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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달러 이후의 질서 - 트럼프 경제 패권의 미래
케네스 로고프 지음, 노승영 옮김 / 윌북 / 2025년 10월
평점 :
들어가는 글
1장. 지배적 통화의 탄생
세계통화를 발행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이점이다. 반면에 세계통화 지위를 잃는 것은 뼈아픈 손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터져나오는 사회적 요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 공장과 기반시설을 재건해야 할 필요성, 식민 지배 권력을 계속 휘두르려는 욕망 등으로 인해(GDP의 240퍼센트를 넘어선 전후戰後 채무는 말할 것도 없다) 영국이 잇따라 재정 문제를 겪은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영국은 1956년, 1967년, 1976년 세 차례나 구제금융을 받으려고 국제통화기금IMF에 머리를 조아려야 했으며 이것 말고도 규모는 작지만 비슷한 여러 구제책에 기대야 했다. 파운드가 세계통화로 군림하던 영광의 시절은 아득한 추억이 되었다. 하지만 미국 달러가 이런 운명을 맞으려면 여러 번의 불운을 겪어야 할 것이다. 지배적 달러는 이제 중장년에 접어들었을지 몰라도 여전히 건강하다. 그럼에도 앞에 놓인 도전(이 책 마지막 부분에서 논의한다)을 마주하려면 우선 세계에서 어떻게 달러가 패권을 쥐게 되었는지 이해해야 한다. 21)
1부. 달러 패권에 맞선 과거의 도전자들
오늘날 유로는 국제 교역과 금융에서 확실히 달러의 가장 중요한 대안이다. 하지만 비EU 나라들 사이의 교역에서 널리 쓰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로는 세계통화가 아니다. 유로존 정부 부채 시장은 발칸화되어 있다. 투자자들은 독일의 부채와 이탈리아의 부채를 똑같이 취급하지 않으며 이는 당연하다. 강력한 재정 당국이 없다는 것은 유로화가 가진 또 다른 주요 한계의 뿌리다. 이를테면 범유로화 예금 보험 제도는 아직 하나도 없는데, 이것은 은행 연합이 온전히 발전하는 데 필요한 기본 조건이다. 자본시장 연합이나 더 온전하게 통합된 은행 시스템이 없고 유럽 정부 부채가 파편화된 상황은 달러와의 경쟁에서 유로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주요 걸림돌이다. 이런 탓에 최근 수십 년간 유럽의 성장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유럽이 역동성을 잃은 요인은 높은 세율과 방만한 복지 등 여러 가지다. 미국과의 격차 중에서 70퍼센트 이상은 낮은 생산성 때문이므로 지금의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50-3)
유로화는 부정할 수 없는 강점을 보유했으며 이 강점은 향후 수십 년 안에 전면으로 등장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유럽중앙은행ECB의 독립은 유럽연합의 기초가 되는 1992년 마스트리흐트 조약에 명시되어 있다. 이에 반해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1913년 의회 입법으로 제정되었다. 그렇기에 만일 의회가 원한다면 연방준비제도는 폐쇄되어 몇 주 안에 미국 재무부에 재흡수될 수 있다. ECB는 헌법적 지위를 누리며 주요 임무는 유로존 전역에서 낮은 인플레이션을 유지하는 것이다. 낮은 인플레이션을 유지하는 방법이 명문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초점이 좁아서 창의적 해석의 여지가 크지 않다. 반면에 물가 안정과 최대 고용을 유지한다는 연준의 이중 의무는 해석의 여지가 크며 관례적으로 연준은 이를 낮은 인플레이션과 완전고용으로 해석한다. 이를테면 연준은 인플레이션과 실업 중 어느 쪽에 비중을 둘지와 관련하여 정치적 압력을 훨씬 많이 받는다. ECB가 공동 책임으로 운영되는 것도 안정성의 한 요인이다. 53)
2부. 중국: 현재의 도전자
중진국 함정에 빠지고 마는 근거는 여럿 있다. 아마도 가장 주된 근거는 빠르게 발전하는 나라가 부유해짐에 따라 (정부 형태와 무관하게) 포퓰리즘적 재분배 압박이 어떤 식으로든 성장을 탈선시킨다는 것이다. 전형적 사례를 보자면 성장이 느려지고 정부가 성장을 지탱할 방법을 찾을 때는 대외 차입을 비롯한 금융 탈규제가 강력한 단기적 해결책일 수 있다. 신생 정부의 제도가 허약하면 급증한 차입은 생산성이 낮은 투자로 흘러들기 쉬운데, 결국에 가서는 투자를 정당화하는 데 필요한 성장을 이루지 못한다. 차입이 단기적 해결책으로 효과를 낼지도 모르지만, 성장이 불가피하게 다시 느려져 누적된 부채를 지탱할 수 없음이 분명해진다. 금융 압박과 자금 부족은 여러 해 동안 쌓이다 어느 시점이 되면 한꺼번에 폭발하기도 한다. 대외 차입이 많았다면 외국 채권자들이 도피하고 그와 더불어 환율이 폭락하고 달러 부채를 자국 화폐 소득으로 상환하는 금융 부담이 치솟는다. 그 결과는 지독한 금융위기다. 87-8)
3부. 나머지 모두의 문제: 달러와 함께 살아가기
고정환율제는 퇴출되었다. 1997~1998년 부채 위기 이후 아시아 각국은 유연한 환율제를 채택하기로 결정했다고 IMF에 보고했다. 하지만 그 나라들의 달러 환율을 흘끗 보기만 해도 대부분의 경우 변동폭이 크지 않거나 변동 속도가 빠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던 걸까? 대부분의 아시아 경제국은 환율을 안정시키려고 폭넓게 개입하면서도 자신들이 유연한 환율제를 채택했다고 IMF에 보고했으며, 이에 따라 IMF는 공식 환율 분류 문서에서 이 환율제들이 유연하다고 기록했다. 요약하자면 많은 신흥시장, 특히 아시아 신흥시장들은 워싱턴 합의를 거부했다기보다는 핵심 요건을 채택하되 나름의 개선점을 첨가하는 방안을 선택했다. 아시아의 정책 입안자들은 자본 통제와 금융시장 규제가 나름대로 유용하기는 하지만 거시경제 정책의 심각한 비일관성을 만회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준비금을 비축하고 규제를 강화하고 일부 통제를(특히 자본 유입과 관련하여) 도입했다. 131, 135-6)
2000년대 초 나를 비롯한 많은 경제학자는 아시아가 달러 보유고를 꾸준히 늘리는 바람에 세계경제의 골치 아픈 불균형이 악화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이체 방크의 세 이코노미스트(마이클 둘리, 데이비드 폴커츠-랜도, 피터 가버는 셋 다 학자 출신이다)는 아시아가 전후戰後 유럽과 같은 발전 전략을 따를 뿐이라고 주장했다. 성장을 북돋우려면 저평가된 환율을 유지해야 하므로 개입과 자본 통제를 혼합하여 구사한다는 것이다. 세 사람은 국제 통화 체제가 (미국, 유럽, 일본을 주로 아우른) 전후 브레턴우즈 체제와 비슷한 브레턴우즈 II 체제로 진화했다고 묘사했다. 그들의 관점에 따르면 이것은 위기로 비화할 위험하고 불공정한 체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아시아 경제(와 이를 모방한 몇몇 나라)가 매우 합리적인 발전 전략을 따른다고 주장했다. 즉 미국의 공공·민간 채무자들은 불평할 게 아니라 이 체제 덕분에 미국인들이 막대한 해외 자금을 유난히 낮은 금리로 빌릴 수 있다는 것에 고마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136)
환율 저평가 이야기에는 중국 당국이 자국 경제의 초경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동원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 빠졌다. 그것은 중국 농촌에서 도시와 제조업 중심부로 해마다 꾸준히 이주하는 수백만 명의 인구다. 서구 경제가 맞닥뜨린 진짜 문제는 도시의 생산 중심지에서 일할 기회를 찾아 해마다 밀려드는 중국 빈농의 물결이었다. 외환시장 개입은 중국 통화의 이른바 저평가에 일조했을지는 몰라도 그 영향은 부차적이었을 것이다. 삼인조 논문의 두 번째 주장은 아시아에서 흘러드는 값싼 자금이 미국에 순수하게 이로웠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미국 은행 규제 담당자들이 금융위기가 신흥시장에만 일어날 거라 생각하지 않고 이른바 자본 유입 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금융 규제에 허점이 있는 나라에 외국 자본이 쏟아져 들어오면 빈틈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질 수 있다. 그렇기에 미국의 명목상 대외 차입이 그 자체로 세계 금융위기를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불에 기름을 부은 것은 분명하다. 137)
4부. 대안 통화
유발 노아 하라리는 화폐가 본질적으로 사회적 관습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모두가 무언가를 화폐로 받아들이기로 한다면 그것이 미크로네시아 얍 섬의 거석이든 중세 일본의 쌀이든 실제로 화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정부가 발행하는 국가 통화는 어떤 대체물이나 사적 통화도 넘볼 수 없는 근본적 이점이 있다. 정부는 모든 피고용인과 공급업자들에게 자신의 통화로 급여를 지불할 수 있으며 정부 통화로 세금을 납부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정부는 자신의 통화로 표시된 부채를 발행할 수 있다. 미국 달러가 ‘법정통화’ 지위를 가진다는 것은 부채가 미국 달러로 상환될 경우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정부는 다양한 활동에서 자신의 통화가 법적 회계 단위로 쓰이도록 요구할 수 있다. 이 모든 이점이 어우러져 발생하는 네트워크 효과 덕분에 정부 통화는 넘볼 수 없는 우위를 누린다. 이걸로 모자란다면 은행 예금의 정부 통화 표시를 의무화하는 등의 제약을 추가할 수도 있다. 151)
규제에 반대하는 격렬한 로비 시도를 제외하면 적어도 울타리를 둘러쳐 암호화폐 이용을 제한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특히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암호화폐를 운용할 때 ‘거래소’를 이용하기 때문에 거래소를 규제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이 ‘온 체인’(블록체인 위에서) 암호화폐 거래가 너무 어렵고 너무 많은 전문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소를 잘못 입력했다가 전 재산을 영영 잃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거래소는 블록체인 용어로 스스로를 치장하려 안간힘을 쓰지만 실은 은행에 불과하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블록체인에 보유한 비트코인은 100달러 지폐와 비슷하고, 거래소에 보유한 비트코인은 은행에 넣어둔 돈과 비슷하다. 거래소는 은행과 꽤 비슷하지만 커다란 차이가 하나 있다. 거래소는 정부가 최종 대부자로서 뒤를 받쳐주지 않으며 암호화폐 업계가 기존 은행 수준으로 규제받지 않는 한 그렇게 될 가망은 없다. 다시 말해 정부는 최종 레버를 쥐었다. 152-3)
골수 암호화폐 신봉자들은 암호화폐를 규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코드가 법이다”라거나 “암호화폐는 검열에 저항력이 있다”라는 말도 있으니 말이다. 이 논리의 문제는 설령 정부가 암호화폐를 완전히 금지하지는 못할지라도 암호화폐의 이용을 번거롭고 값비싸게 만드는 법률을 제정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암호화폐가 정부 통화에 맞서 경쟁력을 가지는 데 필요한 네트워크 효과를 무력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그렇다고 블록체인 기술이 다른 측면에서 금융에 혁명적 영향을 미칠 뚜렷한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의 통화 독점은 금융위기에 대처하고 공공부채 위기를 피하는 데 필수적이다. 비트코인 본위제의 문제들 중 상당수는 금 본위제와 동일할 것이다. 간헐적으로 안정을 가져다줄 수는 있겠지만 만에 하나 위기가 일어나면 그 규모가 훨씬 커질 우려가 있다. 게다가 경기 역행적 케인스 통화 정책을 실행할 능력이 없으면 경기 순환이 훨씬 극심해질 수 있다. 153-5)
화폐에 대한 유발 노아 하라리의 설명이 비트코인 전도사들에게 더없는 희망을 선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암호화폐가 투기를 제외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생각은 암호화폐의 킬러 앱(시장에 등장하자마자 다른 경쟁 상품을 몰아내고 시장을 장악하는 새로운 서비스나 상품―옮긴이)을 무시하는 처사다. 점점 커져가는 지하경제 말이다. 역사적으로 현금은 은밀한 거래에서 선호되는 수단이었다. 비트코인이 합법적 과세 거래에서는 정당한 쓰임새가 거의 없을지 몰라도 지하경제에서 거래를 촉진하는 데 널리 쓰인다면, 이것을 순전히 투기적인 자산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규제 당국이 서투르고 법 집행이 무르다고 항의할 수는 있지만 비트코인의 본원적 가치가 0이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규칙을 어기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사회를 기준틀로 삼지 않는다면 말이다. 사실 수많은 연구에 따르면 비트코인은 폭넓은 불법 활동에 쓰이며 랜섬웨어 공격과 다크웹 시장에서 압도적으로 선호되는 통화다. 157-9)
스테이블코인은 비트코인과 같은 매력도 있지만 전혀 다른 부류다.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가장 널리 쓰이는 두 가지 코인인 테더와 USD 코인USDC이 단연 가장 중요하다. 둘 다 가치가 1달러에 고정되어 있다. 세 가지 핵심 문제가 있다. 첫째, 스테이블코인 공급자의 뒤에 최종 대부자가 없을 경우 스테이블코인이 재무부 채권 같은 안전한 달러 표시 증권으로 충분히 보증되지 않으면 인출 사태를 겪을 위험이 있다. 이것은 고정환율제에서 일어나는 인출 사태와 매우 비슷하다. 둘째, 보유 증권에 대한 이자를 정부 소유의 중앙은행이 아니라 스테이블코인 공급자가 수취한다. 셋째, 스테이블코인이 충분히 보급되고 편리해지면 은행의 중개자 역할을 박탈할 우려가 있다. 은행이 대부하려면 자본이 있어야 하는데, 그 필수 요소를 공급하던 통상적 예금자들이 스테이블코인으로 갈아타기 때문이다. 이 모든 문제는 이론상으로는 해결할 수 있지만 걸림돌과 부작용도 많다. 물론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있지만 정부만이 가능하다. 162-3)
유럽중앙은행, 영국은행, 캐나다은행을 비롯한 전 세계 주요 중앙은행 중 상당수는 독자적인 중앙은행 디지털 통화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즉 ‘CBDC’의 개발을 꽤 많이 진척시켰다. 주도적 CBDC를 내놓으려는 경주에서 달러의 유리한 출발선과 미국의 전반적 기술 우위를 감안컨대 마음만 먹으면 미국의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다. 연방준비제도가 (소매) CBDC의 잠재적 ‘이익과 위험’을 공식적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한 때는 2022년 초다. 미국의 굼뜬 행동은 납득할 만하다. 현재의 통화 체제에서 달러가 왕좌에 있는데 뭐하러 평지풍파를 일으키겠는가? 디지털 통화의 발전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달러의 위상을 깎아내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를테면 디지털 통화는 다른 통화에 대해 고도로 유동적인 시장을 창출하여 달러의 네트워크 우위를 감소시킬 수도 있고, 미국 규제 당국의 권한 밖에 있는 국제 지불의 대안적 ‘레일rail’(거래가 처리되는 매체인 디지털 전송·처리 시스템―옮긴이)을 도입할 수도 있다. 164-5)
모든 우려(사이버 위험, 시스템 장애, 중개자 역할 박탈, 과도한 정부 권력)는 왜 새로운 금융 기술을 점진적으로 시행해야 하는지, 왜 미국보다 훨씬 작은 나라에서 먼저 실험하는 것이 이상적인지 잘 보여준다. 연준은 문제가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생기길 바랄 것이다. 미국은 지난 수십 년간 사실상 모든 거래 신기술에서 새로운 혁신을 받아들이는 데 늑장을 부렸다. 신용카드에 칩을 넣는 데에도 오래 걸렸다. 외국 중앙은행의 CBDC(세계 수준의 금융 시스템을 갖춘 영국을 포함)와 경쟁해야 한다는 우려가 커지자 백악관과 연방준비제도는 자신들이 이 문제를 눈여겨보고 있다고 선언했다. 미국이 언젠가 디지털 달러를 도입할지도 모른다는 위협만으로도 외국 중앙은행들은 자체 CBDC 도입 계획을 포기할 것이다. 체스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위협이 실행보다 세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외국 중앙은행들이 미국에 도전장을 내밀거나 (중국처럼) 자국 통화를 달러와 맞먹게 하고 싶어 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167-8)
5부. 지배적 통화에 따르는 혜택과 부담
권력의 순수한 희열을 제외하면 달러 패권은 미국에 과연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매우 구체적인 유익 한 가지는 외국인들이 놀랍도록 다량의 미국 부채를 기꺼이 보유한다는 것이다. 덕분에 미국 정부는 지불해야 하는 금리를 낮출 수 있다. 달러 부채가 웃돈이 붙어 팔리는(더 낮은 금리를 지불한다는 뜻) 이유 중 하나는 단연코 미국의 금융시장이 가장 깊고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미국 재무부 부채를 별도의 거래 비용 없이 빠르게 팔기는 식은 죽 먹기다. 즉 미국 부채는 유동성이 매우 크다. 또한 적어도 약속된 만큼의 달러를 상환받는다는(즉 깜짝 인플레이션을 배제할 수 있다는)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미국 부채는 매우 안전하다. 미국 정부 부채, 특히 재무부 단기 부채의 수요를 떠받치는 요인 중에서 덜 분명하지만 극도로 중요한 것은 전 세계 금융거래에서 담보로 널리 쓰인다는 사실이다. 재무부 채권은 담보물로 쓰여 화폐와 거의 비슷하기에 (경제학 용어로) ‘보유편익’을 누린다. 172)
수년간 가장 큰 수수께끼 중 하나는 미국인들이 해외에서 차입하는 엄청난 속도로 보건대 어떻게 미국이 공식 통계에서 보는 것보다 더 깊이 부채의 늪에 빠져들지 않았는가다. 특히 흥미로운 시기는 1998~2010년이다. 이때 미국 순 대외 채무의 증가 속도는 미국의 차입 규모에 비하면 달팽이걸음이었다. 이를테면 2010년이 되었을 때 미국의 누적 경상수지 적자는 수입의 45퍼센트에 육박했지만 대외 채무는 17퍼센트밖에 늘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던 걸까? 공교롭게도 대미 외국인 투자는 오랫동안 채권, 특히 단기 채권에 치우쳐 있었다(채권 대 위험자산 비율이 약 60대 40). 하지만 미국의 대외 투자는 정반대로, 주식과 대외 직접 투자가 약 60퍼센트였다. 이 사실만으로도 평균적으로 미국인들이 대체로 높은 수익을 거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주식이 채권보다 높은 실적을 올리니 말이다. 대외 직접 투자는 훨씬 높은 수익을 가져다주는 또 다른 형태의 투자다. 179-80)
외국 자산에 대한 투자자로서 미국인은 유일무이하다고 말할 만한 또 하나의 이점이 있다. 그것은 미국이 역사적으로 이민자의 나라였다는 것이다. 미국 이민자, 특히 1, 2세대 이민자는 여전히 모국에 강한 연대감을 느끼며 모국의 제도를 잘 안다. 그 덕에 미국 투자 자금을 모국에 끌어들이는 데 커다란 비교 우위를 누린다. 최근 나머지 세계가 쌓은 부가 더욱 집중되고 외국 가정이 자녀를 미국 대학에 보내어 미국과 연결을 맺으면서 외국인 직접 투자 채널은 양방향 도로에 더 가까워졌는지도 모른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로 인해 많고 다양한 이민자 인구가 미국에 선사하는 투자 이점이 일부 상쇄되었다. 위험을 대하는 미국인의 태도가 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 좋게든 나쁘게든 미국 체제의 전체 구조는 위험 감수에 보상하며(파산법이 너그럽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투자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훨씬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미국인은 다른 큰 나라의 국민보다 훨씬 부유하며 부자는 더 큰 위험을 감당할 수 있다. 184)
지배적 세계통화를 발행함으로써 미국은 정보에 특권적으로 접근하고 강력한 금융 제재를 부과하는 등의 비정형적 편익에 더해 뚜렷한 양적 편익을 얻는다. 그렇다면 지배적 통화 지위를 유지하는 데에는 상당한 비용도 따를까? 달러는 이제 금으로 태환되지 않는다. 미국 재무부 부채에는 이제 금약관(장래의 화폐 변동으로 인한 채권자의 손해를 막기 위하여, 채무자가 빚을 금이나 금화로 갚거나 금화 가치로 환산하여 갚도록 규정한 금전 채권의 약정―옮긴이)이 없다. 달러를 금으로 보증한다는 약속이 사라진 지금 지배적 통화 지위에 따르는 심각한 단점이 하나라도 있을까? 그런 단점 중 하나는 매우 명확하고 순전히 경제적인 단점으로, 미국이 침체기에 글로벌 포트폴리오에 일으키는 막대한 손실과 관계있다. 미국이 막대한 손실을 일으키는 한 가지 이유는 세계의 은행가이자 비교적 위험한 포트폴리오를 보유했다는 점이고 또 다른 이유는 달러가 글로벌 침체기에 절상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192)
군사력이 통화 패권에서 얼마나 필수적인 요소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일 수는 있지만 논란의 여지는 크지 않다.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은 모두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했을 때 자국 통화의 영향력이 정점에 이르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세계 초강대국 지위를 누렸다. 군사력과 통화 패권은 아무리 못해도 상보적이다. 달러 패권은 군비 조달을 용이하게 하며 특히 갑작스러운 군비 증강에 요긴하다.2 더 미묘한 논점은 미국의 군사력이 국제 금융시장과 국제 금융 기구의 규칙을 확립하고 정책을 설정하는 데에 추가 지렛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볼 때 지정학적 초강대국이 아닌 나라는 지배적 통화의 역할을 지속하기 힘들다. 유럽은 미국의 방패 뒤에 숨을 수 있지만 여러 중대 사안에 대해 영향력과 능력이 미비하다. 세계 금융 시스템은 규칙에 좌우되는데, 이 장 앞부분에서 설명했듯 경제·군사 강국인 나라는 규칙을 제정할 어마어마한 힘이 있다. 그렇지 않다는 생각은 위험할 정도로 어수룩하다. 193, 196)
이 장 첫머리에서 언급했듯 경제학자들은 달러 지배의 또 다른, 전혀 별개의 비용에도 주목했다. 그것은 전 세계가 심각한 침체와 (정도는 덜하더라도) 불황에 빠졌을 때 보험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주요소가 있다. 하나는 위기가 터졌을 때 달러가 절상되곤 한다는 사실과 관계있다. 그럴 땐 자금이 대부분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이것은 미국이 저위험 채무국으로 간주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미국 시장이 유난히 깊기에 동결될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기도 하다. 달러가 등귀하면 외국의 포트폴리오에 들어 있는 미국 자산의 외국환 시장 가치가 증가하고 미국의 포트폴리오에 들어 있는 외국 자산의 달러 시장 가치가 감소하는 효과가 발생한다. 이것을 ‘보험’이라고 부르는 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 덕분에 달러 표시 채권에 대한 투자는 위기에 대비한 더 나은 헤지가 된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것은 미국 재무부 채권의 금리가 유난히 낮은 이자를 지급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다. 196)
6부. 달러 패권의 정점
달러의 패권과 안정에 대한 외부의 도전이 중대하기는 하지만 가장 큰 약점은 내부에 있다. 통화를 보증하는 귀금속이 없는 순수한 법정통화의 세상에서는 인플레이션을 (합리적 수준으로) 안정시키겠다는 연방준비제도의 약속에 대한 신뢰야말로 세계경제가 안정을 유지할 것인가, 거시경제 석기시대(말하자면 1970년대)로 돌아갈 것인가 사이에 버티고 서 있는 가장 중요한 보루다. 연방준비제도의 독립성이 금과옥조라는 생각은 어수룩하다.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라는 정치적 압력이 너무 거세면, 특히 재정 정책이 명백히 지속 불가능하면 연준이 끝끝내 저항할 수는 없다. 대통령은 연준 이사진의 임명을 좌우하며 의회는 연준의 예산을 좌우하고 이론상 연준을 눈 깜박할 사이에 재무부 산하 기관으로 복귀시킬 수 있다. 코로나 시기에 그랬듯 이따금 연준이 무릎을 꿇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중앙은행이 너무 자주 너무 쉽게 굴복하면 기대 인플레이션이 점차 상승하고 불안정이 뒤따를 것이다. 200)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면 실물경제가 여러모로 왜곡되며 금융 시스템에 혼란이 일어난다. 무엇보다, 높고 안정된 인플레이션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전 30년 가까이 득세한 초저인플레이션 시기는 달러가 꽤 안정된 가치 저장 수단으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저인플레이션 시대는 더 많은 사람, 기업, 국가가 달러를 신뢰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달러 이용자와 쓰임새의 저변을 구축했으며 달러의 네트워크 효과를 보강하고 강화했다. 연준이 다시 한번 인플레이션 앞에서 갈팡질팡하면 네트워크 효과가 (하룻밤 새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점차 깎여나갈 것이다. 달러는 다른 통화(이를테면 유로화, 스위스 프랑, 어쩌면 일본 엔화)로 대체될 것이다. 위안화를 국제화하려는 중국의 시도에도 틀림없이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안정된 달러 본위제 하에서 승승장구하던 미국의 금융 부문은 쪼그라들 것이다. 설령 미국 달러가 선두를 유지하더라도 일부 지역에서는 경쟁자들이 발판을 마련할 것이다. 203-4)
그렇다면 중앙은행 독립을 뒷받침하는 논거가 매우 뚜렷해진 지금 왜 걱정거리가 남았을까? 한 가지 문제는 저인플레이션 시대에 너무 많은 사람이 안정된 인플레이션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중앙은행이 목적을 바꿔 다른 문제(이를테면 지구온난화)를 다루는 게 어떻겠느냐고 묻기 시작했다. 오랜 제로 금리 시대(중앙은행들은 단기 금리를 0이나 심지어 그보다 약간 아래로 끌어내렸다)에 통상적 금리 정책이 마비되면서 많은 진지한 사람들은 인플레이션이 다시는 중대한 우려 사항이 아닐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으며, 중앙은행이 독립성과 발권력을 가지고서 다른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이 커졌다. 진보 진영에서는 연준이 불평등을 줄이고 사회정의를 구현하고 (물론!) 환경을 치유하는 쪽으로 에너지를 더 쏟아야 한다고 아우성쳤다. 물론 이것들은 모두 대견한 목표다. 문제는 중앙은행이 이 중 어느 하나에서라도 주도적 역할을 할 전문성, 정책 수단, 민주적 책임성을 갖췄는가다. 204-5)
현재 미국이 노골적으로 채무불이행을 선언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인플레이션이라는 더 쉬운 길이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미국 시장성 부채의 양은 나머지 모든 선진국을 합친 것과 맞먹는다. 미국 부채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데도 총 연간 이자 지불금으로 따진 부채 상환 비용은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때로는 부채 규모가 증가하는데도 이자 지불금이 감소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것은 주로 세계 금융위기 이후 실질금리가 급전직하한 덕분이었다. 물가조정 10년물 미국 재무부 채권에 대한 수익률은 2012년부터 2021년 말까지 평균 0에 가까웠다. 단기 부채에 대한 실질금리는 뚜렷한 마이너스였다. 재무부 채권에 대한 실질금리가 마이너스라는 것은 채권 보유자들이 ‘안전한’ 부채를 보유하는 특권의 대가를 미국 정부에 치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설령 이자를 받더라도 해마다 인플레이션 때문에 남은 원금과 이자의 구매력이 평가절하되기 때문에 채권 보유자들은 순손실을 입는다. 212-4)
어떤 사람들은 2024년 부채가 GDP의 250퍼센트를 넘어선 일본을 예로 들어 부채가 높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무엇에 대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일까? 미국 정부는 쓸 수 있는 패가 많으며 지배적 통화 발행국으로서 다른 나라보다 더 많이 차입할 수 있다. 그럼에도 채무불이행(가능성이 높진 않지만 현재의 정치 환경에서 배제할 수는 없다), 인플레이션(미국 부채의 대부분이 단기 부채이고 10퍼센트만이 물가에 연동되기 때문에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고서는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수 없다), 금융억압(기본적으로 미국인들에게 직간접 부채 보유를 강제하는 것) 등 기본적 수단은 동일하다. 이 중에서 훈훈하거나 고통이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늘날 중앙은행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더 까다로운 환경을 맞닥뜨린 탓에 앞으로 10년 안에 또 다른 인플레이션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매우 높은 부채는 설령 인플레이션 압박에 일조하지 않더라도 그 밖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223)
미국 부채의 상당 부분을 외국이 보유했다는 점은 일반적으로 달러에 매우 유리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모든 부채를 국내에 보유하는 경우보다 훨씬 취약해진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미국 부채를 보유한 외국인들이 느닷없이 확신을 잃었을 때 발생할 위험 때문에 현대판 ‘트리핀 딜레마’(기축통화 발행국이 기축통화의 국제 유동성을 유지하기 위해 경상수지 적자를 지속하면 기축통화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하는 상충 관계―옮긴이)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트리핀 딜레마와의 유사성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지점은 미국 정부가 외국인을 붙잡아둘 능력이 자국민에 비해 훨씬 적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자국민을 상대로 미국은 금융억압을 실시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규제를 확대하여 은행이 울며 겨자 먹기로 부채를 떠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금융억압은 자국민에게만 부과할 수 있는 일종의 세금이다. 금융억압은 외국인 보유자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돈을 빼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226-7)
행운과 실력은 미국 달러의 전후戰後 궤적을 묘사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등식의 ‘행운’ 부분을 너무 자주 잊어버린다. 러시아가 1960년대 중반 경제를 자유화했다면, 일본이 1980년대 중반 우격다짐에 밀려 통화 절하로 불안정을 자초하지 않았다면, 프랑스가 2001년 그리스를 유로화에 포함하자고 주장하지 않았다면, 중국이 2010년대 온전한 변동환율제를 채택했다면 달러는 여전히 꼭대기에 있었겠지만 오늘날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대안적 현실들 중 어느 것에서든 미국 금리는 더 높았을 것이고 달러의 과도한 특권은 더 적었을 것이다. 달러 패권이 맞닥뜨린 최대 위험은 내부에 있다. 어느 당이 집권하든 마찬가지다. 집권당이 너무 많은 권력을 누리는 게 문제다. 지난 수십 년간 달러 패권이 승승장구하면서 미국 정치인(과 많은 경제학자)들은 초저금리가 미래에도 거의 틀림없이 정상적 규범일 것이라는 착각에 빠졌다. 그들의 위안거리는 고전적인 ‘이번엔 다르다’ 사고방식이다. 231)
역사에서 보듯 세계 금융위기 이후 시기를 풍미한 초저금리는 훨씬 오랜 추세로부터의 일시적 일탈로 보아야 한다. 빠르게 증가하는 부채가 방치되고 대규모 적자를 해소할 정치적 의지가 부족하다면 미국과 전 세계는 평균 실질금리와 인플레이션이 더 높아지고 부채 위기와 금융위기가 더 자주 발생하는 세계 금융 변동성의 시대를 오랫동안 겪을 것이다. 딕 체니 전前 미국 부통령의 ‘적자는 문제가 아니다’ 가설은 금리가 떨어지고 또 떨어지던 시기에는 좋은 생각처럼 보였다. 하지만 금리가 (불황을 제외하고) 정상화되는 지금은 글러먹은 생각이다. 지난 70년에 걸친 세계 통화 체제의 발전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을 단 하나만 꼽자면 그것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고 실제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고삐 풀린 미국 부채 정책이 높은 실질금리와 지정학적 불안정을 계속 맞닥뜨린다면, 정치적 압력 때문에 연방준비제도가 인플레이션을 일관성 있게 길들이지 못한다면 달러는 모두의 문제가 될 것이다. 2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