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비스마르크 - 살림지식총서 361 살림지식총서 361
김장수 지음 / 살림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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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기의 활동


1847년 5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Friedrich Wilhelm Ⅳ)는, 철도 건설에 필요한 재원으로서 공채를 발행하기 위해 프로이센 통합지방의회(Der Vereinigte Landtag)를 개원한다는 칙령을 발표했고 그에 따른 선거가 각 지방에서 실시되었다. 당시 비스마르크는 통합지방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브라우휘트쉬(Brauchitsch)라는 의원이 지병으로 의원 활동을 포기함에 따라 그는 1847년 5월 8일 통합지방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독일 역사상 최초의 실제적 대의회였던 통합지방의회는 온건적 성향의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했다. 그러므로 왕권 및 귀족 계층의 이익을 대변했던 우익 세력은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했다. 의회에 진출한 비스마르크는 보수적 성향을 보였는데 그의 그러한 성향은 5월 17일 통합지방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확인된다. 여기서 그는 일부 의원들이 제기한 헌법 제정의 필요성을 반박했고 그것은 지방의회 의원들의 강한 반발을 야기했다. 9)


3월혁명 전후의 활동


오토(Otto) 대제 이후 약 천 년 동안 유지해 오던 신성로마제국은 1806년 10월 14일 예나-아우어슈테트(Jena-Auerstedt) 전투에서 나폴레옹 군에게 패배함으로써 멸망했다. 이후 제국의 영토는 나폴레옹의 보호국이 된 라인연방(Rheinbundstaaten), 호헨촐레른(Hohenzollern) 가의 프로이센, 그리고 합스부르크(Habsburg) 가의 오스트리아로 분할되었다. 1815년 빈 회의의 결정에 따라 등장한 독일 연방은, 35개의 대소 국가와 4개의 자유시(Freistadt)로 구성된 엉성한 정치 체제였다. 그런 와중에 라인연방에서 시작된 독일의 산업 발전은 국내의 상공 시민들을 고무시켰고 그것은 자본주의적 산업 발전을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통합 시장의 형성 요구로 이어졌다. 그에 따라 프로이센의 경제인들은 1819년 북부 독일의 여러 국가들과 관세동맹(zollverein)을 체결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전 독일국가가 참여한 관세동맹이 1844년에 결성됨으로써 정치적 통일에 앞서 경제적 통일이 이룩될 수 있었다.10)


1848년 5월 18일 프랑크푸르트의 성 파울 교회(St. Paul- kirche)에서 국민의회가 개최되었다. 국민의회의 최대 과제는 독일 연방을 하나의 통합 국가로 변형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형성된 개별 영방 국가들을 그대로 둔 채 강력한 중앙 권력을 창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민의회의 이러한 무력함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Schleswig-Holstein) 문제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두 공국은 오랫동안 덴마크 국왕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그중 홀슈타인은 독일 연방의 일원이었다. 그런데 혁명을 계기로 이 지방의 독일계 주민이 덴마크의 지배에 이의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국민의회의 요청으로 파견된 프로이센군이 사태를 진압했으나, 러시아, 영국, 프랑스의 압력으로 프로이센은 덴마크와 휴전 조약을 체결했고 국민의회는 이 조약을 추후 비준했다. 이로써 두 공국의 독일계 주민은 국민의회로부터 배반당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대다수 독일인 역시 그러한 결정에 불만을 표시했다. 12-3)


1851년 5월 15일 비스마르크는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 자신이 후에 인정했듯이 대사직은 한 국가의 외교를 담당하는 중요한 관직이었다. 이 당시 오스트리아 정치가들은,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대등한 국가가 아니며 앞으로도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었고 비스마르크 역시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1858년 3월 비스마르크는 당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후계자였던 빌헬름 왕자에게 자신의 정치적 관점을 정리한 문서를 제출했는데 거기서 그는 베를린 정부가 빈 정부를 의식하지 말고 자기중심적인 정책, 즉 독자적인 정책을 펼쳐야만 독일권에서 프로이센의 위상을 증대시킬 수 있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이면에는 프로이센의 국익을 위해서는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충돌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점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빈 정부는 외교적 역량을 총동원하여 비스마르크를 해임시키려 했고, 그러한 시도는 결국 성공을 거두었다. 15-6)


1859년 1월 23일 비스마르크는 러시아 주재 프로이센 공사로 임명되었다. 3월 말 임지에 도착한 비스마르크는 러시아 외교 정책의 근간을 파악하려는 노력을 펼쳤고 거기서 자신의 관점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도 인지하게 되었다. 러시아 공사로서의 임기를 끝낸 비스마르크는 1862년 1월 22일부터 프랑스 주재 프로이센 공사로 근무했다. 그 기간이 채 일 년도 되지 않았지만, 이 시기에 그는 나폴레옹 3세(Napoleon Ⅲ)의 보나파르트 정책(Bonapartism)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여기서 그는 외교적 업적을 통해 국내 문제를 해결하려는 보나파르트 정책의 운영 과정을 세밀히 관찰해 그것을 향후 자신의 정책에도 활용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실제로 보나파르트 정책의 핵심 구도는 1860년대 초 군제 개혁(heeresreform) 과정에서 야기된 의회와의 충돌 및 1870년대 의회 내 반대 세력과의 대립이라는 내정 문제를 외교적 업적을 통해 해결하려 한 것 등에서 확인된다. 16-7)


현실정치가로서의 행보


1859년 호헨촐레른 가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극한 빌헬름 1세(Wilhelm Ⅰ)는, 섭정 지위에 있을 때 전쟁장관(kriegminister)과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던 론(Roon)과 몰트케(Moltke)로 하여금 프로이센군을 증강시킬 수 있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강구하도록 지시했다. 이러한 병력 증강안에 대해 자유주의자들 역시 원칙적으로 견해를 같이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비역 및 후비역 축소가 해방전쟁(befreiungskrieg)의 전통을 계승하고 군제 개혁가 등의 이상이었던 '무장화된 시민', 즉 시민과 군대가 결속되었던 전통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자유주의자들의 이러한 우려에 대해 빌헬름 1세는 엄격한 군인 정신으로 무장한 군대만이 대내외 문제에 대처할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반론을 제기했다. 이제 군제 개혁은 단순한 군사적ㆍ기술적 범위를 넘어 '시민의 군대인가, 국왕의 군대인가'라는 제도 이념적인 갈등과 대립을 함축하게 되었다. 빌헬름 1세는 군제 개혁을 국왕의 통수권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18-9)


국왕과 의회가 날카롭게 대립하는 가운데 1862년 9월 24일 비스마르크는 임시 수상(interimistische ernennung zum preussischen ministerpräsidenten)으로 임명되었다. 비스마르크는 1862년 9월 30일 의회에서 "독일권이 주목하는 것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그 권력이다. (중략) 오늘의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이것이 1848년과 1849년의 잘못이다―에 의해서가 아니라 피와 철(blut und eisen)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라는 것을 언급했던 것이다. 하원의 반대로 차기 연도 예산이 확정되지 못한 상황에서 비스마르크는 상하 양원의 불일치로 예산이 통과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헌법 규정이 없음을 파악했다. 따라서 그는 하루라도 국가 통치가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점이론(Lückentheorie)을 부각시켰던 것이다. 여기서 그는 헌법적인 교착 상태가 초래될 경우 오직 국왕만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는 입장도 밝혔다. 이후 그는 긴급권을 발동하여 예산 승인 없이 국가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20)


빈 정부가 독일 통합을 진정으로 원하지 않고 있다는 확신을 가진 비스마르크는 군사력 강화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아울러 그는 외교적인 공작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1865년 10월 나폴레옹 3세를 비밀리에 만나 형제 전쟁이 발발할 경우 프랑스의 중립을 약속받았고, 1866년 4월 8일에는 이탈리아 왕국과 3개월간의 한시적 군사 동맹 체제를 체결하여 오스트리아가 패배할 경우 이탈리아의 베네치아(Venezia) 합병도 인정한다는 약속을 했다. 물론 러시아와의 친선 관계는 그가 1859년부터 약 3년간 페테르부르크에서 대사로 근무할 때 이미 구축된 상태였다. 1866년 6월 21일 비스마르크는 의회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군을 홀슈타인으로 출격시켜 형제 전쟁을 일으켰다. 1866년 7월 3일 쾨니히그레츠(Königgrätz)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의 주력군은 프로이센의 후장총과 몰트케가 이용한 철도라는 획기적 이동 수단 때문에 패배했다. 이후로 오스트리아는 독일 통일 문제에서 배제되었다. 21-2)


독일 연방이 붕괴된 이후 독일권은 마인(Main) 강을 경계로 남북 두 개의 블록으로 나뉘었다. 비스마르크는 1866년 10월부터 마인 강 이북의 영방들과 조약을 체결하여 연방 조직을 형성했다. 그것에 따라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작센, 하노버, 쿠어헤센, 그리고 나사우 등을 포함한 총 22개 영방으로 구성된 북독일 연방(Norddeutscher Bund)을 발족시켰다. 북독일 연방은 단순한 국가 연맹이었던 독일 연방과는 달리 중앙 권력을 갖춘 연방 국가의 성격을 가졌다. 마인 강 이남 지역에서 비스마르크는 남부 독일 국가들, 특히 바이에른, 바덴(Baden), 뷔르템베르크(Würtemberg), 그리고 헤센-다름슈타트(Hessen -Darmstadt) 등과 비밀 공수동맹을 맺고 나폴레옹 3세의 야심에 대비하고자 했다. 아울러 그는 1867년에 개편된 관세동맹을 통해 이들 국가들을 북독일 연방에 결속시킬 수 있었다. 이로써 내용적으로 보다 확대된 북독일 연방 및 프로이센이 군림하는 전 독일적 연방 국가의 원형이 창출되었다. 22-3)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독일 통합에 대해 부정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실현을 저지하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남부 독일 국가들과 비밀리에 체결한 공수동맹(Schutzund Trutzbündnis)에 따라 이들 국가들로부터 군사적인 지원을 받았다. 아울러 그는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로부터의 중립도 약속받았다. 또한 그는 몰트케 장군에게 전쟁 준비를 철저히 할 것을 명령했고 그 결과 독일 연합군은 병력, 장비, 훈련 등에서 프랑스군을 압도했다. 따라서 전쟁이 시작된 지 2개월도 안된 1870년 9월 4일, 나폴레옹 3세는 8만 6천 명의 프랑스군과 함께 스당(Sedan)에서 항복하고 강화를 제의했다. 그러나 프랑스에 대해 철저한 타격을 가하고자 했던 비스마르크는 강화 제의를 거부하고 1871년 1월 29일 파리를 함락시켰다. 같은 해 5월 10일 비스마르크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프랑스와 엘자스-로트링겐의 할양 및 50억 프랑의 배상금 지불을 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종결시켰다. 23-4)


내정에 대한 관심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Versailles)에서 탄생한 독일제국은 4왕국, 18공국, 3자유시 등 25개의 국가와 2제국령(엘자스-로트링겐)으로 구성된 연방 국가였다. 그러나 이러한 연방 체제는 이전의 독일 연방처럼 여러 국가의 집합체도 아니면서 완전한 중앙집권 국가라고도 볼 수 없는 모호한 정치 체제였다. 왜냐하면 바이에른, 작센, 뷔르템베르크, 바덴 등이 이전의 칭호 및 지위를 유지하면서 상원에 해당되는 연방의회(Bundesrat)에서도 압도적 의석을 보장받았기 때문이다. 제국헌법에 의하면, 연방의회는 각국의 대표와 황제가 지명하는 60명의 의원들로 구성되었는데 입법권과 군사 및 외교상의 대권 등을 가져 그 권한이 막강했다. 그러나 의원들 중 17명은 황제가 직접 임명했기 때문에 연방의회의 권한은 실질적으로 황제권에 예속되었다. 이 당시 독일제국의 재상은 프로이센 수상도 겸임했다. 또한 그는 의회가 아닌 황제에게만 행정적 책임을 졌기 때문에 황제와 더불어 국정을 실질적으로 운영해 나갈 수 있었다. 25-6)


비스마르크는 국민자유당(Nationalliberale Partei)의 협력으로 군사예산 문제를 해결했지만 제국 창건 이후부터 급격히 성장한 반대파의 세력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여야만 했다. 그중 가장 강력한 반대 세력으로 부각된 것은 가톨릭계의 중앙당(Zentrumspartei)으로, 그 구성원들은 비스마르크의 통일 작업에 불신을 제기해 온 인물들이었다. 1870년 12월 라이헨스페르거(Reichensperger)의 주도로 창당된 이 당의 강령은, 국가로부터 교회의 제 권리를 지키고 각 영방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연방 체제의 도입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창당한 지 얼마 안 되어 바이에른을 비롯한 남부 독일 국가들의 정치가들이 이 당의 핵심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교회 및 가톨릭 주민의 반발을 예상하지 못했던 비스마르크는 로마교회에 굴복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Heinrich Ⅳ)의 행보를 인용하여 '카노사(canossa)에는 결코 가지 않겠다'고 장담하면서도 교회에 대한 양보 정책을 펼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6-7)


1873년부터 시작된 수년간의 경제 불황은 주가의 대폭락과 수많은 기업의 도산 및 노동자들의 대량실업을 야기했다. 국민자유당의 지원하에 자유주의적 제 개혁을 시행함으로써 독일 경제는 비약적인 성장을 구가했지만 장기간의 공황으로 자유주의자들의 이상은 이제 어려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자 비스마르크는 국민자유당을 대신하여 보수당과 중앙당으로부터 지지를 얻고자 했다. 따라서 그는 지금까지 견지한 경제 정책의 근간을 포기하는 대신 새로운 경제 정책의 방향을 제시했다. 즉, 그는 보호관세 제도를 강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앙정부에 대한 지방정부의 부담금 역시 증액시켰던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이러한 정책적 변화는 자신과 국민자유당 사이의 균열을 가져왔지만 보수당과 중앙당과의 결속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은 점차 제국의 새로운 적으로 부상하고 있던 사회주의 추종 세력과의 대립에서 우위를 지켜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27-8)


비스마르크는 1878년 10월 21일 새로이 구성된 제국의회에서 사회민주주의 탄압법(Gesetz gegen die gemeingefährlichen Bestrebungen der Sozialdemokratie)을 통과시켜 사회민주주의적,) 또는 사회주의적, 무정부주의적 성향을 가진 단체들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또한 그러한 활동은 형법적 대상으로 간주되었고 당원들은 경찰의 감시까지 받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민주주의 탄압법은 2년간 한시적으로 시행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1890년까지 갱신ㆍ유지되었다. 1881년 11월 비스마르크는 제국의회에서 사회 입법의 취지를 담은 황제 교서를 낭독하고 노동자들에 대한 국가적 차원에서의 보호 및 부양 정책도 실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후 약 10년간 베를린 정부는 광범위한 사회복지 제도를 도입하는 데 적극성을 보였다. 자유주의 세력은 양분되었는데, 사회민주주의 탄압법 및 노동자 보호 입법에 반대했던 좌파와 달리, 우파 정치가들로 구성된 국민자유당은 사회 입법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것이다. 28-9)


실용적 외교 정책


1870년대 초부터 향후 약 20년 동안 비스마르크는 국제 정치 무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는데, 이 시기를 '비스마르크 시대(Ära von Bismarck)'라고도 한다. 비스마르크는 전쟁을 외교 수단으로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현실정치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독일 통합 이후에는 가능한 한 전쟁을 피하려고 했는데, 그것은 전쟁으로 인해 신생국가 독일이 위협받을 수도 있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인 것 같다.43) 그러면서 비스마르크가 항상 고려했던 것이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복수전(revanchekrieg)이었다. 여기서 그는 프랑스가 독자적으로 독일을 공격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반드시 동맹국을 필요로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프랑스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킬 경우 프랑스의 복수전은 실현될 수 없다는 확신하에 프랑스의 고립화를 독일 외교 정책의 가장 주요한 과제로 설정했다. 이후부터 그는 프랑스의 동맹국이 될 수 있는 러시아를 프랑스로부터 격리시키는 데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30)


1873년 비스마르크의 주도로 결성했던 삼제동맹은 붕괴될 위험이 컸다. 왜냐하면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와 오스트리아의 범게르만주의가 발칸 반도에서 충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러시아는 1887년 이 동맹 체제로부터 탈퇴했다. 여기서 비스마르크가 우려해 온 러시아와 프랑스의 접근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비스마르크는 그것을 막기 위해 1887년 6월 18일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Nikolaj Ⅱ)와 '재보장조약(Rückversicherungsvertrag)'을 체결했는데, 거기에는 독일과 러시아 중 어느 한 국가가 제삼국과 전쟁을 할 경우 다른 국가는 중립을 지킨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재보장조약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상호 방위조약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조약은 독일의 우방인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알 수 없게끔 비밀 조약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890년 3월 20일 비스마르크가 수상직에서 물러나면서 그의 복잡하고 위험한 동맹 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33-4)


실각의 과정


빌헬름 1세의 치세 말기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왕자 사이에 첫 번째 논쟁이 펼쳐졌다. 논쟁의 시발점은 유태인 및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반감을 가졌던 슈퇴커(Stoeker)가 1878년 기독사회당(Christlich-Soziale Partei)을 창당한 것에서 찾아진다. 슈퇴커는 창당 이후부터 자신의 정당을 통해 유태인과 사회주의자들을 폄하하는 데 주력했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유태인과 사회주의자들은 이질적인 집단이기 때문에 제국 내에서 배척당해야 하고 그렇게 해야만 사회적 안정과 평화가 구축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왕자 사이의 갈등을 유발시킨 주된 요인은 바로 이러한 슈퇴커의 조직적이고 반사회주의적인 행동에 대해 빌헬름이 공식적으로 동조했다는 것과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을 그가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당시 비스마르크는 신민 간의 갈등을 유발시킬 수 있는 슈퇴커의 주장에 대해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주장에 왕자가 동조한다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않으려고 했다. 35-6)


빌헬름 2세와 비스마르크 사이의 갈등은 사회 정책에서 본격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1889년 5월부터 루르(Ruhr) 지방과 슐레지엔(Schlesien) 지방에서 15만 명에 달하는 광부들이 파업을 전개했을 때, 비스마르크는 고용주들을 옹호한 반면, 황제는 순진하게도 노동자들을 지지했다. 당시 황제는 자신이 "가난한 계층의 황제(roi des gueux)"가 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비스마르크는 인기에 영합하는 빌헬름 2세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사회민주주의 탄압법에서도 양인은 견해를 달리했다. 빌헬름 2세는 탄압 위주의 사회민주주의 탄압법을 전면적으로 개정하려고 했지만, 비스마르크는 의회에서 기존의 탄압법을 큰 수정 없이 그대로 연장시키려고 했다. 1890년 1월 25일 야당과 보수주의자들은 제국의회에서 비스마르크가 상정한 사회민주주의 탄압법의 연장을 거부했는데, 그것은 비스마르크로 하여금 사회민주주의 탄압법에 대한 황제의 관점을 명확히 파악하게 하는 계기도 되었다. 38)


빌헬름 2세는 1890년 3월 20일 비스마르크의 사직청원을 수용했다. 외양상 황제는 아쉬운 마음으로 비스마르크를 떠나보냈고, 악화된 건강 상태와 그에 따른 그의 청원이 해임의 주된 이유인 것처럼 행동했다. 1890년 3월 29일 비스마르크는 베를린의 레어테르(Lehrter) 역에서 프리드리히스루로 떠났다.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비스마르크의 해임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는데, 그의 해임으로 인해 유럽의 평화가 위협받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비스마르크는 외교 정책에서 힘의 행보를 항상 올바르게 판단했고, 상대방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정확히 인지했다. 그러나 국내 정치에서 그는 이러한 통찰력을 거의 발휘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에서 종종 부각되었던 중용 유지가 국내 정치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못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국내의 정치 세력을 외교 정책에서의 힘의 게임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국내 정치적인 상황을 원만하게 처리할 수 없었던 것이다. 41-2)


은퇴 이후의 활동


빌헬름 2세는 「제국신문」에 정부 및 의회가 만장일치로 정한 비스마르크의 추도 기간 및 자신의 추도문을 발표했다. 거기서 그는 비스마르크가 빌헬름 황제 시기에 이룩했던 업적들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저해하는 요소가 있을 경우 무력과 피를 통해 그것들을 제거하겠다는 언급도 했다. 그런데 황제의 이러한 발언이 비스마르크를 잘못 이해하는 데 크게 일조한 것 같다. 또한 비스마르크를 칭송하는 문구들로 장식된 조형물들이 독일 전역에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정치가들 역시 빌헬름 2세와 마찬가지로 비스마르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것은 그들이 펼쳤던 정책에서도 확인되었다. 그들은 무력이란 방법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이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에서 확인되는 특징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빌헬름 2세가 모로코의 아가디르(Agadir)로 군함 '판터(Panther)'를 출항시킨 것 자체가 바로 '비스마르크식 정치'라 생각했던 것이다.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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