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최경봉.시정곤.박영준 지음 / 책과함께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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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0년(세종 2) 세종은 집현전을 확대 개편해 왕실 연구기관이자 국왕의 자문기관으로 키웠다. 이는 집현전의 주 임무가 왕에게 경서와 사서를 강론하는 경연經筵과 왕이 될 세자를 교육하는 서연書筵이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유교 국가의 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했던 세종은 문신 가운데 젊고 유능한 인재를 선발해 집현전 학사로 삼아 강론에 참여시켰으며 국가적으로 중요한 서적을 편찬하게 했고 일부 학사에게는 사관史官의 일을 겸하게도 했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학술만을 오로지 일로 삼아 종신토록 계속하라"고 당부하면서 여러 특혜를 베풀었다. 예를 들어 국가에서 책이 나오면 가장 먼저 집현전 학사들이 볼 수 있게 했고, 연구를 돕기 위해 많은 서적을 구입해 집현전에 보관케 했다. 또한 재주 있는 소장 학사에게는 집현전의 업무에서 벗어나 오로지 독서만 할 수 있도록 휴가를 주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특전을 베풀기도 했다."(29)


"1444년 2월 16일자 실록 기사를 보면, 세종은 집현전 교리 최항 등에게 언문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라 명하고 세자,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 왕자들이 이 일을 감독하고 관리하게 했다. 한글과 관련해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에게 내린 최초의 공식적인 지시였다."(32) "한글이 세종 25년(1443)에 창제되고 나서도 새 문자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찾아볼 수 없다. 그로부터 3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새 문자의 해설서인 《훈민정음해례》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고 나서 과연 무엇을 했을까? 세종은 창제 다음해인 1444년 2월에 한자음에 관한 책인 운회를 번역하라고 명했고, 1445년 1월에 신숙주, 성삼문을 요동에 보내 한자음을 질의하도록 명했으며, 같은 해 4월에 권제, 정인지 등이 편찬해 올린 《용비어천가》의 간행을 명했다. 이 세 가지는 한글이 세상에 나온 이후 3년 동안에 일어난 일 중 언어학적으로 주목해야 할 사건이다."(38)


왜 세종은 한자음 정리 사업에 매진했던 것일까? "한자음 정리 사업은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첫 번째가 옛부터 써오던 중국의 고대 한자음을 정리하는 것이다. 고대 한자음은 옛 한시를 지을 때 운을 맞추기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 세종은 《고금운회거요》와 같은 운서를 한글로 번역하도록 했다. 두 번째로는 당시 중국의 한자음, 즉 중국 명나라의 한자음을 정확히 알아야 했다. 중국 사신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 정확한 중국발음을 알기 위해서는 중국에서 사용하는 표준 한자음을 알아야 했다. 이를 위해 지은 것이 《홍무정운역훈》이다." "마지막으로 세종은 조선에서 사용하던 한자음의 표준을 만들고자 했다. 당시에 사용하던 현실 한자음을 정리하는 수준이 아니라 당대와 고대를 망라하여 가장 이상적인 표준 한자음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중국의 송나라와 명나라 운서들을 모두 참조하여 세종 29년(1447)에 완성된 《동국정운》이 바로 그 결과로 나온 것이다."(43-4)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하는 《훈민정음》의 어지御旨는 세종의 자주의식을 논할 때 자주 거론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대목은 중국말과 우리말이 서로 다르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고, 조선 한자음과 중국 한자음의 차이를 인식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세종 당시에도 한글의 창제와 사용은 한자와 한문의 지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세종 또한 한 번도 한자와 한문의 권위를 부정한 적이 없었다."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대부분의 국가는 한자의 음과 훈을 기록하고 자신의 모어母語를 기록할 수 있는 표음문자의 필요성을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몇몇 국가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문자를 창제하기도 했다. 몽골, 만주, 말갈 등 중국 주변 민족들이 한문을 사용하면서도 고유 문자를 갖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한글 창제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시작되었고, 한글의 위상 또한 이 맥락에서 결정되었다."(46-7)


"한글 창제의 정치적인 목적은 한글 창제 이전인 1434년 《삼강행실도》를 간행하고, 1442년 《용비어천가》의 편찬을 준비하기 시작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유교의 핵심 이념인 충과 효를 강조한 《삼강행실도》와 왕권의 정당성을 강조한 《용비어천가》는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불교에서 유교로 국가의 이념이 바뀌었으니 바뀐 이념을 홍보해야 했으며, 왕씨에서 이씨로 왕조가 바뀌었으니 새 왕조의 정당성을 홍보해야 했다. 그런데 성공적인 홍보를 위해서는 홍보 책자의 내용을 탄탄히 하는 것도 필요했지만, 사실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만드는 일이 중요했다. 이런 점에서 모든 백성이 쉽게 배울 수 있는 신문자 한글이 이 사업에 활용된 것은 필연적이었다. 세종 스스로도 《삼강행실도》를 쉬운 문자로 번역해 가르친다면 백성을 교화하기 쉬워진다는 논리로 한글 반포를 반대하는 신하들의 주장을 반박한 적이 있었다."(100)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했던 한글의 역할은 한글이 사회 계층 간 의사소통을 도왔다는 데 있다." 《천자문》을 가르칠 때 교육 문자로 한글을 사용했듯이 한글은 양반 계층의 한문 학습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고, "한글로 상소를 올리거나 한글로 방을 붙임으로써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언로言路가 트이게 되었다는 사실은 한글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양반들은 하층민들과의 소통을 위해 한글이 필요했고, 하층민들은 자신들의 뜻을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한글이 필요했다. 또한 학문적으로 높은 수준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되었던 여성들과 사대부 남성 간의 소통에도 한글은 중요한 기능을 했다. 중전이나 대비가 신하에게 한글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고, 신하들이 중전이나 대비에게 한글로 문서를 올리는 것은 조선시대에 있었던 일반적인 일이었다. 한글은 다양한 계층에서 사용했기 때문에 사용자 수를 기준으로 할 때에는 한글이 한문보다 사용층이 더 두터웠던 문자라고 볼 수 있다."(49)


채수가 지은 《설공찬전》이 불온한 내용으로 탄압받은 때가 1511년인데, 이때는 "한글이 창제되고 불과 50여 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이는 새 문자가 창제된 후 50여 년이 지나서 일반 백성들이 한글 소설을 탐독할 정도로 한글이 널리 보급되고 빠르게 유포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다가 18세기에 이르면 한글 소설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세책(貰冊, 전문적으로 책을 베껴쓴 다음 이를 대여해주고 돈을 받는 방식)과 방각(坊刻, 판매 목적으로 서방書坊 등에서 목판으로 판본을 만들어 대량으로 찍어내는 방식)이라는 새로운 유통 방식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즉 한글 소설의 상업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한글 소설을 빌려보거나 사고파는 방법이 없지 않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과 개인 간에 이루어진 거래였다. 이즈음 거리에서 소설을 읽어주면서 돈을 벌었던 이야기꾼(강담사講談師, 강독사講讀師)이 등장하기도 했다."(135)


"상업 출판과 한글 보급의 또 하나의 중요한 사례가 바로 천주교 교리서다. 1801년 정약종의 《주교요지》가 나왔을 때 한국 최초의 외국인 신부였던 주문모 신부는 한글로 된 이 책이 특히 무식한 부녀자와 아이들에게 가치 있다고 생각해 이를 간행한 바 있다. 또한 1801년(순조 1) 100여 명의 천주교도가 처형당한 신유박해 당시 죄인을 심문하던 심문관이 "서민이라도 삼사십 권의 천주교 서적은 가지고 있으니 책을 숨긴 곳을 말하라"고 다그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초기 교회에서 한글 교리서의 출판과 유통이 상당히 활발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1864년에는 서울에 있는 두 곳의 목판 인쇄소에서 네 권의 교리서를 간행하기도 했다." "1881년 동학의 경전인 《용담유사》가 한글로 간행되었으니 서학이든 동학이든 모든 종교와 사상은 한글로 교리를 출간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당시에 한글의 위력이 매우 컸으며, 한글의 대중적 보급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140-1)


"1910년 이후 일본의 식민 지배가 본격화하면서 일본어 상용화를 전제로 한 교육도 본격화됐다. 조선어를 제외한 모든 과목의 교과서가 일본어로 발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행정과 법률 관련 문서는 일본어로 된 문서를 표준으로 삼게 되었다. 일본어가 명실상부한 권력언어인 국어로 되고, 우리말은 피지배 민족의 언어로 그 위상이 급락하였다." "교육, 행정, 법률, 학술 등의 영역에서 밀려난 조선어는 금세 이류 언어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니 일본으로서는 굳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일본어를 강요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권력의 언어에서 밀려난 언어는 생활어로 쓰이다가 문명의 발달과 함께 도태된다는 것은 역사가 말해주기 때문이다. 오히려 조선총독부는 일본인 교사들에게 "언어가 통하지 않아 목적 달성에 지장이 없도록 조선어를 습득하라"고 권했으며, 총독부 관리들에게는 조선어 습득을 장려하면서 총독부 관리와 경찰을 대상으로 조선어 급수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154)


"주시경은 《보중친목회보》(1910.6)에서 '國語'를 '한나라말', '國文'을 '한나라글'로 바꾸었는데, 이로부터 '한말'이란 말과 '한글'이란 말이 만들어졌다. 따라서 '한글'의 '한'은 대한제국의 '韓'과 일치한다. 다시 말해 한글은 곧 '대한제국의 글자'라는 말을 나타낸다." "주시경의 제자인 권덕규는 "韓文을 조선말로 그냥 읽어 '한글'이라 한 것이요, 韓文이라고 그냥 음대로 정음으로 쓰면 지나글 漢文과 음이 혼동될 혐의도 있어 이것도 피한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어학회는 한일병합 이후에도 한글이라는 명칭을 확산시키는 데 주력한다. 조선어학회의 기관지 명칭을 '한글'이라고 한 것도 '한글'이 갖는 상징적 의미를 고려할 때 대한제국의 어문 정책을 지향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를 통해 본다면 당시 조선어학회 학자들은 '국문'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못하는 현실이지만 이에 대응할 수 있는 '한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독립의 의지를 불태웠을 수 있다."(244-5)


"1930년대 조선어학회의 활동은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첫째는 일본이 조선어를 용인하는 상황(이개언어병용정책)을 활용해 한글 강습 활동과 같은 대중사업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조선어 사전 편찬, 철자법 및 표준어 제정 등 조선어 규범화 사업에 매진하는 것이었다. 이때 절대 다수의 조선인이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문맹 상태에 있었던 현실은 조선어학회의 활동 영역을 넓힐 수 있었던 배경으로 작용했다." "1938년 3차 교육령 이후 조선총독부의 언어 정책은 강제적인 국어 상용 정책으로 전환되었고, 그 이전에 이미 한글 강습과 같은 대중사업은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조선어학회는 1940년 10월에 1933년의 철자법 통일안을 개정한 '개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간하고, 1940년 6월 로마자표기법과 외래어표기법을 제정하여, 이를 1941년 1월 《외래어표기법통일안》으로 출판하게 된다. 이는 어문 규범과 관련한 모든 사업을 완결했음을 의미한다."(159-60)


"근대 어문정리기에 우리 맞춤법을 기초했던 주시경과 같은 선각자들은 (본래의 단어 형태를 중시한)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의 표기법을 채택함으로써 형태상의 일관성을 중요시했던 세종의 손을 들어주었다." "1930년대 철자법 논쟁에서 형태주의 표기법을 채택한 조선어학회와 (발음을 중시한) 음소주의 표기법을 주장한 정음파의 대립은 일단 조선어학회의 승리로 마감된다. 이러한 갈등은 해방 이후에 다시 불붙기 시작한다. 이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음소주의 표기법의 필요성을 피력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도 조선총독부의 철자법을 자신들의 철자법으로 개정했고, 이 철자법을 바탕으로 편찬한 사전을 온갖 어려움을 뚫고 편찬해 왔는데 조선어학회의 후신인 한글학회가 자신들의 철자법 원칙을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명 한글파동이라고 불릴 만큼 당시 전 사회를 들끓게 만들었던 철자법 논쟁은 결국 한글학회의 승리로 끝난다."(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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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에 빠져 한국사를 바라보다
심재훈 지음 / 푸른역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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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중국 전문가의 한국사 관전평


"한국 상고사 특히 고조선에 관한 문헌기록은 위만조선 멸망과정을 다룬 《사기》 <조선열전> 이전의 자료로 한정하면 정말 한줌에 불과할 정도이다. 사마천이 《사기》를 편찬한 연대가 기원전 2세기 말~1세기 초 정도이니, 그 이전에 조선을 언급한 중국 측 기록은 글자수로 따지면 아마 100자 남짓 되지 않을까 한다. 그러니 위만조선 이전의 고조선사를 구축하는 작업은 기둥 몇 개만 가지고 큰 집을 지어야 하는 지난한 작업이다. 고고학 자료 역시 많은 한계를 안고 있다. 특정 자료를 민족이나 국가의 강역이나 활동 구역을 밝히는 증거로 활용하는 데는 큰 문제들이 따른다. 특정 고고학적 유물을 다른 족속들이 나누어 썼을 가능성뿐만 아니라 같은 족속이라도 다른 유물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고학적 자료를 민족의 구분에 활용하려는 시도는 문헌자료의 오용 못지않게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고조선 연구에 한국 학자들이 남용하고 있는 비파형동검이 좋은 사례다."(222-3)


"기원전 2세기경 출간된 복생伏生의 《상서대전尙書大傳》에는 주나라 무왕武王이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수감 중에 있던 기자箕子를 풀어주자 이를 부끄럽게 여긴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했고, 이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전한다. 《상서대전》보다 약 50년 후 사마천 역시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서 비슷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1970년대 랴오닝성遼寧省의 서부 다링하大凌河 유역에서 "기자 일족과 연관될 수 있는 기후라는 명문이 새겨진 상 말기의 청동기가 상당량의 다른 상말주초商末周初 청동기들과 함께 이 지역에서 출토되었다. 따라서 기원전 11세기경 기자 조선동래설은 상당한 고고학적 근거를 갖게 된 셈이다. 문제는 기자의 조선 동래를 전하는 문헌기록과 고고학 자료 간에 연대 편차가 너무 크다는 점이다. 고고학 자료에서는 기원전 11세기 그 족속의 이동 가능성을 볼 수는 있지만 문헌자료는 그보다 약 1000년 이후인 기원전 2세기 한나라 때나 되어서야 그러한 인식이 존재한다."(224-6)


선진先秦시대 문헌에서 기자는 상의 마지막 왕에게 학대를 받았지만, 주의 무왕에게는 환대를 받은 현인 정도로 묘사될 뿐이며 조선과의 연관성은 언급되지 않는다. "기자와 조선의 연관성이 한대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과 함께 시간이 갈수록 기자 관련 이야기가 증폭되는 양상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상서대전》이나 《사기》가 단지 기자의 조선 이주와 분봉만을 전하는 반면에, 《한서》에는 조선을 교화시킨 문화적 영웅으로서 기자가 나타나고, 이어지는 《삼국지》에서는 40대를 존속한 조선의 통치가문으로서 기자조선 상이 정립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1,400년 이후 조선 왕조에서 더욱 확대되어, 한민족의 시조로서 기자의 위치가 더욱 공고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양상은 전설적인 이야기가 후대의 문헌으로 갈수록 더욱 세밀하게 증폭되어 나타난다는 구제강(고힐강)의 '누층적累層的으로 조성된 고사古史'설과 맞아떨어져, 그 진위 여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229)


"따라서 기원전 11 세기 중엽 상 멸망 직후에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는 《상서대전》과 《사기》 〈송미자세가〉에 언급된 고사의 신빙성 여부도 엄정하게 재검토되어야 한다. 물론 기자 조선동래설을 비판하는 학자들도 상말주초인 기원전 11세기 다링하 유역에서 기자 일족이 일시적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은 부인하지 않듯이, 상 멸망 이후 기족을 비롯한 상의 귀족 세력들이 다링하 유역으로 이주했을 개연성은 있다. 이는 그 지역에서 발견된 다량의 상 후기 청동기들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서주 전기 연나라의 도읍으로 추정되는 유리허琉璃河 유적지를 비롯한 연나라의 근거지에서도 기족 관련 청동기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다링하 유역과 가까운 연에 근거지를 둔 소공과 기자와의 인연이나 양 지역에서 모두 출토된 기후 명문을 지닌 청동기들 역시 기자 일족의 동북이주설을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기자 일족이 도피해간 바로 그 지역에 과연 조선이라는 정치체가 존재하고 있었을까는 별개의 문제이다."(229-30)


"고조선에 관심을 가지는 유사역사가들이나 학자들까지도 그 연구에서 범하는 가장 큰 오류는 고조선의 원고성遠古性에 대한 선험적 믿음이다.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이나 혹은 기자조선 얘기처럼 기원전 11세기에라도 존재했다면, 그 후신인 위만조선이 기원전 108년에 멸망했기 때문에 고조선은 최소한 2,000년 혹은 1,000년 이상 존속한 나라가 된다.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장기적으로 존재한 나라다." "역사상 존재한 한 정치체나 나라의 존재 여부를 확정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신빙성 있는 문헌 증거로 입증되는 실체가 있어야 한다. 둘째, 고고학적으로 입증되는 실체일 텐데, 최소한 그 중심지로 추정될 만한 성곽이나 묘지 등의 존재가 적절한 편년編年과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 "중국 최초의 왕조로 알려진 전설상의 하夏나라와 그 유적지로 추정되는 기원전 얼리터우二里頭 유적과의 연관성은 그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230-1)


선진시대 문헌 중에 고조선의 존재를 입증하는 근거로 동원되는 "《관자》와 《전국책》은 기원전 1세기 말 유향劉向의 편집을 통해 현재의 형태로 전래되었고, 조선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산해경》의 두 편 역시 한대에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관자》는 그 내용이나 어법이 전국시대 이전으로 소급될 수 없는 부분이 많고, 한 사람의 저작으로 보기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 원형은 전국시대 제나라의 직하稷下에서 활동하던 다양한 학자들이 당시 영웅화된 관중의 사상을 대변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지만, 대부분 진과 한나라 초기를 거치며 소실되었고 유향의 재편집 당시 많은 부분이 새롭게 추가되었을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설사 백번 양보하여 《관자》 두 편에 나오는 내용의 신빙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문헌으로 입증할 수 있는 조선의 최초 출현은 (환공과 관중이 활동했던 기원전 7세기로서)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는 기원전 11세기 중반과는 무려 400년의 차이가 존재한다."(233-4)


"기원전 211년 진의 통일 이후 《사기》 〈진시황본기〉에 진의 영토가 동쪽으로 조선에까지 이르렀다고 언급되어 있듯이 조선이 중국 동북방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사마천은 또한 〈조선열전〉에서 기원전 194년 위만의 조선 왕위 찬탈 이후 조선의 급성장과 함께 1년을 끌어온 한 무제의 조선 정벌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의 존재를 강하게 인식하지 못했던 선진시대의 학자들과 달리 한대 이래의 학자들에게는 요동의 동부나 한반도 서북부를 차지했을 조선이 오늘날 중국 동북부의 대표 세력으로 각인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한대인들은 오늘날 우리들이 이용 가능한 고고학 자료를 활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곳의 대략적 위치(다링하 유역)에 대한 정보는 없었을 것이다. 나아가 한 무제의 조선 정벌에 뒤이어 그 지역에 설치한 군현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까지 더해져 기자의 조선동래 고사는 더욱 정치하게 다듬어질 수 있었다."(235-7)


"중국 동북 지역의 역사를 자신들의 충성심에 따라 정치적 변신을 거듭한 요遼나라 때(907~1125) 변경 주민들의 시각을 통해 바라본 나오미 스텐든은 《속박되지 않은 충성심》에서 당시 중국 동북 지역에서 '중국'은 통합된 개체로서나 관념적으로도 존재하지 않았고, 문화적인 정체성이나 민족성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오직 지역 지도자들의 충성심이 정치적 추이를 결정하는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중세까지 이 지역을 단일한 민족이나 국가적 정체성으로 규정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중국 동북 지역에서 중국의 부재가 지금부터 2,000~3,000여 년 전 그 지역을 아우르는 고조선의 존재를 보증해주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많은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연원이라고 믿고 있는 고조선이 어떤 식으로든 존재했을 수 있지만 만주 지역은 고대 이래 청대까지도 다양한 세력이 이합집산하며 명멸한 곳이었다. 결코 민족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종의 용광로였던 것이다."(2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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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역사학 비판 - 『환단고기』와 일그러진 고대사
이문영 / 역사비평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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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국사를 가문의 역사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민족주의가 오랫동안 강조되어온 결과이다. 그리하여 고대의 일도 마치 어제 삼촌이 도둑 맞은 것처럼 여기면서 역사를 들여다본다. 로마의 멸망은 아무렇지도 않게 읽으면서, 고구려의 멸망은 할아버지네가 망한 양 분통을 터뜨리면서 읽는다. 그러다보니 유사역사를 믿는 사람들은 현재 한국사 교육에 극도의 저항심리를 느끼게 된다."(33) 가짜의 세계는 다양하다. 돈이 잘 벌릴 것 같아서 만들 수도 있고,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해 만들 수도 있고, 종교를 위해 만들 수도 있다. 공통점은 조작된 자료를 가지고 기존의 사실을 부정하면서 자기주장을 일방적으로 펼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유사역사학의 고약한 문제는 (객관적으로 자료를 검증하고 판정을 내리는) 심판관(역사학자) 자체가 오염되었다고 몰고 가는 데 있다. 유사역사학에서는 역사학자들을 친일파, 매국노, 식민사관 추종자로 비난하며 낙인을 찍고 있다."(37)


# 로버트 T. 캐롤의 유사역사학 정의

1. 신화·전설·모험담 그리고 이와 유사한 문학을 문자 그대로 사실로 수용

2. 고대 역사 문헌에 비판적·회의적 태도를 취하지 않고 그 명목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고대 사가의 주장에 대한 경험론적·논리적 반증을 외면

3. 절대로 확실한 것만이 '진실'이며, 절대로 확실한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무엇도 진실이 아니라는 극단적인 회의적 개념에 집착

4. 자신의 의제에 맞는 것은 호의적으로 인용하고, 맞지 않는 문헌은 무시하거나 해석에서 제외하면서 고대 문헌을 선택적으로 사용

5. 의제에 들어맞기만 하면 그것이 진실일 수도 있는 '가능성'을 진실이 되기에 충분조건이라고 간주

6. 인종적 편견이나 무신론, 자민족우월론 때문에, 또는 정치나 종교적 의제에 반대하기 때문에 자기들 주장을 억압하는 음모가 있다고 강조

7. 역사는 승자의 기록에 불과하기 때문에 역사학이란 엄정한 과학이 아니며, 그저 국가의 이익 또는 도덕에 봉사하면 된다고 주장


시카고대학 종교학과 교수인 브루스 링컨은 『신화 이론화하기』에서 "영국 태생의 동양학자 윌리엄 존스 경이 1786년에 내놓은 유럽 언어들과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그리고 페르시아어의 관계와 공통 기원에 대한 가설이 어떤 파장을 끼쳤는지를 잘 보여준다. 존스의 이론은 게르만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찬란한 그리스·로마와 공통의 조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깨닫고 문화적 열등감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그리고 아리아족과 관련이 없는 유대인을 상정함으로써 독일인에게 유대인 박해의 근거를 만들어주었다. '인도-아리아 어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위에 '민족'이 덧씌워지면서 후일 나치가 이 신화를 이용해 홀로코스트라는 전대미문의 대범죄를 저지를 계기가 착착 만들어져갔던 것이다. 유사역사학에서는 파미르 고원을 중요시한다. 파미르 고원에서 인류가 발생했다는 말도 흔히 한다. 그런 척박한 곳에서 생명체가 진화했다는 걸 믿는다는 것 자체가 어이없는 일이다."(53)


"유럽 국가들이 언어를 통해 민족의 기원을 신비하게 채색하려 했던 것과 같은 일이 아시아에서도 일어났다. 한국어와 일본어가 '우랄-알타이 어족'이라는 학설이 나오면서 동아시아에서도 같은 바람이 불었던 것이다. 우랄-알타이가 아리아어나 셈어와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은 이미 19세기때부터였다. 핀란드와 헝가리를 중심으로 '범투라니즘'이라는 운동이 일어난 적 있었다. 투라니즘은 이란 북동부의 투란 평원에서 나온 말로, 우랄-알타이 어족을 '투란 민족'이라는 이름하에 하나로 묶어내려는 이념이다. 투라니즘은 헝가리에서 19세기 초에 시작되었고 1914년 터키의 아타튀르크에 의해 제창되어 터키 민족주의에 이용되기도 했다. 우랄-알타이라는 거대한 영역을 포괄하는 공통의 조상 이야기는 인도-아리아어족의 상정이나 마찬가지로 근대국가 건설에 목마른 이들에게 호소하는 바가 있었다. 일본은 얼른 이 개념을 차용했다." "투라니즘은 일본제국의 대아시아주의와 결합하여 전파되었다."(65-6)


제국주의를 지향한 일본은 "아시아를 병합할 명분이 필요했다. 일본의 힘이 성장함에 따라 그들의 논리도 점차 제국주의화되었다. 시작은 동문동종론(同文同種論)이었다. 동일 문명인 한자 문화권에 들어 있는 아시아 인종이 뭉쳐 유럽 인종에게 대항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이보다 더 사람들을 강력하게 이끄는 이론이 일본에 등장하게 된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유사역사가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혈통주의에 입각한 '아시아주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쥬신론' 또는 '대동이(大東夷)'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이 혈통주의 속에서 중국은 같은 혈통이 아니다. 당시 일본이 같은 혈통으로 간주한 종족은 일본, 한국, 몽골, 만주, 그리고 시베리아의 고아시아 인종들뿐이었다. 이 세력은 후일 '동이족'이라는 이상한 카테고리에 묶인다. 감히 동이족의 땅을 침략하는 러시아를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고, 결국 그들의 뜻대로 러일전쟁이 벌어졌다."(74-5)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활약했던 신채호는 "민족은 역사가 없으면 국민이 되기 힘들 뿐이지만, 역사는 민족이 없으면 아예 존재 자체가 말살된다고 말하고 있다. 민족과 역사에 대한 신채호의 인식은 그 유명한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말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나(아)와 내가 아닌 남(비아) 사이의 관계(투쟁)로서 역사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초기의 신채호가 견지했던 이 역사관에는 큰 약점이 있었다. 아와 비아의 투쟁에서 패배한 민족은 어떻게 되는가? 그런 민족은 다른 민족에게 흡수되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신채호는 약자를 밟아버리는 사회진화론에 회의를 품었다. 그 결과 그는 1920년대부터 무정부주의자로 탈바꿈했다." "신채호는 이제 민족이 아닌 민중을 중시하고, 민중을 새로운 역사의 주체로 바라보게 되었다. 불행히도 그는 이런 인식 변화를 책으로 남기지 못한 채 1928년에 무정부주의운동 중 체포되었고 옥사했다."(86-7)


"광복 이후 한국에는 두 조류의 민족주의가 흐르고 있었다. 초대 문교부 장관(지금의 교육부 장관) 안호상으로 대표되는 극우적인 국수주의가 한 흐름이고, 4월혁명으로 촉발되어 터져 나온 제3세계적인 민족주의 흐름이 다른 하나다. 4월혁명으로부터 촉발된 민족주의적 흐름은 중립화 통일론과 같은 급진적 방식의 통일론을 불러왔는데, 이런 흐름은 5·16쿠데타로 일시 정지되고 만다. 쿠데타의 주역 박정희는 '민족적 민주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1963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이후 "'군정 이양'이라는 자신의 약속을 저버린 박정희는 민주 세력의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 첫 표출이 한일협정 반대운동, 이른바 6·3운동이었다." "문정창의 책은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탄생했다." "그런데 그는 한일협정에 대해 탄식하면서도 정권에 대한 비판은 일절 입에 담지 않고, 그 분노를 엉뚱한 방향으로 쏟아냈다. 바로 역사학계를 향해서였다."(107-8)


"문정창은 역사학계를 매도하는 프레임을 짰고, 이후 유사역사학에서는 끊임없이 그것을 이용했다. 어떤 프레임인가?" 그것은 일부 사가史家들이 일본인 어용학자들의 술수에 넘어가, 단군조선의 실존을 부정하고 '단군신화설'로 격하했다는 주장이다. "문정창이 꺼낸 조선총독부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역사학계가 조선총독부 사관을 답습한다'고 공격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전상진은 『음모론의 시대』에서 음모론자들은 상대방을 악마화 한다고 말한다. 상대를 악마화 하면 설령 우리 편이 실수를 해도 그것을 상대방의 공작으로 밀어붙일 수 있다. 자신들에게 동조하지 않고 자신들을 비판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모든 세력은 악마가 된다." "문정창의 주장을 확산시킨 것은' 국사찾기협의회'라는 단체였다. 국사찾기협의회는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안호상이 1975년에 설립했는데, 이 단체가 결성되면서 유사역사학이 달궈지기 시작했다."(111-2)


"안호상에게 '역사학계=식민사학'의 프레임이 나타나는 것은 1970년대 들어서다. 그는 늦어도 1973년에는 문정창을 만났으며, 1975년부터는 함께 행동했다. 또한 배달문화연구원을 운영하면서 유사역사가들과 정기 모임도 가졌다. 백제의 중국 동남부 점거, 낙랑군이 한반도에 없었다는 등의 주장에 학계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문교부를 상대로 '국정 국사 교과서의 국정 교재 사용금지 및 정사 편찬 특별기구 설치 등의 조치 시행 요구에 대한 불허 처분 취소청구의 소'를 제기했다. 이후 그는 1975년 10월 8일 '국사찾기협의회'를 결성하고 국사찾기운동을 시작한다. 당시 역사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회고할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여기에 참여한 인사 중 한 명인 "월간 『자유』의 박창암은 퇴역 군인이다. 그는 만주군 출신으로 간도특설대에서 중국 공산군인 팔로군 진압에 활약했던 인물이다. 뒤에 5·16 쿠데타에 참여하여 혁명검찰부장으로 서슬 퍼렇게 활동했다."(117-8)


"박정희의 사상적 지향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1968년 12월 5일의 '국민교육헌장' 제정이었다. 안호상은 초반에는 구정치인으로 박정희 정권의 홀대를 받았지만, 1968년에는 민족주의를 표면에 내세운 박정희 정권과 협력하여 국민교육헌장 선포에 관여했다. 국민교육헌장 제정 이후 박정희는 민족에 대한 열등감보다 민족의 긍정적 측면을 바라보는 경향이 강해진다. 이런 변화의 흐름 중 하나가 1970년대에 일어난 이순신 영웅화 작업 등 외침에 저항한 '민족사 복원' 작업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특히 '화랑도'가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화랑을 부각한 사람은 이선근으로 알려져 있다. 이선근은 제4대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역사학자이다. 그는 안호상과도 친했으며 안호상이 일민주의를 내세웠을 때 '일민'이라는 한자보다 우리말 '한겨레'를 쓰라고 권했을 정도였다. 이선근은 우익 단체인 '대동청년단'의 부단장이기도 했다."(136-7)


"식민사학 프레임의 등장에는 그 전까지 검인정이었던 한국사 교과서가 1974년에 국정교과서가 되었다는 사실이 배경으로 존재한다. 전 국민에게 동일한 역사관을 주입할 수 있는 통로가 된 국정교과서 체제는 유사역사가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전달하기에 최적의 체제였다." "유신이 실시된 1972년에 국사교육 강화 방안이 등장했고, 이 방안에서 민족 주체성 확립이 과제로 제시되었다. 1973년부터 국정교과서 발행을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그 표면적인 목표 중 하나가 식민사관의 극복이었다."(119) "안호상이 주창했던 일민주의도 한백성주의로 이름을 바꾼 채 계속 유지되었다. 당연히 한백성주의에서도 안호상은 핏줄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그는 여러 종족이 섞인 나라는 혼혈이기 때문에 하나의 핏줄로 변할수록 더 나은 나라가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한다. 이승만 때 하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을 되풀이한 셈이다."(121)


'국사찾기협의회'의 주요 회원이자 『환단고기』의 번역서 『한단고기』를 내놓아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임승국은 국가보안법으로 역사를 재단하자고 말하면서 전두환에게 꼬리를 쳤다. "대통령 각하의 의지 하나로 결정될 수 있는 국사 광복". 공권력으로 밀어붙이면 역사의 진리가 입증된다는 논리다. "임승국은 민족주의를 반공과 동일한 개념으로 보았다.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도 국가안보(반공)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역사를 국가체제철학이라고 주장한다."(130) "그는 한국사를 다섯 개의 조국으로 구분하는데, 제1조국은 환인의 나라인 환국, 제2조국은 신시개천의 환웅의 나라, 제3조국은 단군왕검의 고조선, 제4조국은 부여→삼국→발해로 이어지며, 제5조국은 제5공화국으로 이어진다. 거기에 조선은 없다." "그가 조선을 덮어버리자고 하는 것은 조선의 역사를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 그는 수치스러운 역사는 숨겨야 한다고 주장한다."(132-3)


"『환단고기』는 그 첫마디부터 "우리 환국의 건국이 가장 오래되었다(吾桓建國最古)"라고 시작된다. 처음과 오래됨에 집착하는 모습이다. 또한 「삼성기전 하편」에서는 첫마디에 "인류의 조상은 나반이라 한다(人類之祖曰那般)"라고 적고, 이후 중국과의 대결에서 우리가 승리했다는 내용을 적어 중국에 대한 뿌리 깊은 열등감을 해소하고자 한다. 이 열등감 때문에 핏줄의 문제가 묘하게 꼬이고 말았다. 중국의 고대 신화·전설의 인물 대부분을 동이족, 즉 한민족의 일원으로 설정하다보니 중국사를 한국사로 할 수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조차 불분명해진 것이다." "『환단고기』 「태백일사」는 고려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역사를 기술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조선에 대한 멸시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의 역사에서도 금나라를 사대한 사실이나 몽고의 침략으로 결국 항복한 사실은 언급하지 않고 있어서, 고려사를 모르는 상태라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의 기술을 하고 있다."(172-3)


"『환단고기』 안에는 근대 이후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들이 나타난다. 위작이라는 증거 중 하나다. 이에 대한 유사역사학 측의 이른바 '반론'은 크게 두 가지 방향이었다. ① 근대에 사용한 용어가 아니다. ② 가필이 있다고 해서 위서는 아니다. ①의 반론은 의미 없는 우기기일 뿐이다. ②의 반론은 사료비판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환단고기』의 문제는 근대에 사용된 단어가 들어 있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환단고기』 「삼성기」의 지은이라고 주장된 안함로(安含老)와 원동중(元董仲)은 안함(安含), 노원(老元), 동중(董仲)을 잘못 읽은 것이다. 「삼성기」는 원래 『세조실록』에 나오는 책 이름이다." "조선시대에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황해도 해주목 '고적' 조에 "수양산성을 안함, 원로, 동중 세 사람이 쌓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노원(老元)의 이름이 뒤집혀 원로(元老)가 되었는데, 한자는 동일하다. 이처럼 다른 책을 통해서도 『환단고기』가 위조되었다는 사실이 증명된다."(181-2)


"이유립은 기자조선을 사마천이 만들어냈다고 주장하면서 기자를 극력 부인한다. 그가 이렇게 말한 데는 물론 이유가 있다. 『삼국유사』를 보면 단군의 고조선이 있고 기자가 와서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위만이 기자의 후예 준왕을 몰아내고 조선을 차지했다. 단군은 한민족의 시조이지만 기자나 위만은 '중국인'이다. 그가 보기에 중국인이 감히 한민족의 나라를 차지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피의 순수함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이유립뿐만 아니라 유사역사가들의 공통된 의식이다. 국사찾기협의회의 일원인 임승국은 『한단고기』에서 "우리는 '하늘→하느→한'의 음운 법칙을 갖는 민족으로 '하늘님→하느님→한님'을 조상으로 모시는 민족신앙을 갖는 민족이다. 하느님의 피를 직접 유전으로 받아 곧 하느님으로 태어나는 백성이라는 천민신앙(天民信仰)은 온 세상에 자랑하고 싶은 우리의 믿음이다"라고 말했다. 순혈이 중요한 유사역사가의 입장에서 기자와 위만은 용납할 수 없는 존재였다."(187-8)


# 기자조선의 빈자리를 채워넣은 한국사 : 『환단고기』


"『환단고기』 「삼성기」 상편에는 "한 신이 사백력(斯白力) 하늘에 있어 홀로 신이 되어 (···) 어느 날 동녀동남 800명을 흑수, 백산의 땅으로 내려보냈다"는 구절이 있다. 유사역사가들은 '사백력'이 시베리아라고 주장한다. '시베리아' 자체가 근대에 생긴 지명인데, 마치 고대에 비슷한 발음으로 불렸을 것처럼 만들어진 단어가 '사백력'이다. "동녀동남 800명을 흑수, 백산의 땅으로 내려보냈다"는데, 이 땅은 만주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흑수'는 흑룡강 '백산'은 백두산이라는 것이다. 즉, 이유립이 「삼성기」 상편에서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환인이 시베리아 땅에서 만주로 와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티베트고원에서 산동반도까지 장악한) 배달국은 환국 다음에 환웅이 세운 나라 이름이다." "이유립은 생산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제국이 어떻게 성립 가능한지 생각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저 땅의 절반 이상이 농사도, 심지어 유목도 불가능한 동토의 땅이라는 사실도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으리라."(213-5)


서거정이 편찬한 『동국통감』을 보면 "요임금 원년 갑진년설에 따라 고조선의 건국 연대는 요임금 25년 무진년으로 결정되었는데, 바로 이 해가 기원전 2333년이다. 이렇게 만든 이유 중 하나는 명나라 건국과 조선 건국의 연도 차이가 25년이 나기 때문이다. 그 연도 차이에 맞춰 요와 단군의 간격도 벌려놓았던 것이다. 만일 요임금-고조선 동시 건국설을 따른다면 고조선의 건국년은 기원전 2357년이 된다. 2018년도 단기 4351년이 아니라 4375년이 될 것이다. 한편 『삼국유사』에 언급된 『고기』에 근거해 요임금 50년 건국설을 따른다면 기원전 2308년이 된다." "『환단고기』와 같은 위서들은 (『동국통감』에서 확정된)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것으로 역사를 꾸며놓았다. 워낙 오랫동안 알아온 연대였기 때문에 고칠 생각을 못한 것이다. 『환단고기』 등이 실제로 과거의 책이 아니라는 간단한 증거라 할 수 있다."(254-5)


"이른바 '영토 순결주의'라는 게 있다. 우리 영토에는 일체 다른 민족의 '더러운' 손길이 닿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식이 고대사에 투영되면 낙랑군이라는 '다른 민족의 더러운 손길'이 문제가 되고 만다. 그러나 유사역사학에서는 반대로 말한다. 사대주의와 식민사관 때문에 우리 역사를 축소시켜온 것이 한국 역사학계이고, 그 대표적인 예가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라는 주장이라는 것이다."(281) 문명은 흔적을 남긴다. "요서의 어디가 낙랑군이었다고 말하는데, 수백 년을 유지한 그곳에는 아무런 유적·유물이 없다. 그렇지만 그곳이 낙랑군이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그들이 '식민사학의 수괴'라고 치를 떠는 이병도의 말을 인용해서 고고학보다 문헌을 중시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이는 이병도 시절의 낡은 이야기일 뿐이다. 고고학의 눈부신 성과에 대항할 방법이 없자 꺼내든 궁여지책에 불과하다. 평양에서는 엄청난 양의 낙랑군 유물과 유적이 나왔다."(283)


"근대에 와서 광개토왕비를 발견한 사람이 일본의 밀정 포병 대위 사코 가게아키(사코 가게노부)이기 때문에 비문 위조설도 광범위하게 퍼졌다." "광개토왕비문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구절은 신묘년(391) 조의 기사로, 위조된 것이라는 주장도 이 기사 때문에 나왔다. 이 기사는 왜가 신라와 백제를 공격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비문의 내용을 잘 살필 필요가 있다. 광개토대왕이 병신년(396)부터 기해년(399)까지 백제를 토벌하고, 경자년(400)에는 신라를 도와 임나가야를 정벌했으며, 갑진년(404)에는 다시 백제와 손을 잡은 왜를 격멸했다는 내용이 신묘년 조 다음에 적혀 있다. 왜가 신라와 백제를 공격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사실이라 해도 비문이 결국 이야기하는 바는 왜(일본)의 대패이다. 광개토왕비는 왜군의 패배, 그것도 대패가 기록된 비석이다. 오늘날 한·중·일 학계는 모두 신묘년 기사가 고구려의 허풍이 들어갔다고 보고 있다. 상대가 막강해야 쳐부순 맛이 난다는 거다."(342-4)


"일본 역사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광개토왕비를 일본으로 가져갈 생각을 했다. 이 무렵 일본은 러일전쟁을 치르던 중이었다." "광개토왕비를 일본에 가져가려 한 이유는 그 비에 적힌 패배를 보고 일본 국민으로 하여금 분발하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시라토리는 패배를 직시하여 분발하자고 했지만, 일본의 국수주의자들은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남연서(南淵書)』라는 위서가 등장한다. 견수사로 중국 수나라를 다녀오던 일본 사신 미나부치노 쇼안이 귀국하다가 광개토왕비를 보고 그 전문을 적어 온 책이 『남연서』라는 것이다. 『남연서』에 따르면 왜는 고구려에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결국 패배했다는 열등감이 위서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1943년 조선총독부는 각도 경찰부장에게 항일 기록이 새겨진 고비들을 폭파하도록 지시했다. 이 명령은 실제로 행해졌다. 남원의 황산대첩비도 지금은 복원해놓았지만 이때 부서졌다."(344-6)


1994년 「삼국시대 천문현상 기록의 독자관측사실 검증」이라는 논문에서 "박창범은 초기 신라가 양자강 중류 지대에 있었으며 백제는 북경 일대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같은 말을 하는 유사역사학자들의 주장이 근거가 너무 박약한 터라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는 참에 "삼국이 중국 땅에 있었다는 "과학적인 증거"가 주어졌으니 환호할 만도 했다." "박창범이 계산한 백제와 후한의 일식 관측 최적 위치를 보면 동일한 지역을 최적 관측지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박창범은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에 대해 단 한마디도 설명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책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에서는 후한의 최적 관측지 지도를 빼버렸다." "박창범 등의 주장은 기본적인 오류를 가지고 있다. 일식은 범위가 아주 넓어서 관측할 수 있는 영역도 매우 크다. 이 영역이 겹치는 곳의 중심이 일식을 관측한 곳이라고 볼 수 없다. 특히 고대사의 경우 관측 기록, 즉 표본이 너무 적기 때문에 유의미한 결과를 낼 수 없다."(347-9)


유사역사학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만주원류고』는 건륭제가 제작을 지시하고 검토한 책인데, "'부족' 조에서 부여, 읍루, 삼한, 물길, 백제, 신라, 말갈, 발해, 완안, 건주 순으로 숙신과 관련된 자료들을 열거한다. 책 제목 그대로 만주족의 원류를 파악하겠다고 쓴 책인데 여기에 부여, 삼한, 발해와 같은 한민족 국가들을 다 집어넣었다. 즉, 부여, 삼한, 발해를 여진족의 변방 부족으로 구성한 책이다. 언어와 음성적 유사성을 근거로 만주의 길림 지방이 신라의 계림이라고 말하는 등, 학문적 신빙성과는 거리가 먼 책이다. 『만주원류고』 '강역' 조에서도 부여, 삼한, 옥저, 백제, 신라, 발해까지 전부 만주에서 활동한 것으로 만들어 청나라의 전사(前史)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만주의 지배자였던 고구려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고구려를 빼놓은 왜곡된 역사책을 만들었는가? 만주 지역의 역사적 주인공은 여진족이어야 하기 때문이었다."(361-2)


# 유사역사학자들이 우리나라 상고시대 지명들을 대부분 요동에 비정하고 있는 이유


"유사역사학 추종자들은 흔히 "일본과 중국은 없는 역사도 만드는데 우리는 있는 역사도 챙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있는 역사'라 주장하는 것이 세계 학계에서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 국수주의에 물든 유사역사학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몇몇 외국 학자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반박하지만 그 절반은 역사학자가 아니고 나머지는 유사역사학 추종자들의 오해와 오독의 결과에 불과하다. 부사년처럼 동북공정의 전초를 만든 학자의 이론을 가져와 단장취의하는 파렴치한 짓들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유사역사학은 역사학 자체를 오도하면서 역사 연구의 목적이 자국의 영광을 되살리는 것이라 현혹하고, 현재 시점에서 수치스러운 역사는 은폐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유도한다. 또한 한민족이 가장 뛰어난 민족이라는 생각을 퍼뜨려 다른 나라 사람들을 깔보고 업신여기게 만든다. 이런 역사관을 가졌던 이들이 나치와 일본제국주의였다."(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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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대혁명 - 중국 인민의 역사 1962~1676 인민 3부작 3
프랑크 디쾨터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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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을 닮고자 했던 마오쩌둥은 비非스탈린화 움직임에 개인적으로 위협을 느꼈다. 아울러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위대한 소련에서 흐루쇼프가 어떻게 그처럼 단독으로 완전한 정책적 반전을 꾀할 수 있었는지 의아했다. 어쨌거나 소련 건국의 아버지로 불린 블라디미르 레닌은 1917년 볼셰비키 집권 이후에 외국 열강의 연합 공격을 성공적으로 버텨 냈고 25년 뒤 스탈린은 나치 독일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터였다. 답은 소련에서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개조하는 작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데 있었다." "공산주의 논리에 따르면 생산 수단의 소유 문제를 둘러싼 사회주의식 개혁이 일단락된 다음에도 개인주의적인 사고부터 민간 시장에 이르기까지 부르주아 문화의 모든 흔적을 영원히 제거할 새로운 혁명이 필요했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데 혁명이 필요한 것처럼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넘어갈 때도 혁명이 필요했다. 마오쩌둥은 이를 문화 대혁명이라고 불렀다."(10-1)


"많은 독재자가 그렇듯이 마오쩌둥은 자신의 역사적 사명과 관련하여 거창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쉽게 원한을 품는 남다른 재주도 있었다. 뒤끝이 길었던 그는 쉽게 상처받고 분노했다. 인명을 경시한 탓에 사람들을 겁박하려고 벌인 정치적 운동에서 태연하게 살인 할당량을 부과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점점 더 동료와 부하를, 특히 오랜 세월 자신의 곁을 지켜 준 전우를 공격하면서 공개적으로 모욕하거나, 투옥하거나, 고문했다. 요컨대 문화 대혁명에는 한 늙은 남자가 말년에 이르러 개인적인 원한을 해결하려는 목적도 존재했다. 문화 대혁명의 이 같은 두 가지 측면, 즉 수정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사회주의 세계를 지향하는 비전과 실재하거나 상상 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적을 겨냥한 추잡하고 앙심에 찬 음모는 별개가 아니었다. 마오쩌둥은 자신과 혁명을 동일시했다. 자신이 곧 혁명이었다. 자신의 권위에 불만족스러운 기미만 보여도 프롤레타리아 정권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으로 간주했다."(12-3)


1부 초기(1962~1966)


"더 이상 대기근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마오쩌둥이 취한 첫 번째 행보는 기근의 책임을 계급의 적에게 돌리는 것이었다. 그는 1960년 11월에 쓴 글에서 <불순분자들이 폭력과 살인, 식량 부족과 굶주림 등을 야기해 권력을 잡았다. 민주주의 혁명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 사회주의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 찬 봉건 세력이 문제를 일으키고 생산적인 사회주의 세력을 방해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은 1956년 이후에도 (스탈린의 저서 『단기 과정』을) 숭배했다. 그는 <사회주의 혁명이 무르익을수록 계급 투쟁은 더욱 격렬해진다>라는 스탈린의 개념에 특히 주목했다. 『단기 과정』에 따르면 <우리가 강해질수록 적은 더욱 유순해지고 고분고분해질 것이다>라고 가정하는 것은 <안일한 자기만족>이었다. 실제로는 정반대 현상이 일어났고 이는 경계심을, <진짜 볼셰비키 혁명가들의 경계>를 촉구했다. 적은 더 이상 외부에 있지 않다. 오히려 잘 보이는 곳에, 바로 당원들 사이에 숨어 있었다."(53-4)


"몇 개월 뒤 사회주의에 초점을 맞추어 혁명적 경계심을 고취하고 일반 대중을 교육하기 위한 사회주의 교육 운동이 <계급 투쟁을 잊지 말라>라는 표어와 함께 시작되었다. 빈농과 중산층 농민들로 이루어진 다양한 위원회가 활용되었다. 허베이 성 싱타이 지구에서는 수천 명의 농민들이 조직되어 <자본가>와 <독자적으로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들>을 공격했다."(58) "류사오치는 사회주의 교육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1963년 2월에는 도시의 부패 실태를 고발하는 펑전의 보고를 중간에서 가로막고 사회주의 교육 운동이 <우리 당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중대한 계급 투쟁>이라는 사실을 엄중하게 경고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결연한 혁명가이며 주석을 계승할 자격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마오쩌둥 본인보다도 더 극단적인 좌파의 길로 노선을 선회하고 있었다. 1963년 말에 이르러서는 공작대를 이끌도록 자신의 아내를 농촌으로 보냈다."(60-1)


류사오치가 주도한 숙청 작업으로 "모든 성이 휘청거리고 있을 때 1964년 10월 모스크바에서 (흐루쇼프의 직속 부하 중 한 명인 브레즈네프의 무혈 쿠데타라는) 일련의 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마오 주석은 이제 자신의 명백한 후계자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당내에서 부쩍 권위를 내세우는 류사오치가 심히 의심스러웠다." "얼마 뒤 12월 26일에는 자신의 일흔한 번째 생일을 맞아 인민 대회당에서 열린 만찬에 일단의 당 지도부 인사들을 불러 놓고 수정주의에 관한 이야기만 자꾸 되풀이하면서 당 중앙에 존재하는 <독립적인 왕국>을 공격했다. 냉랭한 분위기였다." "류사오치는 민초를 조사하도록 자신의 아내를 파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국의 대규모 공작대에 합류해서 그녀를 따르라고 요구했다. 마오쩌둥은 이 같은 하향식 접근 방식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주석은 공작대를 이끄는 지도자가 일반인의 표적이 되는 상향식 운동을 선호했다."(67-9)


"펑더화이에게서 국방부를 넘겨받은 직후부터 린뱌오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을 마스터하는 지름길로써 마오쩌둥 사상을 학습하도록 장려하기 시작했다." "1965년 8월에 개정판이 나왔을 즈음에는 일명 <작은 붉은 책>으로도 알려진 『마오쩌둥 어록』이 군인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백만 권이나 배포된 상태였다." "군사적 모델을 향한 열정은 정식 교육에 대한 경시로 이어졌다. 린뱌오의 표어는 이제 교육 제도 전체에 대한 의구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은) 다른 무엇보다 <혁명의 계승자>를 길러 내야 함에도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는 부르주아 지식인에 의해 학교가 운영되는 것이 특히 문제라고 지적했다. 일부 학생들은 곧장 마오쩌둥의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그런 그들을 위해 마오쩌둥이 편을 들고 있었다. 또 다른 미래의 홍위병 말처럼 <수업은 내 시간을 낭비했고 선생님들도 내 시간을 낭비했다.> 많은 학생들이 주석이 불러 줄 때를 기다렸다."(84-7)


2부 적색 시대(1966~1968)


"1965년 11월에 (마오쩌둥의 신중한 사주를 받은) 야오원위안의 논평은 (베이징 부시장이자 유명한 역사가이며 극작가인) 우한을 비난하는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당시 (베이징 시장이었던) 펑전은 덩퉈에게 우한을 옹호하는 글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덩퉈는 몇 년 전 백화 운동에 관련된 마오쩌둥의 주요 연설에 대해서 일부러 보도를 지연시킨 적도 있었다. 펑전과 우한이 권력에서 밀려나자 덩퉈가 바로 다음 표적이 되었다. 1966년 5월 6일, 이제는 마오쩌둥에게 완전히 장악된 『인민일보』가 덩퉈와 그의 몇몇 추종자들을 비난하고 나섰다." "중학교에서는 당 서기들이 전교생을 모아 놓고 우한과 덩퉈를 비롯한 그들의 추종자를 비난했다." "이제 그들에게 하나의 임무가 주어졌다. 학생들은 대자보를 써달라는 주문을 받았고 작업에 착수했다." "곧 전국에 다음과 같은 표어들이 도배되었다. <흑방 분자를 박살 내자!> <반사회주의 도당은 물러가라!> <끝까지 혁명을 완수하자!>"(109-11)


"마오쩌둥은 펑전이 이끌던 오인소조의 해체를 위해 움직였다. 오인소조 대신 마오쩌둥의 심복들로 구성된 중앙 문화 혁명 소조가 등장했다. 중앙 문화 혁명 소조는 곧 문화 대혁명의 전 과정을 지휘하면서 모든 상위 결정이 내려지는 가장 중요한 정치 기구가 되었다." "(옌안 시절 주석의 대필 작가였던 천보다가 이끄는) 중앙 문화 혁명 소조에는 장칭과 캉성, 야오원위안과 장춘차오를 비롯한 주석의 몇몇 심복들이 포함되었다. 세력 균형이 바뀔 때마다 그 구성원은 달라지겠지만 문화 대혁명 대부분의 기간 동안 중앙 문화 혁명 소조는 계속해서 태풍의 눈으로 남을 터였다." "6월 1일, 천보다는 『인민일보』에 발표한 선동적인 논설에서 시민들을 향해 <모든 괴물과 악마를 척결하라!>라고 강력히 촉구했다. <자신들의 반동적인 공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동자를 속이고 기만하고 멍청하게 만들려 하는> 부르주아의 대변자들을 척결하라는 외침과 함께 문화 대혁명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113-5)


"(류사오치의 아내) 왕광메이는 9년 전 백화 운동에 뒤이은 반우파 운동의 새로운 버전으로 문화 대혁명을 이해했다." "류사오치 역시 베이징 사범 대학교 산하의 명문 중학교에서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공작대 대원들에게 비슷한 지시를 내렸다. <지도자란 적절한 때를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괴물들이 정체를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고 적절한 시점에 반격할 줄 알아야 한다. 반당 및 반사회주의 분자들은 학교에서 반드시 축출되어야 한다.> 그는 심지어 학생과 교사를 모두 합친 숫자의 1퍼센트에 해당하는 인원이 우경 세력으로 비난을 받아야 한다며 할당량도 정해 주었다. 중국 전체를 놓고 따지면 총 30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였다." "류사오치는 단시간에 중국에서 가장 미움받는 지도자로 전락했다. 휘하의 공작대들은 수많은 사람을 순교자로 만들었다. (항저우에서 칩거하면서 상황의 추이를 지켜보던) 마오쩌둥이 베이징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125-7)


1966년 7월 16일, 그 유명한 양쯔강 수영을 마치면서 자신에게 이목을 집중시킨 마오쩌둥은 이틀 뒤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류사오치가 댜오위타이 국빈관에 호출되자 마오쩌둥이 포문을 열었다. <나는 베이징에 돌아온 뒤로 정말 마음이 아팠다. 이곳의 춥고 을씨년스러운 모습 때문이다. 어떤 학교는 문을 닫았고 심지어 어떤 학교는 학생 운동을 탄압하고 있다. 도대체 누가 학생 운동을 탄압하는 것인가?>" "7월 23일 천보다와 나란히 베이징 대학교에 모습을 나타낸 마오 부인은 자신들이 <학생들에게 배워라>라는 주석의 명령으로 그곳에 왔다고 강조했다. 그들은 득의만면한 군중의 환호 속에서 성명을 발표하고 불과 한 달 전에 소란을 피운 학생들을 가리켜 <반동분자>라고 비난했던 공작대의 평가를 뒤집었다." "(주석이 해체를 명하자) 공작대는 사과 성명을 내고 해산했다. 반역자로 몰렸던 학생들은 혐의를 벗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마오쩌둥을 그들의 해방자로 여겼다."(130-1)


"마오쩌둥은 학생들에게 직접 다가갔고 그들에게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협력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들은 쉽게 외부의 영향을 받았고 조종하기가 쉬웠으며 싸우고 싶어 했다. 무엇보다 학생들은 능동적인 역할을 열망했다." "8월 1일 마오쩌둥은 칭화 대학교의 한 부설 중학교에 다니는 일단의 어린 학생들에게 친전을 보내서 그들을 지지한다는 뜻을 전했다. 그들에게 <저항은 정당한 행위다>라고 조언했다. 해당 학생들은 두 달 전에 자체적으로 조직을 결성하고 홍위병이라는 이름을 지은 터였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홍위병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최초로 홍위병 지대(支隊)를 조직해서 마오쩌둥에게 칭찬을 받았던 청소년들은 칭화 대학교에서 운영하는 한 명문 중학교의 학생들이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순수한 혈통을 가진 사람들만이 홍위병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원로 혁명가의 자식인 그들만이 문화 대혁명을 이끌기 위해 꼭 필요한 계급적 배경을 가졌다고 생각했다."(137-9)


"정확히 무엇이 <낡은 문화>인지 매우 막연했지만 <새로운 문화>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에 비하면 차라리 나은 편이었다. 곧 사람들은 주석 숭배가 유일하게 용인되는 프롤레타리아 문화라는 사실을 깨달았다."(172) 1966년 9월 5일, 국무원은 전국을 누비는 홍위병의 교통비와 숙식비를 받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어린 투사들이 혁명의 불꽃을 전국 구석구석까지 확대해 주기를 바랐다. 불길은 두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베이징과 톈진 출신의 홍위병은 전국을 종횡하면서 폭력 사태를 선동하고 <주자파>가 숨어 있는 당사들을 포위했다. 한편에서는 여러 성(省) 출신의 혁명가 학생들이 베이징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문화 대혁명을 공부하고 중앙 문화 혁명 소조 위원들을 만나면서 감을 잡아갔다. 주석은 수백만 명의 홍위병을 직접 사열했다. 매번 사열이 끝날 때마다 급진론자로 거듭난 학생들이 혁명의 불꽃을 고향에 전파할 준비가 완료되어 수도를 떠났다."(184)


# 1966년 12월 21일 무료 숙식과 여행 폐지


홍위병은 출신 계급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기에 그 순수성을 계속 유지하려고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전 홍위병들의 주도권은 약해졌다. "전국 곳곳에서 지역의 지도자들에게 용감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학생들과 반대로 그들을 옹호하는 학생들 사이에 분열이 생겼다. 머지않아 한쪽은 <조반파(造反派)>, 다른 한쪽은 <보황파(保皇派)> 또는 <보수파>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조반파의 상당수는 <흑오류>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홍오류>와 <흑오류>라는 말의 의미 자체가 달라지기 시작하면서 문화 대혁명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홍오류로 태어난 학생들은 어느 순간에 자신들이 잘못된 진영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의 부모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에 의해 선동된 <부르주아적 반동 노선>의 추종자라는 비난을 받는 상황이었다." "이제는 점점 늘어나는 조반파 홍위병들이 <부르주아적 반동 노선>을 따른다고 의심되는 당 지도자들을 포위했다."(202-5)


# 흑오류(黑五類) : 구지주 계급, 구부농 분자, 반혁명 분자, 악질 분자, 우파 분자 등 홍위병이 될 자격이 없는 출신 성분이 나쁜 부류들


"주석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방해하는 주자파를 척결하기 위해 인민에게 단결해서 권력을 쟁취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당내 지도층 인사들은 탄탄한 기반을 보유하고 있었고 반대자의 창끝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데 능숙했으며 자신에게 유리하게 대중 조직을 통제할 정도로 유능했다. 전국의 많은 도시에서는 조반파와 보황파가 서로 싸우다가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주석은 (1967년 1월 3일, 상하이의 조반파 노동자와 홍위병이 신문사 두 곳을 습격해 장악하는 데 성공한) 1월 폭풍을 치하했지만 수십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거나 수개월씩 지속된 지지부진한 싸움에 휘말려 있던 탓에 지역 경제가 파괴되면서 엄청난 대가가 뒤따랐다."(219) "마오쩌둥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홍위병이든 조반파든 아무도 그때까지 <주자파>를 몰아내지 못한 터였다. 군대야말로 혁명을 완성하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었다."(222-3)


"주석이 당초 원했던 것은 혁명의 불길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군대라는 단일 지휘권 아래 전국의 서로 다른 조반파 파벌들을 하나로 묶었다. 그럼에도 혁명의 불길이 완전히 꺼지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4월에 들어서 그는 힘의 균형추를 조반파에게로 옮겼다. 먼저 새로운 명령을 내려서 군이 사람들에게 반동분자라고 낙인을 찍거나 마음대로 체포할 수 없도록 제한을 가했다." "군에 조반파를 상대로 폭력 행사를 금지한 지 하루 뒤에 『베이징일보』가 1966년에 실각한 이래로 가택 연금 상태이던 류사오치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선전 기관은 전직 국가 주석을 향해 폭언을 토해 냈다. 조반파 조직들을 단결시키고 그들의 공세를 류사오치와 당 조직에 남아 있는 그의 대리인들에게 집중시키기 위함이었다." "학생을 비롯한 노동자와 정부 관리가 두 개의 파벌로 분열되면서 문화 대혁명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두 파벌 중 한쪽은 군에 의지했고 다른 한쪽은 군에 반기를 들었다."(236-8)


"양쪽 파벌이 그토록 전의를 불태운 데는 서로에 대한 증오심도 있었지만 상대편보다 자신들이 주석의 충실한 지지자라는 믿음도 한 몫을 차지했다. 무엇보다 조반파와 보황파는 그들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서 싸웠다." "문화 대혁명에 휩쓸린 학생들과 노동자들, 당 간부들 중 상당수는 지극히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빠른 선택을 하도록 강요당했다. 상황은 끊임없이 변했고 종잡을 수 없는 베이징발 정책에 의해서 강요된 운명은 당혹스러운 반전을 거듭했다.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편으로 떠밀린 사람들은 결국 친구나 동료, 심지어 가족과도 싸워야 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혹시라도 자신이 비난 대상으로 전락하면 승리한 자들이 <우파>나 <반동분자>라는 낙인을 찍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 잘해야 직장에서 해고되고 모든 기득권을 상실한 채 소외 계층으로 근근히 살아갈 수 있을 터였다. 그나마도 잘못된다면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질 터였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싸웠다."(243-4)


"중앙 문화 혁명 소조 지도부는 문화 대혁명을 기회 삼아서 개인적인 복수를 하고자 했다. 일당 독재 국가에서 대인 관계가 이념보다 훨씬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다."(258) 1967년 8월 22일 영국 재외 공관이 홍위병의 공격을 받아 불탄 사건은 "종말의 시작에 불과했다. 중앙 문화 혁명 소조가 너무 많이 나아간 터였다. 이튿날 저우언라이는 비난의 화살이 외무부로 향하는 사태를 막고자 아직 상하이에 머물고 있던 주석에게 왕리의 연설문 사본을 보냈다. 마오쩌둥은 한참을 곰곰이 생각한 끝에 자신의 결심을 참모 총장 대리 양청우에게 알려 베이징에 전달하도록 했다. 주석은 왕리를 비롯한 중앙 문화 혁명 소조의 몇몇 대위원들을 혁명을 망가뜨리려는 <불순분자들>로 규정했다. <이 내용을 총리에게만 보고하라. 그들을 체포하게 하고 총리로 하여금 작금의 상황을 정리하게 하라.> 권력이 중앙 문화 혁명 소조에서 다시 저우언라이에게 넘어가면서 문화 대혁명의 다음 단계가 시작되었다."(266)


"상하이에 머물고 있던 주석은 『붉은 깃발』에 발표된 선동적인 사설 한쪽에 <우리의 만리장성을 구하라>라는 메모를 달았다. 만리장성이란 인민 해방군을 빗댄 말이었다. <군대를 존중하라>는 그날의 표어가 되었다. 9월 5일에는 한 달 전 군을 공격하라고 부추겼던 장칭이 조반파를 향해 누구에게도 인민 해방군의 무기를 훔칠 권리는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군인들에게 응사하도록 지침이 내려졌다고 조반파에게 경고했다." "주석은 전국을 돌면서 파벌 싸움이 내전 양상으로 발전했던 지역들을 방문하고 모든 혁명 세력에게 대동맹을 촉구했다." "혁명은 위축되었다. 베이징에서는 10월 1일 국경절에 대비하여 담벼락과 창문, 인도에서 대자보가 제거되었다." "이제는 정부의 공식 표어와 포스터만 붙일 수 있었다. 하나같이 단결의 중요성과 인민 해방군을 위한 활동과 지원을 촉구하는 것들이었다. 대학교 교정에서도 연일 똑같은 메시지가 확성기를 통해 쏟아졌다."(268-9)


"홍위병의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서로를 고발하고 맞고발하는 격렬한 마지막 한 판의 싸움을 끝으로 칭화 대학교 안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지던 확성기 소리가 마침내 잦아들었다. 베이징에 더없이 행복한 정적이 찾아왔다. 늘 해오던 대로 주석의 초상화를 앞세워 행진하는 학생들은 이제 확신에 차 있기보다 암울한 모습이었다. 마오쩌둥은 문화 대혁명을 공식적으로 중단했다. 다음 2주 동안은 선전대가 전국의 대학교와 중·고등학교로 행진했다. 선전대 안에 농민은 있지도 않고 노동자도 몇 명에 불과했지만 공식적으로 <노동자와 농민 마오쩌둥 사상 선전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968년 9월 7일 톈안먼 광장 연단에 선 저우언라이가 전면적인 승리를 선언했다." "한 달 뒤 류사오치는 당에서 공식적으로 축출되었고 <당 내부에 숨어 있던 변절자, 반역자, 배신자인 동시에 무수히 많은 범죄를 저지른 제국주의, 현대 수정주의, 국민당 반동분자들의 앞잡이>로 고발되었다."(290-1)


3부 암흑 시대(1968~1971)


"대오 정화 운동의 발단은 <예순 한 명의 반역자 사건>이었다. 수십 명의 당 고위 간부들이 1930년대에 국민당에 항복했던 변절자라는 사실을 주석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1967년 3월에 캉성이 날조한 사건이었다." "<문화 대혁명의 대업은 당내 고위 간부들 틈에 숨은 반역자와 간첩을 몰아내는 것이다.> 그가 공표한 바에 따르면 류사오치는 국민당과 일본에 제일 먼저 항복했던 반역자였다. 류사오치의 아내 왕광메이는 미국과 일본, 국민당의 간첩이었다. <펑전은 오만한 변절자다. 펑더화이는 스파이인 동시에 반역자다. 뤄루이칭은 공산당에 가입한 적이 없는 간첩이다.> 허룽은 강도였고 루딩이는 장제스에게 고용된 간첩이었다. 탄전린(<우리는 당장이라도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도 배신자였다. 장칭은 전면에 나서 <덩샤오핑을 타도하라!>라고 외쳤다." "문화 대혁명의 표적은 더 이상 <주자파>도, 심지어 <수정주의자>도 아니었다. 적을 위해서 암약하는 간첩들이었다."(295-7)


"대오 정화 운동은 문화 대혁명 이전에 당에 잠입한 스파이와 변절자, 반역자를 가려내기 위한 운동이었다. 따라서 대체로 젊은이들은 해당이 없었다. 1968년 9월 7일 톈안먼 광장 연단에 나와 혁명 위원회를 맞이하면서 저우언라이는 매우 다른 어떤 계획을 구상했다. 학생들이 <공장과 광산, 농촌으로 가서 대중에게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소도시와 대도시에서 젊은이들이 사라졌다. 이후 10년에 걸쳐 수백만 명의 학생들이 시골 벽지로 이송되었다."(307) "농촌으로 보내진 것은 학생들만이 아니었다. 1949년에 죽의 장막이 드리워지자마자 새로운 정권은 사회 질서를 위협하거나 공공 자원을 낭비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도시에서 내쫓기 시작했다. 수백만 명의 피난민과 제대 군인을 비롯해서 매춘부와 극빈자, 소매치기 등이 농촌으로 보내졌고 농촌은 온갖 유형의 악질분자들이 모이는 거대한 쓰레기 하치장이 되었다."(318-9)


1969년 3월 전바오 섬 충돌과 8월 신장 지구 기습 공격 등 국경 분쟁이 벌어지면서 소련의 침략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었다. "주석은 자신의 예전 스승인 스탈린이 저지른 가장 심각한 실수─흐루쇼프가 장차 자신의 네메시스가 될 거라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한 부분은 제외하고─중 하나가 대대적인 침략에 대비한 포괄적인 대피 계획의 부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1964년 10월에 흐루쇼프가 몰락하기 이전부터 중국과 소련은 상대를 향해 연신 호전적인 성명을 발표하며 갈등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리고 주석은 소련이 중국을 공격할지 모른다고 의심했다." "마오쩌둥이 찾은 해답은 전쟁이 발발할 경우 공격받을 가능성이 높은 육상과 해상의 국경선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에 3선을 건설하는 것이었다."(339-41) "1964년부터 1971년까지 산업 분야에 투자된 중국의 전체 예산 중 3분의 2가 3선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는 점에서 3선 건설은 그 자체로 문화 대혁명의 주된 경제 정책이었다."(344)


"1964년에 이르러 중국에게는 우방이 거의 없었고 2년 뒤에는 문화 대혁명이 시작되면서 고립이 더욱 심화되었다. 자력갱생 개념은 시민들을 알아서 해나가도록 방치하는 데 대한 편리한 핑계가 되었다. 시민들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라는 말을 들었고 또다시 풍부한 노동력으로 부족한 자본을 대신해야 한다는 논리가 힘을 얻었다."(348) "재집산화가 추진됨에 따라 정부는 <양곡을 핵심적인 고리로 생각하라>라는 주된 표어와 함께 양곡 생산을 새삼 강조하고 나섰다."(360) 성공 모델로 칭송받은 다자이 마을 본받기 운동은 거대한 기만 행위였다. "다자이 자체가 가짜였으며 모범적인 주민들도 주석이 쓴 희곡에 마지못해 출연한 배우에 불과했다. 기적 같은 수확량도 수치를 부풀렸을 뿐 아니라 다른 마을의 양곡을 빌려와 만든 가짜였다. 관개 시설은 대부분 인민 해방군이 건설한 터였다. 다자이 마을은 자력갱생은 고사하고 국가로부터 엄청난 보조금을 비롯해서 다양한 형태의 지원을 받았다."(364)


"당에서 축출된 지 한 달 뒤인 1969년 11월 12일에 류사오치가 독방에서 사망했다." "1967년에 체포된 뒤로 류사오치는 군중 비판 대회에서 연신 두들겨 맞았고 당뇨병 약도 제공받지 못했다. 폐렴까지 걸린 그였지만 제9차 중국 공산당 전국 대표 대회 당시까지도 살아 있었다. 주석의 지시로 류사오치 사건을 담당하게 된 저우언라이는 자신의 예전 동료를 <범죄를 저지른 반역자, 적의 대리인, 제국주의자들과 현대 수정주의자들 그리고 국민당 반동분자들을 주인으로 섬긴 배신자>라고 고발했다. 류사오치의 시신이 화장된 뒤에 총리는 작은 연회를 열고 자신의 임무가 완수된 것을 자축했다." "1970년 2월 5일, (중앙 위원회는 모든 <반혁명 활동>을 타격하고) <부패>와 <투기>, <낭비>도 단호히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월부터 11월까지 지속되는 동안 이 두 운동은 대체로 겹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통칭 <일타삼반(一打三反)> 운동으로 불렸다."(369-70)


"1969년 10월 소련의 기습 공격이 우려되어 지도부가 허둥지둥 베이징을 벗어났을 때 린뱌오는 쑤저우의 벙커에서 <제1호 명령>을 발동하고 군에 비상 태세에 돌입하도록 명령했다. 그에 따라 10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이 전국의 전략적 요충지를 점거하기 위해 진군했고 수천 대의 탱크와 비행기, 군함이 그들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지휘 계통에 있던 누군가의 섣부른 행동으로 주석의 승인을 받지 못한 채 린뱌오의 명령은 곧바로 철회되었다. 주석은 결정 과정에서 자신이 배제된 사실에 격분했다. 정확히 어디에서 문제가 발생했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었지만 마오쩌둥으로서는 자신의 2인자가 얼마나 손쉽게 군을 장악할 수 있으며, 언젠가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등을 돌리도록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계기가 된 것이 분명했다." "군이 자신의 일상을 장악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그의 반감은 이제 린뱌오와 그의 부하 장군들에 대한 원한으로 변해 갔다."(380-1)


"1969년 4월 제9차 중국 공산당 전국 대표 대회 이후에 이미 주석은 위험 요소를 줄이기로 결심하고 일단의 전문가들에게 린뱌오의 인민 전쟁 모델을 대체할 외교 정책을 모색하라고 지시한 터였다." "1969년 8월에 신장 성에서 발생한 기습 공격으로 소련과 전쟁이 임박했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지면서 사령관들은 대담한 계획을 생각해 냈다. 요컨대 미국이라는 패를 이용한다는 전략이었다. 그들은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두 초강대국 즉 미국과 소련의 대립을 이용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들의 판단은 미국을 소련과 다를 바 없는 적으로 생각하는 린뱌오와 그 휘하의 장군들과 커다란 차이를 보였다." "(미국이 중국을 공격하지 않는 한 중국 군대는 베트남 국경을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은) 마오쩌둥과 스노의 사진이 공개된 1970년 12월 25일을 일주일 앞두고 주석은 이 노(老)기자에게 <대통령으로 오든 관광객으로 오든> 닉슨을 기꺼이 만나겠다는 뜻을 밝혔다."(384-5)


"1971년 9월 12일 해 질 녘에 (군부 순회를 마친) 주석을 태운 기차가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몇 시간 뒤인 다음날 새벽 2시 30분 경 영국제 트라이던트 비행기가 몽골에서 추락했다. 곧 지역 경찰이 드넓은 초원 여기저기에 흩어진 잔해 속에서 새까맣게 탄 남성 시체 여덟 구와 여성 시체 한 구를 수거하여 한곳에 모아 놓았다."(389) "1971년 10월 1일 행진이 취소된 뒤로 린뱌오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상하이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정녠은 국경절 아침 방송에서 관례적인 축하 행사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몹시 놀랐다. 같은 날 한 간수가 수용실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재소자들로부터 『마오쩌둥 어록』을 수거해 갔다. 그날 저녁에 돌려받은 정녠의 책에는 린뱌오가 쓴 서문이 찢겨 나가고 없었다." "린뱌오가 대중에게 인기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이 안도했다. 다른 무엇보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이 문화 대혁명의 끝을 알리는 전조임을 깨달았다."(392-3)


4부 잿빛 시대(1971~1976)


"린뱌오의 군사 독재가 붕괴하고 군인들이 병영으로 돌아가자 농촌 곳곳에서 농민들이 땅에 대한 권리를 되찾고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당 간부들이 앞장서서 땅을 농민들에게 분배했다. 때로는 정부의 대리인과 땅을 경작하는 농민들 사이에 거래가 성립되어 당 간부에게 곡물의 일부를 넘기는 조건으로 가상의 공동 소유 체제가 형성되기도 했다. 농민들이 당 간부들에게 돈을 주며 눈감아 줄 것을 부탁하면서 뇌물은 종종 자유 기업 체제의 바퀴에 윤활유로 작용했다." "무엇보다 린뱌오 사건으로 당이 신망을 잃은 상황에서 일부 당 간부들은 일부러라도 다양한 국가 지시를 변칙적으로 적용하기 시작했고 당초 지도부가 의도한 것보다 훨씬 많이 나아갔다. 한 마을 관리의 말처럼 농촌의 당 간부들은 <정부 시책이 계속해서 오락가락하고 툭하면 비판 대회에서 공개적인 굴욕을 당하게 되면서>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대신 생산에 전념했다."(422-3)


"토지를 농민에게 돌려준 것은 농촌에서 일어난 조용한 혁명의 한 단면에 불과했다. 일부 부유한 마을에서는 시장에 내다 팔 수익성 작물을 심는 것에서 더 나아가 공장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이런 향진기업(鄕鎭企業)들은 일부가 공동 소유로 운영되기도 했지만 상당수가 외형만 공동 소유의 형태를 취했을 뿐 전적으로 개인 사업체로 운영되었다." "향진기업들은 여러 방면에서 시장에 공헌했다. 중개인을 통해 상품을 판매했을 뿐 아니라 벌어들인 돈으로 곡물과 돼지 사료를 구입했으며 이외에도 어유(魚油)에서 아스피린까지 계획 경제가 제공하지 못하는 수입 물품을 구매하기도 했다. 그들은 사업 운영에 필요한 희귀 자원을 놓고 정부와 경쟁하기 위해 구매 대리인을 파견했고 구매 가능한 모든 석탄과 철강, 쇠를 사들였다." "양쯔 강 삼각주 지역에서 발전한 가내 공업은 해방 이전부터 존재하던 예전의 제조 방식과 무역 경로를 그대로 따랐다. 그들은 국가의 영향력이 약해지는 순간에 되살아났다."(430-2)


"제2의 경제가 중앙 정부의 정책이 초래한 광범위한 빈곤을 해결하고자 조용히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공산주의 강령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을 중심으로 제2의 사회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동유럽과 소련에서 그랬던 것처럼 공식적인 정치 체제의 그늘 속에는 비밀스럽고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지하 세계가 존재하고 있었다. 특별히 새로운 현상은 아니었다. 1950년에 공산당이 기본적인 경제권을 억압하기 시작하면서 암시장이 생겨났듯이 새로운 정권에 의해 범죄시된 행위들이 대중의 눈을 피해서 계속 이어진 것이었다." "(모든 구사상과 구제도를 일소하려 했던) 문화 대혁명 자체가 17년에 걸친 공산주의 통치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구사회의 잔재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념적 획일성이라는 겉모습 아래에는 공산당을 위협하는 하위문화와 반(反)문화, 대안 문화의 세계가 존재했다."(441-2)


# 종교 생활, 독서 생활, 라디오 청취, 문화 예술 모임 등


"해빙기가 지나고 한파가 찾아왔다. 이미 1972년 12월에 주석은 린뱌오에 대한 공격으로 문화 대혁명 전체의 권위가 약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염려하기 시작했다."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차원에서 덩샤오핑과 리징취안, 울란푸, 탄전린을 비롯한 노위병들이 다시 기용되었지만 그들의 당내 서열은 높지 않았다.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 캉성 등 중앙 문화 혁명 소조 출신 인사들이 상대적으로 우위를 차지했으며 저우언라이를 견제하기 위해 마련된 전략적인 직책을 맡았다. 총리는 점차 고립되어 갔다. 원로 당 간부들을 복권시키고 경제 질서를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총리에게 마오쩌둥은 의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1974년 1월 마오쩌둥은 총리를 현대판 공자라고 비꼬면서 장칭과 그녀를 따르는 협력자들에게 그를 공격하도록 사주했다. 당초 린뱌오를 겨냥했던 운동이 린뱌오와 공자 두 사람을 모두 비판하는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으로 바뀌었다."(463-4)


"주석은 비록 사망하기는 했지만 저우언라이가 자신에게 향해야 할 관심을 가로채지 못하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총리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짤막하게 알렸을 뿐 헌화를 할 수 없도록 유해를 일반에 공개하지 않았다." "사인방이 그 모든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대중의 감정은 폭발했다. 저우언라이는 현대화를 대표하는 상징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문화 대혁명이 일으킨 재앙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 유일한 지도자였다. 희망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장지로 이동하는 경로를 비밀에 부쳤음에도 수만 명의 사람들이 총리에게 작별을 고하기 위해 거리로 나와서 살을 에는 바람 속에 서 있었다." "추도사를 낭독한 덩샤오핑은 장차 1년 동안 공식 석상에서 사라지게 될 터였다. 불과 며칠 뒤에 그는 부총리직에서 해임되었다. 대중의 분노는 마오 부인과 그 일당을 향했다." "대중은 저우언라이가 죽고 없는 마당에 덩샤오핑까지 숙청을 당하자 앞날을 걱정하며 불안해했다."(473-4)


"지도부가 대중 앞에서 단결된 모습을 보인 것은 주석의 장례식 때가 마지막이었다. 이제 그들 앞에는 최후의 결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석의 시신에 포름알데히드가 주입되고 있던 시점에도) 사인방은 선전 기구를 장악하고 <주자파>에 대항하기 위한 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그들은 당내 세력이 거의 없었고 군에도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권위를 부여해 주었던 유일한 존재는 이제 죽고 없었고 여론도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장칭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의 세력 기반인 상하이는 치열한 권력 쟁탈전이 벌어진 수도에서 한참 멀리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화궈펑을 과소평가한 터였다." "주석이 사망한 지 한 달이 되지 않은 10월 6일에 『마오쩌둥 선집』 제5권에 관한 논의를 위해 정치국 회의가 소집되었다. 그리고 사인방이 회의장에 도착하는 대로 차례로 체포되었다. 함정을 눈치채고 회의에 불참한 마오 부인은 자신의 거처에서 체포되었다."(484-5)


# 10월 6일 사인방(장칭, 장춘차오, 왕훙원, 야오원위안) 체포


"으례 모든 독재자는 전임자와 자신을 차별화할 필요가 있다. 덩샤오핑은 문화 대혁명을 과거사로 치부하고 더 이상의 논의를 중단하고자 했다. 전체 공산당원 중 대략 절반이 1966년 이후에 입당했고 문화 대혁명 당시 추악한 정치판에 휩쓸리면서 노위병들 대다수가 이런저런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혹시라도 가해자들에게 책임을 추궁하고자 작심하고 칼을 들이댈 경우 대대적인 숙청이 불가피할 터였다. 따라서 복권된 사람은 많았지만 기소된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류사오치와 그를 추종하던 세력들도 모두 1980년 2월에 공식적으로 명예를 회복했다." "1981년 7월에 창당 60주년을 맞이하여 당의 역사를 둘러싼 공식 결의문이 발표되었다. 당은 이 문서에서 마오의 대기근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문화 대혁명을 린뱌오와 사인방의 탓으로 돌렸다. 반면에 마오 주석에 대해서는 대체로 면죄부를 주었다."(489)


"진정한 변화는 아래서부터 시작되었다. 적어도 10년 전부터 시작된 조용한 혁명에서 간부들과 농민들은 과거 시장 경제의 장점을 되살림으로써 스스로 빈곤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농촌 일부 지역에서 그들은 조용히 토지를 임대하고 암시장을 열고 지하 공장을 운영했다. 대부분이 은밀하게 진행된 까닭에 이런 자유주의적 관행의 규모를 정확히 측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마오쩌둥의 사후에 이러한 관행들이 더욱 번창했다는 것이다." "1982년에서 1983년 사이의 겨울에 인민공사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그야말로 한 시대가 끝난 것이다." "중국이 급속한 경제 성장은 통상적인 낙수 효과의 개념처럼 도시에서 농촌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시골에서 도심 지역으로 진행되었다. 경제를 변화시킨 개인 기업가들은 (경제적 기회를 추구하면서 마오쩌둥 사상이 강요해 온 이념을 벗어던진) 평범한 수백만 명의 농민들이었고 실질적으로 그들이 국가를 움직인 셈이었다."(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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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의 대기근 - 중국 참극의 역사 1958~1962, 2011년 새뮤얼 존슨상 수상작 인민 3부작 2
프랑크 디쾨터 지음, 최파일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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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6월 백화 운동의 붕괴는 <우파 보수주의>가 중대한 이념적 적이며, 현재의 경제 부진 뒤에는 우파의 타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주석의 의혹을 확고하게 했다. 그는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애쓴 바로 그 전문가들로부터 비판이 쏟아지며 폐기되었던 사회주의 고조 정책들을 부활시키고 싶었다. 경제 발전을 도울 전문적 기술과 과학적 지식을 갖고 있는 그 많은 지식인들이 불만분자들이라면 나라의 미래를 그들의 전문성에 맡긴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현명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당의 제2인자인 류사오치도 농업 생산의 목표량을 더 늘려야 한다는 주석의 주장에 당의 지지를 결집시켰다. 1957년 10월 류사오치의 지원을 받은 마오쩌둥은 재도입된 자신의 비전을 구체화한 <더 크게, 더 신속하게, 더 좋게, 더 경제적으로>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그는 무분별하게 앞으로 내달린다는 함의를 담고 있는 <모진(冒進)>이라는 표현을 도약한다는 의미의 <약진>으로 대체하는 데도 성공했다."(42)


"1957년 5월, 모스크바에서 외국 당 대표단들을 앞에 두고 흐루쇼프는 10월 혁명을 기념하는 기조연설에서 자신의 경제 드라이브의 성공을 선언했다. 「동지들, 우리 계획가들이 계산에 따르면 다음 15년 안으로 소련은 미국 중요 생산품의 현재 산출량을 따라잡을 뿐 아니라 능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오쩌둥은 지체하지 않았다. 그는 공개적으로 도전을 받아들였고 중국은 당시 여전히 중요 산업 강국으로 간주되던 영국을 15년 내로 넘어설 것이라고 즉시 발표했다. 대약진 운동이 시작되었다."(49) "중국은 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키고, 중공업과 경공업을 동시에 시도하면서 <두 다리로 걸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의 지도자로서 마오쩌둥은 이제 완전한 충성심을 요구했다. <숭배가 뭐가 나쁜가? 진리는 우리 수중에 있는데 왜 우리가 그것을 숭배하지 말아야 하는가? 집단은 저마다 그 지도자를 숭배해야 하고, 숭배할 수밖에 없다.> 마오쩌둥은 설명했다. 이것은 <올바른 개인숭배>라고."(56-7)


"<대약진>이라는 표현은 1957년 하반기에 시작된 치수 사업 맥락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15년 안으로 영국을 추월하려고 작정한 마오쩌둥은 자본을 노동으로 대체하는 데서 급속한 공업화의 열쇠를 찾았다. 거대 인구는 중국의 진짜 자산이고 농촌의 모습을 바꾸기 위해서는 춘경기가 오기 전 농한기에 그들을 동원해야 한다. 물길을 돌려서 건조한 북부 지방에 흩어져 있는 피폐한 촌락들의 빈약한 표토에 물을 댈 수 있다면, 아열대 남부 지방에서 거대한 제방과 저수지로 홍수가 방제된다면, 곡물 수확량은 급증할 것이다." "1957년 10월에 3000만 명 정도가 모집되었다. 1958년 1월이 되자 중국에서는 여섯 사람 중 한 명 꼴로 땅을 파고 있었다. 그 해가 저물기 전에 5억 8000만 세제곱미터 이상의 돌과 흙이 옮겨졌다." "허난 성과 안후이 성의 경계 지역, 수십 년 동안 전개될 야심 찬 <화이 강을 동력화하자> 운동의 중심지에서는 100개가 넘는 댐과 저수지가 1957년과 1959년 사이에 건설되었다."(67-8)


"중앙에는 반드시 달성해야 할 일단의 목표치들이 있고, 제2차 계획 역시 당연히 달성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 두 번째 계획이 성으로 전달되어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달성해야 할 지방의 첫 번째 목표치가 된다. 각 성은 그다음 그들이 예상하는 달성 목표치를 반영한 제2차 계획을 수립할 것을 요구받고 결국에는 다 합쳐서 세 가지 목표치가 나오는 것이다. 이 시스템은 현까지 전달되어 현 단위에서 사실상 네 번째 생산 계획까지 추가되었다. 전국적 목표치들이 당 모임에서 끊임없이 수정되어 올라가면서 정해진 목표량과 희망 목표량으로 이루어진 시스템 전체가 꼭대기부터 밑바닥 마을 단위까지 광란의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며 목표량에서 대약진을 낳았다." "온 나라가 규정량, 할당치, 목표량의 세상이 되었고, 확성기가 구호를 쏟아 내고 간부들이 작업을 체크하고 평가하고, 위원회가 주변 세상을 끝없이 등급을 매기고 평가하는 상황에서 그런 숫자들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80-1)


"수치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새로운 최고치를 경신하는 것은 사회주의 진영이 지난해 우주 공간에 쏘아올린 첫 인공위성을 기려 <스푸트니크호 발사하기>라고 불렸다." "이러한 기록들 다수가 <스푸트니크 밭>, 즉 새로운 기록을 경신하는 데 열심인 현지 간부들이 과대 선전한 다수확 실험용 밭에서 달성되었다. 이 밭들은 대체로 집단 농장 가운데 단 몇 뙈기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훨씬 넓은 곳에 적용되는 새로운 영농 기술의 시연장 역할을 했다. 수확량을 증대시키려는 움직임은 비료 쟁탈전을 조장했다." "토양에 양분을 공급하는 주된 방법은 진흙과 볏짚으로 지은 건물을 허무는 것이었다. 외양간처럼 동물이 살았던, 특히 가축이 방뇨한 건물의 벽은 유용한 비료를 제공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낡은 담과 폐가가 헐렸지만 증산 운동이 탄력을 받으면서 줄줄이 늘어선 가옥들 전체가 체계적으로 철거되었다."(82-3)


"북중국 시골에 자리한 쉬수이 현의 현지 지도자 장궈중은 관개 사업을 마치 야전처럼 접근했다. 10만 명의 인력을 징발한 그는 농민들을 군대 조직을 따라 대대, 중대, 소대 단위로 나눴다. 그리고 마을과의 연락을 차단하고 이 노동 부대원들이 임시 막사에서 자고 공동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야외에서 생활하게 만들었다." "명령에 군대처럼 정확하게 대응하는 규율 잡힌 단위로 주민들을 집산화함으로써 장궈중은 노동 문제와 자본 문제를 동시에 해결했다." "(농민 병사들을 지속적으로 혁명에 전개하는 사업의) 핵심 용어는 <군사화>, <전투화>, <규율화>였다." "마오쩌둥은 농민들이 대대와 소대 단위로 조직된 방식을 칭찬하고, 여성을 가사에서 해방시켜 전선으로 보내는 공동 식당과 탁아소, 양로원에 찬사를 쏟아냈다. 그는 <인민공사는 훌륭하다!>고 선언했다. 그해 여름에 걸쳐 중국 전역의 현지 간부들이 너도나도 집단 농장을 인민공사로 결합하여 중국은 동원 체제가 되었다."(95-7)


"강철은 사회주의 연금술에서 성스러운 요소였다. 철강 생산량은 사회주의 나라들이 종교적 열의를 띠며 되뇌는 마법의 숫자였다. 철강 생산량은 인간 행위의 모든 복잡한 차원들을 마법처럼 증류하여 한 나라가 발전의 척도에서 어디에 서 있는지 보여 주는 단 하나의 정확한 숫자로 환원했다." "성공의 열쇠는 인민공사의 뒤뜰에 설치하여 주민들이 운영하는 작은 고로(高爐)였다. 모래, 돌, 내화 점토나 벽돌로 만들어진 고로는 영국을 앞지르기 위한 노력에 모든 주민들을 동원할 수 있는 비교적 간단한 일이었다." "전통적인 송풍 방식에 기반을 둔 토법고로는 일부는 작동했을지 모르지만 다수가 철강 열풍에 사로잡힌 간부들이 인민공사에 강요해 만들어진 엉터리였다."(109-10) "결국 지도부는 그들이 원하는 기록을 얻었다. 비록 그 대부분은 광석을 제련한 후에 남은 찌꺼기거나 불순한 원광, 아니면 그저 통계적 발명에 불과했지만 말이다."(114)


"공산주의로 가는 빛나는 길을 대중 동원에서 찾을 수 있다 하더라도 중국이 농업 국가에서 산업 거국으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다량의 공업 장비와 선진 기술이 필요했다. 마오쩌둥이 중국이 15년 안으로 영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큰소리쳤던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순간부터 베이징은 우방국들로부터 아낌없이 사들이기 시작했다. 제강소, 시멘트 가마, 유리 공장, 발전소, 정유 공장 등, 중공업을 위한 모든 장비와 설비를 구입했다."(127) "중국의 외화와 준비금은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부채와 실제 수입액은 제한된 자원에 부담을 주면서 현물 수출로 갚아야 했다. 기본적 무역 패턴은 신용, 자본재, 원자재를 희소 광물, 제품, 식품과 교환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돼지고기는 케이블과, 콩은 알루미늄과, 곡물은 압연강과 교환되었다. 안티몬, 주석, 텅스텐 같은 희금속의 양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베이징의 흥청망청 쇼핑은 청구서를 지불하기 위해 농촌에서 더 많은 식량을 뽑아내야 한다는 뜻이었다."(130-1)


"적자는 어떻게 메워야 할까? 1958년 11월 저우언라이가 처음으로 <외국과 체결한 계약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안 먹거나, 덜 먹고 덜 소비하는 것이 좋겠다>고 천명했다. 몇 주 뒤 그는 <물건을 받고 답례로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 것은 사회주의 방식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덩샤오핑도 거들었다. <만약 모두가 달걀 몇 알, 고기 1파운드, 기름 1파운드, 곡물 6킬로그램만 아낄 수 있다면 수출 문제 전체가 싹 사라질 것이다.>" "후베이 성은 1959년에 대량 아사와 싸우라고 베이징으로부터 곡물 20만 톤을 받은 반면 중국은 같은 해에 400만 톤 이상을 수출했다." "무역 문제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지면서 1959년 3~4월 상하이 당 모임에서 이 사안이 논의되었다. 마오쩌둥이 나서서 해법으로 채식을 권유했다." "이제 대담해진 저우언라이는 <육류 수출을 보장할 수 있도록 석 달 동안 돼지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육류 외에 식용유 소비도 감축되었다."(137-8)


"수출이 현지의 필요를 제치고 반드시 보장되어야 했다. <우리는 덜 먹어야 한다.> 실질적 문제에 직면한 전시에는 단호하고 가차없는 접근이 정당화되었다. <먹을 게 충분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굶어 죽는다. 인민 절반이 배를 채울 수 있도록 나머지 절반은 굶어 죽게 둬야 한다.> 마오쩌둥의 말이 법이었다."(147) "마오쩌둥은 (1959년 7월에 열린 루산 회의에서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지적한) 펑더화이와 그의 지지자들이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과는 별로 공통점이 없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라고 주장했고 그리하여 그들의 위상을 빼앗고 그들을 부르주아 계급으로 낙인찍었다. 8월 16일 협의회 폐회식에서 마오쩌둥의 반대파들이 당과 국가, 인민에 반하는 모의를 꾸몄다고 유죄를 인정하는 결의문이 채택되었다. 다음 몇 달 동안 <우경> 분자들에 대한 전국적인 마녀사냥이 벌어질 것이었다."(161) "대약진 운동에 방해가 되었던 사람은 누구든 제거되었다."(164)


"1960년 봄 베이징은 <수정주의>와 <제국주의자들과의 유화> 정책을 추구한다는 명분으로 흐루쇼프를 갈수록 독설에 찬 발언으로 규탄하면서 사회주의 진영을 이끄는 권리를 놓고 공공연하게 모스크바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격노한 소련 지도자는 소련 고문관을 전부 중국에서 철수시키는 것으로 보복했다." "이제 돈이 많이 드는 프로젝트의 비용을 지불하기 위한 식량 수출을 덜 해도 되므로 중국 인민은 이러한 프로젝트 취소로 득을 봤어야 한다. 그러나 16년에 걸쳐 상환하도록 협정이 맺어져 있음에도 마오쩌둥은 일정을 앞당겨 정산해야 한다고 우겼다." "1960년 8월 5일, 소련 전문가들의 출국이 전부 완료되기도 전에 성장省長들은 국제 수지 적자가 20억 위안을 향해 가고 있는데 나라는 수출을 충분히 하고 있지 않다는 경고를 전화를 통해 받았다. 2년 안으로 소련에 진 빚을 갚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이는 다시 곡물, 면화, 식용유 수출을 최대한 증대함으로써 이루어져야 했다."(170-1)


"중국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개발 도상국에 후한 원조와 값싼 차관으로 국제적 이미지를 가꾸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베이징이 대약진 운동 기간 동안 외국 무상 원조를 늘린 한 가지 이유는 공산주의 미래로 가는 다리를 발견했음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주요 고려사항은 모스크바와의 경쟁의식이었다. 탈식민 시대에 흐루쇼프는 댐이나 대형 경기장 같은, 위신을 높이는 프로젝트에 원조를 아끼지 않음으로써 개도국들을 미국으로부터 소련의 궤도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애쓰는 식으로 개도국의 충성을 놓고 경쟁을 시작했다. 마오쩌둥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리더십을 놓고 그에게 도전하고 싶었다. 그는 개발 도상국 세계와 관계를 맺는 데 전제가 되는 크렘린의 <평화적 진화> 개념을 무시하고 그 대신 모스크바와의 결연한 경쟁 속에서 알제리와 카메룬, 케냐와 우간다 같은 나라들에서 공산 혁명가들을 원조하면서 전투적인 혁명 이론을 선동했다."(182)


"(1960년 자신의 고향 마을 탄쯔충을 시찰하면서 당이 인민에게 가한 참혹한 현실을 목도하고 커다란 충격을 받은) 류사오치는 (1961년 5월 31일 지도자 모임에서) 당의 전반적 정책은 대성공이라고 교조적으로 주장하면서 재앙의 규모를 어물쩍 넘어가려는 시도를 일축함과 동시에 마오쩌둥이 애호하는 경구가 틀렸음을 밝힘으로써 민감한 부위를 건드렸다." "류사오치는 마오쩌둥과 멀어지고 있었다. 이쯤 되자 참상이 어디서나 너무나 명백하여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신랄한 비판에도 무사할 수 있었다. 류사오치는 문화 대혁명 동안 도전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지만 당분간은 다른 지도자들이 조심스럽게 국무원장 쪽으로 기울면서 마오쩌둥으로부터 권력의 균형추를 아주 조금 가져왔다. 언제나 신중한 저우언라이는 루산 총회에 뒤이어 발생한 일부 오류를 인정한 다음 주석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 잘못된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공개적으로 수용했다."(194-5)


# 농업

1. 곡물 징발 : (종자와 사료를 포함한) 최저생존량 이하의 곡물만 남겨 놓고 나머지를 국가에서 강제로 징발하면서, 농민들은 땅과 수확물에 대한 통제를 잃었을 뿐 아니라, 교환 화폐가 된 곡물을 얻기 위해 강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2. 할당량 : 지역의 조달 목표량은 지도부로 올라가면서 부풀려졌고, 수확량도 그에 걸맞게 부풀려졌다. 다시 증가된 조달 할당량이 부과되었고, 이는 30~37퍼센트에 이르는 곡물 징발을 강제했다. 국가가 식량 부족 사태와 기근을 초래했다.

3. 관료 계획 : 곡물 생산량에 목을 맨 간부들이 곡물 농사를 강제하거나 배게 심기, 깊이 갈기 등을 강요하면서 수확량은 오히려 감소했다. 여기에 곡물 수확량이 넘친다고 확신한 마오쩌둥이 농지의 3분의 1을 휴경하라고 지시하면서 수확량은 더욱 곤두박질쳤다. 


4. 저장과 운송 : 국가 저장은 그에 걸맞는 대규모 저장 능력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벌레와 부패에 따른 곡물 손상을 초래했다. 여기에 수송능력 초과와 연료 부족으로 운송 체계가 마비되면서, 나라 전체에서 곡물이 철도 측선에서 썩어 나갔다.

5. 상업용 작물 : 국가가 경제적 비용 이하의 가격으로 면직물 상품 수출을 강제하면서 면화의 징발량은 82~90퍼센트에 달했다. 중국 전역에서 아사한 사람들은 한겨울에도 벌거벗은 채 죽음을 맞이했다.

6. 가축 폐사 : 가금류는 대약진 기간 초반에 상당량이 도살되었지만, 점차 방치와 굶주림, 추위와 질병으로 폐사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모든 가축이 인민공사로 넘어가면서 농민들에겐 가축을 돌볼 동기가 전혀 없었다.


# 공업

1. 생산량 : 공장의 최고 목표가 생산량이 되면서, 기업체들은 위신이 서는 건물을 세우고, 각종 기계류를 대량으로 수입했다. 그러나 새로운 장비는 유지보수 실패로 망가졌고, 더 많은 생산량 추구는 날림으로 제조한 저질 상품들을 양산했다.

2. 노동환경 : 농촌인구 유입으로 노동자 수는 대폭 늘어났지만, 최신식으로 지어진 공장과 달리 노동자들의 의식주 환경에 대한 투자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열악한 위생과 부족한 식사로 많은 노동자들이 만성 질환에 시달렸다.


# 상업

1. 상품의 실종 : 엉성한 서류 작업, 부정확한 회계, 읽기 힘든 재고 목록 등 분배 과정마다 부패와 관리 부실이 끼어들었고, 사라진 상품들은 암시장에서 거래되었다. 장비와 연료 부족으로 운송 능력이 저하되면서 상품이 제때 분배되지도 못했다.

2. 시장의 실종 : 1949년 이전에는 외딴 지역에서 상인과 행상꾼들이 정기 시장을 만들거나 거리를 누볐고, 읍과 도시에서는 양품점과 가게, 백화점이 성황을 이뤘지만, 1949년 이후에 자유 교역이 계획 경제로 대체되면서 시장은 폐쇄되었다.


# 주거

1. 과시용 건물 : 주거 프로젝트에 배정된 대부분의 돈은 당원들을 제외하고 아무에게도 유형의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 위신 과시용 건물들(호텔, 박물관, 경기장, 대강당 등)과 관공서에 투입되었고, 해당 공간 마련을 위해 일반 가옥들이 철거되었다.

2. 철거 : 대저택, 종교시설, 역사적 기념비와 문화 유적들이 관리 부실과 용도 변경(작업장, 기숙사, 공동 식당 등)으로 마구 철거되었다. 특히 농촌에서는 주택이 비료와 연료의 원천으로 쓰이면서 전체 가옥의 30~40퍼센트가 돌무더기로 변했다.


# 자연

1. 삼림 파괴 : 토법고로에 불을 때기 위해, 연료 부족을 메우기 위해,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철도와 도로를 내기 위해, 도시에서는 회사 시설을 세우기 위해 남벌이 횡행했다. 남부의 대나무 숲부터 북쪽의 고산 목초지와 소나무 숲까지 다양한 숲이 장기간 훼손되었다.

2. 자연 재해 : 잘못 구상된 관개 공사와 경작지의 확대는 자연적 배수 시스템을 파괴하여 자연재해의 파괴력을 극대화하고, 토양을 염류화시켰다. 황허강과 화이강을 따라 진행된 치수 공사는 물과 함께 토사를 가두어 정상적인 강우량에도 큰 침수를 일으켰다.

3. 병충해 방제 : 쥐, 파리, 모기, 참새를 박멸한다는 명분으로 일시에 대중이 동원되었고, 깃털 달린 생물이라면 종류를 가리지 않고 살상했다. 곡식을 먹는다는 이유로 유해 조수에 지정된 참새가 격감하자 1958년 이후 충해가 확산되어 상당 비율의 작물을 망쳤다.


"평등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지주였을지 몰라도 모든 공산주의 국가는 현실에 정교한 위계질서를 수립했다."(287) "기근이 진행되면서 특권 계층의 수가 불어났다. 지속적인 숙청에도 불구하고 당원 수는 1958년 1245만 명에서 1961년 1738만 명으로 절반 가까이 증가했다. 당원들은 어떻게 자신을 챙겨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기근 와중에도 실컷 먹는 한 가지 방법은 모든 것을 국가가 제공하는 잦은 당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었다."(289) "이따금씩 잔치가 벌어진 또 다른 이유는 징발과 인플레이션이 개인의 비축물을 급속히 잠식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이 저축을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시 인민공사가 도래한다는 소문이 돌자 주민들은 앞다퉈 국영 상점에 가구를 파는 가운데, 베이징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보통은 한적한 일부 식당들이 1959년에 한창 성업 중인 것을 보았다. 가구를 팔아 얻은 수익은 식당에서 별미를 사먹는 데 쓰였다."(293)


"사회적 위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든 간에 꼭대기부터 밑바닥까지 사실상 모두가 공산당이 열심히 없애려고 한 그 이윤 동기를 십분 발휘하며 분배 시스템을 전복했다. 기근이 지속되면서 보통 사람의 생존은 점점 더 거짓말을 하고, 아첨을 하고, 감추고, 훔치고, 속이고, 좀도둑질을 하고, 열심히 뒤지고, 몰래 빼돌리고, 게으름을 피우고, 잔꾀를 부리고 조작하거나 다른 식으로 국가의 허점을 찌르는 능력에 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누구도 홀로 경제를 헤쳐 나갈 수는 없었다. 문지기들의 국가에서 장애물은 어디에서나 있었다." "하찮은 권력은 하찮은 사람들을 타락시켰고, 그들은 자신들이 관리하게 된, 공급이 딸리는 재화와 용역에 관해 자의적으로 변덕스러운 결정을 내리며 계획 경제의 하층부에서 급증했다. 그리고 명령 계통의 더 위쪽에서는 권력이 더 클수록 그 오남용도 더 위험스러워졌다. 가장 단순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도 개인적 인맥과 사회적 연줄이 필요했다."(295-6)


"국가를 속이는 또 다른 길은 배급 명단을 부풀리는 것이었다. 섬뜩하기 짝이 없는 죽은 사람 장사가 나라 전역에서 성행했다. 식량을 더 많이 배급받기 위해 가족의 죽음을 감추는 것처럼 간부들은 수시로 농민들의 숫자를 부풀려서 잉여분을 전용했다."(300) "계획 경제의 많은 역설 가운데 하나는 모두가 장사를 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품귀와 인플레이션이 가격을 밀어 올릴 것이라는 쪽에 돈을 걸고 무더기로 구입함으로써 투기를 했다." "당원들은 투기사업에 뛰어들기에 좋은 입장이었고, 일부에게는 그것이 상시적인 활동이었다." "(각종 물품을 거래하고 사들이는) 관행은 예외적 행위라기보다는 <생활 방식>이었는데 노동자들이 <저금을 하는 것은 물자를 모으는 것만큼 효과적이지 않다>고 널리 믿었기 때문이다. 저금은 매달 몇 퍼센트씩 깎여 나갔다. 상하이에서는 물자 부족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람들이 아직 가게에서 구할 수 있는 상품은 무엇이든 전부 줄을 서서 구입해 쟁여 놓았다."(302-4)


"일부 역사가들은 <국가>에 <농민>을 대적시키면서 암시장과 방해 행위, 태만, 절도를 <저항> 행위나 <약자의 무기>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그러한 생존 기술들이 <저항> 행위라면 당은 진즉에 붕괴했을 만큼 널리 만연해 있었다. 정권에 의해 조성된 아사 상황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관습적인 도덕 규준을 무시하고 최대한 훔치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절도는 고질적이었고 그 빈도는 필요와 기회에 의해 결정되었다." "훔칠 기회는 도시에서 가장 컸지만 훔쳐야 할 필요는 기근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농촌을 지배했다. 생산 사이클의 모든 단계마다 주민들은 국가의 요구로부터 곡물 일부를 지키고자 애썼다. 이것은 밭에서부터, 심지어 밀이나 옥수수가 완전히 여물기도 전에 시작되었다. <파랄 때 먹기>란 뜻의 츠칭이라는 전통적 관행을 연상시키듯 주민들은 의용군이 보지 않을 때 조용히 밭에서 이삭을 곧장 잘라내, 손수 겉겨를 벗겨 내고 빻은 다음 푸른 낟알을 생으로 먹었다."(313-4)


"역사상 다른 기근들에서처럼 아사 사태가 지속될 것이 분명해질 즈음이면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미 너무 허약해져 무기를 찾아 봉기를 조직하는 것은 고사하고 옆마을로 걸어갈 기운조차 없었다." "수천만 명이 죽어 가는 동안에도 중국이 붕괴되지 않았던 또 한 가지 이유는 공산당 이외의 가능한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공고한 무언가가 공산당 지배에 대한 신빙성 있는 위협의 출현을 막았다. 대량 아사의 시기에 가장 흔한 자구책은 희망이라는 단순한 장치였다. 그리고 희망은 농촌 마을에서 상황이 아무리 나쁘더라도, 마오쩌둥은 진심으로 인민의 최상의 이익을 생각한다고 가르쳤다. 제국 시대에 흔한 확신은 황제는 자애로우나 그 신하들은 부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부패한 간부가 자애로운 주석의 명령은 수행하지 못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정부>라는 멀리 떨어진 존재와 <마오쩌둥>이라는 반신은 착한 편이었다. 그가 알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달라질 텐데······."(338-9)


"(대약진 운동을 진두지휘한) 모든 지도자들은 고된 전시 상황에 적응된 군부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극단적으로 곤궁한 여건 속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하며 20년을 보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장제스 국민당 정권의 말살 정책에 대응해야 했고, 그 다음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군의 공격에서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당 자체를 뒤흔들며 주기적으로 벌어진 지독한 숙청과 한바탕 자행되는 고문의 시기를 견뎌냈다. 그들은 폭력을 찬미했고, 대량 인명 손실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이데올로기를 공유했다. 1962년 자기 성의 주민 수백만 명을 잃은 리징취안은 대약진 운동을 열 명 중 한 명만이 살아남아 완수할 수 있었던 대장정에 비유했다. <우리는 약하지 않으며 더 강해졌다. 우리는 근간을 유지했다.>" "폭력은 단계적으로 증대되면서 처벌의 위협과 아사의 위협이 서로를 상쇄하는 순간 한계에 도달했다."(435-6)


"가용한 식량을 늘리는 편리한 방책은 약자와 병자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계획 경제는 이미 사람들을 대차대조표 위의 숫자들로, 석탄이나 곡물처럼 공공선을 위해 이용될 수 있는 자원으로 환원했다. 국가가 전부이고,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식량은 흔히 무기로 이용되었다. 굶주림은 심지어 구타보다 더 먼저 동원되는 처벌 수단이었다." "한 농민이 설명했듯이 <솥에서 죽을 퍼내는 국자는 사람들 얼굴을 읽을> 수 있었다. 이것은 많은 인터뷰 대상자들이 기억한 현상, 즉 공동 식당에서 음식을 퍼주는 사람이 <불순분자>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을 고의적으로 차별했던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나라 전역에서 너무 아파서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수시로 배급이 끊겼다. 배급을 끊는 것은 몸이 아픈 것을 정권에 대한 반대로 해석하는 간부들이 쉽게 도달하는 결정이었다." "그것은 약자를 희생시켜 강자에게 보상하며 희소성을 관리하는 단순하고 효과적인 시스템이었다."(438-40)


"(1962년 7월 마오쩌둥과 독대한 자리에서) 류사오치는 천윈과 톈자잉, 대약진 운동을 가장 거침없이 비판해 왔던 두 명이 토지 분배에 관해 공식적으로 의견을 밝히길 원한다고 보고함으로써 말문을 열었다. 곧장 폭발한 마오쩌둥의 입에서 폭언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류사오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서둘러 대꾸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소!」 「역사는 당신과 나를 심판할 거요. 심지어 식인 행위도 역사책에 남게 될 거요!」" "두 사람은 곧 진정했고 마오쩌둥은 경제 조정 정책을 지속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주석은 이제 그 자신의 흐루쇼프, 다시 말해 주인 스탈린을 비난했던 하인을 찾아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류사오치가 분명히 자신의 모든 범죄 행위를 규탄하는 비밀 연설을 할 사람이라고 결론 내렸다. 마오쩌둥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당과 나라를 산산조각 낼 문화 대혁명을 개시하기 위한 참을성 있는 기초 작업은 이미 시작되었다."(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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