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오의 딸 - 위대한 과학자를 완성시킨 비밀의 기록 데이바 소벨 컬렉션
데이바 소벨 지음, 홍현숙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제1부 피렌체로


"1610년 1월 초에 갈릴레오는 그 무엇보다 대단한 발견을 했다. 그것은 이른바 궤도를 그리며 목성 주위를 도는, '창세기부터 오늘날까지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네 개의 행성'이었다. 코시모 1세는 1569년 대공의 직위에 오르기 전인 1537년 공작이 되었을 때, 메디치 가를 위한 고전적인 신화를 창출해냈다. 코시모cosimo는 그 이름에 담긴 의미처럼 자신을 지구에 사는 우주cosmos의 화신으로 형상화시켰다. 이 같은 고등 전술로 그는 오랫동안 불편한 연합 관계를 맺어온 다른 유력한 지배층 가문으로부터 권력을 빼앗는 것이 메디치 가의 숙명임을 피렌체 시민들에게 설파할 수 있었다. 왕가의 사실상 우두머리인 코시모 1세는 자신을 로마 주신主神의 이름을 딴 주피터 행성과 동일시했다. 그래서 그가 거주하고 다스리는 시뇨리아 궁을 이 올림피아의 주제를 강조한 프레스코 벽화로 가득 채웠다. 갈릴레오는 자신이 만든 망원경을 베네치아에 바쳤고, 이제 피렌체에는 목성의 위성들을 헌정할 작정이었다."(60)


"갈릴레오의 이전 동료였던 피사 대학의 교수를 비롯한 유명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부동의 우주'에 반하는 새로운 주장의 근거인 이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갈릴레오는 이 같은 주장의 우수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로마로 건너가 자신의 발견을 알리기로 했다." "로마로 건너간 갈릴레오는 교부 클라비우스가 주임 수학자로 재직 중이던 예수회의 중앙 교육 기관인 콜레조 로마노의 인정을 받았고 그로 인해 큰 힘을 얻었다. 교회 측이 천문학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하는 클라비우스와 그의 훌륭한 동료들은 그 망원경을 독자적으로 입수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이제 갈릴레오가 관찰한 내용 모두를 인증해주는 단체 역할을 했다. 이 예수회 소속 학자들은 우주는 불변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믿음을 고수해야 함에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본 증거까지 부인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을 방문해달라는 흔치 않은 초대로 갈릴레오의 영광을 높여주기까지 했다."(70-2)


"『물에 뜨는 물체 혹은 물속에 가라앉는 물체에 관한 논쟁』은 물에 뜨거나 가라앉는 물체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에 대한 도전일 뿐 아니라 태양의 완전함을 손상하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물에 뜨는 물체』를 유럽의 학자들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일종의 공용어인 라틴어로 쓰지 않고 이탈리아어를 사용해 학문적인 전통을 조롱하기까지 했다." "갈릴레오의 이 같은 행동은 동료 철학자들의 분노를 사고 이들에게 모욕감을 안겨주었다. 여러 사람 앞에서 그와 토론을 벌여 패한 피렌체 아카데미의 루도비코 델레 콜롬베 같은 이들은 특히 그 정도가 심했다. 콜롬베는 갈릴레오의 반反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응해 '반갈릴레오'를 선언했다. 반대로 갈릴레오의 지지자들은 '갈릴레오주의자'를 표방했으며 콜롬베의 이름을 조롱하며 그의 얄팍한 철학을 더욱 신랄하게 공격했다. 콜롬베가 이탈리아어로 '비둘기'를 뜻하므로 이들 갈릴레오를 비판하는 무리를 '비둘기 연맹'이라고 불렀다."(80-1)


"1613년 봄 로마에서 린체이 아카데미의 체시 공은 당시 진행 중인 연속물의 일환으로, 벨저가 쓴 상대적으로 짧은 네 통의 편지와 갈릴레오가 쓴 매우 긴 세 통의 답장을 『태양의 흑점과 그 현상에 관한 역사와 증명』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벨저는 한 달도 더 걸린, 태양을 뒤쫓으며 만든 뛰어난 조판으로 책을 아름답게 장식해주었다. 그러나 이 책에 담긴 내용은 갈릴레오와 그의 공공연한 적들 사이에 이미 형성되어 있던 긴장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 책에 대해 토론하는 과정에서 아직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도 새로운 적이 생겨났다. 게다가 코페르니쿠스가 몇 해 전 다른 나라에서 조용히 사망함에 따라 갈릴레오가 태양중심설의 아버지로 인식되고 그로 인해 비난받기 시작했다. 『물에 뜨는 물체』를 공격한 '비둘기 연맹'은 갈릴레오에 반대하고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지지했지만 『태양의 흑점에 관한 편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제 성경이라는 한층 더 높은 권위에 호소하고 나섰다."(95-6)


"교황은 신학 분야의 고문인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추기경을 불러들였다. 그는 조르다노 브루노의 재판 때 종교재판관을 지낸, 뛰어난 지성을 지닌 예수회 수사였다. '이단자의 심판관'인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린체이 아카데미의 체시 공에게 자신은 코페르니쿠스의 견해를 이단으로 생각하며 지구가 움직인다는 주장은 성경에 위배된다고 털어놓은 일이 있었다. 벨라르미노는 약 15년에 걸쳐 여러 사교 모임에서 갈릴레오와 만나 아는 사이였다. 1611년에는 갈릴레오의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들을 직접 보았을 뿐 아니라, 피렌체에서 직접 천문학을 공부한 인물로서 갈릴레오의 업적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고 치하한 바 있었다.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갈릴레오의 유일한 잘못이라고 생각한 것은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가설이 아닌 현실로 대하는 고집이었다. 어쨌든 증거가 없었다. 나아가 추기경은 갈릴레오가 사람들에게 천문학을 가르치는 데 그쳐야지, 성경의 해석에 대해서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119-20)


"1616년 3월 5일, 금서위원회는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에 대한 공식적인 선언을 공표했다. 즉 그의 주장이 '성서에 위배되는 거짓'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교령에는 관계자들의 이름과 이들에게 가하는 조치가 명시되었다. 문제 되는 내용이 수정될 때까지 코페르니쿠스의 책을 일시적으로 금하며 '이러한 주장이 가톨릭교의 진리에 대해 편견을 유포시키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를 성경에 부합시키려는 시도를 한 책만이 이 혹독한 처분에서 벗어났음을 분명히 깨달았다. 교령에도 언급되지 않고 어떤 개인적인 견책도 받지 않은 갈릴레오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사실 그가 지지한 학설은 비난을 받았으나, 그것을 가설로 다루는 것과 언젠가는 그 교령이 효력을 상실할 것이라고 희망을 품는 것은 자유였다. 그는 변함없이 피렌체의 메디치 가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이탈리아 과학의 거장이었다. 그는 3월 11일에는 파울루스 교황과 한 시간 가까이 개인적인 면담을 하기도 했다."(125-6)


제2부 벨로스구아르도에서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갈릴레오에게 처음 편지를 보낸 때는 1611년이다. 이때 그는 갈릴레오에 대해 말하길 장수하여 남들의 삶을 이롭게 해야 할 위대한 능력을 지닌 고귀하고도 독실한 인물로 묘사했다. 이후 몇 년간 이 추기경의 열정은 더욱 불타올라, 1620년에 「위험한 추종」이라는 시를 보내 갈릴레오를 새롭고도 경이로운 천체 현상의 발견자로 칭했을 뿐 아니라 그가 발견한 태양의 흑점에 대해 '강한 자의 마음속에 깃든 두려움'이라는 은유를 쓰기도 했다. 이렇게 찬사 가득한 시상이 담긴 편지를 맺으며 추기경 자신을 '당신의 형제'라고 칭함으로써 각별한 애정을 표했다. 그런 그가 1623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가 되었다." "학문을 사랑했던 우르바누스는 교황청에 지식인들을 불러들였다. 그는 린체이 아카데미의 비르지니오 체사리니 몬시뇨르를 교황의 의전관으로 임명했는데, 체사리니는 새 교황을 환호로 맞이하는 시를 썼으며 갈릴레오의 강의를 들은 후 수학 연구에 헌신해온 인물이었다."(154, 162)


"갈릴레오가 유럽 전역의 서신 왕래자들로부터 전해 들어 알고 있었듯이, 프랑스와 스페인, 독일과 영국의 천문학자들은 1620년 출간된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를 수정해야 한다는 명령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이 교령은 이탈리아의 체면을 구겨놓았다고도 할 수 있다. 우르바누스를 위축시킨 소문도 나돌았는데 내용인즉 가톨릭으로 개종했던 독일인들이 이 교령 때문에 마음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교령이 발령되고 8년이 지났지만 코페르니쿠스 학설에 대한 우르바누스의 견해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이 천문학적인 계산과 예측의 도구로 활용되는 데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태양중심설은 입증되지 않은 단순한 견해로 남아 있었고, 우르바누스는 차후에도 이것이 입증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갈릴레오가 자신의 논리를 펴나가는 데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참작하고자 한다면, 이 학설이 가설이라고 전제하는 데 변함없이 교황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202-3)


"갈릴레오는 1629년 가을 내내 『린체이 회원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대화』의 완성을 위해 매달렸고, 마침내 크리스마스이브에 이 책을 끝마쳤다. 그는 『대화』의 끝에서 『시금관』에서의 매미 철학 즉, 신과 자연은 인간이 관찰하는 자연 현상을 창출한 무한한 수단을 지니고 있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교황 우르바누스를 만족시키기 위한 시도를 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그 심오함을 간단히 표현함으로써 충실한 아리스토텔레스파의 학자들을 좌절시켰다." "갈릴레오는 『대화』의 최종 원고를 검열관에게 제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발간된 갈릴레오의 모든 저작물은 엄격한 검열 과정을 거친 것들로, 그것은 이탈리아의 출판업자들이 이 규범에 가장 철저히 따랐기 때문이었다. 종교재판소의 검사성성이 있는 로마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시금관』도 공식적인 절차를 무난히 통과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대화』의 실질적인 내용이 검열관들의 심각한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으리라는 우려를 떨쳐버리지 못했다."(250-5)


제3부 로마에서


"『대화』는 이내 우르바누스 교황의 분노를 샀다. 그는 전쟁을 벌이느라 돈을 너무 많이 쏟아 부어 빚이 두 배로 불어나고 자신을 폐위시키려는 스페인의 음모가 두려워 편집증 증세까지 보이고 있었다. 바로 이 최악의 시기에 갈릴레오의 책을 접하게 되었다. 1632년 3월 8일 스페인 주재 바티칸 대사인 가스파레 보르자 추기경은 30년 전쟁에서 독일의 신교도에 대항해 필립 4세 왕을 지켜내지 못한 교황의 실책을 공개적으로 책망했다." "1632년 여름 갈릴레오의 책이 로마로 들어왔지만 우르바누스는 읽을 시간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익명의 고문관들이 교황 대신 이 책에 대한 판단을 내렸는데, 그것은 지독한 모함이었다. 로마에 있는 갈릴레오의 수많은 적들은 『대화』를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괘씸하기 이를 데 없는 찬양으로 보았다. 게다가 이미 유럽이라는 가톨릭교의 제일선에서 가톨릭의 열기가 쇠약해져가는 것을 소리 높여 추궁한 교황은 새로 발간된 이 무례한 내용의 책을 벌하지 않고 넘어갈 도리가 없었다."(314-6)


제4부 로마의 메디치 빌라, 토스카나 대사관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백과사전에조차 갈릴레오에 대한 재판이 두 차례 열렸다고 적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재판은 단 한 차례뿐이었다. 이는 1616년 갈릴레오와 벨라르미노 추기경과의 만남을 첫 번째 재판으로, 갈릴레오가 종교재판관들 앞에 무릎을 꿇은, 다소 오래 지속되었던 1633년의 심문을 두 번째 재판으로 본 것이다. 갈릴레오에 대한 재판은 단 한 번뿐이었으나 그럼에도 천 번은 열린 듯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과학에 대한 종교의 억압이자, 권위에 대한 개인주의의 수호, 혁신 세력과 기득권 세력의 충돌, 오래된 신념에 대한 급진적이고 새로운 발견의 도전, 그리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편협함에 대한 투쟁이라는 의미 때문이다. 교회법이나 관습법의 전 시대를 통틀어 그 의미와 파급 효과가 더 큰 재판, 억측과 유감을 더 많이 남긴 재판은 존재하지 않는다. 갈릴레오에 대한 재판은 1633년 봄에 단 한 번 열렸으나, 적어도 증거의 절반과 대부분의 증언은 1616년의 논쟁과 관련된 것이다."(323-4)


"갈릴레오가 토스카나 대사관에서 두 달을 기다린 후인 1633년 4월 12일 화요일, 종교재판소 검사성성의 수석대표가 마침내 심문을 받으러 오라고 그를 소환했다." "〈저는 그 책에서 지구가 돌며 태양은 고정되어 있다는 견해를 지지하지도 옹호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코페르니쿠스의 의견에 반하는 의견을 펴고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취약하고 설득력 없음을 입증해 보였습니다.〉 갈릴레오의 마지막 증언은 그의 곤란한 상황을 잘 요약해 보여준다. 이처럼 말을 얼버무린 데 대해 그를 비난하기는 쉬울 것이다. 이날의 심문이 끝날 무렵 그는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분명히 인식했으며 자신을 방어할 그럴듯한 이유를 찾았을 수도 있다. 니콜리니 대사가 그에게 순종적인 태도를 보이고, 종교재판관들이 바라는 태도를 꾸며 보이라고 경고한 터였다. 그러나 갈릴레오가 자신이 무고하며 진실하다고 믿었던 것은 재판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가 쓴 편지를 보면 명백히 알 수 있다."(338, 351-2)


"한편 로마로 돌아온 우르바누스 교황은 갈릴레오의 사건에 대해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는 검사성성의 종교재판관들이 친갈릴레오파와 반갈릴레오파로 분열되어 있음을 느꼈으며, 그 책으로 인해 무지에서 깨어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다른 이들은 갈릴레오의 감상적인 변명에서 부정직함을 감지하고 분노했다. 그러나 적어도 갈릴레오가 직접적인 지시를 어겼다는 사실에는 모두 동의했다." "교황 우르바누스 8세는 6월 16일, 추기경인 종교재판관들과의 회의를 주재했다. 교황은 1615년 이 철학자에 대한 최초의 비난에서부터 이 책의 출간, 그리고 최근의 변명과 선처를 호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갈릴레오의 사건을 요약한 정식 보고서를 읽었다. 그리고 『대화』를 쓴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고문이라는 방법까지 동원해 갈릴레오의 '의도'를 심문하라고 지시했다. 교황은 이 책은 어떻든 비난을 면할 수 없으며 금지되어야 한다고 단언했다. 갈릴레오는 감금되거나 참회를 해야 할 판이었다."(365, 374)


"6월 22일, 갈릴레오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판결이 공식 발표되었다. 며칠 후 바르베리니 추기경은 갈릴레오의 감금 장소를 검사성성의 지하 감옥에서 로마의 토스카나 대사관으로 바꿈으로써, 그에 대한 판결을 완화하는 데 성공했다. 우르바누스는 사면을 해달라는 청원은 거절했지만, 갈릴레오로 하여금 마침내 로마를 떠나도록 해주었다." "갈릴레오에 대한 굴욕적인 판결문은 교황의 지시에 따라 파도바에서 볼로냐, 밀라노에서 만토바, 피렌체에서 나폴리와 베네치아 그리고 프랑스의 플랑드르와 스위스에 이르기까지 요란스럽게 고시되고, 종교재판관들에 의해 큰 소리로 낭독되었다. 이에 따라 이 지역의 철학 교수와 수학 교수들은 갈릴레오에 대한 재편 결과에 경각심을 느꼈다." "이 사건들로 인해 1633년 여름에는 금지된 『대화』를 중심으로 암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사실 『대화』를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 중 그것을 내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책의 가치가 높아감에 따라 새로운 귀의자들도 생겨났다."(384-6)


제5부 시에나에서


"시에나의 대주교인 아스카니오 피콜로미니는 두 명의 교황과 수많은 학자를 배출해낸 뛰어난 가문 출신으로, 그 자신이 수학을 공부하였으며 갈릴레오의 오랜 찬미자였다. 재판이 끝난 후 피콜로미니는 갈릴레오의 보호를 자청했다. 니콜리니 대사는 4월에 검사성성의 심문을 받고 돌아온 갈릴레오를 '산 사람이라기보다는 죽은 사람에 가까워' 보였다고 묘사했다. 이후로 몇 주가 더 지나고 충격까지 받은 그가 7월에 시에나에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겠는가? 그는 부당한 판결로 고통 받은 나머지 여러 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거처에서는 흐느껴 우는 소리와 중얼거리는 소리,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피콜로미니는 갈릴레오의 상처 입은 영혼을 회복시켜 과학적인 연구를 계속해나갈 수 있게 해주기로 결심했다. 사실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소로부터 유죄판결을 받은 굴욕을 딛고 일어나, 다른 책(『두 개의 새로운 과학』)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피콜로미니의 열성적인 호의에 힘입은 바 크다."(393–5)


"갈릴레오는 피사 대학에 교수로 재직할 때 운동에 관한 기초 논문에 처음 착수했으나 책을 펴내지는 않았다. 그런 후 파도바에서 20년간 살면서 이 책을 쓰기 위한 새로운 실험 원리를 세웠는데, 즉 가르치는 의무를 다하고 작은 집에서 군사용 컴퍼스 제조 사업을 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진자 운동을 측정해 그 주기의 수학적 법칙을 이끌어냈으며, 경사면에 청동 공을 수도 없이 굴려 자유낙하 시의 가속률을 얻어냈다." "갈릴레오는 사물이 '왜' 움직이는가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파 학자의 모든 담론을 일축하고 고통스러운 관찰과 측정을 통해 '어떻게'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길을 개척할 생각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전 세대의 철학자들이 인식조차 하지 못한 현상을 발견하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갈릴레오는 던져지거나 발사된 탄환 등이 공중을 지나는 경로는, 그의 선배들이 말한 것처럼 단순히 '어느 정도 곡선을 이루는 선'이 아니라 매번 정확히 포물선을 그린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410-2)


"갈릴레오는 후에 '지금까지 펴낸 책보다 『두 개의 새로운 과학』이 낫다'고 평가하게 된다. 그 이유는 이 책에 '내 모든 연구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온 결과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저항과 운동에 관해 자신이 밝혀낸 사실이 자신에게 불멸의 명예를 안겨준 온갖 천문학적인 발견을 능가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수한 망원경을 만들어 그것으로 하늘을 처음 관찰한 자신을 자랑스러워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자신의 위대한 천재성은 세계를 면밀히 관찰해, 그곳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수학적인 비율의 언어로 묘사하는 데 있다고 믿었다. 그런 가운데 로마의 니콜리니 대사는 갈릴레오가 시에나에서 교황과 검사성성에 복종하는 모범적인 죄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교황 우르바누스 8세에게 보고했다. 우르바누스는 이 같은 견해를 시에나의 성직자들이 보낸 비난과 비교 검토했다. 그에 따르면 피콜로미니는 갈릴레오를 이단자임을 고백한 죄인이기보다 귀한 손님으로 모시고 있었다."(443-5)


제6부 아르체트리에서


"경사면에 공을 굴리는 실험은 갈릴레오가 『두 개의 새로운 과학』에서 여러 원리와 함께 소개한, 낙하의 진실에 대한 지루하지만 성공적인 전주곡 역할을 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법칙을 몇 개의 문자와 상징으로 줄여 표현할 수 있는 전통적인 대수 분석 방법에 따르지 않고, 기하학적인 비율로 표현했다." "〈총탄이 가장 멀리까지 나가는 경우는, 양각을 45도로 했을 때 또는 포수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4분원의 여섯 번째 점인 지점을 통과할 때라네. 그러나 다른 이들의 말을 통해서나 반복적인 실험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아는 것보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이유를 아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네.〉" "원인을 형이상학적으로 고찰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과학의 현실적인 적용과 그 가치에 대한 갈릴레오의 이 같은 강조는 당대의 대다수 철학자들과는 동떨어진 행보였다. 아리스토텔레스파의 철학자들이 사물의 본질과 자연 환경에 대해 논의하는 동안, 갈릴레오는 시간, 거리, 가속 같은 측정 가능한 실체를 추구했다."(456-8)


"마침내 우르바누스는 은혜를 베푸는 척하며 갈릴레오의 감금 장소를 아르체트리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 같은 조치는 판결을 약화시켰다기보다는 오히려 강화한 것이었다. 시에나의 환경이 고급 살롱의 분위기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교황은 이후로 갈릴레오의 사회적 접촉을 제한할 것과 가르치는 행위 일체를 영원히 금할 것을 검사성성에 권고했다." "그럼에도 1634년 8월, 갈릴레오는 동료 수학자들과 다시 활발한 서신 왕래를 하기 시작했다. 가을에는 미완의 원고인 『두 개의 새로운 과학』에 다시 매달렸다." "네덜란드는 신교를 믿는 국가였으므로 네덜란드인 출판업자 엘체비르는 로마 종교재판소의 보복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아르체트리에서 여전히 불안에 휩싸여 있던 갈릴레오는 최후의 순간까지 이 책의 출판 사실을 모른다고 잡아뗐다. 프랑스 대사인 프랑수아 드 노아유에게 바친 헌정사에서조차, 그는 자신의 원고가 어떻게 외국의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는지 놀랍다며 짐짓 꾸며냈다."(463-4, 472, 478)


"1638년 6월에 출간된 이 책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저자인 갈릴레오는 책이 출판된 지 수주일이 지난 뒤에 단 한권을 받을 수 있었을 뿐이다. 게다가 그 책이 수중에 들어왔을 때, 그는 책을 읽을 수도 볼 수도 없었다. 그의 두 눈은 이제 백내장과 녹내장으로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1637년 7월 그의 오른쪽 눈이 처음 시력을 잃게 되자 『두 개의 새로운 과학』에 닷새째 날을 추가하려 했던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왼쪽 눈은 이듬해 겨울에 시력을 잃었다. 오직 한쪽 눈만으로 하늘을 관찰하고 이전에 써놓은 글과 그림을 정독했던 이 황혼기에, 그는 별들의 지름과 천체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는 최상의 방법에 관해 짧은 마지막 논문을 썼다." "〈나의 놀라운 관찰과 명징한 증명으로, 지난 모든 세기의 현자들이 일반적으로 인지했던 한계보다 백 배 아니 천 배 더 커진 이 우주가, 이제 내게는 너무도 작게 줄어들어 내 몸의 조그마한 틀만큼이나 작아져버렸다네.〉 갈릴레오는 엘리아 디오다티에게 이렇게 토로했다."(481-3)


"이렇듯 쇠약해진 갈릴레오는 1638년 10월, 함께 살 가장 완벽한 반려자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는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지닌 피렌체 출신의 16세 젊은이 빈첸초 비비아니였다. 비비아니의 학문적 탁월함은 페르디난도 대공의 눈에 띄었고, 대공은 그에게 갈릴레오의 조수로 갈 것을 명했다." "1654년 비비아니가 쓰기 시작한 갈릴레오의 전기에는, 연로한 스승이 자유롭고 두서없이 이야기를 하고 젊은 제자는 온 정성을 다해 귀를 기울이는, 두 사람이 단둘이 누린 시간을 초월한 즐거운 한때가 묘사되어 있다. 갈릴레오의 일생에서 아주 중대한 몇몇 순간을 추적해,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고 거의 신화적인 것으로 만들기까지 한 인물은 다름 아닌 비비아니였다. 그는 갈릴레오가 의학을 공부했던 학생 시절, 피사 대성당에서 미사가 거행되는 동안 흔들리는 전등불을 바라보다 진자의 법칙을 깨달은 것이라든지, 밑에 교수와 학생들이 모여 있는 피사의 사탑 꼭대기에서 포탄을 굴려 떨어뜨린 장면 등을 생생하게 살려냈다."(4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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