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도 이야기 - 인류 최초로 바다의 시공간을 밝혀낸 도전의 역사 데이바 소벨 컬렉션
데이바 소벨 지음, 김진준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1. 상상의 선 


"프톨레마이오스는 적도를 위도가 0도인 선으로 잡았다. 임의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로부터 자연 속에서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적도를 알아냈던 조상들의 선례를 따른 것이었다. 적도에서는 태양과 달과 행성들이 머리 위로 수직에 가깝게 지나간다. 역시 유명한 위도선인 북회귀선과 남회귀선도 태양의 위치에 따라 정해졌다. 연중 태양이 움직이는 범위에서 각각 북쪽과 남쪽의 한계선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초자오선, 즉 경도가 0도인 선은 프톨레마이오스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다. 그는 아프리카 북서쪽의 포처니트 제도(지금의 카나리 제도와 마데이라 제도)를 지나가는 경도선을 선택했다. 그 이후에 지도를 만든 사람들은 본초자오선을 아조레스 제도나 케이프베르데 제도, 로마, 코펜하겐, 예루살렘, 페테르스부르크, 피사, 파리, 필라델피아 등지로 옮기다가 결국 런던으로 낙착을 보았다. 본초자오선의 위치를 결정하는 것은 순전히 정치적인 문제였다. 바로 그것이 위도와 경도의 본질적 차이점이다."(19)


2. 위험한 바다 


"용기와 탐욕을 겸비하고 바다로 나갔던 15~17세기의 선장들은 모항으로부터 동쪽이나 서쪽으로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측정하기 위해 추측 항법을 사용했다. 선장은 바다 위에 측정기를 던져놓고 이 임시 이정표로부터 얼마나 빨리 멀어지는지를 관찰했다. 이 조잡한 속도계의 측정값을 항해일지에 기록하고, 별이나 나침반으로 확인한 진행 방향과 모래시계나 회중시계로 잰 특정 거리의 통과 시간 따위를 함께 적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목적지를 놓치는 일도 흔했다. 추측 항법 때문에 목숨을 잃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같은 개인적인 고통이 전부는 아니었다. 경도를 모른다는 이유로 세계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경제적 재앙을 감수해야 했다. 대양을 오가는 배들은 안전한 항해가 보장되는 소수의 비좁은 항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위도만 가지고 항행해야 했으므로 몇몇 항로에 포경선, 상선, 전함, 해적선 등이 한꺼번에 몰려 붐비다가 서로 싸워 차례로 희생 당했다."(29-30)


# 측정기 : 줄이 풀리는 정도에 따라 배의 속도 및 항주 거리를 재는 장치


3. 우주의 시계 속에서 표류하다 


"일찍이 1514년에 이미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베르너가 달의 운행을 이용하여 배의 위치를 알아내는 방법을 착안했다. 달이 한 시간 동안 움직이는 거리는 대략 달의 지름과 비슷하다. 달은 밤마다 이렇게 장중한 걸음걸이로 붙박이별 사이를 산책한다. 낮에는 (매달 보름 동안은 낮에도 달이 떠 있으므로) 태양 쪽으로 다가가거나 멀어진다. 베르너는 천문학자들이 달의 운행 경로 주위에 흩어진 항성들의 위치를 천체도에 표시하고 달이 각각의 항성을 스쳐 지나가는 시각을─앞으로 몇 년에 걸쳐 매달 달이 뜨는 밤마다─예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낮 동안에 이동하는 해와 달의 상대적 위치도 예측해야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월거 이용법'의 주된 문제점은 그 모든 과정을 좌우하는 항성들의 위치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어느 날 밤이나 낮에 달이 어디쯤 있을지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천문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달의 운행을 지배하는 법칙들을 아직 상세히 이해하지 못한 탓이었다."(39)


4. 병속의 시간 


"시계 예찬론자들은 좋은 시계만 있으면 경도 문제를 거뜬히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때는 뱃사람들이 물통이나 소고기처럼 모항의 시간을 배에 싣고 출항할 수 있을 터였다. 1530년부터 플랑드르의 천문학자 젬마 프리시우스는 기계적인 시계가 바다에서 경도를 찾는 한 방법이라면서 환영했다. 그러나 프리시우스가 내세운 두 가지 조건─즉 지극히 정확한 출항 시각에 시계를 맞춰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항해 중에 시계가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때문에 당시로서는 사실상 사용이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16세기 초의 시계로는 어림없었다. 정확하지도 않았거니와 바다에서의 혹심한 온도 변화를 견뎌낼 재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시계가 부족하나마 상당한 발전을 보인 것은 영국의 항해가 토머스 블런드빌이 대양 항해에서 경도를 측정하기 위해 정확한 시계를 이용해보자고 제안했던 1622년에 이르러서였다. 여러 결점에도 불구하고 장차 시계가 더욱 완벽해졌을 때의 가능성에 대한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51-2)


5. 교감의 가루약 


"17세기 말엽, 바다에서 경도를 알아낼 수 있다는 엉뚱한 주장 가운데서도 가장 기상천외한 이론은 '교감의 가루약'이라는 엉터리 치료제를 근거로 삼았다. 딕비의 가루약을 경도 문제에 써먹는다는 발상은 비록 황당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먼저 상처 입은 개를 출항하는 배에 태운다. 그리고 믿을 만한 사람을 물에 남겨 날마다 정오에 그 개의 붕대를 교감의 가루약 용액에 집어넣게 한다. 그러면 개는 어쩔 수 없이 깽깽거리며 울부짖기 마련이고, 선장은 그 소리를 듣고 시간을 가늠한다. 개의 울부짖음은 곧 태양이 런던 자오선 상공에 도달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때 선장은 그 시각과 배가 있는 지점의 현지 시각을 비교하여 경도를 산출하면 된다. 물론 이 가루약이 수천수만 해리나 떨어진 바다 위까지 효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 또한 그러면서도─이것은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몇 달이 지나도록 이 소중한 상처를 치료하지 못해야 한다는 것이 것이 희망 사항이었다."(57-8)


6. 경도상 


"1714년 7월 9일 앤 여왕 치하에서 발포된 경도법에는 거액의 상금이 책정되었다. 경도법이 발효되기 전에도 경도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는 의견들은 흔해빠질 정도로 많았다. 그런데 1714년 이후 해결책의 잠재적 가치가 급격히 커지자 해결책의 숫자도 급증했다. 머지않아 경도 심사국은 소문을 듣고 상금을 타기 위해 몰려드는 무수한 사기꾼이나 선의의 참가자들에게 포위되다시피 했다." "경도법이 등장한 후 '경도를 찾는다'는 말은 곧 불가능한 도전을 뜻하게 되었다. 걸핏하면 경도가 화젯거리─그리고 웃음거리─가 되었고, 결국 그 시대의 문학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예를 들자면 『걸리버 여행기』에서 닥터 레뮤얼 걸리버는 불멸의 스트럴드브러그가 되었을 때를 상상해보라는 말을 듣고 여러 혜성들이 돌아오거나 거센 강이 얕은 시냇물로 변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즐거움과 더불어 경도가 발견되고 영구기관과 만병통치약 등 위대한 발명품이 속속 완성되는 것을 보는 기쁨을 떠올렸다."(72)


# 스트럴드브러그 : 늙기만 하고 죽지 않는 희귀한 존재


7. 톱니바퀴 만들기 


8. 바다로 간 메뚜기 


"'경도 사나이' 존 해리슨이 동생 제임스 해리슨과 함께 1735년에 제작한 첫 해상 시계 H-1은 모든 면에서 눈에 띄는 존재였다. 그 시대의 산물이면서도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였다. 이 시계가 등장했을 때 세상은 이미 기다림에 지쳐 있었다. H-1은 본래의 목적을 충실히 수행할 뿐이었지만 워낙 뛰어난 탓에 사람들은 오히려 당황했다." "1737년 6월 30일에는 경도 심사국 의원들이 사상 처음으로─심사국 창립 후 23년 만에─회의를 열었는데, 바로 해리슨의 굉장한 기계 때문이었다." "심사 자리에는 해리슨의 탁월한 작품이 있었고, 더욱이 그곳에 모인 전문인 및 정치가들도 해리슨이 국왕과 조국을 위해 이룩한 업적을 자랑스러워하는 분위기였다. H-1이─경도법에 명시된 2만 파운드를 받을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인도 제도로 가는 시험을 요구할 권리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해리슨은 지나친 완벽주의자였다. H-1에 대해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의견을 꺼낸 사람은 당사자인 해리슨뿐이었다."(95, 99-100)


9. 하늘의 시곗바늘 


"해리슨이 차례차례 해상 시계를 제작하던 바로 그 시기에 과학자들도 마침내 하늘의 시계를 이용하는 데 필요한 이론과 기구와 정보를 두루 갖추게 되었다." "이제 '해들리 사분의' 덕분에 두 천체의 고도와 그 사이의 거리를 직접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설령 배가 심하게 흔들리더라도 관측자의 시야에 들어온 두 천체의 상대적 위치는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해들리 사분의에는 어둠이나 안개 때문에 진짜 수평선이 안 보이게 되었을 때 요긴하게 이용할 수 있는 인위적인 수평선이 덤으로 붙어 있었다. 이 사분의는 곧 망원경을 부착하고 측정각을 넓혀 더욱 정확하게 만든 육분의sextant라는 기구로 발전했다. 그렇게 개량한 부분 때문에 이 기구만 있으면 낮 동안에 끊임없이 달라지는 달과 태양 사이의 거리를, 어두워진 뒤에는 달과 별 사이의 거리를 각각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었다. 상세한 성도星圖와 믿을 만한 기구를 갖춘 유능한 항해가라면, 이제 갑판 위에 서서 얼마든지 월거를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106-9)


10. 다이아몬드 시계 


"1753년 워십풀 시계조합의 존 제프리스는 해리슨이 개인적으로 사용할 회중시계 하나를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그는 해리슨이 요구한 설계대로 제작한 것이 분명하다. 제프리가 만든 이 시계에도 작은 이중 금속띠가 들어가 날이 덥든 춥든 정확한 시간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시계는 대단히 정확했다. 해리슨 자신도 이 시계에 마음을 빼앗겨 더 작은 해상 시계를 구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해리슨이 1759년에 완성한 H-4는─이 시계로 결국 경도상을 받았다─앞서 만들어진 H-1, H-2, H-3보다 오히려 제프리스 시계를 더 많이 닮았다. 큼직한 황동 시계의 혈통에서 막내로 태어났으면서도 H-4는 마치 모자에서 끄집어낸 토끼처럼 놀라운 물건이었다. 지름이 5인치나 되므로 회중시계라고 하기에는 큰 편이지만 해상 시계로서는 아주 꼬맹이었으며 무게도 겨우 3파운드였다. 해리슨도 이 시계를 사랑했다. 곧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듯 이 시계는 그야말로 우아함과 정밀성의 진수였다."(122-3)


11. 물과 불의 시련 


"영웅을 찬양하는 이야기에는 야유할 악당도 필요한 법이다. 이 책에서 네빌 매스켈린 목사가 그런 사람인데, 역사는 그를 '뱃사람들의 천문학자'로 기억한다. 매스켈린은 월거 이용법을 선택했다가 곧 신봉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그 방법의 상징적 인물로 떠올랐다." "해리슨의 시계는 경도에 얽힌 복잡한 문제들을 그 안에서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사용자는 수학이나 천문학에 통달할 필요도 없고 시계를 작동시키는 데 경험이 요구되는 것도 아니었다. 과학자나 천측 항법가들의 눈에는 이 해상 시계에 불길한 무엇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뭔가 재빠르고 붙잡을 수 없는 것. 더 옛날이었다면 해리슨은 이런 마술 상자를 해결책으로 내놓았다는 이유로 꼼짝없이 마법사로 몰렸을 것이다. 해리슨이 이런 입장에 놓인 까닭은 스스로 정해놓은 기준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며 또한 그의 적들이 강력히 불신을 표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 공적을 세우고도 기대했던 찬사는커녕 수많은 시련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116-7, 128)


12. 두 개의 초상화 


"1764년 여름에 힘겨웠던 두 번째 시험이 끝난 후, 경도 심사국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몇 달을 그냥 보냈다. 위원들은 수학자들이 H-4의 시간 기록을 계산한 후 천문학자들이 측정한 포츠머스 및 바베이도스의 경도값과 비교할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었다. 심사 자료에는 모든 내용이 포함되어야 했다. 이윽고 최종적인 보고를 들은 위원들은 위의 시계가 충분히 정확하게 시간을 표시했음을 만장일치로 인정했다. 도저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엄청난 성과를 거두고도 해리슨은 작은 승리밖에 얻지 못했다." "1765년 1월에 신임 왕실 천문학자의 이름이 발표되었는데, 다름 아닌 영원한 숙적 네빌 매스켈린이었다. 심사국 회의에서 매스켈린은 월거 이용법을 찬양하는 기나긴 원고를 낭독했다. 이 사건은 월거 이용법을 제도화하려는 움직임의 시작에 불과했다. 해리슨의 크로노미터는 비록 신속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 반면, 하늘은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었다."(146-8)


13. 제임스 쿡 선장의 두 번째 항해 


14. 천재성의 대량 생산 


"켄들과 머지는 살아생전에 각기 해상 시계 세 개를 제작했고, 해리슨도 고작 다섯 개를 만들었을 뿐이지만 시계공 존 아널드는 품질 좋은 해상 시계를 무려 수백 개나 완성시켰다." "존 아널드에게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토머스 언쇼였다. 그는 해리슨의 복잡성과 아널드의 생산성을 응축시켜 완벽에 가까운 크로노미터를 만들어냈다. 윤활유가 필요 없는 계시 장치를 고안하여 마침내 해리슨의 위대한 아이디어 하나를 소형화했다는 사실도 빠뜨릴 수 없다." "아널드와 언쇼 이외에도 점점 더 많은 제작자들이 나타난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판매했으며 군함이나 상선은 물론이고 놀잇배에서도 크노로미터를 사용했다. 그리하여 1737년 전 세계에 하나뿐이던 해상 시계가가 1815년에는 5000여 개로 늘어났다." "해리슨이 제시한 경도 해결책의 실용성이 확실히 입증되자 한때 치열했던 경쟁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리하여 크로노미터는 곧 당연히 항해에 갖춰야 하는 필수품으로 여겨졌다."(172, 175, 179-80)


15. 자오선의 뜨락에서


"런던 중심부로부터 7마일 떨어진 그리니치 천문대 자리에 본초자오선을 설정한 사람은 제5대 왕실 천문학자 네빌 매스켈린이었다. 경도를 찾는 방법 중에서 시계 이용법이 월거 이용법을 누르고 승리를 거둔 후에는 그리니치의 중요성이 다소 줄어들었으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정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뱃사람들은 크로노미터의 정확성을 확인하기 위해 아직도 이따금씩 월거 측정을 해야 했다. 그리고 『항해력』의 해당 페이지를 펼쳐놓은 후, 출발 지점이나 목표 지점이 어디이든 간에 자연히 그리니치를 기준으로 경도를 계산했다." "(매스켈린의 온갖 훼방에 시달리면서도) 존 해리슨은 자신의 해상 시계들을 가지고 시간과 공간의 바다에 도전했다. 그리고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제4의 차원─즉 시간─을 이용하여 삼차원적 공간인 지구의 각 지점을 하나로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세계 각지의 위치를 알아냄으로써 별들을 쓸모없게 만들고 그 엄청난 비밀을 회중시계 속에 가둬놓았다."(182-3,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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