 같은 매력도 있지만 전혀 다른 부류다.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가장 널리 쓰이는 두 가지 코인인 테더와 USD 코인USDC이 단연 가장 중요하다. 둘 다 가치가 1달러에 고정되어 있다. 세 가지 핵심 문제가 있다. 첫째, 스테이블코인 공급자의 뒤에 최종 대부자가 없을 경우 스테이블코인이 재무부 채권 같은 안전한 달러 표시 증권으로 충분히 보증되지 않으면 인출 사태를 겪을 위험이 있다. 이것은 고정환율제에서 일어나는 인출 사태와 매우 비슷하다. 둘째, 보유 증권에 대한 이자를 정부 소유의 중앙은행이 아니라 스테이블코인 공급자가 수취한다. 셋째, 스테이블코인이 충분히 보급되고 편리해지면 은행의 중개자 역할을 박탈할 우려가 있다. 은행이 대부하려면 자본이 있어야 하는데, 그 필수 요소를 공급하던 통상적 예금자들이 스테이블코인으로 갈아타기 때문이다. 이 모든 문제는 이론상으로는 해결할 수 있지만 걸림돌과 부작용도 많다. 물론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있지만 정부만이 가능하다. 162-3)


유럽중앙은행, 영국은행, 캐나다은행을 비롯한 전 세계 주요 중앙은행 중 상당수는 독자적인 중앙은행 디지털 통화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즉 ‘CBDC’의 개발을 꽤 많이 진척시켰다. 주도적 CBDC를 내놓으려는 경주에서 달러의 유리한 출발선과 미국의 전반적 기술 우위를 감안컨대 마음만 먹으면 미국의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다. 연방준비제도가 (소매) CBDC의 잠재적 ‘이익과 위험’을 공식적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한 때는 2022년 초다. 미국의 굼뜬 행동은 납득할 만하다. 현재의 통화 체제에서 달러가 왕좌에 있는데 뭐하러 평지풍파를 일으키겠는가? 디지털 통화의 발전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달러의 위상을 깎아내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를테면 디지털 통화는 다른 통화에 대해 고도로 유동적인 시장을 창출하여 달러의 네트워크 우위를 감소시킬 수도 있고, 미국 규제 당국의 권한 밖에 있는 국제 지불의 대안적 ‘레일rail’(거래가 처리되는 매체인 디지털 전송·처리 시스템―옮긴이)을 도입할 수도 있다. 164-5)


모든 우려(사이버 위험, 시스템 장애, 중개자 역할 박탈, 과도한 정부 권력)는 왜 새로운 금융 기술을 점진적으로 시행해야 하는지, 왜 미국보다 훨씬 작은 나라에서 먼저 실험하는 것이 이상적인지 잘 보여준다. 연준은 문제가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생기길 바랄 것이다. 미국은 지난 수십 년간 사실상 모든 거래 신기술에서 새로운 혁신을 받아들이는 데 늑장을 부렸다. 신용카드에 칩을 넣는 데에도 오래 걸렸다. 외국 중앙은행의 CBDC(세계 수준의 금융 시스템을 갖춘 영국을 포함)와 경쟁해야 한다는 우려가 커지자 백악관과 연방준비제도는 자신들이 이 문제를 눈여겨보고 있다고 선언했다. 미국이 언젠가 디지털 달러를 도입할지도 모른다는 위협만으로도 외국 중앙은행들은 자체 CBDC 도입 계획을 포기할 것이다. 체스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위협이 실행보다 세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외국 중앙은행들이 미국에 도전장을 내밀거나 (중국처럼) 자국 통화를 달러와 맞먹게 하고 싶어 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167-8)


5부. 지배적 통화에 따르는 혜택과 부담


권력의 순수한 희열을 제외하면 달러 패권은 미국에 과연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매우 구체적인 유익 한 가지는 외국인들이 놀랍도록 다량의 미국 부채를 기꺼이 보유한다는 것이다. 덕분에 미국 정부는 지불해야 하는 금리를 낮출 수 있다. 달러 부채가 웃돈이 붙어 팔리는(더 낮은 금리를 지불한다는 뜻) 이유 중 하나는 단연코 미국의 금융시장이 가장 깊고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미국 재무부 부채를 별도의 거래 비용 없이 빠르게 팔기는 식은 죽 먹기다. 즉 미국 부채는 유동성이 매우 크다. 또한 적어도 약속된 만큼의 달러를 상환받는다는(즉 깜짝 인플레이션을 배제할 수 있다는)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미국 부채는 매우 안전하다. 미국 정부 부채, 특히 재무부 단기 부채의 수요를 떠받치는 요인 중에서 덜 분명하지만 극도로 중요한 것은 전 세계 금융거래에서 담보로 널리 쓰인다는 사실이다. 재무부 채권은 담보물로 쓰여 화폐와 거의 비슷하기에 (경제학 용어로) ‘보유편익’을 누린다. 172)


수년간 가장 큰 수수께끼 중 하나는 미국인들이 해외에서 차입하는 엄청난 속도로 보건대 어떻게 미국이 공식 통계에서 보는 것보다 더 깊이 부채의 늪에 빠져들지 않았는가다. 특히 흥미로운 시기는 1998~2010년이다. 이때 미국 순 대외 채무의 증가 속도는 미국의 차입 규모에 비하면 달팽이걸음이었다. 이를테면 2010년이 되었을 때 미국의 누적 경상수지 적자는 수입의 45퍼센트에 육박했지만 대외 채무는 17퍼센트밖에 늘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던 걸까? 공교롭게도 대미 외국인 투자는 오랫동안 채권, 특히 단기 채권에 치우쳐 있었다(채권 대 위험자산 비율이 약 60대 40). 하지만 미국의 대외 투자는 정반대로, 주식과 대외 직접 투자가 약 60퍼센트였다. 이 사실만으로도 평균적으로 미국인들이 대체로 높은 수익을 거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주식이 채권보다 높은 실적을 올리니 말이다. 대외 직접 투자는 훨씬 높은 수익을 가져다주는 또 다른 형태의 투자다. 179-80)


외국 자산에 대한 투자자로서 미국인은 유일무이하다고 말할 만한 또 하나의 이점이 있다. 그것은 미국이 역사적으로 이민자의 나라였다는 것이다. 미국 이민자, 특히 1, 2세대 이민자는 여전히 모국에 강한 연대감을 느끼며 모국의 제도를 잘 안다. 그 덕에 미국 투자 자금을 모국에 끌어들이는 데 커다란 비교 우위를 누린다. 최근 나머지 세계가 쌓은 부가 더욱 집중되고 외국 가정이 자녀를 미국 대학에 보내어 미국과 연결을 맺으면서 외국인 직접 투자 채널은 양방향 도로에 더 가까워졌는지도 모른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로 인해 많고 다양한 이민자 인구가 미국에 선사하는 투자 이점이 일부 상쇄되었다. 위험을 대하는 미국인의 태도가 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 좋게든 나쁘게든 미국 체제의 전체 구조는 위험 감수에 보상하며(파산법이 너그럽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투자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훨씬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미국인은 다른 큰 나라의 국민보다 훨씬 부유하며 부자는 더 큰 위험을 감당할 수 있다. 184)


지배적 세계통화를 발행함으로써 미국은 정보에 특권적으로 접근하고 강력한 금융 제재를 부과하는 등의 비정형적 편익에 더해 뚜렷한 양적 편익을 얻는다. 그렇다면 지배적 통화 지위를 유지하는 데에는 상당한 비용도 따를까? 달러는 이제 금으로 태환되지 않는다. 미국 재무부 부채에는 이제 금약관(장래의 화폐 변동으로 인한 채권자의 손해를 막기 위하여, 채무자가 빚을 금이나 금화로 갚거나 금화 가치로 환산하여 갚도록 규정한 금전 채권의 약정―옮긴이)이 없다. 달러를 금으로 보증한다는 약속이 사라진 지금 지배적 통화 지위에 따르는 심각한 단점이 하나라도 있을까? 그런 단점 중 하나는 매우 명확하고 순전히 경제적인 단점으로, 미국이 침체기에 글로벌 포트폴리오에 일으키는 막대한 손실과 관계있다. 미국이 막대한 손실을 일으키는 한 가지 이유는 세계의 은행가이자 비교적 위험한 포트폴리오를 보유했다는 점이고 또 다른 이유는 달러가 글로벌 침체기에 절상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192)


군사력이 통화 패권에서 얼마나 필수적인 요소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일 수는 있지만 논란의 여지는 크지 않다.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은 모두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했을 때 자국 통화의 영향력이 정점에 이르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세계 초강대국 지위를 누렸다. 군사력과 통화 패권은 아무리 못해도 상보적이다. 달러 패권은 군비 조달을 용이하게 하며 특히 갑작스러운 군비 증강에 요긴하다.2 더 미묘한 논점은 미국의 군사력이 국제 금융시장과 국제 금융 기구의 규칙을 확립하고 정책을 설정하는 데에 추가 지렛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볼 때 지정학적 초강대국이 아닌 나라는 지배적 통화의 역할을 지속하기 힘들다. 유럽은 미국의 방패 뒤에 숨을 수 있지만 여러 중대 사안에 대해 영향력과 능력이 미비하다. 세계 금융 시스템은 규칙에 좌우되는데, 이 장 앞부분에서 설명했듯 경제·군사 강국인 나라는 규칙을 제정할 어마어마한 힘이 있다. 그렇지 않다는 생각은 위험할 정도로 어수룩하다. 193, 196)


이 장 첫머리에서 언급했듯 경제학자들은 달러 지배의 또 다른, 전혀 별개의 비용에도 주목했다. 그것은 전 세계가 심각한 침체와 (정도는 덜하더라도) 불황에 빠졌을 때 보험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주요소가 있다. 하나는 위기가 터졌을 때 달러가 절상되곤 한다는 사실과 관계있다. 그럴 땐 자금이 대부분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이것은 미국이 저위험 채무국으로 간주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미국 시장이 유난히 깊기에 동결될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기도 하다. 달러가 등귀하면 외국의 포트폴리오에 들어 있는 미국 자산의 외국환 시장 가치가 증가하고 미국의 포트폴리오에 들어 있는 외국 자산의 달러 시장 가치가 감소하는 효과가 발생한다. 이것을 ‘보험’이라고 부르는 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 덕분에 달러 표시 채권에 대한 투자는 위기에 대비한 더 나은 헤지가 된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것은 미국 재무부 채권의 금리가 유난히 낮은 이자를 지급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다. 196)


6부. 달러 패권의 정점


달러의 패권과 안정에 대한 외부의 도전이 중대하기는 하지만 가장 큰 약점은 내부에 있다. 통화를 보증하는 귀금속이 없는 순수한 법정통화의 세상에서는 인플레이션을 (합리적 수준으로) 안정시키겠다는 연방준비제도의 약속에 대한 신뢰야말로 세계경제가 안정을 유지할 것인가, 거시경제 석기시대(말하자면 1970년대)로 돌아갈 것인가 사이에 버티고 서 있는 가장 중요한 보루다. 연방준비제도의 독립성이 금과옥조라는 생각은 어수룩하다.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라는 정치적 압력이 너무 거세면, 특히 재정 정책이 명백히 지속 불가능하면 연준이 끝끝내 저항할 수는 없다. 대통령은 연준 이사진의 임명을 좌우하며 의회는 연준의 예산을 좌우하고 이론상 연준을 눈 깜박할 사이에 재무부 산하 기관으로 복귀시킬 수 있다. 코로나 시기에 그랬듯 이따금 연준이 무릎을 꿇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중앙은행이 너무 자주 너무 쉽게 굴복하면 기대 인플레이션이 점차 상승하고 불안정이 뒤따를 것이다. 200)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면 실물경제가 여러모로 왜곡되며 금융 시스템에 혼란이 일어난다. 무엇보다, 높고 안정된 인플레이션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전 30년 가까이 득세한 초저인플레이션 시기는 달러가 꽤 안정된 가치 저장 수단으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저인플레이션 시대는 더 많은 사람, 기업, 국가가 달러를 신뢰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달러 이용자와 쓰임새의 저변을 구축했으며 달러의 네트워크 효과를 보강하고 강화했다. 연준이 다시 한번 인플레이션 앞에서 갈팡질팡하면 네트워크 효과가 (하룻밤 새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점차 깎여나갈 것이다. 달러는 다른 통화(이를테면 유로화, 스위스 프랑, 어쩌면 일본 엔화)로 대체될 것이다. 위안화를 국제화하려는 중국의 시도에도 틀림없이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안정된 달러 본위제 하에서 승승장구하던 미국의 금융 부문은 쪼그라들 것이다. 설령 미국 달러가 선두를 유지하더라도 일부 지역에서는 경쟁자들이 발판을 마련할 것이다. 203-4)


그렇다면 중앙은행 독립을 뒷받침하는 논거가 매우 뚜렷해진 지금 왜 걱정거리가 남았을까? 한 가지 문제는 저인플레이션 시대에 너무 많은 사람이 안정된 인플레이션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중앙은행이 목적을 바꿔 다른 문제(이를테면 지구온난화)를 다루는 게 어떻겠느냐고 묻기 시작했다. 오랜 제로 금리 시대(중앙은행들은 단기 금리를 0이나 심지어 그보다 약간 아래로 끌어내렸다)에 통상적 금리 정책이 마비되면서 많은 진지한 사람들은 인플레이션이 다시는 중대한 우려 사항이 아닐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으며, 중앙은행이 독립성과 발권력을 가지고서 다른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이 커졌다. 진보 진영에서는 연준이 불평등을 줄이고 사회정의를 구현하고 (물론!) 환경을 치유하는 쪽으로 에너지를 더 쏟아야 한다고 아우성쳤다. 물론 이것들은 모두 대견한 목표다. 문제는 중앙은행이 이 중 어느 하나에서라도 주도적 역할을 할 전문성, 정책 수단, 민주적 책임성을 갖췄는가다. 204-5)


현재 미국이 노골적으로 채무불이행을 선언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인플레이션이라는 더 쉬운 길이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미국 시장성 부채의 양은 나머지 모든 선진국을 합친 것과 맞먹는다. 미국 부채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데도 총 연간 이자 지불금으로 따진 부채 상환 비용은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때로는 부채 규모가 증가하는데도 이자 지불금이 감소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것은 주로 세계 금융위기 이후 실질금리가 급전직하한 덕분이었다. 물가조정 10년물 미국 재무부 채권에 대한 수익률은 2012년부터 2021년 말까지 평균 0에 가까웠다. 단기 부채에 대한 실질금리는 뚜렷한 마이너스였다. 재무부 채권에 대한 실질금리가 마이너스라는 것은 채권 보유자들이 ‘안전한’ 부채를 보유하는 특권의 대가를 미국 정부에 치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설령 이자를 받더라도 해마다 인플레이션 때문에 남은 원금과 이자의 구매력이 평가절하되기 때문에 채권 보유자들은 순손실을 입는다. 212-4)


어떤 사람들은 2024년 부채가 GDP의 250퍼센트를 넘어선 일본을 예로 들어 부채가 높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무엇에 대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일까? 미국 정부는 쓸 수 있는 패가 많으며 지배적 통화 발행국으로서 다른 나라보다 더 많이 차입할 수 있다. 그럼에도 채무불이행(가능성이 높진 않지만 현재의 정치 환경에서 배제할 수는 없다), 인플레이션(미국 부채의 대부분이 단기 부채이고 10퍼센트만이 물가에 연동되기 때문에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고서는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수 없다), 금융억압(기본적으로 미국인들에게 직간접 부채 보유를 강제하는 것) 등 기본적 수단은 동일하다. 이 중에서 훈훈하거나 고통이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늘날 중앙은행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더 까다로운 환경을 맞닥뜨린 탓에 앞으로 10년 안에 또 다른 인플레이션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매우 높은 부채는 설령 인플레이션 압박에 일조하지 않더라도 그 밖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223)


미국 부채의 상당 부분을 외국이 보유했다는 점은 일반적으로 달러에 매우 유리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모든 부채를 국내에 보유하는 경우보다 훨씬 취약해진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미국 부채를 보유한 외국인들이 느닷없이 확신을 잃었을 때 발생할 위험 때문에 현대판 ‘트리핀 딜레마’(기축통화 발행국이 기축통화의 국제 유동성을 유지하기 위해 경상수지 적자를 지속하면 기축통화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하는 상충 관계―옮긴이)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트리핀 딜레마와의 유사성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지점은 미국 정부가 외국인을 붙잡아둘 능력이 자국민에 비해 훨씬 적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자국민을 상대로 미국은 금융억압을 실시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규제를 확대하여 은행이 울며 겨자 먹기로 부채를 떠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금융억압은 자국민에게만 부과할 수 있는 일종의 세금이다. 금융억압은 외국인 보유자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돈을 빼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226-7)


행운과 실력은 미국 달러의 전후戰後 궤적을 묘사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등식의 ‘행운’ 부분을 너무 자주 잊어버린다. 러시아가 1960년대 중반 경제를 자유화했다면, 일본이 1980년대 중반 우격다짐에 밀려 통화 절하로 불안정을 자초하지 않았다면, 프랑스가 2001년 그리스를 유로화에 포함하자고 주장하지 않았다면, 중국이 2010년대 온전한 변동환율제를 채택했다면 달러는 여전히 꼭대기에 있었겠지만 오늘날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대안적 현실들 중 어느 것에서든 미국 금리는 더 높았을 것이고 달러의 과도한 특권은 더 적었을 것이다. 달러 패권이 맞닥뜨린 최대 위험은 내부에 있다. 어느 당이 집권하든 마찬가지다. 집권당이 너무 많은 권력을 누리는 게 문제다. 지난 수십 년간 달러 패권이 승승장구하면서 미국 정치인(과 많은 경제학자)들은 초저금리가 미래에도 거의 틀림없이 정상적 규범일 것이라는 착각에 빠졌다. 그들의 위안거리는 고전적인 ‘이번엔 다르다’ 사고방식이다. 231)


역사에서 보듯 세계 금융위기 이후 시기를 풍미한 초저금리는 훨씬 오랜 추세로부터의 일시적 일탈로 보아야 한다. 빠르게 증가하는 부채가 방치되고 대규모 적자를 해소할 정치적 의지가 부족하다면 미국과 전 세계는 평균 실질금리와 인플레이션이 더 높아지고 부채 위기와 금융위기가 더 자주 발생하는 세계 금융 변동성의 시대를 오랫동안 겪을 것이다. 딕 체니 전前 미국 부통령의 ‘적자는 문제가 아니다’ 가설은 금리가 떨어지고 또 떨어지던 시기에는 좋은 생각처럼 보였다. 하지만 금리가 (불황을 제외하고) 정상화되는 지금은 글러먹은 생각이다. 지난 70년에 걸친 세계 통화 체제의 발전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을 단 하나만 꼽자면 그것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고 실제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고삐 풀린 미국 부채 정책이 높은 실질금리와 지정학적 불안정을 계속 맞닥뜨린다면, 정치적 압력 때문에 연방준비제도가 인플레이션을 일관성 있게 길들이지 못한다면 달러는 모두의 문제가 될 것이다.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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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의 딸 - 위대한 과학자를 완성시킨 비밀의 기록 ㅣ 데이바 소벨 컬렉션
데이바 소벨 지음, 홍현숙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제1부 피렌체로


"1610년 1월 초에 갈릴레오는 그 무엇보다 대단한 발견을 했다. 그것은 이른바 궤도를 그리며 목성 주위를 도는, '창세기부터 오늘날까지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네 개의 행성'이었다. 코시모 1세는 1569년 대공의 직위에 오르기 전인 1537년 공작이 되었을 때, 메디치 가를 위한 고전적인 신화를 창출해냈다. 코시모cosimo는 그 이름에 담긴 의미처럼 자신을 지구에 사는 우주cosmos의 화신으로 형상화시켰다. 이 같은 고등 전술로 그는 오랫동안 불편한 연합 관계를 맺어온 다른 유력한 지배층 가문으로부터 권력을 빼앗는 것이 메디치 가의 숙명임을 피렌체 시민들에게 설파할 수 있었다. 왕가의 사실상 우두머리인 코시모 1세는 자신을 로마 주신主神의 이름을 딴 주피터 행성과 동일시했다. 그래서 그가 거주하고 다스리는 시뇨리아 궁을 이 올림피아의 주제를 강조한 프레스코 벽화로 가득 채웠다. 갈릴레오는 자신이 만든 망원경을 베네치아에 바쳤고, 이제 피렌체에는 목성의 위성들을 헌정할 작정이었다."(60)


"갈릴레오의 이전 동료였던 피사 대학의 교수를 비롯한 유명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부동의 우주'에 반하는 새로운 주장의 근거인 이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갈릴레오는 이 같은 주장의 우수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로마로 건너가 자신의 발견을 알리기로 했다." "로마로 건너간 갈릴레오는 교부 클라비우스가 주임 수학자로 재직 중이던 예수회의 중앙 교육 기관인 콜레조 로마노의 인정을 받았고 그로 인해 큰 힘을 얻었다. 교회 측이 천문학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하는 클라비우스와 그의 훌륭한 동료들은 그 망원경을 독자적으로 입수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이제 갈릴레오가 관찰한 내용 모두를 인증해주는 단체 역할을 했다. 이 예수회 소속 학자들은 우주는 불변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믿음을 고수해야 함에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본 증거까지 부인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을 방문해달라는 흔치 않은 초대로 갈릴레오의 영광을 높여주기까지 했다."(70-2)


"『물에 뜨는 물체 혹은 물속에 가라앉는 물체에 관한 논쟁』은 물에 뜨거나 가라앉는 물체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에 대한 도전일 뿐 아니라 태양의 완전함을 손상하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물에 뜨는 물체』를 유럽의 학자들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일종의 공용어인 라틴어로 쓰지 않고 이탈리아어를 사용해 학문적인 전통을 조롱하기까지 했다." "갈릴레오의 이 같은 행동은 동료 철학자들의 분노를 사고 이들에게 모욕감을 안겨주었다. 여러 사람 앞에서 그와 토론을 벌여 패한 피렌체 아카데미의 루도비코 델레 콜롬베 같은 이들은 특히 그 정도가 심했다. 콜롬베는 갈릴레오의 반反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응해 '반갈릴레오'를 선언했다. 반대로 갈릴레오의 지지자들은 '갈릴레오주의자'를 표방했으며 콜롬베의 이름을 조롱하며 그의 얄팍한 철학을 더욱 신랄하게 공격했다. 콜롬베가 이탈리아어로 '비둘기'를 뜻하므로 이들 갈릴레오를 비판하는 무리를 '비둘기 연맹'이라고 불렀다."(80-1)


"1613년 봄 로마에서 린체이 아카데미의 체시 공은 당시 진행 중인 연속물의 일환으로, 벨저가 쓴 상대적으로 짧은 네 통의 편지와 갈릴레오가 쓴 매우 긴 세 통의 답장을 『태양의 흑점과 그 현상에 관한 역사와 증명』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벨저는 한 달도 더 걸린, 태양을 뒤쫓으며 만든 뛰어난 조판으로 책을 아름답게 장식해주었다. 그러나 이 책에 담긴 내용은 갈릴레오와 그의 공공연한 적들 사이에 이미 형성되어 있던 긴장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 책에 대해 토론하는 과정에서 아직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도 새로운 적이 생겨났다. 게다가 코페르니쿠스가 몇 해 전 다른 나라에서 조용히 사망함에 따라 갈릴레오가 태양중심설의 아버지로 인식되고 그로 인해 비난받기 시작했다. 『물에 뜨는 물체』를 공격한 '비둘기 연맹'은 갈릴레오에 반대하고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지지했지만 『태양의 흑점에 관한 편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제 성경이라는 한층 더 높은 권위에 호소하고 나섰다."(95-6)


"교황은 신학 분야의 고문인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추기경을 불러들였다. 그는 조르다노 브루노의 재판 때 종교재판관을 지낸, 뛰어난 지성을 지닌 예수회 수사였다. '이단자의 심판관'인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린체이 아카데미의 체시 공에게 자신은 코페르니쿠스의 견해를 이단으로 생각하며 지구가 움직인다는 주장은 성경에 위배된다고 털어놓은 일이 있었다. 벨라르미노는 약 15년에 걸쳐 여러 사교 모임에서 갈릴레오와 만나 아는 사이였다. 1611년에는 갈릴레오의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들을 직접 보았을 뿐 아니라, 피렌체에서 직접 천문학을 공부한 인물로서 갈릴레오의 업적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고 치하한 바 있었다.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갈릴레오의 유일한 잘못이라고 생각한 것은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가설이 아닌 현실로 대하는 고집이었다. 어쨌든 증거가 없었다. 나아가 추기경은 갈릴레오가 사람들에게 천문학을 가르치는 데 그쳐야지, 성경의 해석에 대해서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119-20)


"1616년 3월 5일, 금서위원회는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에 대한 공식적인 선언을 공표했다. 즉 그의 주장이 '성서에 위배되는 거짓'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교령에는 관계자들의 이름과 이들에게 가하는 조치가 명시되었다. 문제 되는 내용이 수정될 때까지 코페르니쿠스의 책을 일시적으로 금하며 '이러한 주장이 가톨릭교의 진리에 대해 편견을 유포시키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를 성경에 부합시키려는 시도를 한 책만이 이 혹독한 처분에서 벗어났음을 분명히 깨달았다. 교령에도 언급되지 않고 어떤 개인적인 견책도 받지 않은 갈릴레오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사실 그가 지지한 학설은 비난을 받았으나, 그것을 가설로 다루는 것과 언젠가는 그 교령이 효력을 상실할 것이라고 희망을 품는 것은 자유였다. 그는 변함없이 피렌체의 메디치 가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이탈리아 과학의 거장이었다. 그는 3월 11일에는 파울루스 교황과 한 시간 가까이 개인적인 면담을 하기도 했다."(125-6)


제2부 벨로스구아르도에서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갈릴레오에게 처음 편지를 보낸 때는 1611년이다. 이때 그는 갈릴레오에 대해 말하길 장수하여 남들의 삶을 이롭게 해야 할 위대한 능력을 지닌 고귀하고도 독실한 인물로 묘사했다. 이후 몇 년간 이 추기경의 열정은 더욱 불타올라, 1620년에 「위험한 추종」이라는 시를 보내 갈릴레오를 새롭고도 경이로운 천체 현상의 발견자로 칭했을 뿐 아니라 그가 발견한 태양의 흑점에 대해 '강한 자의 마음속에 깃든 두려움'이라는 은유를 쓰기도 했다. 이렇게 찬사 가득한 시상이 담긴 편지를 맺으며 추기경 자신을 '당신의 형제'라고 칭함으로써 각별한 애정을 표했다. 그런 그가 1623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가 되었다." "학문을 사랑했던 우르바누스는 교황청에 지식인들을 불러들였다. 그는 린체이 아카데미의 비르지니오 체사리니 몬시뇨르를 교황의 의전관으로 임명했는데, 체사리니는 새 교황을 환호로 맞이하는 시를 썼으며 갈릴레오의 강의를 들은 후 수학 연구에 헌신해온 인물이었다."(154, 162)


"갈릴레오가 유럽 전역의 서신 왕래자들로부터 전해 들어 알고 있었듯이, 프랑스와 스페인, 독일과 영국의 천문학자들은 1620년 출간된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를 수정해야 한다는 명령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이 교령은 이탈리아의 체면을 구겨놓았다고도 할 수 있다. 우르바누스를 위축시킨 소문도 나돌았는데 내용인즉 가톨릭으로 개종했던 독일인들이 이 교령 때문에 마음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교령이 발령되고 8년이 지났지만 코페르니쿠스 학설에 대한 우르바누스의 견해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이 천문학적인 계산과 예측의 도구로 활용되는 데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태양중심설은 입증되지 않은 단순한 견해로 남아 있었고, 우르바누스는 차후에도 이것이 입증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갈릴레오가 자신의 논리를 펴나가는 데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참작하고자 한다면, 이 학설이 가설이라고 전제하는 데 변함없이 교황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202-3)


"갈릴레오는 1629년 가을 내내 『린체이 회원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대화』의 완성을 위해 매달렸고, 마침내 크리스마스이브에 이 책을 끝마쳤다. 그는 『대화』의 끝에서 『시금관』에서의 매미 철학 즉, 신과 자연은 인간이 관찰하는 자연 현상을 창출한 무한한 수단을 지니고 있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교황 우르바누스를 만족시키기 위한 시도를 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그 심오함을 간단히 표현함으로써 충실한 아리스토텔레스파의 학자들을 좌절시켰다." "갈릴레오는 『대화』의 최종 원고를 검열관에게 제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발간된 갈릴레오의 모든 저작물은 엄격한 검열 과정을 거친 것들로, 그것은 이탈리아의 출판업자들이 이 규범에 가장 철저히 따랐기 때문이었다. 종교재판소의 검사성성이 있는 로마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시금관』도 공식적인 절차를 무난히 통과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대화』의 실질적인 내용이 검열관들의 심각한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으리라는 우려를 떨쳐버리지 못했다."(250-5)


제3부 로마에서


"『대화』는 이내 우르바누스 교황의 분노를 샀다. 그는 전쟁을 벌이느라 돈을 너무 많이 쏟아 부어 빚이 두 배로 불어나고 자신을 폐위시키려는 스페인의 음모가 두려워 편집증 증세까지 보이고 있었다. 바로 이 최악의 시기에 갈릴레오의 책을 접하게 되었다. 1632년 3월 8일 스페인 주재 바티칸 대사인 가스파레 보르자 추기경은 30년 전쟁에서 독일의 신교도에 대항해 필립 4세 왕을 지켜내지 못한 교황의 실책을 공개적으로 책망했다." "1632년 여름 갈릴레오의 책이 로마로 들어왔지만 우르바누스는 읽을 시간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익명의 고문관들이 교황 대신 이 책에 대한 판단을 내렸는데, 그것은 지독한 모함이었다. 로마에 있는 갈릴레오의 수많은 적들은 『대화』를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괘씸하기 이를 데 없는 찬양으로 보았다. 게다가 이미 유럽이라는 가톨릭교의 제일선에서 가톨릭의 열기가 쇠약해져가는 것을 소리 높여 추궁한 교황은 새로 발간된 이 무례한 내용의 책을 벌하지 않고 넘어갈 도리가 없었다."(314-6)


제4부 로마의 메디치 빌라, 토스카나 대사관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백과사전에조차 갈릴레오에 대한 재판이 두 차례 열렸다고 적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재판은 단 한 차례뿐이었다. 이는 1616년 갈릴레오와 벨라르미노 추기경과의 만남을 첫 번째 재판으로, 갈릴레오가 종교재판관들 앞에 무릎을 꿇은, 다소 오래 지속되었던 1633년의 심문을 두 번째 재판으로 본 것이다. 갈릴레오에 대한 재판은 단 한 번뿐이었으나 그럼에도 천 번은 열린 듯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과학에 대한 종교의 억압이자, 권위에 대한 개인주의의 수호, 혁신 세력과 기득권 세력의 충돌, 오래된 신념에 대한 급진적이고 새로운 발견의 도전, 그리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편협함에 대한 투쟁이라는 의미 때문이다. 교회법이나 관습법의 전 시대를 통틀어 그 의미와 파급 효과가 더 큰 재판, 억측과 유감을 더 많이 남긴 재판은 존재하지 않는다. 갈릴레오에 대한 재판은 1633년 봄에 단 한 번 열렸으나, 적어도 증거의 절반과 대부분의 증언은 1616년의 논쟁과 관련된 것이다."(323-4)


"갈릴레오가 토스카나 대사관에서 두 달을 기다린 후인 1633년 4월 12일 화요일, 종교재판소 검사성성의 수석대표가 마침내 심문을 받으러 오라고 그를 소환했다." "〈저는 그 책에서 지구가 돌며 태양은 고정되어 있다는 견해를 지지하지도 옹호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코페르니쿠스의 의견에 반하는 의견을 펴고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취약하고 설득력 없음을 입증해 보였습니다.〉 갈릴레오의 마지막 증언은 그의 곤란한 상황을 잘 요약해 보여준다. 이처럼 말을 얼버무린 데 대해 그를 비난하기는 쉬울 것이다. 이날의 심문이 끝날 무렵 그는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분명히 인식했으며 자신을 방어할 그럴듯한 이유를 찾았을 수도 있다. 니콜리니 대사가 그에게 순종적인 태도를 보이고, 종교재판관들이 바라는 태도를 꾸며 보이라고 경고한 터였다. 그러나 갈릴레오가 자신이 무고하며 진실하다고 믿었던 것은 재판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가 쓴 편지를 보면 명백히 알 수 있다."(338, 351-2)


"한편 로마로 돌아온 우르바누스 교황은 갈릴레오의 사건에 대해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는 검사성성의 종교재판관들이 친갈릴레오파와 반갈릴레오파로 분열되어 있음을 느꼈으며, 그 책으로 인해 무지에서 깨어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다른 이들은 갈릴레오의 감상적인 변명에서 부정직함을 감지하고 분노했다. 그러나 적어도 갈릴레오가 직접적인 지시를 어겼다는 사실에는 모두 동의했다." "교황 우르바누스 8세는 6월 16일, 추기경인 종교재판관들과의 회의를 주재했다. 교황은 1615년 이 철학자에 대한 최초의 비난에서부터 이 책의 출간, 그리고 최근의 변명과 선처를 호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갈릴레오의 사건을 요약한 정식 보고서를 읽었다. 그리고 『대화』를 쓴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고문이라는 방법까지 동원해 갈릴레오의 '의도'를 심문하라고 지시했다. 교황은 이 책은 어떻든 비난을 면할 수 없으며 금지되어야 한다고 단언했다. 갈릴레오는 감금되거나 참회를 해야 할 판이었다."(365, 374)


"6월 22일, 갈릴레오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판결이 공식 발표되었다. 며칠 후 바르베리니 추기경은 갈릴레오의 감금 장소를 검사성성의 지하 감옥에서 로마의 토스카나 대사관으로 바꿈으로써, 그에 대한 판결을 완화하는 데 성공했다. 우르바누스는 사면을 해달라는 청원은 거절했지만, 갈릴레오로 하여금 마침내 로마를 떠나도록 해주었다." "갈릴레오에 대한 굴욕적인 판결문은 교황의 지시에 따라 파도바에서 볼로냐, 밀라노에서 만토바, 피렌체에서 나폴리와 베네치아 그리고 프랑스의 플랑드르와 스위스에 이르기까지 요란스럽게 고시되고, 종교재판관들에 의해 큰 소리로 낭독되었다. 이에 따라 이 지역의 철학 교수와 수학 교수들은 갈릴레오에 대한 재편 결과에 경각심을 느꼈다." "이 사건들로 인해 1633년 여름에는 금지된 『대화』를 중심으로 암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사실 『대화』를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 중 그것을 내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책의 가치가 높아감에 따라 새로운 귀의자들도 생겨났다."(384-6)


제5부 시에나에서


"시에나의 대주교인 아스카니오 피콜로미니는 두 명의 교황과 수많은 학자를 배출해낸 뛰어난 가문 출신으로, 그 자신이 수학을 공부하였으며 갈릴레오의 오랜 찬미자였다. 재판이 끝난 후 피콜로미니는 갈릴레오의 보호를 자청했다. 니콜리니 대사는 4월에 검사성성의 심문을 받고 돌아온 갈릴레오를 '산 사람이라기보다는 죽은 사람에 가까워' 보였다고 묘사했다. 이후로 몇 주가 더 지나고 충격까지 받은 그가 7월에 시에나에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겠는가? 그는 부당한 판결로 고통 받은 나머지 여러 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거처에서는 흐느껴 우는 소리와 중얼거리는 소리,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피콜로미니는 갈릴레오의 상처 입은 영혼을 회복시켜 과학적인 연구를 계속해나갈 수 있게 해주기로 결심했다. 사실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소로부터 유죄판결을 받은 굴욕을 딛고 일어나, 다른 책(『두 개의 새로운 과학』)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피콜로미니의 열성적인 호의에 힘입은 바 크다."(393–5)


"갈릴레오는 피사 대학에 교수로 재직할 때 운동에 관한 기초 논문에 처음 착수했으나 책을 펴내지는 않았다. 그런 후 파도바에서 20년간 살면서 이 책을 쓰기 위한 새로운 실험 원리를 세웠는데, 즉 가르치는 의무를 다하고 작은 집에서 군사용 컴퍼스 제조 사업을 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진자 운동을 측정해 그 주기의 수학적 법칙을 이끌어냈으며, 경사면에 청동 공을 수도 없이 굴려 자유낙하 시의 가속률을 얻어냈다." "갈릴레오는 사물이 '왜' 움직이는가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파 학자의 모든 담론을 일축하고 고통스러운 관찰과 측정을 통해 '어떻게'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길을 개척할 생각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전 세대의 철학자들이 인식조차 하지 못한 현상을 발견하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갈릴레오는 던져지거나 발사된 탄환 등이 공중을 지나는 경로는, 그의 선배들이 말한 것처럼 단순히 '어느 정도 곡선을 이루는 선'이 아니라 매번 정확히 포물선을 그린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410-2)


"갈릴레오는 후에 '지금까지 펴낸 책보다 『두 개의 새로운 과학』이 낫다'고 평가하게 된다. 그 이유는 이 책에 '내 모든 연구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온 결과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저항과 운동에 관해 자신이 밝혀낸 사실이 자신에게 불멸의 명예를 안겨준 온갖 천문학적인 발견을 능가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수한 망원경을 만들어 그것으로 하늘을 처음 관찰한 자신을 자랑스러워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자신의 위대한 천재성은 세계를 면밀히 관찰해, 그곳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수학적인 비율의 언어로 묘사하는 데 있다고 믿었다. 그런 가운데 로마의 니콜리니 대사는 갈릴레오가 시에나에서 교황과 검사성성에 복종하는 모범적인 죄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교황 우르바누스 8세에게 보고했다. 우르바누스는 이 같은 견해를 시에나의 성직자들이 보낸 비난과 비교 검토했다. 그에 따르면 피콜로미니는 갈릴레오를 이단자임을 고백한 죄인이기보다 귀한 손님으로 모시고 있었다."(443-5)


제6부 아르체트리에서


"경사면에 공을 굴리는 실험은 갈릴레오가 『두 개의 새로운 과학』에서 여러 원리와 함께 소개한, 낙하의 진실에 대한 지루하지만 성공적인 전주곡 역할을 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법칙을 몇 개의 문자와 상징으로 줄여 표현할 수 있는 전통적인 대수 분석 방법에 따르지 않고, 기하학적인 비율로 표현했다." "〈총탄이 가장 멀리까지 나가는 경우는, 양각을 45도로 했을 때 또는 포수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4분원의 여섯 번째 점인 지점을 통과할 때라네. 그러나 다른 이들의 말을 통해서나 반복적인 실험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아는 것보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이유를 아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네.〉" "원인을 형이상학적으로 고찰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과학의 현실적인 적용과 그 가치에 대한 갈릴레오의 이 같은 강조는 당대의 대다수 철학자들과는 동떨어진 행보였다. 아리스토텔레스파의 철학자들이 사물의 본질과 자연 환경에 대해 논의하는 동안, 갈릴레오는 시간, 거리, 가속 같은 측정 가능한 실체를 추구했다."(456-8)


"마침내 우르바누스는 은혜를 베푸는 척하며 갈릴레오의 감금 장소를 아르체트리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 같은 조치는 판결을 약화시켰다기보다는 오히려 강화한 것이었다. 시에나의 환경이 고급 살롱의 분위기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교황은 이후로 갈릴레오의 사회적 접촉을 제한할 것과 가르치는 행위 일체를 영원히 금할 것을 검사성성에 권고했다." "그럼에도 1634년 8월, 갈릴레오는 동료 수학자들과 다시 활발한 서신 왕래를 하기 시작했다. 가을에는 미완의 원고인 『두 개의 새로운 과학』에 다시 매달렸다." "네덜란드는 신교를 믿는 국가였으므로 네덜란드인 출판업자 엘체비르는 로마 종교재판소의 보복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아르체트리에서 여전히 불안에 휩싸여 있던 갈릴레오는 최후의 순간까지 이 책의 출판 사실을 모른다고 잡아뗐다. 프랑스 대사인 프랑수아 드 노아유에게 바친 헌정사에서조차, 그는 자신의 원고가 어떻게 외국의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는지 놀랍다며 짐짓 꾸며냈다."(463-4, 472, 478)


"1638년 6월에 출간된 이 책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저자인 갈릴레오는 책이 출판된 지 수주일이 지난 뒤에 단 한권을 받을 수 있었을 뿐이다. 게다가 그 책이 수중에 들어왔을 때, 그는 책을 읽을 수도 볼 수도 없었다. 그의 두 눈은 이제 백내장과 녹내장으로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1637년 7월 그의 오른쪽 눈이 처음 시력을 잃게 되자 『두 개의 새로운 과학』에 닷새째 날을 추가하려 했던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왼쪽 눈은 이듬해 겨울에 시력을 잃었다. 오직 한쪽 눈만으로 하늘을 관찰하고 이전에 써놓은 글과 그림을 정독했던 이 황혼기에, 그는 별들의 지름과 천체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는 최상의 방법에 관해 짧은 마지막 논문을 썼다." "〈나의 놀라운 관찰과 명징한 증명으로, 지난 모든 세기의 현자들이 일반적으로 인지했던 한계보다 백 배 아니 천 배 더 커진 이 우주가, 이제 내게는 너무도 작게 줄어들어 내 몸의 조그마한 틀만큼이나 작아져버렸다네.〉 갈릴레오는 엘리아 디오다티에게 이렇게 토로했다."(481-3)


"이렇듯 쇠약해진 갈릴레오는 1638년 10월, 함께 살 가장 완벽한 반려자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는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지닌 피렌체 출신의 16세 젊은이 빈첸초 비비아니였다. 비비아니의 학문적 탁월함은 페르디난도 대공의 눈에 띄었고, 대공은 그에게 갈릴레오의 조수로 갈 것을 명했다." "1654년 비비아니가 쓰기 시작한 갈릴레오의 전기에는, 연로한 스승이 자유롭고 두서없이 이야기를 하고 젊은 제자는 온 정성을 다해 귀를 기울이는, 두 사람이 단둘이 누린 시간을 초월한 즐거운 한때가 묘사되어 있다. 갈릴레오의 일생에서 아주 중대한 몇몇 순간을 추적해,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고 거의 신화적인 것으로 만들기까지 한 인물은 다름 아닌 비비아니였다. 그는 갈릴레오가 의학을 공부했던 학생 시절, 피사 대성당에서 미사가 거행되는 동안 흔들리는 전등불을 바라보다 진자의 법칙을 깨달은 것이라든지, 밑에 교수와 학생들이 모여 있는 피사의 사탑 꼭대기에서 포탄을 굴려 떨어뜨린 장면 등을 생생하게 살려냈다."(4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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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비스마르크 - 전환의 시대 리더의 발견
에버하르트 콜브 지음, 김희상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3월
평점 :
절판


프롤로그_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주도하다


1815년 이후 35개의 제후국과 네 곳의 자유도시 중 단 몇 곳만 헌법과 의회를 갖추었는데, ‘독일연방’은 이들의 느슨한 결합이었다. 독일연방은 19세기 말쯤 5천5백만 명의 인구와 계층을 아우르는 평등한 선거권(남성의 선거권)을 통해 선출된 제국 의회로 국가와 사회의 제도를 정비했으며, 완전한 정당 체제를 자랑하는 독일제국이 됐다. 제국 수도 베를린은 1815년 20만 명의 인구를 가진 프로이센의 수도였으나, (1815년 4월 1일 태생인) 비스마르크가 사망한 1898년에는 약 2백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는,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였다. 5천 명 이상 규모의 행정구역에 사는 인구가 1815년에는 불과 10퍼센트였으나, 19세기 말에는 50퍼센트를 웃도는 수준으로 늘어났다. 농업국가 독일은 19세기를 거치며 강력한 산업국가로 발돋움했다. 1900년쯤에 이르자 독일은 철강과 제련 산업에서 대영제국의 규모를 능가했으며 무엇보다도 ‘새로운 산업’인 화학과 전기공업에서 선두를 달렸다. 10)


I. 알트마르크 융커의 젊은 시절(1815~1847)


1845년 아버지가 74세를 일기로 운명한 뒤, 비스마르크는 작센 지방의회의 보궐선거에서 기사 작위 의원으로 선출됐다. 또 예리초프Jerichow군의 군수직도 노려볼 만한 영향력을 쌓았다. 이에 그치지 않고 비스마르크는 지역 차원을 넘어서는 활동 범위, 곧 영주재판권(Patrimonialgerichtsbarkeit)을 새롭게 꾸미느라 벌어진 정치 대결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관료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영주의 독립성을 보장해주어야 한다고 강변하고, 정부가 권한을 넓혀 간섭하는 것에 단호히 반대했다. 이 협상에서 비스마르크는 강력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보수적인 영주들, 특히 마그데부르크의 고등법원 원장 에른스트 루트비히 폰 게를라흐Ernst Ludwig von Gerlach(1795~1877)와 밀접하게 협력했다. 게를라흐는 아돌프 폰 타덴과 사돈 간이었으며, 프로이센 보수파의 선봉으로 활약하던 인물이다. 이런 활동으로 비스마르크는 정치가로서 자신의 미래 전망을 높게 평가했던 게 분명하다. 21)


1846년 비스마르크와 요하나 폰 푸트카머는 인생을 함께하기로 다짐했다. 그러나 경건주의에 충실한 요하나의 부모는 비스마르크를 사위로 맞는 걸 전혀 반기지 않았다. 1847년 1월 초 그는 과감하게 포메른의 외진 구석인 라인펠트Reinfeld의 요하나 집으로 찾아갔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약혼은 완벽히 성사됐다. 비스마르크는 요하나에게서 자신이 필요로 한 여인을 발견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평생 충실했으며 솜씨 좋게 집안을 꾸리면서 자녀를 사려 깊게 돌보았고, 무엇보다도 남편의 세계관에 자신을 무조건 맞추었으며, 어떤 결정을 하든 충직하게 따랐다. 남편의 친구는 그녀의 친구였으며, 남편의 적은 자신의 적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비스마르크는 자신에게 맞는 삶을 탐색하느라 매우 불안하고 불확실한 상황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약혼을 비롯해 1847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그는 안정된 토대 위에서 자신의 뜻을 안팎으로 활발히 펼치며 그동안 굶주린 야망을 달랠 기회를 잡았다. 22-3)


II. 영주에서 정치가로(1847~1851)


1847년 여론의 가장 뜨거운 관심을 모은 사건은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소집하겠다고 선포한 ‘통합신분제의회’였다. 모든 지방 토호들을 대상으로 소집된 이 회의에는 대략 6백여 명의 남자들이 참가할 예정이었다. 4월 11일 왕이 ‘통합의회’를 개회했다. 폰 브라우히티슈Von Brauchitsch 가문의 대표가 갑작스러운 병으로 참가 자격을 포기하고 나서야 비로소 비스마르크는 5월 초 의회에 참가할 기회를 잡았다. 의회에 입성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5월 17일, 32세의 최연소 의원은 첫 데뷔무대에서 일대 소동을 일으켰다. 비스마르크는 마치 두 눈으로 보는 것처럼 선명한 그림을 그려내는 표현력에 재치와 신랄한 촌철살인을 담아내는 연설로 청중을 휘어잡을 줄 알았다. 심지어 그의 견해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도 연설만큼은 귀담아들었다. 보수 진영에 재능 있는 연설가의 씨가 적었던 덕에 젊은 의원은 계속 연설을 쏟아내고 인맥을 확장하며 빠른 속도로 ‘정파’의 지도급 인사로 발돋움했다. 26-7)


1850년 5월 오스트리아는 제후 펠릭스 슈바르첸베르크Felix Schwarzenberg(1800~1852)의 지휘 아래 혁명 시위를 진압하고 유럽 내 정치적 입지를 다시 강화했다. 오스트리아는 프랑크푸르트의 독일연방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시도했는데, 합스부르크 왕조를 배제하고 독일연방을 이룩하고자 하는 프로이센의 시도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이런 일촉즉발 상황에서 슈바르첸베르크는 러시아의 지원을 확신했다. 러시아 차르에게 프로이센 중심의 연합 정책은 일정 부분 ‘혁명’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헤센 선제후국’ 문제로 군사적 충돌까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프로이센 정부가 충돌을 피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라인펠트에서 이 소식을 들은 비스마르크는 환호했다. 11월 29일 슈바르첸베르크는 오스트리아를, 오토 폰 만토이펠은 프로이센을 각각 대표해 올뮈츠에서 협약을 체결했다. 협약의 내용은 프로이센이 연합을 포기하고, 프랑크푸르트 의회로 복귀한다는 것이었다. 34-5)


프로이센 여론은 ‘올뮈츠 협약’을 굴욕에 가까운 정치적 패배, 일종의 ‘수치’로 받아들였다. 정부는 의회에서 협약 체결을 합리화해야만 하는 곤혹스러운 지경에 처했다. 1850년 12월 3일에 열린 하원 회의는 말 그대로 비스마르크의 독무대가 됐다. 이 무대가 그의 출세를 결정지었다고 하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는 더 이상 융커의 순전한 이해관계만을 대변하지 않으며, 국가이성에 방향을 맞춰 진정한 국인國人이 무엇인지 헤아릴 줄 아는 언어를 구사한다. 그의 이런 태도는 이미 저 교조적인 보수, 게를라흐를 중심으로 한 극단적인 보수의 원칙 위주 정치로부터 확연히 거리를 둔 자세이다. 1851년 봄에 프랑크푸르트로 프로이센의 의회 대표를 다시 파견하는 일이 시급해지자, 비스마르크의 이름이 명단에 올랐다. 4월 말 왕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무수한 에움길을 거쳐 그동안 36세가 된 남자는 자신이 대학생 시절 꿈꿔온 목표를 이루었다. 그는 외교관이, 그것도 정상급 외교관이 됐다. 35-6)


III. 프랑크푸르트,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리의 외교관(1851~1862)


비스마르크는 프랑크푸르트로 파견됐을 당시 오스트리아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비스마르크가 프랑크푸르트로 보내진 까닭은 그가 ‘혁명’의 확실한 적대자라는 면모를 보였고, 올뮈츠 협약이 맺어질 때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협력을 이끌 대변자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왕과 궁정당은 정확히 이런 이유로 비스마르크를 선택했다. 오스트리아가 보수라는 공동의 이해관계에 연대감을 보이며, 1848년 이전처럼 프로이센을 동등하게 대우하면서 의회를 이끌어 가리라는 비스마르크의 예상은 빠르게 실망으로 바뀌었다. 오스트리아의 정치적 속내는 전혀 다른 목표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유형의 오스트리아 패권 정치”의 대표자인 제후 슈바르첸베르크의 주도 아래 합스부르크 왕조는 1848~1849년 혁명으로 겪은 위기를 보란 듯 이겨내고 유럽 중부를 장악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오스트리아의 이런 헤게모니 정책의 관점에서 독일연방은 그저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40-1)


비스마르크는 연방의회에서 오스트리아의 우위를 확실하게 흔들며, 독일연방 내에서 프로이센의 동등한 위치를 인정받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권위에 몇 차례 흠집을 낼 수는 있었다. 거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건은 세 가지다. 오스트리아 쪽이 희망한 연방의 통일된 언론 관련 법안, 빈이 베를린에 목줄을 걸려 했던 이 법안은 끝없는 논쟁 끝에 결국 오스트리아에게 아무 실익이 없는 형식적인 수준으로 의회를 통과했다. 1848년에 창설된 독일 함대의 해체를 둘러싼 갈등이 오랜 줄다리기 끝에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났다. 가장 중요했던 사건은 독일의 교역 정책에서 누가 선도적 위치를 점하는가 하는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다. 오스트리아의 관세동맹 가입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1853년에 고작 12년의 기한을 가지는 교역 계약만 체결됐다. 1854년 관세동맹이 소독일 중심으로 하노버까지 확장된 것은 경제와 교역, 정치 분야에서 프로이센이 합스부르크 왕조를 누른 매우 중요한 승리이다. 43)


1854년 크림전쟁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 독일연방이 서유럽 강대국들과 연합하는 노선이 매력적으로 보이게끔 안간힘을 썼다. 프로이센 대표 비스마르크는 불굴의 집요함과 섬세한 수완으로 1855년 1월 과반수로 오스트리아가 상정한 안건을 부결시켰다. 연방의회는 러시아를 상대로 군대를 동원해달라는 오스트리아의 요구 대신, 러시아든 서유럽 강대국이든 연방을 위협할 시 전쟁을 벌일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1815년 이후 그리고 혁명의 해인 1848~1849년을 넘어서도 건재했던 유럽 강대국들의 조화는 이 전쟁으로 혼란에 빠졌다. 세 마리의 검은 독수리(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가 구축했던 동맹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프랑스와 영국을 신뢰할 만한 동맹으로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뤄진 단절은 그동안의 모든 권력 구도를 뒤흔들어 유동적으로 만들었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첨예한 대립은 유럽 권력 구도에서 프로이센에게 더 좋은 기회를 잡도록 해주었다. 44-5)


프로이센 정부는 1857~1858년에 위중한 변화에 직면했다. 이 변화는 비스마르크의 향후 경력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1857년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불치의 뇌졸중에 걸려 국가를 통치할 수 없는 지경에 빠졌다. 1858년 10월 초 왕세자 빌헬름은 정부 결정과 의회 동의를 얻어 섭정으로 권좌에 오름으로써 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그는 즉각 새 내각을 구성했다. 빌헬름은 정부가 시대의 정당한 요구와 필요를 ‘세심하게 개선하는 손길’로 돌볼 것이라고 하면서, 프로이센이 독일에서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자세’를 추구하는 정책을 펴고, 군대를 쇄신하는 재편성을 실행하겠다고 선포했다. 새로운 시대’의 출범과 더불어 비스마르크는 영향력을 잃었다. 1859년 1월 베를린에서 그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파견하겠다는 결정이 내려졌을 때, 오스트리아 대표는 이 사실을 알고 비스마르크 앞에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1859년 2월 말 비스마르크는 연방의회 의사당에서 퇴임사를 했다. 48-9)


1862년 5월에 열린 의회선거에서  자유주의자들은 비록 다양한 그림자가 드리우기는 했지만, 압도적이며 빛나는 승리를 자축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전체 353석 가운데 292석을 차지했다. 이로써 왕 빌헬름이 최우선 과제로 꼽았던 군대 개혁이 위기에 처했다. 2월에 전쟁 장관 알브레히트 폰 론이 발의한 입법안은 군대 예산 증가, 육군 강화, 효율적인 3년 복무기간, 사실상 폐지를 목표로 한 향토방위군 편제 개혁을 목표로 제시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복무 기간과 향토방위군 편제 개혁에 격렬한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왕은 군대 개혁안의 핵심 쟁점만큼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고집했기 때문에 군대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헌법 갈등으로 비화했다. 비스마르크는 9월 22일 바벨스베르크 공원에서 이뤄진 장시간 대화 끝에 의회의 저항을 무릅쓰고 군대 개혁을 실행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결심으로 비스마르크는 왕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었다. 왕은 이날 바로 그를 수상으로 임명하기로 했다. 53-5)


IV. 위대한 프로이센과 제국 창설자(1862~1871)


비스마르크가 임명된 9월 23일 의회는 308 대 11이라는 압도적인 표 차이로 군대 개혁을 위해 정부가 요구한 예산안을 거부했다. 비스마르크의 첫 번째 공식 입장 표명으로, 내각은 9월 29일 1863년도 예산안을 철회했다. 그다음 비스마르크는 의회 예산위원회에 출석해 기념비적인 인상을 남겼다. “독일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프로이센의 힘을 주목합니다. (···) 프로이센은 힘을 모아 이미 몇 차례 놓친 유리한 순간에 대비해야만 합니다. 빈조약에 따른 프로이센 국경은 건강한 국가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시대의 중요한 문제는 말과 표 대결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말과 표 대결은 1848년과 1849년의 위중한 실수였습니다. 우리의 결단은 철과 피로써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오늘날까지도 비스마르크라는 이름에 붙는 ‘철과 피(철혈재상)’는 폭풍과도 같은 분노를 일으켰다. 자유주의의 신문들은 국내 정치의 갈등을 향한 시선을 외교 무대로 돌려 무력 통치를 꾀하는 수작이라며 한목소리로 비판했다. 58-9)


한편 이미 오래전부터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둘러싸고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위기가 1863년 말에 확 불꽃을 일으키며 심각한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 위기로 연방의 정세가 새롭게 바뀌며 판도를 결정할 카드 패를 다시 섞었다. 11월에 덴마크 제국 의회는 슐레스비히 공국(덴마크 왕이 ‘동군연합同君聯合’으로 다스리던 공국)을 덴마크 국가로 합병한다고 결정했다. 비스마르크와 오스트리아는 합심해 이 요구를 거부했다. 비스마르크는 덴마크와 프로이센의 갈등에 유럽 강대국들이 개입하는 것을 막으려 그런 결정을 내렸을 뿐이다. 오스트리아 정부도 같은 이유로 비스마르크와 보조를 맞춘 것이 분명하다. 오스트리아 내각은 철저히 합스부르크 왕조의 이해관계와 국가이성에 맞춰, 1863년 말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에서 프로이센과 보조를 맞추기로 결정했다. 이는 중소 공국들의 입장을 깨끗이 무시한 처사였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동맹으로 독일연방 정치에서 비스마르크의 입지가 급격히 확장되었다. 65)


1866년 4월 말 오스트리아의 카이저 프란츠 요제프는 군대에 동원령을 내렸다. 빈 내각은 엘베강 지역 공국들의 운명을 결정할 책임은 독일연방이 져야 한다고 선포했다. 이는 사실상 ‘가슈타인 협약’의 폐기 선언이었으며, 이미 “일종의 선전포고”였다고 로타르 갈은 썼다. 이후 몇 주 동안 시도된 마지막 대화, 양강 노선을 유지해 평화를 유지하자는 물밑 대화(‘미션 가블렌츠Mission Gablenz’)를 프로이센이 추진했지만, 오스트리아가 이를 거부했다. 5월에 빈은 나폴레옹 3세의 회의 제안(프로이센은 이미 수용한 제안)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6월 12일 합스부르크 왕조는 프랑스와 비밀 협약을 맺어 오스트리아가 승리하더라도 베네토는 포기하는 반면, 오스트리아가 독일 내의 영토를 차지해 프로이센에 손해를 입히더라도 프랑스는 중립성을 지키며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더 나아가 프로이센이 차지한 라인강 서쪽 지역을 프랑스가 간섭하기 좋은 독립국으로 만든다는 합의도 이루어졌다. 70)


# 가슈타인 협약(1865년 8월 14일 조인) : 독일 공국들의 지배권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공동으로 가지는 형태를 지속하되, 임시적인 소유권 분할에 합의한 협약. 이로써 프로이센은 슐레스비히를, 오스트리아는 홀슈타인을 각각 차지했다.


앞선 전투의 승리에 이어, 7월 3일 쾨니히그라츠의 전투는 몰트케의 천재적인 전술과 오스트리아 전장총보다 우월한 성능의 프로이센 격침발사총 덕분에 프로이센군의 압승으로 끝났다. 오스트리아 군대는 괴멸 수준으로 패배했다. 그러자 카이저 프란츠 요제프는 나폴레옹 3세에게 중재역을 맡겨 즉각 휴전 협상을 제안했다. 비스마르크가 중시하는 두 가지 핵심은 독일 북부에서 프로이센의 권력 위상을 다지는 것, 그리고 오스트리아가 독일연방에서 빠지는 것이었다.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에게 영토를 요구하지 않는 조건으로 카이저 프란츠 요제프에게 독일연방의 해체를 인정해줄 것을 요구했다. 카이저의 동의는 “오스트리아 황제 국가가 참여하지 않는 새로운 독일의 탄생”에 기여한다고 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소독일 중심의 통일을 인정하고, 프로이센이 마인강 북부에 새롭게 다질 국가에 일절 간섭하지 않으며, 프로이센에게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공국의 소유권을 양도하기로 약속했다. 71-2)


하노버, 헤센 공국, 나사우,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그리고 자유도시 프랑크푸르트 등을 전면 합병함으로써 프로이센 국토는 예전보다 상당히 커졌다. 세 곳의 정통 선제후選帝侯 가문들이 영토를 잃게 된 것은 빌헬름 1세에게 적잖은 충격이었다. 러시아의 차르 역시 이런 혁명적인 변화를 ‘왕조의 연대’를 공격하는 행위라며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과 긴밀히 맞물리는 영토, 예전 면적보다 5분의 1이 늘어난 영토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만 있다면 그런 염려는 불식해도 좋았다. 이로써 독일의 주도권 다툼은 끝났다. 1866년이 유럽 중부 역사를 결정한 해라는 말은 조금도 과언이 아니다. 프랑스는 라인강 서쪽 지역을 넘길 것과, 룩셈부르크와 벨기에를 단독으로 다스릴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비스마르크는 시간을 끄는 노련한 전술로 일단 결정을 유예해가며, 프랑스의 지나친 요구를 함께 막자고 설득하면서 8월에 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 바덴과 보호 및 방어동맹을 맺었다. 72-3)


독일 민족운동이 1866~1867년의 성취를 일종의 과도기로 보았으며, 전쟁을 불사하고서라도 독일통일을 완성해야 한다고 요구한 반면, 비스마르크는 주도면밀한 신중함을 잃지 않았다. 그가 무엇보다도 중시한 것은 연방의 내적 구조를 튼튼히 다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비스마르크는 남부 독일 국가들을 상대로 신중한 유화정책을 펼쳤다. 일단은 보호와 방어동맹 그리고 관세동맹을 맺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보았다. 이 두 가지 동맹이야말로 마인강을 이어주는 두 개의 든든한 다리이기 때문이다. 로타르 갈은 비스마르크가 중시한 것을 이렇게 정리했다. “양쪽의 결속, 구조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군대 제도와 상업과 관세정책, 위기 시 자동적으로 기능할 동맹이 전역에 걸쳐 동일한 효과를 갖도록 법제화에 신경 썼다.” 이런 방식으로 차근차근 다진 조직은 갈수록 촘촘해졌다. 결국 독일의 모든 왕조와 정부는 자국 이익과 국력 제고라는 목적으로 북독일 연맹에 가입했다. 77)


1870년 7월 숨 가쁘게 달아오른 위기의 출발점을 제공한 인물은 호엔촐레른 왕조 적통으로 스페인 왕의 후보에 오른 레오폴트 폰 호엔촐레른Leopold von Hohenzollern(1835~1905)이다. 스페인은 1868년 9월에 국민 대다수가 지지한 군부 쿠데타를 겪었다. 군부는 복고적 성향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여왕 이사벨 2세Isabel Ⅱ가 스페인을 떠나도록 강제했다. 이후 왕을 옹립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빗나가자 스페인 정부 수반인 육군 원수 후안 프림Juan Prim은 1870년 2월 호엔촐레른 왕조의 왕자 레오폴트에게 스페인 왕관을 제안했다. 비스마르크는 호엔촐레른 왕조에게 왕위를 받아들이라고 단호하게 충고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압력으로 7월 12일 레오폴트의 왕 후보 지명은 철회됐다. 이로써 프랑스는 호엔촐레른 출신의 스페인 왕을 막으려는 목적을 이루었으며, 어느 쪽으로 보나 당당한 외교적 성공을 맛보았다. 그러나 파리의 실권자들과 이들에게 자극받은 여론은 이 성공으로 만족해하지 않았다. 79-80)


후보 지명 철회 선언 이후 프로이센은 이 문제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래서 파리 내각은 이 선언이 발표되고 난 뒤 프로이센 왕이 사안에 개입했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프랑스 대사 베네데티는 프로이센 왕에게 호엔촐레른 왕자를 다시 후보로 내세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구속력 있는 확약을 받으라는 지시를 받고 요양을 위해 바트엠스Bad Ems에 머물던 빌헬름을 찾아갔다. 프랑스 정부는 스스로 모든 퇴로를 끊어버렸다. 요구한 성명이 거부당한다면 파리 정부는 유럽 강대국들 눈에 패배자로 전락하고 말 것이며, 이렇게 된다면 파리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질지는 불 보듯 환한 일이다. 나폴레옹 3세와 그의 각료들은 군 동원령과 선전포고를 통해서만 프랑스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7월 14일의 동원령 결의로 전쟁은 불가피해졌다. 그다음 7월 19일 베를린에 프랑스 정부의 공식적인 선전포고가 전달됐을 때, 이미 양측은 전선으로 군대를 속속 집결시켰다. 80-1)


1871년 1월 28일의 휴전협정은 즉각 프랑스 국민의회를 선출해 이 기관을 프랑스 국가의 합법적 대표로 삼는다는 조항을 포함했다. 2월 5일에 선출된 국민의회는 아돌프 티에르를 ‘행정부 수반’으로 임명했다. 티에르와 파브르가 비스마르크와의 협상을 통해 끌어낸 ‘베르사유 잠정 평화조약’은 2월 26일에 양측이 서명을 했으며, 3월 1일에 국민의회의 비준을 받았다. 프랑스는 50억 프랑의 전쟁배상금 외에도 영토를 할양해야만 했다. 알자스 로렌의 일부 지역은 독일제국의 땅으로 합병됐다. 마침내 비스마르크는 남독일 국가들의 정부가 북독일연방에 가입하겠다고 선언한 타협안을 도출해내는 데 성공했다. 이른바 ‘11월 협약들Novemberverträge’로 북독일연방 헌법은 가벼운 수정을 거쳐 독일제국의 헌법이 됐다. 드디어 소독일 민족국가가 탄생했다. 바이에른과의 협약에 서명한 뒤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부하 관료들을 돌아보며 감동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독일통일을 해냈소, 그리고 카이저 옹립도.” 82-4)


V. 제국의 안정화와 평화 수호(1871~1890)


1871년 이후 평화 수호는 비스마르크 외교정책의 최고 목표였다. 1871년 이후 유럽 평화는 한편으로는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복수 욕구로, 다른 한편으로는 발칸반도에서 서로 충돌하는 러시아와 합스부르크 왕조의 이해관계로 위협을 받았다. 프랑스의 복수 의지와 관련 모든 유럽의 정치가를 비롯해 프랑스의 정치가 역시 명확히 간파했던 사실은, 프랑스가 홀로 독일제국을 누르려는 시도를 감행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도전은 다른 강대국들과의 연합으로만 가능했다. 비스마르크는 그래서 다른 강대국들과 연합해 프랑스를 고립시키려는 정책에 집중했다. 그가 보기에 이런 정책은 프랑스가 다시 왕정으로 복귀하지 않고 공화국으로 남을 때에만 실현될 수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러시아나 합스부르크 왕조 같은 강대국을 등에 업지 못하도록 독일제국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이의 동맹을 맺으려 분주히 노력했다. 이런 노력은 1873년 ‘삼제동맹’으로 결실을 맺었다. 91-2)


1875년 여름부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 오스만제국이 지배하는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이 속속 봉기에 합류했다. 이 저항운동을 오스만제국이 잔인하게 짓밟자 러시아는 1877년 4월 전쟁을 선포했다. 러시아와 튀르크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 뒤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구상을 아들 헤르베르트에게 받아쓰게 했다. ‘키싱겐 구술(Kissinger Diktat)’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진 이 기록에서 비스마르크는 가능한 경우들 가운데 ‘최악’이라 여기는 것을 “코슈마르 드 코알리숑cauchemar des coalitions”, 곧 독일을 겨눈 유럽 강대국들의 “결탁이라는 악몽”이라고 부르면서, 자신이 가장 중시하는 외교정책의 원칙을 정리했다. 자신이 그리는 그림은 “그 어떤 영토의 확보가 아니라 전체적인 정치 상황,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모든 강대국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정치 상황이며, 혹시라도 강대국들이 우리를 겨누고 결탁하는 일만큼은 막을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93-4)


국제 갈등 상황이 산스테파노 평화조약으로 예봉이 꺾이고, 핵심 쟁점을 둘러싼 합의를 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베를린 회의 덕분이다. 1878년 6월 13일에서 7월 13일까지 제국 수상 관저에서 열린 이 회의는 비스마르크가 의장을 맡았으며, 유럽의 모든 강대국 정상이 참석했다. 그 결과 러시아는 전쟁으로 얻은 영토 일부를 포기했다(불가리아 남부 지역 행정 자치구인 동東루멜리아). 그러나 1856년 루마니아에게 잃었던 베사라비아 및 소아시아 지역은 자국 영토로 편입됐다고 주장했다.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와 루마니아는 완전한 독립을 얻었으며, 불가리아는 자율권을 가지기는 하지만 튀르크에 조세를 바쳐야 하는 공국이 됐다. 그리스는 이피로스와 테살리아의 일부를 얻었으며, 영국은 키프로스섬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점유할 권리를 각각 차지했다. 독일과 프랑스를 제외하고 유럽의 모든 강대국은 이 전쟁의 결과와 베를린 회의로부터 소기의 성과를 올렸다. 94)


1870년대의 독일 근대화에 정부와 의회 다수파가 상당히 기여한 사실은 한편으로는 문화투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이른바 ‘창설공황(Gründerkrach, Panic of 1873)’이라고 역사에 기록된 경제 위기로 그늘질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독일은 경제가 활황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런 번영에는 프랑스가 전쟁배상금으로 지불한 50억 금프랑(환산하면 약 42억 마르크)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경제 부흥으로 활력을 얻은 주식회사의 설립은 거리낌 없는 주식 투기의 위장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1873년 5월에 시작된 주가 폭락은 오스트리아를 필두로, 이탈리아, 러시아, 그리고 미국을 휩쓸었으며 가을에는 독일을 강타했다. 많은 유대인 금융 종사자가 주식시장에서 활동한 탓에, 주식시장 붕괴가 빚은 심리적 충격은 “독일에서 근대 반유대인주의가 탄생한 순간”의 배경이 됐다. 호황의 갑작스러운 끝은 성장 둔화의 시기로 이어졌다. 이 시기는 몇몇 단기적인 회복세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1890년대까지 지속됐다. 97-8)


국내 정치의 또 다른 주요 문제는 좌파자유주의자인 루돌프 피르호Rudolf Virchow(1821~1902)가 ‘문화투쟁’이라는 개념으로 집약해 표현한 것이다. 한쪽에는 비스마르크 정부와 자유주의가, 그 반대편에는 가톨릭교회와 이를 대변하는 정당인 중앙당(Zentrum)이 서로 문화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툰 싸움이 ‘문화투쟁’이다. 여기에는 다양한 동기가 다발로 묶여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우선 주목해야 하는 동기는 비스마르크가 애초부터 종파 정당의 결성을 매우 꺼렸다는 점이다. 가톨릭을 전면에 내세운 정당은 그 의회 활동의 출발점과 목표점을 로마 교황청의 이해관계로 삼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며, 실제로도 그랬다. 두 번째로 살펴야 하는 동기는 폴란드와 관련한 것이다. 예전부터 비스마르크를 항상 사로잡았던 근심은 프로이센의 동쪽 국경이 폴란드 민족운동으로 위협받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오랜 세월 비스마르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문화투쟁의 뿌리는 폴란드 문제에 있다고 강조하곤 했다. 98-100)


1878~1879년에는 국내 정치의 극적인 사건들이 봇물 터지듯 일어나면서 정치와 의회의 세력 관계에 결정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민족자유주의자들은 더는 비스마르크가 의회를 장악하는 기둥 노릇을 하지 못했으며, 보수가 다시금 힘을 얻었고, 중앙당과의 협력이 가능해졌다. 1878년 초여름에는 카이저 빌헬름 1세를 겨눈 두 번의 암살 시도가 벌어졌다. 첫 번째인 5월 11일에 카이저는 몸 성히 살아남았지만, 6월 2일의 두 번째 시도에서는 중상을 입었다. 오래전부터 사회민주주의가 국가와 사회의 질서를 심각하게 위협한다고 보았던 비스마르크는 이 기회를 이용해 사회민주주의에 일대 타격을 가하기로 결심했다. 1878년 10월 제국 의회는 “사회민주주의가 공동체를 위협하는 행위를 방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다분히 자의적인 법 조항은 권력의 입맛대로 해석하고 실행할 행동 공간을 활짝 열어두었다. 사회민주주의에게 합법적으로 허락된 유일한 활동은 제국 의회와 지방의회 선거에 참여하는 것뿐이었다. 102-4)


사회복지 법안의 입법이야말로 비스마르크가 국내 정치에서 이룩한 가장 중요한 성과이다. 그가 이 법안을 책임지고 주도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사회민주주의를 겨냥한 양면 전략이라고 보는 평가가 우세하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맞는 말도 아니다. 노동자를 생활의 기본적인 위험 요소로부터 보호해줌으로써 노동자 계층이 왕조 국가에 호감을 느끼도록 유도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최신 연구는 사회주의 법과 사회보장 정치의 시작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을 확인했다. 사회민주주의와는 별개로 사회보장 정치는 비스마르크가 그 중요성을 의식하고 추진한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포괄적인 노동자 보호법의 제정에 반대하기는 했지만(특히 일요일 노동 금지법을 반대했다), 산업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폐해의 심각성을 간파하고, 노동자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위치를 정부 대책으로 개선해줄 필연성을 깨달았다. 105-6)


비스마르크는 사회보장을 위한 세 가지 법안, 산업재해와 노년 연금과 상해보상의 법안이 의회를 통과할 수 있도록 통 크게 양보를 해야만 했다. 의회의 다수 의원이 세금으로 사회보장의 재원을 마련하려는 수상의 의중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결국 비스마르크는 노년 연금과 상해보상의 경우에만 (조촐한) 국가보조금을 지급하는 안을 관철시켰다. 비스마르크의 국내 정치 성과를 총평해보자면, 몇몇 성공에도 “그 자신과 독일을 위해 설정한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다는 오토 플란체의 진단은 정확하다. 그가 특히 간절히 원했던 재정 개혁은 이뤄지지 않았다. 중앙당은 문화투쟁을,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사회주의 법을 각각 이겨냈다. 비스마르크는 제국 의회의 힘을 제한하지도 못했고, 정부를 위한 안정적인 다수 확보도 실패했다. 1879년 관세 문제에서는 대기업과 농업의 이해관계를 하나로 묶는 데 성공했지만, 자신이 계획한 다른 분야들의 주요 쟁점에서 비스마르크는 이런 성과를 끌어내지 못했다. 106-7)


발칸반도에서 무르익어가는 대결 분위기는 비스마르크를 혹독한 시험대 위에 세웠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서로 이해충돌을 빚으면서 저마다 독일의 지원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노골적인 전쟁으로 치닫는 것을 막고자 진력했다. 결국 이런 노력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만큼은 막지 못했다. 차르는 삼제동맹이 사망했다고 선포했다. 1887년에 만료되는 삼제동맹을 다시금 연장하는 일은 불가능했지만, 비스마르크는 어떤 경우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연결된 끈은 살려놓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1887년 6월 러시아와 비밀리에 ‘재보장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프랑스가 도발해 독일을 공격할 경우 중립을 지키며, 독일제국은 합스부르크 왕조가 차르 제국을 도발해 공격할 때 중립을 견지한다는 의무를 이행하기로 했다. 이 조약이 제국의 다른 동맹들과 합치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숱한 논란이 빚어졌다. 109-110)


1888년 3월 9일 제국 의회에서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1세의 사망을 공표하면서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예정된 권좌 교체를 바라보는 비스마르크의 속내는 착잡하기만 했다. 1887년 말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불치병을 앓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비스마르크는 “정말 불행한 일”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비스마르크는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인 왕세자 빌헬름이 “성미가 급해 입을 다물어야 할 때 다물 줄 모르며, 아첨에 귀가 얇아 짐작하지도 원하지도 않는 가운데 독일을 전쟁에 빠뜨릴 수 있다”고 걱정했다. 프리드리히 3세의 장례를 치르고 몇 시간 뒤, 비스마르크는 젊은 카이저를 예방하면서 이제 전혀 다른 바람이 불어온다는 것을 실감해야만 했다. 젊은 카이저는 무엇보다도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게 원했다. 국가는 자신이 통치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늙은이’를 떨쳐버리고 싶었다. 이로써 국가라는 배의 조종간을 손수 잡아 온 비스마르크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하기만 한 시한폭탄이었다. 112-3)


갈등은 1890년 3월 15일 마지막 정점을 찍었다. 카이저는 이른 아침 통보도 없이 외교부에 나타나 비스마르크를 격렬하게 힐난했다. 어째서 러시아와의 관계를 그토록 우호적으로 꾸미는지 카이저는 따져 물었다. 당시 빌헬름 2세는 러시아가 곧 오스트리아를 선제공격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여러 의견 차이로 갈등을 빚던 와중에 이제는 외교정책을 두고 심각한 분열이 빚어졌다. 젊은 카이저 주변을 맴도는 비공식 참모들, 이를테면 참모총장 백작 발더제, 카이저의 친구 백작 오일렌부르크, 추밀원 고문관 홀슈타인, 카이저의 삼촌 대공 프리드리히 폰 바덴은 하나 같이 비스마르크에게 등을 돌린 정적들이자 러시아에 반감을 품었다. 이들의 말에 홀린 카이저는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1890년 6월로 기한이 끝나는 재보장조약의 연장, 러시아 쪽이 원하는 연장을 해줘서는 안 된다고 흥분했다(비스마르크가 실각한 뒤 이들은 실제로 연장을 막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외교정책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115)


VI. 권좌에서 물러난 후(1890~1898)


비스마르크가 1893년 8월 말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병이 심해졌을 때, 카이저의 측근들은 빌헬름 2세에게 서둘러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직언했다. 1894년 1월에 극적으로 ‘화해’가 이루어졌다. 비스마르크는 베를린 궁을 방문해달라는 카이저의 초대를 받아들였다(베를린 시민들은 그를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석 주 뒤 빌헬름 2세는 답방을 위해 프리드리히스루를 찾았다. 두 번의 만남에서 카이저는 정치 이야기는 한사코 피했다. 그에게는 오로지 여론에 비치는 모습만 중요했다. 다시 말해 이 ‘화해’는 순전히 형식적인 겉보기 연출일 뿐이었다. 빌헬름 2세는 실각한 수상을 계속해서 불신했으며, 비스마르크는 이 젊은 카이저를 경멸하는 태도를 전혀 바꾸지 않았다. 비스마르크가 유서에 정한 비문은 이렇다. “제후 폰 비스마르크, 1815년 4월 1일 생, 1898년 7월 30일 졸. 독일 카이저 빌헬름 1세의 충직한 신하.” 분명 죽은 비스마르크는 이 비문으로 빌헬름 2세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남겼으리라. 124-6)


에필로그_논쟁의 대상 비스마르크


보수주의와 민족자유주의 진영의 엘리트들은 비스마르크를 이상적 정치인으로 추켜세웠으며, 폭넓은 계층이 민족 영웅으로 섬겼다. 비스마르크라는 인물의 숭배는 그가 죽고 난 뒤 엄청나게 확장되면서, “결국 역사적 실제 인물 비스마르크의 면모는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됐다.” 이런 신격화가 몰고 온 치명적 오류는 “섬세한 신경에 유연하며 항상 중도를 유념했던 외교관”이 목이 긴 전투화를 신은 호전적인 ‘철혈재상’이라는 이미지에 묻혀버리면서, 과격한 민족주의의 아이콘이 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그가 생시에 한사코 멀리했던 민족주의가 사후에 비스마르크를 집어삼킨 셈이다. 무수히 많은 재향군인회, 함대 출신 해군 협회, 무장 촉구 단체 등은 앞다투어 죽은 자 비스마르크를 독점적으로 차지했다고 호들갑을 떨었으며, 범독일 민족주의 연맹은 그 제국주의적 야심을 상징하는 인물로 비스마르크를 내세웠다. 이런 신격화는 이미 1914년 이전에 치명적 파괴력을 자랑했다. 131)


1918년 이후 정치 우파는 비스마르크를 거리낌 없이 공화국과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의 수단으로 편취하면서, 바이마르공화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수단으로 악용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책임자들은 비스마르크의 정치적 유산을 이처럼 국수적이고 민족주의적으로 왜곡하고 변조하는 일에 단호히 대처하지 못했다. 좌파자유주의자들, 사회민주주의자들, 그리고 가톨릭 성향의 정치가 대다수도 비스마르크의 인격과 업적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전래적 입장을 고수했을 뿐이다. 이런 경향을 막으려 진력한 사람은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이다. 슈트레제만은 로카르노 조약(1925)과 베를린 조약(1926)에서 자신의 ‘국가적 현실정치’를 아주 선명하게 담아내면서 드러내놓고 비스마르크라는 모범에 의존했다. 하지만 정치 현장은 고루한 민족주의의 비스마르크 신화에 장악당했으며, 이런 상황은 ‘제3제국’의 시기를 넘어서까지 지속됐다. 반민주적인 비스마르크 신화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차츰 청소됐다.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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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도 이야기 - 인류 최초로 바다의 시공간을 밝혀낸 도전의 역사 ㅣ 데이바 소벨 컬렉션
데이바 소벨 지음, 김진준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1. 상상의 선 


"프톨레마이오스는 적도를 위도가 0도인 선으로 잡았다. 임의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로부터 자연 속에서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적도를 알아냈던 조상들의 선례를 따른 것이었다. 적도에서는 태양과 달과 행성들이 머리 위로 수직에 가깝게 지나간다. 역시 유명한 위도선인 북회귀선과 남회귀선도 태양의 위치에 따라 정해졌다. 연중 태양이 움직이는 범위에서 각각 북쪽과 남쪽의 한계선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초자오선, 즉 경도가 0도인 선은 프톨레마이오스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다. 그는 아프리카 북서쪽의 포처니트 제도(지금의 카나리 제도와 마데이라 제도)를 지나가는 경도선을 선택했다. 그 이후에 지도를 만든 사람들은 본초자오선을 아조레스 제도나 케이프베르데 제도, 로마, 코펜하겐, 예루살렘, 페테르스부르크, 피사, 파리, 필라델피아 등지로 옮기다가 결국 런던으로 낙착을 보았다. 본초자오선의 위치를 결정하는 것은 순전히 정치적인 문제였다. 바로 그것이 위도와 경도의 본질적 차이점이다."(19)


2. 위험한 바다 


"용기와 탐욕을 겸비하고 바다로 나갔던 15~17세기의 선장들은 모항으로부터 동쪽이나 서쪽으로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측정하기 위해 추측 항법을 사용했다. 선장은 바다 위에 측정기를 던져놓고 이 임시 이정표로부터 얼마나 빨리 멀어지는지를 관찰했다. 이 조잡한 속도계의 측정값을 항해일지에 기록하고, 별이나 나침반으로 확인한 진행 방향과 모래시계나 회중시계로 잰 특정 거리의 통과 시간 따위를 함께 적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목적지를 놓치는 일도 흔했다. 추측 항법 때문에 목숨을 잃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같은 개인적인 고통이 전부는 아니었다. 경도를 모른다는 이유로 세계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경제적 재앙을 감수해야 했다. 대양을 오가는 배들은 안전한 항해가 보장되는 소수의 비좁은 항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위도만 가지고 항행해야 했으므로 몇몇 항로에 포경선, 상선, 전함, 해적선 등이 한꺼번에 몰려 붐비다가 서로 싸워 차례로 희생 당했다."(29-30)


# 측정기 : 줄이 풀리는 정도에 따라 배의 속도 및 항주 거리를 재는 장치


3. 우주의 시계 속에서 표류하다 


"일찍이 1514년에 이미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베르너가 달의 운행을 이용하여 배의 위치를 알아내는 방법을 착안했다. 달이 한 시간 동안 움직이는 거리는 대략 달의 지름과 비슷하다. 달은 밤마다 이렇게 장중한 걸음걸이로 붙박이별 사이를 산책한다. 낮에는 (매달 보름 동안은 낮에도 달이 떠 있으므로) 태양 쪽으로 다가가거나 멀어진다. 베르너는 천문학자들이 달의 운행 경로 주위에 흩어진 항성들의 위치를 천체도에 표시하고 달이 각각의 항성을 스쳐 지나가는 시각을─앞으로 몇 년에 걸쳐 매달 달이 뜨는 밤마다─예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낮 동안에 이동하는 해와 달의 상대적 위치도 예측해야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월거 이용법'의 주된 문제점은 그 모든 과정을 좌우하는 항성들의 위치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어느 날 밤이나 낮에 달이 어디쯤 있을지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천문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달의 운행을 지배하는 법칙들을 아직 상세히 이해하지 못한 탓이었다."(39)


4. 병속의 시간 


"시계 예찬론자들은 좋은 시계만 있으면 경도 문제를 거뜬히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때는 뱃사람들이 물통이나 소고기처럼 모항의 시간을 배에 싣고 출항할 수 있을 터였다. 1530년부터 플랑드르의 천문학자 젬마 프리시우스는 기계적인 시계가 바다에서 경도를 찾는 한 방법이라면서 환영했다. 그러나 프리시우스가 내세운 두 가지 조건─즉 지극히 정확한 출항 시각에 시계를 맞춰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항해 중에 시계가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때문에 당시로서는 사실상 사용이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16세기 초의 시계로는 어림없었다. 정확하지도 않았거니와 바다에서의 혹심한 온도 변화를 견뎌낼 재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시계가 부족하나마 상당한 발전을 보인 것은 영국의 항해가 토머스 블런드빌이 대양 항해에서 경도를 측정하기 위해 정확한 시계를 이용해보자고 제안했던 1622년에 이르러서였다. 여러 결점에도 불구하고 장차 시계가 더욱 완벽해졌을 때의 가능성에 대한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51-2)


5. 교감의 가루약 


"17세기 말엽, 바다에서 경도를 알아낼 수 있다는 엉뚱한 주장 가운데서도 가장 기상천외한 이론은 '교감의 가루약'이라는 엉터리 치료제를 근거로 삼았다. 딕비의 가루약을 경도 문제에 써먹는다는 발상은 비록 황당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먼저 상처 입은 개를 출항하는 배에 태운다. 그리고 믿을 만한 사람을 물에 남겨 날마다 정오에 그 개의 붕대를 교감의 가루약 용액에 집어넣게 한다. 그러면 개는 어쩔 수 없이 깽깽거리며 울부짖기 마련이고, 선장은 그 소리를 듣고 시간을 가늠한다. 개의 울부짖음은 곧 태양이 런던 자오선 상공에 도달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때 선장은 그 시각과 배가 있는 지점의 현지 시각을 비교하여 경도를 산출하면 된다. 물론 이 가루약이 수천수만 해리나 떨어진 바다 위까지 효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 또한 그러면서도─이것은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몇 달이 지나도록 이 소중한 상처를 치료하지 못해야 한다는 것이 것이 희망 사항이었다."(57-8)


6. 경도상 


"1714년 7월 9일 앤 여왕 치하에서 발포된 경도법에는 거액의 상금이 책정되었다. 경도법이 발효되기 전에도 경도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는 의견들은 흔해빠질 정도로 많았다. 그런데 1714년 이후 해결책의 잠재적 가치가 급격히 커지자 해결책의 숫자도 급증했다. 머지않아 경도 심사국은 소문을 듣고 상금을 타기 위해 몰려드는 무수한 사기꾼이나 선의의 참가자들에게 포위되다시피 했다." "경도법이 등장한 후 '경도를 찾는다'는 말은 곧 불가능한 도전을 뜻하게 되었다. 걸핏하면 경도가 화젯거리─그리고 웃음거리─가 되었고, 결국 그 시대의 문학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예를 들자면 『걸리버 여행기』에서 닥터 레뮤얼 걸리버는 불멸의 스트럴드브러그가 되었을 때를 상상해보라는 말을 듣고 여러 혜성들이 돌아오거나 거센 강이 얕은 시냇물로 변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즐거움과 더불어 경도가 발견되고 영구기관과 만병통치약 등 위대한 발명품이 속속 완성되는 것을 보는 기쁨을 떠올렸다."(72)


# 스트럴드브러그 : 늙기만 하고 죽지 않는 희귀한 존재


7. 톱니바퀴 만들기 


8. 바다로 간 메뚜기 


"'경도 사나이' 존 해리슨이 동생 제임스 해리슨과 함께 1735년에 제작한 첫 해상 시계 H-1은 모든 면에서 눈에 띄는 존재였다. 그 시대의 산물이면서도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였다. 이 시계가 등장했을 때 세상은 이미 기다림에 지쳐 있었다. H-1은 본래의 목적을 충실히 수행할 뿐이었지만 워낙 뛰어난 탓에 사람들은 오히려 당황했다." "1737년 6월 30일에는 경도 심사국 의원들이 사상 처음으로─심사국 창립 후 23년 만에─회의를 열었는데, 바로 해리슨의 굉장한 기계 때문이었다." "심사 자리에는 해리슨의 탁월한 작품이 있었고, 더욱이 그곳에 모인 전문인 및 정치가들도 해리슨이 국왕과 조국을 위해 이룩한 업적을 자랑스러워하는 분위기였다. H-1이─경도법에 명시된 2만 파운드를 받을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인도 제도로 가는 시험을 요구할 권리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해리슨은 지나친 완벽주의자였다. H-1에 대해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의견을 꺼낸 사람은 당사자인 해리슨뿐이었다."(95, 99-100)


9. 하늘의 시곗바늘 


"해리슨이 차례차례 해상 시계를 제작하던 바로 그 시기에 과학자들도 마침내 하늘의 시계를 이용하는 데 필요한 이론과 기구와 정보를 두루 갖추게 되었다." "이제 '해들리 사분의' 덕분에 두 천체의 고도와 그 사이의 거리를 직접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설령 배가 심하게 흔들리더라도 관측자의 시야에 들어온 두 천체의 상대적 위치는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해들리 사분의에는 어둠이나 안개 때문에 진짜 수평선이 안 보이게 되었을 때 요긴하게 이용할 수 있는 인위적인 수평선이 덤으로 붙어 있었다. 이 사분의는 곧 망원경을 부착하고 측정각을 넓혀 더욱 정확하게 만든 육분의sextant라는 기구로 발전했다. 그렇게 개량한 부분 때문에 이 기구만 있으면 낮 동안에 끊임없이 달라지는 달과 태양 사이의 거리를, 어두워진 뒤에는 달과 별 사이의 거리를 각각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었다. 상세한 성도星圖와 믿을 만한 기구를 갖춘 유능한 항해가라면, 이제 갑판 위에 서서 얼마든지 월거를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106-9)


10. 다이아몬드 시계 


"1753년 워십풀 시계조합의 존 제프리스는 해리슨이 개인적으로 사용할 회중시계 하나를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그는 해리슨이 요구한 설계대로 제작한 것이 분명하다. 제프리가 만든 이 시계에도 작은 이중 금속띠가 들어가 날이 덥든 춥든 정확한 시간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시계는 대단히 정확했다. 해리슨 자신도 이 시계에 마음을 빼앗겨 더 작은 해상 시계를 구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해리슨이 1759년에 완성한 H-4는─이 시계로 결국 경도상을 받았다─앞서 만들어진 H-1, H-2, H-3보다 오히려 제프리스 시계를 더 많이 닮았다. 큼직한 황동 시계의 혈통에서 막내로 태어났으면서도 H-4는 마치 모자에서 끄집어낸 토끼처럼 놀라운 물건이었다. 지름이 5인치나 되므로 회중시계라고 하기에는 큰 편이지만 해상 시계로서는 아주 꼬맹이었으며 무게도 겨우 3파운드였다. 해리슨도 이 시계를 사랑했다. 곧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듯 이 시계는 그야말로 우아함과 정밀성의 진수였다."(122-3)


11. 물과 불의 시련 


"영웅을 찬양하는 이야기에는 야유할 악당도 필요한 법이다. 이 책에서 네빌 매스켈린 목사가 그런 사람인데, 역사는 그를 '뱃사람들의 천문학자'로 기억한다. 매스켈린은 월거 이용법을 선택했다가 곧 신봉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그 방법의 상징적 인물로 떠올랐다." "해리슨의 시계는 경도에 얽힌 복잡한 문제들을 그 안에서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사용자는 수학이나 천문학에 통달할 필요도 없고 시계를 작동시키는 데 경험이 요구되는 것도 아니었다. 과학자나 천측 항법가들의 눈에는 이 해상 시계에 불길한 무엇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뭔가 재빠르고 붙잡을 수 없는 것. 더 옛날이었다면 해리슨은 이런 마술 상자를 해결책으로 내놓았다는 이유로 꼼짝없이 마법사로 몰렸을 것이다. 해리슨이 이런 입장에 놓인 까닭은 스스로 정해놓은 기준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며 또한 그의 적들이 강력히 불신을 표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 공적을 세우고도 기대했던 찬사는커녕 수많은 시련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116-7, 128)


12. 두 개의 초상화 


"1764년 여름에 힘겨웠던 두 번째 시험이 끝난 후, 경도 심사국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몇 달을 그냥 보냈다. 위원들은 수학자들이 H-4의 시간 기록을 계산한 후 천문학자들이 측정한 포츠머스 및 바베이도스의 경도값과 비교할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었다. 심사 자료에는 모든 내용이 포함되어야 했다. 이윽고 최종적인 보고를 들은 위원들은 위의 시계가 충분히 정확하게 시간을 표시했음을 만장일치로 인정했다. 도저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엄청난 성과를 거두고도 해리슨은 작은 승리밖에 얻지 못했다." "1765년 1월에 신임 왕실 천문학자의 이름이 발표되었는데, 다름 아닌 영원한 숙적 네빌 매스켈린이었다. 심사국 회의에서 매스켈린은 월거 이용법을 찬양하는 기나긴 원고를 낭독했다. 이 사건은 월거 이용법을 제도화하려는 움직임의 시작에 불과했다. 해리슨의 크로노미터는 비록 신속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 반면, 하늘은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었다."(146-8)


13. 제임스 쿡 선장의 두 번째 항해 


14. 천재성의 대량 생산 


"켄들과 머지는 살아생전에 각기 해상 시계 세 개를 제작했고, 해리슨도 고작 다섯 개를 만들었을 뿐이지만 시계공 존 아널드는 품질 좋은 해상 시계를 무려 수백 개나 완성시켰다." "존 아널드에게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토머스 언쇼였다. 그는 해리슨의 복잡성과 아널드의 생산성을 응축시켜 완벽에 가까운 크로노미터를 만들어냈다. 윤활유가 필요 없는 계시 장치를 고안하여 마침내 해리슨의 위대한 아이디어 하나를 소형화했다는 사실도 빠뜨릴 수 없다." "아널드와 언쇼 이외에도 점점 더 많은 제작자들이 나타난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판매했으며 군함이나 상선은 물론이고 놀잇배에서도 크노로미터를 사용했다. 그리하여 1737년 전 세계에 하나뿐이던 해상 시계가가 1815년에는 5000여 개로 늘어났다." "해리슨이 제시한 경도 해결책의 실용성이 확실히 입증되자 한때 치열했던 경쟁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리하여 크로노미터는 곧 당연히 항해에 갖춰야 하는 필수품으로 여겨졌다."(172, 175, 179-80)


15. 자오선의 뜨락에서


"런던 중심부로부터 7마일 떨어진 그리니치 천문대 자리에 본초자오선을 설정한 사람은 제5대 왕실 천문학자 네빌 매스켈린이었다. 경도를 찾는 방법 중에서 시계 이용법이 월거 이용법을 누르고 승리를 거둔 후에는 그리니치의 중요성이 다소 줄어들었으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정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뱃사람들은 크로노미터의 정확성을 확인하기 위해 아직도 이따금씩 월거 측정을 해야 했다. 그리고 『항해력』의 해당 페이지를 펼쳐놓은 후, 출발 지점이나 목표 지점이 어디이든 간에 자연히 그리니치를 기준으로 경도를 계산했다." "(매스켈린의 온갖 훼방에 시달리면서도) 존 해리슨은 자신의 해상 시계들을 가지고 시간과 공간의 바다에 도전했다. 그리고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제4의 차원─즉 시간─을 이용하여 삼차원적 공간인 지구의 각 지점을 하나로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세계 각지의 위치를 알아냄으로써 별들을 쓸모없게 만들고 그 엄청난 비밀을 회중시계 속에 가둬놓았다."(182-3,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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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비스마르크 - 살림지식총서 361 ㅣ 살림지식총서 361
김장수 지음 / 살림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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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기의 활동


1847년 5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Friedrich Wilhelm Ⅳ)는, 철도 건설에 필요한 재원으로서 공채를 발행하기 위해 프로이센 통합지방의회(Der Vereinigte Landtag)를 개원한다는 칙령을 발표했고 그에 따른 선거가 각 지방에서 실시되었다. 당시 비스마르크는 통합지방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브라우휘트쉬(Brauchitsch)라는 의원이 지병으로 의원 활동을 포기함에 따라 그는 1847년 5월 8일 통합지방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독일 역사상 최초의 실제적 대의회였던 통합지방의회는 온건적 성향의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했다. 그러므로 왕권 및 귀족 계층의 이익을 대변했던 우익 세력은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했다. 의회에 진출한 비스마르크는 보수적 성향을 보였는데 그의 그러한 성향은 5월 17일 통합지방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확인된다. 여기서 그는 일부 의원들이 제기한 헌법 제정의 필요성을 반박했고 그것은 지방의회 의원들의 강한 반발을 야기했다. 9)


3월혁명 전후의 활동


오토(Otto) 대제 이후 약 천 년 동안 유지해 오던 신성로마제국은 1806년 10월 14일 예나-아우어슈테트(Jena-Auerstedt) 전투에서 나폴레옹 군에게 패배함으로써 멸망했다. 이후 제국의 영토는 나폴레옹의 보호국이 된 라인연방(Rheinbundstaaten), 호헨촐레른(Hohenzollern) 가의 프로이센, 그리고 합스부르크(Habsburg) 가의 오스트리아로 분할되었다. 1815년 빈 회의의 결정에 따라 등장한 독일 연방은, 35개의 대소 국가와 4개의 자유시(Freistadt)로 구성된 엉성한 정치 체제였다. 그런 와중에 라인연방에서 시작된 독일의 산업 발전은 국내의 상공 시민들을 고무시켰고 그것은 자본주의적 산업 발전을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통합 시장의 형성 요구로 이어졌다. 그에 따라 프로이센의 경제인들은 1819년 북부 독일의 여러 국가들과 관세동맹(zollverein)을 체결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전 독일국가가 참여한 관세동맹이 1844년에 결성됨으로써 정치적 통일에 앞서 경제적 통일이 이룩될 수 있었다.10)


1848년 5월 18일 프랑크푸르트의 성 파울 교회(St. Paul- kirche)에서 국민의회가 개최되었다. 국민의회의 최대 과제는 독일 연방을 하나의 통합 국가로 변형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형성된 개별 영방 국가들을 그대로 둔 채 강력한 중앙 권력을 창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민의회의 이러한 무력함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Schleswig-Holstein) 문제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두 공국은 오랫동안 덴마크 국왕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그중 홀슈타인은 독일 연방의 일원이었다. 그런데 혁명을 계기로 이 지방의 독일계 주민이 덴마크의 지배에 이의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국민의회의 요청으로 파견된 프로이센군이 사태를 진압했으나, 러시아, 영국, 프랑스의 압력으로 프로이센은 덴마크와 휴전 조약을 체결했고 국민의회는 이 조약을 추후 비준했다. 이로써 두 공국의 독일계 주민은 국민의회로부터 배반당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대다수 독일인 역시 그러한 결정에 불만을 표시했다. 12-3)


1851년 5월 15일 비스마르크는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 자신이 후에 인정했듯이 대사직은 한 국가의 외교를 담당하는 중요한 관직이었다. 이 당시 오스트리아 정치가들은,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대등한 국가가 아니며 앞으로도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었고 비스마르크 역시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1858년 3월 비스마르크는 당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후계자였던 빌헬름 왕자에게 자신의 정치적 관점을 정리한 문서를 제출했는데 거기서 그는 베를린 정부가 빈 정부를 의식하지 말고 자기중심적인 정책, 즉 독자적인 정책을 펼쳐야만 독일권에서 프로이센의 위상을 증대시킬 수 있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이면에는 프로이센의 국익을 위해서는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충돌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점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빈 정부는 외교적 역량을 총동원하여 비스마르크를 해임시키려 했고, 그러한 시도는 결국 성공을 거두었다. 15-6)


1859년 1월 23일 비스마르크는 러시아 주재 프로이센 공사로 임명되었다. 3월 말 임지에 도착한 비스마르크는 러시아 외교 정책의 근간을 파악하려는 노력을 펼쳤고 거기서 자신의 관점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도 인지하게 되었다. 러시아 공사로서의 임기를 끝낸 비스마르크는 1862년 1월 22일부터 프랑스 주재 프로이센 공사로 근무했다. 그 기간이 채 일 년도 되지 않았지만, 이 시기에 그는 나폴레옹 3세(Napoleon Ⅲ)의 보나파르트 정책(Bonapartism)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여기서 그는 외교적 업적을 통해 국내 문제를 해결하려는 보나파르트 정책의 운영 과정을 세밀히 관찰해 그것을 향후 자신의 정책에도 활용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실제로 보나파르트 정책의 핵심 구도는 1860년대 초 군제 개혁(heeresreform) 과정에서 야기된 의회와의 충돌 및 1870년대 의회 내 반대 세력과의 대립이라는 내정 문제를 외교적 업적을 통해 해결하려 한 것 등에서 확인된다. 16-7)


현실정치가로서의 행보


1859년 호헨촐레른 가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극한 빌헬름 1세(Wilhelm Ⅰ)는, 섭정 지위에 있을 때 전쟁장관(kriegminister)과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던 론(Roon)과 몰트케(Moltke)로 하여금 프로이센군을 증강시킬 수 있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강구하도록 지시했다. 이러한 병력 증강안에 대해 자유주의자들 역시 원칙적으로 견해를 같이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비역 및 후비역 축소가 해방전쟁(befreiungskrieg)의 전통을 계승하고 군제 개혁가 등의 이상이었던 '무장화된 시민', 즉 시민과 군대가 결속되었던 전통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자유주의자들의 이러한 우려에 대해 빌헬름 1세는 엄격한 군인 정신으로 무장한 군대만이 대내외 문제에 대처할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반론을 제기했다. 이제 군제 개혁은 단순한 군사적ㆍ기술적 범위를 넘어 '시민의 군대인가, 국왕의 군대인가'라는 제도 이념적인 갈등과 대립을 함축하게 되었다. 빌헬름 1세는 군제 개혁을 국왕의 통수권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18-9)


국왕과 의회가 날카롭게 대립하는 가운데 1862년 9월 24일 비스마르크는 임시 수상(interimistische ernennung zum preussischen ministerpräsidenten)으로 임명되었다. 비스마르크는 1862년 9월 30일 의회에서 "독일권이 주목하는 것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그 권력이다. (중략) 오늘의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이것이 1848년과 1849년의 잘못이다―에 의해서가 아니라 피와 철(blut und eisen)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라는 것을 언급했던 것이다. 하원의 반대로 차기 연도 예산이 확정되지 못한 상황에서 비스마르크는 상하 양원의 불일치로 예산이 통과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헌법 규정이 없음을 파악했다. 따라서 그는 하루라도 국가 통치가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점이론(Lückentheorie)을 부각시켰던 것이다. 여기서 그는 헌법적인 교착 상태가 초래될 경우 오직 국왕만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는 입장도 밝혔다. 이후 그는 긴급권을 발동하여 예산 승인 없이 국가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20)


빈 정부가 독일 통합을 진정으로 원하지 않고 있다는 확신을 가진 비스마르크는 군사력 강화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아울러 그는 외교적인 공작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1865년 10월 나폴레옹 3세를 비밀리에 만나 형제 전쟁이 발발할 경우 프랑스의 중립을 약속받았고, 1866년 4월 8일에는 이탈리아 왕국과 3개월간의 한시적 군사 동맹 체제를 체결하여 오스트리아가 패배할 경우 이탈리아의 베네치아(Venezia) 합병도 인정한다는 약속을 했다. 물론 러시아와의 친선 관계는 그가 1859년부터 약 3년간 페테르부르크에서 대사로 근무할 때 이미 구축된 상태였다. 1866년 6월 21일 비스마르크는 의회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군을 홀슈타인으로 출격시켜 형제 전쟁을 일으켰다. 1866년 7월 3일 쾨니히그레츠(Königgrätz)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의 주력군은 프로이센의 후장총과 몰트케가 이용한 철도라는 획기적 이동 수단 때문에 패배했다. 이후로 오스트리아는 독일 통일 문제에서 배제되었다. 21-2)


독일 연방이 붕괴된 이후 독일권은 마인(Main) 강을 경계로 남북 두 개의 블록으로 나뉘었다. 비스마르크는 1866년 10월부터 마인 강 이북의 영방들과 조약을 체결하여 연방 조직을 형성했다. 그것에 따라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작센, 하노버, 쿠어헤센, 그리고 나사우 등을 포함한 총 22개 영방으로 구성된 북독일 연방(Norddeutscher Bund)을 발족시켰다. 북독일 연방은 단순한 국가 연맹이었던 독일 연방과는 달리 중앙 권력을 갖춘 연방 국가의 성격을 가졌다. 마인 강 이남 지역에서 비스마르크는 남부 독일 국가들, 특히 바이에른, 바덴(Baden), 뷔르템베르크(Würtemberg), 그리고 헤센-다름슈타트(Hessen -Darmstadt) 등과 비밀 공수동맹을 맺고 나폴레옹 3세의 야심에 대비하고자 했다. 아울러 그는 1867년에 개편된 관세동맹을 통해 이들 국가들을 북독일 연방에 결속시킬 수 있었다. 이로써 내용적으로 보다 확대된 북독일 연방 및 프로이센이 군림하는 전 독일적 연방 국가의 원형이 창출되었다. 22-3)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독일 통합에 대해 부정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실현을 저지하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남부 독일 국가들과 비밀리에 체결한 공수동맹(Schutzund Trutzbündnis)에 따라 이들 국가들로부터 군사적인 지원을 받았다. 아울러 그는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로부터의 중립도 약속받았다. 또한 그는 몰트케 장군에게 전쟁 준비를 철저히 할 것을 명령했고 그 결과 독일 연합군은 병력, 장비, 훈련 등에서 프랑스군을 압도했다. 따라서 전쟁이 시작된 지 2개월도 안된 1870년 9월 4일, 나폴레옹 3세는 8만 6천 명의 프랑스군과 함께 스당(Sedan)에서 항복하고 강화를 제의했다. 그러나 프랑스에 대해 철저한 타격을 가하고자 했던 비스마르크는 강화 제의를 거부하고 1871년 1월 29일 파리를 함락시켰다. 같은 해 5월 10일 비스마르크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프랑스와 엘자스-로트링겐의 할양 및 50억 프랑의 배상금 지불을 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종결시켰다. 23-4)


내정에 대한 관심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Versailles)에서 탄생한 독일제국은 4왕국, 18공국, 3자유시 등 25개의 국가와 2제국령(엘자스-로트링겐)으로 구성된 연방 국가였다. 그러나 이러한 연방 체제는 이전의 독일 연방처럼 여러 국가의 집합체도 아니면서 완전한 중앙집권 국가라고도 볼 수 없는 모호한 정치 체제였다. 왜냐하면 바이에른, 작센, 뷔르템베르크, 바덴 등이 이전의 칭호 및 지위를 유지하면서 상원에 해당되는 연방의회(Bundesrat)에서도 압도적 의석을 보장받았기 때문이다. 제국헌법에 의하면, 연방의회는 각국의 대표와 황제가 지명하는 60명의 의원들로 구성되었는데 입법권과 군사 및 외교상의 대권 등을 가져 그 권한이 막강했다. 그러나 의원들 중 17명은 황제가 직접 임명했기 때문에 연방의회의 권한은 실질적으로 황제권에 예속되었다. 이 당시 독일제국의 재상은 프로이센 수상도 겸임했다. 또한 그는 의회가 아닌 황제에게만 행정적 책임을 졌기 때문에 황제와 더불어 국정을 실질적으로 운영해 나갈 수 있었다. 25-6)


비스마르크는 국민자유당(Nationalliberale Partei)의 협력으로 군사예산 문제를 해결했지만 제국 창건 이후부터 급격히 성장한 반대파의 세력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여야만 했다. 그중 가장 강력한 반대 세력으로 부각된 것은 가톨릭계의 중앙당(Zentrumspartei)으로, 그 구성원들은 비스마르크의 통일 작업에 불신을 제기해 온 인물들이었다. 1870년 12월 라이헨스페르거(Reichensperger)의 주도로 창당된 이 당의 강령은, 국가로부터 교회의 제 권리를 지키고 각 영방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연방 체제의 도입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창당한 지 얼마 안 되어 바이에른을 비롯한 남부 독일 국가들의 정치가들이 이 당의 핵심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교회 및 가톨릭 주민의 반발을 예상하지 못했던 비스마르크는 로마교회에 굴복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Heinrich Ⅳ)의 행보를 인용하여 '카노사(canossa)에는 결코 가지 않겠다'고 장담하면서도 교회에 대한 양보 정책을 펼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6-7)


1873년부터 시작된 수년간의 경제 불황은 주가의 대폭락과 수많은 기업의 도산 및 노동자들의 대량실업을 야기했다. 국민자유당의 지원하에 자유주의적 제 개혁을 시행함으로써 독일 경제는 비약적인 성장을 구가했지만 장기간의 공황으로 자유주의자들의 이상은 이제 어려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자 비스마르크는 국민자유당을 대신하여 보수당과 중앙당으로부터 지지를 얻고자 했다. 따라서 그는 지금까지 견지한 경제 정책의 근간을 포기하는 대신 새로운 경제 정책의 방향을 제시했다. 즉, 그는 보호관세 제도를 강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앙정부에 대한 지방정부의 부담금 역시 증액시켰던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이러한 정책적 변화는 자신과 국민자유당 사이의 균열을 가져왔지만 보수당과 중앙당과의 결속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은 점차 제국의 새로운 적으로 부상하고 있던 사회주의 추종 세력과의 대립에서 우위를 지켜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27-8)


비스마르크는 1878년 10월 21일 새로이 구성된 제국의회에서 사회민주주의 탄압법(Gesetz gegen die gemeingefährlichen Bestrebungen der Sozialdemokratie)을 통과시켜 사회민주주의적,) 또는 사회주의적, 무정부주의적 성향을 가진 단체들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또한 그러한 활동은 형법적 대상으로 간주되었고 당원들은 경찰의 감시까지 받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민주주의 탄압법은 2년간 한시적으로 시행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1890년까지 갱신ㆍ유지되었다. 1881년 11월 비스마르크는 제국의회에서 사회 입법의 취지를 담은 황제 교서를 낭독하고 노동자들에 대한 국가적 차원에서의 보호 및 부양 정책도 실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후 약 10년간 베를린 정부는 광범위한 사회복지 제도를 도입하는 데 적극성을 보였다. 자유주의 세력은 양분되었는데, 사회민주주의 탄압법 및 노동자 보호 입법에 반대했던 좌파와 달리, 우파 정치가들로 구성된 국민자유당은 사회 입법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것이다. 28-9)


실용적 외교 정책


1870년대 초부터 향후 약 20년 동안 비스마르크는 국제 정치 무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는데, 이 시기를 '비스마르크 시대(Ära von Bismarck)'라고도 한다. 비스마르크는 전쟁을 외교 수단으로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현실정치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독일 통합 이후에는 가능한 한 전쟁을 피하려고 했는데, 그것은 전쟁으로 인해 신생국가 독일이 위협받을 수도 있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인 것 같다.43) 그러면서 비스마르크가 항상 고려했던 것이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복수전(revanchekrieg)이었다. 여기서 그는 프랑스가 독자적으로 독일을 공격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반드시 동맹국을 필요로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프랑스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킬 경우 프랑스의 복수전은 실현될 수 없다는 확신하에 프랑스의 고립화를 독일 외교 정책의 가장 주요한 과제로 설정했다. 이후부터 그는 프랑스의 동맹국이 될 수 있는 러시아를 프랑스로부터 격리시키는 데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30)


1873년 비스마르크의 주도로 결성했던 삼제동맹은 붕괴될 위험이 컸다. 왜냐하면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와 오스트리아의 범게르만주의가 발칸 반도에서 충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러시아는 1887년 이 동맹 체제로부터 탈퇴했다. 여기서 비스마르크가 우려해 온 러시아와 프랑스의 접근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비스마르크는 그것을 막기 위해 1887년 6월 18일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Nikolaj Ⅱ)와 '재보장조약(Rückversicherungsvertrag)'을 체결했는데, 거기에는 독일과 러시아 중 어느 한 국가가 제삼국과 전쟁을 할 경우 다른 국가는 중립을 지킨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재보장조약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상호 방위조약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조약은 독일의 우방인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알 수 없게끔 비밀 조약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890년 3월 20일 비스마르크가 수상직에서 물러나면서 그의 복잡하고 위험한 동맹 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33-4)


실각의 과정


빌헬름 1세의 치세 말기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왕자 사이에 첫 번째 논쟁이 펼쳐졌다. 논쟁의 시발점은 유태인 및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반감을 가졌던 슈퇴커(Stoeker)가 1878년 기독사회당(Christlich-Soziale Partei)을 창당한 것에서 찾아진다. 슈퇴커는 창당 이후부터 자신의 정당을 통해 유태인과 사회주의자들을 폄하하는 데 주력했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유태인과 사회주의자들은 이질적인 집단이기 때문에 제국 내에서 배척당해야 하고 그렇게 해야만 사회적 안정과 평화가 구축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왕자 사이의 갈등을 유발시킨 주된 요인은 바로 이러한 슈퇴커의 조직적이고 반사회주의적인 행동에 대해 빌헬름이 공식적으로 동조했다는 것과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을 그가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당시 비스마르크는 신민 간의 갈등을 유발시킬 수 있는 슈퇴커의 주장에 대해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주장에 왕자가 동조한다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않으려고 했다. 35-6)


빌헬름 2세와 비스마르크 사이의 갈등은 사회 정책에서 본격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1889년 5월부터 루르(Ruhr) 지방과 슐레지엔(Schlesien) 지방에서 15만 명에 달하는 광부들이 파업을 전개했을 때, 비스마르크는 고용주들을 옹호한 반면, 황제는 순진하게도 노동자들을 지지했다. 당시 황제는 자신이 "가난한 계층의 황제(roi des gueux)"가 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비스마르크는 인기에 영합하는 빌헬름 2세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사회민주주의 탄압법에서도 양인은 견해를 달리했다. 빌헬름 2세는 탄압 위주의 사회민주주의 탄압법을 전면적으로 개정하려고 했지만, 비스마르크는 의회에서 기존의 탄압법을 큰 수정 없이 그대로 연장시키려고 했다. 1890년 1월 25일 야당과 보수주의자들은 제국의회에서 비스마르크가 상정한 사회민주주의 탄압법의 연장을 거부했는데, 그것은 비스마르크로 하여금 사회민주주의 탄압법에 대한 황제의 관점을 명확히 파악하게 하는 계기도 되었다. 38)


빌헬름 2세는 1890년 3월 20일 비스마르크의 사직청원을 수용했다. 외양상 황제는 아쉬운 마음으로 비스마르크를 떠나보냈고, 악화된 건강 상태와 그에 따른 그의 청원이 해임의 주된 이유인 것처럼 행동했다. 1890년 3월 29일 비스마르크는 베를린의 레어테르(Lehrter) 역에서 프리드리히스루로 떠났다.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비스마르크의 해임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는데, 그의 해임으로 인해 유럽의 평화가 위협받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비스마르크는 외교 정책에서 힘의 행보를 항상 올바르게 판단했고, 상대방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정확히 인지했다. 그러나 국내 정치에서 그는 이러한 통찰력을 거의 발휘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에서 종종 부각되었던 중용 유지가 국내 정치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못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국내의 정치 세력을 외교 정책에서의 힘의 게임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국내 정치적인 상황을 원만하게 처리할 수 없었던 것이다. 41-2)


은퇴 이후의 활동


빌헬름 2세는 「제국신문」에 정부 및 의회가 만장일치로 정한 비스마르크의 추도 기간 및 자신의 추도문을 발표했다. 거기서 그는 비스마르크가 빌헬름 황제 시기에 이룩했던 업적들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저해하는 요소가 있을 경우 무력과 피를 통해 그것들을 제거하겠다는 언급도 했다. 그런데 황제의 이러한 발언이 비스마르크를 잘못 이해하는 데 크게 일조한 것 같다. 또한 비스마르크를 칭송하는 문구들로 장식된 조형물들이 독일 전역에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정치가들 역시 빌헬름 2세와 마찬가지로 비스마르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것은 그들이 펼쳤던 정책에서도 확인되었다. 그들은 무력이란 방법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이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에서 확인되는 특징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빌헬름 2세가 모로코의 아가디르(Agadir)로 군함 '판터(Panther)'를 출항시킨 것 자체가 바로 '비스마르크식 정치'라 생각했던 것이다.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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