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 서남동양학술총서 32
하영선 외 지음 / 창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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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근대한국의 문명 개념 도입사


"서양의 civilization 개념 자체는 막부부터 메이지 초기에는 예의와 교제로 이해되다가 점차 번역어로서 문명과 문화가 함께 쓰이는 짧은 시기를 거쳐 후쿠자와 유키치를 비롯해서 니시 아마네, 미츠쿠리 슈헤이, 모리 아리노리 등에 의해 문명개화 또는 문명으로서 자리를 잡게 된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미개/반개, 개화문명/문명개화의 네 부류로 진보 과정을 설명한다. 그는 1875년에 쓴 본격적 일본 문명론의 전개라고 할 수 있는 『문명론지개략』에서 세계의 문명을 논하면서 유럽 국가들과 미국을 최상의 문명국, 터키, 중국, 일본 등의 아시아 국가들을 반개화국, 아프리카와 호주를 야만국으로 분류한 다음 이러한 분류의 상대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반개화국가인 일본이 문명국이 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시간과 장소를 고려한다면 일차로 서양 문명을 목표로 삼되 우선 지덕을 개발하고, 다음으로 정법을 개혁하고, 마지막으로 의식주나 기계를 추구해서 일본 독립을 획득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57-8)


"유길준은 『세계대세론』에서 이미 전통과 근대의 균형을 조심스럽게 언급하고 있으며, 『서유견문』에서는 개화를 실상개화(實狀開化)와 허명개화(虛名開化)로 나누어 설명한다." "유길준은 실상개화를 달성하려면 개화의 노예에게서 벗어나서 개화의 빈객(賓客)을 거쳐 개화의 주인이 될 것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서 유길준은 개화의 죄인, 개화의 원수 그리고 개화의 병신이라는 강한 표현을 사용하여 당시 조선의 현실을 격렬히 비판한다. 전통 없는 근대를 추구하는 개화의 죄인과, 근대 없는 전통을 추구하는 개화의 원수, 전통의 긍정적 측면을 버리고 근대의 부정적 측면만 받아들인 개화의 병신만 존재하는 19세기 후반 조선의 현실 속에서 유길준이 당면하고 있었던 최대 과제는 단순한 서양문명의 소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통과 근대의 갈등이 아닌 조화를, 더 나아가서 복합화를 당시의 어려운 국내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44-6)


"후쿠자와 유키치가 지덕(智德)의 개화에 이어 정법(政法)의 개화를 논의하는 것처럼 유길준은 행실과 학술의 개화에 이어 정치와 법률의 개화를 강조한다. 정치의 개화를 위해서는 첫째,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청의 급격한 영향력의 강화 속에서 당시 조선이 놓이게 된 양절체체─전통과 근대가 공존하는 국제질서─라는 이중구조의 어려움을 풀어 나가려고 유길준은 우선 구미 근대 국제질서의 명분체계로 등장한 『만국공법』의 논리를 빌려 국가는 마땅히 현존과 자위하는 권리, 독립하는 권리, 산업(토지)의 권리, 입법하는 권리, 교섭과 파사(派使)와 통상의 권리, 강화(講和)와 결약(結約)하는 권리, 중립하는 권리를 보장받아야 함을 강조한다." "유길준은 이러한 양절체제의 현실 속에서 청과의 관계를 속국이 아닌, 증공국(贈貢國)과 수공국(受貢國)의 관계로 만들어 나가면서 동시에 청 이외의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를 균세와 『만국공법』에 기반을 둔 근대 국제관계로 만들어 나가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50-3)


저항의 국제정치 대신에 활용의 국제정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본형 문명화 모델에 자극을 받은 개화파 유길준은 조선 최초의 일본과 미국 유학생으로서 조선이 당면하는 국내외 정치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전통과 근대를 복합화한 조선형 문명화 모델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말미암아 청국의 영향력이 비정상적으로 커지지만 개화세력은 급격히 약화하였기 때문에, 그는 이러한 노력을 행동이 아닌 『서유견문』이라는 글로 남길 수밖에 없었다. 유길준은 갑오개혁(1894)을 통해 비로소 조선형 문명화의 실천기회를 얻게 되었으나, 첫째, 조선이 겪고 있었던 전통과 근대의 갈등, 둘째, 청일전쟁 이후 청의 영향력 대신 급격하게 커지는 일본의 영향력을 현실적으로 견제하기 어려운 국제적 여건, 셋째, 국내 역량의 효율적 동원 실패, 넷째, 조선형 문명화 모델의 실천전략적 취약성 등으로 19세기 조선의 문명화 모색은 좌절된다."(64-5)


2장 서구 권력의 도입


"근대 서구 권력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근대 서구문명에서 권력이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수단으로든지 어떤 행동을 효과적으로 강요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당연한 명제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동양 전통사상에서는 어떤 사람, 예를 들어 왕이나 관리가 자신의 인격을 연마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하는 것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아왔다. 둘째, 권력에 사용되는 수단은 주로 폭력과 돈, 금력 등 외부에서 작용하는 요인이며, 이들의 사용은 법(法)에 합당하는 한 정당하다. 이러한 수단의 양(量)과 방법 그리고 기술 자체에는 제한이 없으며 이를 확대하고 정교화하는 행위는 전문기술의 영역이다. 셋째, 국가가 다른 국가에 대하여 이를 행사하는 경우 거의 모든 경우에 국제 전쟁법에 직접 위배되지 않는 한 정당하다. 넷째, 권력의 행사는 주로 관료주의적 조직에 의한다. 이러한 조직은 권력의 도구이자 주체이며, 조직은 이같은 권력관계의 총체로서의 제도라 할 수 있다."(68)


"중국 고대부터 법가 전통에서는 영토를 넓히고 군대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은 중심 원리였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송(宋)나라 때부터 주자학의 강한 영향으로 '부국강병' 식의 사상은 이른바 '덕치(德治)' 뒤로 밀려나고 '패도(覇道)'로 지탄받게 되었다. 군사력과 경제력의 문제는 동북아시아에서도 분명히 살아있는 현실이기는 했지만 계속 죄악시되고 잊히게 되었고, 현실적으로 군사력을 포함한 모든 폭력적인 문화는 지속적으로 축소되는 운명을 겪게 되었다." "따라서 '부국강병'이 19세기 중반에 등장한 것은 스스로 자성(自省)에서뿐만 아니라 서구 권력 관념의 도입으로 이해할 수 있다. 되돌아보면 서구의 권력 또는 국가권력(national power) 관념은 '부국강병'이라는 한자 조어(造語)로 포장되었다. 결국 서구의 권력 개념은 당시에 그대로 도입된 것이 아니라 전통적 사상언어로 번역되어 전통적 담론(談論)의 틀에 포섭되어 변형·도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72)


"국가권력의 기본 작동원리로서, 그리고 제도로서의 근대 법(法) 개념의 도입은 1894년 청일전쟁에 이은 갑오경장(甲午更張) 때부터였다. 전통적 유교국가에서 법의 의미와 서구식 근대국가에서 법의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서구식 근대국가는 특히 19세기 이후의 민족국가에서 법적 존재였다. 국가는 보편적 법에 근거하여 권력과 폭력을 행사하며, 법에 근거하는 한 정당한 것이었다. 또한 법은 늘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 절차와 주체는 법이 정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그 언어는 명쾌하고 합리적인 언어로 구성되어 추호의 혼란도 없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유교국가에서 법의 위치는 애매한 것이었다. 국가가 법에 따라 다스려진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며 최악의 상황에 한하는 것이었다. 또한 법이란 조선의 경우 명나라의 법전을 사용한다는 것에 별 수치스러움이 없었고, 그것은 동양의 전통에는 입법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86)


"1898년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이 국가권력의 탄압에 의해 소멸하자 20세기 초에 들어와서는 새로운 권력이 시도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1906년 4월에 출범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등이 중심이 된 이른바 '애국계몽운동'이었다. 이 운동 또한 대한자강회 외에도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이 가세한 전국적인 흐름이었다. 대한자강회의 설립 소이(所以)는 바로 '자강(自强)', 즉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힘'이 운동의 의미와 목적 그 자체였고, '실력(實力)'은 바로 그들의 모든 언어의 '키워드'였다. 이렇게 보면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이 갑신정변의 다른 길이었다면 애국계몽운동은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의 실패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제 '힘', 현실적 힘─정치권력의 탄압을 극복할 수 있는 스스로의 힘─의 중요성을 발견한 것이다. 실력이라는 의미는 오랜 기간을 거쳐 다져지는, 언제 어디서, 어떤 조건하에서도 변하지 않는 내면적인 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96-7)


3장 근대한국의 주권 개념


"『만국공법』이 번역되면서 조선에 도입된 주권 개념은 새로운 대외관계의 규범과 규칙의 전파를 뜻하였고, 이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들과 연결되었다. 일본은 1876년의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약) 제1조에 〈조선국자주지방(朝鮮國自主之邦) 보유여일본국평등지권(保有與日本國平等之權)〉이라고 표기하여 청으로부터의 자율성을 명시하였다. 이는 당시 기존의 '정교자주(政敎自主)' 원칙으로부터 종주권에 대한 강조로 대조선정책을 변화시키고 있던 청을 견제하고 자신의 세력확대를 용이하게 하려는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정부는 1877년 청에 대한 보고에서 〈소방(小邦)이 상국(上國)에 복사(服事)하는 것은 천하 공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병자조약에서 소방을 자주국(自主國)이라고 한 제1조는 일본이 마음대로 자서하여 강요한 것〉이라고 하면서 종속관계를 유지하려는 입장을 취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청국을 통해 서양과 일본을 견제하려 했던 조선의 고민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131)


"주권은 하나의 개념이라기보다는 근대정치를 표상하는 관념이자 당시의 문명표준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에 주권 개념의 도입은 곧 포괄적인 관념의 수용 문제였고, 이는 유교와 기독교, 그리고 전통적인 동아시아 정치질서와 근대적인 서구 정치질서 사이 선택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한 사회의 엘리트 계층이 갖게 되는 관념은 그를 통해 한 사회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공동체의 상이 제시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19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주권 관념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질서관의 수용은 그 대응에서 저항과 구성, 그리고 순응의 다양한 형태를 보여주게 된다. 서구를 야만으로 간주하고 무조건적인 척사의 태도를 보인 쪽과 자신의 정치적 이익만을 고려하여 외세에 편승하려 했던 세력을 제외한다면, 당시의 관료나 지식인들은 이전의 규범과 새로운 규범, 그리고 주어진 현실과 명분체제 사이에서 각기 다른 고민을 하였다."(137)


# 주권 개념을 둘러싼 주요 논지들

1. 김윤식(저항의 한계) : 조선이 중국의 속방─조공과 책봉 체제 속에 편입되었지만 내치(內治)에 자주권을 행사하는 나라─임을 명시하는 것이 자주권을 유지하면서 국가의 안보를 보장받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2. 유길준(구성의 좌절) : 강대국의 침략을 면하려고 본심에 없는 조공을 하는 증공국과 자주할 권리가 전혀 없는 속국을 구별하고, 증공국[조선]은 다른 나라들과 동등하게 조약을 맺을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하였다.

3. 윤치호(순응의 결과) : 근대적 주권 관념을 가장 충실하게 수용하였지만, 근대국가의 주체를 당시의 인민들이 아니라 미래의 ‘개화국민’으로 상정한 결과, 대세를 좇아 '선先문명화, 후後독립'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4장 근대한국의 부국강병 개념


"구한말 조선에서 부국강병의 개념이 긍정적 의미로 재해석되고 조선의 여러 국내 정치세력이 부국강병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방식들을 모색하게 된 것은 서구세력의 팽창에 직면하여 유교이념과 조공체제에 입각한 조선의 안전과 독립 확보방식이 뚜렷한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원군이 부국강병을 국가정책의 최우선순위에 두었다는 사실은 과거와 달리 부국강병 개념이 부정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긍정적인 의미로 재해석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대원군에 의해 시작된 구한말 부국강병책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서양세력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부국강병책은 포군의 대대적인 증설, 새로운 무기개발 등으로 이어졌다." "고종 친정기 부국강병의 개념은 더는 패도 혹은 잡술로서 배척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의미는 사라지고, 조선이 최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할 정책의 의미로서 재해석되고 있다."(157-8)


"위정척사파와 달리 김윤식과 어윤중 같은 개화파 관료들은 조선의 부국강병은 기존의 중화질서의 틀 내에서 달성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들의 입장은 유길준이 『서유견문』에서 주장하듯이 당시 조선이 처한 양절체제적 현실을 인정함으로써 중국에 의존하여 조선의 독립을 보장받음과 동시에 서구 국가들과 독자적으로 통상조약을 체결하여 부국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동도서기론자들의 부국강병책은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서 벗어나 일본과 연대하여 조선의 부국강병을 급격하게 달성하기 위해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중심의 급진개화파들의 부국강병 방식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김홍집은 자강은 단순히 부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유교적 도덕질서와 정치제도를 유지한 바탕 위에서 군비의 증강과 서구 선진기술의 도입을 통하여 서구열강의 위협에 대처하고 소국 조선의 안전과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168-9)


5장 근대한국의 세력균형 개념


"『만국공법』(1865)은 청국 동문관(同文館)에서 서양서 한역을 담당했던 윌리엄 마틴이 헨리 휘튼의 『국제법 요강』을 한역한 것인데, 마틴은 이 책에서 'balance of power'를 '균세(均勢)'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자연법론자였던 마틴은 『만국공법』에서 국제법의 자연법적 성격을 부각시켰다. 그는 구미의 『만국공법』이 소국의 자주독립을 보전한 사례들을 예시하면서 세력균형의 자연법적 공공성을 강조하고자 했다. 마틴은 '균세의 원리'를 대국이 세력을 '균평(均平)'하게 만들고 소국이 이에 의뢰하여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태평의 요술(太平之要術)'로 규정하였다. 이 규정은 휘튼의 원저에는 없던 것인데, 마틴이 세력균형의 자연법적 성격을 강조하고자 일부로 할주(割註)의 형태로 삽입한 것이었다. '균세' 개념의 탄생은 『만국공법』의 자연법적 국제법의 이미지와 밀접히 결부되어 있었던 것이다. '균세'는 『만국공법』의 법적 공공성을 실현하는 정치적 공공성을 나타내는 표상이었다."(178-9)


"번역어 '균세'의 사회적 확산과 개념화에 이바지한 텍스트는 황준헌의 『조선책략』이었다. 이 책자는 수신사 김홍집이 일본에서 가져온 것으로, 조선정부에 '친중(親中)·결일(結日)·연미(聯美)'의 외교정책과 '자강'정책을 권유한 논책이었다. '친중·결일·연미'의 균세론은 한국을 서양 국가에 개방하여 위협세력인 러시아와 부상세력인 일본을 견제함으로써 동북아에 세력균형 질서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중국의 조선 종주권을 재정립하려 했던 리홍장의 동북아정책에서 나왔다. '균세'는 '친중·결일·연미'를 정당화하는 논리로서 동원되었다. 『조선책략』은 필사본의 형태로 중앙뿐 아니라 지방 유생사회까지 유포되고 개화론자와 척사론자들 간에 개방개혁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이 논쟁을 통해 '균세' 개념은 개항반대자들(위정척사론자)까지도 그 정확한 의미를 포착할 정도로 널리 유포되었다. 즉, 『조선책략』은 (균세 개념의) 공론화 과정을 통해 '국제정치 개념으로서의 수용'을 유발하였던 것이다."(179-80)


"'균세'는 유교의 권력 관념에 부응하는 중국식 한자어였다. 'balance'의 번역어 '균(均)'은 '평형'의 뜻만이 아니라 토지의 공평한 분배를 통해 '안민(安民)'─경제적·정치적 안정, 곧 '태평'─을 모색하는 유교이념을 담은 '균분(均分)' '균평(均平)'에 쓰이는 '균'의 의미를 연상했을 것이다." "(서구의) 권력지향적 '세력균형' 개념을 규범적 '균세'로 치환하여 규범원리로서 관념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유교이념의 영향뿐 아니라 조선의 취약한 국제정치적 위상과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였다. 관념은 자기 존재의 현실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세력균형 개념에 대한 규범적 관념(해석)은 주권이 취약한 상태에서 세력균형의 주체가 되기 어렵고, 객체가 되기 쉽다는 소국의 현실과 자의식에서 비롯한다. 소국의식이 강한 장소(topos)에서는 규범은 권력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유력한 수단이 된다. 여기서 권력의 취약성 때문에 규범에 의탁하는 국제정치 관념이 '균세'를 규범적인 개념으로 상상하게 하는 착시현상이 나타난다."(185)


"근대 한국의 '합종연횡'에 관한 상상력은 세력균형 관념의 장소성을 드러낸다. 이 상상력은 일본과 중국의 경우와 달랐다. 유럽의 세력균형 체제를 일본 전국시대의 할거체제와 결부하여 생각했을 때 막부 무사들은 개체적 전투력과 생존의지에 충만한 무사들의 만국투쟁적 질서를 상상했다. 그리고 '전국'적 만국투쟁 이미지는 부국강병을 통해 주권을 확보하고 서양국가의 위협에 대항하려는 개체적·주체적 생존의식을 낳았다. 청국의 경우는 서양국가(미국)를 끌어들여 러·일을 견제하는 동북아 세력균형, 곧 균세지국(均勢之局)을 구상하는데, '이이제이(以夷制夷 혹은 '이적제적以敵制敵'이나 '원교근공遠交近攻')'를 동원하였다. '이이제이' 관념에는 화이질서관의 대국 관념이 남아 있었다. 일본과 중국의 경우와 달리 1870~80년대 소국 관념과 결부된 한국 지식인들의 '합종연횡' 관념은 대국과의 동맹이나 외교정책의 신중함(prudence)을 추구하는 전략 관념의 표현이었다."(189)


"갑신정변 실패 이후 갑오개혁과 광무개혁 등 '자주'와 '자강'을 위한 개혁이 시도되었지만, 청국과 일본, 러시아와 일본의 권력투쟁이 동북아 국제관계를 규정하고 열강의 권력투쟁이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국제폭력으로 귀결되는 콘텍스트에서 한국은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세력균형이 열강의 역학관계를 의미하고 조선이 '자주'와 '자강'의 부족으로 세력균형의 객체가 되었을 때 '균세'가 국제행동의 정책원리로서 내면화될 가능성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중립'과 '정립'의 세력균형론이 나타났다. 중립 구상은 세력균형의 주체적 실천이 거의 불가능한 소국의 장소적 특질에서 나왔다. '중립'은 대국이 세력균형 정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갖지만, 부국강병에 기반을 둔 주체적 자주독립이 어려운 상태에서 강구될 수 있는 발상이었다." "조선의 중립은 주권국가 체제와 조공체제가 공존이나 중첩되는 콘텍스트에서 모색된, 그리고 유럽의 경험에서 유추된 조선의 생존전략이었다."(195-6)


"'중립'은 주변 열강들이 만들어내는 세력균형의 부산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중립론은 일본의 힘의 우위(지역패권)가 동북아 세력균형을 대체했을 때 파탄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보호조약 체결 이후 문명개화론자들은 대국 의존론을 생존논리로서 제시하였다. 청국 우위의 콘텍스트에서 친청 중립을 구상했던 유길준은 이 콘텍스트에 들어서면 일본 의존적인 평화론을 내세운다. 일본은 한국의 자강과 국권 회복을 통해 '동양의 영원평화'를 보전하기를 원하며, 한국은 '문명'과 '부강'을 통한 '광복'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일본과 '지성(至誠)의 평화'를 보전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평화'는 일본의 대한정책에 대한 우호적인 협조 혹은 '대국' 일본에 대한 묵종을 뜻했다. '균세'는 이러한 '평화'를 저해하는 요소로 간주한다. 유길준은 '균세'를 믿고 일본에 '경거망동'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하였다. 다른 외세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응하려는 세력균형 정책이 부정되었던 것이다."(197-8)


"세력균형의 내면화 또는 토착화는 열강의 세력균형을 중시한 중립론과 달리 동북아공간 내부의 세력균형을 중시하는 또다른 구상에서 전개되었다. '정립(鼎立)' 혹은 '정족(鼎足)'의 발상이 그것이다. '정립' '정족' 개념은 국제체제의 관점에서 동북아공간의 세력균형을 포착하고 조선을 세력균형의 주체로 상정하는 데 사용되었다. '정립' '정족' 개념은 1890년대 중반 이래 1920년대에 걸쳐 보였는데, 일본이 청일전쟁 이후 세력을 팽창하고 제국을 형성한 시기에 해당한다. '정립' '정족'은 일본이 지역패권국가로 성장해가는 콘텍스트에서 일본에 대응하는 논리로서 제시되었다. 이 개념은 개화지식인들도 보였지만, 특히 유학자들(위정척사파, 개신 유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과거 '균세'와 균세적 동맹을 거부했던 위정척사론자들은 일본의 세력팽창에 직면하자 만국공법을 일본을 비판하기 위한 근거로 받아들였고 '정립'의 세력균형론을 조선의 생존논리로서 적극적으로 내세웠다."(198-9)


# 정립(鼎立) : 한·중·일 삼국이 안정 자립의 세를 보전함 / 정족(鼎足) : 한·중·일 삼국의 지리적 특성, 인종적 동질성, 문화적 유사성을 바탕으로 협심평화를 보전함


"'정립'이 실현되기 어려웠을 때 '만국공법'은 '동양평화'를 파괴하는 일본의 이기적 대외행동을 비판하고 일본에 '신의'와 공공성을 요구하는 규범적 준거로서 부활한다. 1900년대 후반 현실지향적인 국제정치관을 가졌던 문명개화론자들은 일본이 지역패권을 장악해가는 동북아 현실을 인정하고 이러한 현실에 추종하는 자세를 보였다. 반면 전통론자들은 세력균형을 동북아공간에 내면화한 '정립'의 논리를 통해 일본의 폭력과 패권에 대항하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전하려는 강한 의식을 가졌다. 그리고 여기서 만국공법이 일본의 대외행동을 비판하고 세계만국에 공공성을 주창하는 근거로서 제시되었다. '만국공법'의 규범성과 공공성이 전통론자들에 의해 부활했던 것이다. 지난날 '균세'를 부정했던 전통론자(위정척사론자)들이 '정립'의 세력균형 관념을 강하게 주창하게 된 반면, 과거 '사대'를 부정했던 문명개화론자들이 신흥대국 일본과의 의존관계를 중시하게 된 것은 역설적인 현상이다."(203)


6장 근대한국의 평화 개념 도입사


"두 차례의 아편전쟁을 겪으면서 청은 전통적으로 사대질서를 관리해온 예부(禮部)와 별도로 구미의 근대 외교를 담당하는 총리아문(總理衛門)을 설치해서 이중 외교를 시작해야 했다." "이는 청이 구주제국의 행동양식이 단순히 금수와 같이 무력행사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만국공법이라 할 수 있는 법규범에 따르는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청은 이러한 규범을 바로 문명의 표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중국의 오랜 역사 중에 춘추전국시대에 유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는 부회론(附會論)을 전개했다." "『만국공법』은 원용론(援用論)과 부회론의 틀 속에서 중국에 서양 국제법을 구체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점차 빈번해지는 구미제국과의 관계에서 중국은 서양제국들의 요구를 전통적 천하질서의 논리로서 거부하는 것보다는 상대방의 사고와 행동의 규범논리를 원용하여 상대방을 물리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발휘했다."(214-6)


"근대한국의 평화 개념 도입 역시 청일전쟁과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우선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하고 일본이 승리하자, 중국은 1840년의 아편전쟁 이후 반세기 만에 구미의 근대 국제질서를 새로운 문명표준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국내에서도 청의 종주권이 명실상부하게 소멸하고 일본의 영향력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위험 속에서 위정척사론자들의 인간과 금수의 이분법에 기반을 둔 만국공법 거부론 대신에 동도서기론자들의 만국공법 원용론을 채택하게 된다. 양절체제론은 더는 설자리를 잃게 되고 현실에 뿌리는 내리지 못하고 논의 차원에 머물렀던 자강균세의 평화론은 국내외의 현실과 직접 부딪치고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발해지기 시작하고 또 현실적인 실천 가능성을 꿈꾸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1896년 4월부터 1899년 12월까지 제기된 『독립신문』의 자강균세 평화론을 크게 재구성하면 독립, 문명개화, 인민교육의 3대 과제로 요약할 수 있다."(234-5)


"일본의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는 1894년 10월 20일 임시회의에서 개전에 이른 과정을 설명하고, 청일전쟁이 '동양평화'를 유지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공격적 민족주의의 전쟁적 평화관은 러일전쟁 이후 기독교 평화론을 대표하는 우치무라 간조를 포함한 광범위한 일본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20세기 초 조선의 사회진화론에 기반을 둔 평화관은 사회진화론의 양면성, 즉 경쟁진보와 약육강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우선 조선이 20세기에 생존하려면 새로운 지역문명표준으로 등장한 일본을 받아들여서 진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잘 요약한 최석하는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세계열강의 하나가 되었고, 천하대세와 세계치란을 논의하려면 일본을 제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일본 문명을 연구하는 것은 세계 각 나라 사람들의 시대적 요구라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시각에서는 일본의 '동양평화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240-1)


"신채호는 동양주의의 문제를 한마디로 시대착오자들로 평가한다. 20세기는 치열한 열국경쟁시대인데 국가주의를 추구하지 않고 동양주의를 잘못 꿈꾸는 것은 미래 다른 별나라 세계의 경제를 걱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국가가 주인이 되고 동양이 손님이 되어야지 동양이 주인이 되고 국가가 손님이 되면 나라는 망한다고 단언한다."(242) "열국경쟁과 약육강식의 무참한 희생물이 된 한국이 국권을 회복하여 다시 무대에 서는 길을 찾는 과정에서 국가주의와 동양주의는 전혀 상반된 길을 걸었다. 동양주의론은 일본의 동양평화론을 방패삼아 우선 교육과 산업을 통해 새로운 문명표준의 획득을 위해 노력하면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으리라는 소박한 낙관론을 전개했다. 반면에 국가주의론은 구미의 약육강식적 제국주의 위험에서 벗어나려고 뒤늦게 치열한 제국주의 경쟁에 뛰어든 일본의 도움을 기대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비관론이었다. 역사적 현실의 결과는 동양주의론의 패배였다."(245)


7장 근대한국의 국민/인종/민족 개념


"국민은 서양과의 만남 이전에도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나름의 의미로 존재하던 개념이었다. 『주례(周禮)』 『좌전(左傳)』 『사기(史記)』 등 동아시아 문명권의 대표적인 고전에서 이미 국민 개념이 쓰였다. 이때의 국민은 국(國)─선진(先秦)시대 봉건제후의 영지, 중국적 세계질서의 개념적 기초가 잡힌 한대(漢代) 이후에는 중국적 세계질서의 일원인 조공국 등─에 속한 민(民), 즉 백성이었다. 이러한 용례는 조선시대의 문헌에도 답습된다. 『승정원일기』에 보이는 1660년의 한 상소에는 〈두루 넓은 땅의 백성은 또한 국민이 아님이 없습니다〉라고 하여 조공국인 조선의 백성을 국민으로 지칭한다. 또한 이 국민 개념은 동아시아 문명권의 자산을 공유하고 있던 중국과의 담화에서도 자연스럽게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1729년의 『비변사등록』의 기록을 보면 청의 사신과의 대화에서 조선민을 지칭할 때 번속(藩屬)의 백성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국민이 쓰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251-2)


"청일전쟁은 한반도의 인간집단을 지칭하는 개념에 관한 논의를 전혀 다른 문맥 속에 위치시킨 역사적 사건이었다. 우선 청의 패배로 조선에서 조공국의 백성이라는 국민 개념은 현실적인 의미를 잃고 논의의 장에서 사라지게 된다. 둘째, 고종을 중심으로 광무개혁이 진행되면서 (군君과 평등한 민民으로 구성된) 민국 정치이념의 국민 개념이 긴 잠복기에서 벗어나 재등장하였다. 조공국 백성으로서의 국민 개념이 사라진 상황에서 민국 정치이념의 국민 개념은 전통적인 국민의 기표를 손쉽게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셋째, 서양 근대를 모델로 하는 국민 개념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서양 근대를 문명의 기준으로 하는 움직임이 급속히 고조됨에 따라 서양의 역사, 철학 그리고 사회과학 분야의 다양한 지식과 정보가 조선에 전파되었다. 이에 따라 일부 지식인들은 동아시아 문명권의 유산에서 과감히 탈피했고, 이들 중 일부는 서양 근대 국민을 nation의 번역어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256-7)


"조선의 지식인 글 중에서는 유길준이 저술한 『서유견문』이 인종을 소개한 초기의 저작에 속한다. 그는 '세계의 인종' 편에서 〈여러 학자들의 논의가 같지 않아 혹은 삼종이라 하며 혹은 사종이라 하며 혹은 육종이라 하며 혹은 십일종이라 하며 혹은 이십이종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맞지 않는 논의이다. 오직 불루면씨가 말하기를 오종이라 하니 그 말이 맞는 듯한 고로 이 책에서도 역시 채용한다. 그 오종은 황색인, 백색인, 흑색인, 회색인(혹은 종려색), 적색인(혹은 동색)이니〉라고 하여 지구상의 인종을 설명한다." "『서유견문』의 인종 개념은 세계에 대한 자연인류학(physical anthropology)적인 설명에 사용됨에 머물렀고 조선인을 규정하는 새로운 정치체의 구성원을 나타내는 개념으로는 쓰이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인종이 형질적인 구별을 나타내는 자연과학적 개념에서 정치적 의사를 함께하는 인간집단을 나타내는 정치적 개념으로 진화한 것은 청일전쟁 이후의 시기였다."(262)


"대한제국에서 인종 개념의 수용과 그에 따른 황인종으로서의 자기인식은 러시아와 일본 간의 대결, 즉 관점에 따라서는 백인종과 황인종의 대결이 현실감을 띠는 것과 더불어 강화되어갔다." "하지만 1905년의 시점에서도 인종 개념이 대한제국의 정체성을 둘러싼 경쟁에서 완전히 승리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국가 차원에서 국민 개념은 여전히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면서 지역 차원의 인종 개념과 병립하고 있었다. 이 시기 대한제국의 적지 않은 논자들은 대한제국의 국민이자 동아시아의 황인종이라는 두 차원의 정체성이 조화로운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백인종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황인종 일본의 승리는 황인종 대한제국의 이익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은 인종 개념의 확산을 정점에 도달하게 하였으나, 바로 그 전쟁을 통해 황인종의 일본이 황인종의 대한제국에 대해 제국주의적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인종[황인종]과 국민[대한제국민]의 조화는 여지없이 깨어졌다."(266)


"메이지 일본에서 만든 민족/민족주의 개념은 량치차오에 의해 청의 국제·국내정치적 맥락에서 재구성되는 과정을 거쳐 한층 그 위상이 높아졌다. 량치차오에게 제국주의 침탈에 대한 저항은 가장 핵심적인 정치적 과제였고, 민족/민족주의 개념은 이 과제의 해답으로 주목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량치차오의 민족 개념은 그가 일본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지식·정보의 전달자였다는 특징에 의해서 한반도의 민족 개념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275) "러일전쟁 이후 인종 개념이 제국주의 논리로 변하여 국민 개념과 인종 개념의 조화가 깨어짐에 따라 제국주의에 대항하려면 새로운 인간집단을 개념화할 필요가 생겼고 민족 개념은 바로 이러한 요청에 의해 수용되었다. 그리고 수용된 이후에는 대한제국의 현실과의 연관성 속에서 변화되어가며 대한제국의 구성원을 규정하는 중요한 정치적 개념으로 정착되어갔다. 이러한 민족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인종 개념의 대척점에 민족 개념과 국민 개념이 공존하는 상황이 나타났다."(278)


"경술국치와 더불어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일본제국의 신민으로 재규정되었다. 그 결과 그들의 행동은 당연히 대한제국이 아닌 제국일본이라는 국가와 연결되었다. 국민 개념은 여전히 제국의 신민을 나타내고 있었지만 그들이 속하는 제국은 바뀌고 말았다. 대한제국의 국민이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언어로 키워낸 국민 개념은 제국일본에 의해서 제국주의에 대한 복종의 언어로 변화되어버린 것이다." "이에 맞서 한편에서는 이전의 국민 개념, 즉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대한제국의 국민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자는 입장을 고수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국민 개념의 변화를 인정한 위에서 한반도에 존재하는 인간집단을 새롭게 규정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대한제국이 멸망하여 국민의 전제가 되는 국가가 사라진 상황에서 이전의 국민 개념을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논자 다수는 국민 개념과의 결별을 꾀했고, 이들이 주목한 것은 다름 아닌 민족 개념이었다."(286-7)


8장 근대한국의 민주주의 개념 : 『독립신문』을 중심으로


"구한말 서구 민주주의 개념의 소개에서 유길준의 『서유견문』의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유길준은 입헌민주주의를 '군민이 공치하는 정체'라고 하며 국중의 정령과 법률을 대중의 공론으로 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①인민이 천거권을 가지고 ②대신 관리들의 직무를 감찰하거나 정령과 법도에 대해 논의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런 민주주의는 군주와 백성이 공동으로 수호하며 국민이 〈진취하는 기상과 독립하는 정신〉으로 마음과 힘을 다하여 국가를 부강하게 하며 문명개화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유길준의 『서유견문』에서 독특한 것은 민주주의의 제도와 이념의 소개가 그의 부국강병론적 국가론 또는 국권론에 대한 관심과 맞물려 수용되었다는 점이다. '방국의 권리' 편이 '인민의 권리'보다 앞에 다루어지고, '정부의 종류'에서도 '군주가 전단하는 체제'인 절대군주제가 '군민이 공치하는 정체'인 입헌정체보다 앞서 소개되었다."(298-301)


"갑오개혁 이후(1890년대 후반)에 와서야 비로소 민주주의 개념의 체계적 전파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고, 그 초기적 수용이 대중적 기반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1890년대 후반 민주주의 관념의 수용자들은 지식 엘리트층에서 시작되었지만 민주주의 관념은 이 시기에 다시 등장한 일간신문이라는 대중매체를 통하여 빠르게 전파되어 대중에게 확산되었다. 후기 개화기에는 우선 전기 개화기와는 달리 1880년대 중반기 이후 시작된 서구식 근대 교육기관의 영향이 학교교육의 결실을 통해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육영공원, 배제학당, 경성학당 등에서의 수년간 신식교육이 실시되었고, 신세대들 사이에서 신속하게 서구 민주주의 사상을 수용하는 이들이 등장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중 물론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이 서구 정치사상과 민주주의 개념의 전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두 계몽주의적 선각자─초기에는 서재필, 후기에는 윤치호─의 활동과 영향력이 두드러졌다."(302)


"비록 서재필이 초기부터 여러가지 국가적 덕목인 충군애국이나 부국강병, 독립을 강조했으나, 그가 사상적으로 가장 커다란 이바지를 한 것은 조선조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담론인 민권 개념을 소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자유민권론은 『독립신문』이 다루는 '민(民)'의 성격이 유학적 '민(民)'의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서재필이 소개한 민권은 민(民)이 정치체의 객체가 아니고 점차 중심적 역할을 하는 존재로서 두드러졌다." "이제 권리란 특권 양반의 전유물이 아니며 보편자인 인민, 즉 개인들의 〈텬생 권리〉나 〈사람마다 가진 자유권〉이라고 천명하여, 대한인민에게도 서구의 천부인권사상을 당당하게 소개했다. 서재필은 개화기 조선 민중의 계몽을 최우선시하였다. 아직 근대적 자각을 하지 못한 조선의 대중은 〈정부의 목적을 알아야〉 하며 〈교육 없이는 국민들이 정부의 좋은 의도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그는 보았다."(303-4)


"독립협회기의 민주주의는 2단계 프로젝트로 나타났다. 먼저 민권을 고양하고 민권의식을 자각하는 시민층을 육성하는 단계로 계몽과 개화의 단계이다. 그 다음은 입헌군주제를 세우는 (군민공치제) 애국론과 경장론의 단계이다. 한편으로 『독립신문』은 서구의 자유주의나 계몽주의 사상을 소개하면서도 이것을 전통 유교적 관념에 대비하여 독자들에게 개화사상의 우월성을 설득하여 나갔다." "『독립신문』의 주요 담론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경장(更張) 개혁론'이다. 서재필은 급진적 개화운동으로 수구파와 왕권의 반대를 불러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았기에 우회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는 충군애국론을 바탕으로 하되, 개화파의 현실적 입지를 넓히려고 갑오년과 을미년의 근대적 개혁, 즉 경장개혁의 성공적 계승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특히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통해 법률의 시행과 준수가 충군(忠君)이라는 점과 더 나아가 이를 통해 국가의 독립 기초가 굳세어진다는 점을 처음부터 밝혔다."(305)


9장 근대한국의 경제 개념


"일본에서 전통적 경제 개념(경세제민)은 오규 소라이로 대표되는 도쿠가와 유학의 변질, 란가쿠의 영향하에서 동요되었고, 19세기 중엽 개항과 유신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서양적 개념인 economy의 번역어가 되었다. 당시 일본이 마주친 식민지화의 위기[外壓], 그리고 국내 세력으로부터의 점증하는 도전[內壓] 속에서 메이지 지배층은 부국강병이란 슬로건을 국가정책의 전면에 내걸었으며, 따라서 경제는 국민국가를 단위/경계로 한 경제로서 부국과 강병의 상호작용 맥락 속에 있었다. 그리고 부국의 수단은 식산흥업으로, 즉 산업의 육성을 통한 생산의 확대와 교역이라는 당시 19세기 후반 세계표준에 수렴되어갔다. 다시 말해 경제란 백성의 복지, 구휼, 절검(節儉), 조세 및 재정의 합리화로서의 경제에서 국가의 부강, 생산, 식산흥업으로서의 경제로 전환되어갔으며, 이 전환된 개념하에서 국민경제의 성공적 구성은 결국 일본의 독립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에서 또하나의 강국의 출현을 가져온 것이었다."(332)


"유길준에게 경제적인 것의 중심은 대체로 재정과 조세의 문제였다. 그는 〈민세(民稅)를 비용(費用)하는 사무(事務)가 국가 최대의 무(務)〉라 언급하면서 합리적인 조세체계의 구축, 예산확보와 예산집행 등의 재정 기술에 초점을 맞추었다." "요컨대 유길준의 경제는 조세와 재정책이 중심이 되고 근대적 상업관이 부가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후자(=상업관)의 경우 문명개화론이란 보편적 범주에서 논의됨과 동시에 상권의 확보 혹은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부의 체계적 창출로서 상업을 관념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전체적으로 그의 논의는 주어진 재화를 합리적으로 활용한다는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경제는 백성의 복지, 구휼, 절검, 조세 및 재정의 합리화로서의 경제에서 국가의 부강, 생산, 식산흥업으로서의 경제로 전환되는 중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당시 근대경제의 표준담론, 즉 부국강병의 맥락에서 상공업을 통한 생산의 확대란 담론과는 거리가 있었다."(336)


"유길준의 상업관은 1890년대 '상업입국' 혹은 '무역입국'론으로 전개된다. 대표적으로 『매일신문』 1898년 4월 27일자에는 「장사길 넓게 열도록」이란 제하에 〈일국의 흥망성쇠는 상업(무역)에 달렸으니 천하에 장사가 큰 근본이 될지라〉고 주장하면서 영국이 세계 제일의 부강국인 까닭은 〈상업을 확장하야 긔교한 제조물을 만들어가지고 남의 나라 금은을 바꾸어다가 그 나라를 부유케〉 한 데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상업이 단순히 부를 가져다주는 것일 뿐 아니라 〈일국의 재물은 그 나라 혈맥이라 (상업을 장악한 나라는) 몇달 안에 전국 혈맥을 말릴 권리를 가졌으니 정부와 백성의 목숨이 (그 나라의) 장중에 달렸다〉는 점에서 강한 정치적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라가 정부를 지탱하고 백성이 집안을 보전하려면 아무쪼록 장삿길을 널리 열어 해마다 항구에 들어오는 돈이 나가는 돈보다 많게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라는 중상주의적 주장이 드러나고 있다."(338-9)


10장 근대한국의 '개인' 개념 수용


"박영효에 의하면 민은 '자유의 권(權)'을 갖는다. 그러면 '자유'란 무엇인가. 그가 말하는 '자유'는 종래의 한자어 '자유'─그것은 ('문명의 자유'가 아니라) '야만의 자유'일 뿐이었다─와는 의미를 달리한다. '자유'라는 말에도 이미 변용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이른바 자유라는 것은 그 생각한 바를 행할 수 있는 것으로서, 다만 하늘과 땅의 이치를 따를 뿐이며, 속박할 수 없고, 굽힐 수도 없는 것〉이라 한다. 그것은 〈하늘이 부여해준 자유[天賦之自由]〉이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민은 그 자유의 일부를 포기하고 세속의 동의에 따른다. 그리고 따라야 한다. '의무' 같은 것이라 하겠다. 〈사람이 세상에 나와서 그 이익을 서로 얻으려면 일부의 자유를 버리고 세속의 동의를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비록 그 자유를 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야만의 자유를 버린 것이며, 천하에 두루 통하는 이익을 얻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소략하나마 '자연상태에서 사회로 이행해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355-6)


"크게 다르지 않은 박영효와 유길준의 '인민관'은, 시민불복종, 저항권이라는 측면에서 나뉜다. 시민불복종을 긍정하는 박영효와 달리 유길준은 〈군민의 공치(共治)하는 정체(政體) 우왈(又曰) 입헌정체(立憲政體)〉를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군주'의 위상과 관련하여 홉스 식의 (계약을 통한) 이론적 정당화는 보이지 않는다─생각하면서도, 인민의 풍속과 국가의 상황을 불문하고 그 정체를 감행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인민의 정치참여를 유보하는 것이다. 인민의 지식이 부족한 국가는 갑작스레 그 인민에게 국정에 참여하는 권리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 '인민의 권리' 바로 앞에 '인민의 교육'이 있다는 것은 극히 상징적이다. 개량주의나 계몽사상으로서의 뉘앙스가 강하다고 하겠다. 주어진 법률을 준수하고,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다 보면 시민불복종과 저항권이 깃들여지는 그만큼 옅어지게 된다. 그런 점에서 유길준은 로크보다는 홉스에 가까웠다."(359)


11장 대한제국의 '영웅' 개념


"이 시기 구국(救國)과 구망(救亡)의 정신적 전선이 한·중·일 삼국 간에, 더 나아가 동양과 서양 간에 공유된 어휘를 어떻게 해석하고 사용하는가에 놓여 있었다고 할 때, 식민 전야(前夜)의 대한제국 지성계가 일제히 '영웅'을 부르짖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당시 동아시아 영웅론에서 반복적으로 개진되던 두 가지 논점, 즉 '영웅과 시세(時勢)' '무명(無名)의 영웅'의 문제이다. 이 두 가지 문제에서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논자들은 미묘하지만 중대한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차이는 메이지유신으로 근대국가 수립에 성공하고 서구열강과 함께 본격적인 민족제국주의적 경쟁에 뛰어든 일본, 1898년의 무술정변, 1899년부터 1900년의 의화단사건으로 개혁운동과 반제 민중운동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 상황에서 서구 열강의 이권침탈을 받고 있던 중국, 1905년 통감정치 실시로 재정·외교권을 일본에 박탈당한 채 반식민지 상태에 접어든 한국의 각 정치현실과 정확히 부합하고 있다."(375)


"1911년 4월 12일 『신한민본』의 논설 「조선에 와싱톤이 누구뇨」에서는 〈영웅이 시세를 만드느뇨, 시세가 영웅을 만드느뇨 하는 문제는 오늘 천하에 사람마다 아는 말이라〉고 적고 있다. 이 구절은 사회적 조건이 성숙해야 영웅적 업적이 가능한지, 그렇지 않으면 영웅이 출현함으로써 사회변화를 선도하게 되는지를 묻고 있다. 만약 시세가 영웅을 만든다면 제도와 의식이 성숙해야만 그에 부응한 정치적·사회적 진보가 이루어지겠지만, 영웅이 시세를 만든다고 하면 강력한 리더십과 극적인 혁신을 통해 불리한 환경과 물질적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된다. 그런 면에서 청과 대한제국의 지식인들에게 영웅이냐 시세냐는 과학을 넘어서는 실존적 질문이었다. 근대국가의 기틀을 확립하고 사회가 점차 보수화되어간 메이지 말기 일본에서 영웅론이 쇠퇴했지만, 같은 시기 대한제국에서는 영웅론이 맹위를 떨쳤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376)


"도쿠토미 소호의 무명영웅론은 칼라일과 스마일즈의 영웅 개념을 신분사회에서 실력본위 사회로 변화해가던 메이지 일본으로 도입한 것이다. 그것은 영재(英才)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보통사람이 분발 노력하여 된 것이라고 한 스마일즈의 자조론과, 영웅은 진정한 인간의 완성태로서 모든 사람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한 칼라일의 주장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무명'과 '영웅'이 결합된 형태의 무명영웅론은 이 시기 영웅 개념이 전통적 영웅 관념과 다르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도쿠토미 소호는 비슷한 시기 '평민(平民)주의'를 주창하였으며, 소호의 무명영웅론에서 '평민'이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부와 사회적 지위획득의 기회가 만인에게 열려 있었던, 혹은 적어도 그러한 기대를 가능하게 했던 메이지 일본사회의 역동성에 기인한다. 그러나 자유민권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일본이 군국주의로의 경사를 보이는 시점에서 영웅론은 쇠퇴하고 '무명의 영웅'은 '영웅'의 자리를 빼앗긴 채 '무명'으로 남는다."(391-2)


"도쿠토미 소호의 문제의식은 서구의 근대화가 어떻게 가능했는가에 놓여 있으며, 유명한 영웅들의 대사업의 조력자이자 원동력이라는 측면에서 무명의 영웅이 조명되고 있다. 그에게 '무명의 영웅'은 자신의 맡은바 직분을 다하는 '평민도덕'의 구현자이다." "도쿠토미 소호의 '평민도덕'과 '무명의 영웅'에 대한 사상은 칼라일의 논리를 계승한다. 하지만 이러한 '도덕'이 내셔널리즘의 구호로 사용될 때 그것은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향한 맹목적 열성에 불과하다. 훗날 역사적으로 증명된바 일본의 무명영웅론은 국가를 위하여 충성을 바치는 신민, 제국전쟁에서 싸우다 죽는 무명용사가 되라고 요구하는 국가주의로 변질한다. 칼라일의 사상 자체가 안은 파시즘의 위험은 「무명의 영웅」에도 이미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것이다. 대(對)아시아 침략을 언론과 정치활동을 통해 열렬히 지지하고 훗날 A급 전범 판결을 받은 도쿠토미 소호의 삶이 이를 증명한다."(394-5)


"소호의 경우 천황으로 대변되는 메이지 국가의 존립과 발전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유명영웅을 생략하고 메이지 일본의 '평민'들에게 직접 무명영웅으로서의 덕목을 설파할 수 있었다. 반면 량치차오의 무명영웅론이 겨냥하는 계몽의 대상은 무명영웅들이 아니라 유명영웅으로서 청의 위정자들이다. 「무명지영웅」 말미에 량치차오가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시세가 진실로 영웅을 만들고 영웅이 또한 시세를 만드나니 장수를 도와 성공케 하는 자는 병졸이오, 이 병졸을 훈련하여 능히 우리 편이 되게 하는 것은 또한 장수에게 있으니〉라고 한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시세를 만드는 영웅'으로서 중국의 유명영우에게 요청된 시대적 숙제는 중국 인민을 모두 '무명의 영웅'으로 빚어내는 것이었다." "국민의 윤리와 가치를 역설할 도쿠토미 소호의 무명영웅론은 량치차오에게 와서 국가지도자에 대한 시무책이 되었다."(396-7)


"스펜서의 이론에서 영웅이 그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의 산물이며, 제임스의 이론에서 영웅이 일종의 사회적 돌연변이로서 예측할 수 없는 우연성의 조합으로 탄생하는데 비해, 한국의 영웅담론에서 영웅은 '주조(鑄造)'되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사회진화에서 인위적 개입을 중시하는 이러한 경향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발견되지만, 중국과 일본의 영웅론에서는 그 무게중심이 종종 '유명의 영웅'의 주조에 있는데 비해, 한국에서는 '무명의 영웅'을 만들어내려는 데 전적으로 놓여 있다." 시세가 무르익어야만 영웅적 사업이 가능하다고 하면 당대의 한국에는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보아 나라가 망해가는 암울한 과도기였으며, 현실적으로 국가의 대외적 주권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대한제국 지식인들이 어째서 국가형성의 질료로서의 근대적 민(民)에 대한 언술에 사로잡혀 있었는가 하는 의문은 이 당시 영웅론을 사회진화론의 맥락에서 읽었을 때 비로소 풀리게 된다."(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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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5 - 아나키 / 아나키즘 / 아나키스트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5
페터 크리스티안 루츠.크리스티안 마이어 지음, 송재우 옮김 / 푸른역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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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2. '아나키' 개념의 역사적 변천 과정


"용어상으로 엄격하게 이해하자면 이 말은 항상 군사적인 지도자 없음이란 뜻이며, 집정관이 없는 상태와 마찬가지 의미에 결부되었다. 이 밖에 고전시대와 그 직후에는 사실상 지도나 지배가 없는 상태에서 나오게 된 속박 없음과 방종이라는 단지 막연한 의미에서 우선적으로 사용되었고, 혹은 곧바로 불순종이라는 의미와 경우에 따라서는 결과적으로 혼란한 일반적 상태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의 변환은 아마도 구체적으로 〈지도자 없는〉 집단의 행동 방식인 〈민중의 무법지배〉라고 표현하는 거칠고 시끄럽게 소속감이 없는 군중의 상태나 혹은 〈무법 상황에 빠진 해군들〉이라고 표현되는, 해군들의 뻔뻔스럽게 통제되지 않은 상태를 빗댄 것이리라." "폴리스와 연관되어서도 이 낱말은 〈속박이 없음〉, 〈방종〉, 〈무질서〉란 막연한 의미에서 사용되었으며, 실제로 아이스퀼로스와 플라톤도 사용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번 사용하였다."(16-7)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 정치체제 이론의 틀 내에서 '아나키'를 최초로 명확하게 언급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마키아벨리도 군주제, 귀족제, 민주제라는 세 가지 〈좋은〉 형태의 지배를 언급했다. 〈좋은 것들은 이 세 가지이고, 나쁜 것은 또 다른 세 가지인데, 이들은 앞의 세 가지에 좌우되며 각각 비슷해서 매우 쉽게 다른 것으로 바뀐다. 왜냐하면 군주제는 쉽게 전제정이 되며 귀족정은 과두제가, 민주정은 쉽게 아나키로 바뀌기 대문이다.〉 이처럼 마키아벨리에게서 민주정이 아나키를 만든다는 표현이 명확하게 발견된다." "보댕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완성된 형태의 공화국 이전 단계로 지배가 없는 〈국가civitas〉를 앞에 두는 것이 옳은지를 묻는다. 보댕은 이것을 거부하고, 법과 지배가 없어서 결국에는 주권자가 없는 이러한 상태를 〈아나르키아anarchia〉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의미의 확산을 통해서 '아나키'는 (모든 법적인 통치권력의 반대 개념이라는) 새로운 의미의 차원으로 나아가게 된다."(27-8)


"18세기에는 아나키 개념이 폭정과 새롭게 연결되었다. '폭정Despotie'이 '폭정적' 및 '포악한'과 함께 이미 홉스를 통해서 당시 정치적 논의에 도입되었으며, 아나키 개념의 수용은 나중에야 이루어졌다. 이러한 연관에서 순환 모형의 새로운 변형이 제시되었다. 아나키는 폭정/압제정을 만들고, 폭정/압제정은 아나키를 생성한다. 이와 함께 아나키와 폭정은 서로 비교되고 평가되었다. 어쨌든 실제적 기능과 연관하여, 특히 그 논란의 정점에는 폭정은 아나키보다 좋다/나쁘다, 혹은 양쪽이 동일하다가 있다. 이러한 연관이 사라지게 된 19세기와 달리 '아나키'는 끊임없이 폭정/압제정과의 직접적 연관 속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들의 동일성은 그 부정적 절대성으로부터 나왔다. 양자는 〈자유〉와 〈질서〉에 대립되었다. 아나키나 폭정은 법과 질서를 인정하지 않았다. 〈질서 없는 자유는 압제를 부르는 방종이며, 자유 없는 질서는 아나키로 몰락하는 노예 상태이다.〉"(34)


"18세기 후반에 '아나키'는 무엇보다도 계몽철학자들과 저술가들에 의해서 긍정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1778년 《독일백과사전》의 샤이데만텔 및 아델룽은 아나키를 사회 형태로 최초로 부각시켰다. 클뤼겔과 쥐스티처럼 영국의 공리주의자와 유사하게 이들은 사실 항상 사회적 행복이라는 이상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아나키'는 이제─보댕과 유사하게─〈평등하고 불평등한 사회가 서로 구별되듯이 국가에 대립적인 사태이다.〉 국가 이전의 사회와 국가 사회는 아나키와 국가처럼 대립적으로 존재하였다." "브로크하우스의 1814년의 《초기 백과사전》은 정치체제의 개념으로 '아나키'와 가족, 공동체, 사회에 연관된 사회적 범주로서 '아나키' 사이의 결합을 담고 있다. '아나키'는 〈공동체적인 통체 형태를 가지지 않는─그리고 이와 함께 권세, 계층, 폭력이 없는─하나의 민족 단체Volksverein〉로 정의되었다. 이러한 정의의 설명에서 비로소 '아나키'가 〈무질서와 해체〉의 상태로 특징지워졌다."(43-5)


3. 18~19세기에 전개된 '아나키' 개념의 영역 확대


"이미 프랑스혁명 이전의 여러 가지 사건에서 시작된 아나키 개념의 역사화 과정은 1790년대에 절정으로 치달았다." "'아나키'가 〈과도기〉 혹은 〈특정한 상태〉라는 생각은 점차 줄어들었고, 이제는 〈자연적 사회〉에서 자유의 행복한 장소로도 받아들여졌으며, 이에 더하여 당파적 개념, 이데올로기적-정치적 무기, 투쟁의 개념이 되었다." "역사철학적 시각에서 아나키의 직접적 정치화와 함께 먼저 프랑스에서, 이어서 독일에서 '아나키스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나타났다. 정치적 일상의 투쟁에서 여러 정치적·사회적 집단들이 서로 상대방을 〈아나키스트〉로 불렀다. 그리하여 1800년 이후에 아나키스트란 1790년대의 일상적 투쟁이 바래고 난 뒤에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자, 물론 나중의 공산주의자에 의해서 점차적으로 부르주아적 사회에서 지위와 세력으로 성장하지 않은 국외자, 사회적 가장자리 집단으로 불렸다. '아나키스트' 개념은 사회적으로 국외자 집단의 자기인식이라는 기능을 맡게 되었다."(52-3)


"괴레스는 아나키를 완성된 정부 형태로 정의하였다. 〈야만의 상태에서부터 사회로의 첫 발걸음이 이러한 문화로 넘어가는 것이라면, 압제적 정부 형태에서 대의적 정부 형태로 옮겨가는 것은 두 번째 발걸음이다. 이로부터 순수하게 민주정적인 정부 형태는 세 번째 옮겨감이며, 여기에서 아나키로 가는 것은 최종적으로 마지막 옮겨감이다.〉" "여기서 '아나키'는 말 그대로 지배 없음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초험철학에 와서야 비로소 아나키 개념이 절대적 자유가 되었다. 〈·····자유는 상상의 첫 번째 조건이며, 순수 오성의 마지막 목적이며, 오성은 보다 높은 것에서부터 유한한 것에 영향을 미치며, 목적은 가상을 없애거나 유한한 것을 없앤다. 이러한 목적에 도달하게 되는 만큼 이것은 우리를 자유로 인도한다. 자유의 개념에 따른 사회는 아나키로 존재하게 되며─사람들은 이런 사회를 신의 나라, 혹은 황금의 시대라고 부를 것이리라. 본질적은 것은 물론 아나키여야 한다.〉"(59-60)


"아나키와 폭정의 근본적인 분리는 흥미롭게도 결국 국가학에서부터 도입되었다. 크리스티안 다니엘 포스는 1797년에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개념에 대한 올바른 규정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혁명의 전체 기간 동안에 결코 아나키가 발생하지 않았다. 항상 공동체로부터 인정된 최고 권력이 동일한 것으로 존재하였고 영향을 행사하였으며····· 공동체로부터 인정된 권력이라는 얼굴을 가진 악의적인 권력의 소유자로부터 강탈을 당하고, 살해되었기 때문에, 그리하여 아무도 권력 행사자 측의 사람에 대해서나 잘못 사용된 최고 권력의 행사자로부터 자신의 삶이 안전하지 않으므로, 아마 여기에는 전제정치와 같은 것이 있었더라도 결코 아나키는 없었다.〉" "이와 같은 근본적인 아나키와 폭정/전제정치의 구분은 결국 프루동과 모제스 헤스에게 나타나는 확실히 긍정적 정치체제 형태로 아나키의 규정을 위한 전단계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분리가 이 시대의 일반적 사회 의식에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64-5)


"헤겔은 아나키가 지배의 타락 형태라는 특별한 표현 방식을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독일의 정치체제론》이라는 초기 저작에서 헤겔은 집중적으로 당시의 독일이 하나의 '국가'인가라는 물음에 몰두하였다. '국가'에 대한 상대 개념은 당시 그에게 '아나키'였고, 강한 표현으로는 〈개방적 아나키offene Anarchie〉였다." "(하나의) 상태로서 '아나키'에 관한 전통적 의미와 함께 보수적 반동이 생겨났다. 보수주의자 폰 데어 마르비츠는 아나키를 〈지위와 귀족의 말살 후에 또는 군주의 권력을〉 부수는 〈완전한 아나키〉로, 그리고 폭정과 유사한 〈비국가〉로 보았다." "'진보', '폭동의 정신', 〈민족국가〉는 메테르니히와 그의 이데올로그가 싫어한 것이다." "따라서 메테르니히는 벨기에, 폴란드, 이탈리아에서 7월혁명의 발발 이후에 자유주의적이며 혁명적인 세력과 연관하여 〈아나키스트적인 패거리Faktion〉에 대해서 말했는데, 스위스의 젊은 독일인들은 그가 보기에 〈아나키의 반사회적 분자들〉이었다."(70-2)


4. '아나키' 개념의 확산과 반발


"프루동은 '아나키' 개념을 그의 투쟁적 저술인 《소유란 무엇인가?》(1840)에서 건드렸다. 〈인간이 평등 안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것처럼, 사회는 아나키 안에서 질서를 추구한다.〉 여기에서 그는─인간과는 무관한 최후의 진리로서─정의와 평등을 〈수학적 진리〉와 비교했다. 그의 유작 《수첩Carnets》에까지 일관하는 '아나키'의 긍정적인 의미 내용을 그는 '아나키'의 전래적인 부정적 정의와 대립시켰다. 〈아나키는 군주, 주인의 부재이며, 이것이 우리가 매일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는 정부의 형식이다. 인간을 규칙으로, 인간의 의지를 법률로 간주하는 고질적 습관이 우리를 혼돈의 표현이자 무질서의 만연으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프루동에 따르면, 〈자유는 그것이 의지의 통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오직 법률의 권위, 곧 필연성만을 인정하기 때문에 아나키이다. ·····자유는 본질적으로 조직적이다.〉" "그의 마지막 편지에서 프루동은 아주 솔직하게 표현한다. 〈아나키는····· 하나의 정부 형태나 정치체제이다.〉"(95-6)


"프랑스혁명 후 수십 년간 아나키 개념은 모제스 헤스를 통하여 마지막으로 번성하게 되었다." "다시금 모든 풍부한 혁명적 및 혁명 이후의 의미 내용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헤스는 한편으로는 확실히 프루동을 넘어서서 모든 권위와 계급을 지양하는 것으로서 아나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의 긍정적 위치로서 아나키를 찾아냈다. 〈무신론과 공산주의라는 양쪽의 현상이 되돌아가게끔 아나키는 사회적 삶에서처럼 정신적인 삶에서 모든 지배의 부정이며, 모든 규정의 단적인 말살로 먼저 나타나며, 이와 함께 모든 현실의 단적인 말살로 나타난다.〉" "그는 〈·····모든 공산주의와 무신론, 모든 아나키·····〉라고 말하면서 아나키와 동일하게 보았던 이 시대의 위대한, 다시금 화해되어야 하는 힘인 무신론과 공산주의를 아나키로 환원시켰다. 이에 상응하여 〈무신론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가 같은 차원에서 언급되었다. 헤스는 프랑스혁명으로 절대적-역사적 새로운 시작이 제시된 것으로 보았다."(98-9)


"1830년 이래로, 특히 1848년 이래로 자유주의자·보수주의자·혁명주의자는 아나키와 아나키즘으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하였으며, 확고해지는 부르주아 사회의 진행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성적 긍정성의 원리에 정착하고자 시도하였다. 이를 위해서 거의 모든 책임전가의 수단은 정당화되었다. 그리하여 1848년 독일가톨릭연맹 독일국민회의는 〈잘못 이해된 자유 개념의 표현이 독일의 많은 지역에서 아나키적 운동을 자극〉하였다는 점을 경고하였다. 아나키는 이제 〈국가에 대한 범죄, 대역죄, 반란〉으로, 또한 〈비정상, 사회적 관계의 결함〉으로 공공연히 비난받았다. 이 세기의 초엽부터 형성된 이와 같은 평가절하는 확대된 정치체제 개념의 틀 속에서 계획되었다. 〈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실행하는 권력이 중지되거나, 법이 압력을 행사할 수 없을 정도로 권력이 방해받고 추락하기 때문에 아나키는 국가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100-1)


5. 아나키즘과 사회주의


"스스로 '아나키즘적'이라고 일컫는 여러 운동이 분류될 수 있지만 국제적 운동으로서 아나키즘과 아나키-노동조합운동의 역사는 1866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노동자협회의 제1차 정식 회의에서 시작한다. 마르크스와 특히 〈쥐라연맹〉에 모인 바쿠닌 추종자 사이의 모든 내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1872년 〈모든 사회주의자는 아나키를 이렇게 이해한다〉라고 설명했다. 〈일단 프롤레타리아적 운동의 목적인 계급 철폐가 이루어지면 국가의 지배가 사라진다.〉 그는 물론 동일한 〈개인적 통신〉에서 아나키스트를 인터내셔널의 〈분열자〉로 표현했다.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거의 모든 순간에 아나키즘을 모든 조직의 적, 아나키스트를 〈카오스의 친구〉, 부르주아의 개인주의적 유산으로 단정짓고, 그들로부터 〈실제적 사회주의자〉의 모든 특성을 박탈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카우츠키, 투라티, 플레하노프는 이 점에서 그들을 따랐다."(109-10)


"마르크스주의자와 반대로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이를테면 악셀로드,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이 〈민중 속에서 탄생〉되었고, 여기에서부터 그 창조적 이념이 얻어진다고 강조한다. 〈세계 사회주의의 거대한 가족grande Famille du socialisme universel〉이라는 모든 선서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 아나키스트 크루아제가 〈아나키는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자신의 모든 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기를 원한다. 그런데 조직은 최종적 결과의 측면에서 개인의 자유를 늘 다소간 제한하게 된다. 따라서 아나키는 모든 항구적 체계에 반대한다〉라고 외쳤다." "여기서 개념사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아나키스트'라는 낱말이 1870년대 이래로 부르주아-보수주의 진영에서 나와서 사회주의적-공산주의적 운동, 조합주의적-아나키즘적 운동으로 나아가게 되었고─이에 대한 반응으로─이로부터 자기 지칭을 위해서 일단 항상 새로운 차별화와 변화가 사용되었다는 점이다."(110-1)


6. 전망


"1870~80년대 사전에서 '아나키'는 흔히 〈국가의 결여된 통치권력Gewalt des Staates〉과 함께 대조되었다. 막스 베버는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이러한 연관성을 반영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국가(통치)〉와 〈아나키〉를 대조시켰다. 게오르크 짐멜은 자신의 《사회학》에서 '아나키'를 〈뿌리 없음〉과 〈확고한 삶의 감정의 결여〉와 동일시하였다." "1918년 이후에 짐멜은 '아나키' 개념의 소진, 그 임의성과 혼돈 가능성을 이렇게 분석하였다. 〈저런 모든 개별성에는····· 확고함이 바로 경직성, 고정성, 고루함과 같다. 그 본질은 순수한 동요이며, 공허함의 충족, 자극의 최대화, 지적 광채가 언제나 유혹하는 곳으로 저항 없이 흘러가며, 이러한 가치의 동일화를 요구한다. 이 모든 것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인상을 받는다. 이들은 모두 다른 쪽에 설 수 있다. 이들이 반동적인지 혹은 혁명적인지, 자유로운 정신인지 혹은 가톨릭적인지, 권위적인지 혹은 아나키적이 되는지는 결국 상황에 좌우되지 내부에서부터의 필연이 아니다.〉"(1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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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4 - 보수, 보수주의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4
루돌프 피어하우스 지음, 이진일 옮김 / 푸른역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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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2. 문제의 배경 : '전통주의' ─ '보수주의'


"보수주의의 특징은 개별적 변화에 대한 저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의 범위를 포괄하는 시대의 변화 전체에 대한 저항을 지향했다. 보수주의는 이미 정치적 성격들을 갖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전통주의라는 보다 보편적인 형태 속에 가려져 있었으며, 변화에 대한 거부가 적극적인 창출Gestaltung에 대한 의지보다 강했다."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사회적 변화에 직면한 상황에서 보수주의는 자신들의 반동적 목표를 설정할 때 전적으로 급진적 노선을 취할 수 있다. 보수주의가 단지 과거의 지배형식을 재건하고, 지배계급의 귀환을 통해 과거 자신들의 역할을 되찾고자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러한 역할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상황에서도 한때는 신성했지만 인간적 오만함Hybris으로 인해 회복 불가능하게 파괴되어버린 질서를 회복하고, 거부된 현재를 넘어 현실 저편의 신성한 미래를 목표로 추구하고자 한다면,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프로그램으로서의 보수주의는 혁명적 잠재력이 될 수 있다."(17-9)


3. 유럽의 과거 속 전통주의적·복고적·보수적 사유구조


"오래 전부터 통용되어 오던 진리에 기대는 일은 철저한 계획에 따른 변화에의 요구보다 사실 훨씬 오래된 일이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규범들Normen을 지향하였고, 이에 대한 추종, 어떤 경우에는 이들을 다시 들춰내고 부활시키는 일들을 도덕적 과제인 동시에 정치적 과제로 간주했다. 원형으로 돌아가기reformatio, 새롭게 거듭나기renovatio, 원천으로 돌아가기revolutio 등의 개념과 이의 독일어 표현들은 18세기 중반을 넘어서까지도 오래된 것에 대한 재발견과 회귀, 개선되고 발전된 원상회복Wiederherstellung을 의미했다. 즉 전혀 해방적이거나 혁명적 특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또한 16세기 교회의 종교개혁도─헤겔에 의해 '혁명'으로 표현된 바 있는─독일사에서 가장 중요한 개혁운동이기는 하지만, 중세적 의미에서는 교회 갱신renovation ecclesiae, 즉 그리스도의 상을 따라 인간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 실현되는 그리스도 율법Lex Christi으로의 회귀로 보았다."(23)


"정치-사회적 발전의 가야 할 길이 변화와 고수 사이의 중간 길이며, 전진 속에 연속성이 유지되어야만 한다는 확신은, 스스로를 좀 더 자유주의적으로 혹은 보수주의적으로 이해하는지 구별없이, 19세기 독일 식자층에게는 널리 퍼져있는 생각이었다." "1830년까지는 이러한 사고를 가리키는 그 어떤 명칭도 실질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7월혁명이 일어나면서 독일의 정치 환경도 변한다. 혁명에서 승리하지 않았어도 과거로의 회귀는 불가능하며, 지키려는 힘과 변화를 추구하려는 힘, 이 양자 사이의 결단이 요구되고 있음을 인식해야만 했다. 어느 한쪽만을 편드는 일이 일방적이라는 비난을 쉽게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했지만, 이러한 선택을 불가피해 보였으며, 명칭을 부여함으로써 정의를 내리고, 같은 편임을 드러내며, 호소하는 행위를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보수적konservativ'이라는 표현은─독일인에게는 외래어로─ 자신의 정치적 대표성을 획득한다."(28-9)


4. 단어의 역사


"라틴어 'conservare(간직하다, 유지시키다, 구조하다)'는 이미 가치에 중점을 둔 의미 영역에 속해 있었다. 'conservator(수호자)'라는 단어는 행위에 근거를 둔 명사로, '수호자custos', 혹은 '보호자servator'라는 단어와 동의어였다." "기독교 세계에서 산발적으로 'conservator'는 구원자 예수Heiland라는 의미를 갖는 'salvator(구원자)'라는 표현과 나란히 쓰였다." "신을 〈만물의 창조자이며····· 보호자〉로 표현한 것을 빼면 'conservateur'라는 단어는 14세기 이래 무엇보다 법과 재산을 보호하는 직위에 붙여졌다. 〈군주는 본래 백성의 재산과 자유의 보호자conservateur다.〉 이런 오래된 법률-행정적 언어 용법과의 엄격한 구분을 제외한다면, 일반적으로 프랑스혁명이 'conservateur'라는 표현을 정치적 개념으로 사용하게 된 첫 계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도 처음엔 반혁명적 입장의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혁명의 성과물들을 보호하는 정책에 대한 표현으로 사용되었다."(32-3)


"마담 드 스탈은 〈혁명을 종식시킬 수 있는 현재의 상황들〉이라는 글에서 〈보존적 집단을 조직하는 것이 낫다〉는 확신을 드러낸다." "이러한 용례는 혁명 자체의 결과에 대한 표현을 끌어와 사용한 것으로, 이를 통해 반혁명을 막는 것뿐 아니라, 다음에 올 급진혁명을 지켜내고자 한 것이다. 이후 점차 '보존적conservateur'이라는 개념은 혁명의 전제가 되었고, 또한 혁명을 종결시켰던 나폴레옹 체제의 자기 이해를 드러내는 개념이 되었다. 부르봉 왕조의 재건이 이루어지고 비로소 정당 체제가 성립되는데, 이는 1789년부터 1814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를 인정하는 정도에 따라, 제헌헌장을 변화의 종식으로 판단할 것인가, 아니면 헌법상의 지속적 발전의 기반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따라 그 판단은 달라진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conservateur'라는 개념은 프로그램을 갖춘 정치적 노선의 이름과 정당의 이름으로 쓰이면서 프랑스 밖에서도 받아들여지게 된다."(34-5)


# 제헌헌장Charte constitutionelle : 루이 18세가 1814년 즉위하면서 공포한 프랑스 헌법. 비록 그는 여기에서 1789년 혁명을 부정하고, 자신의 체제와 구체제 간의 연속성을 강조하였지만, 구체적인 헌법의 내용에서는 지난 20년간의 혁명을 통한 변화를 인정하고 반영하였다. 특히 소유권과 관련하여 프랑스혁명 이후의 변화를 용인하였고, 행정 체계도 혁명과의 연속성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5. 1830년 이후의 상황


"7월혁명은 그것이 가져온 제도적 변화의 규모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유럽의 정치적 환경을 변화시켰다. 7월혁명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난 18세기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에 출현했던 민주적 경향들, 그리고 그 뒤에 존재했던 사회적 동력을 극복하고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 정치적 발전이 충분히 발전의 길로 연결될 수 없었다는 것들에 대해 자각하게 만들었다. 사회적·정치적 현실이 더 이상 멈출 수 없는 변화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꼭 필요한, 혹은 바라왔거나 허락되는 변화나 보존의 한도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다. 정치적 성격을 띤 공적 영역의 점진적 확장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느 한편을 선택하도록 요구했다. 즉, 자신의 사회적·국가적 질서에 대한 입장, 이들 중 이미 행해졌거나 저지된 것들, 그리고 어떻게 이들이 진행되어야 할 것인가의 문제─나아가 다른 이들의 동의를 받아내고 연대의식을 심으며, 반대자들을 확인하여 이들과 싸우고자 하는 의도가 놓여 있었다."(44-5)


"최종적으로 보수주의는 군주정 체제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점차 방어적 자세로부터 벗어나, 자신들의 입장이 시대의 변화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근본적 변화로의 전환을 지속적으로 추구해 나가고자 하는 그런 시대적 경향에 대한 반대임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였다. 민주주의자들의 말뿐인 급진주의는 보수주의자들에게 〈파괴주의자들〉에 대항하면서 변화 속에서 보존을 정당화시키는 논거를 제공하였다. 이로써 보수주의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이 과거의 상태를 재건하거나 혹은 기존의 관계들을 단지 붙잡아두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변화를 방해하고,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들과 싸우며, 현재의 문제를 문제로서 인식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하면 할수록, 더욱더 그들 스스로의 정치이념은 적극적으로 되어간다. 이들은 (인간의 선천적 불평등에 대한 신념 같은)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사고를 구성하는 근본 요소들을 프로그램의 목표로 삼았다."(56)


6. '보수당'


"'보수적', '보수주의자', '보수주의' 등의 개념은 1848년 혁명의 전야까지도 분명한 윤곽을 갖지 못한 채 사용되었으며, 명확히 지칭할 수 있는 정치적 집단이나 방향이 고정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들은 '보수주의'라는 개념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즉, 보수주의라는 개념은 이들에 대한 반대자들의 논박 속에 있었다. 이를 통해 보수주의자들은 한편에서는 자신들이 오로지 보존만 하고자 하는 측으로 몰아붙여지고 있다고 느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당명과 연결시켜 만들어진 획일화된 정치 프로그램에 불신감을 느끼면서, 당이 의당 해야 할 정치적 행위에 대한 의무를 피해갔다. 전통적 지배계급이 지녀온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에 따르면, 이들에게 사회질서와 정치권력이란 존재의 영역이지 의지나 의무의 영역이 아니었고, 따라서 당 정치를 통한 각축의 대상도 아니었다. 이러한 입장은 많은 온건 자유주의자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72-3)


7. 1848/49년 혁명


"구 보수주의자들에게 1848년 봄의 사건은 커다란 충격이었으며, 이에 대해 그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후버는 새로운 국가질서를 현재의 적법한 상태로 인정하였다. 비록 조국이 위기의 순간은 극복했다 하더라도, 어쩌면 과거보다는 순화되었을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과거로부터 진행되어 온 싸움〉, 즉 자신의 발전 능력을 먼저 증명해보여야만 하는 일은 계속되어야 했다. 그는 또한 예지력 있게도, 자유주의가 약속했던 자유 속에서 보수주의적인 것들이 과거보다 더 잘 구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베트만 홀벡은 〈건강한 보수주의〉를 지지하였으며, 〈정당한 소유권 주장〉을 옹호했다. 또한 그는 〈부르주아적····· 관계들의 자연스러우면서도 꼭 필요한 변화〉를 제시했고, 〈고사되어 가는 삶의 형식을····· 복구〉시키고자 하는 그런 사람을 '반동주의자'로 칭했다. 《신프로이센 신문》은 반혁명 투쟁을 넘어, 〈사물의 새로운 질서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 현재의 동적인 사상〉에 대한 개입을 요구하였다."(82-3)


# 봄의 사건 : 1848년 3월부터 독일과 전 유럽에서 일어난 혁명의 물결들


8. 반동의 징표 속에서


"《국가와 사회 사전》 안의 〈보수적〉이라는 항목에서(보다시피 〈보수주의〉가 아니라) 바게너는 유지Erhalten라는 단어와 그 의미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정치적 부채Hypothek를 서술하고 있으며, 그래서 이 단어가 모든 삶의 영역에서 대대적인 변화가 진행되는 시대에는 언제나 새롭게 정당화시킬 수 있는 개념 정의를 요구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당연히 단지 지켜내는 것만이 문제의 중심이 아니다." "기독교 정신을 지키고,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더 커다란 전체의 구성 요소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더 고상한 질서〉를 위해 복무하는 사람, 이러한 〈질서를 인정받고자〉 노력하면서, 기존의 존재하는 것들의 정신적 기반을 위해 발을 들여놓는 그런 사람만이 오직 〈진정으로 보수적인〉 사람이다. 〈하나의 정당이 적어도 제도와 문화의 총체를 보존하고자 하며, 시간이 흐르면서 보존시켜야 할 바른 기반 위에서 성장하고 발전된다면〉, 그때에 비로소 이 정당을 '보수적'이라고 칭할 수 있다."(93)


9. 제국 설립기


10.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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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3 - 근대적 / 근대성, 근대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3
한스 울리히 굼브레히트 지음, 원석영 옮김 / 푸른역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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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 술어 '근대적modernus'의 의미

1. 현재(↔ 이전) : 바로 지금 다른 것들로 대체될 수 있는 제도나 생각, 대상들

2. 새로운(↔ 오래된) : 과거의 시대들과 구분되는 한 시대

3. 일시적인(↔ 영원한) : 영원을 축으로 대비시킨 '미래의 과거로서의 현재'


2.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의 '근대적modernus' 개념


"13세기 이후에는 (서론에서 구분한) 첫 번째 의미에 따른 '옛날 사람들/현대인들antiqui/moderni' 패러다임이 일정 기간 동안 경쟁하고 이후 해체되는 철학 학파들을 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렇게 사용됨으로써 현재 진행 중인 논쟁을 넘어서까지 적용할 수 있는 명칭이 되었다. 따라서 르네상스 때에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여전히 '현대철학moderne Philosophie'으로 간주되었다. '현대적 방식via moderna'은 14세기에 통상적으로 오캄의 유명론의 명칭이었다. 그러나 중세에서 '옛날 사람들'과 '현대인들'이라는 대비는 훨씬 더 광범위한, 시대의 자기 이해를 규정하는 구분에 사용되었다. 중세신학자들은 '현대인들'로서의 자신들을 사제들과 차별화했다. 구약에서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과 대비해서 '옛날 사람들'로 간주되었다. 이와 달리 고대라는 과거를 지향하는 르네상스 시대에는 형용사 '근대적modern'이 현재를 칭하는 데 사용되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22-3)


3.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시기의 '근대적modern' 개념


"1678년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시작되어 20년 이상 지속된 〈신구 문학 논쟁〉은 페로가 '근대인'이 고대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새로운 우월감을 공개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촉발되었다. 그 우월감은 현대Gegenwart가 데카르트와 코페르니쿠스 이래로 학문의 완전성에 있어서 가지고 있는 명백한 우위가 현대 예술의 보다 높은 완전성 속에 그 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중세의 유형학적 관점을 대체한 르네상스의 순환적 역사관 자리를 진보적 역사 모델이 새롭게 차지했다." "논쟁을 유발하는 페로의 명제 〈우리가 바로 고대인이다〉에서 '고대인'이라는 말은 분명히 현재라는 장소를 특징짓는다. 아울러 새로운 역사 모델의 시대 순에서 '근대인'의 장소를 특징짓는 동시에 지금까지 〈고대의 고대인〉에게 인정된 우위가 이제는 현대의 대변자로서 〈근대의 고대인〉에게로, 역사적인 발전의 끝과 그럼으로써 완성을 재현한 〈근대의 고대인〉에게로 옮겨져야 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펼친다."(29-30)


"《백과전서》가 다시금 고대를 현대 미적 감각의 훌륭한 기준으로 언급한다는 사실은 18세기에 지배적이었던 고전주의에 직면하여 〈논쟁Querelle〉에서 제시된 가능성, 즉 각각의 시대 예술을 모든 이전 시대들의 예술과 동등하게 평가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는 형용사 '근대적modern'이 고전주의 맥락 속에서 현재가 독립적인 것으로서 자신을 과거와 분리하는 데 기여하지 못하고, 당시에 지배적이었던 (고대에서 받아들인) 〈예술〉이라는 제도를 '근대적'이 지닌 첫 번째 의미로 특징지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중세 봉건지배 체제 원리를 '근대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그 체제에서 전파된 인류사의 데카당스 모델의 틀 안에서 현재를 앞선 시대로서 고대와 비교하면서 현재의 열등함을 입증한다." "그러나 당시 고전주의 예술 이론들과 대조적으로, 루소는 고대를 모범적인 패러다임이라고 하지 않았다. 고대 사회들 또한 분업과 소외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3-5)


"고대 작가들은 자연적인 교육을 통해 인위적인 교육에 의해 자연과 단절된 현대 작가가 따라갈 수 없는 완전성에 도달했다. 현대 작가는 오로지 이상을 통해서만 잃어버린 통일성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이상이란 그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요원한 것이기 때문에, 문명화된 인간은 결코 자연적인 인간처럼 예술에서 완전해질 수 없다.〉 이처럼 현대 예술이 다시금 고대 예술보다 낙후된 것처럼 보이던 18~19세기 전환기의 독일에서, 실러는 감상적인 예술과 소박한 예술이 추구한 혹은 이미 이룬 목표들에 대한 전통적인 평가를 다음과 같이 뒤집는다. 〈인간이 예술을 통해 추구하는 목표는 자연을 통해 도달한 것보다 무한히 더 선호되어야 한다.〉 실러를 현대 문학의 가장 위대한 대표자로 간주한 훔볼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대인들은 단순히 그들이 있던 그대로였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있는 그대로를 인식하며 그 이상을 쳐다본다. 우리는 반성을 통해 우리 자신으로부터 이중적인 인간을 형성했다.〉"(41)


"1830년 이후 '근대적modern'이라는 말의 의미 변천의 방향을 지시해주는 것은 낭만주의와 '근대적'인 현재의 차이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그 차이를 실용정신에 의해 특징지어진 것으로 간주하는 증거들이다. 휴브너의 《신문과 회화사전》(1826)에는 〈북미의 자유국가들〉이 패러다임으로 제시되었는데, 거기에서는 이미 현대적인 것Das Moderne이 일반적으로 〈유용함〉이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전의 항목이 이미 통용되고 있는 근대에 대한 이해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셸링의 문장, 즉 〈아카데미적인 연구 방법에 대한 강의〉와 같은 인용문들이 잘 보여준다. 여기에서는 〈실용정신을 역사에서 가장 최고인 것으로 간주하는〉 현대인들의 성향을 개탄하고 있다." "이로써 19세기 첫 10년 동안 〈신구 문학 논쟁〉에서 제시된 현재에 대한 이해와 고대라는 모범과의 분리가 완수되었고 이는 언어규범으로 유입되었다. 1830년 이후에 일어난 시대 감정의 근본적인 변환이 그 언어규범에 상응한다."(46-7)


4. 19세기의 '근대적modern' 개념


"1859년에 보들레르는 《근대적 삶의 화가》에서 〈자기자신을 추월하는 가속에 대한 경험〉으로 표현되는 새로운 시대 감정을 근대성에 대한 미학이론으로 탈바꿈시켰다." "즉 '근대적modern'과 '근대성'이라는 말이 더 이상 낭만주의자들이 전제했듯이 가장 최근의 시대라는 특수성이 아니라 아름다움에 대한 모든 다양한, 그러나 여전히 무상한 인간의 이념들을 특징짓는 것이라는 결론에 말이다. 〈근대성은 이행, 순간적인 것, 그리고 우연성이다.〉 일시적인 다양한 이상들에 대한 구상을 담지하고 있는 근대성 개념에는 이제 더 이상 과거의 본질로서 '고대'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불멸적인 것만이 대립된다. 근대적인 것과 영원이라는 두 원리는 〈아름다움의 이중적인 본성〉 속에서 서로를 보완한다. 문학의 과제는 일시적인 것으로부터 문학적인 것에 담겨있는 것을 분리하는 데 있다. 이로써 영원이 근대적인 것과 대립 축을 이룰 수 있다. 〈유행이 내포하는 연대기적 시학과 일시적인 것의 영원함을 추출하다.〉"(51-2)


"보들레르의 근대성 이론은 또한 시간의 역사화의 결과, 특히 보들레르의 경우 과거 시대들 그 자체가 현재였다는 통찰의 결과로, 어떻게 세 번째 의미로서의 '근대적' 개념 사용이 '영원한'이라는 말의 반대말이 되는지를 인식하게 해준다. 유럽 3월혁명 전 기간에도 시간의 역사화는 역사 기술에 있어서 어려운 과제였다. 현재가 더 이상 그것을 기점으로 과거를 과거로 판단하게 해주는 기준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49년 라마르틴은 현대사가 〈더 이상 역사 기술의 한 장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통찰을 보다 더 자세한 근거로 제시했다. 실제적인 체험과 기억 사이에서 자신을 보존하는 커다란 사건들의 결과가 아주 급작스럽게 나타날 수 있다. 예전에는 현재로 간주된 자신의 삶의 기억들이 부단히 먼 과거로 나타날 정도로 말이다. 〈어제는 이미 과거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듯하다.〉 시간의 역사화는 삶에서 체험된 사건들이 과거로 나타날 수 있는 사유 모델에 의해 경험이 되었다."(53-4)


"독일청년운동에서 이와 유사한 의식의 출발점은 인접한 과거를 명시적으로 종결된, 현재와 질적으로 다른 시대로 치부하는 것이었다. 그 대변자 중 하나인 하이네는 1828년에 이미 〈괴테 시대의 원리와 예술 이념〉이 의미를 잃었다는 것을 확인했고, 헤겔이 죽은 후인 1834년에 〈철학 혁명이 끝났음〉을 선언했다. 그리고 이미 1831년에 이제 〈괴테의 요람에서 시작해서 그의 관에서 끝날 것이라는 예술시대의 종말에 대한〉 자신의 〈예언이 곧 실현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헤겔 또한 예술의 종말이 자신이 속해있는 현재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슐레겔과 헤겔처럼 하이네는 낭만주의 시대와 자신이 속해있는 현재 사이의 단절을 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들처럼 현재의 예술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거나 옛 예술에 필연적으로 뒤쳐져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는 〈이와는 반대로 이 시대의 운동이 예술에 유익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54-5)


5. 세기의 전환기 프로그램으로서의 근대


"19세기의 역사적 틀 안에 있는 수많은 프로그램에 대한 글들에서 발견되는 미래에 맞추어진 현재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관련된 의견 일치는 전환기를, 즉 넓은 지평에서 인간 행위의 모범으로서 〈전통의 강요〉가 〈선택의 강요〉에 의해 대체되는 전환기를 강조한다. 이러한 전환은 보수주의자들과의 논쟁을 통해서도 설명된, 근본적 변화의 결과이다. 즉 그 변화의 다양한 발현에 대한 시대 체험과 수렴점에 일어난 근본적 변화의 결과이다. 가속화되고 연속적인 역사의 변화에 대한 고려와 동시적이지 않은 역사 진행의 다양성에 대한 통찰을 통해, 과거에서 그 시작을 확정한 시대로서 현재의 구분은 이제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현재는 그것의 지속에서 시간 진행의 한 점으로 환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과거로, 그럼으로써 이 미래를 설계하는 기회로 체험되었다. 따라서 이제 현재는 프로그램으로 표현될 수 있는 미래 지향적인 행위를 계획하는 데 열려있는 활동 공간으로 이해되었다."(70-1)


"20세기 미학의 실현과 이에 대한 철학적 반성은 1859년에 보들레르가 구체화한 근대성에 대한 성숙한 이해와 구상의 이행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사람들은 근대적인 예술작품들의 과도기적 특징을 더 이상 치명적인 운명으로 느끼지 않고, 소외된 사회에 대한 저항의 기회와 의도된 부정성으로 느꼈다. 〈현 사회의 소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회피를 앞세우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이미 40년 전에 브르통은 그동안 색이 불명료해진 피카소의 1913년의 콜라주들을, 그것들이 속한 과거에 대한 기록으로서 의식 속에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위대한 예술로 경탄했다. 〈환희와 예술적 자만심의 소재가 되는 모든 것에 반대되는 소멸과 단명 그 자체를 찾으려 했다.〉 이러한 부정성의 미학은 기껏해야 사회가 야기한 소외를 모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미학은 스스로 자기자신에게 부가한 의무, 즉 그때그때마다 최신 예술 추세가 구체화되는 순간에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는 의무로 인해 많은 대중들로부터 멀어졌다."(82-3)


6. 사회역사적인 귀결의 단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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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2 - 혁명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2
라인하르트 코젤렉.오토 브루너.베르너 콘체 엮음,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기획, 한운석 옮 / 푸른역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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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혁명 개념은 근대적인 것이다. 중세 말 이후 이 말은 처음에 이탈리아에서, 그리고 이어 서유럽에서 정치적인 언어로 유통된다. 오늘날 이해되고 사용되는 개념은 엄격히 말해서 프랑스혁명 이후 일상화되었다." "분석적으로 볼 때 근대적인 혁명 개념은 필연적으로 공동 줄기에 속하는 것은 아닌, 적어도 두 개의 경험 영역을 포함하고 있다. 한편으로 그 개념은 내전으로 상승할 수 있고, 헌법의 변경을 초래하는 봉기에서 표출되는 폭력적 소요를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 개념은 과거로부터 미래에까지 이르는 장기적인 구조 변동을 함축한다. 그럴 경우 이 개념은 '영구혁명'에서와 같이 '과정'과 '발전'에 접근한다." "두 개의 의미 영역은 개별적으로 이용될 수 있지만, 프랑스혁명 이후 두 영역이 동일한 혁명 개념 속에서 서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보통이다. 역사적 양상은 정치적 목적을 설명하고 거꾸로 정치적 목적 설정을 통해 역사적 차원이 설명된다. 개념은 인식을 이끄는 동시에 행동을 안내한다."(12-3)


2. 고대에서의 '혁명'


"그리스인들의 〈정치적 혁명〉 이전에 보통 모든 생활관계들이 뿌리째 흔들린 장기간의 시기가 있었는데 이것은 흔히 잔인한 분노들의 표출로 나타났다. 그것은 그러나 광범위한 계층의 경제적 공고화 이후에야 가능했다. 그것은 그 후 적어도 아테네에서 그리고 아마도 많은 다른 장소들에서도 비교적 〈비혁명적〉 방식으로 완수되었다. 사람들은 옛날부터 인민집회를 갖고 있었거나 옛 전범에 따라 혹은 이웃 도시들의 예를 따라 그것을 쉽게 재건할 수 있었다." "이 전통적인 〈명목적normistisch〉 지평에서는 헌법 변경을 위한 많은 인민들의 결정들은 지금까지 지배계층에게는 금시초문이고 모든 전통에 모순되고 거의 혁명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것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당하다. 이 과정과의 연관 속에서 소요와 폭력은, 아무튼 아테네에서는, 과거의 것을 지키려는 사람들로부터 비롯되었다. 민주주의로의 운동은 점차 변형되는 기존 법률의 지평 속에서 장기간에 걸쳐 수행되었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23)


"특히 작고 불안정한 폴리스에서는 통상적인 것과 예외적인 것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존재했다. 거기에는 〈중간층〉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소수〉의 〈재산가들〉이 하층민들에게서 시민권을 빼앗거나 크게 제한함으로써 그들의 공통 이익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반면에 민주주의는 모든 자유로운 공동체 구성원들의 제약받지 않는 시민권을 통해 특징지어진다. 능동적 시민권 문제가 그렇게 중심적이 됨으로써만 과두정과 민주주의 사이의 대립이 가장 중요한 정치적 대립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 양 헌법은 여러 가지로 당파적이었다. 이에 따라 시민이든 과두정이든 그 공통의 중요한 이해관계는 헌법 전복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었다. 헌법과 당파의 역량은 따라서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 현대에는 헌법 내에서 가능한 것이 당시에는 헌법 교체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따라서 이 전환이 매우 빈번했다. 그것은 불분명한 경계를 형성했지만 경계는 정치적 일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25)


"고대에는 잠재적인 혁명적 에너지의 정체停滯도, 그것의 폭발도 없었다. 고대에는 커다란 영토의 정치적 단위와 정치권력과 정당성의 집중이라는 의미를 가진 국가도 없었고, 그것이 약한 시기에도 군주국으로 하여금 사회에 대해 강력한 힘을 행사하게 만드는 내외적 규율화도 없었다. 이에 따라 자신의 사상, 곧 구체제에 대한 포괄적인 대안을 사상 속에 구축하기 위한 단초와 보장을 자체 내에 충분히 갖고 있는, 정치로부터 압박을 받는 사회도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주목할 만한 국가의 〈낙차〉, 곧 개별적인 입장들 사이의 폭넓은 차이들은 형성될 수 없었다." "그들의 정치사회적 현실은 훨씬 더 긴밀하고 더 닫혀 있었으며 그들의 개념들은 덜 추상적이었고, 그들은 그들 공동체 전체를 대표성이라는 추상적 형식에서가 아니라 시민적 혹은 귀족적 정체성에서 찾았다. 이렇게 그들의 정치에는 사회변동을 계획하는 계기가 빠져있었다. 그들은 자신과의 거리두기가 부족해서 자기변혁으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26-7)


"그리스인들에게 없었던 것은 로마인들에겐 더욱 없었다. 귀족들과 평민들 사이의 신분 투쟁은 그리스인들처럼 동시적인 위기와의 유사성을 보여준다." "이 〈원로원과 민중들의 투쟁들〉은 불규칙적인 일이었으며, 정확히 다른 방식으로는 원로원이 극단적인 상황에서 강력한 적들을 무너뜨리고 죽음으로 몰아간 유혈적 폭력이 있었다. 그것은 결코 전복이 아니었다. 원로원 반대파의 목적도 결코 혁명적이 아니었다." "여기서 어떤 새로운 계층도 전면으로 부상하지 않았으며, 한 질서가 해체되었고, 구질서가 오랜 내란에서 탈진했을 때 군주정이라는 새로운 질서가 그 자리에 들어설 수 있었다." "로마는 시민성이 강하게 각인되어 있지 않았으며 아테네처럼 강한 시민적 정체성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정치적 권리의 모든 실질적 분화에도 불구하고 공화국은 대표성이 아니라 정체성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서는 그리스에서보다 혁명적 잠재력이 덜 축적될 수 있었다."(29-31)


3. 중세


"중세에는 근대의 혁명 개념에 상응하는 개념이 이 명칭하에서건 다른 명칭하에서건 없었다." "여기서 '혁명'이라는 말의 역사와 후에 그로써 파악된 사안의 역사가 구분되어야 한다. 사안에 대해서는 두 가지 요소가 중심적이다. 1) 적어도 권력 관계의 부분적인 전복을 목표로 하는, 법적으로는 동등한 자격을 갖지 않은 당파들 사이의 불법적인 혹은 일반적으로 합법적이라고 이해되지 않는 폭력 사용 : 봉기, 반란, 모반 등. 2) 단 한 번의 행위에서건 보다 장기적인 과정에서건 전체 정치사회적인 구조의 포괄적인 변혁. 첫 번째 형태는 중세에 빈번하고 다양한 스펙트럼의 표현들에 의해 포착되는 반면, 두 번째 형태의 개념사적 포착은 상응하는 사상이나 요구들이 개념적으로 전혀 명료화되지 않기 때문에 더 큰 어려움을 초래한다. 여기서 '개혁reformatio'과 '혁신renovatio'이라는 용어가 가장 중요하다. 포괄적인 변혁은 근대적인 혁명 개념의 특수성 중 하나이다."(42-3)


"(모반, 봉기, 반란 같은) 모든 종류의 폭력적 봉기들이 중세에 널리 퍼져있었다." "이것들과 전쟁과의 구분 기준은 폭력 사용의 합법성이나 불법성에 있지 않고, 당파들 사이의 법적 관계에 있다. 전쟁은 법적으로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다. 반면에 봉기 등은 법적으로 열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 맞서 수행된다." "범죄와의 구분도 유동적이다. 반란자들을 일상적인 범죄자로 취급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흔히 법률에서 처벌 위협으로 나타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법적으로 우월한 쪽의 완전한 승리로 나타난다." "법적으로 종속된 사람만이 그의 상급자에 맞서 봉기하고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 지배세력으로부터 대립의 원인이 출발한다면 다른 용어가 사용된다. 군주의 '부당한 폭력', '폭정', '독재' 등. 명칭은 항상 가치판단을 포함하고 있다. 반란은 합법적인 군주에 맞서는 것이고 따라서 불법적이다." "편향성은 단지 나중에 첨어를 통해 상대화시키거나 전도될 수 있다."(46-7)


4. 근세 초부터 프랑스혁명까지


"루터는 〈정신적 봉기〉를 찬미했다. 그는 오직 선포만을 지지했다. 인간은 〈신의 성스러운 말씀에 감사해야 하며 이 영적인 봉기를 곧 말로써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진실의 빛〉을 열어주며 어떤 당파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우리는 당파적인 이름을 지우고 기독교인이라 일컫자 ····· 교황파들은 기꺼이 하나의 당파적인 이름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악마의 명부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이 정신적 폭동설은 평화적 선포를 목표로 하며 루터에 의해─그의 두 나라 이론에 따라─세속적인 정부에 대한 물리적 폭동으로부터 엄격히 분리된다. 세속적인 지상에서의 모반은 개선시키기보다는 점점 더 많은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폭동은 아무런 합리적 사고도 갖고 있지 않고, 죄 지은 사람보다 죄 없는 사람에게 더 큰 해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것이 항상 올바른 측면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어떤 폭동도 정당하지 않으며 항상 개선보다는 손해가 더 많이 발생한다.〉"(86-7)


"보댕은 권력의 필연적 독점론을 관철하였다.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지 않는다면, 결코 국가는 폭도들과 싸움을 좋아하는 시민들에 의해서 평화를 얻지 못할 것이다. 국가들은 결코 소요가 끊이지 않을 것이고, 왕들은 참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전bellum civile'이라는 표현은 보댕에서 홉스까지 종교적 경계를 넘어서 순수하게 정치적인 해결책을 추구했던 정치이론가들이 선호했는데, 이는 의미론적으로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두 사람은 내전이 국가를 통해 극복되어야 할 가장 큰 해악이라고 보았다." "국가라는 대안을 고려하여 전체 사회가 숙명적으로 몰락하는 경우가 아니면 내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모든 역사적 목표 설정이 거부된다. 평화가 내전보다 더 낫다는 키케로로부터 재삼재사 인용된 문구인 〈내게는 시민들 사이의 어떤 평화든지 내전보다 낫다〉는 그로티우스의 말은 내전에는 뒷날 혁명에 부여되었던 어떤 역사적 목표도 설정되지 않았음을 입증한다."(92-4)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순환에 대한 6권의 서적》에서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도는 것과 항성으로 격상된 지구의 순환운동을 표시하고, 지구가 그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17세기에 구체적인 정치적 사건들에 관계된 보다 좁은 혁명 개념이 관철되었다. 그것은 지배권의 교체, 정치적 암살 혹은 다른 현저한 사건들, 봉기나 내란을, 뿐만 아니라 영향력이 큰 행위들을 가리킬 수 있다. 이 연관 속에서 그 개념은 항성의 순환과 그 필연성에 대한 유추적 서사로부터 벗어나 정치적·역사학적 언어의 경험적 개념으로 되며 흔히 제목에 등장하고 대부분 복수로 사용된다. 새로운 용법에서 결정적인 것은 혁명들이 연대기적 순서 속에서 생각되어지고, 그 회귀가 필연적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혁명'은 이제 새로운 방향을 가리키고 그곳으로 안내하는 전환점을 표시한다."(121-2)


"'명예혁명'으로 일컬어진 1688년의 헌법 변동과 더불어 우선 영국사를 위한 일회성, 곧 합법칙성 그리고─〈비자연적인 내전〉과는 반대로─사건의 비폭력성과 동시에 혁명이 일어난 필연성을 강조한 개념의 특이화Singularisierung가 시작되었다." "특히 단수 개념이 새로운 의미를 획득했다. 1688년의 혁명은 결코 내전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이상을 선취했다." "1688년의 혁명은 18세기 중엽부터 확산되어간 역사철학적인 개념 발전에 길잡이 역할을 했다. 그것은 계몽사상의 명제들을 실현하기 시작했으며,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실현하게 될 정신과 여론의 자유로운 혁명이었다. 이 혁명은 달랑베르의 말을 따르면 〈빠름으로 인하여 더 많은 것을 약속해주는 것으로 보이는 변화〉였다." "계몽사상가들이 경제와 헌법 영역에서 구체제 말기의 수많은 개혁 시도들에 부여한 낙관적 의미가 이 언어 사용에 연결된다. 개혁들은 거의 항상 '혁명'으로 분류되었다."(123-4)


"1770년 이후에는 필요한 개혁을 성취하기 위해 비상시에는 내전도 불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메르시에는 1770년에 〈많은 국가들에게 그것은 불가피한 시대이며, 가공할 시대이며 유혈적이지만 자유의 징표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내전이다〉라고 말했다. 이 시기는 모든 혁명들 중 가장 행복한 시기이고, 지금까지 감추어진 계몽적 인물들은 이제 지도적인 역할을 행하리라는 것이다. 이 개념에 경험적인 뒷받침을 제공한 것은 미국의 독립전쟁이었다. 그것은 곧바로 자연적 인권의 이름으로 이제는 독재의 폭력적 전복도 정당화한 '혁명'으로 환영받았다. 디드로와 레이날의 말을 빌리면 〈탄압이 반란을 불러일으킬 구원의 운동〉인 것이며, 〈하루 아침에 새로운 세기에 들어온〉것이다. 진보적 미래 개념으로서 '혁명'은 내전을 자유로 가는 길목에서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단계로 간주하도록 했다. 이 역사적으로 입증된 기대 개념을 가지고 다가오는 프랑스혁명을 위한 성향이 표현되었다."(124-5)


"'혁명'이 얼마나 특별히 미래 개념으로 되었는지는 다가오는 변혁을 필연적이고 도덕적이고 정당한 것으로 예견한 수많은 진단들로부터 분명해진다. 그의 비판이 정치체제를 넘어 전 역사로 향하였던 루소는 1762년 《에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그들은 지금의 질서를 신뢰한다. 그들은 이 질서가 불가피한 혁명의 주제라는 것, 그리고 그들이 아이들이 부딪힐 것을 예견할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다는 것을 생각지 않는 것이다.〉" "루소에게서 혁명 개념은 '위기'라는 개념과 결합하여, 선동적이고 인류학적이고 도덕적으로 뒷받침된 종말론적 차원을 획득하였다. 그의 적보다 더 차분하였던 디드로는 다가오는 혁명을 노예제와 무정부 상태, 공포와 자유의 변증법적 산물로 예견했다. 그는 고대의 순환 및 독재론을 빌려서 자유에 도취한 인민이 자발적으로 그에게 굴복할 위대한 인간의 독재를 결과적으로 예언한다. 그러나 디드로가 도출하는 문제는 현대적이며 그것은 열려있는 미래를 가리킨다."(126-7)


5. 프랑스혁명과 당시 독일의 수용


"프랑스혁명이 급진화되고 당의 분열, 의심과 추적, 테러와 독재, 계몽되지 못한 대중의 전제주의, 전체적으로 유혈 내전의 형태와 결합되면서 (독일에서) 다수의 동의는 사라져버렸다." "새로운 혁명 개념은 곧 내전의 전통적인 교훈을 받아들였다. 가브는 〈모든 경험에 의하면 내전이 국가 간 전쟁보다 잔혹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혁명 과정에서 단순히 당쟁의 결과로 생기는 열정 역시 모든 선한 것을 ····· 파괴할 수 있을 정도로 격앙된 성격의 것이다〉라고 말했다. 〈일단 전쟁이 국가 내부에서 발생하면, 그 진행과 결과는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정의가 아니라 성공이 결정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무질서의 해악을 통해서 잘못된 질서의 해악과 맞서싸우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고도 했다. 그렇게 혁명의 경과가 내전과 수렴되었는데, 이에 힘입어서 빌란트는 고전 역사에 근거해 쿠데타 일 년 전 보나파르트의 독재를 예견할 수 있었다."(138-9)


"에드먼드 버크가 수립한 프랑스혁명 비판의 핵심은 인민지배로 추정되는 것을 향해 있다. 버크는 〈완전한 민주주의〉에서 〈모든 정치적 괴물 중에서 가장 파렴치한 것〉을 감지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개개인의 모든 책임을 익명의 보편성에 떠넘기고 그럼으로써 파국을 잉태한 안일함이 번식토록 오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혁명'은 모든 낯선 경험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당파 선택을 강요하는 개념이 되었다. 이 개념은 계몽시대의 일반적인 지지를 상실했다. 이론적인 전제들과 그에 상응하여 여과된 경험에 따라 진영들은, 이념형으로 말하자면, 일관된 민주주의자, 헌법주의자, 그리고 경향적으로 보수주의에 더 가까운 정치적 실용주의자로 나뉘었다. 이들 모두에게 '혁명'은 다양한 의미가 내장된 당파 개념이 되었지만, 이것은 프랑스혁명의 핵심이 더 이상 '폭동'이나 '반역' 같은 전통적인 범주들로 파악될 수 없는 비상한 사건이라는 공통된 인식에 기초해 있었다."(144-5)


"행동주의적 혁명가들에게 혁명 개념은 구원의 기대와 이를 행동으로 실현하려는 전체적 요구의 결합이었다. 〈혁명은 범죄의 지배가 정의의 지배로 넘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명 의식의 주문은 전 세계로 확장되었다. 〈세계 혁명의 절반은 이미 수행되었다. 나머지 절반을 완수해야 한다〉라고 로베스피에르는 외쳤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은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와 같다는 자연의 비유─한 반구는 여전히 암흑 속에 잠겨 있지만, 다른 쪽 반구는 이미 빛 속에 있다─를 덧붙였다. 어쨌든 혁명 개념은 미래에도 확장되어서 그의 실현에 대한 기대감을 일깨웠다. 반쪽짜리 혁명에 만족하는 자는 스스로 자신의 무덤을 파는 것이라고 생쥐스트는 말했다. 수많은 재앙과 점점 더 빠르게 다가오는 세계의 종말과 결합되어 있었던 이전의 기독교 구원의 기대가 이제는 진보적으로 변형되어 재등장했다." "일단 혁명의 역사적 유일성이 의식화되면, 그로부터 공정한 행동으로의 정당화가 뒤따랐다."(152-4)


6. 역사철학적 관점 속 '혁명'과 그 반대 개념들


"헤겔은 〈세계사가 영원한 이성의 산물이고 이성이 그의 대혁명들을 규정했다는 것〉에서 출발했다. 따라서 그는 프랑스혁명을 세계사적인 사건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프랑스혁명을 로마 가톨릭 세계의 특별한 산물로 상대화했다. 바로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의 자유주의 추상화야말로 그곳에서 지배하는 〈종교적 예속〉에 대한 반동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패한 도덕성, 국가 헌법과 입법 체제를 종교의 변화 없이 바꾸는 것, 즉 종교개혁 없이 혁명을 하는 것은 근대의 우행으로 간주될 수 있을 뿐이다.〉 〈프로테스탄트적 양심의 해방 없이, 곧 종교의 변화 없이는 어떤 정치적 혁명도 성공할 수 없다.〉 독일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혁명은 앞서 있었던 종교개혁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불필요해졌고, 부분적으로는 보상을 받았다. 어쨌든 소위 게르만적 자유 원칙이 이후 독일을 실제 혁명들과 예상 혁명들의 (통시적) 서열에 끼워넣는 데 중대한 역할을 수행했다."(171-2)


"프랑스혁명을 지지자들이 기꺼이 세계사의 최종 결정으로 간주한 것은 프랑스혁명을 일회적이고 유일무이한 혁명으로서 경험한 일에 속했다. 토마스 페인도 그렇게 간주했고, 개념에 들어있는 귀환, 즉 천부 인권과 시민권의 복구는 반半종말론적 해석과 반半순환적 해석 사이에서 동요하는 이러한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었다. '혁명'은 그 후 '대위기'라는 개념에 가까워졌고, 구간에 따라 그와 교환 가능했다. 그러나 '혁명'은 동시에 이 개념의 다의성을 공유했다. '혁명'은 열려있는 미지의 미래로 이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지기는 했지만 옛 어법을 따라서 반복될 수도 있었다. 즉 그것은 '사회적', '산업적', 혹은 '영구혁명'까지 되었다. 이로써 그것은 시간 경험을 정지시키는 변화와 변화 압력을 개념화시키기 위한 지속 범주로 승격되었다. '혁명'은 근대의 역사적 근본 운명으로서의 끊임없는 위기와 일치될 수 있을 만큼, 위기들의 합을 자신 안에 묶어내는 하나의 과정 개념이 되었다."(177-8)


"1789년 이래 계몽된 혁명에 대한 희망이 폭력적으로 침식됨으로써, 변화의 필연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평화 혁명과 혁명에 대한 이성적인 계획 가능성을 구하려는 반대 개념이 신속히 분리되어 나왔는데, 그것은 '진화'였다. 1792년에 헤르더가 썼듯이 〈내 좌우명은 사물의 지속적·자연적·이성적 진화이지 혁명이 아니다. 전자가 저지당하지 않고 계속되면, 이를 통해 후자를 가장 확실하게 예방하게 된다.〉 '진화'는 우선 계획 가능한 개혁이라는 의미에서 타동사적으로 사용되었고, 에어하르트 역시 1795년에 그렇게 사용했다. 모든 인민은 성숙해가면서 혁명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헌법들이 다양한 성숙도에 순응함으로써 본래의 혁명을 예방할 수도 있다····· 그런 국가에서는 다른 국가에서 혁명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 지혜에 의해 촉발된 진화를 통해 일어나게 된다.〉" "칸트는 〈국가가 때에 따라 스스로 개혁하고 혁명 대신에 진화를 시도하면서 좀 더 나은 것을 위해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진보라고 보았다."(179)


"개혁을 통해 폭력적인 혁명을 예방하기 위해서 역사적 발전을 증거로 대는 것은 그 이후 역사철학적으로 조성된 위상학Topologie의 영역에 속했다. 바더는 모든 역사가 〈진화주의〉에 지배받고 있다는 것을 출발 전제로 삼았다. 이것이 개혁을 통해서 가속화되는 대신, 반동에 의해서 저지되고서야 비로소 그 부정적인 상응물, 즉 〈혁명주의〉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바더는 하르덴베르크처럼 〈혁명운동의 발생〉은 진화의 〈정지 혹은 저지의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역사적 원리를 내세웠다. 그는 양극단, 즉 〈반혁명〉과 〈혁명주의〉에 반대했다. 〈진화주의〉는 역사적인 선제 명령이고, 〈혁명주의〉는 인간의 잘못에서 생긴다. 여기서 바더는 〈무산자〉보다 유산자에게 더 큰 책임을 돌리는 경향을 보인다. 지배자들이 단지 〈혁명적 반동의 자극물로〉 작용하는 반면,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반란이라는 성스러운 권리〉가 무산자에게 넘어갔다는 것이다."(181-2)


"독일의 대다수 시민들이 그들의 개혁 요구가 아무리 급진적이었다고 해도 '진화'를 지지하고 '혁명'에 반대하도록 만든 것은 당연히 프랑스혁명의 역사를 통해 알려진 폭력적이고 테러적인 단계와 그에 뒤이은 보나파르트 독재였다. '진화'는 역사적 개념으로 한층 높은 기대 수준을 갖고 있었고, 포괄적인 연관관계 속에 장기적 혹은 단기적 변화를 보장했다. 혁명은 폭력적이라는 점에서 위험한 것으로 남았다. 마르크스 이론의 특징은 그가 '진화'와 '혁명'을 서로 반대되는 함의를 갖는 개념들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발전 단계상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전복 과정의 정점은 그들이 마지막 혁명이라고 예견했던 정치혁명이었다." "여기서 '진화'와 '혁명'은 반대 개념이 되기를 그만두었다. 오히려 경제적 발전이 필연적으로 혁명을 향해 움직여가면서, 이제까지 비상 상태로 여겨졌던 내전은 일상적인 계급투쟁의 정상 상태로 그 해석이 바뀌게 되었다."(184-5)


"서로 중첩되는 집단들을 지지했던 세 명의 대변자들이 거론될 수 있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경제 발전의 법칙이 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파국으로 절대 이끌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로 댔다. 〈자유주의 제도들은····· 파괴될 필요가 없고, 계속 발전될 필요가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조직과 의욕적인 행동이 필요하지만 혁명적 독재가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 "카우츠키도 똑같이 경제적 발전을 증거로 댔지만, 이러한 발전의 종말은 의사-종말론적으로 자본 권력과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대결정 투쟁〉과 다를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카우츠키는 〈사회혁명〉과 현재 사회를 토대로 하는 〈사회개혁〉을 엄격하게 구분했다." "개혁파와 가장 급진적이고 조롱조로 논쟁을 벌인 로자 룩셈부르크는 순응을 통해서 〈혁명의 망치질, 즉 프롤레타리아를 통한 정치 권력의 장악〉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사회개혁은 자기자신을 위해 추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186-8)


"무어하르트에 따르면, '반동'은 모든 새로운 것의 절멸을 목표로 하고 '근대' 자체에 대항한다. '반동주의'는 역사를 자신의 특권과 이해를 보장하기 위한 구실로만 사용하고 사회적 상황은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요컨대, 〈역행적인 혁명〉이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이를 의미론적 구조에서 보자면 혁명에게 보다 큰 정당화의 잠재력을 할당하는 지속적인 강제적 대안이 '반동'을 통해서 표현되고 있다. 진화와 개혁과 다르게 반동에는 일시적 가치서열 상에서 오직 몰락에만 바쳐질 수 있는 반발전적인, 반진보적인, 반민주적이고 반사회적인 힘이 지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시간을 되돌리려는〉 헛된 시도이고, 한 짧은 혁명 구호처럼 반동에 대항한 가차 없는 투쟁은 〈진보의 친구들의 의무〉가 된다. 혹은 프뢰벨이 1847년에 공개적으로 호소했듯이 〈혁명은 옳고 반동은 옳지 않다. 혁명은 합법적이고 반동은 불법이다. 혁명은 법적 의식과 법의 유효성에 있어서 법적 평등의 진보이기 때문이다.〉"(195-6)


"7월혁명 직후 '영구성 속의 혁명'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푈리츠는 〈혁명으로 인해 극도로 자극되고 증가된 모든 힘들의 계속적인 운동을 통해서 내적인 국가 생활 전체의 완전한 '부활'이 초래되도록 그것[혁명]을 말하자면 영구성 속에서 설명할 것이다〉라고 썼다." "하이네는 '혁명'이 끝나지 않은 한, 〈국가병〉과 〈고열〉이 지배한다고 함으로써, 의학적 위기의 비유로 표현을 바꾸었다. 중요한 것은 아직 열려져 있는, 장기적으로 작용하는 위기였다." "빌헬름 슐츠는 50년 전부터 시작된 변혁을 〈지금 벌써 완전히 끝난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가련할 정도로 피상적인 역사관〉이라고 말한다. 종교개혁은 유럽의 불화를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으로 진정시키는 데 130년을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의 사회운동이 〈더 넓은 공간〉에 걸쳐 있고 더 많은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더 일찍 그의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로써 구조적 유추가 새로이 '회귀'의 의미에서 등장했다."(198-9)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마르크스는 〈많든 적든 재산이 있는 모든 계급들을 지배층으로부터 몰아낼 때까지, 프롤레타리아가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연대가 한 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지배국가들에서····· 적어도 결정적인 생산력이 프롤레타리아의 손에 집중될 정도로 진척될 때까지 혁명을 영구화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이고 우리의 과제〉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장기적인 혁명 개념과 그 당시의 정치적 혁명 개념을 합쳤다. 〈정치혁명의 전투 구호는 영구혁명이어야 한다.〉 중심이 되었던 것은 정치혁명적 희망의 좌절을 앞으로 다가올 실현의 증거물로 해석할 것을 가르친 역사철학적 보상 개념이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 대한 그의 분석에다 〈혁명의 실패!〉라는 표제를 붙였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에 굴복한 것은 혁명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 이전의 전통적인 추종자들이었다.〉 환상은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201)


"1848년 혁명이 좌절되고 난 후 1906년에 가서야 트로츠키가 '영구혁명'에 새로운 내용을 채웠다. 그는 첫째로 러시아와 같이 자본주의적으로 저발전된 나라에서는 마르크스가 이미 인정했듯이 헌법적이고 민주적인 혁명으로부터 사회주의혁명으로의 단절 없는 이행이 가능하고 필요하다는 것에서 출발했다. 노동자와 농민이 함께 영구혁명의 시민적 단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집권하면, 프롤레타리아는 따라서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의 테두리에 제한되어서는 안 되고 영구혁명의 전술을 전개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레닌이 1917년 4월에 집어든 테제이다. 트로츠기가 산업후진국에서 도출한 자신의 모델들로부터 발전시킨 두 번째 테제는 우리 지구상의 식민적 종속 국가들에 대한 사회주의의 차용 가능성에 있었다. 사회주의는 언제나, 그러나 오직 지구적으로 그리고 동시적으로만 도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영구혁명은 세계혁명으로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205)


7. 전망


"전체적으로 혁명 개념은 모두 마르크스주의 진영에서 일종의 존재론적 지속 범주로 굳어진 특징을 보인다. 프랑스혁명 이래로 생각하고 말할 수 있었던 모든 표현법들이 그렇듯이, 혁명을 〈보장할〉, 〈확정할〉, 〈추진할〉 필요가 있다거나, 그것을 〈위반〉, 〈희생〉, 〈배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을 서로 엄격히 구분했던 기준들은 혁명 진행의 단계설, 혁명 가속화의 계획 가능한 속도, 사회주의를 내전의 경로를 통해서라도 들여오려는 정치적 결단에 있었다."(235-6) "확실한 것은 '폭동', '전쟁', '내전', '혁명'의 개념 영역에서 새로운 경험들을 내포하고 있는 변화가 나타났다는 점이다. '전쟁'과 '내전', 그리고 '내전'과 '혁명' 간 구분이 모호해진 이래로, 우리 지구상의 투쟁 형태들은 새로이 급진화되었다. 테러와 게릴라 투쟁은 부분적으로는 견제되고 부분적으로는 보호 아래에서 비로소 실현되는 원자적인 위협으로부터 정치의 거의 정규적인 요소들로 탈바꿈했다."(2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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