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비판 - 『환단고기』와 일그러진 고대사
이문영 / 역사비평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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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국사를 가문의 역사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민족주의가 오랫동안 강조되어온 결과이다. 그리하여 고대의 일도 마치 어제 삼촌이 도둑 맞은 것처럼 여기면서 역사를 들여다본다. 로마의 멸망은 아무렇지도 않게 읽으면서, 고구려의 멸망은 할아버지네가 망한 양 분통을 터뜨리면서 읽는다. 그러다보니 유사역사를 믿는 사람들은 현재 한국사 교육에 극도의 저항심리를 느끼게 된다."(33) 가짜의 세계는 다양하다. 돈이 잘 벌릴 것 같아서 만들 수도 있고,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해 만들 수도 있고, 종교를 위해 만들 수도 있다. 공통점은 조작된 자료를 가지고 기존의 사실을 부정하면서 자기주장을 일방적으로 펼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유사역사학의 고약한 문제는 (객관적으로 자료를 검증하고 판정을 내리는) 심판관(역사학자) 자체가 오염되었다고 몰고 가는 데 있다. 유사역사학에서는 역사학자들을 친일파, 매국노, 식민사관 추종자로 비난하며 낙인을 찍고 있다."(37)


# 로버트 T. 캐롤의 유사역사학 정의

1. 신화·전설·모험담 그리고 이와 유사한 문학을 문자 그대로 사실로 수용

2. 고대 역사 문헌에 비판적·회의적 태도를 취하지 않고 그 명목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고대 사가의 주장에 대한 경험론적·논리적 반증을 외면

3. 절대로 확실한 것만이 '진실'이며, 절대로 확실한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무엇도 진실이 아니라는 극단적인 회의적 개념에 집착

4. 자신의 의제에 맞는 것은 호의적으로 인용하고, 맞지 않는 문헌은 무시하거나 해석에서 제외하면서 고대 문헌을 선택적으로 사용

5. 의제에 들어맞기만 하면 그것이 진실일 수도 있는 '가능성'을 진실이 되기에 충분조건이라고 간주

6. 인종적 편견이나 무신론, 자민족우월론 때문에, 또는 정치나 종교적 의제에 반대하기 때문에 자기들 주장을 억압하는 음모가 있다고 강조

7. 역사는 승자의 기록에 불과하기 때문에 역사학이란 엄정한 과학이 아니며, 그저 국가의 이익 또는 도덕에 봉사하면 된다고 주장


시카고대학 종교학과 교수인 브루스 링컨은 『신화 이론화하기』에서 "영국 태생의 동양학자 윌리엄 존스 경이 1786년에 내놓은 유럽 언어들과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그리고 페르시아어의 관계와 공통 기원에 대한 가설이 어떤 파장을 끼쳤는지를 잘 보여준다. 존스의 이론은 게르만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찬란한 그리스·로마와 공통의 조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깨닫고 문화적 열등감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그리고 아리아족과 관련이 없는 유대인을 상정함으로써 독일인에게 유대인 박해의 근거를 만들어주었다. '인도-아리아 어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위에 '민족'이 덧씌워지면서 후일 나치가 이 신화를 이용해 홀로코스트라는 전대미문의 대범죄를 저지를 계기가 착착 만들어져갔던 것이다. 유사역사학에서는 파미르 고원을 중요시한다. 파미르 고원에서 인류가 발생했다는 말도 흔히 한다. 그런 척박한 곳에서 생명체가 진화했다는 걸 믿는다는 것 자체가 어이없는 일이다."(53)


"유럽 국가들이 언어를 통해 민족의 기원을 신비하게 채색하려 했던 것과 같은 일이 아시아에서도 일어났다. 한국어와 일본어가 '우랄-알타이 어족'이라는 학설이 나오면서 동아시아에서도 같은 바람이 불었던 것이다. 우랄-알타이가 아리아어나 셈어와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은 이미 19세기때부터였다. 핀란드와 헝가리를 중심으로 '범투라니즘'이라는 운동이 일어난 적 있었다. 투라니즘은 이란 북동부의 투란 평원에서 나온 말로, 우랄-알타이 어족을 '투란 민족'이라는 이름하에 하나로 묶어내려는 이념이다. 투라니즘은 헝가리에서 19세기 초에 시작되었고 1914년 터키의 아타튀르크에 의해 제창되어 터키 민족주의에 이용되기도 했다. 우랄-알타이라는 거대한 영역을 포괄하는 공통의 조상 이야기는 인도-아리아어족의 상정이나 마찬가지로 근대국가 건설에 목마른 이들에게 호소하는 바가 있었다. 일본은 얼른 이 개념을 차용했다." "투라니즘은 일본제국의 대아시아주의와 결합하여 전파되었다."(65-6)


제국주의를 지향한 일본은 "아시아를 병합할 명분이 필요했다. 일본의 힘이 성장함에 따라 그들의 논리도 점차 제국주의화되었다. 시작은 동문동종론(同文同種論)이었다. 동일 문명인 한자 문화권에 들어 있는 아시아 인종이 뭉쳐 유럽 인종에게 대항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이보다 더 사람들을 강력하게 이끄는 이론이 일본에 등장하게 된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유사역사가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혈통주의에 입각한 '아시아주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쥬신론' 또는 '대동이(大東夷)'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이 혈통주의 속에서 중국은 같은 혈통이 아니다. 당시 일본이 같은 혈통으로 간주한 종족은 일본, 한국, 몽골, 만주, 그리고 시베리아의 고아시아 인종들뿐이었다. 이 세력은 후일 '동이족'이라는 이상한 카테고리에 묶인다. 감히 동이족의 땅을 침략하는 러시아를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고, 결국 그들의 뜻대로 러일전쟁이 벌어졌다."(74-5)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활약했던 신채호는 "민족은 역사가 없으면 국민이 되기 힘들 뿐이지만, 역사는 민족이 없으면 아예 존재 자체가 말살된다고 말하고 있다. 민족과 역사에 대한 신채호의 인식은 그 유명한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말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나(아)와 내가 아닌 남(비아) 사이의 관계(투쟁)로서 역사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초기의 신채호가 견지했던 이 역사관에는 큰 약점이 있었다. 아와 비아의 투쟁에서 패배한 민족은 어떻게 되는가? 그런 민족은 다른 민족에게 흡수되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신채호는 약자를 밟아버리는 사회진화론에 회의를 품었다. 그 결과 그는 1920년대부터 무정부주의자로 탈바꿈했다." "신채호는 이제 민족이 아닌 민중을 중시하고, 민중을 새로운 역사의 주체로 바라보게 되었다. 불행히도 그는 이런 인식 변화를 책으로 남기지 못한 채 1928년에 무정부주의운동 중 체포되었고 옥사했다."(86-7)


"광복 이후 한국에는 두 조류의 민족주의가 흐르고 있었다. 초대 문교부 장관(지금의 교육부 장관) 안호상으로 대표되는 극우적인 국수주의가 한 흐름이고, 4월혁명으로 촉발되어 터져 나온 제3세계적인 민족주의 흐름이 다른 하나다. 4월혁명으로부터 촉발된 민족주의적 흐름은 중립화 통일론과 같은 급진적 방식의 통일론을 불러왔는데, 이런 흐름은 5·16쿠데타로 일시 정지되고 만다. 쿠데타의 주역 박정희는 '민족적 민주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1963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이후 "'군정 이양'이라는 자신의 약속을 저버린 박정희는 민주 세력의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 첫 표출이 한일협정 반대운동, 이른바 6·3운동이었다." "문정창의 책은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탄생했다." "그런데 그는 한일협정에 대해 탄식하면서도 정권에 대한 비판은 일절 입에 담지 않고, 그 분노를 엉뚱한 방향으로 쏟아냈다. 바로 역사학계를 향해서였다."(107-8)


"문정창은 역사학계를 매도하는 프레임을 짰고, 이후 유사역사학에서는 끊임없이 그것을 이용했다. 어떤 프레임인가?" 그것은 일부 사가史家들이 일본인 어용학자들의 술수에 넘어가, 단군조선의 실존을 부정하고 '단군신화설'로 격하했다는 주장이다. "문정창이 꺼낸 조선총독부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역사학계가 조선총독부 사관을 답습한다'고 공격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전상진은 『음모론의 시대』에서 음모론자들은 상대방을 악마화 한다고 말한다. 상대를 악마화 하면 설령 우리 편이 실수를 해도 그것을 상대방의 공작으로 밀어붙일 수 있다. 자신들에게 동조하지 않고 자신들을 비판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모든 세력은 악마가 된다." "문정창의 주장을 확산시킨 것은' 국사찾기협의회'라는 단체였다. 국사찾기협의회는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안호상이 1975년에 설립했는데, 이 단체가 결성되면서 유사역사학이 달궈지기 시작했다."(111-2)


"안호상에게 '역사학계=식민사학'의 프레임이 나타나는 것은 1970년대 들어서다. 그는 늦어도 1973년에는 문정창을 만났으며, 1975년부터는 함께 행동했다. 또한 배달문화연구원을 운영하면서 유사역사가들과 정기 모임도 가졌다. 백제의 중국 동남부 점거, 낙랑군이 한반도에 없었다는 등의 주장에 학계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문교부를 상대로 '국정 국사 교과서의 국정 교재 사용금지 및 정사 편찬 특별기구 설치 등의 조치 시행 요구에 대한 불허 처분 취소청구의 소'를 제기했다. 이후 그는 1975년 10월 8일 '국사찾기협의회'를 결성하고 국사찾기운동을 시작한다. 당시 역사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회고할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여기에 참여한 인사 중 한 명인 "월간 『자유』의 박창암은 퇴역 군인이다. 그는 만주군 출신으로 간도특설대에서 중국 공산군인 팔로군 진압에 활약했던 인물이다. 뒤에 5·16 쿠데타에 참여하여 혁명검찰부장으로 서슬 퍼렇게 활동했다."(117-8)


"박정희의 사상적 지향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1968년 12월 5일의 '국민교육헌장' 제정이었다. 안호상은 초반에는 구정치인으로 박정희 정권의 홀대를 받았지만, 1968년에는 민족주의를 표면에 내세운 박정희 정권과 협력하여 국민교육헌장 선포에 관여했다. 국민교육헌장 제정 이후 박정희는 민족에 대한 열등감보다 민족의 긍정적 측면을 바라보는 경향이 강해진다. 이런 변화의 흐름 중 하나가 1970년대에 일어난 이순신 영웅화 작업 등 외침에 저항한 '민족사 복원' 작업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특히 '화랑도'가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화랑을 부각한 사람은 이선근으로 알려져 있다. 이선근은 제4대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역사학자이다. 그는 안호상과도 친했으며 안호상이 일민주의를 내세웠을 때 '일민'이라는 한자보다 우리말 '한겨레'를 쓰라고 권했을 정도였다. 이선근은 우익 단체인 '대동청년단'의 부단장이기도 했다."(136-7)


"식민사학 프레임의 등장에는 그 전까지 검인정이었던 한국사 교과서가 1974년에 국정교과서가 되었다는 사실이 배경으로 존재한다. 전 국민에게 동일한 역사관을 주입할 수 있는 통로가 된 국정교과서 체제는 유사역사가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전달하기에 최적의 체제였다." "유신이 실시된 1972년에 국사교육 강화 방안이 등장했고, 이 방안에서 민족 주체성 확립이 과제로 제시되었다. 1973년부터 국정교과서 발행을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그 표면적인 목표 중 하나가 식민사관의 극복이었다."(119) "안호상이 주창했던 일민주의도 한백성주의로 이름을 바꾼 채 계속 유지되었다. 당연히 한백성주의에서도 안호상은 핏줄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그는 여러 종족이 섞인 나라는 혼혈이기 때문에 하나의 핏줄로 변할수록 더 나은 나라가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한다. 이승만 때 하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을 되풀이한 셈이다."(121)


'국사찾기협의회'의 주요 회원이자 『환단고기』의 번역서 『한단고기』를 내놓아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임승국은 국가보안법으로 역사를 재단하자고 말하면서 전두환에게 꼬리를 쳤다. "대통령 각하의 의지 하나로 결정될 수 있는 국사 광복". 공권력으로 밀어붙이면 역사의 진리가 입증된다는 논리다. "임승국은 민족주의를 반공과 동일한 개념으로 보았다.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도 국가안보(반공)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역사를 국가체제철학이라고 주장한다."(130) "그는 한국사를 다섯 개의 조국으로 구분하는데, 제1조국은 환인의 나라인 환국, 제2조국은 신시개천의 환웅의 나라, 제3조국은 단군왕검의 고조선, 제4조국은 부여→삼국→발해로 이어지며, 제5조국은 제5공화국으로 이어진다. 거기에 조선은 없다." "그가 조선을 덮어버리자고 하는 것은 조선의 역사를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 그는 수치스러운 역사는 숨겨야 한다고 주장한다."(132-3)


"『환단고기』는 그 첫마디부터 "우리 환국의 건국이 가장 오래되었다(吾桓建國最古)"라고 시작된다. 처음과 오래됨에 집착하는 모습이다. 또한 「삼성기전 하편」에서는 첫마디에 "인류의 조상은 나반이라 한다(人類之祖曰那般)"라고 적고, 이후 중국과의 대결에서 우리가 승리했다는 내용을 적어 중국에 대한 뿌리 깊은 열등감을 해소하고자 한다. 이 열등감 때문에 핏줄의 문제가 묘하게 꼬이고 말았다. 중국의 고대 신화·전설의 인물 대부분을 동이족, 즉 한민족의 일원으로 설정하다보니 중국사를 한국사로 할 수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조차 불분명해진 것이다." "『환단고기』 「태백일사」는 고려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역사를 기술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조선에 대한 멸시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의 역사에서도 금나라를 사대한 사실이나 몽고의 침략으로 결국 항복한 사실은 언급하지 않고 있어서, 고려사를 모르는 상태라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의 기술을 하고 있다."(172-3)


"『환단고기』 안에는 근대 이후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들이 나타난다. 위작이라는 증거 중 하나다. 이에 대한 유사역사학 측의 이른바 '반론'은 크게 두 가지 방향이었다. ① 근대에 사용한 용어가 아니다. ② 가필이 있다고 해서 위서는 아니다. ①의 반론은 의미 없는 우기기일 뿐이다. ②의 반론은 사료비판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환단고기』의 문제는 근대에 사용된 단어가 들어 있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환단고기』 「삼성기」의 지은이라고 주장된 안함로(安含老)와 원동중(元董仲)은 안함(安含), 노원(老元), 동중(董仲)을 잘못 읽은 것이다. 「삼성기」는 원래 『세조실록』에 나오는 책 이름이다." "조선시대에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황해도 해주목 '고적' 조에 "수양산성을 안함, 원로, 동중 세 사람이 쌓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노원(老元)의 이름이 뒤집혀 원로(元老)가 되었는데, 한자는 동일하다. 이처럼 다른 책을 통해서도 『환단고기』가 위조되었다는 사실이 증명된다."(181-2)


"이유립은 기자조선을 사마천이 만들어냈다고 주장하면서 기자를 극력 부인한다. 그가 이렇게 말한 데는 물론 이유가 있다. 『삼국유사』를 보면 단군의 고조선이 있고 기자가 와서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위만이 기자의 후예 준왕을 몰아내고 조선을 차지했다. 단군은 한민족의 시조이지만 기자나 위만은 '중국인'이다. 그가 보기에 중국인이 감히 한민족의 나라를 차지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피의 순수함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이유립뿐만 아니라 유사역사가들의 공통된 의식이다. 국사찾기협의회의 일원인 임승국은 『한단고기』에서 "우리는 '하늘→하느→한'의 음운 법칙을 갖는 민족으로 '하늘님→하느님→한님'을 조상으로 모시는 민족신앙을 갖는 민족이다. 하느님의 피를 직접 유전으로 받아 곧 하느님으로 태어나는 백성이라는 천민신앙(天民信仰)은 온 세상에 자랑하고 싶은 우리의 믿음이다"라고 말했다. 순혈이 중요한 유사역사가의 입장에서 기자와 위만은 용납할 수 없는 존재였다."(187-8)


# 기자조선의 빈자리를 채워넣은 한국사 : 『환단고기』


"『환단고기』 「삼성기」 상편에는 "한 신이 사백력(斯白力) 하늘에 있어 홀로 신이 되어 (···) 어느 날 동녀동남 800명을 흑수, 백산의 땅으로 내려보냈다"는 구절이 있다. 유사역사가들은 '사백력'이 시베리아라고 주장한다. '시베리아' 자체가 근대에 생긴 지명인데, 마치 고대에 비슷한 발음으로 불렸을 것처럼 만들어진 단어가 '사백력'이다. "동녀동남 800명을 흑수, 백산의 땅으로 내려보냈다"는데, 이 땅은 만주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흑수'는 흑룡강 '백산'은 백두산이라는 것이다. 즉, 이유립이 「삼성기」 상편에서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환인이 시베리아 땅에서 만주로 와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티베트고원에서 산동반도까지 장악한) 배달국은 환국 다음에 환웅이 세운 나라 이름이다." "이유립은 생산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제국이 어떻게 성립 가능한지 생각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저 땅의 절반 이상이 농사도, 심지어 유목도 불가능한 동토의 땅이라는 사실도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으리라."(213-5)


서거정이 편찬한 『동국통감』을 보면 "요임금 원년 갑진년설에 따라 고조선의 건국 연대는 요임금 25년 무진년으로 결정되었는데, 바로 이 해가 기원전 2333년이다. 이렇게 만든 이유 중 하나는 명나라 건국과 조선 건국의 연도 차이가 25년이 나기 때문이다. 그 연도 차이에 맞춰 요와 단군의 간격도 벌려놓았던 것이다. 만일 요임금-고조선 동시 건국설을 따른다면 고조선의 건국년은 기원전 2357년이 된다. 2018년도 단기 4351년이 아니라 4375년이 될 것이다. 한편 『삼국유사』에 언급된 『고기』에 근거해 요임금 50년 건국설을 따른다면 기원전 2308년이 된다." "『환단고기』와 같은 위서들은 (『동국통감』에서 확정된)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것으로 역사를 꾸며놓았다. 워낙 오랫동안 알아온 연대였기 때문에 고칠 생각을 못한 것이다. 『환단고기』 등이 실제로 과거의 책이 아니라는 간단한 증거라 할 수 있다."(254-5)


"이른바 '영토 순결주의'라는 게 있다. 우리 영토에는 일체 다른 민족의 '더러운' 손길이 닿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식이 고대사에 투영되면 낙랑군이라는 '다른 민족의 더러운 손길'이 문제가 되고 만다. 그러나 유사역사학에서는 반대로 말한다. 사대주의와 식민사관 때문에 우리 역사를 축소시켜온 것이 한국 역사학계이고, 그 대표적인 예가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라는 주장이라는 것이다."(281) 문명은 흔적을 남긴다. "요서의 어디가 낙랑군이었다고 말하는데, 수백 년을 유지한 그곳에는 아무런 유적·유물이 없다. 그렇지만 그곳이 낙랑군이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그들이 '식민사학의 수괴'라고 치를 떠는 이병도의 말을 인용해서 고고학보다 문헌을 중시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이는 이병도 시절의 낡은 이야기일 뿐이다. 고고학의 눈부신 성과에 대항할 방법이 없자 꺼내든 궁여지책에 불과하다. 평양에서는 엄청난 양의 낙랑군 유물과 유적이 나왔다."(283)


"근대에 와서 광개토왕비를 발견한 사람이 일본의 밀정 포병 대위 사코 가게아키(사코 가게노부)이기 때문에 비문 위조설도 광범위하게 퍼졌다." "광개토왕비문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구절은 신묘년(391) 조의 기사로, 위조된 것이라는 주장도 이 기사 때문에 나왔다. 이 기사는 왜가 신라와 백제를 공격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비문의 내용을 잘 살필 필요가 있다. 광개토대왕이 병신년(396)부터 기해년(399)까지 백제를 토벌하고, 경자년(400)에는 신라를 도와 임나가야를 정벌했으며, 갑진년(404)에는 다시 백제와 손을 잡은 왜를 격멸했다는 내용이 신묘년 조 다음에 적혀 있다. 왜가 신라와 백제를 공격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사실이라 해도 비문이 결국 이야기하는 바는 왜(일본)의 대패이다. 광개토왕비는 왜군의 패배, 그것도 대패가 기록된 비석이다. 오늘날 한·중·일 학계는 모두 신묘년 기사가 고구려의 허풍이 들어갔다고 보고 있다. 상대가 막강해야 쳐부순 맛이 난다는 거다."(342-4)


"일본 역사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광개토왕비를 일본으로 가져갈 생각을 했다. 이 무렵 일본은 러일전쟁을 치르던 중이었다." "광개토왕비를 일본에 가져가려 한 이유는 그 비에 적힌 패배를 보고 일본 국민으로 하여금 분발하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시라토리는 패배를 직시하여 분발하자고 했지만, 일본의 국수주의자들은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남연서(南淵書)』라는 위서가 등장한다. 견수사로 중국 수나라를 다녀오던 일본 사신 미나부치노 쇼안이 귀국하다가 광개토왕비를 보고 그 전문을 적어 온 책이 『남연서』라는 것이다. 『남연서』에 따르면 왜는 고구려에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결국 패배했다는 열등감이 위서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1943년 조선총독부는 각도 경찰부장에게 항일 기록이 새겨진 고비들을 폭파하도록 지시했다. 이 명령은 실제로 행해졌다. 남원의 황산대첩비도 지금은 복원해놓았지만 이때 부서졌다."(344-6)


1994년 「삼국시대 천문현상 기록의 독자관측사실 검증」이라는 논문에서 "박창범은 초기 신라가 양자강 중류 지대에 있었으며 백제는 북경 일대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같은 말을 하는 유사역사학자들의 주장이 근거가 너무 박약한 터라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는 참에 "삼국이 중국 땅에 있었다는 "과학적인 증거"가 주어졌으니 환호할 만도 했다." "박창범이 계산한 백제와 후한의 일식 관측 최적 위치를 보면 동일한 지역을 최적 관측지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박창범은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에 대해 단 한마디도 설명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책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에서는 후한의 최적 관측지 지도를 빼버렸다." "박창범 등의 주장은 기본적인 오류를 가지고 있다. 일식은 범위가 아주 넓어서 관측할 수 있는 영역도 매우 크다. 이 영역이 겹치는 곳의 중심이 일식을 관측한 곳이라고 볼 수 없다. 특히 고대사의 경우 관측 기록, 즉 표본이 너무 적기 때문에 유의미한 결과를 낼 수 없다."(347-9)


유사역사학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만주원류고』는 건륭제가 제작을 지시하고 검토한 책인데, "'부족' 조에서 부여, 읍루, 삼한, 물길, 백제, 신라, 말갈, 발해, 완안, 건주 순으로 숙신과 관련된 자료들을 열거한다. 책 제목 그대로 만주족의 원류를 파악하겠다고 쓴 책인데 여기에 부여, 삼한, 발해와 같은 한민족 국가들을 다 집어넣었다. 즉, 부여, 삼한, 발해를 여진족의 변방 부족으로 구성한 책이다. 언어와 음성적 유사성을 근거로 만주의 길림 지방이 신라의 계림이라고 말하는 등, 학문적 신빙성과는 거리가 먼 책이다. 『만주원류고』 '강역' 조에서도 부여, 삼한, 옥저, 백제, 신라, 발해까지 전부 만주에서 활동한 것으로 만들어 청나라의 전사(前史)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만주의 지배자였던 고구려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고구려를 빼놓은 왜곡된 역사책을 만들었는가? 만주 지역의 역사적 주인공은 여진족이어야 하기 때문이었다."(361-2)


# 유사역사학자들이 우리나라 상고시대 지명들을 대부분 요동에 비정하고 있는 이유


"유사역사학 추종자들은 흔히 "일본과 중국은 없는 역사도 만드는데 우리는 있는 역사도 챙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있는 역사'라 주장하는 것이 세계 학계에서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 국수주의에 물든 유사역사학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몇몇 외국 학자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반박하지만 그 절반은 역사학자가 아니고 나머지는 유사역사학 추종자들의 오해와 오독의 결과에 불과하다. 부사년처럼 동북공정의 전초를 만든 학자의 이론을 가져와 단장취의하는 파렴치한 짓들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유사역사학은 역사학 자체를 오도하면서 역사 연구의 목적이 자국의 영광을 되살리는 것이라 현혹하고, 현재 시점에서 수치스러운 역사는 은폐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유도한다. 또한 한민족이 가장 뛰어난 민족이라는 생각을 퍼뜨려 다른 나라 사람들을 깔보고 업신여기게 만든다. 이런 역사관을 가졌던 이들이 나치와 일본제국주의였다."(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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