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대혁명 - 중국 인민의 역사 1962~1676 인민 3부작 3
프랑크 디쾨터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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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을 닮고자 했던 마오쩌둥은 비非스탈린화 움직임에 개인적으로 위협을 느꼈다. 아울러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위대한 소련에서 흐루쇼프가 어떻게 그처럼 단독으로 완전한 정책적 반전을 꾀할 수 있었는지 의아했다. 어쨌거나 소련 건국의 아버지로 불린 블라디미르 레닌은 1917년 볼셰비키 집권 이후에 외국 열강의 연합 공격을 성공적으로 버텨 냈고 25년 뒤 스탈린은 나치 독일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터였다. 답은 소련에서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개조하는 작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데 있었다." "공산주의 논리에 따르면 생산 수단의 소유 문제를 둘러싼 사회주의식 개혁이 일단락된 다음에도 개인주의적인 사고부터 민간 시장에 이르기까지 부르주아 문화의 모든 흔적을 영원히 제거할 새로운 혁명이 필요했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데 혁명이 필요한 것처럼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넘어갈 때도 혁명이 필요했다. 마오쩌둥은 이를 문화 대혁명이라고 불렀다."(10-1)


"많은 독재자가 그렇듯이 마오쩌둥은 자신의 역사적 사명과 관련하여 거창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쉽게 원한을 품는 남다른 재주도 있었다. 뒤끝이 길었던 그는 쉽게 상처받고 분노했다. 인명을 경시한 탓에 사람들을 겁박하려고 벌인 정치적 운동에서 태연하게 살인 할당량을 부과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점점 더 동료와 부하를, 특히 오랜 세월 자신의 곁을 지켜 준 전우를 공격하면서 공개적으로 모욕하거나, 투옥하거나, 고문했다. 요컨대 문화 대혁명에는 한 늙은 남자가 말년에 이르러 개인적인 원한을 해결하려는 목적도 존재했다. 문화 대혁명의 이 같은 두 가지 측면, 즉 수정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사회주의 세계를 지향하는 비전과 실재하거나 상상 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적을 겨냥한 추잡하고 앙심에 찬 음모는 별개가 아니었다. 마오쩌둥은 자신과 혁명을 동일시했다. 자신이 곧 혁명이었다. 자신의 권위에 불만족스러운 기미만 보여도 프롤레타리아 정권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으로 간주했다."(12-3)


1부 초기(1962~1966)


"더 이상 대기근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마오쩌둥이 취한 첫 번째 행보는 기근의 책임을 계급의 적에게 돌리는 것이었다. 그는 1960년 11월에 쓴 글에서 <불순분자들이 폭력과 살인, 식량 부족과 굶주림 등을 야기해 권력을 잡았다. 민주주의 혁명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 사회주의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 찬 봉건 세력이 문제를 일으키고 생산적인 사회주의 세력을 방해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은 1956년 이후에도 (스탈린의 저서 『단기 과정』을) 숭배했다. 그는 <사회주의 혁명이 무르익을수록 계급 투쟁은 더욱 격렬해진다>라는 스탈린의 개념에 특히 주목했다. 『단기 과정』에 따르면 <우리가 강해질수록 적은 더욱 유순해지고 고분고분해질 것이다>라고 가정하는 것은 <안일한 자기만족>이었다. 실제로는 정반대 현상이 일어났고 이는 경계심을, <진짜 볼셰비키 혁명가들의 경계>를 촉구했다. 적은 더 이상 외부에 있지 않다. 오히려 잘 보이는 곳에, 바로 당원들 사이에 숨어 있었다."(53-4)


"몇 개월 뒤 사회주의에 초점을 맞추어 혁명적 경계심을 고취하고 일반 대중을 교육하기 위한 사회주의 교육 운동이 <계급 투쟁을 잊지 말라>라는 표어와 함께 시작되었다. 빈농과 중산층 농민들로 이루어진 다양한 위원회가 활용되었다. 허베이 성 싱타이 지구에서는 수천 명의 농민들이 조직되어 <자본가>와 <독자적으로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들>을 공격했다."(58) "류사오치는 사회주의 교육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1963년 2월에는 도시의 부패 실태를 고발하는 펑전의 보고를 중간에서 가로막고 사회주의 교육 운동이 <우리 당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중대한 계급 투쟁>이라는 사실을 엄중하게 경고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결연한 혁명가이며 주석을 계승할 자격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마오쩌둥 본인보다도 더 극단적인 좌파의 길로 노선을 선회하고 있었다. 1963년 말에 이르러서는 공작대를 이끌도록 자신의 아내를 농촌으로 보냈다."(60-1)


류사오치가 주도한 숙청 작업으로 "모든 성이 휘청거리고 있을 때 1964년 10월 모스크바에서 (흐루쇼프의 직속 부하 중 한 명인 브레즈네프의 무혈 쿠데타라는) 일련의 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마오 주석은 이제 자신의 명백한 후계자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당내에서 부쩍 권위를 내세우는 류사오치가 심히 의심스러웠다." "얼마 뒤 12월 26일에는 자신의 일흔한 번째 생일을 맞아 인민 대회당에서 열린 만찬에 일단의 당 지도부 인사들을 불러 놓고 수정주의에 관한 이야기만 자꾸 되풀이하면서 당 중앙에 존재하는 <독립적인 왕국>을 공격했다. 냉랭한 분위기였다." "류사오치는 민초를 조사하도록 자신의 아내를 파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국의 대규모 공작대에 합류해서 그녀를 따르라고 요구했다. 마오쩌둥은 이 같은 하향식 접근 방식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주석은 공작대를 이끄는 지도자가 일반인의 표적이 되는 상향식 운동을 선호했다."(67-9)


"펑더화이에게서 국방부를 넘겨받은 직후부터 린뱌오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을 마스터하는 지름길로써 마오쩌둥 사상을 학습하도록 장려하기 시작했다." "1965년 8월에 개정판이 나왔을 즈음에는 일명 <작은 붉은 책>으로도 알려진 『마오쩌둥 어록』이 군인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백만 권이나 배포된 상태였다." "군사적 모델을 향한 열정은 정식 교육에 대한 경시로 이어졌다. 린뱌오의 표어는 이제 교육 제도 전체에 대한 의구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은) 다른 무엇보다 <혁명의 계승자>를 길러 내야 함에도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는 부르주아 지식인에 의해 학교가 운영되는 것이 특히 문제라고 지적했다. 일부 학생들은 곧장 마오쩌둥의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그런 그들을 위해 마오쩌둥이 편을 들고 있었다. 또 다른 미래의 홍위병 말처럼 <수업은 내 시간을 낭비했고 선생님들도 내 시간을 낭비했다.> 많은 학생들이 주석이 불러 줄 때를 기다렸다."(84-7)


2부 적색 시대(1966~1968)


"1965년 11월에 (마오쩌둥의 신중한 사주를 받은) 야오원위안의 논평은 (베이징 부시장이자 유명한 역사가이며 극작가인) 우한을 비난하는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당시 (베이징 시장이었던) 펑전은 덩퉈에게 우한을 옹호하는 글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덩퉈는 몇 년 전 백화 운동에 관련된 마오쩌둥의 주요 연설에 대해서 일부러 보도를 지연시킨 적도 있었다. 펑전과 우한이 권력에서 밀려나자 덩퉈가 바로 다음 표적이 되었다. 1966년 5월 6일, 이제는 마오쩌둥에게 완전히 장악된 『인민일보』가 덩퉈와 그의 몇몇 추종자들을 비난하고 나섰다." "중학교에서는 당 서기들이 전교생을 모아 놓고 우한과 덩퉈를 비롯한 그들의 추종자를 비난했다." "이제 그들에게 하나의 임무가 주어졌다. 학생들은 대자보를 써달라는 주문을 받았고 작업에 착수했다." "곧 전국에 다음과 같은 표어들이 도배되었다. <흑방 분자를 박살 내자!> <반사회주의 도당은 물러가라!> <끝까지 혁명을 완수하자!>"(109-11)


"마오쩌둥은 펑전이 이끌던 오인소조의 해체를 위해 움직였다. 오인소조 대신 마오쩌둥의 심복들로 구성된 중앙 문화 혁명 소조가 등장했다. 중앙 문화 혁명 소조는 곧 문화 대혁명의 전 과정을 지휘하면서 모든 상위 결정이 내려지는 가장 중요한 정치 기구가 되었다." "(옌안 시절 주석의 대필 작가였던 천보다가 이끄는) 중앙 문화 혁명 소조에는 장칭과 캉성, 야오원위안과 장춘차오를 비롯한 주석의 몇몇 심복들이 포함되었다. 세력 균형이 바뀔 때마다 그 구성원은 달라지겠지만 문화 대혁명 대부분의 기간 동안 중앙 문화 혁명 소조는 계속해서 태풍의 눈으로 남을 터였다." "6월 1일, 천보다는 『인민일보』에 발표한 선동적인 논설에서 시민들을 향해 <모든 괴물과 악마를 척결하라!>라고 강력히 촉구했다. <자신들의 반동적인 공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동자를 속이고 기만하고 멍청하게 만들려 하는> 부르주아의 대변자들을 척결하라는 외침과 함께 문화 대혁명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113-5)


"(류사오치의 아내) 왕광메이는 9년 전 백화 운동에 뒤이은 반우파 운동의 새로운 버전으로 문화 대혁명을 이해했다." "류사오치 역시 베이징 사범 대학교 산하의 명문 중학교에서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공작대 대원들에게 비슷한 지시를 내렸다. <지도자란 적절한 때를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괴물들이 정체를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고 적절한 시점에 반격할 줄 알아야 한다. 반당 및 반사회주의 분자들은 학교에서 반드시 축출되어야 한다.> 그는 심지어 학생과 교사를 모두 합친 숫자의 1퍼센트에 해당하는 인원이 우경 세력으로 비난을 받아야 한다며 할당량도 정해 주었다. 중국 전체를 놓고 따지면 총 30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였다." "류사오치는 단시간에 중국에서 가장 미움받는 지도자로 전락했다. 휘하의 공작대들은 수많은 사람을 순교자로 만들었다. (항저우에서 칩거하면서 상황의 추이를 지켜보던) 마오쩌둥이 베이징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125-7)


1966년 7월 16일, 그 유명한 양쯔강 수영을 마치면서 자신에게 이목을 집중시킨 마오쩌둥은 이틀 뒤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류사오치가 댜오위타이 국빈관에 호출되자 마오쩌둥이 포문을 열었다. <나는 베이징에 돌아온 뒤로 정말 마음이 아팠다. 이곳의 춥고 을씨년스러운 모습 때문이다. 어떤 학교는 문을 닫았고 심지어 어떤 학교는 학생 운동을 탄압하고 있다. 도대체 누가 학생 운동을 탄압하는 것인가?>" "7월 23일 천보다와 나란히 베이징 대학교에 모습을 나타낸 마오 부인은 자신들이 <학생들에게 배워라>라는 주석의 명령으로 그곳에 왔다고 강조했다. 그들은 득의만면한 군중의 환호 속에서 성명을 발표하고 불과 한 달 전에 소란을 피운 학생들을 가리켜 <반동분자>라고 비난했던 공작대의 평가를 뒤집었다." "(주석이 해체를 명하자) 공작대는 사과 성명을 내고 해산했다. 반역자로 몰렸던 학생들은 혐의를 벗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마오쩌둥을 그들의 해방자로 여겼다."(130-1)


"마오쩌둥은 학생들에게 직접 다가갔고 그들에게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협력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들은 쉽게 외부의 영향을 받았고 조종하기가 쉬웠으며 싸우고 싶어 했다. 무엇보다 학생들은 능동적인 역할을 열망했다." "8월 1일 마오쩌둥은 칭화 대학교의 한 부설 중학교에 다니는 일단의 어린 학생들에게 친전을 보내서 그들을 지지한다는 뜻을 전했다. 그들에게 <저항은 정당한 행위다>라고 조언했다. 해당 학생들은 두 달 전에 자체적으로 조직을 결성하고 홍위병이라는 이름을 지은 터였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홍위병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최초로 홍위병 지대(支隊)를 조직해서 마오쩌둥에게 칭찬을 받았던 청소년들은 칭화 대학교에서 운영하는 한 명문 중학교의 학생들이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순수한 혈통을 가진 사람들만이 홍위병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원로 혁명가의 자식인 그들만이 문화 대혁명을 이끌기 위해 꼭 필요한 계급적 배경을 가졌다고 생각했다."(137-9)


"정확히 무엇이 <낡은 문화>인지 매우 막연했지만 <새로운 문화>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에 비하면 차라리 나은 편이었다. 곧 사람들은 주석 숭배가 유일하게 용인되는 프롤레타리아 문화라는 사실을 깨달았다."(172) 1966년 9월 5일, 국무원은 전국을 누비는 홍위병의 교통비와 숙식비를 받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어린 투사들이 혁명의 불꽃을 전국 구석구석까지 확대해 주기를 바랐다. 불길은 두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베이징과 톈진 출신의 홍위병은 전국을 종횡하면서 폭력 사태를 선동하고 <주자파>가 숨어 있는 당사들을 포위했다. 한편에서는 여러 성(省) 출신의 혁명가 학생들이 베이징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문화 대혁명을 공부하고 중앙 문화 혁명 소조 위원들을 만나면서 감을 잡아갔다. 주석은 수백만 명의 홍위병을 직접 사열했다. 매번 사열이 끝날 때마다 급진론자로 거듭난 학생들이 혁명의 불꽃을 고향에 전파할 준비가 완료되어 수도를 떠났다."(184)


# 1966년 12월 21일 무료 숙식과 여행 폐지


홍위병은 출신 계급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기에 그 순수성을 계속 유지하려고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전 홍위병들의 주도권은 약해졌다. "전국 곳곳에서 지역의 지도자들에게 용감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학생들과 반대로 그들을 옹호하는 학생들 사이에 분열이 생겼다. 머지않아 한쪽은 <조반파(造反派)>, 다른 한쪽은 <보황파(保皇派)> 또는 <보수파>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조반파의 상당수는 <흑오류>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홍오류>와 <흑오류>라는 말의 의미 자체가 달라지기 시작하면서 문화 대혁명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홍오류로 태어난 학생들은 어느 순간에 자신들이 잘못된 진영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의 부모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에 의해 선동된 <부르주아적 반동 노선>의 추종자라는 비난을 받는 상황이었다." "이제는 점점 늘어나는 조반파 홍위병들이 <부르주아적 반동 노선>을 따른다고 의심되는 당 지도자들을 포위했다."(202-5)


# 흑오류(黑五類) : 구지주 계급, 구부농 분자, 반혁명 분자, 악질 분자, 우파 분자 등 홍위병이 될 자격이 없는 출신 성분이 나쁜 부류들


"주석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방해하는 주자파를 척결하기 위해 인민에게 단결해서 권력을 쟁취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당내 지도층 인사들은 탄탄한 기반을 보유하고 있었고 반대자의 창끝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데 능숙했으며 자신에게 유리하게 대중 조직을 통제할 정도로 유능했다. 전국의 많은 도시에서는 조반파와 보황파가 서로 싸우다가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주석은 (1967년 1월 3일, 상하이의 조반파 노동자와 홍위병이 신문사 두 곳을 습격해 장악하는 데 성공한) 1월 폭풍을 치하했지만 수십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거나 수개월씩 지속된 지지부진한 싸움에 휘말려 있던 탓에 지역 경제가 파괴되면서 엄청난 대가가 뒤따랐다."(219) "마오쩌둥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홍위병이든 조반파든 아무도 그때까지 <주자파>를 몰아내지 못한 터였다. 군대야말로 혁명을 완성하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었다."(222-3)


"주석이 당초 원했던 것은 혁명의 불길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군대라는 단일 지휘권 아래 전국의 서로 다른 조반파 파벌들을 하나로 묶었다. 그럼에도 혁명의 불길이 완전히 꺼지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4월에 들어서 그는 힘의 균형추를 조반파에게로 옮겼다. 먼저 새로운 명령을 내려서 군이 사람들에게 반동분자라고 낙인을 찍거나 마음대로 체포할 수 없도록 제한을 가했다." "군에 조반파를 상대로 폭력 행사를 금지한 지 하루 뒤에 『베이징일보』가 1966년에 실각한 이래로 가택 연금 상태이던 류사오치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선전 기관은 전직 국가 주석을 향해 폭언을 토해 냈다. 조반파 조직들을 단결시키고 그들의 공세를 류사오치와 당 조직에 남아 있는 그의 대리인들에게 집중시키기 위함이었다." "학생을 비롯한 노동자와 정부 관리가 두 개의 파벌로 분열되면서 문화 대혁명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두 파벌 중 한쪽은 군에 의지했고 다른 한쪽은 군에 반기를 들었다."(236-8)


"양쪽 파벌이 그토록 전의를 불태운 데는 서로에 대한 증오심도 있었지만 상대편보다 자신들이 주석의 충실한 지지자라는 믿음도 한 몫을 차지했다. 무엇보다 조반파와 보황파는 그들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서 싸웠다." "문화 대혁명에 휩쓸린 학생들과 노동자들, 당 간부들 중 상당수는 지극히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빠른 선택을 하도록 강요당했다. 상황은 끊임없이 변했고 종잡을 수 없는 베이징발 정책에 의해서 강요된 운명은 당혹스러운 반전을 거듭했다.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편으로 떠밀린 사람들은 결국 친구나 동료, 심지어 가족과도 싸워야 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혹시라도 자신이 비난 대상으로 전락하면 승리한 자들이 <우파>나 <반동분자>라는 낙인을 찍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 잘해야 직장에서 해고되고 모든 기득권을 상실한 채 소외 계층으로 근근히 살아갈 수 있을 터였다. 그나마도 잘못된다면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질 터였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싸웠다."(243-4)


"중앙 문화 혁명 소조 지도부는 문화 대혁명을 기회 삼아서 개인적인 복수를 하고자 했다. 일당 독재 국가에서 대인 관계가 이념보다 훨씬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다."(258) 1967년 8월 22일 영국 재외 공관이 홍위병의 공격을 받아 불탄 사건은 "종말의 시작에 불과했다. 중앙 문화 혁명 소조가 너무 많이 나아간 터였다. 이튿날 저우언라이는 비난의 화살이 외무부로 향하는 사태를 막고자 아직 상하이에 머물고 있던 주석에게 왕리의 연설문 사본을 보냈다. 마오쩌둥은 한참을 곰곰이 생각한 끝에 자신의 결심을 참모 총장 대리 양청우에게 알려 베이징에 전달하도록 했다. 주석은 왕리를 비롯한 중앙 문화 혁명 소조의 몇몇 대위원들을 혁명을 망가뜨리려는 <불순분자들>로 규정했다. <이 내용을 총리에게만 보고하라. 그들을 체포하게 하고 총리로 하여금 작금의 상황을 정리하게 하라.> 권력이 중앙 문화 혁명 소조에서 다시 저우언라이에게 넘어가면서 문화 대혁명의 다음 단계가 시작되었다."(266)


"상하이에 머물고 있던 주석은 『붉은 깃발』에 발표된 선동적인 사설 한쪽에 <우리의 만리장성을 구하라>라는 메모를 달았다. 만리장성이란 인민 해방군을 빗댄 말이었다. <군대를 존중하라>는 그날의 표어가 되었다. 9월 5일에는 한 달 전 군을 공격하라고 부추겼던 장칭이 조반파를 향해 누구에게도 인민 해방군의 무기를 훔칠 권리는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군인들에게 응사하도록 지침이 내려졌다고 조반파에게 경고했다." "주석은 전국을 돌면서 파벌 싸움이 내전 양상으로 발전했던 지역들을 방문하고 모든 혁명 세력에게 대동맹을 촉구했다." "혁명은 위축되었다. 베이징에서는 10월 1일 국경절에 대비하여 담벼락과 창문, 인도에서 대자보가 제거되었다." "이제는 정부의 공식 표어와 포스터만 붙일 수 있었다. 하나같이 단결의 중요성과 인민 해방군을 위한 활동과 지원을 촉구하는 것들이었다. 대학교 교정에서도 연일 똑같은 메시지가 확성기를 통해 쏟아졌다."(268-9)


"홍위병의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서로를 고발하고 맞고발하는 격렬한 마지막 한 판의 싸움을 끝으로 칭화 대학교 안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지던 확성기 소리가 마침내 잦아들었다. 베이징에 더없이 행복한 정적이 찾아왔다. 늘 해오던 대로 주석의 초상화를 앞세워 행진하는 학생들은 이제 확신에 차 있기보다 암울한 모습이었다. 마오쩌둥은 문화 대혁명을 공식적으로 중단했다. 다음 2주 동안은 선전대가 전국의 대학교와 중·고등학교로 행진했다. 선전대 안에 농민은 있지도 않고 노동자도 몇 명에 불과했지만 공식적으로 <노동자와 농민 마오쩌둥 사상 선전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1968년 9월 7일 톈안먼 광장 연단에 선 저우언라이가 전면적인 승리를 선언했다." "한 달 뒤 류사오치는 당에서 공식적으로 축출되었고 <당 내부에 숨어 있던 변절자, 반역자, 배신자인 동시에 무수히 많은 범죄를 저지른 제국주의, 현대 수정주의, 국민당 반동분자들의 앞잡이>로 고발되었다."(290-1)


3부 암흑 시대(1968~1971)


"대오 정화 운동의 발단은 <예순 한 명의 반역자 사건>이었다. 수십 명의 당 고위 간부들이 1930년대에 국민당에 항복했던 변절자라는 사실을 주석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1967년 3월에 캉성이 날조한 사건이었다." "<문화 대혁명의 대업은 당내 고위 간부들 틈에 숨은 반역자와 간첩을 몰아내는 것이다.> 그가 공표한 바에 따르면 류사오치는 국민당과 일본에 제일 먼저 항복했던 반역자였다. 류사오치의 아내 왕광메이는 미국과 일본, 국민당의 간첩이었다. <펑전은 오만한 변절자다. 펑더화이는 스파이인 동시에 반역자다. 뤄루이칭은 공산당에 가입한 적이 없는 간첩이다.> 허룽은 강도였고 루딩이는 장제스에게 고용된 간첩이었다. 탄전린(<우리는 당장이라도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도 배신자였다. 장칭은 전면에 나서 <덩샤오핑을 타도하라!>라고 외쳤다." "문화 대혁명의 표적은 더 이상 <주자파>도, 심지어 <수정주의자>도 아니었다. 적을 위해서 암약하는 간첩들이었다."(295-7)


"대오 정화 운동은 문화 대혁명 이전에 당에 잠입한 스파이와 변절자, 반역자를 가려내기 위한 운동이었다. 따라서 대체로 젊은이들은 해당이 없었다. 1968년 9월 7일 톈안먼 광장 연단에 나와 혁명 위원회를 맞이하면서 저우언라이는 매우 다른 어떤 계획을 구상했다. 학생들이 <공장과 광산, 농촌으로 가서 대중에게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소도시와 대도시에서 젊은이들이 사라졌다. 이후 10년에 걸쳐 수백만 명의 학생들이 시골 벽지로 이송되었다."(307) "농촌으로 보내진 것은 학생들만이 아니었다. 1949년에 죽의 장막이 드리워지자마자 새로운 정권은 사회 질서를 위협하거나 공공 자원을 낭비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도시에서 내쫓기 시작했다. 수백만 명의 피난민과 제대 군인을 비롯해서 매춘부와 극빈자, 소매치기 등이 농촌으로 보내졌고 농촌은 온갖 유형의 악질분자들이 모이는 거대한 쓰레기 하치장이 되었다."(318-9)


1969년 3월 전바오 섬 충돌과 8월 신장 지구 기습 공격 등 국경 분쟁이 벌어지면서 소련의 침략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었다. "주석은 자신의 예전 스승인 스탈린이 저지른 가장 심각한 실수─흐루쇼프가 장차 자신의 네메시스가 될 거라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한 부분은 제외하고─중 하나가 대대적인 침략에 대비한 포괄적인 대피 계획의 부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1964년 10월에 흐루쇼프가 몰락하기 이전부터 중국과 소련은 상대를 향해 연신 호전적인 성명을 발표하며 갈등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리고 주석은 소련이 중국을 공격할지 모른다고 의심했다." "마오쩌둥이 찾은 해답은 전쟁이 발발할 경우 공격받을 가능성이 높은 육상과 해상의 국경선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에 3선을 건설하는 것이었다."(339-41) "1964년부터 1971년까지 산업 분야에 투자된 중국의 전체 예산 중 3분의 2가 3선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는 점에서 3선 건설은 그 자체로 문화 대혁명의 주된 경제 정책이었다."(344)


"1964년에 이르러 중국에게는 우방이 거의 없었고 2년 뒤에는 문화 대혁명이 시작되면서 고립이 더욱 심화되었다. 자력갱생 개념은 시민들을 알아서 해나가도록 방치하는 데 대한 편리한 핑계가 되었다. 시민들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라는 말을 들었고 또다시 풍부한 노동력으로 부족한 자본을 대신해야 한다는 논리가 힘을 얻었다."(348) "재집산화가 추진됨에 따라 정부는 <양곡을 핵심적인 고리로 생각하라>라는 주된 표어와 함께 양곡 생산을 새삼 강조하고 나섰다."(360) 성공 모델로 칭송받은 다자이 마을 본받기 운동은 거대한 기만 행위였다. "다자이 자체가 가짜였으며 모범적인 주민들도 주석이 쓴 희곡에 마지못해 출연한 배우에 불과했다. 기적 같은 수확량도 수치를 부풀렸을 뿐 아니라 다른 마을의 양곡을 빌려와 만든 가짜였다. 관개 시설은 대부분 인민 해방군이 건설한 터였다. 다자이 마을은 자력갱생은 고사하고 국가로부터 엄청난 보조금을 비롯해서 다양한 형태의 지원을 받았다."(364)


"당에서 축출된 지 한 달 뒤인 1969년 11월 12일에 류사오치가 독방에서 사망했다." "1967년에 체포된 뒤로 류사오치는 군중 비판 대회에서 연신 두들겨 맞았고 당뇨병 약도 제공받지 못했다. 폐렴까지 걸린 그였지만 제9차 중국 공산당 전국 대표 대회 당시까지도 살아 있었다. 주석의 지시로 류사오치 사건을 담당하게 된 저우언라이는 자신의 예전 동료를 <범죄를 저지른 반역자, 적의 대리인, 제국주의자들과 현대 수정주의자들 그리고 국민당 반동분자들을 주인으로 섬긴 배신자>라고 고발했다. 류사오치의 시신이 화장된 뒤에 총리는 작은 연회를 열고 자신의 임무가 완수된 것을 자축했다." "1970년 2월 5일, (중앙 위원회는 모든 <반혁명 활동>을 타격하고) <부패>와 <투기>, <낭비>도 단호히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월부터 11월까지 지속되는 동안 이 두 운동은 대체로 겹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통칭 <일타삼반(一打三反)> 운동으로 불렸다."(369-70)


"1969년 10월 소련의 기습 공격이 우려되어 지도부가 허둥지둥 베이징을 벗어났을 때 린뱌오는 쑤저우의 벙커에서 <제1호 명령>을 발동하고 군에 비상 태세에 돌입하도록 명령했다. 그에 따라 10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이 전국의 전략적 요충지를 점거하기 위해 진군했고 수천 대의 탱크와 비행기, 군함이 그들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지휘 계통에 있던 누군가의 섣부른 행동으로 주석의 승인을 받지 못한 채 린뱌오의 명령은 곧바로 철회되었다. 주석은 결정 과정에서 자신이 배제된 사실에 격분했다. 정확히 어디에서 문제가 발생했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었지만 마오쩌둥으로서는 자신의 2인자가 얼마나 손쉽게 군을 장악할 수 있으며, 언젠가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등을 돌리도록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계기가 된 것이 분명했다." "군이 자신의 일상을 장악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그의 반감은 이제 린뱌오와 그의 부하 장군들에 대한 원한으로 변해 갔다."(380-1)


"1969년 4월 제9차 중국 공산당 전국 대표 대회 이후에 이미 주석은 위험 요소를 줄이기로 결심하고 일단의 전문가들에게 린뱌오의 인민 전쟁 모델을 대체할 외교 정책을 모색하라고 지시한 터였다." "1969년 8월에 신장 성에서 발생한 기습 공격으로 소련과 전쟁이 임박했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지면서 사령관들은 대담한 계획을 생각해 냈다. 요컨대 미국이라는 패를 이용한다는 전략이었다. 그들은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두 초강대국 즉 미국과 소련의 대립을 이용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들의 판단은 미국을 소련과 다를 바 없는 적으로 생각하는 린뱌오와 그 휘하의 장군들과 커다란 차이를 보였다." "(미국이 중국을 공격하지 않는 한 중국 군대는 베트남 국경을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은) 마오쩌둥과 스노의 사진이 공개된 1970년 12월 25일을 일주일 앞두고 주석은 이 노(老)기자에게 <대통령으로 오든 관광객으로 오든> 닉슨을 기꺼이 만나겠다는 뜻을 밝혔다."(384-5)


"1971년 9월 12일 해 질 녘에 (군부 순회를 마친) 주석을 태운 기차가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몇 시간 뒤인 다음날 새벽 2시 30분 경 영국제 트라이던트 비행기가 몽골에서 추락했다. 곧 지역 경찰이 드넓은 초원 여기저기에 흩어진 잔해 속에서 새까맣게 탄 남성 시체 여덟 구와 여성 시체 한 구를 수거하여 한곳에 모아 놓았다."(389) "1971년 10월 1일 행진이 취소된 뒤로 린뱌오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상하이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정녠은 국경절 아침 방송에서 관례적인 축하 행사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몹시 놀랐다. 같은 날 한 간수가 수용실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재소자들로부터 『마오쩌둥 어록』을 수거해 갔다. 그날 저녁에 돌려받은 정녠의 책에는 린뱌오가 쓴 서문이 찢겨 나가고 없었다." "린뱌오가 대중에게 인기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이 안도했다. 다른 무엇보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이 문화 대혁명의 끝을 알리는 전조임을 깨달았다."(392-3)


4부 잿빛 시대(1971~1976)


"린뱌오의 군사 독재가 붕괴하고 군인들이 병영으로 돌아가자 농촌 곳곳에서 농민들이 땅에 대한 권리를 되찾고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당 간부들이 앞장서서 땅을 농민들에게 분배했다. 때로는 정부의 대리인과 땅을 경작하는 농민들 사이에 거래가 성립되어 당 간부에게 곡물의 일부를 넘기는 조건으로 가상의 공동 소유 체제가 형성되기도 했다. 농민들이 당 간부들에게 돈을 주며 눈감아 줄 것을 부탁하면서 뇌물은 종종 자유 기업 체제의 바퀴에 윤활유로 작용했다." "무엇보다 린뱌오 사건으로 당이 신망을 잃은 상황에서 일부 당 간부들은 일부러라도 다양한 국가 지시를 변칙적으로 적용하기 시작했고 당초 지도부가 의도한 것보다 훨씬 많이 나아갔다. 한 마을 관리의 말처럼 농촌의 당 간부들은 <정부 시책이 계속해서 오락가락하고 툭하면 비판 대회에서 공개적인 굴욕을 당하게 되면서>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대신 생산에 전념했다."(422-3)


"토지를 농민에게 돌려준 것은 농촌에서 일어난 조용한 혁명의 한 단면에 불과했다. 일부 부유한 마을에서는 시장에 내다 팔 수익성 작물을 심는 것에서 더 나아가 공장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이런 향진기업(鄕鎭企業)들은 일부가 공동 소유로 운영되기도 했지만 상당수가 외형만 공동 소유의 형태를 취했을 뿐 전적으로 개인 사업체로 운영되었다." "향진기업들은 여러 방면에서 시장에 공헌했다. 중개인을 통해 상품을 판매했을 뿐 아니라 벌어들인 돈으로 곡물과 돼지 사료를 구입했으며 이외에도 어유(魚油)에서 아스피린까지 계획 경제가 제공하지 못하는 수입 물품을 구매하기도 했다. 그들은 사업 운영에 필요한 희귀 자원을 놓고 정부와 경쟁하기 위해 구매 대리인을 파견했고 구매 가능한 모든 석탄과 철강, 쇠를 사들였다." "양쯔 강 삼각주 지역에서 발전한 가내 공업은 해방 이전부터 존재하던 예전의 제조 방식과 무역 경로를 그대로 따랐다. 그들은 국가의 영향력이 약해지는 순간에 되살아났다."(430-2)


"제2의 경제가 중앙 정부의 정책이 초래한 광범위한 빈곤을 해결하고자 조용히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공산주의 강령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을 중심으로 제2의 사회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동유럽과 소련에서 그랬던 것처럼 공식적인 정치 체제의 그늘 속에는 비밀스럽고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지하 세계가 존재하고 있었다. 특별히 새로운 현상은 아니었다. 1950년에 공산당이 기본적인 경제권을 억압하기 시작하면서 암시장이 생겨났듯이 새로운 정권에 의해 범죄시된 행위들이 대중의 눈을 피해서 계속 이어진 것이었다." "(모든 구사상과 구제도를 일소하려 했던) 문화 대혁명 자체가 17년에 걸친 공산주의 통치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구사회의 잔재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념적 획일성이라는 겉모습 아래에는 공산당을 위협하는 하위문화와 반(反)문화, 대안 문화의 세계가 존재했다."(441-2)


# 종교 생활, 독서 생활, 라디오 청취, 문화 예술 모임 등


"해빙기가 지나고 한파가 찾아왔다. 이미 1972년 12월에 주석은 린뱌오에 대한 공격으로 문화 대혁명 전체의 권위가 약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염려하기 시작했다."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차원에서 덩샤오핑과 리징취안, 울란푸, 탄전린을 비롯한 노위병들이 다시 기용되었지만 그들의 당내 서열은 높지 않았다.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 캉성 등 중앙 문화 혁명 소조 출신 인사들이 상대적으로 우위를 차지했으며 저우언라이를 견제하기 위해 마련된 전략적인 직책을 맡았다. 총리는 점차 고립되어 갔다. 원로 당 간부들을 복권시키고 경제 질서를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총리에게 마오쩌둥은 의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1974년 1월 마오쩌둥은 총리를 현대판 공자라고 비꼬면서 장칭과 그녀를 따르는 협력자들에게 그를 공격하도록 사주했다. 당초 린뱌오를 겨냥했던 운동이 린뱌오와 공자 두 사람을 모두 비판하는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으로 바뀌었다."(463-4)


"주석은 비록 사망하기는 했지만 저우언라이가 자신에게 향해야 할 관심을 가로채지 못하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총리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짤막하게 알렸을 뿐 헌화를 할 수 없도록 유해를 일반에 공개하지 않았다." "사인방이 그 모든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대중의 감정은 폭발했다. 저우언라이는 현대화를 대표하는 상징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문화 대혁명이 일으킨 재앙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 유일한 지도자였다. 희망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장지로 이동하는 경로를 비밀에 부쳤음에도 수만 명의 사람들이 총리에게 작별을 고하기 위해 거리로 나와서 살을 에는 바람 속에 서 있었다." "추도사를 낭독한 덩샤오핑은 장차 1년 동안 공식 석상에서 사라지게 될 터였다. 불과 며칠 뒤에 그는 부총리직에서 해임되었다. 대중의 분노는 마오 부인과 그 일당을 향했다." "대중은 저우언라이가 죽고 없는 마당에 덩샤오핑까지 숙청을 당하자 앞날을 걱정하며 불안해했다."(473-4)


"지도부가 대중 앞에서 단결된 모습을 보인 것은 주석의 장례식 때가 마지막이었다. 이제 그들 앞에는 최후의 결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석의 시신에 포름알데히드가 주입되고 있던 시점에도) 사인방은 선전 기구를 장악하고 <주자파>에 대항하기 위한 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그들은 당내 세력이 거의 없었고 군에도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권위를 부여해 주었던 유일한 존재는 이제 죽고 없었고 여론도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장칭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의 세력 기반인 상하이는 치열한 권력 쟁탈전이 벌어진 수도에서 한참 멀리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화궈펑을 과소평가한 터였다." "주석이 사망한 지 한 달이 되지 않은 10월 6일에 『마오쩌둥 선집』 제5권에 관한 논의를 위해 정치국 회의가 소집되었다. 그리고 사인방이 회의장에 도착하는 대로 차례로 체포되었다. 함정을 눈치채고 회의에 불참한 마오 부인은 자신의 거처에서 체포되었다."(484-5)


# 10월 6일 사인방(장칭, 장춘차오, 왕훙원, 야오원위안) 체포


"으례 모든 독재자는 전임자와 자신을 차별화할 필요가 있다. 덩샤오핑은 문화 대혁명을 과거사로 치부하고 더 이상의 논의를 중단하고자 했다. 전체 공산당원 중 대략 절반이 1966년 이후에 입당했고 문화 대혁명 당시 추악한 정치판에 휩쓸리면서 노위병들 대다수가 이런저런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혹시라도 가해자들에게 책임을 추궁하고자 작심하고 칼을 들이댈 경우 대대적인 숙청이 불가피할 터였다. 따라서 복권된 사람은 많았지만 기소된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류사오치와 그를 추종하던 세력들도 모두 1980년 2월에 공식적으로 명예를 회복했다." "1981년 7월에 창당 60주년을 맞이하여 당의 역사를 둘러싼 공식 결의문이 발표되었다. 당은 이 문서에서 마오의 대기근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문화 대혁명을 린뱌오와 사인방의 탓으로 돌렸다. 반면에 마오 주석에 대해서는 대체로 면죄부를 주었다."(489)


"진정한 변화는 아래서부터 시작되었다. 적어도 10년 전부터 시작된 조용한 혁명에서 간부들과 농민들은 과거 시장 경제의 장점을 되살림으로써 스스로 빈곤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농촌 일부 지역에서 그들은 조용히 토지를 임대하고 암시장을 열고 지하 공장을 운영했다. 대부분이 은밀하게 진행된 까닭에 이런 자유주의적 관행의 규모를 정확히 측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마오쩌둥의 사후에 이러한 관행들이 더욱 번창했다는 것이다." "1982년에서 1983년 사이의 겨울에 인민공사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그야말로 한 시대가 끝난 것이다." "중국이 급속한 경제 성장은 통상적인 낙수 효과의 개념처럼 도시에서 농촌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시골에서 도심 지역으로 진행되었다. 경제를 변화시킨 개인 기업가들은 (경제적 기회를 추구하면서 마오쩌둥 사상이 강요해 온 이념을 벗어던진) 평범한 수백만 명의 농민들이었고 실질적으로 그들이 국가를 움직인 셈이었다."(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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